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10일 금요일

긴 머리의 세르히오(Sergio)



         맹하린


1998년  재아문협에서 발표


가게의 양쪽 진열장 사이의 통로로, 현지인 청년이 템포 빠른 랩송을 부르면서 들어온다.
지체부자유자처럼 손발이 각각 불편해 보인다.
어찌 보면 체머리를 흔드는 것 같기도 하다.
길고 치렁치렁한  머리는 산발에 가깝다.
하루의 일과나 되는 것처럼 언제나 한두 명 나타나는 거지겠거니,  그렇게 앞당겨 생각하며 카운터의 서랍을 연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부자유스러워 보이던  청년은 금세 멀쩡해 지면서 불쑥 잔돈을 바꿔 달라고 요청한다.
"세르히오!"
이웃 가게 ' 세종 인쇄소'의 현지인 종업원이었다.
기다랗게 웨이브 진 머리를 한껏 흔들며 랩송에 맞춰 요란스레 춤까지 추면서 들어 온 모습은 내 쪽에서 불구자로 착각하기에 한 치도 모자라지 않았던 것이다.
잔돈을 바꾸고 나간 후에도 얼빠진 사람처럼 나는 한참이나  웃고 있었다.
세종 인쇄소의 H가 평소에 왜 그리 세르히오를 못마땅하게 대하는지가 약간이나마 납득되는 기분이었다.

H는 하루에 서너 번 쯤 우리 가게에 들러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다 간다.
한 때는 아침마다 박카스를 사다줘서 , 내가 부탁처럼 사양했더니 지금은 안 그러고 있다.
나는 인스턴트식품이나 드링크 종류를  거의 즐기지 않는다.
H는 중독 수준이 되었다고 하는데, 나는 중독되는 걸 왜 즐기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족속이다.
그렇지만 나는 H의 천생 여자이고, 차분하면서 참을성 많은 성격을 몹시 아끼는 편이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 나는 착하고 순수한 H가 왜 세르히오한테만은  지나칠 정도로 완고한 자세를 고수하는 것일까를 고개까지 갸웃하면서 자주 의아해 오던 터였다.

H의 표현을 빌리면 이렇다.
서양에도 엄연히 존댓말이 존재하고 있고, 되도록 명령형 같은  건 절친하지 않은 윗사람에게는 절대로 삼가야 하는 철칙이 있는데 세르히오는 건방지게도 주인에게 반말정도는 다반사이며 명령에다 잔소리까지 수시로 해낸다는 얘기였다.
H의 가까운 곳에 가위가 있으면 한 발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본인이 집어가지 않고 대뜸 그런다는 것이다. 그러저러한 단점을 늘어 놓자면 한두 가지가 아니란다.
"세뇨라(아줌마), 거기 가위 좀 집어줄래요?  세뇨라, 화장실의 수도꼭지 좀 제대로 잠그도록 하세요.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면서 몹시 듣기 싫은 소리를 내고 있는데 안 들려요? "
특히 이 부분만은 정말 못 참겠고, 분하기도 하다며  H는  단박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흥분한다.
"아쥼마, 가게 좀 비우지 마세요.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고 되도록 옆 가게에도 놀러 가지 마세요. 아쥼마의 바이사노(동족)들이 성큼 가게에 찾아오면  세뇰(아저씨)도 없고, 아쥼마도 없는데, 세뇰과 아쥼마만 찾는다구요. 대다수가  언제 오는가, 라는 이 나라 말조차 할줄 모르면서, 세뇰? 세뇨라? 그렇게 캐물어 댈 때는 내가 죽을 맛이랍니다. 아시겠어요? 그 정도도 그런대로 괜찮아요.  꾸안도(언제)를 꾸안또(얼마)라는 말로 바꿔서 말하고 있는 것조차 못 알아채는 데다, 지치지도 않고 깐또(노래)라고까지  엉뚱한 말로  소리칠 때면 내가 정말 얼마나 쩔쩔매며 황당해지는지 알기나 하세요? "
나는 웃음이 마구 터지려는 걸 겨우 참는데 H는 아직 불만이 더 남았나보다.
"제일 괴로운 건 그 지긋지긋하게 긴 머리, 산발하고 장발인 그 곱슬머리는 진짜 못 봐 주겠어요. 부림을 당하는 주제에 부리는 사람처럼 구는 게 차마 견딜 수 없어 내가 오죽하면 그 애 하고 싸움을 다 한다니까요."
그랬다.  H가 세르히오를 다그치는 광경과 서로 다투는 장면을 나는 여러 번이나 목격했었다.
그래도 H는 아직 더 남았나보았다.
"어떤 날은 내가 이러기를 다 했어요. 세르히오, 제발 그 머리 좀 자를 수 없겠니? 아니면 묶던지, 그것도 싫으면 차라리 모자를 써라. 네가 일할 때마다 그 머리가 너무나 거추장스러워 보여 내가 다 괴롭다. 넌 왜 우리 한국인들이 싫어하는 짓만 골라 가며 하는 거냐? 너한테 잘 어울리는 이 나라 말이 딱 하나 있다. 메디오 로꼬(반미치광이)!"
H는 검지를 옆 이마에 대고 뱅글뱅글 돌리는 시늉까지 재현한다.
"하하하."
H의 그러저러한 불평들이 어떤 면으로는 꽤나 순박하게 느껴져 나는 그야말로 모처럼 쾌청하게 밝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며칠 됐을 것이다.  출근길에 인쇄소에 들렀더니, 세르히오는 까만 모자를 머리에 살짝 얹고 다소곳하고 얌전하게 유리창 닦기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H는 마치 일주일만에 만나는 것처럼 반기더니, 나를 위해 커피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세르히오! 웬일로 모자를 다 썼지?
세르히오는 이미 바깥에서 안쪽으로 바닥을 쓸어내는 중이었다.
"아쥼마가 내 긴 머리를 별로 안 좋아 하거든요. 깡패 같고 퇴폐적이랍니다. 너무 병적으로 싫어하니까……."
"세르히오!"
H의 느닷없는 고함에 깜짝 놀란 세르히오는 잽싸게 나한테 도피처를 구하듯 다가왔다.
그러나 하는 말은 언제나처럼 기발했다.
"세뇨라, 잠깐만 비켜 줄래요? 당신이 서 있는 곳을 좀 쓸고 싶거든요."
"세르히오? 손님이 계실 때 청소하는 건 대단한 실례야.  빨리 가라는 뜻인데,  안 되겠다.  청소는 다음에 하는 게 낫겠어."
"세뇨라도 참, 바쁜 세상에 무슨 미신 같은 걸 믿고 그러세요? 이왕이면 빗자루 들었을 때 해버려야죠."
" 일단은 세뇨라 린한테 사과부터 하는 게 좋겠다."
"그래요 , 좋습니다. 내가 동양의 미신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었어요. 사과해요. 세뇨라, 린!"
" 저런,  쟤가 꼭 저렇게 엉뚱해요."
마지못해 빗자루를 치우고는 있었지만, 세르히오의 한 풀 꺾인 얼굴에 점차적으로 몰려드는, 이기적으로 굳혀지고 있는 비감한 표정은 참으로 대단했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 나는 인쇄소 앞의 보도블록을 청소하면서 우리 가게 앞까지 청소해 주고 있는 세르히오를 보게 되었다.
모자는 어디다 팽개쳤는지 치렁치렁한 곱슬머리를 잔뜩 풀어헤친 채, 호스를 이용해 물청소까지 열심을 부리고 있었다.
선입관을 갖고 바라봐서인지 세르히오는 한껏 기분이 좋아 보였다.
" 세뇨라가 오늘 왜 안 보이지? 고마워, 우리 가게 앞까지 청소해줘서."
"아쥼마는 오늘 감기가 심해서 집에서 쉰답니다. 세뇰만  있어요."
" 그런데 오늘은 모자를 안 썼네?"
"아쥼마가 내 긴 머리를 얼마나 구박하는지 알기나 하세요?  이런 기회에 내 머리에게 자유를 좀 베풀어야죠. 자유, 자유를!"
세르히오는 그 긴 머리를 흔들며 노래를  부르더니 그 정도로는 모자란 지 춤까지 추기 시작했다.
나는 저절로 솟아오르는 화창한 미소를 띤 채 세르히오를 유심히 지켜보게 된다.
바람에 휘날리는 수양버들처럼 긴 머리를 소유한 , 젊음인지 개방인지 또는 무구함인지 모를 세르히오의 춤추며 노래 부르는 모습을.
사고방식의 별다름을.
세대 차이를.
동서양의 격차를.
서로 소속을 뚜렷하게 사수하려는 주종관계의 부딪침을.

세르히오는 나를 향해 약간 다가오더니 사뭇 진지해지며  마치 마음 저 끝에서 끄집어내듯 천천히 말을 꺼냈다.
"해방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신성한 권리죠. "
그는 허리를 좀 펴며 더없이 심각해지기까지 한다.
"나는 엄마의 잔소리가 싫어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도망 오다시피 고향을 떠나 왔어요. 바로 1년 전이었죠. 그런데 나는 요즘 때 아닌 의문이 생겨나 깜짝깜짝 놀라고 말아요. 어떻게 돼서 내  엄마가 동양인의 얼굴로 바뀐 채 나를  더 많이  닦달까지 하는 걸까요? "
그것은 하소연이었지만,  하소연다운 구석은 결코 없었다.
이럴 경우 특히 침묵을 지켜내는 걸 고집하는 성격이지만,  내 눈시울은 이미 눈물이 좀 글썽여지고 있었다.
나는 이윽고 싱긋 웃고 어깨를 좀 쳐들어 보이는 걸로 내 난처함을 대신했다.

H가 세르히오로 인해 괴로워하고 마음을 끓이는 건 어떤 면으로는 그만큼 세르히오를 인간답게 대하고 싶은 차원에서 그러리라고 여긴다,
격돌과 이해  사이를 그렇게나 열심히 드나드는 사람들을 상 주는 제도가 있다면 아마 H와 세르히오가 금상으로 뽑히게 될것이다.
나는 이후부터라도 세르히오에게 더좀 친절을 베풀어야겠다고 속으로 다짐을 하게 된다.
누구한테 충고하는 성격은 아니기 때문에 겉으로라도 그러다보면 H역시 조금이라도 바뀐 시선으로 세르히오를 보아낼 것만 같다.
양쪽 다 조금씩 양보한다면 각 나라의 국위선양을 위해서도 한층 더 좋을 것만  같은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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