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4일 일요일

12월 첫 토요일에


                          맹하린


나는 일 년이면 미용실을 세 번도 안 갈 때가 많다.
올해는 이미 세 번을 채웠지만.
앞머리는 주로 내가 자르는데, 거울 볼 때는 모르지만 사진을 보면 내가 자른 표시가 역력 해서 웃음이 절로 솟는다. 하지만 내가 나를 안 봐주면 누가 봐즐것인가.  그래서 그럭저럭 참아주는 셈이긴 하다. 누에가 뜯어먹다 만 뽕잎처럼 들쑥날쑥인 내 이마 위의 앞머리.
(누에고치에서 비단실을 뽑아내듯 내 머리카락에서도 비단과 같은 시가 나온다면 좋을 듯!)

금요일 오후에 나는 마침 작업실에서 앞머리를 좀 자르는 중이었다.
그런데 고객이 벨을 눌러 제대로 얼굴에 묻은 자디잔 머리카락을 닦아내지도 못하고 매장으로 나가게 되었다. 아들이 나가봤자 고객들은 꼬치꼬치 물으며 나만 찾기 때문에 그처럼 불리한 상황일지라도 부득이 내가 나갈 수밖에 별다른 도리라고는 없다고 여겨진다.
40대의 남자 분이었는데 토요일에, 한인묘원에서 상객들이 바치게 될 꽃을 50 송이 정도 주문하기 위해서였다.
금요일 새벽, 이미 주말에 사용할 꽃들을 모두 구입해온 터이고, 국화나 카네이션은 주문이 없을 때 사다 놓으면 고스란히 남아 결국은 버리게 되는 경우를 한두 번 당한 게 아닌지라 주말이면 묘지에 가는 분들을 위해선 그저 소국이나 준비해 놓고는 했었다.

그럴 때 전화로 문의가 들어오면 나의 대답은 훨씬 가볍고 수월해진다.
-오늘 아침에 꽃시장에 다녀왔거든요. 하지만 국화나 카네이션은 미처 못 사왔는데 어쩌지요? 좀 비싸긴 해도 차카부코 묘지 앞에 가시면 금방 사실 수는 있을 텐데요. 죄송합니다.
그런데 직접 찾아오거나, 한 번도 못 본 분이라도 어딘지 모르게 친근감이 엿보이는 데다,  특히 잘 생긴 분이면 나의 마음은 단박에 약해지고 만다.
가장 큰 문제는 나는 이 세상에서 잘 생기지 않은 사람을 한 번도 본 일이 없다는 데에 있다. 모두를 아름다운 꽃이나 나무로 바라보는 나의 이 탐미주의라니!
결국 토요일 발인 시간 이전까지 카네이션 50송이를 준비해 두겠다고 약속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지난번에 보니까 그 꽃이 너무 잘 부러지던데요?”
(이분이 언제 또 오셨었지?  부모님의 은혜라는 뜻을 지닌 꽃은 워낙 잘 부러진답니다. 부모님에 대한  은혜를 알아챈다는 게 항상 꿋꿋한 기상으로 세워있지 못하는 까닭에 그러는 건지도 모르겠지만요.)

토요일 이른 새벽, 나는 급할 때마다 레미스(대절용 자가용차)를 보내 면,  지정한 꽃을 빠른 시간 안에 대주는 띠또네 가게에 전화를 했다.
스물다섯 송이씩 묶여진 다발 두 단을 주문하기 위해서다. 꽃시장과는 가격차이도 있고, 꽃도 덜 싱싱한 단점이 있음을 감안하면서도, 꽃시장이 안 여는 날이거나 꽃이 모자란다 싶게 다급할 때면 자주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1시간 후에 도착된 꽃은 흰색 카네이션이 아니라 하얀 장미였다.
다시 바꿔 오기에는 너무나 빠듯한 시간이었고.

사실 그럴 때 나는 전혀 화를 내거나 따지는 성격은 못 된다.
살면서 누구나 실수는 있게 마련이라는 견해 때문이다.
결국 그러한  형편일 때마다 따지는 역할은 아들이 떠맡아 해낸다.
전혀 싸우지 않고 매끄럽게 할 말 다하고 승리 비슷한 걸 쟁취하는 아들.
사실 장미는 카네이션보다 훨씬 값어치 있는 꽃이라서 나는 차라리 안도감까지 껴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그동안의 내 행적으로 보자면, 대부분의 초상난 댁에서 주문하는 50송이나 100송이는 준비과정이 어렵지 않을 경우, 그리고 친한 분들일 경우엔 조의금 대신 그냥 내어주는 일도 부지기수였다고 본다.
그렇지만 안면만 있는 분들에겐 띠또네 가게가 온세지역이니까 레미스비용 30페소와 꽃값 이외에 10페소만 더 얹어 받아왔다.

꽃을 찾으러 온 분은 여자 분이었는데 가다가 금세 되돌아 왔다.
아무래도 꽃이 싱싱하다는 느낌이 안 들어 도로 가져오게 되었다면서 바꿔 줄만한 흰색 꽃과 교체해 달라는 부탁이 곁들여졌다.
그럴 때 나는 카네이션 대신에 장미가 왔더라는 변명 같은 걸 절대로 안 한다.
그렇잖아도 불편한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 빌미를 안길 확률이 너무나 커다랄 게 뻔한 일이라서이다.
나는 하는 수없이 차카부코 묘지의 앞길에 가보라는 권유를  또 다른  방법으로 제시하게 됐다.
지금 가게를 열어야 할 시간이라서 다시 다른 곳에서 꽃을 구입하고 그럴만한 시간은 남아 있지를 않다는 답변이었다.
결국 나는 장미 50송이의 겉잎을 모두 떼어내 다듬는 방법을 선택했고, 냉장고에 남아 있던 카네이션 18송이도 함께 내어 주게 된다.
어떤 이유에서든 상을 입은 고객에게 성의를 다 해내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내 맘 가득 스멀거렸기 때문이었다.

돌아가신 분께선 예고도 없이 떠나셨으니 나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고 본다.
하지만  언제나 미리미리 예약하지 못하고 성급하게 주문하는 나의 바쁘신 고객들로 인해 나는 일이 좀 밀린다 싶어지면  뛰면서 일해도 시간이 모자란다.
그렇게 산뜻하지 않게 시작한 토요일 오전이었어도,  나는 개업식에 보낼 축하화분 너댓 개,  D식당의 아기 돌,  H관의 칠순,  한국인 2세의 콘서트,  현지인 닥터 MARCELO의 딸 생일,  중간 중간 예약 없이 찾아와 즉석에서 기다렸다 찾아가는 몇 분들에게까지  차질 없이 제 때에 맞춰 일을 소신껏 해냈다고 그나마 안도하게 된다..
틈틈이 내 블로그에도 들어 가보고 상조회 게시판도 몇 번 쯤 검색했을 것이다.
금요일에 묘지용 카네이션 50송이 주문했던 분, 일이 그 지경이 됐을 때 전화 목소리조차 친밀하게 전해져 오던 그분께서 나의 불찰 때문에 기분 많이 상하지 않으셨기를 하루에도 몇 차례나 염원하면서 12월 첫 토요일, 오늘을 그렇게 보냈다.(누님이라고 불러 주셔서 감사했어요.)

핸드폰으로 마지막 주문을 한 분은 청년고객이었다.
10분 후에 도착될 예정이니 라운드형 다발을 큼직하게 빨리 좀 만들어 달라는…….
주말마다 매번 이렇지는 않으나 나는 한가한 날은 대단히 한가한가(표현이 좀 이상하지만 사실은  타고난 천성인 내 장난기.) 하면, 바쁜 날은 또 무진장 바쁘게 보낸다.
언제였던가. Y교회 선교사께서 20분 만에 꽃다발 4개를 만들어야 한다고 우기셔서 거의 날아 다니듯 일하면서 그 부탁 고스란히 들어 드린 적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아들은 부재 중이었다.
꽃다발 하나 만드는데 10분이 소요된다면 대부분의 고객들은 금시초문이라는 듯 깜짝 놀란다.
"그렇게나 늦게요?"
그럴 때 나도 놀라기는 놀란다. 물론 속으로만 놀라지만.
( 내가 꽃다발을  뚝딱 찍어내는 기계로 보이시나 보군요. 단지 꽃재료들을  기계 위에 준비하느라  늘어놓는다고 해도 그 정도의 시간은 충분히 소비될 문제죠.)

돌 꽃을 배달했을 때,
D정의 아저씨는 지폐 통을 열어보더니 난감함이 엿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집 사람이 집으로 다 들고 가 버렸구나. 이따가 다시 한 번 오실래요?"
(바쁜 날이라서 산책을 걸렀다는 내 사정을 어떻게 아셨지? 아! 그래서였구나. 그런 이유 때문에 50페소의 잔돈을 안 가지고 다닌다고 큰 돈을 두어 장 내밀며 맨날 나를 혼냈었구나. 그 아주머니가…….어쨌거나 고객이란 고마운 존재임은 자명한 사실!)

배달 다닐 때마다 나는 문우 P선생을 자주 떠올리게 된다.
그분은 한국에 살 때, 꽃배달부를 직업으로 가진 일이 있었다고 한다.
고객이 애인한테 보내는 꽃을 전달해주는 생업의 무대에 서서,  받는 당사자인 여성을  앞에 모시고  기타 치며 노래까지 부르는 일을 날마다 했었다는 문우 P선생.
나는 기타만 안 치고 노래만 안 불렀지 이런저런 회식장소에 자주 배달을 나간다.
바쁨이 자랑도 되는 나의 고객들은 발품을 팔기 귀찮아서, 또는 자동차로 지나가는 길인데도 일단 멈췄다 가는 일이 번거로워 나의 배달을 특히  선호한다.

아침나절에 Gaona 거리 3600대의 김소아과에 이전축하화분 몇 개를 배달하고 돌아오는 길에서  나는 보았다.
트라픽으로 된 레미스가 아베쟈네다 거리의 옆길로 접어들었을 때 나는 홀연 보아낸 것이다.
그리고 다시 아베쟈네다 큰길로 방향을 바꾸었을 때 나는 내 눈동자가 커다래짐을 느끼며 다시 보게 되었다.
촛불시위처럼 많은 인파가 오가던 감동의 물결을.
촛불대신 옷 보따리를 든 감격적인 흐름들을.
그 기억 몹시도 아껴뒀다는 듯, 밤이 되기만을 소원해 온 것처럼 이제야 겨우 떠오르고 있다.
토요일에 한 번도 아베쟈네다 거리를 지나가 본 적이 없었으므로 그 장면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몇 백 명이 아니라 천명도 채울 것 같던 현지인들의 격동과 감동의 출렁임.
(우와! 내 동족님들, 특히나 내 친구들 오늘 대박 좀 내셨겠네?)

그런데 왜 지금 눈물이 약간 글썽여지는 걸까.
앞머리를 자를 때 얼굴에 묻었던 먼지처럼, 또는 눈썹처럼 짧디 짧던 머리카락들
고작 지금에야 떼어내고 씻어내듯 약간의 눈물 닦고 또 닦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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