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하린 플러스 발상 무엇이든 플러스 발상을 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은 면역성이 강하여 좀처럼 병에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늘 마이너스 발상만 하는 사람은 한심스러울 정도로 쉽게 병에 걸리고 만다. 똑 같은 상황, 똑 같은 라이프스타일임에도 불구하고 생기 있고 건강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늘 기운이 없고, 병약한 사람이 있다. 이 같은 차이는 대부분 마음가짐에서 시작된다. -하루야마의 <뇌내혁명> 중에서- 우리 가게는 버스정거장을 앞에 두고 있다. 한국과 달리 버스정거장이 앞에 있어 좋은 일보다 버스정거장이 앞에 있기 때문에 귀찮은 일이 더 많은 편이라고 해야겠다. 버스를 기다리기 지루한 현지인이 불쑥 들어와 이렇다하게 뭐라도 구입할 의도는 전혀 안보이면서 저렇다하게 바쁜 내게 이것저것 캐묻는 일이 부지기수다. 대부분 분재에 대한 질문이다. 자꾸만 죽으려고 한다는 얘기다. 그럴 때 나는 되도록 명쾌하게 답해준다. " 주인은 살리고 싶은데 분재가 죽고 싶어 하나요? 식물 쪽에서 죽으려고만 안 하면 차츰 살아나요. 아무리 그렇단 들 주인의 사랑과 관심이 멀어지면 죽는 게 아니라 죽이는 건 당연지사죠." 20일쯤 되었을까……. 작업실 안에서 어머니날에 대비하느라 열심히 리본을 접고 있는데 가게 안으로 들어오며 누가 재미있게 부른다. "저기요!" (네, 여기요.) 갓 스물 정도 되어 보이는 한국아가씨였다.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생면부지의 얼굴이었는데, 대뜸 휴지를 좀 얻을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버스를 기다리느라 가로수 둘레의 난간에 앉았었는데, 그만 바지에 껌이 붙고 말았다는 얘기였다. 일단 떼어내 주려고 내 나름대로의 친절과 조치는 취했으나 내 노력과는 상관없이 전혀 말끔하지가 못했다. 일단 집에 돌아가고, 껌이 붙은 바지 위에 신문을 깔고 다림질을 하면 쉽게 제거가 될 거라고 나는 부연설명까지 잊지 않았었다. 하물며 껌이 허옇게 자리 잡고 있는 부분이 누군가의 눈에 띄지 못하도록 내 검정빛 원피스를 그녀의 상의 안에 입혀주기도 했다. 빌려주는 옷이라서 함부로 입는 옷이 아닌, 아끼는 옷을 내어 준 것이다. 그녀를 보내고 작업실에 들어서니 아들이 실실 웃었다. 말하나마나 결과는 뻔 하게 예측 된다는 듯 한, 묘한 뉘앙스가 엿보이는 웃음이었다. 그렇게 20일이나 지나게 되었다. 내 지인이나 친구들에게야 뭐라도 빌려주면 돌려줄 때까지 마냥 잊는다. 지금 나보다 그들에게 훨씬 더 필요할 게라고 도리어 편하게 맘을 먹기도 한다. 그러나 낯선 사람에게는 그래서도, 그런 일이 있어서도 안 될 일이다. 그 아가씨가 이글을 읽을 확률은 전무하다고 봐야겠지만 일단은 적게 된다. 그 뒤 아들은 자주 실실 웃는다. 나도 웃는다. 내 웃음이 훨씬 실실이다. 쉬잇! 이건 극비다. 내가 가끔은 나도 모르게 실실 웃는다는 사실 말이다. 내 안에 숨어 있다가 가끔 나를 호되게 몰아 부치고 기필코 참견해야만 직성이 풀린다고 착각하는 또 다른 내가 단박에, 그리고 가차 없이 나를 향해 일갈을 터뜨린다. 예외는 있을 수 없다는 듯 지극히 냉소적인 일면까지 내비치며……. (자식도 잃고 사는 주제에 그까이꺼, 까짓 원피스 하나? 뭐 어때서!!!)
에필로그: 오늘(10월 8일), 맨 처음 인사를 저기요! 그렇게 시작하는,
얼굴이 유난스레 하얀 한국아가씨가 어김없이 저기요! 그러면서 우리
가게로 들어오더니, 작은 종이백을 내민다. 뭐죠? 라고 묻는 내게
옷이요, 라는 답이 먼저 건네져 온다.
내 원피스가 돌아온 것...
나는 잘 세탁되어 보송보송 새틋함까지 느껴지는 내 옷을 돌려 받았는데...
그런데 왜 나의 모국애를 돌려 받은 기분인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