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6일 월요일
잔치 이야기
맹하린
이민 짬밥(?) 30년이 넘다 보니까 모르는 교민보다 아는 교민이 더 많아진 처지가 되었다.
그들의 집안에 수저가 몇 개인지 까지도 파악이 되어 있을 지경이다.
왜냐하면 자녀가 몇이나 있다는 정도까지 제대로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친인척이 몇 쯤, 혹은 모두 함께 이민 온 이민자도 있겠지만, 대다수의 교민들은 연고자 없이 이민을 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경사가 닥치면 이리저리 연락하여 간곡히 부탁하건대 제발 친척이 좀 되어 달라고, 부디 자리를 좀 빛내 주시라고 여기저기 초대장을 보내야할 형편이 전개된다.
초대장만 보내온다면 모를까, 예비 신랑신부를 대동하고 인사를 시키면서까지 초대장을 가져오는 경우도 의외로 많다.
(생각하자면 나는 그럴 경우에나 금세 떠오르는 인물인가보다.)
어느 정도 친하다고 보면 친하달 수도 있고, 그저 아는 정도라고만 여겨왔을지라도, 그러한 상황에 부딪히게 되면 일단은 덕담부터 안기게 된다.
하지만 정작 결혼식엔 참석을 못하고 부조도 생략할 때가 많다.
나는 화수분(안에다 온갖 물건을 넣어 두면 새끼를 쳐서 끝이 없이 나오는 보물단지라는 뜻)을 감춰둔 처지는 아니라서다.
거기다 애들 백일에다 돌, 그리고 회갑, 칠순, 팔순, 미수(米壽).
어떤 분들은 애들 백일이나 돌도 2백 명에서 3백 명까지 초대를 해서 말 그대로 삐까번쩍한 잔치를 치른다.
사업기반을 튼튼하게 다진 사람일수록 한층 성대하고 거창한 잔치를 준비한다.
대부분의 당사자들이 교민신문에 결혼식초대의 광고를 일주일씩 내고, 과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분들에게만 초대장을 보낸다 해도 , 정작 피로연 장소에 가보면 하객의 수는 무려 5백 명이 넘어 식사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돌아가는 사태 또한 결혼식 순서 중의 하나인 것처럼 벌어진다.
아는 지인들 중에는 부조금에 비해 피로연 비용이 훨씬 많아 낭패 중의 낭패를 보았다는 이들 역시 넘치도록 많다. (단정컨대 식당 잘못이 아니라, 한 가족에 두사람 이상 참석해서 문제인 듯.)
결혼식이 장삿속도 아니고 왜 이러한 병폐가 차츰 시정될 기미를 안보이고, 점차 화려만발한 쪽으로만 나날이 확대되어 나가는 추세인지 생각수록 오리무중이 아닐 수 없다.
하객이 넘치다 보니까 국수라도 나눠 먹자는 우리 한국인 고유의 역사와 전통과 예절은 오간데 없고 국수도 못 먹고 돌아가야 할 볼상 사나운 일까지 불거진다.
몇 년 전에 성당에서 만들어지는 "한맘"이라는 월간지의 편집을 맡은 일이 있다.
그때 안나회장을 하시던 분이 대단히 수고들 많다면서 저녁식사 초대를 한 적이 있었다.
손자의 돌잔치에편집위원들 전체를 부른 거였다.
전부는 못 참석하고 여덟 명만 참석하게 되었다.
거기서부터 말썽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봉사하느라 수고들 했고, 단체장으로서 따로 식사도 대접하지 못했으니까, 그날이라도 와서 밥을 들고 가라는, 단지 그러한 좋은 뜻의 이유였고 요지였지만 말이다.
문제는 그분의 며느님, 미사엔 열성적이던 그 아기엄마가, 대번 안면을 바꾸고 우리가 앉은 식탁까지 쪼르르 달려 오면서 생겨났다.
그녀는 한복의 소매까지 걷어 부치며 따지고 나섰다.
도대체 초대한 기억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데, 왜들 떼거지로 몰려와 공짜 밥을 먹고 있느냐는 항의였다.
우린 단지 편집위원들일 뿐이고, 편집이나 좀 할 줄 알았지 변명에는 약한지라, 계속해서 비실비실 서로가 서로를 쳐다보며 자꾸만 웃고 있었다.
그러한 우리팀의 모습이 그 여인을 더 화나게 하는 모양이었다.
거의 죽을상이 된 편집장이 돌상 주위에 있던 안나회장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전하고 나서야 진위가 가려졌지만, 우리의 뱃속은 그날 뭘 잘못 먹은 것처럼 결코 편치가 않았다.
참으로 껄끄러운 식사였다.
(이런 부작용들은 결국 잔치의 하객들이 어디나 떼를 지어 다니는 점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닐런지.)
그동안 몇 분의 교민일간지 집필진들이 결혼식 피로연이나 여러 잔치에 관한 잘잘못을 누누이 지적해 온 터인 데도 몇 십 년이 지난 현재까지 조금이나마 개선 되는 양상은 전혀 안 보이고 있다. 도리어 한층 성대해지는 측면으로만 장족의 발전을 거듭해 왔을 것이다.
나의 한 친구는 한국에 사뒀던 건물이 1백만 달러 가까운 시세에 판매되어 재테크하고 돌아왔다고 쉬쉬하며 어깨를 높이고 있다.
다른 한 친구는 한국의 강남땅 정도 되는 뿌에르또 마데로에 아파트를 구입해놓고 얼마 전 이사하여 참 많이도 기쁘고 뿌듯해 보이기까지 한 표정에 몰입해 있다.
(이상하다. 친구들은 좋은 일이나 궂은 일이나 꼭 나한테 제일 먼저 말해 주고 싶어한다.)
그녀들에 비할 경우, 한 치도 뒤지지 않는 어떤 친구는 꽃을 참 좋아는 한다.
그런데 한 푼도 새롭고 소중하다고 여기는 성격이라서, 우리 가게에 오면 완성품을 사가는 일이 드문 게 아니라 전무하다.
(한국과 달라 나는 꽃을 꼭 필요한 양만사 온다. 꽃을 계획없이 많이 준비하게 되면 나중에 다 버려야 하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된다.)
특히 무슨 행사라던가 기념일이 되면 그녀는 약속처럼 우리 가게에 일찍어니 나타난다.
그녀의 의리 하나는 참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가게가 아베쟈네다인데도, 그리고 그곳에도 화원이 서너 개 쯤 영업을 하고 있는 데도 한사코 한인타운 지역인 우리 가게까지 자가용을 운전하며 찾아오는 것이다.
정말 대단하고 올곧고 바른 여인이라고 표현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녀가 그렇게 일부러 틈을 내어 우리 가게까지 오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따로 있다고 한다.
같은 값이면 우리 꽃을 팔아 주고 싶고, 그리고 같은 가격이지만 내가 푸짐하게 준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구입한 꽃과 재료를 이용하여 손수 꽃꽂이 하는 작업을 퍽으나 즐기지만, 꽃을 꼼꼼하게 구입하는 것도, 약간만 고르기를 선호하는 것도 더불어 즐긴다.
최대한으로 까다롭게 굴며 나를 닥달하듯 괴롭힌 뒤, 약간의 꽃과 재료를 사들고 그녀가 돌아가고 나면 나는 아들에게만 농담삼아 연기를 펼쳐 왔었다.
" 식당에 가서 있잖아? 나는 불고기도 내가 만드는 걸 좋아하니까 고기만 살래요. 아! 파하고 양념 일습도 따로 가져와 봐요. 우선 보고나서 고를게요. 에구, 고기 덩어리가 너무 크잖아요? 작은 걸로 바꿔줘요. 저런, 이 양파보다 더 적은 건 없어요? 난 양파도 크기만 하면 싱겁고 싫더라. 이러면 좋겠니? 좋겠냐구?"
그 후, 그녀가 다녀간 뒤엔 아들이 그런다.
" 왜 오늘은 식당에 가서 불고기도 이렇고 저렇고, 그 얘기를 안 하시는 거죠? 그 얘기 들을 때마다 무척 재미있던데."
나는 웃으며 답한다.
"자주 하면 재밌니? 재밌냐구? 난 말이지. 내가 안 하면, 네가 기억 시켜 주는 게 더 재밌다!"
최근엔 어떤가.
그녀가 다녀가면 아들은 그 어떤 말도 생략한 채 껄껄껄, 소리가 좀 크다 싶을 정도로 웃어댄다. 나 또한 웃을 수밖에 없다.
같은 톤으로 웃을 수는 없어서 약간 다르게 웃는다.
자나 깨나 산뜻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자에게 흔히 따르는, 지극히 빈번한 바로 그 웃음이다.
"키키키."
(나여, 잘 참아줘서 고맙데이! 장사라는 게 다 그런 거래.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친구를 많이 두랬니? 하물며 부자친구들이라니!)
오! 대단히 부자면서 한 푼에도 벌벌 떠는 위대한 나의 친구들!
경쟁이라고는 없는 독과점 품목으로 교민 덕택에 대박이 난 걸 전혀 못 알아채는,
나의 거룩하고 훌륭하며 존경심까지 절로 생기는 대단한 내 친구들.
(내 친구들 대다수가 컴맹이다. 만약 이 글을 읽는다해도 상관 없다. 나도 풀 데가 있어야 한다.)
어제 저녁은 돌잔치가 있어 어느 식당에 꽃 장식을 납품했었다.
2백여 명 정도의 Cubierto(식기 한 벌)가 말끔하게 차려져 있었다.
중소기업 수준의 상권을 너도나도 이룩해 내었고, 개인 경제성장도 어느 정도 구축한 분들이라면 잔치를 하고 광고를 낼 경우, 부조금은 생략합니다, 라는 글도 빠짐없이 첨부하면
더욱 복 받을 일인 것을.
약간이나마 축소하고 간소화 한다면 더욱 바람직한 일인 것을.
광고가 그런 식으로 나가도 할 사람은 꼭 부조를 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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