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15일 수요일

밸런타인데이




    맹하린


아르헨티노들은 대략  몇 년 전부터 2월 14일에 지켜져 왔던  밸런타인데이를
Dia de los enamorados(연인의 날)로 과감하게 그 명칭을 바꿨다.
혹자는 초콜릿회사의 장난일 거라고 하고, 또 누군가는 꽃시장 측의 술수일 확률이 더 많다고도 한다.
현지인 고객 중의 몇 분에게 일부러 질문을 해본 적이 있다.
세계적인 명칭을 구태여 바꿔야 했을 가장 근접한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대답마다 한결 같았다.
어떻게 여자한테서 꽃을 받느냐는 얘기였다.
"하물며 초콜릿을?"
그들은 그렇게 반문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우리 남자의 영역을 그런 일에까지 침범당하면 곤란하죠. 있어서도 있을 수도 없는 아이러니입니다."

여름휴가철이라서 투박한 기념일로 뒷전에 밀릴 것 같아도, 한국인 2세들은 아침저녁으로는 춥고 서늘해지는 2월달에까지  바다로 떠나지는 않는다.
1월경에 1.5세대나 2세대들이 다녀오면, 2월에는 1세대들과  교대하는 게 정석이기 때문이다.
사실, 밸런타인데이에는  10대와 20대와 30대가 대부분이고,  여성은 손으로 꼽을 정도이며 거의 남성 고객이 주류를 이룬다.
40대도 없지는 않지만, 40대의 여자들은 살림 맛을 알아 가는 시기이므로 꽃에 앞서 현찰을  요구하는 추세라고 들 한다.

나는 밸런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가 닥치면,  고객에게 보답하는 의미로 초콜릿이나 사탕을 내가 먼저 준비해서 꽃에 얹어 보내기를 즐겨 실행해 왔다.
어떤 고객은 친구들을 대표해서 각각 다른 가격의 꽃다발과 꽃바구니를 여럿이나 주문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땐 4백 페소(80달러 상당)나 한 송이나 초콜릿의 비중을 똑 같이 해낸다.
내게는 똑 같은 고객이기 때문에 차등을 두기가 싫은 것이다.

어제는 다행히도 예년에 비해 꽃도 초콜릿도 턱없이 부족하여 두 번이나 더 구입해 오게 되는 이변이 있었다.
바쁜 날은 언제나 그러하듯 배달 사고가 한 둘 있다.
가사도우미들이 주인도 부재중이고 열쇠도 없다면서 현관문을 안 열어준 까닭에,  레미세로(대절용 자가용 기사)들이 꽃을 도로 들고 온 예다.
주문한 남편 분들에게 전화를 하니 퇴근할 때 찾아가겠단다.
그럴 때 나는 레미스 비용을 굳이 계산에 넣지는 않는다.
그걸 꼭 손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온 것이다.

고객의 면전에서 꽃이 안 남았다, 초콜릿도 없다, 그렇게 섭섭함을 안기는 일이 너무나  겸연쩍어 7시 반에는 서둘러 셔터를 내렸다.
하지만 그때 마침 전화를 해온  단골 고객 아드리안이 때 아닌 말썽이었다.
잘 생기고 친절하고, 봄의 날이나 어머니날뿐 아니라 직장 상사와 현지인 동료들의 꽃을 모두 도맡아 주문하고 실어가고 그러던 우리나라 대한민국 건아 아드리안.
아베쟈네다의 한인 가게에서  Encargado(지배인)로 일하는 아드리안.
문 닫을 시간에야 겨우 전화로 주문을 하던 아드리안,
아침나절에 직장의 주인과 동료들의 꽃을 일찌거니 가져가고 막상 자기 꽃은 퇴근 무렵에야 챙길 수밖에 없을 정도로 언제나 바쁘게,   밤늦도록 일하는 아드리안.
10분쯤 지나면 온다더니 9시 가까워서야 나타난 아드리안.

가게의 전화비용을 최대한으로 줄이기 위해 나는 지방, 핸드폰, 국제전화 모두를  받기만 하고 보낼 수는 없도록 전화국의 서비스를 받아온 지 벌써 7년쯤 되었을 것이다.
공교롭다. 내 핸드폰은 카드를 넣기만 하면 벌써 더 이상 잔액이 남아 있지 않다고 앵무새처럼 종알대기를 좋아해서 카드는 어쩌다 넣는데.
아들의 핸드폰은 하필 카드의 잔여액이 아슬아슬 달랑거렸으나 다행히 겨우 신호만  전달은 되었나 보았다.
이웃 가게 모두 이미 문을 닫은 상태였다.
9시가 넘은 시각에 끼이익~ 급정거하면서 아드리안은 도착했다.
"죄송합니다. 공장에 꼬르떼(바느질을 필요로 하는 재단만 끝낸 미완성 의류) 일감을 가져다주고 그러는 과정에서 그만 잊고 말았어요. “
그의 음성은 자동차의 엔진만큼이나 가르랑 거렸다.
목에 모래가 몇 개 걸린 것처럼 깔깔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아드리안 같았으므로 나는 웃고 싶은 여력이라고는 남아 있지 않았는데도  미소를 남발하며 꽃바구니를 건네고 있었다.
그가 너무 미안해 있어서 내가 더 미안했을 것이다.

마지막 시간의  현지인 여인 두 명은,  서로 일행인 게  분명하면서 전혀 일행이 아닌 것처럼 교대로 왔었지만, 더 이상 꽃이 안 남았다는 설득 위에 웃음까지  버무려서 살살 되돌려 보냈었다.
왜냐하면 그녀들은 지폐지만 가짜를 내고 큰 거스름을 받아가려는 '거스름 도둑들' 이기 때문이라서다.  그녀들은 꼭 자가용으로 움직인다.
또한 현지인답지 않게 빨리빨리라는 노래를 잘 부른다.
기동력까지 갖췄겠다, 어서 튀기 위해서다.

이만하면 나도 관록이라는 게 붙은 건가?
꽃 장사와 고객 관리와 도둑 퇴치에 있어서…….

이상하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끝내고 자리에 누우면 서로 스크럼을 짠 피로의 누적은 서둘러 도망치고 새로운 에너지가 채워지고 있음을 스멀스멀 감지하게 된다.
나 이런 환경이라서 나와 나이와 근심을 모르고 시적시적 잘도 살아가나 보다.

아침이 되려면 아직 3시간 정도 남았다.
나는 정상이 아닌 게 확실하다.
어제 그렇게나 쉬지 않고 일했으면서 새벽이 너무 거뜬하고 상쾌하다.
네 시 반에서 다섯 시에는 일어나 뭔가를 써내게 되는 아침이다.
어차피 인생의 아침은 희극이나 비극 아니면 무사태평이다.
내가 정신을 함빡 몰두할 수 있는 노동이 있어 나는 매번  감사롭다.
내게 있어 일은 바다에 닿은 것과 같은 느낌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바다에 닿았을 때는 바다만 바라보게 된다.
일 앞에서는 일만 생각나서 일이라는 존재가
꼭 바다처럼 여겨져 생각 할수록 참 근사하다.

굳이 떠나지 않아도
내 시야는 지금 온통 바다다.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바다.
그 생동적인 바다가
오늘도
아름답게 출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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