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12일 일요일

버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2000년 재아 호남향우회 회지에 게재


    맹하린


남미의 주요 국가들이 여럿이나 인접되어 있는 아르헨티나 국경에선,  이웃나라를 여행할 경우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는 무비자 혜택을 나라마다 주고 받고 있다.
하지만 몇 나라는 유독 한국인만을 예외로 취급하며 국경에서 따로 비자를 받게 하고 까다로운 절차까지 밟게 만든다.
비자를 받고 나면 하물(荷物) 검색이 실시되는데, 차안은 상관없지만 자가용의 트렁크나 관광버스의 짐칸은 필수적으로 조사를 받게 돼 있다.

3년 전 가을, 어느 단체의 개별 초청을 받아 우루과이 온천관광을 다녀오게 되었다.
그 모임엔 숙면(熟面)의 여인들이 대부분이었고 나의 문우이자 모 일간지의 사주되는 L실장도 눈에 띄어 나는 그 모임의 일원이나 되는 것처럼 금세 편하게 어울릴 수가 있었다.
관광회사의 한국인 직원은 버스가 떠나기 전 한바탕의 훈시(訓示)를 했는데 , 한국인 낚시꾼들의 무질서가 그 예로 들춰졌다.
"관광회사의 특별한 지시가 없어도 아르헨티노들은 버스에 탈 때 쯤이면 평상복으로 바꿔 입고 어획물들을 짐칸에 넣는 일을 기본으로 해냅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인들은 비린내 나는 낚시장비는 물론이고 붕어나 잉어까지도 차안으로 들고 타려고 하시죠. 그래서 운전기사들과 적잖은 마찰을 벌이게 됩니다.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우루과이 국경에선 과일종류를 무조건 압수합니다. 그점 꼭 명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치나 마른 오징어도 문제지만 전통음식이라고 봐주는 편인데, 과일만은 방역(防疫)을 위한 그들만의 대책이니까 제발 반출금지임을 꼭 염두에 두라면서 그 직원은 다시 한 번 토를 달며 강조하기를 잊지 않았다.
그 한국인 직원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여기저기서 우려와 탄식과 갑론을박이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 짐칸에 이미 두 상자의 사과가 실린 모양이었다.

우루과이 국경에서 비자 받는 복잡한 절차를 끝낸 건 그나마 수월한 일이었다.
주술을 외우며 요행을 기대하던 임원들은 검색을 지켜보려는 의도에서 버스를 하차했는데, 짐칸을 열자마자 김치냄새와 밑반찬 냄새를 압도한 건 새콤달콤한 사과들의 향기였나 보았다.
가차 없이 사과상자를 압수당하게 된 건 마땅하고 옳은 일이 된 것.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남미인 들은 그럴 경우 절대로 상대방을 쓸까스르지 않는 기본적인 예의를 갖췄다는 점이다.
진지한 설득작전으로는 승산이 적겠다고 파악됐는지 임원들은 이내 분통 터지는 표정들을 지었다. 그뿐 아니라 합세하여 대들기 시작했다.
반박이 점점 거세어질수록 전혀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정중한 태도로 대처하던 검사원들은 이대로는 못 미더우니까 차안까지 조사해야겠다면서 이미 차안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S실장과 나는 도대체 상대가 못 되는 그 의견충돌을 속수무책 지켜볼 수밖에 별다른 도리라고는 없어 보여 내심으로 참 안타까웠었다.

애꿎은 사과 두 상자는 속속 오고 가는 관광객들이 훤히 내다보는 장소에서 소독약이 뿌려지기 일보직전의 상태에 직면하기에 이르렀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남미인 들은 남의 일에 드러내 놓고 구경하기를 꺼리는 지독한 개인주의자들이라는 점이다.
임원들의 항의가 별다른 효과를 못 보는 듯 싶었던지, S실장은 내게 짧은 신호를 보내며 먼저 차에서 내렸다. 연장자인 그녀의 눈짓에 나도 자동적으로 차에서 내려야 했다.
사근사근 여성스러우면서도  논리 정연한 면모가  더 강한 S실장은 검사원들에게 보다 삭삭 하고 친절한 음성으로 양해를 구하기 시작했다.
S실장과 나는 미리 중요한 행사의 사회를 함께 보기로 약속이라도 해낸  것처럼 서로 말을 조리 있게 나눠서 건네고 있었다. 그녀가  검사원들을 향해 한소절을 얘기하고 나를 쳐다보면, 내가 다른 한 소절을 검사원들에게 건네고 그녀를 쳐다보는  방식이었다.
" 우린  사전지식이라고는  전혀 없었기 때문에 진정 본의 아니게도 당신들의 법에 저축되는 사건을 초래하게 되었나 봅니다.  그점 매우 죄송하게 생각하는 중이니 가능하다면 약간의 배려나마 베풀어 주 시기 바랍니다."
"조금은 아시리라 여겨집니다만, 우리 한국인들은 모두 하나같이 부지런함을 추구하는, 어떤 면으로 보면 일 중독자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 일하면서 생활해야 한다는 건 우리 한국인의 자랑스러운 민족성이기도 하죠."
"누구나 피땀 흘려 일하는 걸 생활원칙으로 삼아왔기 때문에, 우리 한국인들에게 있어 먹는 음식을 함부로 버리는 일은 철칙에 가까운 금기(禁忌)사항이 되었지요."
"뭐랄까, 낭비도 낭비지만 일종의 죄악으로까지 간주하는 관습이 우리도 모르게 뿌리박히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이 사과를 우리가 한 두 개씩 먹고 떠나도, 당신들의 업무에 차질이나 지장을 끼치는 일이 아니라면,  부디 그리 할 수 있도록 선처해  주면 고맙겠는데……."

분명히 말하건대 나와 S실장은 그때 그렇게 나오면 설마 그들이 사과정도는 적당히 통과시켜 주지 않을까 그런 착각 따윈 없었던 게 분명 했다.
당장 버려지게 될 사과 두 상자가 아깝기 짝이 없다는 평소의 절약정신에서 급조된 제안이었을 확률이 더 크다.
결국 차안까지는 들고 오를 수 없으니까 장소를 옮기지 않는 선에서 그렇게 하도록 하라는 지시에 의해,  하필 쓰레기통 옆에서라도 당장 해결을 봐야 했다.
검사원들의 허락을 전해들은 50여명의 여인들은 순식간에 하차했다.
S실장과 나는 마치 '사과 빨리 먹기 대회' 에 심사를 나온 위원들처럼 검사원들과 함께 말없이 지켜봐야 했다,
허둥대듯 웃으며, 또는 뭉텅뭉텅 사과를 베어 먹고 있는 여인들을 일종의 비장미 까기 느끼며.

사람이 먹는 과일을 쓰레기통에 집어넣고 소독약을 부어버리면 아까운 건 물론이고 죄를 짓는 기분이 들 거라는 사고방식을 조합하여 서둘러 사과 먹기를 끝낸 우리의 대단히 용감하면서 거룩하고 , 떳떳하고,  의젓하게까지 보이는  일행들은 드디어 버스에 올라 차가 흔들리도록 커다랗게 웃어댔다.
두 개의 사과를 넓지도 않은 치마폭에 감춰들고 올라선 어느 여인의 득의양양한 기지(奇智)
에는 특별상이 주어졌다.
미리 준비했던 상품 중에서 "재치상'이라는 제목으로 주어지게 된 것이다.

나라와 나라의 경계(境界)에서 꼭 지켜야 할 국경 법을 너무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떼까지 쓰며 사과상자를 묻혀 들여가려던 동양의 작은 아침의 나라 여인들.
그녀들을 상대로 고단수의 깔끔한 임무를 나름대로의 대응으로 굳건하게 실현하던 우루과이 측 검사원들 앞에서 세상에,  외국에 나와 살면서까지 자랑스럽게 알뜰살뜰한 우리 대한민국 여인들의 우직과 소박함이라니!
그런저런 복잡한 검사 과정을 여러 번 부대끼면서 지내는 중이어서였을까.
무한정하게 펼쳐진 갈대숲과 한국을 닮은 산야와 강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어 집과 가족과 일상생활의 자질구레한 문제들을 거의 잊고 지냈으며 참으로 의미 있었던, 즐거움과 폭소의 연속이었던 2박 3일이었다.
사과사건 때문에 엎치락뒤치락 더 많이 웃어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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