2011년 12월 14일 수요일

차라리 당신을 잊고자 할 때

- 도종환

 차라리 당신을 잊고자 할 때
당신은 말 없이 제게 오십니다.
차라리 당신에게서 떠나고자 할 때
당신은 또 그렇게 말없이 제게 오십니다.

남들은 그리움을 형체도 없는 것이라 하지만
제게는 그리움도 살아있는 것이어서
목마름으로 애타게 물 한 잔을 찾듯
목마르게 당신이 그리운 밤이 있습니다.

절반은 꿈에서 당신을 만나고
절반은 깨어서 당신을 그리며
나뭇잎이 썩어서 거름이 되는 긴 겨울동안
밤마다 내 마음도 썩어서 그리움을 키웁니다.

당신 향한 내 마음,
내 안에서 물고기처럼 살아 펄펄 뛰는데
당신은 언제쯤 온 몸 가득 물이 되어 오십니까.
서로 다 가져갈 수 없는 몸과 마음이
언제쯤 물에 녹듯 녹아서 하나되어 만납니까.

차라리 잊어야 하리라 마음을 다지며
쓸쓸히 자리를 펴고 누우면
살에 닿는 손길처럼 당신은 제게 오십니다.
삼백예순 밤이 지나고 또 지나도 꿈 아니고는 만날 수 없어
차라리 당신 곁을 떠나고자 할 때
당신은 바람처럼 제게 오십니다.








대나무의 고백 - 복효근


늘 푸르다는 것 하나로
내게서 대쪽같은 선비의 풍모를 읽고 가지만
내 몸 가득 칸칸이 들어찬 어둠 속에
터질 듯한 공허와 회의를 아는가

고백컨대
나는 참새 한 마리의 무게로도 휘청댄다
흰 눈 속에서도 하늘 찌르는 기개를 운운하지만
바람이라도 거세게 불라치면
허리뼈가 뻐개지도록 휜다 흔들린다

제 때에 이냥 베어져서
난세의 죽창이 되어 피 흘리거나
태평성대 향기로운 대피리가 되는,
정수리 깨치고 서늘하게 울려퍼지는 장군죽비

하다못해 세상의 종아리를 후려치는 회초리의 꿈마저
꿈마저 꾸지 않는 것은 아니나
흉흉하게 들려오는 세상의 바람소리에
어둠 속에서 먼저 떨었던 것이다

아아, 고백하건대
그놈의 꿈들 때문에 서글픈 나는
생의 맨 끄트머리에나 있다고 하는 그 꽃을 위하여
시들지도 못하고 휘청, 흔들리며, 떨며 다만,
하늘 우러러 견디고 서 있는 것이다




-초여름-
  


위의 시가 어딘지 모르게 애틋한 느낌이 들어 다른시 하나 다시 올립니다. 연말이라서 이미 써 둔 글 올리는 일도 짬이 안 나 다시 시를 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