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11일 토요일

열어 보아라




      맹하린


'쟌톰이라는 영국소년이 있었다. 고등학생의 신분인데도  너무 공부와 담을 쌓고 사니까, 그의 부모는 속을 무척 태웠다.
소년의 아버지가 협상을 제시했다.
"나는 네가 지금이라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옥스퍼드 대학에만 들어가 준다면 나중에 너의 큰 소원을 꼭 들어주겠다."
평소부터 빨간 스포츠카를 갖고 싶었던 쟌톰은 그때부터 열심히 공부하였고, 그 결과 영국의 명문 옥스퍼드 대학에 합격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합격증을 받았을 때, 쟌톰은 먼저 아버지에게 보여 드렸고 어서 빨간 스포츠카를 사달라고 말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성서를 가져다주면서 루가 복음 11장을 읽어보면 된다고 하셨다.
쟌톰은 분노가 치밀었다.
약속이 틀리지 않은가.
그래도 아버지는 끝끝내 루가 복음 11장만 고집하셨다.
약속을 지키지도 않고 성서 읽기를 강요하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워,  쟌톰은 아버지에게 미운 감정까지 생기는 걸 간신히 참아 냈다.

입학식이 있을 때에도 손수 성서를 챙겨 주면서  기숙사에 닿으면 반드시 루가 복음 11장을 읽어야 한다고 거듭  그 말씀만 반복 하셨다.
하지만 쟌톰은 약속을 깬 아버지가 섭섭해서 성서는 결코 읽을 생각도 없었고 , 되레   한 구석에 처박아 두고  일부러 외면하게  되었다.
4년의 학창 시절,  그리고 방학이 되어 집에서 지낼 때조차, 아버지는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성서를 읽어야 한다고만 우기셨다.

졸업식을 마치고 ,기숙사 짐을 정리할 때,  학교에 오신 아버지는 성서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아들이 보는 앞에서 루가 복음 11장을 펼쳤다.
 거기엔 빨간 스포츠카를 사고도 남을 수표 한 장이 꽂혀 있었다.'

아버지가 그렇게도 두드리고 열어보고 찾아보라고 했는데도 쟌톰은 오로지 미움이라는 한 가지에만 집착한 관계로  많은 세월을 한시도 원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지냈던 것이다.

나는 내가 생업과 씨름을 하기에는 너무나 경제관념이 협소하고 빈약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어디서나 아무거나 사지는 않더라도 어쩐지 저축이 잔뜩 든 통장을 지닌 것처럼 당장은 그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는 뿌듯하고 부유한 느낌을 언제나 간직하며 산다.

나는 연금신청도 하지 않았다.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에게 돌아가야 할 몫이라고 단정하기 때문이다.

지인 하나는 이 나라에서 제법 재산을 축적했던 분이었는데, 아베쟈네다에 있는 몇 개의 가게와 집을 몇 년 전에 처분하였다.
그리고 본국에 환국하여 전라남도 어느 도시, 경치 좋고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펜션을 운영하며 생활하고 있다.
(도시의 이름은 알지만 비밀에 부친다.)
문제는 최근의 그 내외가  아르헨티나에서의 생활을 몹시 그리워 한다는 것이다.
도우미를 구하기도 쉽지 않아서 투숙객들에게 직접 식사를 제공해야 한다는 점이 가장 힘들고, 생각했던 것보다 손님도 많지 않다는 얘기였다.
아직은 50대라서 도 닦고 사는 것만 같은 그런 생활이 정신적으로 많이 고달프다는 것 같았다.

나는 내 나이 같은 걸 언제나 잊고 많은 걸 버리면서 살아왔다.
사람이 자유로움을 얻으려면 잘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다.
난 지금도 많은 것을 부여 받고 있을 것이다.
뭔가를 얻으려면 다른 뭔가를 잃어야 한다는 말은 요즈음의 내게 진리처럼이 아니라 곧 진리다.
사람은 어차피 약간의 자기 의도와  약간의 세상 진리로 살아가고 행동하게 되어 있다.

내가 되도록 발가락이 가장 잘 들어나 보이는 슬리퍼를 선호하는 첫째 이유는,  더 낮아지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대지를 더 가깝게 감촉하려는 의도도 많을 것이다.
그 무엇보다 더 확실한  모티브가  된 것은 25년 동안 너무 팍팍하고 너무 힘겨운 발걸음을 걸어 왔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식의 슬리퍼는 날이 추워지면 결코 신을 수 없는 게 단점이다.
그리고 바닥에 물이 있다거나 비 내리는 날엔 절대로 신으면 안 된다.
(어느 책을 읽다가, 절대라는 말은 절대 사용하면 안 된다고 해서 하하 웃은 적이 있다. )
아무리 그래도  슬리퍼니까 절대라는 말을 사용한다.
겨울엔 절대 안 신지만 나는 바닥에 물이 있거나 비 내리는 날엔  절대적으로 신는다.
안 넘어지려고 살금살금 걷는 일도 어떤 면으로는 스릴 만점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혹은 내가 이 세상에 거저 태어난 게 아니고 어떤 섭리에 의해서 보내졌다고 한다면 자신만의 쾌락이나 자만에 정신을 앗기고  사는  건 진정 두려운 일의 하나가  된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해답이지만 신의 약속이 발견되지 않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껏  쟌톰처럼 꼭 읽으라는 성서를 책장 한 구석에 방치해 둔 날들을 살아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라도 두드리고 열어 보고 찾아보는 생을 살아나가고자 한다.
겉으로 발견되지 않는 해답이다.
신의 안 보이는 약속 아닌가.
당연히 발견하지 못할 때가 주어지는  것이다.


댓글 2개:

Oldman :

저도 앞으로 더 성서속에 감춰진 귀한 것들을 찾아 열심히 뒤적이겠습니다. ㅎ ㅎ

나이를 먹어 갈 수록 버리는 연습이 더욱 필요한 것 같아요...

maeng ha lyn :

오늘 트윗하러 들렀더니 Sinenmul이라는 분이 이런 글을 올리심.

"한 손은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에요."

오드리 햅번

버린다는 건 누군가를 돕는 손이 된다는 뜻도 포함 될 듯 합니다.
딱히 물질이라기보다 아픔을 함께 하는~
넵, 우리 조금씩 버리며 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