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29일 수요일
보약의 효과
맹하린
나는 키가 165Cm이고, 거기서 110을 뺀 숫자의 Kg을 지녔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45Kg에서 46Kg을 오갔는데, 결혼하고 체중이 늘어난 건 아니다.
이민 와서 약간 늘었다.
그래봤자 49Kg이어서, 이웃에 살던 한국 꼬멩이들이 나를 보고 젓가락공주라고 놀렸었다.
군정시절, 시우다델라 아파트에 인구조사가 일주일 간격으로 나오자, 우리는 서둘러 운동사범 Y씨의 뒷채에 1만 달러를 내고 전세를 들었다.
시우다델라 아파트는 유럽에서 활약 중인 축구선수 떼베스가 살던 우범지대 아파트다.
생각날 때마다 웃음이 샘솟는 일은, 지금은 Y씨의 후계자가 된 주니어 Y 때문이었다.
그때 주니어 Y는 열 살이었을 것이다.
내가 유치원에서 아이를 데려 오다가 이민동창에게 들르느라 집에늦게 도착하면 주니어 Y는 내게 마구 야단을 쳤었다.
주니어 Y는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는데도 한국말을 제법 했다.
" 얜일이(원일이) 엄마, 집 안보고 왜 천천히 다녀요? 자자꾸(자꾸를 자기 아빠한테 그렇게 배웠음) 그렇게 하려면 집 나가 버려요!"
그럴 때 나는 내가 너희 집 문지기냐? 그러지 않고 하하하 웃어 넘기는 성격이었다.
사실 우스웠으니까 웃었던 거다.
세상은 그렇다. 상대방은 화를 내는데 이쪽에선 웃을 때가 있는 것 같다.
코미디의 유머철학 비율은 6+2+2인데, 6이 재미이고 감동이나 교훈이 각각 2라고 한다.
사람이 한 번 웃을 때마다 1백 82개의 근육이 움직이며 몸에 유익한 호르몬 분비가 많아진다고 한다.
그때 1년 정도 그 집에서 살고 우리는 집을 사서 나왔다.
그집에 살 때, 주니어 Y가 심각하게 내게 물었던 말이 있었다.
"왜 얜일이 엄마는 젓가락 공주가 한 번도 안 아파요? , 내 엄마는 고르다(뚱뚱이)인데 날마다 아파요."
"왜냐면 나는 보약을 좀 먹었거든."
"보약? 그거 어디서 파는데요? 내 엄마도 사다 줘야 돼요."
"한국에서나 살 수 있어. 이 나라엔 아직 아무도 한의사가 못 와 있잖아."
어느 날.
아베쟈네다 상가에 위치해 있었고, 주름치마를 전문으로 판매하던 유미네 가게에서 그 무렵 재아교민사회에 최초로 결성된 여성골프모임 J클럽 임원들의 임시회의가 있었다.
갈비와 감자를 굵직하게 썰어 넣은 갈비찜에 겉절이 김치를 곁들여 점심을 맛있게 먹고 났는데 현지인이 페인트를 배달하러 왔다.
50Kg용량의 두 통이었다.
꼬르따도르(재단사)와 엔시마도르(재단보조)는 주름공장에 일감을 가져다 주러 갔었다.
그런데 고객들이 연신 주름치마를 사러 오니까 두 통의 페인트 통이 문가에 있어 사뭇 걸리적거리는 상황이었다.
보다 못한 유미엄마가 그걸 옮기려고 시도를 해봐도 꼼짝도 안 했다.
나는 그럴 때 처음부터 나서는 성격은 아니다.
나약한 친구들은 아예 엄두도 못 내고, 두어 명이 어떻게든 들어보려고 교대로 다가갔지만, 페인트 통은 전혀 꿈쩍도 안 했고, 두 명이 한꺼번에 들어보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제야 천천히 걸어 가 페인트 통의 손잡이를 번쩍 들어 한쪽으로 옮겨 놓게 되었다.
기가 막혀서 단체로 뒤집어지던 친구들.
그 사실을 전혀 믿지 못하겠던지, 두어 명은 다시 쫒아가 온갖 힘을 다 쏟으며 애를 썼지만, 약간도 흔들리지 않던 50Kg의 페인트 통.
나는 체중 면으로는 내 인생을 제대로 컨트롤 해왔는지도 모르겠다.
50Kg을 들어낼 수 있는 55Kg이니까.
개미는 자기 몸무게의 600배를 나를 수 있다는데 나는 나보다 적은 양을 들어냈을 뿐인 것이다.
운동을 따로 한 일도 없고, 운동을 좋아하지도 않지만, 나는 지하수 물통 30Kg도 거뜬하게 정수기 위에 올리는 편이다.
아마도 어려서 먹어낸 보약 덕택이 아닌가 한다.
우리 집에서는 장손인 오빠에게 1년에 두 세 번 보약을 해줬다.
여름엔 땀으로 약효가 나간다고 해서 여름만 빼고, 계절마다 그랬다.
그런데 오빠는 쓰다고 탓하며 보약마다 병적으로 기피했다.
결국 보약은 내 차지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럴 때 오빠는 손질 잘된 손톱을 바라보며 뜻모를 미소를 짓고는 했다.
(오빠, 고마워요. 나를 보약 먹여 키워줘서.)
안 될 건 없었다.
오빠에게는 싫은 것이 내게는 괜찮은 것이었으니까.
나는 어려서부터 쓰디쓴 그 보약이 참 맛있었고 매력적이라고 여겼었다.
감칠맛까지 느껴졌었다.
실제로 나는 요즘도 고들빼기김치나 씀바귀 같은 나물을 자주 장만한다.
"살면서 맘고생 좀 있을 테니 미리 쓴 맛 좀 들이거라!"
아마 신(神)은 내게 그런 메시지를 보내셨었나 보다.
결혼해서도 추석이나 설 즈음에 나는 시어머니로부터 칭찬을 퍽도 많이 들었다.
동서들이 다 듣는 데서였다.
" 말랐어도 강단이 있는 맏 며느리, 살은 적어도 뼈가 튼튼한 며늘아이."
인생에 공짜는 없다더니 나는 보약을 먹은 대가로 지금 열심히 힘내어 일을 해내고 있다.
가끔은 휴식을 취하며.
휴식!
얼마나 듣기 좋고 부드러운 말인가.
그제는 밤새 비가 내렸다.
비 내리는 밤은 언제나 신비롭다.
어떤 밤은 빗소리가 자장가인데, 어떤 밤은 빗소리가
자꾸만 함께 퍼붓자고, 같이 쏟아지자고, 더불어 내리자고 그런다.
빗소리에 여러 번 잠에서 깨었던 밤.
오늘 아침, 내 마음은 어딘지 모르게 말끔히 씻겨진 것처럼 몹시도 상쾌하다.
나는 비가 내리고 난 이틀 간의 새벽을 참 사랑한다.
머리 속에서 갈등 같은 게 일단은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더 비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리피트 버튼을 누르고 나는 커피를 몇 모금 마신다.
디아나 워싱톤의 'Time After Time'이다.
때로는 길을 잃고 싶다.
그런데 그게 가능한가 하면 불가능하게도 여겨진다.
일단 헤매지만, 나의 내부에서 조급함이 물결치기도 한다.
길을 찾아낸 나를 발견할 때도 간혹 있다.
이미 가을이다.
아침저녁으로 춥지만 난 추위 속을 걷는 일도 기쁨으로 여긴다.
그러면 없던 힘도 생기는 것처럼 긴장되는 느낌이라서다.
오늘도 산뜻하게 하루를 잘 살아낼 것이다.
2012년 2월 28일 화요일
인디언 기도
-펌-
인디언 기우제’란 말은, 인디언들이 가뭄이 들어 기도할 때 비가 올 때까지 기도한다는 것을 빗댄 말입니다. 이 말에는 비가 올 때까지 기도를 하니 당연히 이루어질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비아냥거림이 섞여있습니다. 물론 좋게 보는 시각에서는 용기를 잃지 않고 부단히 기도를 하니 그 결과가 좋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해석을 붙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인디언 기우제’란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북미 원주민들로부터도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계속 지낸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작가가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나바호족의 기우제를 수년동안 관찰한 게리 위더스푼에 의하면, 모두 네 번의 기우제를 관찰했는데, 모두 12시간 이내에 비가 왔다고 합니다. 그중의 세 번은 몇시간 동안만 왔고, 한번은 몇일간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기우제에서는 잠시동안만 비가 왔다고 합니다.
각각의 상황은 모두 다르지만, 어쨌든 그들이 기우제를 지내면 많든 적든 비가 오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현상은 이웃의 호피족이나 다른 인디언 부족들도 마찬가집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기도를 하기에 이처럼 비가 오는 것일까? 뛰어난 인디언 주술사들은 우주의 기운을 마음대로 부리는 신비한 재주라도 갖고 있는 것일까?
인디언 공부하면서 늘 궁금해 하던 것이 바로 인디언들의 기도였습니다. 도대체 그들은 기도를 어떻게 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명한 주술사들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서도 비를 오게 할 수가 있었으며, 반대로 폭우처럼 쏟아지는 비도 멈추게 할 수 있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와 같은 사례가 여럿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얼마전 그 인디언 기도의 실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다음은 그래그 브래든이 전하는 그의 인디언 친구 데이비드의 ‘비기도(rain prayer)’ 내용입니다.
미국 서남부에 100년만에 최악의 가뭄이 왔을 때 일입니다. 나는 인디언 친구인 데이비드를 따라 그의 부족의 ‘신성한 원(medicine wheel, 둥글게 돌을 놓아 만든 원)’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비 기도를 할 참이었습니다. 마침내 높은 산정의 능선에 있는 신성한 원에 도착하자, 그는 신발을 벗었습니다. 얼마나 엄숙하게 신성한 태도로 신발을 벗는지 그 자체가 기도였습니다.
그는 맨발로 대지 위에 섰습니다. 그리고 등을 돌려 신성한 원의 돌 가로 걸어갔습니다. 아무 소리없이 그는 신성한 원을 돌았습니다. 하나하나의 돌과 그의 조상들에게 존경을 표현하면서. 그의 발은 신성한 원의 돌들로부터 3센티미터 이상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신성한 원의 돌에 발이 닿지 않도록 주의했습니다.
신성한 원의 가장 바깥쪽 돌을 돌았을 때, 그의 얼굴은 내 쪽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그의 눈은 굳게 감겨져 있었습니다. 그는 시종 눈을 감고 돌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정확히 각각의 돌 옆에 발을 디뎠습니다.
신성한 원을 다 돌자 그는 걸음을 멈추고 똑바로 섰습니다. 그리고 양손을 얼굴 앞으로 모은 뒤 기도했습니다.
한여름의 뜨거운 햇빛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데도 그의 숨결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잠시 기도를 하던 그는 마침내 깊은 숨을 내쉬며 그의 자세를 풀었습니다. 그리고 내게 왔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이제 다 끝났네.”
내가 놀라서 물었습니다. “벌써? 비를 내려달라는 기도를 하러 온 것 아냐?”
그가 신발을 신고 앉으며 말했습니다.
“아니, 나는 ‘비가 내리는’ 기도를 하러 온 거야. 만일 내가 비를 내려달라는 기도를 하러 왔다면 결코 비는 오지 않을 것이네.”
놀랍게도 얼마후 구름 한 점 없던 날씨가 점차 흐려지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한두 방울씩 내리던 비는 순식간에 굵어지기 시작했고, 이내 천둥번개가 치기 시작했습니다. 검은 먹구름이 우리가 내려오는 골짜기를 뒤덮었습니다. 비는 억수같이 퍼붓기 시작했다. 이러다가는 홍수가 나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습니다.
우리가 그 골짜기를 빠져나올 즈음 멀리 동쪽 산들과 내가 서있는 골짜기 입구 사이에 펼쳐진 너비 18킬로미터의 거대한 들판이 호수로 변했습니다. 그날 저녁 지역방송국의 날씨특보는 콜로라도주 남부와 뉴멕시코주 북서지역 전체에 장대비가 내리기 시작했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실홥니다. 그리고 그래그 브래든이 그의 <이사야 효과>라는 책에서 ‘데이비드 기도’라고 명명한 그 유명한 인디언 기돕니다.
다음날 아침 브래든은 데이비드에게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온통 물난리잖아.”
한동안 침묵하던 데이비드가 말했습니다. “나는 비기도를 했을 뿐,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것까지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
그렇다면 이렇게 오랜 가뭄을 끝내고 비를 오게 한 데이비드 기도, 아니 인디언 기도의 요체는 무엇일까? 데이비드의 말을 들어봅시다.
“어렸을 때 어르신들이 내게 기도의 비밀을 알려줬네. 비밀의 요체는 이런 거야. 우리와 이 세계의 힘을 이어주는 다리는 바로 우리의 가슴이네. 우리의 감정과 우리의 생각이 결혼하는 것은 바로 여기, 우리의 가슴이란 말이지.
기도하면서 나는 현재의 모든 것에, 그리고 과거에 일어났던 모든 것에 감사를 드렸네. 나는 황무지의 바람에게도, 대지의 뜨거운 열기에게도, 심지어 가뭄에게도. 그런 다음 나는 새로운 메디슨, 비가 내리는 메디슨을 선택했지.
“나는 눈을 감고 신성한 돌 둘레를 돌며 비가 온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네. 그리고 곧 비가 내 몸을 촉촉이 적시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지. 단순히 그렇게 상상한 것이 아니라 깊은 몰입과 집중 속에서 실제로 그렇게 느낀 것이네. 그때 나는 비를 맞으며 마을의 큰 광장에 맨발로 서있었던 것 같네. 비에 젖은 땅이 내 발가락 사이로 스며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
그리고 태풍 속에서 우리 마을 집의 흙벽과 지붕을 덮은 이엉에서 나는 그 비릿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네. 나는 마을에서 나와 비를 맞으며 가슴께까지 자란 옥수수밭 사이를 걸어갔네. 그 황홀하고 짜릿한 느낌은 뭐라 표현할 수가 없었지....
“눈을 감고서 나는 그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었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기도하는 방식이라네. 뭔가를 원한다면 먼저 그것을 오감(五感)으로 느껴야 하네. 그래서 실제로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처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냄새를 맡고, 피부로 느껴야 하는 것일세. 그때 기도는 비로소 힘을 발휘하지. 이것이 우리가 새로운 씨앗을 뿌리는 방식이네.”
데이비드 기도는 말합니다. 기도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기도하고자 하는 내용을 먼저 온 몸으로 느껴야 한다고.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하는 기도는 의미가 없다고. 그런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그것은 단지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 바람이 이루어지게 하려면 먼저 온 몸으로 느껴야 한다고. 그리고 창조에 동참할 수 있게 허락해주신 신들께 감사드려야 한다고.
그런데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인디언 주술사 구르는 천둥이 지적했던 것처럼, 기도할 때 결코 비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당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기도는 이익을 얻기 위한 사사로운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2012년 2월 27일 월요일
나의 생일
맹하린의 생활 산책
아르헨티나 조선일보
2001년 7월 26일
나는 친구가 많다.
친구가 많다는 건 한 명도 없다는 얘기라고 누군가 단정 지어 말한다 해도 나는 친구들의 장점만을 좋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 하나하나를 다 소중하게 아낀다.
친구 W와는 동갑이고 생일까지 같은 날이고, 남편들의 성은 박 씨이며 직업도 같아서 각자의 공통점까지 여럿이다 보니까 한층 가깝게 지내는 중이다.
몇 년 전부터 W는 잊지 않고 나와 생일을 함께 보내주고 있다.
양력 7월 하순이면 W는 내게 전화를 해오는데, 우리가 식사를 나누게 될 식당과 시간을 정하고 그러느라 한참이나 실갱이를 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날 둘이서만 참 좋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남편들 흉도 좀 들썩이면서 세상 사는 얘기들을 곁들이다가 선물도 주고받고 그러는 것이다.
올해도 며칠 전이 생일이었는데, W가 먼저 전화를 해와 우리는 각자의 시간을 서로 절충하다보니까 점심으로 정하게 되었다.
W는 전화를 끝낼 때 부탁하나를 선전포고 하듯 쏟아냈다.
"있잖아, 난 꽃다발을 별로 안 좋아 하니까 일부러 그런 걸 맞추고 그러지 마. 꽃다발은 물론이고 다른 선물도 사양이야. 우리 그냥 올해는 조촐하게 식사를 하면서 수다나 실컷 떨자."
"저런! 그랬었구나. 그런데 난 해마다 꽃다발을 했었네?"
나는 꽃다발 선물을 퍽도 선호하는 편이었다.
사실, 형편에 맞지 않게 격에 안 닿는 선물을 하거나 낭비하는 일도 일종의 사치나 허영으로 간주하며, 그런 태도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가난이라고까지 단정 짓는 나였으므로 꽃다발 이외의 다른 선물을 골라야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잠시 멍한 기분이었다.
마당에서 전화를 받다가, 바둑 삼매경에 빠져 있는 가족이 있는 거실로 돌아온 나는 고개까지 갸웃하면서 중얼대고 있었다.
"너무 이상하네. 왜 꽃다발을 싫어하는 사람이 다 있지? 그것도 여자가. 더군다나 생일까지 같은 친구가."
가족들은 이구동성으로 명쾌하고 그럴 듯한 대답을 해냈다.
"싫다면 싫은 거죠. 난 알 것 같아요. 등 따습지 않은 어떤 불편함 같군요."
"꽃다발을 기피하는 무슨 이유가 따로 있을 거야. 어쩌면 실용적인 선물을 바라는 지도 모르겠고."
나는 서둘러 쇼핑센터 '까르푸'에 가서 머그잔 여섯 개를 고른다. 값도 착했고, 운치도 있는 수입품이었다.
W는 올리보스 (Olivos)지역에서 별장과 같은 주택에 살고 있고
W는 애들이 셋이나 되므로 한 달 생활비와 학비가 몇 천 달러가 든다고 그러고
불경기의 여파로 해마다 다녀오던 고국여행을 3년이나 못 갔다고 투덜거리길 잘 한다.
하지만 나처럼 꼭 필요한 소비가 될는지 생각하면서, 안쓰는 일에 관록이 붙은 생활환경은 아닌 게 확실하다.
M식당에는 W보다 내가 먼저 도착되었다.
약속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된 W를 반기던 나는 화들짝 놀란 나머지, 눈동자가 커다랗게 떠졌다가 순간적으로 고정되는, 그 비슷한 느낌이 스멀거렸기 때문에 자리에서 사뿐 일어났다.
W는 핸드백과 선물 보따리 등은 왼손에, 오른 손엔 아주 예쁘고 정성스럽고 반짝이까지 반짝반짝 빛나는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 꽃다발이라는 게 우아하게 안겨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 껴안고 뺨을 대며 축하한다는 말을 나누고 난 후에도 나는 꽃다발을 유심히와 무심히가 엇갈리는 심정으로 번갈아 가며 보았다.
"있잖아. 꽃다발을 받을 때의 기분이 너무나 근사했어. 그래서 나도 자기를 좀 그렇게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왜! 불만이구나?"
W와 헤어지면서, 30Kg의 쌀부대조차 거뜬하게 들어 올리는 평소의 내 팔 힘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친구 W가 들려준 선물 보따리는 어딘지 모르게 골똘한 표정을 짓게 하는 무엇인가의 무거움같은 게 분명하게 끼어 들고 있었다.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W가 걷는 쪽을 돌아보니, 우연처럼 W도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나는 보따리를 잠시 땅에 내려 두고, 꽃다발과 함께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마치 꽃다발을 건네던 내 지난 몇 년 간의 생일들에게 손을 흔드는 기분이었다.
내 음력 생일에 내가 나를 축하해 주는 의미에서 계절에 맞게 옷을 한 벌 사 입고, 양력 생일이면 가족에게서 꽃나무와 클래식 음악이 수록된 음반과 함께 짧은 편지를 받던 촌스럽게 오붓했던 지난날들에까지도 손을 흔들어 주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생일.
이 언어는 현재의 내게 여러모로 격세지감을 안긴다.
손에 잡고 있는 동안에는 작게 보이지만, 놓치고 나면 곧 그것이 얼마나 크고 귀중한지를 알게 된다는 추억 가득 실린 지난날들 또한 마찬가지다.
손에 잡고 있을 때 작게 여긴 적도 없었지만, 나는 분명 상실한 것 이상으로 많은 걸 획득한 느낌으로 가득해 있기는 하다.
내 생일은 어쩌면 1년에 한 번 씩이 아니라 한 달에 한 번도 돌아오고 일주일에 한 번일 때 역시 많았을 것이다.
W 뿐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그렇게 나를 항상 배려하고 언제나 챙기면서 고맙게, 나로 하여금 문학에 더욱 치열하면서 몰두까지 할 수 있도록 유도해 주던 날들이 대부분 이었다고 보여진다.
생일이 있어 나 반짝 밝아지기도 하고
생일이 있어 나 애틋한 격정이 치밀기도 한다.
다음 해의 생일엔 W에게 내가 만든 꽃다발을 건넬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우연히도 꽃집을 인수하게 된 것이다.
내가 항상 이용하던 바로 그 M 꽃집이다.
하지만 나는 어떤 결심을 굳히게 된다.
언제나와 같이 다시 양력 생일을 가족과만 보내고 싶어진 것이다.
언제나 그래 왔듯이 음력 생일은 내가 나를 축하 하는 날로만 지내고 싶어진 것이다.
이제 W와 같이 보내는 생일은 접으려 한다.
왜냐면 아무리 친구라 해도 나는 부담을 느끼면서까지 선물을 받고 축하를 받고 그러기가 더할나위없이 버거워진 탓이다.
꽃다발만은 여전히 보내게 될 것이다.
어느 날부터 나는 티 나지 않게
그리고 고요히 살아갈 수 있기만을 바라고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고
존재해 왔고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사에 감사하리라는 점이다.
2012년 2월 25일 토요일
2012년 2월 24일 금요일
칼 프리드리히 가우스
(펌)
언제나와 마찬가지.
맛있게 살자! 라는 표어아래 밥을 좋아한다면 누구든 모시는 그동네
의 Renyts님의 연재강좌입니다. ^^
가우스..고등학교때는 가우스수라는 것으로 그렇게 골치를 썪이더니..
대학교와서는 가우스엘리미네이션..가우스-조단 엘리미네이션...가우스-세이델법..등등등..
공업수학, 수치해석, 선형대수등에서 열심히 괴롭혀주신 선생님이시죠..아하핫.
본문 들어갑니다.
수학자나 과학자나 매한가지니까.....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수학자 중에 유일하게 "초천재" 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는 대 수학자 칼 프리드리히 가우스. 매우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삶을 살았던 그는 현대 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 있어서 공공의 적이라 할 수 있을 만한 복잡한 업적을 많이 남긴 사람이다.
특히나 그가 수학을 천문학에 응용함으로서 (물론 그 이전에도 수학과 천문학은 관계가 깊었지만 천문학자가 수학을 연구한 것이 아닌 수학자가 천문학을 연구한 케이스로는. 그가 처음일 듯.) 천문학에 많은 변화를 가져 왔으며 소행성의 존재를 발견하기도 한다.
사실 가우스 선생은 마이클 선생과는 다른 경로로 위대한 학자가 된 사람이다.
기실 가우스 선생도 가난한 집 출생이었다. 당시 가난한 집들이 다 그랬지만 가우스 선생도 교육의 기회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뭐..초등학교 정도는 다녔지만...원래 그의 어머니는 그의 2살떄 글을 익혔다던지...라는 천재성을 알면서도 어려운 집안 사정때문에 그를 공부시킨다는 것은 생각도 안 했었는데...천재는 평범하지 않달까...그의 초 천재성을 보여주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가 9살일때 대수 시간에 쓰잘데기 없는 다른 업무에 치이던 선생은 아이들에게 간단한 계산을 시키면서 자신의 일을 하려고 1~100까지 모두 더하라고 한다. 그런데 이 가우스란 놈 보소. 다른 녀석들 똥줄빠지게 계산하는데 이녀석은 딩가딩가 노는게 아닌가! 분노모드 선생이 가우스를 불러서 빨리 계산하지 않느냐고 따졌다. 그러나. 가우스란 녀석 이미 다 계산 했다는것이 아닌가!
"인석! 선생을 상대로 사기를 치남~!"
"선생 즐~ 답은 5050이셈~"
"뭣이! 이녀석...너 집에서 계산해 온 것이냐!~!"
"샘 즐~~ 셈은 바보~ 결합법칙과 곱셈으로 풀 수 있으셈~~ "
"뭣! 풀이를 한번 보여봐라~"
"1+100 = 101 , 99+2 = 101 , 98+3 = 101....이렇게 101이 50개가 나오니까 5050 되셈...샘은 바보. "
(당시 가우스 선생은 초딩이었다....)
당시샘의 말을 빌리자면 어이없고 황당했으며 이녀석의 천재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당시는 고등학생 아니 대학생들도 모르는 풀이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더불어 굴욕감 까지 느꼈다고 한다.
여하간에 이녀석의 초천재성을 확인한 선생은 어머니를 극구 설득 가우스 선생에게 고등 교육을 받게 하고 어머니와 삼촌의 도움으로 가우스는 고등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서도 녀석은 괴물이었다. 17세때 절대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던 정 17각형의 작도법을 개발해내 나는 선생따위는 껌이다. 라는 것을 만천하에 알렸으며 21세때는 이걸 홀수각형 작도법으로 일반화 시켰다. 22세에는 이미 학위를 받았으며 27세에는 소행성의 궤도 계산법으로 대학 교수가 된다..--;;
보통 천재는 단명한다고 하던가. 그러나 이 가우스 선생은 70세 까지 잘 먹고 잘 살다 갔으니 그런것 반드시 맞는 말은 아닌것 같다. 가우스 선생의 그 뒤 업적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은 찾아보시길..여하간 자기 아이디어를 증명하느라 시간 버렸다면 대강 맞다.
가우스 선생의 천재성을 증명하는 일화중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있다. 어느날 다른 수학자가 어느 어려운 문제를 가져와서 가우스 선생에게 이 문제에 대한 아이디어가 없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문제를 본 가우스 선생은 대뜸 답을 말해버렸다는 것이다.
"아니 가우스 선생 이 문제 알고 있었소?"
"방금 처음 봤소."
"그런데 어떻게 답을 그렇게 금방 알 수 있소.?"
"대개 수학 문제를 보면 먼저 답이 생각난다오--;;"
풀이를 쓰는 것 보다 답이 먼저 생각났다니 얼마나 초 천재적 인간인가..가끔 이런 재능을 가진 인간을 보면 때려주고 싶지만 가우스 선생은 인간성도 좋은 편이라 편안하게 말년을 살았다고 하니 불평등한 세상인가....
물론 가우스 선생도 꼬장꼬장한 면이 있어서 우선권 이라던지 틀린 이론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편이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업적에 관련된 내용일 뿐이다. 그는 진실이 왜곡되는 것을 매우 싫어했으며 때문에 어설픈 이론으로 얼버무리려 하는 사람들에게 가차 없는 편이었다 때문에 후학에 대해 가혹하다는 평도 있지만 그의 성격상 가혹하게 하였다기 보다는 가차없는 태도가 그런 오해를 가져 온 것 같다. 실제로 사생활 적인 측면에서 그는 매우 좋은 사람이었으며 가우스 선생 집 근처에는 그가 위대한 수학자라는 것도 모를 정도로 평온하고 조용한 할아버지 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집 주변 어린이들에게 먹을것도 잘 사주고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도 잘 해주는 그런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매우 평온하게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는 가운데 숨을 거둘 수 있었다.
가우스 선생의 집중력에 대한 일화도 하나 있다.
가우스 선생이 60이 넘어서 늙은이가 되었을 떄 부인이 죽을병에 걸려서 죽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가우스 선생은 극진하게 간호했지만 병에 차도가 없어서 오늘내일 하던 찰나 엄청난 수학적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잠시 방에 올라가 계산을 하고 있었는데...의사가 찾아와서 이렇게 말 하더란다.
"부인이 돌아가실려고 합니다. 어서 오시지요."
그러나 이미 문제에 빠져있던 가우스 선생..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 마누라 한테 잠깐만 기달리라고 해요. 이 문제만 풀고 갈게."
뭐 부인을 우습게 알았다기 보다는 그만큼 문제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보인다. 이만큼의 집중력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역사상 유일한 천재 수학자라고 불릴 수 있었던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초여름- |
새벽에 <천재 과학자들의 탐구> 라는 책을 읽다가 수학의 '초천재'라 불리우는 가우스 선생의 흥미진진한 일화가 있어 대강 적어 왔어요. 그런데 인터넷을 검색하니까 더 근사한 연구를 발견하게 되어 조마조마 펌했습니다. 맛 있게 살자! 라는 표어도 사랑하고 , 밥을 좋아하는 저니까, 훌륭하신 글을 올려 주신 님께서 (연재강좌하신 Renyts선생님도) 저의 펌을 용서해 주셨기를 간곡히 바라게 됩니다. |
2012년 2월 23일 목요일
동서(同壻)
맹하린
엊그제 점심 무렵, 콩나물비빔밥을 하려고 파 송송 썰며 양념장을 준비하는데(콩나물 비빔밥엔 고추장양념보다 간장양념이 제 맛을 낸다.) 전화벨이 울렸다.
미국의 캘리포니아에 사는 작은 동서였다.
크리스마스카드나 연하장을 해마다 보냈었는데 올해는 어영부영 못 보내서 미안하다는 그녀의 서두를 시작으로 장장 40분이나 서로의 밀린 얘기를 주고받았다.
동서는 87년도에 아르헨티나에 이민을 왔었고, 이곳에서 10년을 살다가 미국으로의 재이민을 97년도에 단행했다.
순전히 막내에 대한 교육열 때문이었다.
큰 애 장일과, 둘째 문경은 본국의 한양대학에 유학을 시켰었다.
막내 정훈은 현재 미국에서 정형외과 레지던트다.
장일이 대학을 졸업하고, 도미니카 공화국에 소재한 본국 모 회사의 지상사에 취직 되었을 때, 동서는 제일 먼저 내게 전화해서 이게 모두 형님 덕택이라고 내게 극찬을 아끼지 않으며 고마워했다. 우리 덕택에 이 나라에 이민을 왔었고, 그런 연유로 서반아어를 제대로 익혀서 취직이 누구보다 빨랐다는 뜻이었다.
시동생은 참 아르헨티나를 맘에 들어 했다.
팔레르모 지역에서 슈퍼를 하면서 몇 십만 달러쯤 저축하여 미국으로 떠났지만 진정 가기가 싫다는 언질을 틈만나면 했었다.
순전히 동서의 고집에 의해 미국으로 갔었는데 언제까지나 이곳을 잊지 못했나 보았다.
워낙 술을 좋아했지만 미국에서는 특히 저녁마다 술을 들면서, 혼자라도 아르헨티나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형님네 집에 가서 살겠노라고 밤마다 읊더니 재이민 간지 3년째인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는 기별이었다.
미국생활에 적응이 안 되어 그런 건 아니고, 단지 떠날 시기가 되어 그리 된 거라고, 나는 동서가 전화해서 울먹일 때마다 그렇게나마 위안을 건네고는 했다.
동서는 몇 년 전에 3층집을 구입했는데, 뒤의 정원이 숲처럼 울창하다고 언제 와볼 거냐고 자주 전화에 대고 채근하듯 묻고는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 들수록 집을 줄이는 경향이 많은데 동서는 밤에 혼자서 잠을 자는 집이라도 우선은 그런 집을 가져 보는 게 소원 중에 들어 있었다니 뭐라고 해서도 안 될 것이다.
가진 대로만 샀더라면 별일이라고는 없었을 텐데, 동서는 미국사회가 원래 그런 곳이고 이왕이면, 하고 욕심을 부리다 보니까 융자까지 얻었다는 설명이다.
잘못 투자할 경우, 몇 십만 달러를 날리는 건 시간문제인 나라가 미국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게 된 시동생과 동서는 그동안 취직생활만 열심히 해냈었다.
동서는 새벽 6시에 자동차로 집을 나서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출퇴근하며, 노인들 간병인 일을 직업으로 갖고 있다고 했다.
한 번 다녀가고 싶은데 일자리를 놓칠까가 염려 되어 도저히 못 오겠다고 언제나 그 소리만 거듭하고 거듭한다.
어떤 땐 아기를 돌보는 일을 한다고도 그런다.
밤에는 교회의 신자들 주문에 의해 파머도 해주고 머리도 자르고 그러는데, 미국사회는 어떻게 된 일인지 재물이 들어오는 것보다 나가기 바쁘다는 투정이 더 많다.
동서가 영업하던 이곳 팔레르모 지역은 자고새면 집값이 오르고 있고,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는 첨단의 땅이 되었다.
동서가 소유했던 팔레르모 아파트 단지 주위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Soho(영국 런던의 한 지역)이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Manhattan이 되었다고 메스콤은 가끔씩 떠들어 댄다.
나는 그 사실에 대해서 동서에게는 새치름 숨기게 된다
동서가 이곳에 살 때 나는 멸치젓갈을 50Kg 정도 담가 선물한 일이 있다.
식구 수도 많고, 반찬이 없을 땐 쌈장으로도 먹는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였다.
그게 그리도 맛있다고 동네방네 소문내면서 교회 반모임 교우에게 그 맛을 보여 준다고, 글쎄 박커스 병 하나에 가득 담아다 준 모양이다.
그때 그분이 일부러 내게 전화해서 한참이나 웃었는데, 그 사실은 알 만한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회자되었었다.
동서는 그토록 알뜰살뜰한 살림꾼이다.
자기는 잘 쓰면서 남에게만 그런다면 흉이 될 수도 있겠지만, 동서는 자기한텐 절대 안 쓰고 남한테는그 다음으로 안 쓰니 누가 뭐라해도 일단은 봐 줘야 한다.
자신을 위해서는 옷도 안 사 입고, 허튼 돈 한 푼도 축내지 않으며, 오로지 자식들한테만 아낌없이 희생하는 사람이 바로 동서다.
나는 어떤 때 동서가 참 이해가 안 될 때가 많았었다.
김치도 내가 담근 김치가 더 맛있다면서 심심하면 배추와 무를 툭 던져 놓고 잽싸게 도망친 뒤, 이튿날 저녁나절이면 헤헤헤 웃으며 찾으러 온다.
누가 맏동서인지 참 헷갈리는 국면 비슷한 상황을 맞게 되던 날들이 예전엔 분명 있었는데....
그렇지만 나는 동서를 아랫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자식이나 동생으로 여겨서야 미움이나 원망을 금세 전환시킬 수 있었다.
왜냐하면 동서는 한국에 있을 때, 내가 중매해서 갓 고등학교를 나온 스무 살에 내 시동생과 결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그래도 이 나라보다 문화생활이 더 발달된 나라니까 참고 잘 살도록 해."
내가 그런 식으로 부탁처럼 말하면 동서는 전화에 대고 모르는 소리 그만하라는 듯 생뚱맞게 소리를 꽥 지른다.
"문화생활요? 그런 건 아르헨티나에 있을 때나 누렸는 걸요. 나는 한국보다 사실 아르헨티나가 더 그립다구요!"
" 세상에! 그렇다면 오면 되잖아. 왜 동서는 동서를 위한 삶을 못 살고 그러는 건데?"
"내가 하고 싶었던 일들이 바로 내 자식들이 살고 있는 일이고, 그러면 된 거죠. 후회는 없어요. 그렇게라도 만족해요."
"장하다, 대한민국!"
나는 엉뚱하게도 그렇게 표현하며 결국 웃어 줄 수밖에 없다.
" 정훈이의 뒷바라지만 아니라면 나도 아르헨티나에 가서 살고 싶어요. 그곳은 정말 시골스럽고 정이 넘치고, 그리고 좋은 곳이죠. 맞아요, 형님. 그곳이 바로 천국이에요."
" 오고 싶으면 언제라도 와. 일단은 다니러 한 번 와도 되고."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이제 나한테서 김치는 못 담아 갈 거다. 내 김치도 어제 6개월 만에 담근 걸. 나는 요즘 즉석으로 간단히 해 먹고 따로 국밥이 아니라, 따로 안 반찬으로 살거든. 어제는 파스타. 그제는 카레라이스. 내일은 생채와 청국장찌개. 김치가 좀 익으면 날마다 그걸 이용해야지. 하루는 김치찌개, 하루는 김치볶음밥, 하루는 김치전. 그렇게.)
그동안 나도 참 어설프게 살아온 게 피부로 느껴진다.
아까워서 시먹지는 못하고, 그리도 즐기는 김치담기를 6개월이나 외면하다니.
식품점의 김치들은 하나 같이 조미료 맛이 너무 느껴져 손도 마음도 잘 안 가고는 했었다.
겨우 풀리기 시작한 내 글의 넋두리를 오늘은 이만 묶고, 내일 다시 또 풀어 내려고 한다.
(날마다 써내니까 적당히 써야 하리라고 반성하게도 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인생이란 건 참, 그리 호락호락하지가 않은 것 같다.
오늘도 미리 인생에게 무릎을 좀 꿇는 심정으로 친구의 메시지를 읽어 냈다.
참 맑고 밝고 환한, 그런데 눈물이 좀 글썽여지는 아침이다.
2012년 2월 22일 수요일
-긴급 뉴스-
온세역에서 50년된 기차
브레이크 고장 일으켜 사망 51명, 중상자 703명 발생.
어떤 기자는 기관사(28세)가 졸았다고 발표
어느 기자는 브레이크 문제로 발표.
사고 시간 22일 아침 8시 반경.
정오 1시 현재, 중상자 긴급 수송용 헬리콥터 12대 운행중.
러시 아워였던 관계로 상상외의 많은 사상자 속출.
이틀 동안 행방이 묘연해서 가족과 당국과 국민들 모두를 애타게 했던 루까스 멘기니 레이(20세)의 시신이 24일 발견되었다. 3호 칸과 4호칸 사이에 껴 있었다고 한다.
루까스는 TV 방송국 체널 7의 편집(보도국)국장을 아버지로 뒀다는 기사를 보았다.
아르헨티나는 이런 국민이 살아 가는 나라다.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집값과 월세 비용이 날이 갈수록 치솟기 때문에 근교에 생활터전을 마련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졌다.
그런 이유로 출퇴근을 기차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추세에 이른 것이다.
어제 아침, 한국의 동생이 전화를 해왔었다.
"언니, 그 나라에 기차 사고가 크게 났다고 뉴스에 자꾸 나오네? 별일 없지? 그런데 뉴스에 나오는 아르헨티나 차들을 보니까 너무 후지더라. 고물 차들만 기어 다니는 거 있지?"
" 응, 아르헨티나는 그래. 그래도 중산층 이상은 새 차를 구입해. 활동하는데 우선 기동력이 있잖아. 수리비도 덜 들겠고."
아르헨티나는 그런 나라다.
중산층인 루까스 같은 청년이 기차를 타고 다니는 나라.
후져서 갖다 버려야 할 차들을 손 볼 수 있을 때까지 손 봐서 끌고 다니는 나라.
일본에서 10년된 최신형 기차를 구입해 왔다고 신이 나 있는 나라.
나는 어쩌면 아르헨티나의 그런 면들을 아끼는 지도 모르겠다.
카니발 연휴에, 관광지에 가진 돈 엄청 뿌려 대고
요 며칠 장사들이 안 된다고 국민들은 연거푸 엄살이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진 날씨 덕택에 신상품이 잘 나가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정치인들이 호텔이나 관광사업에 손을 대고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 잊고
관광객들은 날이면 날마다 그 장단에 북치고 장구치고 춤까지 춰댔었다.
세상은 다시 흐르고 흘러가고 있다.
2012년 2월 21일 화요일
한국인의 밤
맹하린
한아 수교 50주년 기념 <한국인의 밤> 콘서트가 콜리세오 극장(Teatro Coliseo)에서 오늘 밤과 내일 밤, 이틀에 걸쳐 개최된다.
한인회의 중책을 맡으신 분께서 초대장을 8장이나 가져다 주셨다.
21일 표가 네 장, 그리고 22일 표도 네 장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웃의 갈만한 분들에게 일단 의향을 물은 뒤, 나눠 주기에 바빴다.
특히 지난 몇 년 동안 남편의 간병은 물론이고, 제품 업까지 운영하느라 한 시도 몸과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을 영심엄마에게 제일 먼저 건넸다.
친한 친구와 함께 다녀오라고 두 장을 내줬다.
우리 가게 앞의 오디열매를 모두 따먹어도 된다고 선선이 허락했던 바로 그 영심엄마다.
그녀는 아침저녁으로 영심이라는 이름의 개를 산책 시키며, 때때로 내게 레퍼토리가 비슷한 하소연을 스스럼없이 잘 털어 놓는다.
그녀의 남편 얘기는 그녀보다 내 쪽에서 더 기피하는 편이긴 하다.
항상 그녀의 생업에 관한 얘기가 주제가 된다.
현지인 경찰이 매달 정기적이다 싶게 찾아와 트집을 잡는다는 얘기다.
트집만 잡으면 괜찮겠는데, 대놓고 봉투를 요구한다고 한다.
상납금을 매번 그런 식으로 뺏기는 데서 오는 울분은 그녀에게는 대단한 비중의 스트레스로 쌓이기 때문에 문제중의 커다란 문제다.
“ 나쁜 인간!”
어려서부터 욕이라고는 모르고 지내온 나지만, 영심이네를 등치는 그 경찰에게는 욕도 아까워져, 하물며 욕까지도 최대한으로 아껴서 쏟아내게 된다.
아무리 그래도 욕이란 본받을 일은 못되므로, 세상에서 가장 좋다는 욕으로 바꿔서 하게 된다.
"복 받을 인간."
5년 전부터 하반신 마비를 맞이한 상태라, 허구한 날 하의실종의 날들이고, 여름이건 겨울이건 이불만 덮고 사는 영심아빠를 직접 보여줘도 눈 하나 깜짝도 안한다는 경찰이다.
일부러 이불을 젖히며 이러고 사는 인생을 보살피며 살아가노라고 간절히 설명해도 그 경찰의 악랄함은 점차 더 하면 더했지 전혀 수그러 들 줄을 모른다는 거였다.
그 경찰에게 있어, 영심이네 제품공장은 코에 걸면 코걸이요, 귀에 걸면 귀걸이다.
뭐라도 트집을 잡자면 트집거리가 되고 꼬투리도 되는 것이다.
간혹 가다 분을 참지 못하고 큰소리로 대항하게 되면, 제품이 될 일감을 실어오고 완제품을 실어 나를 때를 지키고 있다가, 당장 으르렁 대며 협박부터 쏟아진다고 한다.
몽땅 압수하겠다고 나온다는 것이다.
일감을 내어주는 한인 업주에게 조금이라도 누가 될까를 겁내게 되는 영심엄마로서는 결국 다시 봉투로 해결하는 방법을 되찾기에 이른다.
결정적 요인의 작용이 언제나 불리한 쪽으로만 치닫게 됨을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하는 것이다.
어느 날부터 영심 엄마가 내 눈에는 투명인간에게 이끌려 가는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하였다. 때때로가 아니라 자주 허우적대는 모습이라 서다.
영심엄마가 그녀의 주인이라기보다, 투명인간이 그녀의 진짜 주인이고, 그 주인에게 자주 얻어 터지는 일상이 언제라도 엿보이게 되는 삶.
영심엄마와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못 보면서, 약간이나마 그녀의 일상에 대해 안타까움을 안고 지켜본다는 건 얼마나 무겁고 힘겨운 과제처럼 여겨지던지 나는 때로 그점이 참으로 미안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겪을 만큼 겪어 내고 있는 것이다.
1985년도에 요한 바오로 2세의 한국방문에 맞춰, 나는 한국과 일본을 여행하고 온 일이 있다.
물론 남편과 함께였다.
한국은 한 달이었고, 일본엔 열흘을 머물었었다.
그런데 일본의 주요도시에는 한국에서 몰려 온 연예인단이 상상 외로 많이들 체류하며 어떤 면으로는 고생스러운 날들을 운명처럼극복하며 지내는 중이었다.
어떤 밤, 가라오케 극장에서 그 한국 연예인단들이 공연하는 쇼를 구경하게 되었다.
페티 김, 조용필 등등의, 얼굴만 틀리지 노래하는 음성만은 너무도 똑같은, 또는 더 잘하는 한국 연예인들이 기라성처럼 공연을 해내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우리 한국인들의 타고난 예술적 기질에 대해서 감탄하고 또 감탄했었다.
그렇지만 웬지 마음 한 구석이 몹시도 쓰라렸다.
남의 나라에서 그런 식으로 살아 가는 모습이 참 을씨년스러워 보였을 것이다.
이번에 내아 하는 연예인들도 갈고 닦은 예술성이 그 어떤 일류 가수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매우 뛰어나리라는 건 기정사실이라고 본다.
나는 해마다 2월이 되면 거의 외출을 삼간다.
여행 철인데도 여행까지 자중하는 편이다.
가족 하나의 기일이 낀 달이라는 이유로, 누군가 굳이 자중하라고 질타를 퍼붓지 않아도, 내 쪽에서 자중에 자중을 다하는 달이다.
많은 교민들이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콜리세오 극장에 가게 되리라고 예상된다.
즐겁고 아름다운 물결이 가득 출렁이고, 행복 또한 범람하는 밤이 되기를 기원하게 된다.
우리를 위해 먼 길 마다 않고 오게 된 연예인들이고, 하물며 우리와 아르헨티나와의 수교 5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인 것이다.
사정이 있어 관람은 못하지만, 이 행사를 위해 불철주야 수고하신 분들의 노고에 뒤늦은 감사를 전하게 된다.
감사합니다!
에필로그: 오후 6시 반에 친구들이 찾아 오고 전화오고 그래서
사정을 털어 놓기는 싫고
하는 수 없이 공연을 그녀들과 함께 보고 왔어요.
따로 표를 안 남겼다고 했더니, 여유 있는 표가 있다고 했어요.
부랴부랴 외출복 갈아 입고 얼굴에 페인팅도 좀 하고.
문득 내 맘대로 사는 세상에 살고 싶었어요~
은둔의 거인들이라 분명 그럴 리는 없겠으나
혹 친애하는 그대들이 와 있을까봐 박수도 조신하게 쳤던 밤.
아주 가까운 곳에 문우의 부모가 계셨어요.
그런데 내가 기대하던 비보이 댄스나 태권도무는 다음날에나 있다고 하고
잘 모르는 가요만~
측근이신 분의 변명은 리허설 무대였다고 생각하라고.
왜 리허설을 외국의 무대에서 했나요?
어찌하여 바쁘고 노쇠한 분들 모시고 하나요?
겨우 갔는데...
다음엔 이렇게 티나게 차별이 주어지는 공연이 아니기를 바라게 됐어요..
마땅한 홍보 정도는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마치 자중하기 위해 공연에 다녀 온 것만 같았죠.
장소만 옮겨 낸 저의 자중 객석~
2012년 2월 20일 월요일
신비로움
맹하린
비가 내리는 오후, 나는 한길로 난 앞마당에 고즈넉이 앉아 땅을 겨냥하듯 떨어지며 작은 갈색 꽃송이들을 순식간에 만들었다가 찰나적으로 사라지고 마는 수많은 빗방울무늬를 몹시 도취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나는 아홉 살이었다.
비에 갇혀 친구들에게 찾아 갈 수도 없었고, 친구를 대신해 줄 수 있는 동생은 우기(雨期)가 안겨주는 졸림에 참패를 당해 이미 낮잠 중이었다.
그렇게 마당에 한바탕 떨어지는 빗방울들과, 그 빗방울들이 내가 앉아 있는 처마 밑으로 모여 작은 시내를 이루며 떠내려가는 물줄기를 바라보던 나의 눈길은 우연히 마당 가운데로 옮겨졌다. 새끼 붕어 한 마리가 ,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의 앞마당 한복판을 팔딱이면서 이리저리 튕겨 오르는 광경을 불현듯 발견하게 된 것이다.
순간적으로 놀라게 된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강으로 내려가는 비탈길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빗방울 꽃무늬들까지 유심히 살펴보는 일을 여러 번 거듭하였다.
비바람이 가져왔을 수도 없고, 하늘에서 떨어졌을 수도 없고, 강에서 거슬러 올라 왔을 수도 없고, 땅에서 솟아날 수는 더군다나 불가능한 일이고.
그렇게 의문을 갖고 집착하니까 아무리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도 해답이 안 나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뒤집어 생각하기로 작정을 굳히자는 것이었다.
비바람이 가져왔을 수도 있고
하늘에서 떨어졌을 수도 있고
강에서 팔딱이며 달려 왔을 수도 있고.
가장 근사치에 가까운 해답이 생각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낚시하던 사람이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비를 피하느라 뛰어가다 한 마리 떨어뜨리고 갔을 수도 있고' 였다.
그럴 경우, 나는 그 의문을 어른들한테 캐묻는 아이는 아니었다.
되도록 모든 걸 내 상상에 맡기는 걸 특히 좋아했으므로.
고모의 심부름으로 친척이면서 친구인 명자 집에 다녀오는데 전방(前方) 50미터 쪽에서 참새 한 마리가 낮게 날아오고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나는 무의식중에 양팔을 펴서 몰이군의 자세를 취하며 새를 잡는 시늉을 했는데 웬일이었을까. 참새는 내 왼손의 바닥에 부딪쳐 순식간에 땅에 떨어지고 있었다.
재빨리 엎디고 손에 들어 살펴본 참새는 다행히 주둥이만 약간 다쳤을 뿐 , 상처까지는 안 입어 보였다.
눈을 멀쩡히 뜬 장님참새는 아니었을 텐데, 그렇게 중얼대며 집에 가져갔다.
상자에 넣어두고 사흘 동안 약을 발라주며 보살피다가 그만하면 다 나았을 것 같을 무렵이 되자, 굳이 다친 장소까지 가서 날려 보냈다
모이를 통 먹지 않아, 걱정하는 나를 보고 할머니가 한 말씀 하셨었다.
환경이 낯설거나 주둥이를 다쳐서 못 먹는 게 아니고 ,짐승들은 아프면 모이를 멀리하며 자연치유를 해낸다는 매우 간결한 설명이셨다.
이 얘기의 핵심은 제비 보살피기에 치중했던 흥부의 이야기에 계도(啓導)되어 참새를 낫게 해줬다는 데에 있지 않고, 순간적으로 팔을 벌린 손바닥에 운 나쁘게 주둥이를 다친 참새와의 치기어린 충돌에 대한 죄책감에 있다.
구태여 이런 식으로 열거하지 않더라도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여러 형태의 신비로운 일들은 예고도 없이 자주 일어났던 것도 같다.
신비로운 일은 신비로움, 그대로 간직해 두려한다.
신비라는 건 나물을 캐고 햇볕을 즐기는 것처럼 한가한 의미는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내가 써내는 글들이 과연 나와 다른 사람에게 한 치라도 이로운 건지 그런 건 되로록 되짚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난 아무도 알 수 없는 나만의 어떤 긍지를 지니고 있는 것만 같은 바로 그 점이 내게는 무엇보다 커다란 힘이기 때문이다.
나는 자주 상처를 입지만, 그 상처를 치유하는 데 1시간도 안 걸리는, 내 타고난 천성을 사랑하고 아낀다.
나는 마음이 아프면 구태여 밥을 굶지는 않지만 책은 굶는다.
그리고 날마다 글을 쓴다.
한때는 소설을 붙잡고. 또 한때는 시를 붙잡으며 , 최근처럼 펜 닿는 대로 쓰기도 한다.
그게 내 유일한 자연치유 방식이다.
틈틈이 읽던 <의뢰인>을 끝내고, 나는 지금 제럴드 그린의 <홀로 코스트>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행복한 무명시절>을 교대로 읽고 있다.
물론 예전에 읽었던 책들이다.
나는 때로 그런다.
이미 읽었던 책을 읽기도 하고, 두 권의 책을 같은 시기에 번갈아 읽어 내는 걸 즐긴다.
언제라도 다시 책을 읽을 수 있어 나는 고맙고 행복하다.
그리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새벽.
이런 새벽 때문에 사람들은 여행을 떠나고
나는 글을 쓸 것이다.
2012년 2월 19일 일요일
카니발(Carnival)
맹하린
아르헨티나는 어떤 면으로는 공휴일의 천국이라고도 표현할 수가 있겠다.
원래 토요일이나 국경일은 관공서나 은행, 그리고 학교 등이 문을 닫게 되어 있다.
국가적 차원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 되는 독립기념일이나 혁명의 날 등 두 셋은 제 날짜를 벗어 날 수 없도록 고정 시켰지만, 다른 국경일은 주중에 껴있을 경우 금요일이나 월요일로 옮길 수 있도록 제정해낸 법은, 전직대통령들은 물론이고 현 크리스티나 대통령까지 그 부분에 기여한 바가 지대하게 컸다고 본다.
토요일과 일요일까지 합하여 3일을 내리 연휴로 즐기고 휴식을 취한다는 사실은 말만 들어도 근사하고 신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르헨티나는 그렇게 몰아 놓은 연휴가 자그마치 평균적으로 한 달에 한 번 아니면 두 번씩을 맞고 보내도록 설정해 둔 것이다.
중산층이나 서민층의 표심을 깡그리 확보하려던 포석이라고는 해도, 국민들 대부분이 '케세라 세라(멋대로 돼라)! 놀고먹고 여행 다니기에 중독된 것처럼. 흥청대는 모양새로 나날이 발전하는 추세에 있다.
이번 월요일과 화요일 역시 카르나발(Carnaval=카니발)축제라서 또 다시 연휴다.
토요일부터 화요일까지 무려 나흘이나 누릴 수 있는, 말 그대로의 황금연휴가 닥친 것이다.
카니발(Carnival).
라틴어의 카르네 발레(Carne vale: 고기여, 그만), 혹은 카르넴 레바레(Carnem levare:고기를 먹지 않다)에서 어원이 생긴 카니발은 사육제(謝肉祭)라는 의미가 더 크다.
로마시대부터 그 기원이 유래되었다.
사순절 직전 3일에서 1주일 동안에 걸쳐 행해지는, 가톨릭 국가들에게 비중이 큰 축제라고 본다.
부활절 40일 전부터 사순절이 시작되는데, 예수그리스도가 광야에서 단식했던 날들을 기리기 위해 고기를 끊는 관습도 지키고 , 그 전에 고기를 미리 먹고 즐기자는 행사라고도 알려져 있다.
카니발 하면 브라질의 '리우 데 쟈네이로'가 특히 첫 손으로 꼽힌다.
아르헨티나도 전국적인 카니발 축제가 며칠씩 진행되지만, 춤이나 악기의 리듬부터 판이하고 각나라마다 개성이 다르기 때문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많은 차이가 느껴진다.
내 개인적으로는 브라질의 삼바가 곁들인 카니발에게 단연 최고의 가치와 점수를 주게 된다.
브라질 여인들은 몸매가 특히 아름답다.
완전 예술이다.
카니발은 하늘의 축복 같다.
2012년도의 축제는 아직 시작단계에 이른 상태여서 해가 지난 축제의 삼바춤을 올린다.
덜 야한 동영상으로 고르느라 나 스스로 꽤나 애를 먹었던 것 같다.
오롯이 정신을 쏟으며 지켜보게 되는, 정열과 광란이 함께 하는 축제가 아닐까 한다.
2012년 2월 18일 토요일
막차를 놓치고
맹하린
막차는 여섯시에 있었다.
토요일이었다.
대략 한 시간에 한 대 정도만 왕래하는 버스였다.
하숙생활을 하며 고교 1년생이던 나는 토요일 오후 집으로 가면, 일요일 오후에는 버스를 타고 다시 하숙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 월요일 아침 일찍 기차를 타고 곧바로 등교하는 방식을 더 좋아했다. 그만큼 집에 더 있고 싶어서였다.
(우리 동네는 버스가 늦게 시작하고 일찍 끝내는 운행을 했다.)
그날은 도서관에서 책에 넋 잃고 지내다가 그만 마지막 버스를 놓치고 말았다.
그럴 경우, 기차를 타고 대장촌에서 내려 15리(6Km)를 만경강과 들녘과 강변을 끼고 걷다보면 머잖아 집에 닿을 수도 있는데, 공교롭게도 그날은 마지막 기차까지도 놓친 형편이었다.
가을이라 해는 일찍 졌다.
이미 어스름이 도시 전체에 그물과 같이 서서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하숙으로 다시 돌아가도 상관은 없었지만, 일주일 동안 쌓인 집에 대한 그리움이 머리 끝까지 차오른 데다, 주말만이라도 하숙생에게서 해방이 될 사모님에게 크게 폐가 되리라는 느낌이 앞서자, 그런 발상 자체가 벌써 거부감을 안기고 있었다.
하숙의 주인아저씨는 우리 학교는 아니지만 모 여중의 교사였다.
그래서 나는 그분들에게 선생님과 사모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리와 전주의 중간 지역에 위치한 우리 집은 이리에서는 30리(12Km), 전주에서는 40리(16Km)였다.
나는 몇 가지 방법 중에서 30리를 걸어가는 일을 기꺼이 선택했다.
집까지의 도로 근처에는 고작 7개 정도의 마을이 있을 뿐이었다.
가는 길마다 만경강과 호남평야가 오른 쪽 아니면 왼쪽으로 전개되어 있는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행로였다.
아무리 밤이라고 해도 그 아름다움이 어디로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아름다움은 어둠 속에서도 또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무렵의 시골 길엔 가로등이 설치되지 않았으므로 주위는 너무나 어둡고 흐릿했다.
그나마 달빛이 있었다.
한 때는 친구들과 동생들 더불어 떼 지어 다니며 기차통학을 했었다.
동생들은 하숙을 병적으로 싫어해서 그때까지도 통학만 고집했다.
하루에 기차를 탈 수 있는 대장촌까지 아침저녁 합하여 왕복 30리(12Km)를 걸었고, 토요일엔 버스나 기차를 타지 않고 편도 30리(12Km)를 걷는 일을 고집하던 우리였다.
그런데 혼자였다.
길은 여전히 흐릿하고 어두웠다.
어떻게 집에 닿았는지 모른다.
사람과 자동차에게 특히 겁을 먹었다.
추수철을 틈탄 어떤 농부가, 지게에 볏단을 잔뜩 얹은 채 행길을 따라 멀리서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도로 옆 풀숲에 납작 엎드려 숨었다.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할 수가 있다.
그 농부가 걸을 때마다 지게 위에서 들썩이던 볏단들의 반항하던 소리.
“ 우리 논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요. 우리 가족들과 주인에게 돌아가게 해주세요.”
볏단들은 그렇게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며 아우성이었다.
그 농부가 차츰 멀어지자 나는 풀숲에서 빠져 나와 다시 길을 걸었다.
상황이라는 붓은 얼마나 많이 우리의 삶에 색칠을 잘 해내는지.
한편의 추상화처럼 그날 밤 어둠 속을 걸어 내던 일, 그 자체가 내겐 극적인 자유회복을 의미했을 것이다.
자주는 아니고, 멀리서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비친다 싶으면 나는 다시 풀숲에 엎디기를 서너 번 반복했을 것이다.
학동리와 우리 동네 중간에 있는 도깨비 방죽이 좀 두려웠지만, 나는 어려서부터 담력이 뭔지도 모를 때조차 담력쟁이였다.
막상 도깨비가 내 앞에 나타난다고 해도 무서워하기에 앞서 잔머리부터 굴렸을 테고, 그 잔머리 덕택에 그 난관에서 빠져나오는 걸 선호했던 , 나는 그런 아이였다.
잔머리에 대해 약간의 할 말이 있다.
하숙집 사모님과, 사모님의 남자조카이며 내 또래이던 전영선과 어느 날 시장에 다녀왔는데, 선생님은 낮잠을 주무시고 계셨다.
부엌으로 통하는 안방의 고리를 잠근 채였다.
내 방은 그 안방보다 더 안에 있었다.
현관이 따로 있었지만 그 문 역시 잠긴 채였다.
기다랗고 좁던 문틈으로 선생님의 잠든 모습이 약간이나마 보였다.
사모님과 전영선이 아무리 문을 두들겨도 너무나 깊은 잠에 빠지셨는지 도대체 기척이 없어서 더 걱정들을 했다. 느닷없이 정신을 잃으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럴 때 내 잔머리는 적절한 꾀를 불러들인다.
잠기지 않았을 때는 잠김 고리가 물음표를 거꾸로 물구나무 선 모습으로 달려 있지만, 잠겼을 때는 물음표가 옆으로 엎드려 뻗친 모양의 잠김 고리였다.
과일 칼을 문틈의 밑쪽에 비집듯 넣어 힘껏 문고리를 위로 밀어 올린 나.
“열렸다!”
정작 문을 열어 낸 나는 가만히 있는데, 사모님과 전영선이 합창을 했다.
그날부터 나는 머리가 좋은 애로 하숙집과 아주 가까운 곳에 살던 전영선의 가족에게까지 부상(浮上) 하게 된다.
결국 집에 닿아서 일주일 동안 못 마신 샘물부터 두레박으로 건져 올려 달콤하게 마셨다.
하물며 그립고 그립던 집의 밥을 먹었다.
이윽고 30리나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는 얘기를 가족과 나눴다.
일요일 하루를 강과 산과 들과 수리조합둑길을 걷고 그렇게 알뜰살뜰 지낸다.
틈틈이 집의 밥과 군것질을 하고.
그때의 버릇이 쌓여 나는 일요일만은 책을 읽지 않는다.
자연만이 내게 책으로 읽히는 날인 것이다.
그때 배웠다.
일단 길을 떠나기만 하면 , 희망적인 당도가 꼭 주어진다는 것.
나는 가끔 막차를 놓치고 기차도 놓치고 칠흙 같던 어둠 속을 걸어
크고 넓고 안위롭던 내 집에 닿는 꿈을 꾼다.
결국은 내 집의 화평을 만끽하는 장면에서 깨어나 현실과 이어지는 꿈이다.
내 사유의 끈은 때로 그 시절에 닿는다.
버스를 놓친 시기도 아니고
기차까지 놓친 막막함도 아니고
칠흙 속을 걷던 시간은 더욱 아니고
도깨비 방죽을 지나던 시절은 더군다나 아니며
드디어 내 집에 도착하여
대문 쪽에 있던 작두물이 아니라
안마당에 있던 샘물과
내 집 밥과 내 집 군것질과
내 동네를 산책하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지극히 평화로운 성채.
진돗개라서 진도로 불리던 개가 지켜주던 집.
온돌까지도 정겨워 여러 번 딩굴어 보던 집.
내 평생 가장 아늑하던 집.
내 인생의 정해진 구도.
그동안 세상을 다 가져본 것처럼 산뜻했던 날들.
뭔가 허전한 것처럼 이렇다하게 남아 있는 건 적을지라도
굳이 조바심치지 않고 단지 글이나 쓰면서 살아가면
그런대로 좋다고 긍정을 담게 되는
최근의 내 일상은 그러한 흐름이다.
계속 여일하게 살아낼 것이다.
내게 더없이 살가운 조국과 이 나라.
그리고 내 환경에게 손톱만큼도 투덜대지 않으며.
바쁨과 한가로움을 번갈아 즐기며.
나의 사소한 일상과 강물 같은 감성을 사랑하며.
2012년 2월 17일 금요일
이스털린 패러독스
맹하린
내 고객은 한국인이 대부분이지만, 현지인도 꽤 있고, 중국인과 인접국 이민자들, 특히 볼리비아노들도 여럿이나 있다.
현지인 고객들은 알음알음으로 점차 늘어가는 추세에 있다.
사실 인구로 따지자면 한국인보다 현지인과 볼리비아노들이 월등하게 많기 때문에 그점을 유의하고 고객관리만 잘 한다면 꽃가게를 운영하는 일에 크게 지장은 없을 것이다.
현지인 단골들은 내가 그들에게 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내게 친절하고, 내가 해낸 꽃장식을 맘에 꼭 들어 한다.
현지인 꽃가게와는 차원이 다른 솜씨라고 칭찬하는가 하면, 법정부케나 머리끈 꽃장식을 찾으러 와서는 나를 헤니아(Genia=천재,영재)라고까지 극찬을 아기지 않는 예쁘고 매력이 넘치는 세뇨리따(아가씨)들도 많다.
얼마 전, 우리 가게와 아주 가까운 J교회의 지하식당에 꽃다발 4개를 배달하러 간 일이 있었다. 일요일이었고, 약간 이른 점심시간이었다.
에어컨 시설이 잘 되어있어, 내겐 좀 춥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른들보다 먼저 챙겨 주려는 배려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었으나 유치부 어린이들 30여명이 점심식사 중이었다.
주방에서 봉사 중이던 자모 한 분이 꽃을 보더니 반기며 내게 다가와 꽃 대금을 지불했다.
나오면서 유심히 보니까 유치부 어린이들은 미역국에 김치가 곁들여진 약간의 한국식 반찬을 앞에 놓고 밥들을 냠냠 먹고 있었다.
어린이들이라 더 예뻤지만, 도란도란 밥을 잘 먹는 모습이 보는 내게 흐뭇함을 안기고 있었다
그점 하나만 보더라도 J교회는 살림을 제대로 꾸려가는 교회라는 인식이 새롭고 신선하게 각인되고 있었다.
다시는 볼 일이 없기를 속으로 바라게 되던 고객은 지금까지 한 사람도 없었다.
다시는 안 보고 싶은 사람은 항상 더 자주 보게 되는 이치이므로 내가 참을성 있게 잘 대했기 때문에 일이 그리 된 건지도 모르겠다.
우울증을 앓는 이들의 대다수가 그렇듯 겉으로는 행복해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을 짓는 고객도 때때로 만나게 된다.
우리가 손 붙잡지 못하고 있는 세상이, 때로는 쓸쓸함보다 더한 슬픔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우리는 매우 오랜 기간을 방황하는 일에 시간, 그리고 정신을 앗기고 소비하며 살아간다.
나는 굳이 돌이켜 볼 때가 있다.
소통을 주고받는다는 게, 얼마나 커다란 축복인지를 너무도 잘 알면서도 하찮은 이유를 내세워 자꾸만 결별을 예고하고 주고받고 그랬던 날들을.
이제, 기도하면서 나의 신에게 이렇게 찬양하고 싶다.
" 당신께서 항상 나를 헤매게 했던 것 같아도 , 언제나 중심을 잡도록 이끈 존재였던 때가 더 많았습니다. 주님!"
'이스털린 패러독스'라는 약간은 낡았지만 보고 들을 때마다 새롭게 되는 심리학 용어가 있다.
기본적이며 물질적인 수준이 어느 정도 달성된 후에는 부(富)의 증가가 마땅한 행복을 증진시키지는 못한다는 이론을 지칭한 말이다.
욕심이 적은 내게 그런 말이 가당치 않아서 참 다행이다.
일을 해낼 수 있을 때까지 열성을 모두 바쳐 해낼 생각이다.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다 해도 중노동이 아닌 일로 바꿀 계획 같은 건 없다.
그런데 언제 궤도에 오르지?
일이 있어서 나는 없던 힘도 생기고 있다.
문학이 없는 생애처럼 일이 없는 생은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이 안 된다.
일은 내게 문학의 바탕이고, 문학은 내게 일의 연속일 따름이다.
벌써 오늘의 일과를 틈틈이 진행 중이다.
휴가철이라서 금요일마다 가는 꽃시장을, 내 대신 다른 사람을 보냈었다.
이제 그 아름다운 꽃님들을 냉장고 안의 물을 채운 통에 살살 넣어야 한다.
어느 날의 나 또한 이스털린 패러독스의 매너리즘에 고민하는 모습을 보일 수도 있으려나.
2012년 2월 16일 목요일
내가 발견한 가장 아름다운 세상
맹하린의 생활 산책
아르헨티나 한국일보
1996년 7월 20일
나는 어떤 일이나 취미에 한번 집착하기 시작하면 다른 일에는 눈도 주지 않는 지독한 단점을 지니고 있다.
몇 년 전 골프에 흠뻑 반해서, 어떻게든 100을 끊어보려고 열성을 부려 본적이 있다.
특별히 코치를 받지도 않았는데, 일주일에 두세 번을 필드에 나가니까 자연히 100이라는 걸 끊어보게 되었다.
100을 못 칠 때도 많았지만 100이라는 걸 끊고 나니까 90을 끊어야겠다고 작정하게 되는 이 욕심을 어이할까.
지난 화요일 아침, 남편과 집을 나설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Jose Jurado 골프장 근처에 거의 닿았을 무렵, 앞에 가던 자동차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느껴질 정도로 짙은 안개가 자욱하게 펼쳐지기 시작했다.
안개는 그 희뿌연 날숨과 들숨으로 참 잘 만났다, 그러기라도 하는 듯 골프장 앞 도로와 자동차들을 들이마셨다 품어내기를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약간 걷혀져 앞의 차가 보인다 싶으면 다시 움직이고 자동차는 그렇게, 주춤주춤 마냥 걷다시피 걸음마를 떼어 놓고 있었다.
얼마나 지독한 농무였던지, 졸지에 안개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어찌 보면 자동차가 구름 위에 들어 올려져 있는 듯 한 착각까지 들 지경이었다.
평소, 어떤 일을 만날 때마다 나보다 지구력이 약한 성격인 남편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곧장 집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다고 약간씩 짜증을 피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견해로는 돌아가는 일이 더 복잡한 일로 예상 되었다.
나는 예외 없이 곧 개이게 될 테니까 계속 견뎌보자고 부탁처럼 말하고 있었다.
우리 내외는 각자의 의견을 내세우기 시작하면 서로 승리자다.
남편은 고집이라면 막무가내인 박력만점의 박 씨 고집이고, 나는 고집에도 맹점 투성이인 맹 씨 고집이기 때문이다.
그는 안 된다면 안 되는 쪽으로만 발달된 고집불통이고, 나는 된다면 되는 쪽으로 우겨대기에만 도통한 고집통이니 결국 둘 다 이기는 셈인 것이다.
다만 그럴 뿐, 크게 다투는 일은 없다.
서로의 의사를 존중하고 서로의 의사대로 각자 행동하면 그런대로 편하다고 여기는 탓에 아슬아슬한 쟁탈전까지는 한 번도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아리 같이 싫고 좋음이 분명한 나와, 사람이 너무 착해서 같이 사는 사람을 사람 좋은 쪽으로 지치게 만드는 그와 어디가 그렇게 천생연분이겠는가.
비록 같은 편은 못되더라도 서로 참아내는 게 각자를 위하는 제일 현명한 방법이지 싶은 것이다.
항상 자기 식대로의 생활 관념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는 우리 내외였다.
각자의 개성을 침범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품기 시작하면 그 관계라는 게 이미 성가셔지기 시작한다고 단정해 버리는 결의도 전혀 배제하지 못했다.
우리는 그토록 지극히 평범하지 못한 사고방식을 오랜 세월동안 숙성 시켜왔던 셈이다.
서로의 의견을 내세우는 데만 급급하지 않고 산뜻하게 제시한 각자의 합의점은 금세 결정으로까지 진전되기에 이르렀다.
그는 나를 골프장에 내려놓고 끝날 무렵에나 데리러 오겠다고 내세우고 , 나는 여기까지 와서 안개 따위 시시한 이유 때문에 그대로 되돌아 갈 수는 없다고 버틴 것이다.
나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개성 넘치게 각각 승리 하고야 마는 우리 내외의 특별한 성격을 매우 존중해 왔다.
5분이면 닿을 수 있는 길을, 졸지에 40분을 허비하고 골프장에 도착해보니, 나처럼 집념이 강한 사람들이 클럽에 앉아 안개가 걷히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꼭 이런 일을 짚고 넘어가고 싶지는 않으나, 그리고 하필이면 이런 일에까지 구태여 남녀의 차등을 두어야 한다는 일이 퍽으나 속상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밝힐 수밖에 없는 사실은 여자라고는 나 혼자였다는 점이다.
차의 트렁크에서 내 수레와 골프가방을 내려준 남편은 캐디 없이 혼자 칠거니까 넉넉잡고 세 시간 후가 되는 12시에는 데리러 오겠다면서 총총 떠나갔다.
생각하자면, 그렇게 가버리기도 쉽지 않고 그런 식으로 남아 있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평소의 나는 사르트르나 카뮈나 카프카처럼 실존주의에 가깝다.
모든 관념적인 것을 배제하고 거의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한다.
그래도 나는 역시 한국인의 딸임이 분명하다.
남편이 서둘러 골프장 입구를 떠날 때, 일말의 후회 비슷한 변화가 생겨난 것이다.
주춤대듯 망설이며, 그러나 용기를 내어 세 번쯤 남편을 불러 봤지만 다시 밀려든 극심한 안개가 남편이 탄 자동차와 내 목소리를 끌꺽 삼켜버리고 말았다.
날숨으로 토해냈을 입김을 안개가 다시 들숨으로 깊이 집어 삼켰을 때, 남편은 이미 찻길에 닿아 까마득히 멀게만 느껴지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강심장을 지니고 있다고는 하여도 현지인이 대부분이었지만 한국인들도 몇몇 있는 클럽에 용감하게 앉아 있을 수 있는 철판까지는 지니지 못했으므로, 나는 우선 전반이 아니라 후반 쪽에서 시작하겠다고 사무원에게 말하고 후반의 구장 쪽으로 미리 나갔다.
수레를 끌고 후반 쪽 구장에 도착했을 때, 다시 밀려든 짙은 안개가 천지를 온통 휘감을 듯 내려 덮이더니 눈앞에 들어 올린 손가락조차 바라볼 수 없는 상황을 조성했다.
세상 태어나(나는 이 말을 가끔 즐겨 사용한다.) 이와 같은 안개는 듣거나 본 적이 없어라.
그렇게 중얼대며 옴짝달싹 못하고 그냥 서 있었다.
짙은 안개는 부드러운 동아줄로 나를 속박하고 있었는지 전혀 움직일 수도 없는 형편이어서 15분 정도 눈을 감아 보거나 떠보는 일 밖에 이렇다하게 할 일이라고는 없었다.
내가 발견한 가장 아름다운 세상은 그때 비로소 펼쳐졌다.
마침 내가 서 있는 발치 근처에는 넓다란 인공호수가 있었고, 18개의 hole을 만들어 퍼팅연습을 할 수 있도록 조성해 놓은 퍼팅연습구장이 바로 근처에 있었다.
보송보송한 서양 잔디와 울타리 구실을 할 수 있게 둘러쳐진 회양목의 안켠에 베고니아와 팬지, 그리고 아네모네 꽃들이 유난히 정성스레 가꿔져 있었는데, 지극히 작위적이고 지나친 인공미가 넘쳐나는 그 풍광들은 평소의 내게 이렇다하게 큰 감동을 못 주어왔었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조화를 보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그러나 안개가 걷히면서 보게 된 그 인공미에는 유별난 섬세함이 깃들어 있었다.
안개는 높은 곳에서 낮은 데 까지 점차적인 모습으로 걷히는 중이었다.
맨 처음 높은 나무의 잔가지들, 그 다음엔 나무의 가슴둘레, 그리고 나무등걸, 그 다음에 낮고 암팡진 몸으로 에워싸듯 둘러서서 울타리를 이루고 있는 회양목.
그리고 베고니아, 아네모네, 팬지, 잔디 순으로 단층 같은 현상을 이루며 사라지는가 싶더니, 어느 새 차가운 공기로 인한 수증기가 살포시 하얀 서리로 맺혀져 성에들의 은빛 누리가 장식되어 있었다.
마지막 자태의 안개가 은빛의 뾰쪽뾰쪽한 보석이 내려 앉아 보이던 잔디의 성에로 머물 때의 절경에 대해선 지금 섣불리 표현하고 싶지가 않다.
특히 더 낮은 지역인 인공호수에 내려가 사그라지고 있던 안개의 마지막 모습은 묘하게도 환상을 본 것과 같은, 허무 그 자체였다.
만당추수의 일장춘몽에나 비할 수 있을까.
살아있다는 사실에 대한 유열을 그때처럼 강도 있게 인식해 본 일이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작은 순례객 되어 비온 뒤의 세상처럼 함초롬히 해맑고 깨끗해져 있는 절경 속을 은혜롭게 거닐었다.
곳곳에 낮은 자세로 앉아 있는 민들레, 바이올렛 등의 숙근초들
작약한 몸매의 잎사귀를 쫑긋 세우고 서있는 붓꽃의 청초함.
작은 무리를 지어 군무를 이루던 낭미초(강아지풀)들.
어디서 날아왔는지 작은 떼새들이 푸르르 잔디위에 내려 앉아 제 몸의 칼깃을 가다듬고 있음도 신선하고 눈부셨다.
섬섬 빛나는 치장을 하고 나타난 아침햇살이 졸린 눈을 부비며 기지개 켜듯 작연한 광채를 펼쳐낼 때의 청휘로움.
12시보다 약간 일찍 도착한 남편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며 나는 내가 만났던 그 아름다운 세상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꺼내지 않고 다른 얘기만 했다.
의리 없이(?) 떠났다 돌아온 남편이지만 내게 감탄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절경을 선물한 고마운 사람이라는 생각은 굳건히 맘속에 감추고 있었을 것이다.
스코틀랜드의 칼비니스트들이 인간의 죄를 벌하려고 창조해낸 전염병이 골프라고 했던가.
웬일인지 그토록 열심을 다했고, 극성을 바쳐 골몰했던 골프를 옷가게를 하면서 그만두게 되었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과도 같이 여겨졌고, 도대체 한 가지 일에 온통 정신과 시간을 소비해야 한다는 점에 차츰 회의가 느껴져서도 그랬겠으나, 나는 이미 문학이라는 열병에 퐁당 발이 빠져 있어 더 그랬을 것이다.
어떤 면으로 나는골프를 문학과 바꿔치기 했을 확률이 더 많다.
문학에 대해서 참 별 것도 아니라고 혹평들을 하지만, 내게 있어 문학은 너무나 매혹적이고 벼라별 것이고 소중한 장르와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날부터 남편에게 조금이라도 져주려고 노력하는 중이지만 우리 내외는 아직껏 서로 승리자다.
지는 게 이기는 거라는 아주 평범한 진리에 도통한 남편.
나는 그에게 감사하는 중이다.
겉으로 드러내어 감사를 하게 되면 그는 분명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면서 나의 맹한 고집을 우지끈 소리가 나도록 꺾으려 들 게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남편에게 들킬까를 염려한 나머지 마음속으로만 고마워한다.
결국 우리 내외 중에서 진정한 승리자는 단연 남편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남편이여!
나의 고집은 영원할 것입니다.
2012년 2월 15일 수요일
밸런타인데이
맹하린
아르헨티노들은 대략 몇 년 전부터 2월 14일에 지켜져 왔던 밸런타인데이를
Dia de los enamorados(연인의 날)로 과감하게 그 명칭을 바꿨다.
혹자는 초콜릿회사의 장난일 거라고 하고, 또 누군가는 꽃시장 측의 술수일 확률이 더 많다고도 한다.
현지인 고객 중의 몇 분에게 일부러 질문을 해본 적이 있다.
세계적인 명칭을 구태여 바꿔야 했을 가장 근접한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대답마다 한결 같았다.
어떻게 여자한테서 꽃을 받느냐는 얘기였다.
"하물며 초콜릿을?"
그들은 그렇게 반문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우리 남자의 영역을 그런 일에까지 침범당하면 곤란하죠. 있어서도 있을 수도 없는 아이러니입니다."
여름휴가철이라서 투박한 기념일로 뒷전에 밀릴 것 같아도, 한국인 2세들은 아침저녁으로는 춥고 서늘해지는 2월달에까지 바다로 떠나지는 않는다.
1월경에 1.5세대나 2세대들이 다녀오면, 2월에는 1세대들과 교대하는 게 정석이기 때문이다.
사실, 밸런타인데이에는 10대와 20대와 30대가 대부분이고, 여성은 손으로 꼽을 정도이며 거의 남성 고객이 주류를 이룬다.
40대도 없지는 않지만, 40대의 여자들은 살림 맛을 알아 가는 시기이므로 꽃에 앞서 현찰을 요구하는 추세라고 들 한다.
나는 밸런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가 닥치면, 고객에게 보답하는 의미로 초콜릿이나 사탕을 내가 먼저 준비해서 꽃에 얹어 보내기를 즐겨 실행해 왔다.
어떤 고객은 친구들을 대표해서 각각 다른 가격의 꽃다발과 꽃바구니를 여럿이나 주문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땐 4백 페소(80달러 상당)나 한 송이나 초콜릿의 비중을 똑 같이 해낸다.
내게는 똑 같은 고객이기 때문에 차등을 두기가 싫은 것이다.
어제는 다행히도 예년에 비해 꽃도 초콜릿도 턱없이 부족하여 두 번이나 더 구입해 오게 되는 이변이 있었다.
바쁜 날은 언제나 그러하듯 배달 사고가 한 둘 있다.
가사도우미들이 주인도 부재중이고 열쇠도 없다면서 현관문을 안 열어준 까닭에, 레미세로(대절용 자가용 기사)들이 꽃을 도로 들고 온 예다.
주문한 남편 분들에게 전화를 하니 퇴근할 때 찾아가겠단다.
그럴 때 나는 레미스 비용을 굳이 계산에 넣지는 않는다.
그걸 꼭 손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온 것이다.
고객의 면전에서 꽃이 안 남았다, 초콜릿도 없다, 그렇게 섭섭함을 안기는 일이 너무나 겸연쩍어 7시 반에는 서둘러 셔터를 내렸다.
하지만 그때 마침 전화를 해온 단골 고객 아드리안이 때 아닌 말썽이었다.
잘 생기고 친절하고, 봄의 날이나 어머니날뿐 아니라 직장 상사와 현지인 동료들의 꽃을 모두 도맡아 주문하고 실어가고 그러던 우리나라 대한민국 건아 아드리안.
아베쟈네다의 한인 가게에서 Encargado(지배인)로 일하는 아드리안.
문 닫을 시간에야 겨우 전화로 주문을 하던 아드리안,
아침나절에 직장의 주인과 동료들의 꽃을 일찌거니 가져가고 막상 자기 꽃은 퇴근 무렵에야 챙길 수밖에 없을 정도로 언제나 바쁘게, 밤늦도록 일하는 아드리안.
10분쯤 지나면 온다더니 9시 가까워서야 나타난 아드리안.
가게의 전화비용을 최대한으로 줄이기 위해 나는 지방, 핸드폰, 국제전화 모두를 받기만 하고 보낼 수는 없도록 전화국의 서비스를 받아온 지 벌써 7년쯤 되었을 것이다.
공교롭다. 내 핸드폰은 카드를 넣기만 하면 벌써 더 이상 잔액이 남아 있지 않다고 앵무새처럼 종알대기를 좋아해서 카드는 어쩌다 넣는데.
아들의 핸드폰은 하필 카드의 잔여액이 아슬아슬 달랑거렸으나 다행히 겨우 신호만 전달은 되었나 보았다.
이웃 가게 모두 이미 문을 닫은 상태였다.
9시가 넘은 시각에 끼이익~ 급정거하면서 아드리안은 도착했다.
"죄송합니다. 공장에 꼬르떼(바느질을 필요로 하는 재단만 끝낸 미완성 의류) 일감을 가져다주고 그러는 과정에서 그만 잊고 말았어요. “
그의 음성은 자동차의 엔진만큼이나 가르랑 거렸다.
목에 모래가 몇 개 걸린 것처럼 깔깔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아드리안 같았으므로 나는 웃고 싶은 여력이라고는 남아 있지 않았는데도 미소를 남발하며 꽃바구니를 건네고 있었다.
그가 너무 미안해 있어서 내가 더 미안했을 것이다.
마지막 시간의 현지인 여인 두 명은, 서로 일행인 게 분명하면서 전혀 일행이 아닌 것처럼 교대로 왔었지만, 더 이상 꽃이 안 남았다는 설득 위에 웃음까지 버무려서 살살 되돌려 보냈었다.
왜냐하면 그녀들은 지폐지만 가짜를 내고 큰 거스름을 받아가려는 '거스름 도둑들' 이기 때문이라서다. 그녀들은 꼭 자가용으로 움직인다.
또한 현지인답지 않게 빨리빨리라는 노래를 잘 부른다.
기동력까지 갖췄겠다, 어서 튀기 위해서다.
이만하면 나도 관록이라는 게 붙은 건가?
꽃 장사와 고객 관리와 도둑 퇴치에 있어서…….
이상하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끝내고 자리에 누우면 서로 스크럼을 짠 피로의 누적은 서둘러 도망치고 새로운 에너지가 채워지고 있음을 스멀스멀 감지하게 된다.
나 이런 환경이라서 나와 나이와 근심을 모르고 시적시적 잘도 살아가나 보다.
아침이 되려면 아직 3시간 정도 남았다.
나는 정상이 아닌 게 확실하다.
어제 그렇게나 쉬지 않고 일했으면서 새벽이 너무 거뜬하고 상쾌하다.
네 시 반에서 다섯 시에는 일어나 뭔가를 써내게 되는 아침이다.
어차피 인생의 아침은 희극이나 비극 아니면 무사태평이다.
내가 정신을 함빡 몰두할 수 있는 노동이 있어 나는 매번 감사롭다.
내게 있어 일은 바다에 닿은 것과 같은 느낌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바다에 닿았을 때는 바다만 바라보게 된다.
일 앞에서는 일만 생각나서 일이라는 존재가
꼭 바다처럼 여겨져 생각 할수록 참 근사하다.
굳이 떠나지 않아도
내 시야는 지금 온통 바다다.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바다.
그 생동적인 바다가
오늘도
아름답게 출렁이고 있다.
2012년 2월 13일 월요일
반대 현상
맹하린
인류가 살고 있는 천체인 둥근 지구의 끝에서 끝에 위치해 있는 관계라 그럴까.
한국과 아르헨티나는 반대 현상이 의외로 많다는 걸 항상 신기한 맘으로 접하게 된다.
말씀을 재밌게 하시는 교민분들은 항상 이렇게 표현하신다.
"한국에서 땅을 똑바로 파 들어가면 종국에 가서는 아르헨티나가 나옵니다."
그 말씀이 맞을 것도 같다.
여러 반대 현상들을 대하게 될 때마다 그런 공감이 안 드는 건 아닌 것이다.
* 제일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건, 밤과 낮의 시차(時差)가 12시간이나 다르다는 점이다.
즉 한국이 밤 12시면 아르헨티나는 낮 12시인 것이다.
* 계절 또한, 약간 반대라면 모를까 확실한 반대다. 한국이 여름일 때 아르헨티나는 겨울이고, 한국이 한겨울이면 아르헨티나는 한여름이다. 그래서 아르헨티나는 눈이 내릴 가능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땡볕과 무더위 속에서 크리스마스를 맞고 보내게 된다.
* 한국은 여름에 습기가 많고 겨울에 건조한 편이지만. 아르헨티나는 여름에 건조하고 겨울에 습기가 많다.
* 숫자를 셀 때 한국은 엄지부터 시작하는데 비해, 아르헨티나는 새끼손가락부터 세고. 한국은 손을 편 뒤 손가락을 접으며 세지만, 아르헨티나는 먼저 주먹을 쥔 뒤 손가락을 펴나가면서 센다.
* 코를 닦을 때, 한국은 콧등에서 아래로 내려 쓰다듬듯 닦는데, 아르헨티나는 인중에서 올려붙이듯 위로 닦아낸다.
* 걸레나 행주, 그리고 빨래를 짤 때, 한국은 몸 안쪽으로 모으면서 짜는데, 아르헨티나는 몸 바깥 쪽으로 짠다.
* 약혼식과 결혼식, 생일 파티 등 모든 잔치나 행사는 밤에 치른다.
* 사람을 오라고 부를 때, 한국식으로 손등을 위로하고 흔들면 가라는 뜻이다.
손등을 바깥으로 하고 손가락이 허공 쪽을 바라보게 한 뒤 흔들어야 오라는 뜻이다.
실제로 한국식으로 부르자 계속 갔고, 아르헨티나 식으로 바꾸니까 와줘서 실소(失笑)를 면치 못한 적도 있었다.
* 쌍둥이를 낳았을 경우, 한국은 세상에 먼저 나온 아기가 형이나 언니가 되는데 , 아르헨티나는 나중에 태어난 아기가 형이고 언니가 된다.
씨가 먼저 심겨졌다는 원리가 바탕이 된 의미라고 하는데, 꽤 그럴듯하게 생각되는 게 한국의 쌍둥이들은 대부분 형이나 언니가 동생보다 더 작았던 게 아닌가 하는 기억이 새롭다.
* 껍질이 흰 고구마는 밤고구마이고, 껍질이 붉은 고구마는 물고구마이다.
* 25페소(5달러 상당) 가격의 물품을 사면서 50페소를 내면, 거스름을 받을 때 먼저 5페소를 받으면서 삼십 페소, 사십 페소, 오십 페소, 하면서 5페소와 10페소의 지폐를 하나씩 받는데, 50페소까지 채워지면 아귀가 들어맞는 계산으로 끝을 맺게 된다.
* 상현과 하현의 달이 지닌 현도 한국과 반대다.
그밖에도 반대 현상은 많지만 일일이 모두 나열하는 일은 다음 기회로 미루겠다.
굳이 중국철학의 지배원리인 음양오행설을 따지지 않더라도 아르헨티나에서 병약한 날들을 보냈던 사람일지언정 한국이나 미국에 다니러 가서는 거뜬하게 건강을 되찾아 오기도 한다.
반대로 한국이나 미국에서는 선병질이던 사람이, 아르헨티나에 오면 쉽게 건강을 되찾는 경우까지 있어 보통문제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일종의 신비로움으로 느껴지던 예를 수 차례 보아왔다.
우주와 인사(人事)의 상관관계는 오묘하고 신비로운 영역인 게 확실한 모양인데, 태어난 나라를 멀리 떠나와, 반대되는 현상이 파다(頗多)한 이치를 자주 겪고 살면서도 굳이 반대가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만은 아직껏 튼튼하게 건재하고 있음을 수시로 자각처럼 붙들고 있다,
구태여 손가락을 주먹 쥔 뒤 새끼손가락부터 세고 싶지 않을뿐더러, 걸레나 행주 그리고 빨래를 짜 낼 때, 굳이 몸 안에서 바깥 쪽으로 비틀며 짜내고 싶지 않다는 데서 우리 이민자의 강한 의지력은 살아 움직이는 게 아닌지 감히 역설하게 된다.
산책도 산책이지만, 꽃을 다루면서
설거지 하면서, 집이나 가게의 창밖을 내다 보면서
나는 글에 대한 영감(靈感)을 참으로 많이 받아 왔다.
실생활에 있어선 잘 다루지 못하나
글을 쓸 때는 반대 현상을 리듬처럼 띄우는 경우가 간혹 있었을 것이다.
전투에서 병력배치에 따라 승패가 판가름 나듯
작곡을 하는 과정에서 음계의 배열과 위치에 다라 색다른 음악이 탄생되듯
기존의 공식에 얽매이지 않고 사유(思惟)할 때
새로운 창조의 가능성이 그에 알맞는 열매를 맺는 게 아닌가 싶어진다.
아르헨티나의 개미는 먹이를 머리에 이고 간다는데
사실이 그런지 언제 그 점을 확인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해 왔으면서
아직도 그거 하나 제대로 찾거나 실행하지 못했다.
하수도로 빠져 나가는 물도 반대로 휘돈다는 학설이 있다고 아들이 귀뜸을 해줬으므로
그점을 제대로 실감하려고 아무리 자세히 봐도 정확성을 못 찾겠어서 진즉 포기한 상태다.
남들은 휴가 여행이다, 얼음산이다, 신나게 나다니는데
나 겨우 일에나 몰두하는 지독한 반대쟁이???????
이 무더위에 글이나 끼적이고 있는 나여.
대단한 반대 현상 속의 나여!!!
2012년 2월 12일 일요일
버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2000년 재아 호남향우회 회지에 게재
맹하린
남미의 주요 국가들이 여럿이나 인접되어 있는 아르헨티나 국경에선, 이웃나라를 여행할 경우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는 무비자 혜택을 나라마다 주고 받고 있다.
하지만 몇 나라는 유독 한국인만을 예외로 취급하며 국경에서 따로 비자를 받게 하고 까다로운 절차까지 밟게 만든다.
비자를 받고 나면 하물(荷物) 검색이 실시되는데, 차안은 상관없지만 자가용의 트렁크나 관광버스의 짐칸은 필수적으로 조사를 받게 돼 있다.
3년 전 가을, 어느 단체의 개별 초청을 받아 우루과이 온천관광을 다녀오게 되었다.
그 모임엔 숙면(熟面)의 여인들이 대부분이었고 나의 문우이자 모 일간지의 사주되는 L실장도 눈에 띄어 나는 그 모임의 일원이나 되는 것처럼 금세 편하게 어울릴 수가 있었다.
관광회사의 한국인 직원은 버스가 떠나기 전 한바탕의 훈시(訓示)를 했는데 , 한국인 낚시꾼들의 무질서가 그 예로 들춰졌다.
"관광회사의 특별한 지시가 없어도 아르헨티노들은 버스에 탈 때 쯤이면 평상복으로 바꿔 입고 어획물들을 짐칸에 넣는 일을 기본으로 해냅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인들은 비린내 나는 낚시장비는 물론이고 붕어나 잉어까지도 차안으로 들고 타려고 하시죠. 그래서 운전기사들과 적잖은 마찰을 벌이게 됩니다.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우루과이 국경에선 과일종류를 무조건 압수합니다. 그점 꼭 명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치나 마른 오징어도 문제지만 전통음식이라고 봐주는 편인데, 과일만은 방역(防疫)을 위한 그들만의 대책이니까 제발 반출금지임을 꼭 염두에 두라면서 그 직원은 다시 한 번 토를 달며 강조하기를 잊지 않았다.
그 한국인 직원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여기저기서 우려와 탄식과 갑론을박이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 짐칸에 이미 두 상자의 사과가 실린 모양이었다.
우루과이 국경에서 비자 받는 복잡한 절차를 끝낸 건 그나마 수월한 일이었다.
주술을 외우며 요행을 기대하던 임원들은 검색을 지켜보려는 의도에서 버스를 하차했는데, 짐칸을 열자마자 김치냄새와 밑반찬 냄새를 압도한 건 새콤달콤한 사과들의 향기였나 보았다.
가차 없이 사과상자를 압수당하게 된 건 마땅하고 옳은 일이 된 것.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남미인 들은 그럴 경우 절대로 상대방을 쓸까스르지 않는 기본적인 예의를 갖췄다는 점이다.
진지한 설득작전으로는 승산이 적겠다고 파악됐는지 임원들은 이내 분통 터지는 표정들을 지었다. 그뿐 아니라 합세하여 대들기 시작했다.
반박이 점점 거세어질수록 전혀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정중한 태도로 대처하던 검사원들은 이대로는 못 미더우니까 차안까지 조사해야겠다면서 이미 차안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S실장과 나는 도대체 상대가 못 되는 그 의견충돌을 속수무책 지켜볼 수밖에 별다른 도리라고는 없어 보여 내심으로 참 안타까웠었다.
애꿎은 사과 두 상자는 속속 오고 가는 관광객들이 훤히 내다보는 장소에서 소독약이 뿌려지기 일보직전의 상태에 직면하기에 이르렀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남미인 들은 남의 일에 드러내 놓고 구경하기를 꺼리는 지독한 개인주의자들이라는 점이다.
임원들의 항의가 별다른 효과를 못 보는 듯 싶었던지, S실장은 내게 짧은 신호를 보내며 먼저 차에서 내렸다. 연장자인 그녀의 눈짓에 나도 자동적으로 차에서 내려야 했다.
사근사근 여성스러우면서도 논리 정연한 면모가 더 강한 S실장은 검사원들에게 보다 삭삭 하고 친절한 음성으로 양해를 구하기 시작했다.
S실장과 나는 미리 중요한 행사의 사회를 함께 보기로 약속이라도 해낸 것처럼 서로 말을 조리 있게 나눠서 건네고 있었다. 그녀가 검사원들을 향해 한소절을 얘기하고 나를 쳐다보면, 내가 다른 한 소절을 검사원들에게 건네고 그녀를 쳐다보는 방식이었다.
" 우린 사전지식이라고는 전혀 없었기 때문에 진정 본의 아니게도 당신들의 법에 저축되는 사건을 초래하게 되었나 봅니다. 그점 매우 죄송하게 생각하는 중이니 가능하다면 약간의 배려나마 베풀어 주 시기 바랍니다."
"조금은 아시리라 여겨집니다만, 우리 한국인들은 모두 하나같이 부지런함을 추구하는, 어떤 면으로 보면 일 중독자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 일하면서 생활해야 한다는 건 우리 한국인의 자랑스러운 민족성이기도 하죠."
"누구나 피땀 흘려 일하는 걸 생활원칙으로 삼아왔기 때문에, 우리 한국인들에게 있어 먹는 음식을 함부로 버리는 일은 철칙에 가까운 금기(禁忌)사항이 되었지요."
"뭐랄까, 낭비도 낭비지만 일종의 죄악으로까지 간주하는 관습이 우리도 모르게 뿌리박히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이 사과를 우리가 한 두 개씩 먹고 떠나도, 당신들의 업무에 차질이나 지장을 끼치는 일이 아니라면, 부디 그리 할 수 있도록 선처해 주면 고맙겠는데……."
분명히 말하건대 나와 S실장은 그때 그렇게 나오면 설마 그들이 사과정도는 적당히 통과시켜 주지 않을까 그런 착각 따윈 없었던 게 분명 했다.
당장 버려지게 될 사과 두 상자가 아깝기 짝이 없다는 평소의 절약정신에서 급조된 제안이었을 확률이 더 크다.
결국 차안까지는 들고 오를 수 없으니까 장소를 옮기지 않는 선에서 그렇게 하도록 하라는 지시에 의해, 하필 쓰레기통 옆에서라도 당장 해결을 봐야 했다.
검사원들의 허락을 전해들은 50여명의 여인들은 순식간에 하차했다.
S실장과 나는 마치 '사과 빨리 먹기 대회' 에 심사를 나온 위원들처럼 검사원들과 함께 말없이 지켜봐야 했다,
허둥대듯 웃으며, 또는 뭉텅뭉텅 사과를 베어 먹고 있는 여인들을 일종의 비장미 까기 느끼며.
사람이 먹는 과일을 쓰레기통에 집어넣고 소독약을 부어버리면 아까운 건 물론이고 죄를 짓는 기분이 들 거라는 사고방식을 조합하여 서둘러 사과 먹기를 끝낸 우리의 대단히 용감하면서 거룩하고 , 떳떳하고, 의젓하게까지 보이는 일행들은 드디어 버스에 올라 차가 흔들리도록 커다랗게 웃어댔다.
두 개의 사과를 넓지도 않은 치마폭에 감춰들고 올라선 어느 여인의 득의양양한 기지(奇智)
에는 특별상이 주어졌다.
미리 준비했던 상품 중에서 "재치상'이라는 제목으로 주어지게 된 것이다.
나라와 나라의 경계(境界)에서 꼭 지켜야 할 국경 법을 너무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떼까지 쓰며 사과상자를 묻혀 들여가려던 동양의 작은 아침의 나라 여인들.
그녀들을 상대로 고단수의 깔끔한 임무를 나름대로의 대응으로 굳건하게 실현하던 우루과이 측 검사원들 앞에서 세상에, 외국에 나와 살면서까지 자랑스럽게 알뜰살뜰한 우리 대한민국 여인들의 우직과 소박함이라니!
그런저런 복잡한 검사 과정을 여러 번 부대끼면서 지내는 중이어서였을까.
무한정하게 펼쳐진 갈대숲과 한국을 닮은 산야와 강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어 집과 가족과 일상생활의 자질구레한 문제들을 거의 잊고 지냈으며 참으로 의미 있었던, 즐거움과 폭소의 연속이었던 2박 3일이었다.
사과사건 때문에 엎치락뒤치락 더 많이 웃어대면서.
2012년 2월 11일 토요일
열어 보아라
맹하린
'쟌톰이라는 영국소년이 있었다. 고등학생의 신분인데도 너무 공부와 담을 쌓고 사니까, 그의 부모는 속을 무척 태웠다.
소년의 아버지가 협상을 제시했다.
"나는 네가 지금이라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옥스퍼드 대학에만 들어가 준다면 나중에 너의 큰 소원을 꼭 들어주겠다."
평소부터 빨간 스포츠카를 갖고 싶었던 쟌톰은 그때부터 열심히 공부하였고, 그 결과 영국의 명문 옥스퍼드 대학에 합격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합격증을 받았을 때, 쟌톰은 먼저 아버지에게 보여 드렸고 어서 빨간 스포츠카를 사달라고 말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성서를 가져다주면서 루가 복음 11장을 읽어보면 된다고 하셨다.
쟌톰은 분노가 치밀었다.
약속이 틀리지 않은가.
그래도 아버지는 끝끝내 루가 복음 11장만 고집하셨다.
약속을 지키지도 않고 성서 읽기를 강요하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워, 쟌톰은 아버지에게 미운 감정까지 생기는 걸 간신히 참아 냈다.
입학식이 있을 때에도 손수 성서를 챙겨 주면서 기숙사에 닿으면 반드시 루가 복음 11장을 읽어야 한다고 거듭 그 말씀만 반복 하셨다.
하지만 쟌톰은 약속을 깬 아버지가 섭섭해서 성서는 결코 읽을 생각도 없었고 , 되레 한 구석에 처박아 두고 일부러 외면하게 되었다.
4년의 학창 시절, 그리고 방학이 되어 집에서 지낼 때조차, 아버지는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성서를 읽어야 한다고만 우기셨다.
졸업식을 마치고 ,기숙사 짐을 정리할 때, 학교에 오신 아버지는 성서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아들이 보는 앞에서 루가 복음 11장을 펼쳤다.
거기엔 빨간 스포츠카를 사고도 남을 수표 한 장이 꽂혀 있었다.'
아버지가 그렇게도 두드리고 열어보고 찾아보라고 했는데도 쟌톰은 오로지 미움이라는 한 가지에만 집착한 관계로 많은 세월을 한시도 원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지냈던 것이다.
나는 내가 생업과 씨름을 하기에는 너무나 경제관념이 협소하고 빈약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어디서나 아무거나 사지는 않더라도 어쩐지 저축이 잔뜩 든 통장을 지닌 것처럼 당장은 그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는 뿌듯하고 부유한 느낌을 언제나 간직하며 산다.
나는 연금신청도 하지 않았다.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에게 돌아가야 할 몫이라고 단정하기 때문이다.
지인 하나는 이 나라에서 제법 재산을 축적했던 분이었는데, 아베쟈네다에 있는 몇 개의 가게와 집을 몇 년 전에 처분하였다.
그리고 본국에 환국하여 전라남도 어느 도시, 경치 좋고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펜션을 운영하며 생활하고 있다.
(도시의 이름은 알지만 비밀에 부친다.)
문제는 최근의 그 내외가 아르헨티나에서의 생활을 몹시 그리워 한다는 것이다.
도우미를 구하기도 쉽지 않아서 투숙객들에게 직접 식사를 제공해야 한다는 점이 가장 힘들고, 생각했던 것보다 손님도 많지 않다는 얘기였다.
아직은 50대라서 도 닦고 사는 것만 같은 그런 생활이 정신적으로 많이 고달프다는 것 같았다.
나는 내 나이 같은 걸 언제나 잊고 많은 걸 버리면서 살아왔다.
사람이 자유로움을 얻으려면 잘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다.
난 지금도 많은 것을 부여 받고 있을 것이다.
뭔가를 얻으려면 다른 뭔가를 잃어야 한다는 말은 요즈음의 내게 진리처럼이 아니라 곧 진리다.
사람은 어차피 약간의 자기 의도와 약간의 세상 진리로 살아가고 행동하게 되어 있다.
내가 되도록 발가락이 가장 잘 들어나 보이는 슬리퍼를 선호하는 첫째 이유는, 더 낮아지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대지를 더 가깝게 감촉하려는 의도도 많을 것이다.
그 무엇보다 더 확실한 모티브가 된 것은 25년 동안 너무 팍팍하고 너무 힘겨운 발걸음을 걸어 왔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식의 슬리퍼는 날이 추워지면 결코 신을 수 없는 게 단점이다.
그리고 바닥에 물이 있다거나 비 내리는 날엔 절대로 신으면 안 된다.
(어느 책을 읽다가, 절대라는 말은 절대 사용하면 안 된다고 해서 하하 웃은 적이 있다. )
아무리 그래도 슬리퍼니까 절대라는 말을 사용한다.
겨울엔 절대 안 신지만 나는 바닥에 물이 있거나 비 내리는 날엔 절대적으로 신는다.
안 넘어지려고 살금살금 걷는 일도 어떤 면으로는 스릴 만점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혹은 내가 이 세상에 거저 태어난 게 아니고 어떤 섭리에 의해서 보내졌다고 한다면 자신만의 쾌락이나 자만에 정신을 앗기고 사는 건 진정 두려운 일의 하나가 된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해답이지만 신의 약속이 발견되지 않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껏 쟌톰처럼 꼭 읽으라는 성서를 책장 한 구석에 방치해 둔 날들을 살아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라도 두드리고 열어 보고 찾아보는 생을 살아나가고자 한다.
겉으로 발견되지 않는 해답이다.
신의 안 보이는 약속 아닌가.
당연히 발견하지 못할 때가 주어지는 것이다.
2012년 2월 10일 금요일
긴 머리의 세르히오(Sergio)
맹하린
1998년 재아문협에서 발표
가게의 양쪽 진열장 사이의 통로로, 현지인 청년이 템포 빠른 랩송을 부르면서 들어온다.
지체부자유자처럼 손발이 각각 불편해 보인다.
어찌 보면 체머리를 흔드는 것 같기도 하다.
길고 치렁치렁한 머리는 산발에 가깝다.
하루의 일과나 되는 것처럼 언제나 한두 명 나타나는 거지겠거니, 그렇게 앞당겨 생각하며 카운터의 서랍을 연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부자유스러워 보이던 청년은 금세 멀쩡해 지면서 불쑥 잔돈을 바꿔 달라고 요청한다.
"세르히오!"
이웃 가게 ' 세종 인쇄소'의 현지인 종업원이었다.
기다랗게 웨이브 진 머리를 한껏 흔들며 랩송에 맞춰 요란스레 춤까지 추면서 들어 온 모습은 내 쪽에서 불구자로 착각하기에 한 치도 모자라지 않았던 것이다.
잔돈을 바꾸고 나간 후에도 얼빠진 사람처럼 나는 한참이나 웃고 있었다.
세종 인쇄소의 H가 평소에 왜 그리 세르히오를 못마땅하게 대하는지가 약간이나마 납득되는 기분이었다.
H는 하루에 서너 번 쯤 우리 가게에 들러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다 간다.
한 때는 아침마다 박카스를 사다줘서 , 내가 부탁처럼 사양했더니 지금은 안 그러고 있다.
나는 인스턴트식품이나 드링크 종류를 거의 즐기지 않는다.
H는 중독 수준이 되었다고 하는데, 나는 중독되는 걸 왜 즐기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족속이다.
그렇지만 나는 H의 천생 여자이고, 차분하면서 참을성 많은 성격을 몹시 아끼는 편이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 나는 착하고 순수한 H가 왜 세르히오한테만은 지나칠 정도로 완고한 자세를 고수하는 것일까를 고개까지 갸웃하면서 자주 의아해 오던 터였다.
H의 표현을 빌리면 이렇다.
서양에도 엄연히 존댓말이 존재하고 있고, 되도록 명령형 같은 건 절친하지 않은 윗사람에게는 절대로 삼가야 하는 철칙이 있는데 세르히오는 건방지게도 주인에게 반말정도는 다반사이며 명령에다 잔소리까지 수시로 해낸다는 얘기였다.
H의 가까운 곳에 가위가 있으면 한 발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본인이 집어가지 않고 대뜸 그런다는 것이다. 그러저러한 단점을 늘어 놓자면 한두 가지가 아니란다.
"세뇨라(아줌마), 거기 가위 좀 집어줄래요? 세뇨라, 화장실의 수도꼭지 좀 제대로 잠그도록 하세요.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면서 몹시 듣기 싫은 소리를 내고 있는데 안 들려요? "
특히 이 부분만은 정말 못 참겠고, 분하기도 하다며 H는 단박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흥분한다.
"아쥼마, 가게 좀 비우지 마세요.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고 되도록 옆 가게에도 놀러 가지 마세요. 아쥼마의 바이사노(동족)들이 성큼 가게에 찾아오면 세뇰(아저씨)도 없고, 아쥼마도 없는데, 세뇰과 아쥼마만 찾는다구요. 대다수가 언제 오는가, 라는 이 나라 말조차 할줄 모르면서, 세뇰? 세뇨라? 그렇게 캐물어 댈 때는 내가 죽을 맛이랍니다. 아시겠어요? 그 정도도 그런대로 괜찮아요. 꾸안도(언제)를 꾸안또(얼마)라는 말로 바꿔서 말하고 있는 것조차 못 알아채는 데다, 지치지도 않고 깐또(노래)라고까지 엉뚱한 말로 소리칠 때면 내가 정말 얼마나 쩔쩔매며 황당해지는지 알기나 하세요? "
나는 웃음이 마구 터지려는 걸 겨우 참는데 H는 아직 불만이 더 남았나보다.
"제일 괴로운 건 그 지긋지긋하게 긴 머리, 산발하고 장발인 그 곱슬머리는 진짜 못 봐 주겠어요. 부림을 당하는 주제에 부리는 사람처럼 구는 게 차마 견딜 수 없어 내가 오죽하면 그 애 하고 싸움을 다 한다니까요."
그랬다. H가 세르히오를 다그치는 광경과 서로 다투는 장면을 나는 여러 번이나 목격했었다.
그래도 H는 아직 더 남았나보았다.
"어떤 날은 내가 이러기를 다 했어요. 세르히오, 제발 그 머리 좀 자를 수 없겠니? 아니면 묶던지, 그것도 싫으면 차라리 모자를 써라. 네가 일할 때마다 그 머리가 너무나 거추장스러워 보여 내가 다 괴롭다. 넌 왜 우리 한국인들이 싫어하는 짓만 골라 가며 하는 거냐? 너한테 잘 어울리는 이 나라 말이 딱 하나 있다. 메디오 로꼬(반미치광이)!"
H는 검지를 옆 이마에 대고 뱅글뱅글 돌리는 시늉까지 재현한다.
"하하하."
H의 그러저러한 불평들이 어떤 면으로는 꽤나 순박하게 느껴져 나는 그야말로 모처럼 쾌청하게 밝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며칠 됐을 것이다. 출근길에 인쇄소에 들렀더니, 세르히오는 까만 모자를 머리에 살짝 얹고 다소곳하고 얌전하게 유리창 닦기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H는 마치 일주일만에 만나는 것처럼 반기더니, 나를 위해 커피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세르히오! 웬일로 모자를 다 썼지?
세르히오는 이미 바깥에서 안쪽으로 바닥을 쓸어내는 중이었다.
"아쥼마가 내 긴 머리를 별로 안 좋아 하거든요. 깡패 같고 퇴폐적이랍니다. 너무 병적으로 싫어하니까……."
"세르히오!"
H의 느닷없는 고함에 깜짝 놀란 세르히오는 잽싸게 나한테 도피처를 구하듯 다가왔다.
그러나 하는 말은 언제나처럼 기발했다.
"세뇨라, 잠깐만 비켜 줄래요? 당신이 서 있는 곳을 좀 쓸고 싶거든요."
"세르히오? 손님이 계실 때 청소하는 건 대단한 실례야. 빨리 가라는 뜻인데, 안 되겠다. 청소는 다음에 하는 게 낫겠어."
"세뇨라도 참, 바쁜 세상에 무슨 미신 같은 걸 믿고 그러세요? 이왕이면 빗자루 들었을 때 해버려야죠."
" 일단은 세뇨라 린한테 사과부터 하는 게 좋겠다."
"그래요 , 좋습니다. 내가 동양의 미신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었어요. 사과해요. 세뇨라, 린!"
" 저런, 쟤가 꼭 저렇게 엉뚱해요."
마지못해 빗자루를 치우고는 있었지만, 세르히오의 한 풀 꺾인 얼굴에 점차적으로 몰려드는, 이기적으로 굳혀지고 있는 비감한 표정은 참으로 대단했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 나는 인쇄소 앞의 보도블록을 청소하면서 우리 가게 앞까지 청소해 주고 있는 세르히오를 보게 되었다.
모자는 어디다 팽개쳤는지 치렁치렁한 곱슬머리를 잔뜩 풀어헤친 채, 호스를 이용해 물청소까지 열심을 부리고 있었다.
선입관을 갖고 바라봐서인지 세르히오는 한껏 기분이 좋아 보였다.
" 세뇨라가 오늘 왜 안 보이지? 고마워, 우리 가게 앞까지 청소해줘서."
"아쥼마는 오늘 감기가 심해서 집에서 쉰답니다. 세뇰만 있어요."
" 그런데 오늘은 모자를 안 썼네?"
"아쥼마가 내 긴 머리를 얼마나 구박하는지 알기나 하세요? 이런 기회에 내 머리에게 자유를 좀 베풀어야죠. 자유, 자유를!"
세르히오는 그 긴 머리를 흔들며 노래를 부르더니 그 정도로는 모자란 지 춤까지 추기 시작했다.
나는 저절로 솟아오르는 화창한 미소를 띤 채 세르히오를 유심히 지켜보게 된다.
바람에 휘날리는 수양버들처럼 긴 머리를 소유한 , 젊음인지 개방인지 또는 무구함인지 모를 세르히오의 춤추며 노래 부르는 모습을.
사고방식의 별다름을.
세대 차이를.
동서양의 격차를.
서로 소속을 뚜렷하게 사수하려는 주종관계의 부딪침을.
세르히오는 나를 향해 약간 다가오더니 사뭇 진지해지며 마치 마음 저 끝에서 끄집어내듯 천천히 말을 꺼냈다.
"해방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신성한 권리죠. "
그는 허리를 좀 펴며 더없이 심각해지기까지 한다.
"나는 엄마의 잔소리가 싫어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도망 오다시피 고향을 떠나 왔어요. 바로 1년 전이었죠. 그런데 나는 요즘 때 아닌 의문이 생겨나 깜짝깜짝 놀라고 말아요. 어떻게 돼서 내 엄마가 동양인의 얼굴로 바뀐 채 나를 더 많이 닦달까지 하는 걸까요? "
그것은 하소연이었지만, 하소연다운 구석은 결코 없었다.
이럴 경우 특히 침묵을 지켜내는 걸 고집하는 성격이지만, 내 눈시울은 이미 눈물이 좀 글썽여지고 있었다.
나는 이윽고 싱긋 웃고 어깨를 좀 쳐들어 보이는 걸로 내 난처함을 대신했다.
H가 세르히오로 인해 괴로워하고 마음을 끓이는 건 어떤 면으로는 그만큼 세르히오를 인간답게 대하고 싶은 차원에서 그러리라고 여긴다,
격돌과 이해 사이를 그렇게나 열심히 드나드는 사람들을 상 주는 제도가 있다면 아마 H와 세르히오가 금상으로 뽑히게 될것이다.
나는 이후부터라도 세르히오에게 더좀 친절을 베풀어야겠다고 속으로 다짐을 하게 된다.
누구한테 충고하는 성격은 아니기 때문에 겉으로라도 그러다보면 H역시 조금이라도 바뀐 시선으로 세르히오를 보아낼 것만 같다.
양쪽 다 조금씩 양보한다면 각 나라의 국위선양을 위해서도 한층 더 좋을 것만 같은데...... .
2012년 2월 9일 목요일
우리가 우리를 챙겨야 할 때
맹하린
비가 오셔서 그럴까요?
약간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고 있습니다.
어제 오늘은 그러한 날입니다.
한국의 여름은 습기가 많아서 더 더웠던 것 같아요.
어딘지 모르게 끈적이고 묵직하던 더위.
그런데 이 나라의 더위는 어떤지요.
햇볕은 따갑지만 그늘에 들어가면 금세 서늘해지죠.
겨울은 또 어떻던가요.
아르헨티나는, 이 나라의 추위는 습기가 많아서 으스스하고 기분까지 을씨년스럽게 돼요.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 기온 속에서도 뼛속 깊이 스미는 추위를 느끼게 되는 거죠.
남극에서 불어오는 냉기가 몸은 물론이고 마음까지 움추리게 만들지 않던가요.
계절도 반대지만 습기까지 반대인 것입니다.
우리의 모국인 한국과
우리 제2의 나라인 아르헨티나는.
여름휴가철.
그것도 그냥 휴가철은 아니죠.
현지인들이 1년을 기다리고 1년을 적금 붓고, 1년을 준비하는 여름휴가철 아니던가요?
하루도 일주일도 아니고 보름씩 다녀오는 , 말 그대로 가족 대 이동, 민족 대 이동의 휴가 말입니다. 국내는 말할 것도 없고 이웃나라는 물론이고, 외국 역시 계획안에 안들 수 없고.
우리 교민들은 견본이 될 옷을 구하기 위해 한국이나 미국이나 유럽까지 겸사겸사 다녀오는 추세가 아니던가요.
인도를 아십니까?
세상을
인생을
사람을
그 여러 이미지를 자꾸만 되새김질 하게 만드는 나라.
동틀 무렵.
순례자 되어 손과 손이 병을 들고
질서가 안 보이는 질서정연함으로 떼 지어 강으로 몰려가는 그들.
수저도 없이 오른 손으로 직접 밥을 먹고, 왼손은 해우소인 강에서만 사용하는 그들.
해오름의 그 장관이던 강 주변과 거룩함조차 솟아나게 하던 그들의 전설과 같은 행렬.
작은 강이 큰 강과 만남을 위해 가고 가던 그들.
강은 그렇지 않던가요?
크거나 작고, 느리거나 빠르고 거칠거나 고요하죠.
강은…….
우리 살아가는 강가는 인도의 강과 크게 다름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굳이 무얼 얻으러 사는 것 같지도 않고
사실은 무언가를 버리려고 사는 의미도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 모두의 소통의 장이라고 여긴다면 아쉽게나마 산뜻한 답이 되려는지요.
사람에 따라서는 짜증도 나타내기 마련입니다.
욕설까지 서슴지 않는 경우도 종종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저 역시 여러 차례 겪고 당해 온 일입니다.
그럴 때마다 잘 참아내서 제가 저를 칭찬한 적도 많았을 테죠.
어떤 일을 만나도 '내 탓이오' 그러면 가장 잘 이겨내는 지름길이 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부딪치기 마련인 것입니다.
아무나 뉘우치지는 않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사람은 성숙을 익히는 것입니다.
지각이 있는 사람만이 후회를 하고 후회를 압니다.
우리가 진정 심각하게 반성하고 지켜 보아야 할 대상은 따로 있다고 봅니다.
사회 지도층.
그리고 교회의 거목들.
현대는 너무 그들을 부유층으로만 격상 시키고 말았습니다.
세상을 구제하고 구원하고 사목하는 일은 누구의 역할입니까?
도는 누가 닦습니까?
잘 먹고, 명예에 집착하고, 향락에 물든 인사들이 어떻게 복지사회를 구성하고 참다랗게 연꽃을 피우겠습니까?
내가, 우리가 그분들을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분들의 잘못이 아닌. 바로 우리의 커다란 실책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보편적인 성향에 점차 물들어야 하는데, 그분들이 우리보다 앞장서 보편성을 펼치고 있는 이 어불성설은 대체 무슨 일이랍니까?
아무에게도 의존하지 않아도 어딘지 모르게 든든한 구석이 느껴지는 삶.
당장은 아무 일도 문제다운 문제가 안 되는 생.
이제 그건 그분들이 아니라 우리가 솔선수범 살아내야 할 몫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그분들에게서 깨우치는 삶이 아니라, 그분들이 우리를 보고 터득해야 하는 세상이 닥쳐 온 건지도 모릅니다.
누구에게 누구를 의탁하려고 했을까요?
그분들을 우리에게
아니면 우리를 그분들에게?
우리가 우리를 챙기고 내가 나를 챙겨야 할 시절이 도래한 모양입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맹하린
나는 오후 4시에서 5시 사이에 산책을 다녀온다.
한 블록이지만 가고 오니까 두 블록을 걷는 셈이다.
건강을 위해서라기보다, 사유(思惟)를 돋구려는 행위라고 봐야 할 것이다.
약 두 달 전.
산책을 나서려고 더좀 편한 슬리퍼로 갈아 신는 중이었다.
나는 슬리퍼도 발가락이 다 드러나는 매우 낮은 슬리퍼를 좋아한다.
왠가하면 가장 땅과 가깝게 접촉할 수가 있어서다.
밖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내가 가장 마음 아파하는 소음 중의 하나가 아이들의 울음인 것을.
마침 전화가 와 약간 지체한 뒤 다시 산책을 나서게 되었다.
그런데 이웃 가게 곡물상회 창고 앞의 가로수 밑에서 다섯 살쯤 된 현지인 여자아이가 거의 진저리 지경에 이른 상태로 엉거주춤 선채 흐느끼고 있었다.
옆에는 아이들 엄마로 보이는 30대의 현지인 여인이 한 살쯤 된 여자아기를 품에 안고 서 있었다.낭패감에 젖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다는 듯 한 표정으로 곧 무너질 것처럼 아슬아슬 하게.
아마 우리 가게 앞에 위치한 버스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중이었나 본데 무슨 변고가 생겨 그 옆가게 앞쪽으로 자리를 이동한 분위기였다.
세상이 하도 험하다보니 가능하면 그런 일에 외면하고, 상관을 잘 안 하는 성격인데, 그날의 그 심각한 분위기는 나의 발길을 옴짝달싹 못하게 세워 놓았으므로 나는 대체 무슨 일인가를 묻게 되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과정에서 큰 애가 옷에 실례를 했다는 얘기였다.
큰 거라고 했다.
어려서 친척 집에 갈 때도 내 수저를 기필코 챙기고 다닐 정도로 깔끔을 떨었던 나지만, 그냥 지나치기엔 내 나름대로의 도덕심과 주체성이 손상을 입지 않겠나 싶어져 순간적으로 그 모녀에게 다가가 우리 가게에서 해결하자는 말을 조심스레 건네게 되었다.
그럴 경우 나는 머리회전이 약간 빠르다.
잠시 문 앞에서 기다리라고 해놓고 아나바다까지 뛰어가 커다란 바구니에서 다섯 살에 맞을 바지 하나와 스키니 진을 저렴한 값에 구입해낸 것이다.
헌옷이지만 세탁이 되어 있었고 말짱해서 우선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 모녀들을 우리 화장실까지 데려갈 용기는 안 났기 때문에 일단 매장의 바닥에 신문을 여러 장 깐 뒤, 그 위에 아이를 세웠다.
옷가게 하는 친구가 한 보따리 가져다 준 Retaso(자투리 천)를 여러 장이나 물에 흠뻑 적셔 아이를 당장 비누로 닦게 했다.
그리고 아나바다에서 산 옷으로 갈아입힐 수 있도록 도왔다.
기분이 나쁠 수도 있겠어서 이 말만은 꼭 했다.
" 헌 옷을 사줘서 미안해요. 나중에 버리세요."
한국 애들의 그런 모습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현지인은 다 그런지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그 아이는 정말 대단하고 지독한 연기를 피우는 전대미문의 폭발물과 같았다.
중학교 때 본 영화에서, 교사가 학생이 토한 음식을 손으로 찍어 냄새를 맡는 장면을 매우 감명 깊게 보아 냈으면서도 말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아이는 이내 말끔해졌고, 훨씬 기분이 달라졌다는 듯, 말도 제법하고 깔깔대며 웃기까지 했다.
Desodorante(탈취제)와 손크림까지 건네어 온몸 가득 향기롭게 되자 아이들 엄마는 그제야 정신이 좀 차려지는지 살짝 안색이 펴지고 있었다.
몹시 고마워하는 그녀들에게 문제의 옷을 봉투 여럿에 싸고 또 싸서 돌려보내고 나는 매장을 청소한 뒤 다시 산책을 나서게 되었다.
kiosco(편의점)에서 과자를 사 들고 나서는 그 모녀들을 금세 다시 만나게 되었다.
버스 타는 걸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인가 보았다.
우리는 순간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 우리는 오래 알았던 사이처럼 스스럼없이 웃음부터 주고받았다.
처음 이웃 가게 앞에서 발견했을 때는 어디서 본 듯한 얼굴 같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더욱 그런 관점이 생겨, 이게 바로 데자뷔가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치밀었다.
이미 일면식이 있었던 사이여서 우리는 잊지 않고 서로 포옹하고 뺨에 뺨을 대는 인사를 교대로 주고받았다.
가게에서 헤어질 때 각자 통성명을 했기 때문에 이미 내 이름을 기억해둔 여자 아이 멜리사는 산책길을 향해 길을 건너는 동안 나를 자꾸만 불렀고 연신 손을 흔들었고, 그리고 힘껏 소리쳐 많은 인사를 했다.
"Margarita, Gracias(마르가리따, 고마워요.)"
"Margarita, Suerte(마르가리따, 행운을)!"
"Chau, Margarita (안녕, 마르가리따)."
멜리사의 엄마 사라는 여전히 찡그린 채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멜리사는 계속 말하고 여전히 손을 커다랗게 흔들어댔다.
아이가 나를 절대군주의 이름처럼 간곡하게 부르는 음성을 뒤에 남기고 나는 다른 날과 하나도 다름없이 느릿느릿 산책을 해냈다.
꽃과 잔디와 나무들과 예외없이 눈길을 주고받았고,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우리나라 대한민국 만만세의 꽃 무궁화도 살몃 어루만져 주고 그렇게.
가게로 돌아오자, 내 기분이 그래서였을까.
어딘지 모르게 여진이 잔존하듯 남아 있는 느낌이었다.
다시 청소하고 향수를 뿌리고 한바탕 난리를 피운 뒤 작업실에 들어서니 아들이 내게 아무 말도 없이 손가락총질을 서너 번 흔듬과 동시에 해내고 있었다.
아들 대신 내가 나를 향해 말을 쏘았다.
"하여간에 오지랖? 빵, 빠방 빵!"
나는 잠시 그 모녀를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히고, 두려움이라던가 추위를 잊게 해줄 수 있었다면 그걸로 된 일이었다.
지금은 여름이니까 산들바람을 불러 들였다고 해도 괜찮겠고.
때로 도덕적이면서도 사회적인, 그런 잣대를 들이댈 때도 더러 있겠으나, 나는 세상을 향한 산책과 일탈 속에서 내 운명과 보조를 맞추며 여일하게 바스락 거리며 살아갈 것이다.
격정적인가하면 차분한 사유(思惟)를 실처럼 자아 낼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는 행복이겠다.
오늘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초여름- |
나는 주로 가게에서 지내야 하는 신세라서 이렇다 할 선행은 못해낸다. 하루에 두 가지 정도 희생을 한다. 희생. 너무 거창한 언어다. 내게 있어 희생은 하기 싫은 일과 피하고 싶은 일을 해내는 것. |
2012년 2월 8일 수요일
다행이다
맹하린
어제 정오 무렵, 우리 가게와 가깝고 Esquina(모퉁이)에 위치한 Kiosco(편의점)에 Helado(아이스크림)를 사러 갔다.
39도를 웃돈다는 이례적인 더위이긴 해도, 평소에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걸 왜 하필 그 시간에 사러 갔는지 참으로 모를 일이다.
Kiosco 강여인은 차양모자를 쓴 어느 여인과 의자에 앉아 한담(閑談) 중이었다.
그런데 그 여인에게서 약간 낯이 익다는 친근감이 전해져 왔다.
(한국의 고전형 미인이구나.)
그런 느낌으로 서로 짧게 인사를 주고받다가, 고전형 미인, 그 부분에서 퍼뜩 누구인지가 떠올랐다.
"아, 우리 고객의 부탁으로 배달을 해드렸던 분!"
그런데도 여인은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Kiosco 강여인이 내가 어떤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지 알려 주려고 짧게 노래를 불렀다.
"꽃집의 아가씨는 예뻐요."
강여인의 친구들은 나만 보면 그 노래를 잘 부른다.
그 여인은 그제야 나를 알아챘다.
너무 반가우니까 박카스를 사주겠다면서 강여인의 몫까지 세 개를 사야겠다고 말했다.
나는 재빨리 내가 먼저 박카스 값을 지불했다.
여인은 드디어 내 고객의 안부를 물어왔다.
" 우리 종친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언제 오세요?"
"전화로만 주문하시는 분이시라 저는 그분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무척 예의 바른 분이라는 정도만 알고 있어요."
나는 여인에게서 내 고객의 신상파악을 약간이라도 듣거나 말하는 사태가 생길까를 염려한 나머지 서둘러 그곳을 나온다.
Kiosco의 입구에는 하얀 자전거가 세워져 있었다.
예전에 자동차로 Julio.A.Roca공원과 Sarmiento공원에 가족과 함께 주말마다 자주 갔었다.
나는 운전 연습도 했었고, 가족 모두 자전거를 하나씩 대여해 하루 종일 지냈던 시절이 느닷없이 그립게 떠올랐다.
자전거는 놀러온 여인의 것이었다.
최신형 자전거처럼 가늘면서 높다란 기능성 자전거가 아니라, 약간 낮고 어딘지 모르게 만만해 보이는 자전거였다.
자전거를 잠깐 타 봐도 되느냐고 묻는 나에게, 물론이라는 대답이 선선히 건네져 왔다.
매사에 정나미가 넘치고 모든 일에 이성적인 면이 두드러지는 편인 나지만 때로는 뭐에 씌인 사람처럼 충동적일 때도 있다.
확실히 뭐에 씌인 날이었다.
자전거에 오르자마자, 나는 그만 왼쪽으로 넘어지고 만 것이다.
진정 1미터조차 나가지 못했었다.
잠시 정신을 팔았던 것이다.
어떤 애틋함이 내 시야를 찰나처럼 가린 거였다.
아니다. 나는 어떤 곤경에서 탈피하려고 때 아닌 무리수를 두었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나동그라지 듯 넘어지고 말았을 터.
그럴 경우, 나는 당장 부서질 것처럼 연약한 존재처럼 여겨진다.
왼쪽 발목에 약간의 통증과 압박감을 느꼈지만 두 여인에게는 내색을 삼가고 총총 가게로 돌아왔다.
하얀 반바지의 무릎 부위는 이미 약간의 피가 배어 있었다.
성치 않은 곳은 네 군데 같았다.
발목, 무릎, 손목, 팔꿈치.
왼쪽으로 넘어져서 인지 모두 왼쪽이었다.
병원부터 가자고, 바보짓 하고 다닌다고, 아들한테 한 마디도 서러운데 몇 마디나 들었다.
뭐든 털어놓기를 잘하는 나는 아들한테 하마터면 원인을 실토할 뻔했다.
병원은 안 가도 된다고 나는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내가 어떤 결정이든 번복하는 걸 성가셔 한다는 걸 잘 아는 아들은 그래서 더 조심스럽게 말했다.
" 자전거라면 왠만큼 타셨잖아요? 그만하기 다행이죠. 하지만 병원엔 가봐야……."
"알잖아? 나는 참을 일은 잘 참고, 못 참겠으면 못 참아낸다는 거. 어쩐지 자전거가 하얗더라니! 눈밭인 줄 알았나봐, 이 바보가."
내 가족이 자전거를 타던 날들의 추억이 넘어진 거였다.
나는 내 가족과 자전거를 타던 날들의 추억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싶었던 것일까.
택시나 레미스를 타야 한다는 아들을 대번에 제압하고 나는 절룩이며 퇴근했다.
자동차들이 내 주위를 환영처럼 오갔다. 그리고 멈춰 있기도 했다.
일주일 남은 밸런타인데이 전까지는 멀쩡할 수 있도록 타박상에 좋다는 것 모두 다 챙겨 먹을 계획이었다. 그리고 맘껏 쉬고 그럴 작정이 각성처럼 굳혀졌었다.
친구내외가 까릴로에 Quinta(별장)를 얻었는데 2월말까지 보름동안 머물거라고 연락이 왔다.
나더러 일주일이라도 다녀가라는 걸, 갈까 말까 시소의 중앙쯤에 앉아 혼자 이랬다저랬다를 즐기던 중이었다.
가지 말라는 암시 같다.
다른 데는 점점 안 아픈데 발목은 차츰 붓고 점차 아프고 그리고 쑤셨다.
뼈가 놀란 모양이다.
다행이었다. 마음이 아니고 뼈가 놀라서.
진정 다행이었다. 워드는 찍을 수 있게 손가락은 괜찮아서.
아픔인지 통증인지를 잊기 위해 어제 나는 가게의 소파에 누워 책을 읽기 시작했었다.
발목에 얼음찜질 주머니를 두른 채였다.
내가 좋아하는 존 그리샴, 그 작가가 쓴 '의뢰인'이었다.
헌책을 사다놓고 기회가 닿지 않아 한참이나 못 읽어냈었다.
존 그리샴의 웬만한 책은 다 읽었고, 모두 소유한 편인데, 읽어야지 그러며 못 읽어낸 책이 바로 ‘의뢰인’이었다.
존 그리샴은 우선 재미있다.
일단은 스릴 만점이다.
차종이 링컨인 자가용 위의 지붕에서, 총구를 입에 물고 자살한 어느 변호사의 죽음을 보게 된 아홉 살의 리키가 충격으로 엄지를 빠는 장면이 있다.
'지진을 겪은 후 엄지를 빠는 캘리포니아 애들의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본 적이 있는 리키의 형 마크. 온갖 분야의 의사들이 나와서 설명을 했던 프로.
지진이 난 지 1년이 지났는데도, 그 불쌍한 애들은 아직도 엄지손가락을 빨고 있었다고.
마크도 충격이 컸지만 동생 리키의 충격은 지진을 겪은 어린이들처럼 컸던 것이다.'
그 장면에서 나는 소리 없이 울먹였다.
왠지 눈물이 솟았다.
그리고 자꾸만 눈물이 흘렀었다.
밤새 비가 내렸다.
새벽에도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발목은 밤사이 잘 쉬었고 거의 회복되었다는 듯 거뜬했다.
생각이나 걱정보다 의외로 빠른 치유였다.
눈 뜨자마자 전기스탠드의 스위치를 누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실기시험을 치르는 것처럼 발목은 내 앞에서 씩씩함을 잘도 보여줬다.
끄덕없이 자신만만한 걸음이었다.
‘의뢰인’을 끝까지 다 읽어내야겠다는 생각에 내 마음 벌써부터 오늘이라는 하루가 흥미진진하게 다가오고 있다.
나는 거듭 안도하게 된다.
워드를 찍을 수 있게 되어 무한 감사다.
내게 있어 발렌타인 데이는 그 다음 문제다.
다행이다.
2012년 2월 7일 화요일
우리라는 작은 마당에...
맹하린의 생활 단상(斷想)
아르헨티나 중앙일보
2007년 11월 3일
역사학자 토인비가 즐겨 쓰던 예화에 '청어 이야기'가 있다.
'신선한 청어를 즐기는 영국인을 대상으로 여러 원양수산업체가 경쟁을 시도했는데, 배 안에서 기진맥진 지친 청어들은 신선도가 형편없었다.
그런데 유달리 한 업체만이 싱싱한 청어를 들여와 많은 수익을 올렸다.
결국 관계자에 의해 그 비결이 밝혀지게 되었다.
청어들 안에 살아있는 큰 숭어를 넣었다는 것이다. 청어들은 이 숭어의 먹이가 되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도망치고 쉴새없이 움직이는 바람에 싱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가 지인들에게 가끔 하는 얘기 중에는 감나무에 관한 게 있다.
친구 K는 본국 전주에서 시인으로 활약 하고 있다
(지역문학상을 거의 열 개쯤 받았을 것이다.)
고등학교 다닐 때, 시험공부 한다고 그녀의 집에 몇 번인가 갔었다.
건설국의 공무원이던 아버지와 국전작가이던 서예가 어머니의 보호 아래 그녀는 6남매가 북적대는 가정에 살고 있었다.
K의 집 마당에는 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그 감나무가 턱없이 커서가 아니라 마당이 너무나 좁았기 때문에 이렇다 할 공간이 별로 없었다.
여러 개의 마당을 지녔던 우리 집에 비하면 참으로 보잘 것 없는 환경이었다.
하지만 K의 시 속에는 그 좁은 마당에 꽉 들어찬 감나무가 크고 아름다운 정원 한 켠을 장식하고 있는 우람찬 한 그루처럼 감동적이고 산뜻한 모습으로 자라며 지금껏 땅과 하늘을 향해 뿌리와 가지를 한껏 뻗어내고 있는 것이다.
K가 보내준 여러 권의 시집 중에서 잠시 그녀의 싯귀를 인용해 본다.
'달빛 시린 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매달린
홍시 위로 무서리 내려앉는 소리'
'우리 자랄 적 아이들 세상은 울안이었어
앞마당 곳간 옆에 감나무 잎삭들 마저
우수수지고 마당가에 여린 햇살 뽀작거리면'
내가 굳이 이렇게 K의 싯귀를 예로 드는 건
K의 집 좁은 마당을 가득 차지하고 있던 감나무처럼
내가 세상에 나온 기념으로 아버지가 심어 준 호두나무처럼
한인타운의 중앙 분리화단에 우뚝우뚝 자리 잡은 도토리나무들처럼
우리 인간의 의식 속에는 때로, 각자의 나무가 자주 서 있고 향기까지 선물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함이다.
이민역사 40여년이 훌쩍 흐르다보니 경제적 기틀을 달성한 교민들이 의외로 많아졌다.
아베쟈네다 지역에 진지를 구축한 젊은 군단에게서도 고뇌의 한숨에 섞여 간혹 승전가 비슷한 쾌보까지 바람에 실려 오는 이즈음, 로망롤랑이 보낸 편지에 답장으로 보냈던 톨스토이의 주체사상이 부각되듯 떠오르게 된다.
“예술가로서의 참된 조건은 예술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인류에 대한 사랑이다.”
나는 역설하여 이렇게 주장하고 싶어진다.
“경제인으로서의 참된 조건은 경제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인류에 대한 사랑이며, 단체장이나 봉사자로서의 참된 조건은 명예나 권위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인류애에 대한 사랑이다.”라고.
우리 기성세대의 생애가 앞으로 10년이나 20년, 아니면 30년이나 40년 정도 남아 있다할지라도 그다지 많은 기간이라고는 그 누구도 단정할 수 없다.
거창하게 인류애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제 우리의 가족부터 기꺼움과 자애로움으로 돌보면서 더불어 이웃을 아끼고, 더 나아가 교회와 한인사회등을 챙겨 나가야 하리라.
나야 진즉부터 인생이라는 불가항력의 굴곡에 여러 차례 무릎을 꿇어온 터수라서 작은 일에 더 행복해 하며 누구와 비교 따위를 안 하는 것을 철칙으로 여기며 살아왔다.
그런 이유로 나는 언제나 자유인이며 매사에 유유자적이다.
돌이켜보면 우리 이민자들은 그동안 너무 각박한 고난도의 터널을 지나오지 않았나 싶다.
지금껏 너무 일에만 치우치며 살아왔던 게 아니었나 하는 헤아림도 생긴다.
그러한 와중에서라도 어떤 계기로든 책임을 떠맡게 됐다면 기왕지사 봉사라는 짐을 걸머지게 된 이상 솔선수범하여 모범적 선행을 실천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만 할 것이다,
내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교민을 위해서.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소탈하면서도 평화로운 세상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먼 여행에서 돌아와 내 집만의 안락함을 기쁘게 누릴 때처럼.
일부 교회들과 한국학교, 그리고 부인회에서는 우리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을 위해 매우 진취적인 행사를 개최하는 일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한다.
다시 한 번 유념하여 기필코 되돌아 볼 일이다.
우리라는 마당은 비좁을지라도 우리 후세들인 푸르른 나무들은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는지를.
비록 우리가 작은 마당에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일지라도, 우리의 2세들의 의식 속에는 언제나 크고 우람한 나무로 서 있을 수 있도록 우리 이제라도 새롭게 각오를 다지며 씩씩한 나무가 되도록 진솔한 날들을 조성했으면 하고 간곡히 바라게 된다.
2012년 2월 6일 월요일
잔치 이야기
맹하린
이민 짬밥(?) 30년이 넘다 보니까 모르는 교민보다 아는 교민이 더 많아진 처지가 되었다.
그들의 집안에 수저가 몇 개인지 까지도 파악이 되어 있을 지경이다.
왜냐하면 자녀가 몇이나 있다는 정도까지 제대로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친인척이 몇 쯤, 혹은 모두 함께 이민 온 이민자도 있겠지만, 대다수의 교민들은 연고자 없이 이민을 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경사가 닥치면 이리저리 연락하여 간곡히 부탁하건대 제발 친척이 좀 되어 달라고, 부디 자리를 좀 빛내 주시라고 여기저기 초대장을 보내야할 형편이 전개된다.
초대장만 보내온다면 모를까, 예비 신랑신부를 대동하고 인사를 시키면서까지 초대장을 가져오는 경우도 의외로 많다.
(생각하자면 나는 그럴 경우에나 금세 떠오르는 인물인가보다.)
어느 정도 친하다고 보면 친하달 수도 있고, 그저 아는 정도라고만 여겨왔을지라도, 그러한 상황에 부딪히게 되면 일단은 덕담부터 안기게 된다.
하지만 정작 결혼식엔 참석을 못하고 부조도 생략할 때가 많다.
나는 화수분(안에다 온갖 물건을 넣어 두면 새끼를 쳐서 끝이 없이 나오는 보물단지라는 뜻)을 감춰둔 처지는 아니라서다.
거기다 애들 백일에다 돌, 그리고 회갑, 칠순, 팔순, 미수(米壽).
어떤 분들은 애들 백일이나 돌도 2백 명에서 3백 명까지 초대를 해서 말 그대로 삐까번쩍한 잔치를 치른다.
사업기반을 튼튼하게 다진 사람일수록 한층 성대하고 거창한 잔치를 준비한다.
대부분의 당사자들이 교민신문에 결혼식초대의 광고를 일주일씩 내고, 과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분들에게만 초대장을 보낸다 해도 , 정작 피로연 장소에 가보면 하객의 수는 무려 5백 명이 넘어 식사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돌아가는 사태 또한 결혼식 순서 중의 하나인 것처럼 벌어진다.
아는 지인들 중에는 부조금에 비해 피로연 비용이 훨씬 많아 낭패 중의 낭패를 보았다는 이들 역시 넘치도록 많다. (단정컨대 식당 잘못이 아니라, 한 가족에 두사람 이상 참석해서 문제인 듯.)
결혼식이 장삿속도 아니고 왜 이러한 병폐가 차츰 시정될 기미를 안보이고, 점차 화려만발한 쪽으로만 나날이 확대되어 나가는 추세인지 생각수록 오리무중이 아닐 수 없다.
하객이 넘치다 보니까 국수라도 나눠 먹자는 우리 한국인 고유의 역사와 전통과 예절은 오간데 없고 국수도 못 먹고 돌아가야 할 볼상 사나운 일까지 불거진다.
몇 년 전에 성당에서 만들어지는 "한맘"이라는 월간지의 편집을 맡은 일이 있다.
그때 안나회장을 하시던 분이 대단히 수고들 많다면서 저녁식사 초대를 한 적이 있었다.
손자의 돌잔치에편집위원들 전체를 부른 거였다.
전부는 못 참석하고 여덟 명만 참석하게 되었다.
거기서부터 말썽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봉사하느라 수고들 했고, 단체장으로서 따로 식사도 대접하지 못했으니까, 그날이라도 와서 밥을 들고 가라는, 단지 그러한 좋은 뜻의 이유였고 요지였지만 말이다.
문제는 그분의 며느님, 미사엔 열성적이던 그 아기엄마가, 대번 안면을 바꾸고 우리가 앉은 식탁까지 쪼르르 달려 오면서 생겨났다.
그녀는 한복의 소매까지 걷어 부치며 따지고 나섰다.
도대체 초대한 기억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데, 왜들 떼거지로 몰려와 공짜 밥을 먹고 있느냐는 항의였다.
우린 단지 편집위원들일 뿐이고, 편집이나 좀 할 줄 알았지 변명에는 약한지라, 계속해서 비실비실 서로가 서로를 쳐다보며 자꾸만 웃고 있었다.
그러한 우리팀의 모습이 그 여인을 더 화나게 하는 모양이었다.
거의 죽을상이 된 편집장이 돌상 주위에 있던 안나회장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전하고 나서야 진위가 가려졌지만, 우리의 뱃속은 그날 뭘 잘못 먹은 것처럼 결코 편치가 않았다.
참으로 껄끄러운 식사였다.
(이런 부작용들은 결국 잔치의 하객들이 어디나 떼를 지어 다니는 점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닐런지.)
그동안 몇 분의 교민일간지 집필진들이 결혼식 피로연이나 여러 잔치에 관한 잘잘못을 누누이 지적해 온 터인 데도 몇 십 년이 지난 현재까지 조금이나마 개선 되는 양상은 전혀 안 보이고 있다. 도리어 한층 성대해지는 측면으로만 장족의 발전을 거듭해 왔을 것이다.
나의 한 친구는 한국에 사뒀던 건물이 1백만 달러 가까운 시세에 판매되어 재테크하고 돌아왔다고 쉬쉬하며 어깨를 높이고 있다.
다른 한 친구는 한국의 강남땅 정도 되는 뿌에르또 마데로에 아파트를 구입해놓고 얼마 전 이사하여 참 많이도 기쁘고 뿌듯해 보이기까지 한 표정에 몰입해 있다.
(이상하다. 친구들은 좋은 일이나 궂은 일이나 꼭 나한테 제일 먼저 말해 주고 싶어한다.)
그녀들에 비할 경우, 한 치도 뒤지지 않는 어떤 친구는 꽃을 참 좋아는 한다.
그런데 한 푼도 새롭고 소중하다고 여기는 성격이라서, 우리 가게에 오면 완성품을 사가는 일이 드문 게 아니라 전무하다.
(한국과 달라 나는 꽃을 꼭 필요한 양만사 온다. 꽃을 계획없이 많이 준비하게 되면 나중에 다 버려야 하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된다.)
특히 무슨 행사라던가 기념일이 되면 그녀는 약속처럼 우리 가게에 일찍어니 나타난다.
그녀의 의리 하나는 참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가게가 아베쟈네다인데도, 그리고 그곳에도 화원이 서너 개 쯤 영업을 하고 있는 데도 한사코 한인타운 지역인 우리 가게까지 자가용을 운전하며 찾아오는 것이다.
정말 대단하고 올곧고 바른 여인이라고 표현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녀가 그렇게 일부러 틈을 내어 우리 가게까지 오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따로 있다고 한다.
같은 값이면 우리 꽃을 팔아 주고 싶고, 그리고 같은 가격이지만 내가 푸짐하게 준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구입한 꽃과 재료를 이용하여 손수 꽃꽂이 하는 작업을 퍽으나 즐기지만, 꽃을 꼼꼼하게 구입하는 것도, 약간만 고르기를 선호하는 것도 더불어 즐긴다.
최대한으로 까다롭게 굴며 나를 닥달하듯 괴롭힌 뒤, 약간의 꽃과 재료를 사들고 그녀가 돌아가고 나면 나는 아들에게만 농담삼아 연기를 펼쳐 왔었다.
" 식당에 가서 있잖아? 나는 불고기도 내가 만드는 걸 좋아하니까 고기만 살래요. 아! 파하고 양념 일습도 따로 가져와 봐요. 우선 보고나서 고를게요. 에구, 고기 덩어리가 너무 크잖아요? 작은 걸로 바꿔줘요. 저런, 이 양파보다 더 적은 건 없어요? 난 양파도 크기만 하면 싱겁고 싫더라. 이러면 좋겠니? 좋겠냐구?"
그 후, 그녀가 다녀간 뒤엔 아들이 그런다.
" 왜 오늘은 식당에 가서 불고기도 이렇고 저렇고, 그 얘기를 안 하시는 거죠? 그 얘기 들을 때마다 무척 재미있던데."
나는 웃으며 답한다.
"자주 하면 재밌니? 재밌냐구? 난 말이지. 내가 안 하면, 네가 기억 시켜 주는 게 더 재밌다!"
최근엔 어떤가.
그녀가 다녀가면 아들은 그 어떤 말도 생략한 채 껄껄껄, 소리가 좀 크다 싶을 정도로 웃어댄다. 나 또한 웃을 수밖에 없다.
같은 톤으로 웃을 수는 없어서 약간 다르게 웃는다.
자나 깨나 산뜻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자에게 흔히 따르는, 지극히 빈번한 바로 그 웃음이다.
"키키키."
(나여, 잘 참아줘서 고맙데이! 장사라는 게 다 그런 거래.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친구를 많이 두랬니? 하물며 부자친구들이라니!)
오! 대단히 부자면서 한 푼에도 벌벌 떠는 위대한 나의 친구들!
경쟁이라고는 없는 독과점 품목으로 교민 덕택에 대박이 난 걸 전혀 못 알아채는,
나의 거룩하고 훌륭하며 존경심까지 절로 생기는 대단한 내 친구들.
(내 친구들 대다수가 컴맹이다. 만약 이 글을 읽는다해도 상관 없다. 나도 풀 데가 있어야 한다.)
어제 저녁은 돌잔치가 있어 어느 식당에 꽃 장식을 납품했었다.
2백여 명 정도의 Cubierto(식기 한 벌)가 말끔하게 차려져 있었다.
중소기업 수준의 상권을 너도나도 이룩해 내었고, 개인 경제성장도 어느 정도 구축한 분들이라면 잔치를 하고 광고를 낼 경우, 부조금은 생략합니다, 라는 글도 빠짐없이 첨부하면
더욱 복 받을 일인 것을.
약간이나마 축소하고 간소화 한다면 더욱 바람직한 일인 것을.
광고가 그런 식으로 나가도 할 사람은 꼭 부조를 하는 것을.
2012년 2월 5일 일요일
멀리 있어도 사랑이다
- 김정한
밀어내고 또 밀어내도
자꾸만 더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생각하면
숨을 쉴 수가 없을 만큼 가슴이 아픕니다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목이 메입니다
마음은 잊어라 하는데
손은 여전히 그 사람을 잡고 있습니다
죽도록 사랑하면서도
사랑한다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 사람이 미치도록 보고싶습니다
보고싶다는 말을
숨쉬듯 숨 넘기듯
또다시 꿀꺽 삼켜버리고 맙니다
함께 있으면 행복해지는 사람인데
그 사람 마음속에도
내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갑니다
그저
그 사람에게도 나라는 존재가
단 한 사람의 사랑하는 사람이기를 바라는 마음 뿐입니다
오래 오래
그 사람이 사랑하는 여자로 남기를 바라는 마음 뿐입니다
내게 사랑은 아름다운 상처 내게 사랑은 달콤한 아픔 내 가슴속에 뛰어든 날 부터 나의 모든걸 차지한 사람 사랑은 그 어디서 오는지 어디로 갈지 알수는 없지만 오직 한 사람 니 곁에 닿기위해 멀고 먼 길을 헤매어 온거야 내가 살아온 모든 순간 순간이 내게는 바로 널 향한 길이었어 운명은 그 어디에 있어도 이렇게 우릴 한곳으로 불러 오직 한 사람 니 곁에 닿기위해 멀고 먼 길을 헤매어 온거야 내가 살아온 모든 순간 순간이 내게는 바로 널 향한 길이었어 너를 만나기 위해서
버찌와 참새
맹하린
'프리드리히라는 이름을 지닌 프러시아의 국왕은 버찌를 즐겨 먹었다.
그의 정원에는 탐스런 버찌가 해마다 많이 열렸는데, 알맞게 무르익을 무렵만 되면 참새들이 나타나 절반 이상 먹어 치우는 사태가 발생하고는 했다.
화가 난 프리드리히 국왕은 참새를 잡아오는 사람들에게는 상금을 주도록 하라는 엄명을 내리게 되었다. 상금을 받기 위해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참새를 잡으러 다녔고, 거의 소탕 직전에 까지 다다랐다. 하지만 그 다음해엔 버찌의 소출이 예년보다 훨씬 적었다.
버찌가 열매를 맺기도 전에 벌레들이 버찌의 잎과 싹을 거의 갉아 먹었기 때문이었다.
참새들은 버찌는 물론이거니와 벌레까지 상관없이 먹어댔지만, 양심껏 섭취했던 것?
사실은 참새가 적어지자, 결과적으로는 벌레들의 번식이 급속도로 진전되었던 것이다.
결국 프리드리히 국왕은 참새를 전멸시키라는 왕명을 신속하게 거둬들이기에 이르렀다.'
나는 일하다가, 설거지를 하다가, 길을 걷다가, 휴식을 취하다가, 산책 중일 때, 혹은 빗소리에 취해 있다가도 문득문득, 또는 퍼뜩 영감(靈感)이 떠오르는 스타일이다.
어쩌다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의무처럼 날마다 글을 써내는 관계로 매순간이 글과의 동고동락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차이콥스키의 적절한 말은 이렇다.
"영감(靈感)은 우아하게 손을 흔드는 사람에게 생기는 게 아니라
무지막지한 황소처럼 온 힘을 다하여 밀어 붙이는 사람에게 생긴다."
영감(靈感)은 게으름뱅이를 절대 사랑하거나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매우 어린 시절부터, 나는 항상 글이나 쓰면서 살 수 있기를 바랐었고, 글쟁이 되는 게 소원 중의 첫째였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나는 나름대로 목표를 달성했고, 행복한 편에 든다고 자인한다.
누구나 세상을 살아보고 살아 가고 있기는 하지만 , 첫 번째의 소원을 이룬다는 게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때로 생은 소용돌이처럼 나를 어지럽게 휘둘러 왔다.
어떻게든 헤어나려는 나를 한동안 사로잡고, 도대체 놔줄 생각을 안했던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글이라도 쓸 수 있어 살아갈 여력을 얻을 수 있었고, 내 나름대로 잘 극복헸다고 본다.
나는 요즘 살고, 살아가고, 살지만,
소탕작전에서 포수가 쏘아 올린 단호한 총알에 하마터면 목숨 줄 놓을 뻔 했던
그러한 처지와 다름 아닌 참새와 같다.
어쩌면 열매가 익기도 전에 참새에게 먹히던 버찌.
혹은 열매가 열리기도 전에 잎과 싹을 갉히던 나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나를, 역동적이면서 자유롭게 세상을 비상하는 참새라고 지칭하는 게 차라리 적절한 표현일 거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엔 버찌가 곳곳에 있다.
비록 프리드리히 국왕이 소유한 정원의 버찌만큼 좋은 품종은 아니어도.
이쯤에서 나는 혼란을 겪는다.
나는 버찌였었던지, 아니면 참새였는지에 대해서.
그렇지만 기필코 참새이고 싶다.
우리 인간이 즐겁기 위해서만 살아간다는 건, 성서는 물론이고 많은 양서(良書)의 그 어느 대목에도 나와 있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씩씩하게 말하는 중이지만 내가 하는 이야기는 나를 이상하리만큼 주눅 들게 만들고 있는 느낌이기도 하다.
그 누구보다도 감성적이지만
그 어떤 누구보다 이성적인 사람일 가능성이 더 많은 나.
최근의 나는, 광야에 홀로 서 있는 것처럼 주위의 사물들을 뚜렷이 지각하려는 느낌이 강하다.
하물며 내 앞에 전개된 관념들을 산뜻하게 주시하려고도 한다.
나의 체념이나 단념은 언제나 긍정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그점 매우 고맙기까지 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여름.
무덥고 나른하고 텅빈 도시에서의 나날들.
이와 같은 날씨 때문에 이 나라 사람들은 여름 휴가철을
오랜 옛적부터 2~3개월씩이나 부여했나 보다.
해가 안 보이는 날에도 쨍쨍한 더위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자신을 찬찬히 되돌아보는 일이 상쾌하지 않을 확률도 있지만
희망적일 경우가 더 많다는 걸로 스스로를 격려하게 된다.
2012년 2월 4일 토요일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맹하린의 생활 산책
아르헨티나 조선일보
2002년 10월 25일
미국의 쌍둥이 빌딩에서 테러에 희생됐던 사람들, 그 가족들에 대한 해당정부의 보상금이 1인당 1백만 달러로 굳혀지고 있다는 소식이 얼마 전 신문의 한 면을 장식했다.
1백만 달러.
세금 등을 뗀다고 해도 대단한 액수가 아닐 수 없다.
졸지에 가족을 잃은 대가.
피해가족들이 1백만 달러라는 거액의 보상금을 받게 되면 예전보다 나은 경제적 윤택을 누릴 수는 있겠으나, 더 행복해진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가족이나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상실감은 오래토록 지독한 아픔으로 잔존하듯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우리의 고국에서는 복권에 당첨된 서민층의 형제가 25억 원이라는 당첨금을 서로 양보하려고 해서 화제다.
동생과 그 친구에게 추석선물로 나눠 준 복권이었다고 한다.
어느 연구소는 복권이나 카지노 등에서 일확천금을 획득한 사람들의 80퍼센트가, 운명이 바뀌기 이전보다 훨씬 불행한 삶을 초래한다고 통계학적으로 밝혔다.
제대로 버는 방법도, 제대로 쓰는 방법도, 제대로 적응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이리라.
따지고 보면 벼락부자가 됐다고 해서 행복한 것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러저러한 와중에도 세상은 온통 테러와 전쟁과 전염병, 그리고 천재지변의 여파로까지 시달림을 당하고 있는 현실이다.
세상은 그만두고라도 아르헨티나가, 그 속에 몸담고 있는 우리가, 그 우리 속에 사는 내가 당장에 불편을 겪으며 살고 있는 것이다.
하도들 어렵다, 앞이 안 보인다, 절망적이다를 외쳐대니까 나의 곤경은 이유도 내력도 못되는 사항 같아서 의연하게 참고 견디자니 나를 다 부러워하는 사람까지 생겨난다.
전혀 외로워 보이지도 않고 어딘지 모르게 초연해 있다는 것이다.
그럴까?
가진 거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데 나는 뭘 믿고 이리도 당당하단 말인지,
그러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싶어 유심히 거울을 들여다 보게 될 때가 있다.
내가 아는 나는 몸도 마음도 나약한 이미지다.
그러나 그 나약함의 이면에는 자아의식이 튼튼하게 감겨 있음을 본다.
분명한 것은 나는 지난날에 대한 아쉬움을 느끼기에 앞서, 차라리 실패를 인정하는 방식을 우선적으로 선택 했으리라는 것이다.
사실 나는 최근의 몇 년인가를 참 절약에 절약을 다하면서 살아냈다.
그 결과인지 나 이제 아무리 힘든 일과 대면해도 별로 겁내거나 두려워하지를 않게 되었다.
너무 오래 걸어 낸 순례객이 느끼는, 절룩임 같은 증상도 내게는 무딘 옹두리처럼 저절로 굳혀지고 변형되었다.
세상이 첨예롭다 보니까 처세도, 처신도 , 주고받는 말까지도 사뭇 조심을 쏟게 된다.
분명한 것은 고난을 받는 이웃에게 편견을 배제하고 이해하는 자세까지 갖춘다면 아름다운 세상은 자연처럼 오리라는 점이다.
언제 내 앞에 불행이 닥칠 지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다.
행운도 불행도 미리 예고하고 찾아오는 예는 드물기 때문이다.
그렇단 들, 비록 고달픈 시선으로 지켜볼 때라도 이 세상의 온갖 자연들은 얼마나 수려하고 각별한가.
회의적일 때 일수록 돌 틈을 비집고 싹트는 잡초까지도 신비롭게 대하고 바쁠 때 특히, 야외나 근교라도 자주 들러보아야겠다는 각성이 싹튼다.
우리 모두 오늘만 살고 그만 둘 수는 없음에랴.
보다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작은 일에도 나, 그리고 나 아닌 남까지도 배려하는 마음을 조금씩이나마 습득해 나가리라는 결심을 굳히고 굳히게 된다.
나, 이쯤에서 잠시 글 쓰는 일에 약간의 틈을 남길까를 염두에 두지 않은 건 아니다.
내 거실과 주위의 눈에 익은 사물들이 하나 같이 나처럼 글의 마무리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느낌 같은 게 나도 모르게 밀려 오게 된다.
나는 이런 식의 말없는 신뢰와 지지가 바탕이 되는 신비로움이 소중해서
그게 사랑스러워 글을 쓰고 또 쓰고 그러는 건지도 모르겠다.
간혹 어떤 상황에 처한 다는 게 얼마나 산뜻하게 우리의 생을 추상화처럼 유도하던지...... .
이 새벽, 나는 글 쓰는 일, 그 자체가 자유를 의미하고 있음을 오롯이 긍정하게 된다.
그동안 모르고 지냈던 , 내 안에서 환히 빛나는 어떤 메시지를 발견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감사하라.
작은 새처럼 단순하거라.
내 안의 격정이 방안을 가득 메우고 채울 것 같은
매우 이른 아침이다.
나는 지속적으로 글을 가까이 하고
그리고 쓰겠다.
뭔가에 영감을 얻었기에 쓸 것이고
그 뭔가를 태연하려는 마음일 때도 쓸 것이다.
-초여름- |
일년에 두어 번 다이어트를 하는 친구가 있다. 한 번에 거의 보름 쯤 굶는 플랜이다. 내 보기엔 요요현상 때문인지 매번 똑 같아 보이던데 친구는 그걸 극기훈련처럼 잘도 치뤄낸다. 배고픔을 참는 과정일 때 친구는 일부러 한국요리책을 팔랑팔랑 넘기며반복하고 그런다. 음? 맛있겠다! 음? 맛있겠다! 나는 이맘때쯤이면 바닷가에 혼자는 못가고 이런 식의 사진들을 자주 본다. |
2012년 2월 3일 금요일
우리의 둥지는 아늑한가?
맹하린의 수요칼럼
아르헨티나 조선일보
2000년 4월 19일 수요일
월요일은 원래대로 먹고
화요일은 화끈하게 먹고
수요일은 수수하게 먹고
목요일은 목이 칼칼하도록 먹고
금요일은 금식하듯 먹고
토요일은 토하기 직전까지 먹고
일요일은 일일이 챙겨서 먹는다.
현대인들의 음식문화를 꼬집은 어떤 학자가 ‘ 요새 사람들은 못 먹어서 병에 걸리는 게 아니라 너무 잘 먹어서 생기는 질환이 더 많다'는 학설을 펼쳐 놓아, 웃음과 함께 위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아르헨티나에서 살아가는 우리 교민은 어떤가?
월요일은 동문회
화요일엔 띠모임
수요일엔 향우회 골프모임
목요일엔 미국으로 재이민을 떠나는 친목회원의 송별회
금요일엔 지인의 아기 돌잔치
토요일엔 한 쌍인 게 다행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두세 군데씩 겹치는 결혼식.
이것이 일종의 소속감과 연대감에 실려 떠밀리듯 살아가는 우리 교민 대다수의 현주소다.
거기다 우리 1세들은 물론이고 2세들 역시 앉으나 서나 골프, 그리고 골프장, 더불어 골프채 얘기다.
일상사의 모든 목적을 가정적이고 가족적인 테두리에 중점을 두고 살아가는 현지인의 생활패턴에 비해 우리 한국인, 특히 재아 교민들은 모든 행동반경을 밖으로 밖으로만 구축하면서 열심히 힘차게 바깥세상만을 만끽하며 살아가는 것 같다.
우리가 이렇게 밖으로만 휘돌고 있을 때, 우리의 2세들은 컴퓨터와 오락실, 노래방 등에 서서히 잠식되듯 중독되어 가면서 ‘외롭다’ 와 ‘외롭지 않다’의 경계사이를 오락가락, 진정 외롭게 헤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 목소리로 나타나지 않는 그들의 고독한 현장을 엿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 차세대들을 한껏 옹호하고 싶은 느낌이 최근에 부쩍 자주 들고 있다.
처음엔 아주 하찮게, 우연찮게 따로이 겉돌던 계기가 세월의 함수에 실리면서 무한대의 곡선으로 폭이 넓혀졌을 것이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
불경기를 잊기 위해?
의류사업에서 쌓이는 스트레스를 풀고 싶어서?
이민 초창기에 비해 많은 발전이 우리 교민사회에 있었고, 날이 갈수록 번창일로의 대열에 합류하는 젊은세대들의 성공사례도 자주 보고 듣게 된다
재산은 혼자 찾아오는 법이 없다고 한다. 재산이 오면 탐욕이라는 친구도 함께 따라온다고 .
우리와 우리의 차세대들은 이래저래 서로 겉돌고 있다.
어느 심리학자는 논했다.
'세대 간의 관계 속에서 생기는 대부분의 트러블은 상대의 마음이 충실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을 제대로 알아 내지 못한 탓으로 생긴다.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마음은 돌아설 때 누구보다 결연히 자신을 거둔다. 따라서 사람과 세상이 화해하는 것은 자기는 그런 줄로만 알았던, 많지도 않던 틀에 구겨 넣으려던 제 마음과 화해하는 일이다. 말랑말랑해서 변하거니 했던, 결기어린 제 마음과 화해하는 일이 바로 진정한 화해며 세대 간의 벽을 허무는 화해다.'
이런저런 이유가 타당하지 않아도 좋으니 우리 이제 밖에서의 발길을 어서어서 가정으로 향하도록 차츰 배려하고 자주 함께하는시간을 아낌없이 바치고 할애하도록 관심을 기울였으면 한다. 가서 우리의 자녀들과 조촐한 식탁을 마주하고 하루 내내 있었던 얘기들을 잔잔하게, 그리고 막역지우의 친구처럼 친밀하게 나누도록 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그렇게 이행하는 길만이 우리의 둥지를 빠른 시일 안에 아늑하고 더욱 포근하게 변모시키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장식하게 될 것 같아서다.
내 앞에 비로소 나타난 세상이라는 바다가, 내가 이제까지 눈길조차 주지 않던 상식이라는 게 내게 수없는 파도가 되어 화합의 음향으로 밀려오고 있다.
나는 눅눅하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눅눅하기 이전에 모든 찌꺼기나 때를 보송보송한 촉감을 지니도록 서둘러 세탁을 해내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예전의 내게 고통은 괴로움 그 자체였는데, 현재는 모든 고통이 사소한 것으로 변화되었다.
나는 고통조차 선택의 여지라는 게 있다고 믿으며 거부할 수도 있는 영역도 주어지고 있다는 점과 그 권한을 재량껏 갖추는 몫은 언제나 스스로의 역할에 좌우된다는 것도 어느 시기에 저절로 깨우치게 되었다.
지금껏 나의 내면엔 많은 희망이 억압처럼 갇혀 있었고, 그 사실은,구태여 숨기고 싶지도 않은 매우 자명한 일이라고 본다.
어느 격언과 같이 '가장 나중에 웃는 웃음을' 나는 웃으려고 한다. 꼭 그렇게 될 것이다.
가정 , 가족 .
이 말들은 현재의 내게 무엇보다 매력적인 언어다.
나부터 새롭게 각성하고자 고요히, 작게나마 되뇌어 본다.
우리의 둥지는 아늑한가?
2012년 2월 2일 목요일
축복처럼 질타처럼 내리던 폭우
맹하린
저녁 7시 반에서 8시 사이에 퇴근하는 나는 폭우가 쏟아질 것만 같은 예감이 휘휘 밀려오던 어제 저녁, 자꾸만 가게 입구의 문앞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또 내다보고 그랬다.
그냥 비가 아니라 큰 비가 내릴 것 같은 무겁고 암울한 빛의 먹구름 잔뜩 낀 하늘.
그쯤 되면 당장 퇴근하는게 좋겠다고 몇 번이고 재촉하게 되지만, 아들은 비 때문에 퇴근시간을 앞당기는 건 어느 나라 법이냐고 도무지 끄떡도 안 할 뿐아니라, 요지부동 제 할 일까지도 끝을 안 내려고 한다.
딱히 아들의 할 일이라고 해봐야 그 시간대엔 그저 책이나 읽고 인터넷이나 하는 정도지만.
(아들! 나는 너와 문학이 아니었다면 벌써부터 죽고 싶었고, 이미 죽었을 지도 몰라. 그런데 너와 문학 때문에 앞으로 90까지는 살아내고 싶어. 나중에 두 가지만 확실하게 후회해 줄래? 미리 퇴근하고 싶을 때 그러지 못하게 한 것, 일이 많은 날, 식당에서 뭐 좀 시켜 먹자고 하면 입맛 버린다, 돈 아깝다 그러며 , 결국은 바쁜 상황이라서 간단히 라면에 찬밥이나 말아 먹게 하던 일.)
결국 셔터를 내릴 무렵엔 하늘이 수많은 호스를 대고 뿌려대는 것처럼 폭우가 엄청 쏟아지기 시작했다. 호스도 그냥 호스는 아닌, 대형 호스들 같았다.
순식간에 거리는 온통 물바다였다.
쏟아지는 양보다 길바닥에 흐르는 물줄기마다에 쓰나미처럼 막강한 속력이 실려 있었다.
가능한한 순발력 있게 힘을 모아 , 꽤 심각하다는 가뭄을 단박에 몰아낼 실력행사를 본때 있게 보여주자는 듯 급류는 낮은 쪽으로 연신 휘몰리고 휩쓸리고 달려가고 있었다.
(내가 사는 지역은 지대가 좀 높은 편에 속한다.)
언젠가도 썼었지만 아들은 퇴근시간마다 한 블록, 그러니까 J교회 앞 켠의 산책로는 기꺼이 함께 걸어가 준다.
나란히는 아니고 항상 5미터나 3미터쯤 간격을 둔 걸음이다.
누가 보면 꼭 싸우고 난 모자간처럼 보일 것이다.
그게 나에 대한 질서이자 배려라고 생각하는 아들.
그렇지만 내가 굳이 내색하지 않더라도 나의 기분이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다는 걸 파악했을 경우엔 아무 말이나 시키면서 살갑게 굴기도 한다.
나란히 같은 보조로 걸어 주면서까지 말이다.
그 다음 D식당 건너편의 산책길은 나 혼자 걷게 하고 아들은 D식당 바로 앞길로 접어든다.
나와 아들은 D식당의 문앞에서 몇 년 전, 열 서너살 쯤의 현지인 두 명에게 강도를 당했었다.
내 입장으론 그 걸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아 그 길을 피하는 것이고, 아들은 그 정도 가지고 겁 먹기는 싫다면서 부득불 그 길을 선택하는 셈이다.
결국, 나는 영원히 그 일을 기억에서 못 지우는 편이고, 아들은 전혀 기억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려는지.
가장 확실하고 중요한 건, 나는 보도블록보다는 산책길을 좋아한다는 점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다음 반 블록을 남기고 다시 합류하면 드디어 집으로의 당도가 이루어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가 그 정도 억수로 쏟아지게 되면, 자가용이 없을 경우, 레미스(대절용 자가용)나 택시를 기본적인 방편으로 삼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비를 좋아해 마냥 빗속을 걷는 걸 즐기는 편이고, 아들은 단지 한 푼까지도 소중히 여기는 인물이라 그렇게 걷는 걸 고집하는 셈이다.
말이 걷는 것일 뿐, 우산을 받고도 신발은 물론이려니와 옷도 몸도 흠뻑 젖고 젖기 마련인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비옷을 생각안 한건 아니었으나, 더위 때문에 금세 포기했었다.
D식당이 가까워진 육거리에서는 정강이까지 빠지는 급류를 최대한으로 찰박이며 즐기듯 헤쳐 나갔다.
하지만 지나가는 자동차로 인한 급류의 활개짓에 휘말려 나는 휘청 넘어질 뻔 했던 찰나까지 겪어야 했다.
D식당 쪽으로 건너가던 아들도 그 장면 고스란히 보았나 보았다.
때로 나는 아들에게서, 언제 어디서나 평화로이 무사고로 지낼 수 있도록 시나브로 내 주위에 둘러 서 있는 방패라거나 돌담과도 같은 느낌을 받는다.
나는 여러 마디로 아들을 잘 두었지만, 아들은 한 마디로 어미를 못 두었다.
(그래도 내 친구의 아들보다는 좀 나으려나?)
친구의 아들은 나만 만나면, 본인은 자기 엄마의 리모콘이라며, 눈물만 안 보일뿐 내게 일러 바치느라 정신없이 바쁘다.
그럴 경우, 친구의 아들이 일단, 약간, 살몃 가엾다.
퇴근하면 소파에 눕기부터 하고, 한국드라마에 이미 중독된 상태인 친구는, 리모콘을 잘 사용하지 못해 그거 틀어라 저거 틀어라 다 큰 아들을 종 부리듯 부려 먹는다는 얘기다. 나는 일단 집에만 가면 문화생활과는 담을 쌓고 사는 데다, 컴퓨터도 웬만큼은 도사에 가까우니, 그점에 대해선 큰 소리 탕탕이고 떳떳하기 이를데 없는 편이라고나 할까.
이런 면으로는 나 아들에게 꽤 잘 둔 어미도 되지 싶다.
나의 몸과 옷도 젖을대로 젖었지만, 내 정신까지도 나머지 산책로까지 매우 천천히 걸으며 비에게 흠뻑 적셔지고 말았던 듯 하다.
그래, 이 기회에 나 좀 두들겨 맞자, 그런 심정도 있었을 것이고 나여, 잘 참았다, 되도록 은혜로 받아들이거라, 그런 다짐도 고스란히 느껴 낼 수 있던 폭우였을 것이다.
느닷없어 보이지는 않았고, 이미 예비된 비였다.
비를 피하지 않고
비를 오롯이 맞고
몸도 마음도 고즈넉이 젖고
참으로 특별나고 고맙던 폭주(暴注)였다.
은총처럼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되던 강우였다.
언제나 그래왔지만 굳이 피하려고 하지 않고
함초롬히 비를 받아들이게 되던 순간이었다.
새삼 깨달았던 것도 같다.
비라는 비 모두 내 아릿한 기분들을 얼마쯤 정화시킨다는 사실을.
절절하던 감성을 표연히 고뇌하게 됐었고
결정적 동기를 부여하게 되었던 폭우였다고도 보여진다.
물로 만든 폭탄처럼 쏟아지고 퍼 부어 내리는 빗줄기 속을 느릿느릿 걸어 낼 수 있었던 건 어쨌거나 인내심 깃든 행위였다.
그건 견결함, 그 자체였다.
내가 즐거움만을 위해 살고 있지 않다는 게 불현듯 감사로웠다.
나는 신의 어떤 섭리에 의해 살고 있다는 신념의 날들도 때로 있었으므로
나 스스로의 독자적인 판단으로 살아내지는 못하고 있을 경우가 참으로 흔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일종의 자구책으로 결곡을 익혔던 건지도 모르겠다.
비를 즐기는 감성은 나보다 훨씬 먼저 태어나 나를 기다려 줬을 것만 같다.
어린 시절.
혼자서 바깥마당에 앉아 빗물의 작은 굽이에 손을 적시며 상념에 빠지던 아이였다.
나는.
세상은 어차피 불공평하다.
나는 열까지 세기도 전에 잠들어 버린다.
선각자들의 얘기와 같이 졸릴 때의 눈커풀이 그 무엇보다 무겁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오래 전에 터득해낸 사람이다.
하지만 어떤 이는 새벽까지 졸지도 않고 마치 밝은 날만을 선호하는 사람처럼 멀뚱대기만 하는 것이다.
세상을, 또는 비를 즐기는 내 감각은 진정 불가사의한 구조와 다름 아니다.
결코 끝을 모르는 내 탐미주의 또한 내가 생각하기에도 진정 전설적이다.
나는 비가 그칠까 두려운 사람처럼 빗소리를 음악처럼 즐기며, 그러나 금세 잠들고 말았다.
이제 나는 다시금 미소를 잊지 않고 하루하루를 긍정으로 살아내려고 한다.
(왜 이렇지? 오늘은 마치 슬픔이나 외로움을 어디 먼 곳으로 재이주 시킨 것만 같구나.)
여기서, 이쯤에서 내가 긴장을 풀었다고 단정한다면 사람들은 나에 대한 진정성을 전혀 모르는 착오에 잠기고야 말 것이다.
내 느긋함과 여유로움은 언제나 긴장과 공존해왔고, 긴장이 아닌 것처럼 긴장해왔던 것을.
세상은 여전히 장승처럼 의젓하고 고요로운데 나는 왜 그리 폭우에 젖고 찰박이고 휩쓸리고 고통스러워 하고 그랬던 건지 새삼 숙고하게도 된다.
신이 인간에게 애틋함이라거나 감사라거나 열정의 능력을 부여하고 베푸는 자리가 가령 있었다면, 나 분명 손 약간 들고 저요, 저요! 그랬던게 아니었을까?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마당에서 소통을 주고 받고 했던 중이었다면 절대로 그 마당 고유의 법과 테두리를 선망만 해서는 안 된다는 걸 미리 파악해 뒀어야 했다는 점이다.
어젯밤 폭우는 그렇게도 나를 두들겨 팼고, 내게 질타와 인식의 총알되어 쏘아지고 퍼부어졌다.
오늘, 비 온 후의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세상은 더 푸르고 더 해맑고 더욱 쨍쨍하다.
뜻밖에도, 톨스토이가 부활에서 설파한 말이 내 맘에 찰랑찰랑 언어의 비로 내리고 있다.
'인간이란 강물과 같은 것이다.
물은 어느 강에서나 똑 같아서
어디를 가건 변함이 없지만
강 그 자체에 이르러서는
좁은 것도 있거니와 빠른 것도 있고
넓은 것도 있거니와 고요한 것도 있고
맑은 것도 있거니와 흐린 것도 있고
찬 것도 있거니와 따스한 것도 있다.
인간도 이와 마찬가지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 속에 인간으로서의
온갖 성질의 싹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때는 하나의 성질이 나타나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다른 성질이 나타나곤 해서
똑 같은 사람이면서 전혀 다른 성질이
나타날 때가 있는 것이다.
맹하린
저녁 7시 반에서 8시 사이에 퇴근하는 나는 폭우가 쏟아질 것만 같은 예감이 휘휘 밀려오던 어제 저녁, 자꾸만 가게 입구의 문앞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또 내다보고 그랬다.
그냥 비가 아니라 큰 비가 내릴 것 같은 무겁고 암울한 빛의 먹구름 잔뜩 낀 하늘.
그쯤 되면 당장 퇴근하는게 좋겠다고 몇 번이고 재촉하게 되지만, 아들은 비 때문에 퇴근시간을 앞당기는 건 어느 나라 법이냐고 도무지 끄떡도 안 할 뿐아니라, 요지부동 제 할 일까지도 끝을 안 내려고 한다.
딱히 아들의 할 일이라고 해봐야 그 시간대엔 그저 책이나 읽고 인터넷이나 하는 정도지만.
(아들! 나는 너와 문학이 아니었다면 벌써부터 죽고 싶었고, 이미 죽었을 지도 몰라. 그런데 너와 문학 때문에 앞으로 90까지는 살아내고 싶어. 나중에 두 가지만 확실하게 후회해 줄래? 미리 퇴근하고 싶을 때 그러지 못하게 한 것, 일이 많은 날, 식당에서 뭐 좀 시켜 먹자고 하면 입맛 버린다, 돈 아깝다 그러며 , 결국은 바쁜 상황이라서 간단히 라면에 찬밥이나 말아 먹게 하던 일.)
결국 셔터를 내릴 무렵엔 하늘이 수많은 호스를 대고 뿌려대는 것처럼 폭우가 엄청 쏟아지기 시작했다. 호스도 그냥 호스는 아닌, 대형 호스들 같았다.
순식간에 거리는 온통 물바다였다.
쏟아지는 양보다 길바닥에 흐르는 물줄기마다에 쓰나미처럼 막강한 속력이 실려 있었다.
가능한한 순발력 있게 힘을 모아 , 꽤 심각하다는 가뭄을 단박에 몰아낼 실력행사를 본때 있게 보여주자는 듯 급류는 낮은 쪽으로 연신 휘몰리고 휩쓸리고 달려가고 있었다.
(내가 사는 지역은 지대가 좀 높은 편에 속한다.)
언젠가도 썼었지만 아들은 퇴근시간마다 한 블록, 그러니까 J교회 앞 켠의 산책로는 기꺼이 함께 걸어가 준다.
나란히는 아니고 항상 5미터나 3미터쯤 간격을 둔 걸음이다.
누가 보면 꼭 싸우고 난 모자간처럼 보일 것이다.
그게 나에 대한 질서이자 배려라고 생각하는 아들.
그렇지만 내가 굳이 내색하지 않더라도 나의 기분이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다는 걸 파악했을 경우엔 아무 말이나 시키면서 살갑게 굴기도 한다.
나란히 같은 보조로 걸어 주면서까지 말이다.
그 다음 D식당 건너편의 산책길은 나 혼자 걷게 하고 아들은 D식당 바로 앞길로 접어든다.
나와 아들은 D식당의 문앞에서 몇 년 전, 열 서너살 쯤의 현지인 두 명에게 강도를 당했었다.
내 입장으론 그 걸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아 그 길을 피하는 것이고, 아들은 그 정도 가지고 겁 먹기는 싫다면서 부득불 그 길을 선택하는 셈이다.
결국, 나는 영원히 그 일을 기억에서 못 지우는 편이고, 아들은 전혀 기억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려는지.
가장 확실하고 중요한 건, 나는 보도블록보다는 산책길을 좋아한다는 점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다음 반 블록을 남기고 다시 합류하면 드디어 집으로의 당도가 이루어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가 그 정도 억수로 쏟아지게 되면, 자가용이 없을 경우, 레미스(대절용 자가용)나 택시를 기본적인 방편으로 삼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비를 좋아해 마냥 빗속을 걷는 걸 즐기는 편이고, 아들은 단지 한 푼까지도 소중히 여기는 인물이라 그렇게 걷는 걸 고집하는 셈이다.
말이 걷는 것일 뿐, 우산을 받고도 신발은 물론이려니와 옷도 몸도 흠뻑 젖고 젖기 마련인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비옷을 생각안 한건 아니었으나, 더위 때문에 금세 포기했었다.
D식당이 가까워진 육거리에서는 정강이까지 빠지는 급류를 최대한으로 찰박이며 즐기듯 헤쳐 나갔다.
하지만 지나가는 자동차로 인한 급류의 활개짓에 휘말려 나는 휘청 넘어질 뻔 했던 찰나까지 겪어야 했다.
D식당 쪽으로 건너가던 아들도 그 장면 고스란히 보았나 보았다.
때로 나는 아들에게서, 언제 어디서나 평화로이 무사고로 지낼 수 있도록 시나브로 내 주위에 둘러 서 있는 방패라거나 돌담과도 같은 느낌을 받는다.
나는 여러 마디로 아들을 잘 두었지만, 아들은 한 마디로 어미를 못 두었다.
(그래도 내 친구의 아들보다는 좀 나으려나?)
친구의 아들은 나만 만나면, 본인은 자기 엄마의 리모콘이라며, 눈물만 안 보일뿐 내게 일러 바치느라 정신없이 바쁘다.
그럴 경우, 친구의 아들이 일단, 약간, 살몃 가엾다.
퇴근하면 소파에 눕기부터 하고, 한국드라마에 이미 중독된 상태인 친구는, 리모콘을 잘 사용하지 못해 그거 틀어라 저거 틀어라 다 큰 아들을 종 부리듯 부려 먹는다는 얘기다. 나는 일단 집에만 가면 문화생활과는 담을 쌓고 사는 데다, 컴퓨터도 웬만큼은 도사에 가까우니, 그점에 대해선 큰 소리 탕탕이고 떳떳하기 이를데 없는 편이라고나 할까.
이런 면으로는 나 아들에게 꽤 잘 둔 어미도 되지 싶다.
나의 몸과 옷도 젖을대로 젖었지만, 내 정신까지도 나머지 산책로까지 매우 천천히 걸으며 비에게 흠뻑 적셔지고 말았던 듯 하다.
그래, 이 기회에 나 좀 두들겨 맞자, 그런 심정도 있었을 것이고 나여, 잘 참았다, 되도록 은혜로 받아들이거라, 그런 다짐도 고스란히 느껴 낼 수 있던 폭우였을 것이다.
느닷없어 보이지는 않았고, 이미 예비된 비였다.
비를 피하지 않고
비를 오롯이 맞고
몸도 마음도 고즈넉이 젖고
참으로 특별나고 고맙던 폭주(暴注)였다.
은총처럼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되던 강우였다.
언제나 그래왔지만 굳이 피하려고 하지 않고
함초롬히 비를 받아들이게 되던 순간이었다.
새삼 깨달았던 것도 같다.
비라는 비 모두 내 아릿한 기분들을 얼마쯤 정화시킨다는 사실을.
절절하던 감성을 표연히 고뇌하게 됐었고
결정적 동기를 부여하게 되었던 폭우였다고도 보여진다.
물로 만든 폭탄처럼 쏟아지고 퍼 부어 내리는 빗줄기 속을 느릿느릿 걸어 낼 수 있었던 건 어쨌거나 인내심 깃든 행위였다.
그건 견결함, 그 자체였다.
내가 즐거움만을 위해 살고 있지 않다는 게 불현듯 감사로웠다.
나는 신의 어떤 섭리에 의해 살고 있다는 신념의 날들도 때로 있었으므로
나 스스로의 독자적인 판단으로 살아내지는 못하고 있을 경우가 참으로 흔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일종의 자구책으로 결곡을 익혔던 건지도 모르겠다.
비를 즐기는 감성은 나보다 훨씬 먼저 태어나 나를 기다려 줬을 것만 같다.
어린 시절.
혼자서 바깥마당에 앉아 빗물의 작은 굽이에 손을 적시며 상념에 빠지던 아이였다.
나는.
세상은 어차피 불공평하다.
나는 열까지 세기도 전에 잠들어 버린다.
선각자들의 얘기와 같이 졸릴 때의 눈커풀이 그 무엇보다 무겁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오래 전에 터득해낸 사람이다.
하지만 어떤 이는 새벽까지 졸지도 않고 마치 밝은 날만을 선호하는 사람처럼 멀뚱대기만 하는 것이다.
세상을, 또는 비를 즐기는 내 감각은 진정 불가사의한 구조와 다름 아니다.
결코 끝을 모르는 내 탐미주의 또한 내가 생각하기에도 진정 전설적이다.
나는 비가 그칠까 두려운 사람처럼 빗소리를 음악처럼 즐기며, 그러나 금세 잠들고 말았다.
이제 나는 다시금 미소를 잊지 않고 하루하루를 긍정으로 살아내려고 한다.
(왜 이렇지? 오늘은 마치 슬픔이나 외로움을 어디 먼 곳으로 재이주 시킨 것만 같구나.)
여기서, 이쯤에서 내가 긴장을 풀었다고 단정한다면 사람들은 나에 대한 진정성을 전혀 모르는 착오에 잠기고야 말 것이다.
내 느긋함과 여유로움은 언제나 긴장과 공존해왔고, 긴장이 아닌 것처럼 긴장해왔던 것을.
세상은 여전히 장승처럼 의젓하고 고요로운데 나는 왜 그리 폭우에 젖고 찰박이고 휩쓸리고 고통스러워 하고 그랬던 건지 새삼 숙고하게도 된다.
신이 인간에게 애틋함이라거나 감사라거나 열정의 능력을 부여하고 베푸는 자리가 가령 있었다면, 나 분명 손 약간 들고 저요, 저요! 그랬던게 아니었을까?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마당에서 소통을 주고 받고 했던 중이었다면 절대로 그 마당 고유의 법과 테두리를 선망만 해서는 안 된다는 걸 미리 파악해 뒀어야 했다는 점이다.
어젯밤 폭우는 그렇게도 나를 두들겨 팼고, 내게 질타와 인식의 총알되어 쏘아지고 퍼부어졌다.
오늘, 비 온 후의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세상은 더 푸르고 더 해맑고 더욱 쨍쨍하다.
뜻밖에도, 톨스토이가 부활에서 설파한 말이 내 맘에 찰랑찰랑 언어의 비로 내리고 있다.
'인간이란 강물과 같은 것이다.
물은 어느 강에서나 똑 같아서
어디를 가건 변함이 없지만
강 그 자체에 이르러서는
좁은 것도 있거니와 빠른 것도 있고
넓은 것도 있거니와 고요한 것도 있고
맑은 것도 있거니와 흐린 것도 있고
찬 것도 있거니와 따스한 것도 있다.
인간도 이와 마찬가지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 속에 인간으로서의
온갖 성질의 싹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때는 하나의 성질이 나타나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다른 성질이 나타나곤 해서
똑 같은 사람이면서 전혀 다른 성질이
나타날 때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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