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3일 금요일

우리의 둥지는 아늑한가?



맹하린의 수요칼럼

아르헨티나 조선일보

2000년 4월 19일 수요일

월요일은 원래대로 먹고
화요일은 화끈하게 먹고
수요일은 수수하게 먹고
목요일은 목이 칼칼하도록 먹고
금요일은 금식하듯 먹고
토요일은 토하기 직전까지 먹고
일요일은 일일이 챙겨서 먹는다.

현대인들의 음식문화를 꼬집은 어떤 학자가 ‘ 요새 사람들은 못 먹어서 병에 걸리는 게 아니라 너무 잘 먹어서 생기는 질환이 더 많다'는 학설을 펼쳐 놓아,  웃음과 함께 위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아르헨티나에서 살아가는 우리 교민은 어떤가?

월요일은 동문회
화요일엔 띠모임
수요일엔 향우회 골프모임
목요일엔 미국으로 재이민을 떠나는 친목회원의 송별회
금요일엔 지인의 아기 돌잔치
토요일엔 한 쌍인 게 다행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두세 군데씩  겹치는 결혼식.

이것이 일종의 소속감과 연대감에 실려 떠밀리듯 살아가는 우리 교민 대다수의 현주소다.
거기다 우리 1세들은 물론이고 2세들 역시 앉으나 서나 골프, 그리고 골프장,  더불어 골프채 얘기다.
일상사의 모든 목적을 가정적이고 가족적인 테두리에 중점을 두고 살아가는 현지인의 생활패턴에 비해 우리 한국인, 특히 재아 교민들은 모든 행동반경을 밖으로 밖으로만 구축하면서 열심히 힘차게 바깥세상만을 만끽하며 살아가는 것 같다.

우리가 이렇게 밖으로만 휘돌고 있을  때, 우리의 2세들은 컴퓨터와 오락실, 노래방 등에 서서히 잠식되듯 중독되어 가면서 ‘외롭다’ 와 ‘외롭지 않다’의 경계사이를 오락가락, 진정 외롭게 헤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 목소리로 나타나지 않는 그들의 고독한 현장을 엿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 차세대들을 한껏 옹호하고 싶은 느낌이 최근에 부쩍 자주 들고 있다.

처음엔 아주 하찮게, 우연찮게 따로이 겉돌던 계기가 세월의 함수에 실리면서 무한대의 곡선으로 폭이 넓혀졌을 것이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
불경기를 잊기 위해?
의류사업에서 쌓이는 스트레스를 풀고 싶어서?

이민 초창기에 비해 많은 발전이 우리 교민사회에 있었고, 날이 갈수록 번창일로의 대열에 합류하는 젊은세대들의 성공사례도 자주 보고 듣게 된다
 재산은 혼자 찾아오는 법이 없다고 한다. 재산이 오면 탐욕이라는 친구도 함께 따라온다고 .
우리와 우리의 차세대들은 이래저래 서로 겉돌고 있다.
어느 심리학자는 논했다.
'세대 간의 관계 속에서 생기는 대부분의 트러블은 상대의 마음이 충실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을 제대로 알아 내지 못한 탓으로 생긴다.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마음은 돌아설 때 누구보다 결연히 자신을 거둔다. 따라서 사람과 세상이 화해하는 것은 자기는 그런 줄로만 알았던, 많지도 않던 틀에 구겨 넣으려던 제 마음과 화해하는 일이다. 말랑말랑해서 변하거니 했던, 결기어린 제 마음과 화해하는 일이 바로 진정한 화해며 세대 간의 벽을 허무는 화해다.'

이런저런 이유가 타당하지 않아도 좋으니 우리 이제  밖에서의 발길을 어서어서 가정으로 향하도록 차츰 배려하고  자주 함께하는시간을  아낌없이 바치고  할애하도록 관심을 기울였으면 한다. 가서 우리의 자녀들과 조촐한 식탁을 마주하고 하루 내내 있었던 얘기들을 잔잔하게, 그리고 막역지우의 친구처럼 친밀하게 나누도록  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그렇게 이행하는 길만이  우리의 둥지를 빠른 시일 안에 아늑하고 더욱 포근하게 변모시키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장식하게 될 것 같아서다.

내 앞에 비로소 나타난 세상이라는 바다가, 내가 이제까지 눈길조차 주지 않던 상식이라는 게 내게 수없는 파도가 되어 화합의 음향으로 밀려오고 있다.

나는 눅눅하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눅눅하기 이전에 모든 찌꺼기나 때를 보송보송한 촉감을 지니도록 서둘러 세탁을 해내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예전의 내게  고통은  괴로움 그 자체였는데, 현재는 모든 고통이 사소한 것으로 변화되었다.
나는 고통조차 선택의 여지라는 게 있다고 믿으며 거부할 수도 있는 영역도 주어지고 있다는 점과 그 권한을 재량껏 갖추는 몫은 언제나 스스로의 역할에  좌우된다는 것도 어느 시기에  저절로 깨우치게 되었다.

지금껏 나의 내면엔 많은 희망이 억압처럼 갇혀 있었고, 그 사실은,구태여 숨기고 싶지도 않은 매우 자명한 일이라고 본다.
어느 격언과 같이 '가장 나중에 웃는 웃음을' 나는 웃으려고 한다. 꼭 그렇게 될 것이다.

가정 , 가족 .
이 말들은 현재의 내게 무엇보다 매력적인 언어다.
나부터 새롭게 각성하고자 고요히, 작게나마 되뇌어 본다.
우리의 둥지는 아늑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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