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2일 월요일

맹하린의 생활 포커스. 내 혈육들.


나는 형제가 아홉이다.
친 형제만 다섯인 데다 함께 자란 고모네 자녀들까지도 형제로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양조장을 경영하던 아버지가 육이오에 희생되자, 고모는 고모부의 어깨에 데릴사위라는 견장을 얹은 뒤 부득이 우리 집에 눌러 살게 되었다.
(오오, 형제 중에 나를 가장 사랑하고 아꼈다는 아버지!)
중앙대학 국문과를 중도에 그만둔 고모는 내게 엄연히 어머니가 있었는데도 나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정신적 어머니였다.
고모의 치밀한 교육은 내게 피와 살이 되어 나는 그나마 이만큼의 나를 형성해 왔지 않았나 싶다. 우리 아홉 형제들은 하루하루를 재미있게 잘 살았다.
서로가 서로를 소중히 여기며 결코 싸울 일도 없었으므로.
전북대학 의대에서 수의학과를 전공한 고모부는 우리 집안의 기둥이었던 할머니가 조심스러웠을 테지만, 아무튼 데릴사위라는 짐을 어딘가에 부려놓고 싶어서였는지 아니면 수의사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기 때문인지 틈만 나면 지리산이나 화엄사 근처로 사냥을 다녔다.
서울에서 구입해 오는 총포와 사냥모자, 그리고 열 개도 넘는 작고 뾰쪽한 주머니마다 총알을 꽂을 수 있는 조끼와 무릎까지만 둥글고 정강이 부분은 좁던 당꼬바지 차림으로 언제나 사냥을 다니던 고모부.
형제 중에 가장 못생겨서 가여웠을까. 나만 예뻐해 주던 고모부.
자전거도 귀하던 그 시절에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던 잘 생기고 똑똑하던 고모부는 버스와 오토바이의 접촉사고로 사십 중반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도 고모는 우리와 고모의 아이들이 전혀 주눅 들지 않도록 온갖 배려를 아낌없이 발휘하며 무탈하게 잘 키웠다.
고모의 첫째 송태언은 거의 왕자처럼 자란 나머지 송양지인 같은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고모의 막내 송주은은 현재 모 대학의 음대학과장 자리에 있다.
고모의 셋째, 연세대학 장학생이었던 송태일은 연고전의 응원단장을 지낼 때의 경험을 살려 한국 최초의 이벤트 회사 '연하나로기획'을 설립한 입지적인 존재다. 그는 한국 10대 젊은 사장의 반열에도 올랐었다.
88올림픽의 붉은 악마 응원단, 아시안 게임과 2002년 한일 월드컵 개막식, 청개천의 개장식도 연하나로기획이 도맡아 창출하고 개최했다고 인터넷을 검색하면 뜬다.
고모의 둘째 송태호는 재작년 음악 팀의 일원으로 가수 남진과 브라질에 다녀갔었다.
그의 음악성은 어려서부터 가히 천재적이었다. 어떤 음악을 들어도 정확한 음계로 곧장 따라했으니까.
혹자는 꽤나 적나라한 이 글을 일종의 자랑으로 단정할지도 모르겠다.
아르헨티나 교민사회, 두루 뭉실 인정이 넘치는 것 같지만 퍽도 탈 많고 첨예로운 이 땅에서 이런 식의 나열이 자랑 축에나 들기나 하려나.
그것은 단지 내 불행했던 날들을 요리하려는 소스와 양념에 불과한 것을.
내 의도와 아무런 상관없이 아버지와 고모부의 사랑을 온통 독차지 했던 형벌이었을까.
나는 마치 내 혈육들의 불행을 온통 떠맡기 위해 떠나온 사람처럼 아르헨티나에 살면서 여러 슬픈 일들을 겪어냈다.
사실이 그랬다. 내 형제들은 한국에서 날이 갈수록 행복했는데 나는 아르헨티나에서 자주 슬펐다. 그럴 때마다 문학이 매번 팔 벌려 나를 안아주기는 했다. 그토록 괴롭던 날들의 막막한 터널을 나는 고국의 혈육들에게 내색 한 번 안하고 의연히 빠져 나왔다. 왜냐하면 인생이란 원래 크면 클수록, 잘나가면 잘 나갈수록 더 복잡하게 산다는 단정에 나는 마냥 혼자인양 견뎌낸 것이다.
어쩌면 나는 문학을 지향해야 할 운명이라서 언제나 그리운 내 혈육들과 격리되었고, 어떤 면으로 나는 세상이 온통 시라는 걸 알아채려고 한동안 불행했을지도 모르겠다.
여러 형태의 불행들, 그 난폭자들이 어느 날부턴가 더 이상 내게 수작을 부리지 않아서 나는 지금의 내가 좋은 데다 고맙기까지 하다.
하물며 나는 뒤늦게 중노동자다.
중요한 것은 불행이 또 다시 내게 손짓하는 일이라도 생길까봐, 나도 모르는 사이 겸허하게 묵묵부답 찌부러져 지내고, 주어진 일마다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이민생활이란 얼마만큼 재산을 축적하느냐에 중점을 쏟을 뿐, 고생이 안 되는 생업 같은 건 그 어디에도 없는 편이니까.
골프? 85년도에 꺾었던 골프채를 다시 붙들고 싶은 생각 따위는 전혀 없고, 없다.
결코 만만치 않던 여러 우여곡절의 실마리를 겨우 찾고서야 나는 비로소 내 본연의 위치에 도달한 느낌이다. 그것은 운명을 향한 순명이라거나 순응을 보료처럼 깔고서야 얻어낸 터득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왜 내가 밀쳐낸 그리움들은 포기를 못하는 걸까. 어찌하여 틈만 나면 내게 안기려 드는 것일까.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내 형제들이 사무치게 그리워질 때마다 인터넷을 검색할 것이다.
그리하여 내 혈육들, 송태일과 송주은. 웹 계통의 회사 기획팀에서 중책을 맡고 있는 조카 맹한경, 선화예중고와 한양대학 피아노과를 장학생으로 졸업했으며 독일에 유학을 다녀와 수차례의 연주회를 열었고 여러 대학에 강의를 나가고 있는 조카 김현주. 서울대학 장학생이었고 2008년 행정고시에 패스한 또 다른 조카 임두리.
그들의 맹활약 까지도 관심을 기울이며 내가 나를 격려할 것이다.
항상 혼자였고, 너무나 커다란 고통의 경로를 이윽고 통과했으므로 이제 나는 매순간 순간을 은총으로 여기며 살아가려고 한다.
가장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가능하면 자연의 일부처럼 생활하며 내 나름의 신념을 나의 신에게 정성을 다해 바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