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 3일 월요일

소풍 후에

맹하린                           


몇 년 전이었다.
H일보에 칼럼을 쓰는 s여사가 전화에 대고 말했다.
-있잖아요, 어제 남편과 후리리다에 있는 극장에서 한국영화를 봤는데요. 어쩐지 문우인 당신이 떠오르는 영화였어요. 꼭 한 번 가보세요. 제목은 봄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에요.
남편은 그 무렵 중풍을 앓는 중이었고, 대체적으로 내게 헌신적인 편이고 효자표 아들이긴 해도 나는 그럴 때 절대로 아들에게 신세지는 성격은 아니라서, 그리고 친구들은 하나 같이 바쁜 몸들인지라 결국 인터넷에서 찾아내 보았지만, S여사처럼 감명 깊다는 느낌은 못 받았던 것 같다. 난 원래 한국영화를 꽤나 싱거워 해왔고 내가 소금치며 맛보는 스타일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내 가게에서 집까지의 거리는 세 블록이다.
나는 중앙분리대에 조성된 산책로를 즐겨 오가는데, 아들은 남자가 무슨 산책로를, 그런 의도를 표방한 채 인도로 다니기를 당연시해온 편이다.
그런데 퇴근길에 나와 동행을 해야 할 경우엔 제일교회 건너편에 있는 한 블록의 산책로는 부득이 함께 가준다. 나란히는 아니고 꼭 싸운 뒤의 모자간처럼 약간의 거리를 두고 걷는 자세가 역력하다. 그 다음 영락교회 건너편의 산책로는 나만 걷게 하고 아들은 D식당 쪽의 인도를 향해 걷기를 서슴치 않는다.

그 길은 몇 년 전 나와 아들이 노상강도를 만났던 장소라서 나는 일부러 그 길을 회피하는 경향이 강하고, 아들은 그런 식의  경험 따위를 내세워 그 길을 두려워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일부러 더 그길로 간다는 걸 내게 확실하게 짚고 넘어간 적이 있다.
아들이 제일교회 앞의 산책로를 동반해 주는 행동의 진정한 의미는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 어느 날, 엄마를 한때는 에스콧해낼 수 있었다는 의미를 싣게 된 그 어떤 포석이 포함된 행위로 보이고 있다.
나중에 회한으로 남을 일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동작일 수도 있겠고 .

나는 외국에 나와 살지만 한인 타운에서 생활하는 일이 나름대로의 긍지라고 여긴다.
현지인 고객도 있지만 한국인이 대부분인 고객들을 접하면서 날이면 날마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에 몸담고 살고 있음을 감사로움으로 품고 사는 것이다.
중국의 고사에서처럼 문 위에 돌멩이를 매달아놓고 항상 조신하게 살아왔음을 아들은 나를 보며 익히 배워왔을 것이다.
재산 같은 걸 물려 줄 수 있는 존재는 못되지만 내 사는 모습, 내 살아온 모습, 내 살아갈 모습 모두 보이며 어떤 어려움조차 부끄럼없이 털어놓았을 뿐더러  소탈한 모습까지도 저절로  들키기 마련이었다고  자인한다.
아들은 적어도 세상에게 욕심을 부리지는 못했으나 세상을 거짓없이  인정하고 받아들여 온 이 엄마를 제대로는 깨우쳐 왔으리라.
항상 내가 꿈꾸어 온 세상이었다.
꿈이 꿈을 부르는 세상이었다.

아는 사람들 만나는 순간, 격려하는 심정으로 등을 토닥여 주고 싶어지는...
오늘은 그런 봄날 아침이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들도 나처럼 무언가를 키우며 자긍하며 그렇게 숙연히 살아가리라는 사실이다.
마음이 넓어서 그렇다기보다 세상의 매력에 현혹되어…….
어떻게 세상을 원망할 것인가. 어떤 처지에서도 원망이 안 되는데.
불현듯 세상을 몇 백 년 쯤 살아낸 느낌, 오늘 가득어니 밀려오고 채워지고 있다.

어제, 문협에서 야유회를 갔었다.
바다처럼 넓은 강변을 지닌  ‘뿐따라라’였다.
회장이 직접 구어준 아사도도 매우 근사했었고, 특히 회원들이 윷놀이 중간 중간에 웃음과 다툼을 버무려 내지르던 함성..... .
회원들 근처, 매우 가까운 옆켠의 풀밭에 엎뎌 있던 내게, 끊임없이 들려오던 나뭇잎들이 바람과 함께 쏴아 쏴아 공연하던 합창소리도 대단히 환상적이었다.

내게 아픔이었고 내가 고통을 건넸을 확률이 더 많았던 날들, 어느 정도 강물에 띄우고
그리고 다시  생의 한복판으로 돌아왔다.
비록 세상을 찬미할지라도
다시는 세상을 아파하지 않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