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20일 월요일

신비로움




   맹하린


비가 내리는 오후,  나는 한길로 난 앞마당에 고즈넉이 앉아  땅을 겨냥하듯 떨어지며  작은 갈색 꽃송이들을 순식간에 만들었다가 찰나적으로 사라지고 마는 수많은 빗방울무늬를 몹시 도취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나는 아홉 살이었다.
비에 갇혀 친구들에게 찾아 갈 수도 없었고, 친구를 대신해 줄 수 있는 동생은 우기(雨期)가 안겨주는 졸림에 참패를 당해 이미 낮잠 중이었다.

그렇게 마당에 한바탕 떨어지는 빗방울들과, 그 빗방울들이 내가 앉아 있는 처마 밑으로 모여 작은 시내를 이루며 떠내려가는 물줄기를 바라보던 나의 눈길은 우연히 마당 가운데로 옮겨졌다. 새끼 붕어 한 마리가 ,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의 앞마당 한복판을 팔딱이면서 이리저리 튕겨 오르는 광경을  불현듯 발견하게 된 것이다.

순간적으로 놀라게 된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강으로 내려가는 비탈길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빗방울 꽃무늬들까지 유심히 살펴보는 일을 여러 번 거듭하였다.
비바람이 가져왔을 수도 없고, 하늘에서 떨어졌을 수도 없고, 강에서 거슬러 올라 왔을 수도 없고, 땅에서 솟아날 수는 더군다나 불가능한 일이고.
그렇게 의문을 갖고 집착하니까 아무리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도 해답이 안 나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뒤집어 생각하기로 작정을 굳히자는  것이었다.
비바람이 가져왔을 수도 있고
하늘에서 떨어졌을 수도 있고
강에서 팔딱이며 달려 왔을 수도 있고.
가장 근사치에 가까운 해답이 생각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낚시하던 사람이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비를 피하느라 뛰어가다 한 마리 떨어뜨리고 갔을 수도 있고' 였다.
그럴 경우, 나는 그 의문을 어른들한테 캐묻는 아이는 아니었다.
되도록 모든 걸 내 상상에 맡기는 걸 특히 좋아했으므로.

고모의 심부름으로 친척이면서 친구인 명자 집에 다녀오는데 전방(前方) 50미터 쪽에서 참새 한 마리가 낮게 날아오고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나는 무의식중에 양팔을 펴서 몰이군의 자세를 취하며 새를 잡는 시늉을 했는데 웬일이었을까. 참새는 내 왼손의 바닥에 부딪쳐 순식간에 땅에 떨어지고 있었다.
재빨리 엎디고 손에 들어 살펴본 참새는 다행히 주둥이만 약간 다쳤을 뿐 , 상처까지는 안 입어 보였다.
눈을 멀쩡히 뜬 장님참새는 아니었을 텐데,  그렇게 중얼대며 집에 가져갔다.
상자에 넣어두고 사흘 동안 약을 발라주며 보살피다가 그만하면 다 나았을  것 같을 무렵이 되자,  굳이  다친 장소까지  가서  날려 보냈다
모이를 통 먹지 않아, 걱정하는 나를 보고 할머니가 한 말씀 하셨었다.
환경이 낯설거나 주둥이를 다쳐서 못 먹는 게 아니고 ,짐승들은 아프면 모이를 멀리하며 자연치유를 해낸다는 매우 간결한 설명이셨다.
이 얘기의 핵심은 제비 보살피기에 치중했던 흥부의 이야기에 계도(啓導)되어 참새를 낫게 해줬다는 데에 있지 않고, 순간적으로  팔을 벌린 손바닥에 운 나쁘게 주둥이를 다친 참새와의 치기어린 충돌에 대한 죄책감에 있다.

구태여 이런 식으로 열거하지 않더라도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여러 형태의 신비로운 일들은 예고도 없이 자주  일어났던  것도  같다.
신비로운 일은 신비로움, 그대로 간직해 두려한다.
신비라는 건 나물을 캐고 햇볕을 즐기는 것처럼 한가한 의미는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내가 써내는 글들이 과연 나와 다른 사람에게 한 치라도 이로운 건지 그런 건 되로록 되짚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난 아무도 알 수 없는 나만의 어떤 긍지를 지니고 있는 것만 같은 바로 그 점이 내게는 무엇보다 커다란 힘이기 때문이다.
나는 자주 상처를 입지만, 그 상처를 치유하는 데 1시간도 안 걸리는,  내 타고난 천성을 사랑하고 아낀다.

나는 마음이 아프면 구태여 밥을  굶지는  않지만 책은 굶는다.
그리고 날마다 글을 쓴다.
한때는 소설을 붙잡고. 또 한때는 시를 붙잡으며 , 최근처럼 펜 닿는 대로 쓰기도 한다.
그게 내 유일한 자연치유 방식이다.

틈틈이 읽던 <의뢰인>을 끝내고,  나는 지금 제럴드 그린의 <홀로  코스트>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행복한 무명시절>을 교대로 읽고 있다.
물론 예전에 읽었던 책들이다.
나는 때로 그런다.
이미 읽었던 책을 읽기도 하고, 두 권의 책을 같은 시기에 번갈아 읽어 내는 걸 즐긴다.
언제라도 다시 책을 읽을 수 있어 나는 고맙고 행복하다.
그리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새벽.
이런 새벽 때문에 사람들은 여행을 떠나고
나는 글을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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