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15일 목요일

우리에게 내려진 선물



맹하린의 생활단상(生活斷想)

남미크리스챤신문 칼럼

2001년 12월 22일

프랑스에 사는 어느 하녀가 병석에 누운 여주인을 오랜 세월동안 섬기고 있었다. 많은 재산을 축적해둔 그 여주인은 충직한 하녀에게 틈만 나면 말하였다.
" 내가 죽게 되면, 내 재산은 가족들과 친지들에게 골고루 물려주도록 이미 변호사에게 의뢰를 해놓았다. 아주 먼 친척에게까지 빠짐없이 혜택이 돌아갈 거야. 유언장은  이미 작성을 끝내둔 상태지."
여주인이 가끔씩 들려주는 이 말에는 자신에게도 반드시 한 몫을 챙겨 주리라는 언질 같은 게 실려 있으리라고 하녀는 굳게 확신하고 있었다.
일생동안 충성을 다해 일해 온 하녀에게 얼마간의 보상을 베푸는 건 당연한 일이기도 했으므로.하지만 여주인이 작성해 둔 유언서에는 하녀의 이름이 결코 없었다. 여주인은 어느 날 하녀를 불러 이 사실을 인지(認撤)시키며 그 대신 한 가지 선물을 내주었다.
“ 이것은 너를 주려고 특별하게 마련 해둔 선물이다. 나를 위해 일생을 바쳐 온 네게 대한 감사의 표시이니 보잘 것 없다고 너무 섭섭해 하진 말았으면 좋겠구나."
차근차근 말하면서 여주인이 하녀에게 건네 준 선물이란 것은 석고(石膏)로 빚은 십자가였다. 자기를 위해 여주인이 남겨준 몫이 라는 게 달랑 십자가 하나임을 깨닫게 된 하녀는 여주인의 성의가 고맙다고 말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배신감과 같은 섭섭함을 도저히 감출 수가 없게 되었다.
(일생을    헌신해온  결과가 고작 석고로 만든 낡아빠진 이 따위 십자가란 말인가! 나를 주려고 특별히 만든 선물?)
하녀는 여주인의 작은 배려라고 생각하며 하는 수 없이 문제의 십자가를 침대의 머리맡에 걸어 두기는 했지만, 여주인에게 바쳐 온 자기의 지난날들을 돌이킬 때마다 벽에 걸린 그 십자를 바라보는 일이 매번 괴로움이었고 원망스럽게까지 느껴지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하녀의 마음 한편에서는 분개와  어두운 감정이
자꾸만 치밀어 오르는 것이었다.

어느 날 저녁, 하녀는 그 십자가를 우러러 보며 스스로의 심정을 툴툴거리며 털어놓았다,
"저는 오랜 세월을 주인만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그런 내게 돌아온 것이라고는 겨우 십자 가 하나 뿐이라니요. 주인에게 한 번도 찾아온 적이 없고, 아무런 뒷바라지조차 해낸 일이 없는 먼 친척들에게는 많은 재산을 분배해 주면서, 오, 주님. 이것이 저에 대한 배려이고 선물이랍니다. 제가 주인을 위해 바친 그 많은 세월들이 기껏 십자가 하나로 보상이 된 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이 정당한 보수라고요?"
자기감정과 격분에 저절로 도취한 하녀는 벽에 걸린 십자가를 과격하게 떼어내어 마룻바닥을 향해 힘껏 내동댕이쳤다. 그리고는 화난 음성으로 눈물을 홀리며 울부짖었다.
"나타시아 부인, 나는 당신의 그 잘난 선물을 원치 않습니다. 산산이 부서진 당신의 십자가가 내 발치에 흩어져 있으니 당장 도로 가져가십시오."
그런데 참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박살이 난 십자가의 조각들 사이에서 찬란한 물체들이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었다. 다급하게 무릎을 꿇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작은 알갱이들은 현란한 빛으로 반짝이며 무수히  흩어져 있는 게 아닌가. 하녀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부서진 십자가의 조각들은 모두 찬란한 다이아몬드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뒤늦게 깨닫게 된 하녀는 주인을 향한 감사와  깊은 희한에 휩싸여 울며 한탄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오, 주님. 이토록 불손하고 은혜도 모르던 제 잘못을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자기를 생각해 준 주인의 깊은 뜻을 겨우 헤아리게 된 하녀는 용서를 청하려고 서둘러 여주인의 방을 두들겼다. 안에서는 아무 대답 이 없었다. 하녀가 문을 열고 방에 들어섰을 때 여주인은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


은행저축봉쇄령,해외여행자비용제한, 달러구입불가능,냄비시위, 슈퍼마켓습격강탈, 날로 늘어나는 실업문제 등,긴축정책인지 긴급처방인지 아니면 경제공황인지가 뒤범벅되고 있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섬이 만들어지고 있는,메마를대로 메마른 현실이 어느덧 우리 앞에 전쟁처럼 닥쳐왔다. 참으로 대단한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인접국 우루과이에는 예금을 맡기려는 아르헨티나인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아르헨티나의 은행들 앞에는, 일주일에 250페소나마 꺼내 쓰려는,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 기나긴 행렬로 아이러니한 상황까지 연출하고 있다.

가진 이나 못 가진 이나 고생스럽기는 마찬가지가 돼 버렸다. 이런 차제에 위의 예화를 읽으며 느끼는 바가 없지 않아 있었다.
전지전능 하신 이의 지혜와 선물의 가치를 성급하게만 판단하고 있는 하녀가 바로 나, 또는 우리가 아닐까 싶어진다.
여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여러 형태의 십자가를 선물로 내리셨다고 본다. 그런데 우리가 그 뜻을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서둘러 불평하고 있지는 않는지. 그리고 지나친 판단력으로 보장된 미래까지도 흐릿하게 부정하는 건 아닌지 가끔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여러 가족과 먼 친척에게까지 돌아가게 되는 유산만을 크고 부러운 사실이라고 착각하면서 머잖아, 아니면 이미 받아둔 석고로 만든 나와 우리의 십자가에는 이렇다 할 관심이나 고마움 이란 게 지극히 결여되어 있다. 더불어서 원망 까지 쏟아내는 실정은 아니려는지.
내 이웃이 잘 되면 나만 못 살고 있다는 인식(認識)에서 우리는 하루 속히 벗어나야 될 것 같다. 또한 내 이웃이 곤경에 있는데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이기심에서도 우리는 어서 빠져 나와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원하는 일이 바로 서로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 아니던가.
전능하신 분께서 이미 내려 주었을 지혜와 선물의 가치를 더 좀 진지한 마음을 지닌 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참으로 필요한 시기가 지금이 아닌지 그 점 사료된다.
해마다 오시는 아기 예수님은  올해도 어김없이 이 땅에 찾아오신다.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는 이에게 평화’






-초여름-
  

10년 전에 써냈던 부족한 글을 올리려니 부끄럽기만 합니다.
말 그대로 격세지감이 밀려들기도 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정세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듯 싶습니다.
하지만 판자촌에 사는 사람들, 즉 크리스티나 정부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베푸는 보상금.
표현도 근사한 복지국가건설을 위한 프로젝트에 우리 교민들 또한 덩달아 한 몫 거드는 점 참 아이러니입니다. 집이나 가게를 몇 개씩 소유한 분들이 전문변호사나 브로커에게 의뢰하여 보상금을 타내려고 수속 중이고, 이미 타내는 과정에 있다는 사실은 좀 많이 수치스러운 일 같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또 어떻습니까? 오직 보상금을 타내기 위한 방편으로 각 직장의 종업원으로 일하면서도 정식고용을 기피하는 경향에 물들어 있는 형편이 아니던가요?
어떤 볼리비아인들은 가족수당 등을 합치면 한 달에 받는 여러 보상금이 자그마치 1천 달러에서 2천 달러도 넘는다고 합니다.
이러니 나라가 이 모양 이 꼬락서니로 되어 가는 거죠.

본국 역시 가진 자들이 주로 그런 병폐에 물들어 가는 기미가 없지 않아 있겠지만서도!!!




2001년 당시, 상품을 삽시간에 강탈 당한 중국인 슈퍼마켓소속종업원의 망연자실에 가까운 충격

그 당시의 냄비시위와  대규모 소요사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