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21일 수요일

내 가족, 그리고 우리 집


맹하린의 수요칼럼

아르헨티나 조선일보

2000년 9월 28일


모처럼의 여행을 4박 5일 동안 다녀왔다.
고려사의 비구니스님 두 분과 함께였다.
집 걱정은 잊고 훌훌 잘 다녀오라는 가족의 선선한 허락에 나는 배낭과 손가방 하나를 간단히 챙겼고, 두 분의 스님들께선 그야말로 특특한 빛깔의 광목으로된 바랑 하나씩이 전부였다.

San Javier 산으로의 드라이브.
산자락의 중간에는 세 분의 비구 스님들이 계신 Tucuman 한마음선원이 한국의 사찰처럼 좋은 경관과 탑까지 세운 위용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곳에서 옷가게를 운영하는 문우 윤상순 시인의 남편이신 서원장님의 자동차로 구불구불 돌고 돈 뒤 그 산의 정상에 오르니 Tucuman 시가지가 사탕수수밭들과 함께 넓게 펼쳐져 있었다.
Tucuman에서 Cafallate 까지의 여섯 시간.
Cafallate에서 Cachi와Salta, Salta에서 frontera,
Frontera에서 다시 Tucuman,
Tucuman에서 다시 부에노스아이레스로의 강행군이 곁들인 알찬 여행에서 나는 매우 아름답고 독특한 경치들을 꼼꼼하게, 그리고  마음 켜켜이 담아 두었다.
그 과정에는 죽음의 계곡이라 이름지어진 정말 험난한 계곡들이 많았었고,  투어 차량으로 100Km를 달려도 끝이 안 보이던 다양하고 그럴듯한 이름들을 지닌 흙산들도 참 감격적이었다.
아직껏 잔설을 머리에 얹은 채 앉아 있던 산을 바로 옆에 하고 Cachi의 정상에 닿았을 때는 우리 일행이 백두산 높이와 버금가는 2.280고지에 올라 있는 것이라 했다.
어떤 250Km의 코스는 나무숲과 호수로 둘러싼 푸른 산.
어떤 160Km의 코스는 붉거나 하얗거나 회색으로 어우러져 미국의 그랜드캐년이 무색해 할 것 같은 흙산.
어떤 160Km는 돌과 선인장과 시냇물로 장관을 이룬 겹겹의 산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모든 크고 작은 산들이 로스안데스의 작은 줄기에 불과하다니 감탄이 넘쳐 저절로 말문이 막히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여러 날의 잠은 괜찮은 호텔을 찾아 묵었고, 식사문제는 스님들이 각각 짊어진 바랑의 쌀과 밑반찬과 작은 전기밥솥이 해결해 주었다.
북쪽으로 갈수록 적은 인가와 검은 머리의 인디언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집 앞의 마당에 마른 선인장 통들을 내어놓기는 했지만, 따로 정한 값을 부르지 않고 Voluntad(마음대로)을 내어 놓으면 된다고 얘기하던 인디언의 후예.
그 선인장 통들도 절대로 마구 잘라낸 것들이 아니라 문제가 있었던 선인장들만을 말려낸 자연보호 측면이 눈에 훤히 보이는 상품들이었다.
인디언 부족들이 잔존해 있는 Cachi마을의 도자기 상품들 역시 전통과 토속미를 고수하려는 의지만이 굳건한 모습들이었다.

강물을 길어 올려 풀풀 날리는 먼지를 어린아이 달래 듯 잠재우던 그들.
낡은 판자처럼 굳어 있는 마른 밭을 화락화락 갈아엎는 광경은 마치 수면 위로 솟구쳐 오르는 파도와도 같았다.
Frontera 온천을 소중한 듯 담쏙 안고 있는 산자락의 아름드리 나무숲에는 내가 수집하는 착생 란들이 무더기로 꽃을 피우고 있었다.
여러 포기를 뜯어 가방에 챙기는 나를 두고 작은 스님께서 한마디 하신다.
“맹보살님(그분들은 나뿐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보살이니 처사니 그런 호칭을 초지일관 고수한다.)은 그 몇 개의 포기만을 소유하는 셈이지만, 사실은 그 모든 게 우리 것이 아니기도 하지요.”
참으로 묘한 여운이 남는 얘기라서 이미 가방에 넣었던 착생 란들을 다시 아름드리나무에 붙일까 말까 그런 갈등까지 생길 지경이었다.
하지만 시치미 떼는 기분으로 애꿏은 가방만 두어 번 토닥이고 말았다.

이렇게나 훌륭한 산천을 두고 왜 우리는 속속 이 나라를 떠나고 있고,
그리고 떠날 계획들인 것일까.
하물며 아무 것도 남은 게 없고 그야말로 배낭 하나 달랑 짊어진 심정인 나는 이 나라에게 이리도 강한 애착이 드는 것을.

그 빌렸던 배낭까지도  원래의 주인인 친구에게 돌려주려고 엊그제 아침미사에 들고 갔더니,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신부님. 신부님, 우리 신부님’께서 한 말씀 하신다.
“집을 나오셨습니까?”
신부님께서 웃으며 물으셨으므로 나도 웃으며 대답한다.
“네. 신부님, 저는 날마다 집을 나옵니다.”
다음 말은 속으로만 해낸다.
(그런데 어둡기도 전에 다시 집으로 돌아갑니다. 저는 내 가족과 우리 집을 무진장 사랑하거든요.)

날마다의 방황도 그럴 듯하지만, 내가 머물 곳, 그리고 기댈 곳은 언제나 가정이다 . 그리고 가족이고.
너무나 고맙고 반가운 내 가족, 그리고 언제라도 포근한 내 집, 그리고 우리 집.





-초여름-
  

그 여행 중에 스님들에게서 많은 좋은 점을 진정한 배움으로 익혔었다.
한 가지 내 것으로 접수해야할지 말아야할지 계속 망설이게 되던 대목이 있었고,  아직도 내것으로  흡수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
그분들은 수세식 화장실의 물내림도 물일 경우 그냥 놔두고 모아서 한꺼번에 누른다는사실이다.
지구의 물 아끼기 운동의 일환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