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23일 목요일

동서(同壻)



                       맹하린
        

엊그제 점심 무렵, 콩나물비빔밥을 하려고 파 송송 썰며 양념장을 준비하는데(콩나물 비빔밥엔 고추장양념보다 간장양념이 제 맛을 낸다.) 전화벨이 울렸다.
미국의 캘리포니아에 사는 작은 동서였다.
크리스마스카드나 연하장을 해마다 보냈었는데 올해는 어영부영 못 보내서 미안하다는 그녀의 서두를  시작으로  장장 40분이나 서로의 밀린 얘기를 주고받았다.

동서는 87년도에 아르헨티나에 이민을 왔었고,  이곳에서 10년을 살다가 미국으로의 재이민을 97년도에  단행했다.
순전히 막내에 대한  교육열  때문이었다.
큰 애 장일과, 둘째 문경은 본국의 한양대학에 유학을 시켰었다.
막내 정훈은 현재 미국에서 정형외과 레지던트다.

장일이 대학을 졸업하고,  도미니카 공화국에 소재한 본국 모 회사의 지상사에 취직 되었을 때, 동서는 제일 먼저 내게 전화해서 이게 모두 형님 덕택이라고 내게 극찬을 아끼지 않으며 고마워했다. 우리 덕택에 이 나라에 이민을 왔었고, 그런 연유로 서반아어를 제대로 익혀서 취직이 누구보다 빨랐다는 뜻이었다.

시동생은 참 아르헨티나를 맘에 들어 했다.
팔레르모 지역에서 슈퍼를 하면서 몇 십만 달러쯤 저축하여 미국으로 떠났지만 진정 가기가 싫다는 언질을 틈만나면 했었다.
순전히 동서의 고집에 의해 미국으로 갔었는데  언제까지나  이곳을 잊지 못했나 보았다.
워낙 술을 좋아했지만 미국에서는 특히  저녁마다 술을 들면서, 혼자라도 아르헨티나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형님네 집에 가서 살겠노라고 밤마다 읊더니 재이민 간지 3년째인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는 기별이었다.
미국생활에 적응이 안 되어 그런 건 아니고, 단지 떠날 시기가 되어 그리 된 거라고, 나는 동서가 전화해서 울먹일  때마다 그렇게나마  위안을 건네고는 했다.

동서는 몇 년 전에 3층집을 구입했는데, 뒤의 정원이 숲처럼 울창하다고 언제 와볼 거냐고 자주 전화에 대고 채근하듯 묻고는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 들수록 집을 줄이는 경향이 많은데 동서는 밤에 혼자서 잠을 자는 집이라도 우선은 그런 집을 가져 보는 게 소원 중에 들어 있었다니 뭐라고 해서도  안 될 것이다.
가진 대로만 샀더라면  별일이라고는 없었을 텐데, 동서는 미국사회가 원래 그런 곳이고 이왕이면, 하고 욕심을 부리다 보니까 융자까지 얻었다는 설명이다.
잘못 투자할 경우, 몇 십만 달러를 날리는 건 시간문제인 나라가 미국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게 된 시동생과 동서는 그동안 취직생활만 열심히 해냈었다.


동서는 새벽 6시에 자동차로 집을 나서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출퇴근하며,  노인들 간병인 일을 직업으로 갖고 있다고  했다.
한 번 다녀가고 싶은데 일자리를 놓칠까가 염려 되어  도저히 못 오겠다고 언제나 그 소리만 거듭하고  거듭한다.
어떤 땐 아기를 돌보는 일을 한다고도 그런다.
밤에는 교회의 신자들 주문에 의해 파머도 해주고 머리도 자르고 그러는데, 미국사회는 어떻게 된 일인지 재물이 들어오는 것보다 나가기 바쁘다는 투정이  더 많다.

동서가 영업하던 이곳 팔레르모 지역은 자고새면 집값이 오르고 있고,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는 첨단의 땅이 되었다.
동서가 소유했던 팔레르모 아파트 단지 주위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Soho(영국 런던의 한 지역)이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Manhattan이 되었다고 메스콤은 가끔씩  떠들어 댄다.
나는  그 사실에 대해서 동서에게는   새치름  숨기게 된다

동서가 이곳에 살 때 나는 멸치젓갈을 50Kg 정도 담가 선물한 일이 있다.
식구 수도 많고, 반찬이 없을 땐 쌈장으로도 먹는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였다.
그게 그리도 맛있다고 동네방네 소문내면서 교회 반모임 교우에게 그 맛을 보여 준다고, 글쎄 박커스 병 하나에 가득 담아다 준 모양이다.
그때 그분이 일부러 내게 전화해서 한참이나 웃었는데, 그 사실은 알 만한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회자되었었다.
동서는 그토록 알뜰살뜰한  살림꾼이다.
자기는 잘 쓰면서 남에게만 그런다면 흉이 될 수도 있겠지만, 동서는 자기한텐 절대 안 쓰고 남한테는그 다음으로 안 쓰니  누가 뭐라해도 일단은 봐 줘야 한다.
자신을 위해서는 옷도 안 사 입고, 허튼 돈 한 푼도 축내지 않으며, 오로지 자식들한테만 아낌없이 희생하는 사람이 바로 동서다.

나는 어떤 때 동서가 참 이해가 안 될 때가 많았었다.
김치도 내가 담근 김치가 더 맛있다면서 심심하면 배추와 무를 툭 던져 놓고 잽싸게 도망친 뒤,  이튿날 저녁나절이면 헤헤헤 웃으며 찾으러 온다.
누가 맏동서인지 참 헷갈리는 국면 비슷한 상황을  맞게  되던 날들이 예전엔 분명 있었는데....
그렇지만 나는 동서를 아랫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자식이나 동생으로 여겨서야 미움이나 원망을 금세 전환시킬 수  있었다.
왜냐하면 동서는 한국에 있을 때, 내가 중매해서 갓 고등학교를 나온 스무 살에 내 시동생과 결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그래도 이 나라보다 문화생활이 더 발달된 나라니까 참고 잘 살도록 해."
내가 그런 식으로 부탁처럼 말하면 동서는 전화에 대고 모르는 소리 그만하라는 듯 생뚱맞게 소리를 꽥 지른다.
"문화생활요? 그런 건 아르헨티나에 있을 때나 누렸는  걸요.  나는 한국보다 사실 아르헨티나가 더 그립다구요!"
" 세상에! 그렇다면 오면 되잖아. 왜 동서는 동서를 위한 삶을 못 살고 그러는 건데?"
"내가 하고 싶었던 일들이 바로 내 자식들이 살고 있는 일이고, 그러면 된 거죠. 후회는 없어요. 그렇게라도 만족해요."
"장하다, 대한민국!"
나는 엉뚱하게도 그렇게 표현하며 결국 웃어 줄 수밖에  없다.
" 정훈이의 뒷바라지만 아니라면 나도 아르헨티나에 가서 살고 싶어요. 그곳은  정말 시골스럽고 정이 넘치고, 그리고 좋은 곳이죠.  맞아요,  형님.  그곳이 바로 천국이에요."
" 오고 싶으면 언제라도 와.  일단은 다니러  한 번 와도 되고."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이제 나한테서 김치는  못 담아 갈 거다. 내 김치도 어제 6개월 만에 담근 걸. 나는 요즘 즉석으로 간단히 해 먹고 따로 국밥이 아니라, 따로 안 반찬으로  살거든. 어제는 파스타. 그제는 카레라이스. 내일은 생채와 청국장찌개. 김치가 좀 익으면 날마다 그걸 이용해야지. 하루는 김치찌개, 하루는 김치볶음밥, 하루는 김치전. 그렇게.)

그동안 나도 참 어설프게 살아온 게 피부로 느껴진다.
아까워서 시먹지는 못하고, 그리도 즐기는 김치담기를 6개월이나 외면하다니.
식품점의 김치들은 하나 같이 조미료 맛이 너무 느껴져 손도 마음도  잘 안 가고는 했었다.

겨우 풀리기 시작한 내 글의 넋두리를 오늘은  이만 묶고,  내일 다시 또 풀어 내려고 한다.
(날마다 써내니까 적당히 써야 하리라고 반성하게도  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인생이란 건 참,  그리 호락호락하지가 않은 것 같다.
오늘도 미리 인생에게 무릎을 좀 꿇는 심정으로 친구의 메시지를 읽어 냈다.
참 맑고 밝고 환한, 그런데 눈물이 좀  글썽여지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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