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27일 월요일

나의 생일


맹하린의 생활 산책

아르헨티나 조선일보

2001년 7월 26일


나는 친구가 많다.
친구가 많다는 건 한 명도 없다는 얘기라고 누군가 단정 지어 말한다 해도 나는 친구들의 장점만을 좋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 하나하나를 다 소중하게 아낀다.
친구 W와는 동갑이고 생일까지 같은 날이고, 남편들의 성은 박 씨이며  직업도 같아서 각자의 공통점까지 여럿이다 보니까 한층 가깝게 지내는 중이다.

몇 년 전부터 W는 잊지 않고 나와 생일을 함께 보내주고 있다.
양력 7월 하순이면 W는 내게 전화를 해오는데,  우리가 식사를 나누게 될 식당과  시간을 정하고 그러느라 한참이나 실갱이를 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날 둘이서만 참 좋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남편들 흉도 좀 들썩이면서  세상 사는 얘기들을 곁들이다가  선물도 주고받고 그러는 것이다.

올해도 며칠 전이 생일이었는데,  W가 먼저 전화를 해와 우리는 각자의 시간을 서로 절충하다보니까 점심으로 정하게 되었다.
W는 전화를 끝낼 때 부탁하나를 선전포고 하듯 쏟아냈다.
"있잖아, 난 꽃다발을 별로 안 좋아 하니까 일부러 그런 걸 맞추고 그러지 마. 꽃다발은 물론이고 다른 선물도 사양이야. 우리 그냥 올해는 조촐하게 식사를  하면서 수다나 실컷 떨자."
"저런! 그랬었구나. 그런데 난 해마다 꽃다발을 했었네?"
나는 꽃다발 선물을 퍽도 선호하는 편이었다.
사실,  형편에 맞지 않게 격에 안 닿는 선물을 하거나 낭비하는 일도 일종의 사치나 허영으로 간주하며, 그런 태도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가난이라고까지 단정 짓는 나였으므로 꽃다발 이외의 다른 선물을 골라야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잠시 멍한 기분이었다.

마당에서 전화를 받다가, 바둑 삼매경에 빠져 있는 가족이 있는 거실로 돌아온 나는 고개까지 갸웃하면서  중얼대고 있었다.
"너무 이상하네. 왜 꽃다발을 싫어하는 사람이 다 있지? 그것도 여자가. 더군다나 생일까지 같은 친구가."
가족들은 이구동성으로 명쾌하고  그럴 듯한 대답을 해냈다.
"싫다면 싫은 거죠. 난 알 것 같아요. 등 따습지 않은 어떤 불편함 같군요."
"꽃다발을 기피하는 무슨 이유가 따로 있을 거야. 어쩌면 실용적인 선물을 바라는 지도 모르겠고."
나는 서둘러 쇼핑센터 '까르푸'에 가서 머그잔   여섯 개를  고른다.  값도 착했고, 운치도 있는 수입품이었다.

W는 올리보스 (Olivos)지역에서 별장과 같은 주택에 살고 있고
W는 애들이 셋이나 되므로 한 달 생활비와 학비가 몇 천 달러가 든다고 그러고
불경기의 여파로 해마다 다녀오던 고국여행을 3년이나 못 갔다고 투덜거리길 잘 한다.
하지만 나처럼 꼭 필요한 소비가 될는지 생각하면서, 안쓰는 일에 관록이 붙은 생활환경은 아닌 게 확실하다.

M식당에는 W보다 내가 먼저 도착되었다.
약속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된 W를 반기던 나는 화들짝 놀란 나머지, 눈동자가 커다랗게 떠졌다가 순간적으로 고정되는,  그 비슷한 느낌이  스멀거렸기 때문에 자리에서 사뿐 일어났다.
W는 핸드백과 선물 보따리 등은 왼손에, 오른 손엔 아주 예쁘고 정성스럽고 반짝이까지 반짝반짝 빛나는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 꽃다발이라는 게 우아하게 안겨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 껴안고 뺨을 대며 축하한다는 말을 나누고 난 후에도 나는 꽃다발을 유심히와 무심히가 엇갈리는 심정으로 번갈아 가며 보았다.
"있잖아. 꽃다발을 받을 때의 기분이 너무나  근사했어. 그래서  나도  자기를 좀 그렇게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왜!  불만이구나?"

W와 헤어지면서, 30Kg의 쌀부대조차 거뜬하게 들어 올리는 평소의 내 팔 힘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친구 W가 들려준 선물 보따리는 어딘지 모르게 골똘한 표정을 짓게 하는 무엇인가의 무거움같은 게  분명하게 끼어 들고 있었다.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W가 걷는 쪽을 돌아보니, 우연처럼 W도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나는 보따리를 잠시 땅에 내려 두고, 꽃다발과 함께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마치 꽃다발을 건네던 내 지난 몇 년 간의 생일들에게 손을 흔드는 기분이었다.

내 음력 생일에 내가 나를 축하해 주는 의미에서 계절에 맞게 옷을 한 벌 사 입고, 양력 생일이면 가족에게서 꽃나무와 클래식 음악이 수록된 음반과 함께 짧은 편지를 받던 촌스럽게 오붓했던 지난날들에까지도 손을 흔들어 주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생일.
이 언어는 현재의 내게 여러모로 격세지감을  안긴다.
손에 잡고 있는 동안에는 작게 보이지만, 놓치고 나면 곧 그것이 얼마나 크고 귀중한지를 알게 된다는 추억 가득 실린 지난날들 또한 마찬가지다.
손에 잡고 있을 때 작게 여긴 적도 없었지만, 나는 분명 상실한 것 이상으로 많은 걸 획득한 느낌으로 가득해 있기는 하다.
내 생일은 어쩌면 1년에 한 번 씩이 아니라 한 달에 한 번도 돌아오고 일주일에 한 번일 때 역시 많았을 것이다.
W 뿐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그렇게 나를 항상 배려하고 언제나 챙기면서 고맙게, 나로 하여금 문학에 더욱 치열하면서  몰두까지 할 수 있도록 유도해 주던 날들이 대부분 이었다고 보여진다.

생일이 있어 나 반짝 밝아지기도 하고
생일이 있어 나 애틋한 격정이 치밀기도 한다.

다음 해의 생일엔 W에게 내가 만든 꽃다발을 건넬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우연히도 꽃집을 인수하게 된 것이다.
내가 항상 이용하던 바로 그 M 꽃집이다.

하지만 나는 어떤 결심을 굳히게 된다.
언제나와 같이 다시 양력 생일을 가족과만 보내고 싶어진 것이다.
언제나 그래 왔듯이 음력 생일은 내가 나를 축하 하는 날로만 지내고 싶어진 것이다.
이제 W와 같이 보내는 생일은 접으려 한다.
왜냐면 아무리 친구라 해도 나는 부담을 느끼면서까지 선물을 받고 축하를 받고 그러기가 더할나위없이 버거워진 탓이다.
꽃다발만은 여전히 보내게 될 것이다.

어느 날부터 나는 티 나지 않게
그리고 고요히 살아갈 수 있기만을 바라고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고
존재해 왔고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사에 감사하리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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