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7일 화요일
우리라는 작은 마당에...
맹하린의 생활 단상(斷想)
아르헨티나 중앙일보
2007년 11월 3일
역사학자 토인비가 즐겨 쓰던 예화에 '청어 이야기'가 있다.
'신선한 청어를 즐기는 영국인을 대상으로 여러 원양수산업체가 경쟁을 시도했는데, 배 안에서 기진맥진 지친 청어들은 신선도가 형편없었다.
그런데 유달리 한 업체만이 싱싱한 청어를 들여와 많은 수익을 올렸다.
결국 관계자에 의해 그 비결이 밝혀지게 되었다.
청어들 안에 살아있는 큰 숭어를 넣었다는 것이다. 청어들은 이 숭어의 먹이가 되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도망치고 쉴새없이 움직이는 바람에 싱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가 지인들에게 가끔 하는 얘기 중에는 감나무에 관한 게 있다.
친구 K는 본국 전주에서 시인으로 활약 하고 있다
(지역문학상을 거의 열 개쯤 받았을 것이다.)
고등학교 다닐 때, 시험공부 한다고 그녀의 집에 몇 번인가 갔었다.
건설국의 공무원이던 아버지와 국전작가이던 서예가 어머니의 보호 아래 그녀는 6남매가 북적대는 가정에 살고 있었다.
K의 집 마당에는 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그 감나무가 턱없이 커서가 아니라 마당이 너무나 좁았기 때문에 이렇다 할 공간이 별로 없었다.
여러 개의 마당을 지녔던 우리 집에 비하면 참으로 보잘 것 없는 환경이었다.
하지만 K의 시 속에는 그 좁은 마당에 꽉 들어찬 감나무가 크고 아름다운 정원 한 켠을 장식하고 있는 우람찬 한 그루처럼 감동적이고 산뜻한 모습으로 자라며 지금껏 땅과 하늘을 향해 뿌리와 가지를 한껏 뻗어내고 있는 것이다.
K가 보내준 여러 권의 시집 중에서 잠시 그녀의 싯귀를 인용해 본다.
'달빛 시린 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매달린
홍시 위로 무서리 내려앉는 소리'
'우리 자랄 적 아이들 세상은 울안이었어
앞마당 곳간 옆에 감나무 잎삭들 마저
우수수지고 마당가에 여린 햇살 뽀작거리면'
내가 굳이 이렇게 K의 싯귀를 예로 드는 건
K의 집 좁은 마당을 가득 차지하고 있던 감나무처럼
내가 세상에 나온 기념으로 아버지가 심어 준 호두나무처럼
한인타운의 중앙 분리화단에 우뚝우뚝 자리 잡은 도토리나무들처럼
우리 인간의 의식 속에는 때로, 각자의 나무가 자주 서 있고 향기까지 선물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함이다.
이민역사 40여년이 훌쩍 흐르다보니 경제적 기틀을 달성한 교민들이 의외로 많아졌다.
아베쟈네다 지역에 진지를 구축한 젊은 군단에게서도 고뇌의 한숨에 섞여 간혹 승전가 비슷한 쾌보까지 바람에 실려 오는 이즈음, 로망롤랑이 보낸 편지에 답장으로 보냈던 톨스토이의 주체사상이 부각되듯 떠오르게 된다.
“예술가로서의 참된 조건은 예술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인류에 대한 사랑이다.”
나는 역설하여 이렇게 주장하고 싶어진다.
“경제인으로서의 참된 조건은 경제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인류에 대한 사랑이며, 단체장이나 봉사자로서의 참된 조건은 명예나 권위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인류애에 대한 사랑이다.”라고.
우리 기성세대의 생애가 앞으로 10년이나 20년, 아니면 30년이나 40년 정도 남아 있다할지라도 그다지 많은 기간이라고는 그 누구도 단정할 수 없다.
거창하게 인류애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제 우리의 가족부터 기꺼움과 자애로움으로 돌보면서 더불어 이웃을 아끼고, 더 나아가 교회와 한인사회등을 챙겨 나가야 하리라.
나야 진즉부터 인생이라는 불가항력의 굴곡에 여러 차례 무릎을 꿇어온 터수라서 작은 일에 더 행복해 하며 누구와 비교 따위를 안 하는 것을 철칙으로 여기며 살아왔다.
그런 이유로 나는 언제나 자유인이며 매사에 유유자적이다.
돌이켜보면 우리 이민자들은 그동안 너무 각박한 고난도의 터널을 지나오지 않았나 싶다.
지금껏 너무 일에만 치우치며 살아왔던 게 아니었나 하는 헤아림도 생긴다.
그러한 와중에서라도 어떤 계기로든 책임을 떠맡게 됐다면 기왕지사 봉사라는 짐을 걸머지게 된 이상 솔선수범하여 모범적 선행을 실천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만 할 것이다,
내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교민을 위해서.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소탈하면서도 평화로운 세상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먼 여행에서 돌아와 내 집만의 안락함을 기쁘게 누릴 때처럼.
일부 교회들과 한국학교, 그리고 부인회에서는 우리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을 위해 매우 진취적인 행사를 개최하는 일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한다.
다시 한 번 유념하여 기필코 되돌아 볼 일이다.
우리라는 마당은 비좁을지라도 우리 후세들인 푸르른 나무들은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는지를.
비록 우리가 작은 마당에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일지라도, 우리의 2세들의 의식 속에는 언제나 크고 우람한 나무로 서 있을 수 있도록 우리 이제라도 새롭게 각오를 다지며 씩씩한 나무가 되도록 진솔한 날들을 조성했으면 하고 간곡히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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