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18일 토요일
막차를 놓치고
맹하린
막차는 여섯시에 있었다.
토요일이었다.
대략 한 시간에 한 대 정도만 왕래하는 버스였다.
하숙생활을 하며 고교 1년생이던 나는 토요일 오후 집으로 가면, 일요일 오후에는 버스를 타고 다시 하숙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 월요일 아침 일찍 기차를 타고 곧바로 등교하는 방식을 더 좋아했다. 그만큼 집에 더 있고 싶어서였다.
(우리 동네는 버스가 늦게 시작하고 일찍 끝내는 운행을 했다.)
그날은 도서관에서 책에 넋 잃고 지내다가 그만 마지막 버스를 놓치고 말았다.
그럴 경우, 기차를 타고 대장촌에서 내려 15리(6Km)를 만경강과 들녘과 강변을 끼고 걷다보면 머잖아 집에 닿을 수도 있는데, 공교롭게도 그날은 마지막 기차까지도 놓친 형편이었다.
가을이라 해는 일찍 졌다.
이미 어스름이 도시 전체에 그물과 같이 서서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하숙으로 다시 돌아가도 상관은 없었지만, 일주일 동안 쌓인 집에 대한 그리움이 머리 끝까지 차오른 데다, 주말만이라도 하숙생에게서 해방이 될 사모님에게 크게 폐가 되리라는 느낌이 앞서자, 그런 발상 자체가 벌써 거부감을 안기고 있었다.
하숙의 주인아저씨는 우리 학교는 아니지만 모 여중의 교사였다.
그래서 나는 그분들에게 선생님과 사모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리와 전주의 중간 지역에 위치한 우리 집은 이리에서는 30리(12Km), 전주에서는 40리(16Km)였다.
나는 몇 가지 방법 중에서 30리를 걸어가는 일을 기꺼이 선택했다.
집까지의 도로 근처에는 고작 7개 정도의 마을이 있을 뿐이었다.
가는 길마다 만경강과 호남평야가 오른 쪽 아니면 왼쪽으로 전개되어 있는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행로였다.
아무리 밤이라고 해도 그 아름다움이 어디로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아름다움은 어둠 속에서도 또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무렵의 시골 길엔 가로등이 설치되지 않았으므로 주위는 너무나 어둡고 흐릿했다.
그나마 달빛이 있었다.
한 때는 친구들과 동생들 더불어 떼 지어 다니며 기차통학을 했었다.
동생들은 하숙을 병적으로 싫어해서 그때까지도 통학만 고집했다.
하루에 기차를 탈 수 있는 대장촌까지 아침저녁 합하여 왕복 30리(12Km)를 걸었고, 토요일엔 버스나 기차를 타지 않고 편도 30리(12Km)를 걷는 일을 고집하던 우리였다.
그런데 혼자였다.
길은 여전히 흐릿하고 어두웠다.
어떻게 집에 닿았는지 모른다.
사람과 자동차에게 특히 겁을 먹었다.
추수철을 틈탄 어떤 농부가, 지게에 볏단을 잔뜩 얹은 채 행길을 따라 멀리서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도로 옆 풀숲에 납작 엎드려 숨었다.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할 수가 있다.
그 농부가 걸을 때마다 지게 위에서 들썩이던 볏단들의 반항하던 소리.
“ 우리 논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요. 우리 가족들과 주인에게 돌아가게 해주세요.”
볏단들은 그렇게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며 아우성이었다.
그 농부가 차츰 멀어지자 나는 풀숲에서 빠져 나와 다시 길을 걸었다.
상황이라는 붓은 얼마나 많이 우리의 삶에 색칠을 잘 해내는지.
한편의 추상화처럼 그날 밤 어둠 속을 걸어 내던 일, 그 자체가 내겐 극적인 자유회복을 의미했을 것이다.
자주는 아니고, 멀리서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비친다 싶으면 나는 다시 풀숲에 엎디기를 서너 번 반복했을 것이다.
학동리와 우리 동네 중간에 있는 도깨비 방죽이 좀 두려웠지만, 나는 어려서부터 담력이 뭔지도 모를 때조차 담력쟁이였다.
막상 도깨비가 내 앞에 나타난다고 해도 무서워하기에 앞서 잔머리부터 굴렸을 테고, 그 잔머리 덕택에 그 난관에서 빠져나오는 걸 선호했던 , 나는 그런 아이였다.
잔머리에 대해 약간의 할 말이 있다.
하숙집 사모님과, 사모님의 남자조카이며 내 또래이던 전영선과 어느 날 시장에 다녀왔는데, 선생님은 낮잠을 주무시고 계셨다.
부엌으로 통하는 안방의 고리를 잠근 채였다.
내 방은 그 안방보다 더 안에 있었다.
현관이 따로 있었지만 그 문 역시 잠긴 채였다.
기다랗고 좁던 문틈으로 선생님의 잠든 모습이 약간이나마 보였다.
사모님과 전영선이 아무리 문을 두들겨도 너무나 깊은 잠에 빠지셨는지 도대체 기척이 없어서 더 걱정들을 했다. 느닷없이 정신을 잃으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럴 때 내 잔머리는 적절한 꾀를 불러들인다.
잠기지 않았을 때는 잠김 고리가 물음표를 거꾸로 물구나무 선 모습으로 달려 있지만, 잠겼을 때는 물음표가 옆으로 엎드려 뻗친 모양의 잠김 고리였다.
과일 칼을 문틈의 밑쪽에 비집듯 넣어 힘껏 문고리를 위로 밀어 올린 나.
“열렸다!”
정작 문을 열어 낸 나는 가만히 있는데, 사모님과 전영선이 합창을 했다.
그날부터 나는 머리가 좋은 애로 하숙집과 아주 가까운 곳에 살던 전영선의 가족에게까지 부상(浮上) 하게 된다.
결국 집에 닿아서 일주일 동안 못 마신 샘물부터 두레박으로 건져 올려 달콤하게 마셨다.
하물며 그립고 그립던 집의 밥을 먹었다.
이윽고 30리나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는 얘기를 가족과 나눴다.
일요일 하루를 강과 산과 들과 수리조합둑길을 걷고 그렇게 알뜰살뜰 지낸다.
틈틈이 집의 밥과 군것질을 하고.
그때의 버릇이 쌓여 나는 일요일만은 책을 읽지 않는다.
자연만이 내게 책으로 읽히는 날인 것이다.
그때 배웠다.
일단 길을 떠나기만 하면 , 희망적인 당도가 꼭 주어진다는 것.
나는 가끔 막차를 놓치고 기차도 놓치고 칠흙 같던 어둠 속을 걸어
크고 넓고 안위롭던 내 집에 닿는 꿈을 꾼다.
결국은 내 집의 화평을 만끽하는 장면에서 깨어나 현실과 이어지는 꿈이다.
내 사유의 끈은 때로 그 시절에 닿는다.
버스를 놓친 시기도 아니고
기차까지 놓친 막막함도 아니고
칠흙 속을 걷던 시간은 더욱 아니고
도깨비 방죽을 지나던 시절은 더군다나 아니며
드디어 내 집에 도착하여
대문 쪽에 있던 작두물이 아니라
안마당에 있던 샘물과
내 집 밥과 내 집 군것질과
내 동네를 산책하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지극히 평화로운 성채.
진돗개라서 진도로 불리던 개가 지켜주던 집.
온돌까지도 정겨워 여러 번 딩굴어 보던 집.
내 평생 가장 아늑하던 집.
내 인생의 정해진 구도.
그동안 세상을 다 가져본 것처럼 산뜻했던 날들.
뭔가 허전한 것처럼 이렇다하게 남아 있는 건 적을지라도
굳이 조바심치지 않고 단지 글이나 쓰면서 살아가면
그런대로 좋다고 긍정을 담게 되는
최근의 내 일상은 그러한 흐름이다.
계속 여일하게 살아낼 것이다.
내게 더없이 살가운 조국과 이 나라.
그리고 내 환경에게 손톱만큼도 투덜대지 않으며.
바쁨과 한가로움을 번갈아 즐기며.
나의 사소한 일상과 강물 같은 감성을 사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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