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 19일 수요일

선물

                      맹하린

10월 셋째 일요일이던 어머니날 무렵.
나는 일 년 중 가장 큰 대목을 위해 사흘이나 복닥거리며 보냈다.
아니, 한 달 내내 준비하며 지냈다고 봐야겠다.
어디에서 그렇게나 많은 우리의 한국인 젋음들이 오고 오던지,
생각할수록 신비스럽다.
내게 동생 같은 친구 두세 명이 해마다 큰 행사를 치를 때마다
기꺼운 마음을 보태며 도와주는 데도, 그리고 아들과 거의 밤새워
일하는 데도 주문에 비해 턱없이 상품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줄서 있는 고객들이 많을 때조차도 전화 받고 배달 보내고 틈틈이 
꽃바구니나 꽃다발을 만들어 내느라 나는 내가 어디에 있고,  어떤 
모습으로 흐르는 중인지를 완벽하게 잊고야 마는, 내가 나에게서
꽤나 멀어져 있는 순간들의 연속인 과정으로 떠밀리듯 가고 갔었다.
물론 또래의 친구들이 도와 준 날들도  있긴 했었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몇 년을 힘든 내색도 없이 해내던 일을 고작 한 
나절하고는 일주일 동안 몸살을 앓는 연약형 체질인 걸로 부족하여 귀족형
여인들이라서 내 쪽에서 사양하는 입장으로 굳혀진 셈이다.

그렇게 일하고 저녁에 친구들과 식당에 닿아, 친구들이 즐겨하는 보양전골을
시켜주고 아들과 나는 따로 시킨 돌솥비빔밥이나 순두부찌개를 너무 지쳐
거의 못 먹고 앉아 있노라면 이윽고 친구들의 염려가 마치 꽃꽂이처럼 장식된다.
일찍, 먼저, 어서 집으로 돌아가 쉬라는 권유바구니와 배려다발되어…….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와 잊지 않고 해내는 일이 지폐를 정리하는 일이다.
경기가 아무리 곤두박질을 친다고 해도 우리의 2세들이 어머니날에 이행하는 
연례행사는 날이 갈수록 더하면 더 했지 결코 시들지는 않는 것 같다.

남편이란 대체 어떤 존재인가?
그가 생존해 있을 때는 와병 중이던 그에게 정확한 액수를 알려주기 위해
지폐의 얼굴을 가지런히 정리한 뒤 세어보다가, 결국 다 못 파악하고 쓰러져 
잠들기 마련이었는데,  그래서 그 다음날 새벽에야 매상액을 남편에게 알려줄 
수  있었는데, 그런데 그가 떠나고 난 4년 동안 도대체 왜 졸리기는 한데 끝까지 
모두 세어내기까지 할 수 있는지, 그 진위가 참으로 의아스럽다. 
(나의 맘고생 모조리 다 챙겨들고 떠난 남편이여! 나는 이리도 의연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꽃가게를 운영하는 일이 중노동이긴 하지만,
꽃가게를 운영하는 일은
우아함의 대명사라도 된다는 듯 매번 부러워하는 단순편리형인 지인들.
대다수의 그들 때문에 나는 그럭저럭 행복한 사람으로 비춰지는 경우가 
비일비재이고 부지기수다.
불현듯 아들이 깜짝 놀라며, 너무 바빠서 내게 선물한다는 걸 잊었노라고
몹시도 미안함을 표시해온다.
그럴 때 나는 일단 짓궂어지는가 하면 매우 너그러워지기도 한다.
“ 글쎄, 그랬더라니까! 내년엔 절대로 잊지 않았으면 고맙겠다는 것도
알아둘래? 그런데 난 선물 받았는데……. 그렇게나 많은 일을 도와준 
것보다 더 크고 많은 선물은 결코 없다고 보는데 “
이쯤에서 나는 속으로만 말한다.
(너 사는 모습 전체가 내게 선물이야. 고마워 아들!)
이왕 고마움의 장을 펼쳤으므로 나는 친구들에게도 내 안에서 끝나는
나만의 메시지를 건네기 시작 한다.
(친구들, 고마워 나의 일을 자기들 일처럼 도맡아 해줘서.)
(파수꾼이 되어 준 친구들도 감사합니다. 어찌하여 고생의 극치로만
여겨지는 고난도의 희생을 사서 하는지 쉽게 용납이 안 되지만, 마음마다 
자주 실금으로 갈라짐을 자인하면서 완전 밉지만, 그렇지만 고마운 건 
고마운 거였습니다. 그 어떤 선물보다 커다란 선물 같아요. 감사합니다.
만약 그대들이 어머니였고, 내가 어머니가 아니었더라면 일이 여기에
이르진 않았을 것만 같아 문득 송구스럽습니다. 
한동안 나는 내 감성을 어떻게 하면 표현하지 않는가에 몰두하며 
어떻게 지우는가에 대해서만 정신을 빼앗겨 왔던 듯도 합니다.)

새삼, 누군가의 안부를 묻고 싶어지는, 오늘은
바로 그런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