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11일 일요일

감사의 말씀

이 조사는 레지나가 평소 알고 지내던 여러분께 남긴 편지로 대신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께.

평생 받을 사랑을 차고 넘치도록 짧지만 깊이 받았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어느 한 분께도 감사드리지 않을 분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게 나의 가장 큰 자랑인 것 같습니다.
일일이 한 분 한 분 이름을 부르고 그 이름 속에 떠오르는 감사의 정과 아기자기 했던 추억들을 다 적고 싶지만 지면상(히히), 그리고 팔이 아파서 그만 둡니다.
그러나 내 마음속의 편지에는 얼굴 하나 이름 하나 추억 하나에 감사만이 기득가득 채워지고 있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아버지 얼굴을 모르는 홀어머니의 막내딸이라는 것 빼고는 (그것조차도 내 어머니가 미처 느끼지 못하게 두 몫의 사랑을 주셨죠.) 한 번도 사람에게 상처 받고 미운사람이 없었다는 것도 정말 감사드리고 싶은 일이네요.
오히려 제가 알게 모르게 상처를 드리고 용서 받을 일을 했을 텐데 그점이 부끄럽고 죄송스러울 뿐입니다.
사랑도 받기만 하고 사랑할 줄 모르고, 김치 한포기의 은혜도 받기만하고 갚을 줄 몰랐고 그러면서도 잘 난체를 꽤나 했죠?(못된 것!!)
다 용서해 주십시오.
철이 덜 들어서 잘 모르고 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하고 다 용서해 주십시오. 저의 진심된 마음은 늘 사람이 그립고 좋았으며 순간순간의 나쁜 상황에 처해도 그래, 오해는 이해 이전의 상태라는데 아마 지금이 그런 상태일거야, 어떤 계기나 시기가 찾아오면 오해에서 이해로 감싸지는 상황이 될 거야 하며 마음으로부터 섭섭하거나 미운 적은 없었어요. 진심입니다,
(믿어달라는 놈 치고 믿을 놈 한 놈도 없겠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생명을 귀하게 여겨 주십시오. 가진 시간을 만끽하십시오. 하고 싶은 일들을 하십시오.
해야 할 일도 미루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길이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연을 느껴보십시오. 자주 많이!
밤하늘도 새파랗다는 것 아시는지요.
하늘의 구름이 빛에 따라 변하는 그 현란한 빛의 잔치를 보셨는지요.
얼마나 놀라운 그림인지 모릅니다.
숨이 턱턱 막히는 2초 3초의 짧은 그림일 때도 있답니다.
버스 정류장의 붓꽃은 또 얼마나 촌스럽게 예쁜지요.
우리가 바빠서 눈길 한 번 준적 없어도 자연은 그렇게 우리를 해바라기 하며 자신의 품으로 돌아올 우리를 그렇게 참을성 있게 기다려 줍니다.
사시장철 가장 예쁜 모습으로 아무런 강요도 없이 그냥 돌아볼 때
돌아올 때만 가만히 기다려 주네요.

사랑하는 여러분.
살아서 여러분들이 옆에 계셨기에 참 즐겁고 행복했고
이제 죽으면 아버지 하느님 곁에서 온갖 맛있는 과일과 꽃과
성인성녀들을 바라보며 살 테니 저는 이렇게, 사나 죽으나 행복이 넘치는군요.
과연 제가 그럴만한 인간이었는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이토록 켰던 것을
육신의 허물을 벗게 되는 지금에야 절절이 깨닫게 됩니다.
너무나 감사해서 예수님의 손가락이라도 꼬집어 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모시고 온 성모님의 치맛자락이라도 흔들어 대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제가 조금 먼저 천국을 맛본다고 너무 미워하지 마십시오.
왜냐면 천국 것은 먹어도 먹어도 없어지지 않고, 보고 보아도 닳아지지 않을 테니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하늘이 주신 이 육신의 세상에서도 즐겁고 재미있고 기쁘게 살다가 온화한 나라에서 다시 만나 보기를 바랍니다.
정말
정말
정말
감사했습니다,

       박레지나 올림

                 (박영희 레지나는 향년 46세로 2000년 4월 28일 18시 20분에 선종)










-초여름-
  



문우였던 박영희 레지나는 시인이다.
그녀는 시를 완성하면 일단은 내게 보여주는 걸 서슴치 않았다.
석류 알처럼 고르고 예쁜, 자칭 백만 불짜리라고까지  표현하던 치아를 생긋 보이며 금세  웃으면서  잊지 않고 꼭 부탁하는 말.
-보기만 하면 안 돼요. 예쁘게 고쳐 주실 거죠?
그럴 때마다 내 대답은 상냥하기만 한 게 아니라 한결 같은 대응에 익숙했다.
-난 내 작품만 고칠 줄 알아. 다른 사람의 작품을 감히 손대다니. 큰 실례야.

이 세상 소풍을 마치고 떠나기 전 레지나는 미리 이 편지의 작성을 끝냈는데,  발인이 있던 두어 시간 전에 가족을 통하여 내게 신속하게 전달되었다.
레지나는 여전히 부탁을 곁들여 두는 일을 결코 잊지않고 있었다.
-보기만 하지 않고 근사하게 고쳐 주실 거라는 거,  그점 가장 확실하게 믿으며 떠나요. 아셨죠?

청개구리과인 나는 그녀가 떠난 바로 그날, 강가에 앉아 비를 주룩주룩 맞는 심정이 되어 있었다. 

어미의 말을 그토록 거역하면서 세상을 역행하며 살아냈던 청개구리의 불효막심한 마음...... .
마지막이니까 제대로 고쳐야겠다는 작정 비슷한 각오 같은 걸 나는 연신 울면서 굳히고 굳혔을 것이다.
정작 맘먹고 고칠 결심을 다짐하는 순간까지  이렇다하게 결정적인 흠이 안 보였으며 , 고칠 데라고는 전혀 없었던 레지나의 편지.
절대로 고쳐서는 안 될 것만 같았던 레지나의 마지막 메시지.

장례미사 직후 있었던 고별행사의 초반에  나는
레지나의 이 편지를 사회자 단상의 마이크를 붙잡고 낭송하던 나는
평소에 마이크는 물론이고 울음도 뚝, 하고 내가 나에게 명령하면 조절을 가능케 하는 편인 나는
겉으로야  조금 울고 속으로 엄청 울면서 조사를 끝냈던 나는
나는
나는
나는
레지나의 미소와
레지나의 위트와
레지나의 고요로움과
레지나의 우아함을
약간이나마 답습해낼 수 있었으려나.

사랑하는 레지나.
선물이 하고 싶어지는 날이라면서
어느 날 꽃가마에 가서 

내게 사준 특이한 옷...
아직 아끼면서 가끔은 

잘 입어내고 있어.
나는 레지나가 그 나라에서도 진짜 행복할 거라고 믿어.
왜냐면 레지나는 언제 어디서나 

미소가 아름다운,
항암 치료 중에 더 많이  행복함을 깨달았었다고 감사해 마지않던,  바로 그 레지나이므로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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