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하린
한국소설(한국소설가협회)
2006년 6월호
-작가의 말- |
![]() 작가의 말 30년이라는 장기간의 외국출장이라고 생각하면 내 이민생활은 전혀 고달프지가 않다. 그래도 저무는 강에 서면, 어서 돌아가고파 금세 따사로워지는 내 눈시울. 좋은 작품으로 빛을 볼, 그때. 비로소 나 환국을 서두를 것인가. 아르헨티나라는 광활한 글밭을 만나게 되어 그나마 가슴 뛰노는 환희의 나날을 보내노니……. |
재아문인협회의 월례회가 식당 궁전에서 있었다.
회원 중에서, 생할봉사상이라는 명목으로 본국 대통령훈장을 받게 된 P여사와 문화부장관상을 받게 된 K씨 . 그리고 본국의 을유문화사가 펴 낸 한국의 명수필 2에 작품이 실리게 된 C씨를 위한 축하연까지 겸하느라, 꽃다발 증정은 물론이고 교민 바이올리니스트 N양까지 초대해 일사천리로 진행된 회의였다.
식당 궁전의 밖으로 나오자, 서례는 적당히 소리까지 높이며 외친다.
“강남 가실 분들은 K선생과 함께 가주세요. 동대문 쪽은 누구셨죠? 아, 미리들 모여 계셨네요."
유쾌하게 웃으며, 그럼 우리는 어디야? 신촌인가? 아니,왕십리가 낫겠다. 그렇게 재미있어하는 회원들과 헤어지고, 가장 집이 가까운 서례는 총총 집에 닿는다.
남편은 그때껏 안 들어와 있었다. DVD를 보던 아들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탁자위의 쪽지를 말없이 건네준다.
(무슨 일이 또 생겼구나.)
아들은 언제나 그런다. 좀 낌새가 이 상하다 싶으면 되도록 말을 아끼는 것이다.
서례는 아들에 대해서 언제나 할말이 좀 있는 편이다.
불과 얼마전이었을 것이다.
이미 퇴근 해서 집안 일을 좀 하고 있을 때, 누가 초인종을 눌러 나가보니 근처에 사는 옥자씨였다. 좀도둑이 가게의 셔터를 반쯤 들어올리는 중에, 마침 지나가던 경찰이 발견했고, 곧바로 연행해 간 모양이었다. 그런데 주위의 아무도 서례의 집 전화번호를 몰랐으니 고장난 셔터가 근처분들의 뜻하지않은 걱정거리로 크게 부상했던 거였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서례는 집 전화번호를 아무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는 성격이고, 그런 연유로 인하여 일이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서례의 핸드폰 번호는 오래 전에 광고에까지 공개를 해둔 상태지만, 그것에 대한 개념이 무개념이라서 맨날 여기저기 두고 다니기 마련인 핸드폰.
집에서 필요해서 찾으면 가게에 두고 나왔고, 가게에서 찾으면 집에 두고 나왔음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서례의 핸드폰.
결국 서례의 가게 가까이 사는 사람이 옥자씨에게 전화를 넣었고, 그 사실을 알려주려고 옥자씨는 숨가삐 달려온 거였다.
서례는 뜀박질도 제법 하지만 뛰다가 무슨 일이 있으면 안 되겠기에 약간 경보처럼 빠르게 걷는데, 아들은 저만큼 뒤에 오면서 서례를 두어 번 나무라고 있었다.
" 천천히 가세요. 급할수록 느리게 가야 한다는 걸 전혀 모르시는 분처럼 왜 그러세요?"
서례가 아들 얘기를 자주 꺼낼 수밖에 없는게, 아들은 그날 셔터 전문기술자를 따로 부르지 않고 고집스레 낑낑대며 스스로 고쳐낸 것이다.
물론, 어느 현지인의 도움과 힘이 특히 컸다고 본다.
그 현지인은 버스로 퇴근할 부인을 기다리던 중이었다고 했다.
앞쪽으로 무지막지하게 휜 셔터를 어떻게든 원상복귀를 시켜보려는 아들의 모습이 꽤나 가상했던가 보았다.
서례는 그 현지인을 지금껏 천사처럼 여기고 있다.
왜냐면 그날 경황이 없어 제대로 된 인사를 못했으므로, 행여 다시 인사할 날이 있으려나, 그런 마음으로 퇴근 길에 자주 버스정거장을 유심히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는데. 그런데, 그런데도 그 현지인은 그후 한번도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메모에는 한국에서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는, C의 성명이 적혀 있었다.
C는 'oo부인'이라는 제목으로 써냈던 약간 야한 소설이 영화화 됐었고., 그 영화를 계기로 많은 무슨무슨부인이라는 영화들이 시리즈로 나오는 일에 일익을 담당했던 작가다.
아들은 쇼크요법에선 가까스로 비키게 해준 셈이라는 듯 그제야 말문을 연다.그런데 거의 통역하듯 말하고 있다.
“모임에 가셨으니까 내일 아침에, 그때나 전화를 드릴 듯함,그런 식으로 설명. 그렇지만 자꾸 설명 해도 소용 없음. 굉장히 막무가내! 꽤 심각한 일 터진 느낌."
아들에게 번호를 남긴 C의 핸드폰은 연신 통화중이라는 안내 음만 나온다.
서례는 하는 수 없이 서울에 살고 있는 미례에게 전화를 넣는다. 전화를 기다리는 동안 서례는 꽤 들뜨는 심정이었던 게, C가 전화를 해올 일이라고는 7년 전 에 보낸 두 개의 중편소설에 관한 것밖에는 달리 없었음에랴.
미례에게 지시한대로 C에게서 전화가 온건 정확히 15분 뒤였다. 일상적인 안부도 생략한 채 C는 확인하듯 묻는다.
" 어제 오후에 승희하고 통화했는데, 너 곧 책 내러 귀국한다며?"
“ 네, 승희가 해마다 연하장을 보내주는데 내 생활이 너무 타이트해서요. 나는 새해인사를 전화로 대신했었어요."
보고 싶다고, 언제 나오느냐고 따지듯 묻는 승희에게 서례는 그랬었다.
“ 곧 나갈 거야. 책 하나 낼까싶어 . 나이 드니까 내 맘도 변하나봐."
C는 느닷없이 컹컹 울리는 것 같은 음성으로, 부디 농담이었으면 좋을 얘기를 선전포고처럼 쏟아내기 시작했다.
“얘, 몇 년 전에 보내준 네 작품을 있잖아? 내가 사실은 어떤 문예지에 갖다 주고 왔었거든. 헌데, 그 문예지 담당자들이 내가 갖고 갔으니까 내 작품이겠거니 그러고, 내 이름으로 너의 작품이 나간 거야"
" 선배,어떻게 그런 일이…… ."
" 참, 그 고료는 내가 어디에 잘 뒀는데.가만,어딘가 있을 거야."
“ 선배 . 도대체 무슨 그런…… .”
" 너 나오면 주려고 내가 잘 간직해 뒀거든. 내가 요새 치매인가 봐. 뭘 잘 두면 꼭 잊어버린다니까.''
“ 선배 , 그 작품이 …… ."
“ 얘는? 좀 기다리고 우선 내 말부터 잘 들으라니까 ."
서례는 세워지려는 날을 애써 무디게 가다듬는다.
“그 사람들이 실수해서 그렇게 됐으니까, 이번엔 내 작품을 네 이름으로 하나 내자."
‘하나 내자‘ 라고 말할 때, C는 매우 의리에 찬 음성이기까지 했다.
“ 대체 그게 웬 말도 안 되는?”
" 서례야, 내가 너한테 빚을 졌으니까 내가 내 작품으로 갚을게 ."
이번에도 가로채일까봐 서례는 속사포를 쏘듯 재빨리 말을 쏘아댄다.
" 싫어요. 난 선배의 작품은 물론이고, 그 누구의 작품도 욕심나지 않는다구요!"
“ 너 있잖아? 책 내는 문제는 정말 심각하게 결정해야 돼. 지금 한국은 IMF 이후에 책이 전혀 안 팔리고 있어. 인터넷이다, 컴퓨터다 해서 책들을 안 사보니까, 출판사들이 너도나도 도산하는 추세고 "
“글쎄요. 선배의 얘기는 매우 합리적이긴 한데요. 하지만 작가가 꼭 책을 많이 팔려고 책을 낼까요? 아무튼 어떤 작품인지나 말해 주세요."
"왜 그 있잖아, 첫 문장이 '밤송이처럼 짧은‘으로 시작되고. 비디오 집이 나오고, 화원이 배경이 된 작품…… .”
" 하필 왜 그 작품이죠?"
서례는 잠시 말을 잃는다. C는 혼자서 계속 떠들고 있다.
" 이왕 책을 내려면 한 5년 뒤에나 내도록 해. 그때는 책이 좀 팔리려나?''
“ 하여간에 선배. 그만 끊어요. 난 지금 한가하게 선배의 변명을 들을 게 아니라 뭔가 해결책을 좀 찾아봐야할 것 같거든요."
서례는 난데없이 대형냉장고에 갇힌 듯 한 싸늘한 공포감이 엄습해옴을 깨닫는다. 크게 외쳐도 될 일은 아니라서, 서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로지 문을 힘껏 두드리는 일이었다. 겨우 구조됐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가까스로 남편과 아들이 보였다. 마치 전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남편은 그제야 귀가한 터였다.
대강 간추린 설명을 듣고 난 남편과 아들은 흡사 C가 보낸 칙사처럼 군다.
" 나쁘다! 그래도 여보, 진정해. 그리고 우리 잊자. 그 여자가 당신 작품으로 상을 탄 것도 아니고……. 너무 충격 받지 않을 거지? " 남편
서례는 입을 딱 벌렸다가 이내 다물었다. 아들은 한 수가 아니라, 여러 수 더 뜬다.
" 왜 이렇게 연락이 안 오느냐고 수시로 불평하시더니, 어쨌거나 게재는 됐었군요. 그래도 딴 생각 마시고, 지금까지 써온 작품들 열심히 갈고 닦으세요. 아시죠? 쓰는 것보다 더 많이 다듬고 더 많이 읽어야한다는 거. " 아들
그건 일종의 위로다. 어떤 사람들은 매번 위로를 그런 식으로 한다.
특히 서례의 가족은.
서례는 그들을 가볍게 제치고 수레가 가파른 비탈길을 구르듯 뜰뜰 마당으로 내려간다.
수레에 치일까봐 양쪽으로 갈라서서 멍하니 서례인지 수레인지를 지켜보는 남편과 아들.
커피를 여러 잔 마셨을 때조차 서례는 어려서 엄마가 들려주던 자장가를 부르며 자기가 저를 재워왔다.
착한 아기 잠 잘 자는
베개 머리에
어머님이 홀로 앉아
꿰매는 바늘
꿰매어도
꿰매어도
밤은 안 깊어
서례형제들이 쉽게 잠들지 못할 경우, 엄마는 특히 ‘꿰매어도 밤은 안 깊어’의 후렴부분을 나직나직 밤비 내리는 소리로 반복하고 반복했었다. 어깨나 등을 토닥여주며.
그럴 때마다 눈꺼풀은 천근만근 무거워지기 시작했고.
일 년에 두 번, 아르헨티나는 크리스마스와 제야에, 전국에 걸쳐 지축이 뒤흔들릴 정도로 심한 몸살을 앓는다. 밤을 세워가며 총과 폭죽을 터뜨리기 때문이다.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는 그 전통적인 축제에도 밤새 잘도 자고 일어나서 , 참 대단한 어머니 . 탄복할만한 아내로 불리던 서례는 그만 밤을 꼬박 새우기에 이른다. 엄마의 자장가도 부르고 싶지 않은 밤이었다.
가게 문을 열자마자 문협 회원인 E가 들어선다. 그는 앉지도 않고 불쑥, 문협을 그만 두겠다고 나온다. 본인을 명단에서 빼달라고까지 강하게 표현하기를 서슴치 않고 있고.
" 명단에서 빠져야 할 만큼 뭐가 크게 잘못된 일이라도 있었나요?"
서례는 떫은 표정 같은 걸 워낙 잘 나타내지 않는 편이라서 오히려 산뜻하게 웃으며 묻는데, 그야말로 떨떨한 웃음이 떨떠름, 피기도 전에 사라지고 있었다.
E는 문제를 선뜻 제시하지는 않는다. 서례는 그를 달래지도 질책하지도 않는다. E는 가깝게 지내던 회원 P에게서 '당신의 시는 문학적으로 볼 때 수준미달이다' 라는 평을 바로 어젯밤 들었기 때문이라는 하소연을, 결코 안하고 싶다는 표정으로, 그러나 한다.
(밤을 세운 사람이 내 앞에 또 하나 있구나. 오나가나 문학이 문제인 것일까.)
서례는 그를 이해한다. 오죽 속이 상했으면 새벽같이 회장이라는 사람을 찾아왔을까싶어 , 그의 단순한 성격을 좋은 쪽으로 받아들이려고 할 만 한 말조차 꾹꾹 참는다.
승희와 미례에게 국제전화를 넣는다.
“저런! 너 당장 나와라. 그래서 그 선배를 고발해버려. 그럼 그 선배도,유명 탤런트로 이름을 날리는 그 선배의 딸도 얼굴을 못 들고 다닐 거야. 그런 인간은 인터넷에 띄워야 돼. ‘내 작품을 찾습니다’ 그렇게만 올려도 꽤 시끄러울걸.” 승희
'‘언니도 참. 왜 작품을 그 여자에게 보냈어? 직접 보냈어야잖아. 그럼 이런 일도 안 생겼을 테고." 미례
등단이라는 것을 했을 때 , 한국에 나간 서례에게 C가 그랬었다. 한국 문단은 작품이 아무리 좋아도 문예지에 게재하는 일이 그다지 쉽지만은 않다고. 작품을 C에게 보내주면 C가 좋은 문예지에 게재 시켜주겠노라 고 그러면서 C는 모 문예지의 편집위원인 K씨까지 소개시켜줬었다.
그리하여 서례는 K씨에게도 두 편의 작품을 보냈었고.
그 작품이야 워낙 빨리 써 보냈으므로 차라리 게재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여기는 형편이니까, 이렇다하게 개의치는 않는다.
“한국을 떠난 지 20년이 넘는다지만 언니는 한국도, 한국 사람도 너무 모른다!"
“그래. 난 내 나라에 대해서 아는 것 보다 더 많은 게, 모르는 걸 거야."
서례는 사실 본국은 물론이고 본국문단도 너무 멀다는 생각을 꽤 자주하며, 너무나도 바쁘게 허우적대며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쁜 틈틈이 글 쓰느라 더 바빴지만.
(순간적으로 부끄러움이 앞선다.
이웃에 사는, 서례보다 약간만 어린 친구가 ' 왜 언니는 이곳의 한인문협에서 모집하는 공모전에는 작품을 안 내죠? ' 라고 물었을 때, 잘난 것처럼, 혼자서 도통했고 뭐든 많이 아는 것처럼 쓸쓸하게 웃었던 자신에 대해서 .
그리고 어떤 나이 어린 여대생이 본국의 어느 공모전에 당선 되었을 때 문학의 문짜도 모르고 그다지 가깝지도 않은 여인이 서례에게 하던 뜨악한 질문.
형님은 언제 저렇게 상금을 타 볼 거야?
그랬을 때 혼자 드높은 것처럼 기분이 별로였던 기억에 대해서도. )
“어쨌거나 내가 오빠에게 연락해서 우선 그 여자의 이름으로 나갔다는 언니의 작품을 수소문해 보도록 할게 .”
“실수로 그렇게 됐다고 우기지만 그 선배는 배경이나 내용을 조금씩 바꿨을 거야. 그러니까 일단은 문예지마다 그 선배의 중편을 조회해 봤으면 해."
서례가 의아스러운 건, 만약 실수로 C의 이름과 함께 그 작품이 나갔다면. 그 다음 호에 충분히 정정문이라도 나갔어야 되기 않았느냐는 점이었다. 그 무렵의 서례는, 원고를 보낸 지 1년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라서 용기를 내어 C에게 전화를 했었다. 모르는 이에게서, 이사 간 지 1년이 다 돼간다는 대답만 들었다. 7년. 사실 서례는 한국이 멀다는 생각보다는 7년 동안을 절망 비슷한 감상을 자주 껴안고 지냈었다. C의 말대로 게재가 어렵긴 어려운가보다, 그렇게 자조하면서. 그리하여 주눅이라는 주눅은 다 들어 그 어떤 문예지에도 작품을 보낼 생각을 못해 왔던 셈이고.
아들은 서례를 놀린다.
“어머니가 그 분에게 작품을 보냈다는 증거가 어디 있어요?''
“이러리라고 대비했던 건 아니지만. 난 그 작품을 이미 공증해 뒀었어 ."
“그렇다면 그분이 작품을 받았다는 법적 증명이 될 만한 꼬투리는요?''
서례는 흡사 오리처럼 멀뚱멀뚱 아들을 쳐다본다.
하지만 꽤 뒤뚱대며 겨우 꽥꽥거림을 되찾는다.
“내 작품이라면 내 작품이야. 그런데 무슨 법까지 들먹이며 복잡해야 되는 거니?"
처음엔 멈칫거리다가 서례는 차츰 침착해지고 있었다.
“난 그 작품에서처럼 자식 하나를 교통사고로 잃었고. 난 현재까지 화원을 운영하고 있고 그 작품에 나오는 툴루즈 로트렉의 ‘세탁부’가 내 가게에 엄연히 걸려 있고…… .”
아들은 잠시 웃어주는 표정이다가 이내 정색을 하더니, 금세 서례의 말을 가로막는다.
“그런 건 전혀 도움이 안돼요. 그 분이 정말 나쁜 사람일 경우. 표절이 라는 이름으로 되레 당한다는 상상을 왜 못하시는 거죠?''
“설마.”
아들은 사뭇 신랄할 정도로 몰아세운다,
‘모르세요? 설마라는 단어, 어머니가 내게 알려주신 말이라는 거. 그리고 지금에 와선 어머니의 그 설마 하는 안이함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됐다는 거."
“난 적어도 남의 작품은 훔치지 않아. 그거니? 안이 하다는 게?”
며칠이 지나도록 미례와 준욱에게서는 전혀 연락이 없다.
서례는 너 무도 기이하게 여겨져 전화를 해본다.
준욱은 뭐가 잘못됐는지 계속 통화중이다.
미례는 딴전까지는 아니더라도, 말과 말 사이에 시들해지고 마른 마음이 시들시들 박혀 있다.
“언니 . 오빠가 지금 인터넷으로 알아는 보는데 그게 그리 쉽지를 않나 봐, 그리고 난 엊그제 서울대 병원에서 수술날짜를 받았어. 당뇨 때문에 왼 눈을 수술해야 된대 ,"
“네 그 예쁜 눈을?''
“그리고 민서아빠한테 야단만 맞았다니까. 언니 대신 그 여자를 만나려면 강하게 욕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 내가 무슨 그런 깡다구가 있기나 한가고 말이야. 사실 이건 내 일도 아니고……”
(맞아, 맞는 얘기야. 이건 네 일도 아니지 .)
서례는 C에게 직접 전화를 넣는다. 서두부터 강하게 나오며 , 서례는 왼손으로 수화기를 들고 오른손으로는 소형 녹음기의 스위치를 약간 비치적거리는 심정으로, 비장하게 누르게 된다. 그래서 마치 소형 녹음기에 대고 비판하고 항의하는 느낌까지 들고 있었다.
“며칠 동안 곰곰 생각했어요. 그런데 나는 내 작품이 선배의 이름으로 나갔다는 사실이 도저히 납득이 안돼요. 소위 지식인이라는 선배가, 하물며 작가라는 분이 어떻게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7년 동안 침묵만 치켜 왔는지도 의아스럽고…… .”
C의 음성은 생기도 생기려니와. 거의 발랄하다고까지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당당하였다.
“아! 그거? 얘, 네 작품이 도착했을 당시부터 지금까지 같은 아줌마가 일하거든. 며칠 동안 그 아줌마를 시켜 찾아봤는데. 글쎄 네 작품이 그대로 있는 거야. 내가 받았던 고료가 48만원인 게 이상해서 찾아보니까, 네 작품은 고스란히 있었어. 내가 콩트를 하나 보냈었는데, 결국은 그 콩트의 고료였던 거야. 네 작품은 중편이잖아. 중편은 나 정도 중견 작가면 2백만 원은 받거든."
“선배는 중견이라는 말을 퍽 자부심 있게 하시네요."
“이상하게 꼬인 소리는 그만하고, 그건 내가 보낸 콩트의 고료였다니까."
콩트. 서례는 C에게, 두 편의 중편은 물론이고 67편의 수필원고까지 보냈었다는 데에 겨우 생각이 닿은 것이다. 일시에 몰려드는 해일.
그 수필 중의 한 편이 C의 콩트로 둔갑하지 말라는 법은 어디 있는가.
작품이 C의 이름으로 나갔었다는 실토를 들었을 때는 명치에 응어리가 생긴 것처럼 거북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는 뒤집어 엎기는 실소를 자아내기도 버거워서, 서례는 자기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차라리 작품이 잘못되었다는 상황이 낫기라도 한 것처럼 .
" 평소의 나는 문학에 대해서 별로 타산적이지도 본능적이지도 못했어. "
“아니죠. 아마도 타산적 본능에 충실하셨을 겁니다. 본능이란 건 그렀다면서요? 잘라 내도 계속 자란대요. 동물의 자절현상처럼요."
“계속 이상한 소리만 할 거니? 부탁인데, 서례야,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이 일만은 복잡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 너?"
“이미 보따리가 풀리고 말았어요. 선배는 이 일을 실토할 때가 그나마 괜찮았는데……더할 나위 없이 솔직했거든요. 지금은 어떤 줄 아세요?”
서례는 또박또박 끊으며 으르렁대듯 말한다.
“드, 디. 어. 본색을, 드, 러, 내, 다!"
“점점 ? 근데 서례야, 내가 며칠 맘 잡고 알아 봤는데, 넌 책을 내도 아 무 이상이 없을 거래."
“애초에 그렇게 알아보고 그랬더라면 그나마 좋았을 텐데요. 그런데 어쩌죠? 나는 더 이상 선배를 못 믿거든요. 일단은 각 문예지마다 조회를 해 볼게요."
“그게 원이라면 그렇게 해. 내가 알기로는 문예지가 약 백 개도 넘을 텐데…… 먼저 전화로 일일이 확인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문예지가 백 개가 넘는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항이고,이제와서 그런 식으로 걱정 하는 건 일종의 월권행위 아닌가요?"
“어떻게든 찾아봐. 그런 뒤에 내게 전화 좀 주고…… .”
“앞으로 절대 선배하고 전화할 일이라고는 없어요. 아시겠어요?”
서례는 가위로 싹둑 자르듯 매몰차게 말하며 전화를 끊고 녹음기도 스톱시킨다. 곧 바로 C의 전화가 다시 온다. 서례는 잊지 않았다는 듯 녹음기의 스위치를 다시 누른다.
“얘, 우리 대학 다닐 때 내가 승희와 널 참 예뻐했는데,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나올 수 있는 거니? 참, 슬프다‘
"정말 슬프세요? 악어의 눈물은 안 흘리셨나요? 누구세요? 누구시기에 그리도 간단하게 내 문학인생을 낚아채었냐고요?”
그제야 말문이 막히는지 C는 잠시 아무 말도 못 꺼낸다. 결국 침묵을 깬 건 C다.
“잠깐 생각하고 있었어. 내가 왜 이렇게 너한테 당해야 하는지를…… .”
“나도 잠깐 생각하고 있었어요. 선배의 임기웅변과 오리발에 대해서…… .”
서례는 자신의 음성이 난생 처음으로 격렬해져 있다는 데에 생각이 닿는다. 일부러 목소리를 가다듬지만 단호함만은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가 않다. C는 여전히 자신감 넘치는 음성으로 묻는다.
“너 정말 내 후배 맞니?”
“선배는 진정 내 선배 맞나요?”
“세상에, 그렇게 착하던 네가…… .”
“참 다행이네요. 나를 멍청이로 본 게 아닌가 싶어, 요즘 매우 섭섭해 있었거든요.”
C는 어딘지 모르게 격앙된 음성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내가 만약 네 글을 내 이름으로 실었다면 내가 네 딸이다!"
서례는 잠시 혼란에 빠진다.
(정말 안 그랬다는 얘기인가? )
“아니지 ,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내 자식들을 두고까지 맹세할게. 됐지? 그래도 화가 안 풀리면 고소라도 하던지 ."
“그런 걸 왜 하겠어요, 가톨릭을 믿는 내가……”
C는 마치 이국땅에서 처음으로 동포를 만난 듯 한 살가운 음성으로, 환성을 지르듯 말을 날리고 있었다.
“얘 , 나도 성당에 나가! 내가 성모님을 두고도 맹세할게. 그럼 됐지?"
“우이아? 엔깐따다!(어머? 반갑군요!)"
“그게 무슨 말이니?"
"걱정 마세요. 좋은 말이니까."
더 이상의 통화는 불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서례는 수화기를 던지듯 내려놓는다.
서례는 두렵고 겁까지 난다. C가 서례에게 해낸 여러 맹세들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이 생겨날까봐.
화엄경에서였던가.
여인은 산달이 되어 친정으로 아기를 낳으러 가고 있었다. 그 여인은 친정에 닿기도 전. 짧은 순간에 여러 가지 환난을 맞게 된다. 낭군은 말에서 떨어져 죽고. 막 낳은 아기는 뱀에 물려 죽으며. 큰애는 급류에 휩쓸려 죽게 되는 것이다. 혼비백산 찾아간 친정집엔, 부모형제들이 모 두 화재로 목숨을 잃었다는 비보만이 남아있었다. 절간의 노승은 기진맥진 지쳐있는 여인에게 이렇게 설파한다. ‘당신은 전생에 어느 대감댁 의 후실이었습니다. 그때껏 후손을 못 보던 대감의 전처가 아들을 먼저 낳게 되자. 당신은 그 아기의 몸에 그만 바늘을 넣는 악역무도한 일을 저질렀지요. 시기심의 발로였습니다. 아기는 결국 죽게 되었고. 전처는 당신을 의심했습니다. 당신의 대답은 매우 거리낌이 없었지요. 〈내가 만약 그런 나쁜 일을 저질렀다면 나는 후생에 천벌을 받을 거야. 내 낭군은 말에서 떨어져 죽고, 내 큰애는 물살에 휩쓸려 죽을 것이며, 갓난아기는 뱀에 물려 죽겠고, 친정식구는 불에 타 죽을 거야. 이렇게 맹세할 정도로 나는 아냐. 절대로! 고승은 결론을 맺는다. ‘우리 중생은 말 한 마디조차, 헛되이 발설하거나 맹세해서도 안 됩니다. 말이 곧 씨가 되기 때문입니다.'
C는 또 다시 전화를 해온다. 그리도 가혹하게 내몰았는데도 시근사근이 지나쳐 지근지근이다. 이쪽에서 화를 내는데, 같이 화를 안낸다는 자체가 뭔가를 인정한다는 게 아닐까.
서례는 문제의 핵심을 찾아내려고 승희에게 전화한다.
승희야말로 며칠 사이, C에게 완전히 세뇌된 나머지 C와 똑같은 말만 한다.
앞에 선배라는 호칭이 붙어 있다는 것밖에는 특별하게 다른 게 없다. 선배는 중견이고. 선배는 성모마리아를 두고까지 맹세한다고도 그러고, 선배는 자식을 두고도 맹세하고 있고, 이 모든 일이 거짓일 경우엔 선배는 서례의 딸도 될 수 있다고까지 말하고……
그런데 이 말만은 멈칫대며 실토한다.
" 근데, 있잖아? 그 선배, 내가 알아봤더니 전적이 벌써 여러 번이었어. 네가 세번 째야. 젊은 후배 하나 하고는 재판까지 갔었다더라."
서례는 이윽고 문제의 핵심에서 벗어나고자 미례에게 전화를 넣는다.
미례는 몹시 반가워는 한다. 그런데. 오히려 미례가 서례에게 묻고 있다.
“어떻게 됐어?"
서례가 꺼내려던 말을 미례에게서 듣게 되자, 서례는 그만 큭큭 웃음이 터졌다. 미례는 이미 그러기로 작정한 듯 서례를 달래기 시작한다.
“우리는 살면서 돈도 떼이고, 빚보증도 서보고, 사기까지 당해왔잖아.
"넌 어떻게 이 일을 그런 일들에 비유할 수가 있는 거니?"
" 알아, 언니 마음. 그래도 어쩌겠어? 사실 언니도 그렇지만, 나나 오빠가 이런 일에 나서서 야단칠 성격은 못되잖아. 그리고 정작 야단친들 또 어쩌겠어. 그리고 언니, 성욱이가 보도부국장으로 있는 방송국의 기자들에게 이 일을 터뜨릴까도 생각 안 한건 아니야. 성욱인 우리 형제 아냐? 좀 더 일을 지켜보겠지만, 가만 안 있을 거래."
"넌 뭐 하러 성욱이 한테까지 이 얘길 했니? 난 일부러 연락 안 했는데."
"어느 정도 윤곽은 알고 있어. 만약 그 여자가 못되게 나오면 그 앤 액션을 취할걸."
"그러지마, 그건 진정 나를 위하는 게 아니야. 나도 기분 같아선 혼을 내주고 싶기도 했었지만."
서례는 잘 안다. 큰애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 굳이 보상도 받지 않은 자신에 대해서…….
그걸 받아 무슨 맛있는 걸 사먹겠나, 어떤 예쁜 옷을 구입하겠나, 또는 집치장 같은 걸 할 수나 있으려는지, 그러면서 단호하게 거두절미 말도 못 꺼내게 하던 자신을.
15년이 다 돼가는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그때 보상을 얼마나 받았었는지를 캐듯이 묻는다. 받기 싫어서 안 받았다는 명료한 대답에, 사람들은 지금껏 몹시 아쉬워하는 데다, 아마 영원히 아쉬워들 할 것이다. 지금까지와 다름없이 이런 말들을 아주 자연스레 깔아 두면서.
-그런 건 받을 수만 있으면 꼭 받아내야 해요. 보람 있는 일에 쓰면 참 좋잖아요.
핸드폰의 신호음이 짧게 울린다. 달리 할 말도 없었으므로 미례와의 전화를 서둘러 끊고 만다.
"안녕하십니까? 홍 선생님. 서영사입니다."
“네. 영사님께서도 안녕하셨어요?"
“다음 주 화요일에 본국에서 반기문 외교통상부장관님께서 오십니다. 그래서 대사관저에서 동포간담회가 있습니다. 수요일 저녁 7시 30분입니다. 꼭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네. 그러겠습니다. 그럼 그날 뵙겠어요."
한국대사관저는 울창한 나무숲에 안겨있다. 만찬은 양식과 한식이 어우러진 풀 코스였는 데다 12명의 교민단체장과 반외교부장관과의 질의응답 등이 있었으므로 시간은 어느덧 새벽 1시가 다 돼가고 있었다. 또한 12명의 단체장들은 이슈가 될 만한 화제를 각양각색으로 표현해내고 있었다. 본국사람들이 8시간 수면을 취 할 때, 우리 이민자들은 4시간만 잘 수 있었다고 말하는 이가 있는가하면, 아르헨티나의 포도주와 무공해에 대해서 찬사를 늘어놓는 이도 있었다.
서례는 아들의 경우를 예로 든다. 서례는 글 을 쓸 때, 아들에게서 가장 많은 영감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제 아들은 어려서 이민을 따라 왔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그 애는 생각도 꿈도 서반아어로 했다고 합니다.。 중학교 다닐 땐 그 애의 생각과 꿈이 반반으로 나뉘어졌죠. 대학에 다니는 현재. 그 애의 꿈과 생각은 다시 서반아어로 돌아간 게 아니라, 모국어를. 본인도 모르게 다시 사용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본인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정체성을 되찾은 것입니다. 비록 외국에 살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영원한 한국인임을 어떤 자리에서도 각인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박수가 터지자, 서례도 같이 박수를 쳐, 분위기는 한층 화기애애해지고 있었다.
현지인 남편과 사별하고, 혼혈아들과 살고 있는 A에게 들른다. A는 노년의 현지인 수리공과 수시로 마떼(호리병 박안에 뜨거운 물로 우려내는 아르헨티나산 녹차)를 마시고 있다. 그냥 마시는 게 아니라, 스테인리스로 된 빨대를 서로 주고받으며 마시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먹던 술잔을 비우고 그 잔에 술을 따라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처럼 아르혠티노(아르헨티나인) 들은 마떼통을 주고받으며 빨대를 같이 사용하는 걸로 서로의 결속을 다짐해낸다고 봐야 할 것이다. 수리공은 마떼만 같이 마시는 게 아니다. 가스레인지 앞에 A와 나란히 서서 , 주전자에 더운물을 같이 데우며 , 서례에게 귀찮을 정도로 여러 차례 권유하고 권유하는 것이다.
“노 그라시아스 (고맙지만 사양합니다). "
물론 서례는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다.
드디어 끝났다는 듯 수리도구를 챙겨든 수리공이 3층을 향해 올라간 뒤에야 A는 서례의 맞은편에 앉는다.
“굳이 수리공과 마떼를 그런 식으로 같이 마셔야만 시원하니 ?
”남의 나라에 살면서 인종차별을 당하는 게 아니라,하는 거구나. 넌…… ."
"아냐, 그런 뜻이 ."
"집수리를 제대로 하려면 인간적으로, 친구처럼 대해줄 필요가 있어. 왜? 보기 싫었구나? “
“모르겠다. 현지인과 결혼했었기 때문에 넌 그런 일들이 가능하고 편안한지도.”
“넌 왜 가끔 애처럼 못되게 굴지? 다 그러고 사는 거야. 모자란 듯 넘치게."
‘넘치듯 모자란 게 아니고? “
“그만 두자. 그런데, 이건 분명히 해둘래? 그러는 넌 타인한테 잘 당하고, 이러는 난 절대로 안 당한다는 거 ."
“그래, 맞아. 참으로 맞는 얘기야. 요즘 내 주위에 맞는 얘기를 하는 사람이 왜 이리 많은지 모르겠다."
뒤꼍의 대나무 밭에서 댓잎들이 소나기 쏟아지는 소리를 내고 있다.
”참, 네 작품은 어떻게 됐어, 찾았어?"
한 달 동안의 갈등에 대한 해답을 이제야 얻은 사람처럼 서례는 새삼 찹찹해진다.
혈혈단신이 어떤 건지, 외로움이라는 게 어떤 건지까지도 서례는 이 한 달 동안에 완벽하게 터득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매번 무거운 우수가 농무처럼 내리 덮치려 고해서 서례는 자꾸만 고개를 휘젓고는 했다.
서례로서는, 한국의 출판물 공해에 일익을 담당하는 거나 아닌가 싶어서 , 그동안 계속 발간을 미루어 왔었고. 자비출판을 해야 한다는 조건에도 자존심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꼭 책을 내리라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A는 채근하듯 다시 묻는다.
“내 말 못 들었니? 문제의 그 작품이 어떻게 됐냐니까?"
“책을 낼까해. 그것도 꼭 실어야지 ,"
“그냥 이대로 덮을 거야? 그런 여자는 본때를 보여야 하는 건데 ."
“그건 내 소관이 아니야. 난 더 이상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싶지가 않아. 이 문제에 발이 빠졌었다는 것만으로도 감탕밭 같았거든.”
“그래도 그런 여자는 단죄해야 된다! 너 ."
“그것도 내 소관이 아니고…… 난 그 작품을 발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내 할 일을 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 . 나로서는 그 선배가 후생에 내 딸만 안 되면 참 고마운 거고…… ."
“무슨 얘 기 야?"
“그럴 일이 있어."
단정하지만 이번 일로 C나 서례 둘 중에, 허둥거린 사람이 분명 있을 터였다,
지난 밤 서 례는 꿈을 꿨었다.
어디서 처절한 울음소리가 들려오는데. 너무나 듣기에 기분 나쁜 울음 소리였다. 그러나 그 울음소리와 자신과는 무관하지 않다는 느낌 때문에, 서례는 울음소리의 근원지를 굳이 찾아 나섰다. C가 여러 사람의 몰매를 맞고 있었다. 서례는 C에게 달려들 듯 감싸면서 말리기 시작했다.꿈에서 깨어나자, 서례는 마음을 다잡고 다잡았다.
차라리 서례가 전생에 C에게 진 빚을 갚는 거라고, 변모의 싹을 틔운 것이다. 이것은 자신과의, 자신을 향한 변화였다.
“걱정된다.”
“뭐가?”
“출판이 다 될 무렵. 넌 한국으로 전화할 것 같아. 그 작품은 빼주세요, 라고 말이야."
“그건 나도 장담 못해. 1분 사이에도 변하는 사람이 바로 나니까."
A의 집을 나와, 서례는 거리를 걷는다.
거리는 눈부시게 밝다. 비온 뒤와 같이 더 깨끗해 보이고, 더 산뜻하며 더 상쾌하다.
그리고 하늘. 온통 하얗지도 않고 온통 파랗지도 않은 짙은 남색에 흰색 뭉게구름.
서례는 느닷없이 팔을 벌려 하늘에, 구름에 답한다.
해방감!
옛 중국의 현인처럼 심기일전하는 마음이기 까지 하다.
' 숲에서 일하고 돌아온 현인은 얼마 뒤에 도끼를 잃어 버렸음을 깨닫는다. 그런데 이웃에 사는 총각이 매우 수상쩍다. 그렇게 의심을 품자. 총각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도끼를 가져갔기 때문에 저런 식으로 보이는 거라고만 연관 짓게 되고, 도끼를 훔쳐간 야비함으로만 결론이 맺어지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현인은 우연히 광에서 도끼를 발견한다. 그제야 숲에서 돌아온 날. 좀 더 잘 간직하느라 깊숙이 감춰뒀던 기억까지도 되찾게 된 것이다. 그때 비로소 현인의 눈에는 이웃총각의 일거일동이 도끼를 가져가지 않았기 때문에 저렇게 떳떳하고 당당해 보이는 거로구나, 라는 결론에까지 도달하게 되며 매우 타당하고 마땅한 태도로만 비춰지는 것이었다.'
미아가 됐었던 자식을 가까스로 찾아낸 것처럼, 서례는 여러 편의 단편들을 목욕재계를 시키고 새로운 의복 일습도 갈아입힌다.
‘내 작품을 찾습니다.'
서례는 불쑥, 그리고 절절 외치려는 스스로를 굳이 토닥여댄다.
엄마의 자장가까지 읊어대며.
엄마처럼 자애롭게.
빗소리처럼 나직나직.
특히 후렴 부분을…… .
꿰매어도
꿰매어도
밤은 안 깊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