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13일 화요일

빛나는 기계


맹하린의 생활 산책

아르헨티나 한국일보

1996년 6월 6일


우리 집 전화요금은 몇 년 동안 기본요금에서 조금 웃도는 가격으로
책정되어 나오고 있다.
그동안 내가 친구들과 수다를 안 떨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무한테나 집 전화번호를 가르쳐 줄 필요를 못 느끼는 데서 생기는 원인과 결과에서 일이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뒤늦게 철이 들어 버린 것일까.
그게 아니고 내가 친구들과도 언제나 절제와 간격을 지켜오기를
즐겨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아니면 전화통에 매달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만한 문제다운 문제가 없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마음이 심란하고 답답할 때, 마음을 좀 풀어 놓을 수 있게 해주는 빛나는 기계와 좋은 친구가 있다는 사실은 진정 감사할 몫 중의 하나가 아닐까 최근의 나는 부쩍 그런 생각을 하게도 된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의 공공요금이 몇 십프로 정도 더 인상되리라는 초안이 상정되는 중이라는 뉴스를 접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기본요금이 조금 웃도는 우리 집 전화요금은
삭막하고 인색한 내 감정의 기폭을 정확하게 표현해주는 바로미터 같아서
어떤 면으로는 쓸쓸하고 서글프다.

온세지역에서 의류도매상을 하는 수산나에게 전화해 본다.
내게는 동생 같고 항상 의젓하고 여자다운 수산나는 하필 자리에 없다.
곧 이어 현지인 친구 클라우디아와 통화하기 위해 수화기를 다시 든다.
이렇게 마옴 먹고 여기저기 전화를 해댄다면  다음 달 전화요금은 기하급수적으로 엄청나게 많이 나오는 사태를 몰고 오는 거나 아니려는지.

나는 안다.
의자를 끌어당기지만  않았고, 안내를 부탁한다는 말만 안했을 뿐 나는 아래의
단편소설 속  아이처럼 안내를 받고 싶은 심정인 것을.

수화기를 제 자리에 놓으면서 , 오래 전에 읽었던
단편소설이 새삼 그립게 각인되고 있었다.



아이의 집은 그 마을에서 가장 맨 처음 전화를 놓았다.
계단옆 벽에 붙여 놓은 참나무로 만들어진 전화통.
아이에게는 수화기가 손에 닿지는 않았다. 하지만 언제인가 지방에  출장을 떠난 아버지와 통화를 할 수 있도록 엄마가 마루에 있는 의자를  끌어 당긴 뒤, 아이를 의자 위에 올린 뒤 수화기를 귀에다가  대 주었었다.
아이는 엄마가 가끔씩 그 빛나는 기계에 대고 안내를 부탁한다고 말하면서 무얼 물어보는 걸 여러 차례 목격 하게 된다.
무엇이든 알고 있는 천사가 저 빛나는 기계 속에 살고 있구나.
아빠의 목소리까지 그 속 에 들어있지 않았던가.
어느 날, 혼자 집에 남아 있던 아이는 혼자서 놀다가 손가락을 다치게 된다.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려주던 날의 엄마처럼 마루 한 켠에 있는 의자를 끌고 와 그 위로 올라섰다. 그런 뒤 곧장  빛나는 기계를 들고 엄마가 누르던 숫자의 자리를 흉내 내듯 눌러본다.
아주 조그맣게  안내를 부탁한다고 말하게 된다.
"네, 안내입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상냥한 음성 ,
"손가락을 다쳤단 말이야. 어떻게 해 . 아앙…"
손가락이 아프다는 걸 어리광 피울 수 있는 사람이 기계 속에 있다고 느껴지자 아이는 ,울음보가 터뜨려진다.
빛나는 기계 속의 천사는 아이를 달래면서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먼저 냉장고를  열고 얼음을 꺼내어 손가락에 대고 있으면 아픔이 가라앉게 돼."
그때부터 모르는 게 생기면 의자를 끌어 당겨 그 위에 올라가 "안내를 부탁합니다."하고 말하게 되고,"안내입니다."하고 말하는 빛나는 기계 속의 천사는 어떠한 어려운 일도
거뜬하게 해결해 준다.
학교의 숙제들, 그리고 다람쥐 먹이에는 무엇이 적당한 것에 대해서도.
얼굴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수시로 해오는 하찮은 질문에, 싫어하는 내색을 한 번도 안하고 귀한 시간을 허락하여 친절과 인내력으로 아량을 베풀어 주던 빛나는 기계 속의 천사.
아이가 애지중지하던 새였던 카나리아가 죽었다. 풀이 죽어 전해 주는 소식을 듣고 빛나는 기계 속의 천사는 말한다.
『포올, 죽은 다음에도 노래 부를 수 있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요.

아홉 살 소년이 된 아이는 이사를 가게 되었다.
새로운 도시에서는 고향에서 와 같은, "안내입니다"가 아니었고 불친절했다.
빛나는 기계 속의 가정교사가 문득 문득 그립게 된다.
때때로 어려운 문제에 마주할 때마다 간절하고 그립게 빛나는 기계 속의 천사를
떠올리게 된다.

소년은 성장하여 대학에 다니게 된다.
방학을 보내고 대학으로 돌아가는 비행장에서, 보딩 시간을 기다리다가 자기도 모르게 고향마을의 전화국 번호를 눌러본다.
안내를 부탁한다고 말하기도 전에 "안내입니다" 라고 말하는,  어린 시절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목소리가 들려온다.

분명 귀에 익고 그리웠던 목소리 .
청년은 언젠가 질문한 일이 있던,"저어,「휙스」라 는 단어를 쓸 때 어떻게 쓰지요?"라고 암호처럼 묻게 된다.
얼마만큼의 침묵이 흐른 뒤에 이윽고, "혹시 지금은 손가락이 나았겠지요?" 라는 천사의 대답이 들려온다.
청년은 웃으며 말한다. 어린 시절에,그녀가 얼마나 소중한 의미의 존재였었던가를.  최근몇 년 동안 얼마나 그리워했는지를.

얼마 뒤에 청년이 다시 전화로 안내를 부탁했을 때, 그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과 함께 청년에게 남겼다는 말을 듣게 된다.
"죽어서도 누래 부를 수 있는 세상이 있노라고 전해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