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19일 금요일

부인회에 다녀와서


                              맹하린


매월 셋째 월요일의 오후 2시에는 한인타운에 있는 노인회관에서 부인회 월례회가 열린다.
우리 고유의 떡과 커피, 그리고 계절에 따른 과일까지 들면서 1시간 반 정도의 회의가 진행된다.

아버지날과 어머니날이 닥치면 2백여 분의 교민 노인들을 초대해 각종 한국음식을 대접하교 고전무용 합창 등을 준비하는 일은 기본(基本)에 든다.
현지인 어린이 병원과 이 세실리아 수녀가 운영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에 위치한 고아원방문들을 연례행사(年例行事)로 삼고 있다.
트럭에 헌옷과 국수, 밀가루 설탕 등을 바리바리 실어다 준다.

이번 달에는 이정애 고문께서 모국에 다녀오신 소감을 허심탄회하신 모습으로 토로(吐露)하셔서 회원들 모두 울컥한 감동을 껴안으며 열심으로 경청(傾聽)했다고 본다.
80이 넘으신 그분은 본국에서 종합검진을 받으셨는데 머리에 음성종양을 20년 동안 키워 낸 사실을 그제야 아셨다고 한다.
몇 번인가 쓰러지셨던 원인이 귓속의 나팔관 문제였다는 사실도 겹쳐서 알게 됐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두 번도 아니고, 한 번 밖에 못 살다 가는 인생, 꾸준히 사회와 교회에 신앙적인 열정까지 쏟으며 봉사(奉仕)를 잊지 않고 살아 와서 그점이 가장 감사한 일이었다고 하셨다.
그날따라 모국여행, 골프, 장사 등 이유라는 이유 모두 내세우면서 자리를 채우지 못했던 회원들이 좋은 말씀을 함께 못 들었던 일 내내 맘 켕겼다.

얼마 전 지병(持病)으로 세상을 떠난 K여인이 슬프도록 추억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40대 중반인 K여인은 이민 와서 사 입은 거라고는 외출복 두 벌과 핸드백 하나가 전부였다고 한다.
가게에서 파는 옷을 주로 입으며 오로지 재산을 모으기만 하고 떠났다는 얘기다.

교민 여성 골퍼인구는 대략 3백여 명 정도 되리라고들 집계를 한다.
나 역시 이민 초창기엔 골프의 매력에 빠져서, 평일 역시 혼자서도 필드에 나갈 정도였었다.
나는 교민 역사 상 첫 번째로 결성 된 여성골프회 '잔디' 모임의 12인 중의 한사람이기도 했다.
글쟁이 노릇에 온통 넋이 나가, 혹은 너무 시간을 많이 앗긴다는 이유로 오래 전 골프채를 꺾었다.
현재 그 '잔디'모임의 회원만도 이미 백여 명이 넘었다고 한다.
누차 짚어 왔지만, 우리 교민에게 골프라는 운동이 있어 줘 나는 자주 고마워하는 푼수 떼기다. 따로 즐길만한 운동이 마땅치가 않아서 더 그러는 셈이다.

지금을 분깃점으로 해서, 골프를 치면서도 한 달에 한 번 교민이나 현지인등을 위한 부인회의 자원봉사에 솔선수범(率先垂範) 참여하여 봉사하는 여인들의 발길이 점차 늘어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정신수양을 위해 스스로 꺼려하는 일을 일주일에 몇 가지씩 실행해내는 내게 있어 부인회의 자원봉사는 어떤 면으로는 한 달에 한 번씩 치르는 정신수양의 숙제(宿題)를 풀어 내는 일이 될 확률이 크다.

내가 지키고 싶은 글쟁이로서의 자세는 다른 일에는 무관심하고 싶고 칭찬이라거나 비난, 혹은 실패나 성공에 연연하지 말아야겠다는 점에 있다.
부인회원이 되고나서 나는 마치 봉사라는 기본원칙을 매일 가방에 넣고 다니는 것처럼 태도자체가 의연해졌다고 자긍하게 된다.
그것은 내게 인생의 어떤 선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나 나를 맹언니라고 따르는 동생들이 여럿이나 있어 언제라도 든든한 편이다.

우리 교민소유의 한인묘원과 우리 교민소유의 한인골프장까지 이룩해낸 교민들이 바로 우리 아닌가.
몇 년 전부터 땅 정도는 사놓을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둔, 우리 2세들을 위한 청소년 회관도 기필코 우리 부인회원들의 손으로 벽돌을 쌓아나가도록 점차 힘을 모았으면 좋겠다.

재아 한인 여성들이여!
부디 분발하시고 힘에 힘을 더해 부인회원으로서의 봉사도 차후에는 외면하지 맙시다!!!
우리는 기다립니다. 여러분들의 선선한 발걸음과 모성애 가득한 손길을...

2013년 4월 10일 수요일

친애하는 그대 4



     맹하린


은둔하는 고수들과 굳이 논쟁을 겨루지 않아도 상관은 없겠다... 그런 단정으로 내가 페북의 문 앞에 서서 도어노커를 새처럼 쪼았을 때, 그대는 이미 기다렸다는 듯 내게 문 활짝 어니 열어 주었습니다.
그토록 우연처럼 그대를 만나게 되었을 때, 그대는 의외로 다정했고 특히나 신비 가득했었답니다.
멈칫멈칫 마음의 빗장을 밀고 있는 스스로를 나는 비로소 발견하게 되었을 테지요.

화사한 봄날 문득 만나게 되는 꽃샘추위. 그리도 쨍한 느낌과 함께 그대는 너무 맑아서 내가 바라보는 세상까지 실제로 상쾌한 느낌이 들도록 유도하고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자신을 아끼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거라고들 하죠.
아무리 그리들 정의를 내리지만, 그건 우리가 살아가면서 맞닿아야 할 부인할 수 없는 생의 본질이기도 할 것입니다.

지그시 바라보고 있으면 영원(永遠)이 제시되는 느낌 또한 유난히 강한 그대.
나는 어느 덧 그 길을 향해 홀연 발길 내디딥니다.
때로 서로의 소통이 되는 얘기를 나눌 때마다 등에 진 외로움의 켜 하나씩 부리고 있는 스스로를 조금씩 깨닫게도 됩니다.
그건 결국 세상의 행간을 살피고 그대의 행간을 헤아리는 게 아니라, 나를 읽기 위해 펼치는 행간이라는 의미도 될 것입니다.

나는 매사에 새처럼 자유로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아무리 그렇단 들 되도록 운명과도 같은 인연이 되려고도 합니다.
그대의 나를 향한 응시는 기쁨이기도 하고 아픔이기도 했을 테니까요.
점차 커지는 그대에 대한 관심을 잘디잔 부피로 나누려고 나는 때대로 음악 속으로의 침잠(沈潛)을 시도(試圖)하게도 됩니다.

갈수록 그대를 알아간다고 생각할 때마다 왜 우리의 간격은 명백해지기는커녕 점차 애매해지고 있는 것일까요?
하지만, 하지만 말입니다.
나의 그대는 그대가 그대입니다.

그대를 알기 전만 해도 세상이 참 천천히 흐르고 있었는데 지금은 너무 후다닥 달아나고 있어 푸르르 놀랄때 많았습니다.
가치판단의 기준이라는 것은 그리도 유유히 변하는 것이었나 봅니다.

이윽고 나는 출근을 하기 위해 가벼운 코트를 걸치고 있습니다.
땅을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걷는 일 그 자체에서 이루 표현 키 어려운 기쁨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살아 있음의 유열(愉悅)을 강하게 포옹하면서 불현듯 깨닫게 되겠지요.
왜 이렇게 멀리 떨어져 지내게 되었을까, 우리는...

격한 감동보다 잔잔함이 오롯이 안기듯 피어나는 그런 하루를 보내고 맞고 우리는 그렇게 다르면서도 함께 하는 시간 속을 지나고 있습니다.
그대...
오늘도 평화 가득한 날 보내시기를.

2013년 4월 7일 일요일

단감을 금세 따 낸 것처럼




맹하린


가게의 초인종이 뚜뚜따따 울렸다.
중국산 벨소리다.
열 개 정도의 음악이 입력되어 있다.
길이가 15미터인 우리 가게는 맨 안쪽 간이 부엌에서 설거지나 물일을 할 경우, 벨소리가 잘 안 들리는 경향이 많다.
그래서 가장 경쾌하면서도 요란한 음악으로 설정해 두었고, 일단은 작업실과 매장 사이의 커튼을 젖히고 누구인지를 먼저 확인하는 편이다.
마늘이나 빗자루나 하여간에 장사치들이 하루에도 꽤 많이 눌러대는 상황에 자주 접하게 되지만, 입구까지 나갈 필요도 없이 그쯤 서서 오른손을 양 옆으로 흔들기만 해도 그들은 잘 물러가기 때문이다.

오늘.
아주 훤칠한 현지인 청년이 벨을 누른 뒤 현관문에 서 있었다.
양손에 단감을 하나씩 들고 유리문에 댄 채였다.
나는 성큼성큼 다가 가 값을 묻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보게 되었다.
우리 가게 앞, 두 그루의 오디나무 화단에 기대앉은, 30K는 될 것 같은 커다란 감 부대를...
한국식품점에서 1Kg에 10페소(1달러 20센트 상당)를 지불 했었는데, 그는 2Kg에 같은 가격을 제시하고 있었다.
80페소를 냈다. 16Kg을 구입한 것이다.
절반이나 훌쭉 줄어든 감 부대를 가뿐한 모습으로 들고 가는 그의 자태는 어딘지 모르게 경쾌함이 묻어났다.

결혼해서 처음 찾아갔던 시댁에서 보았던 다섯 그루의 단감나무.
그 나무들에서 금세 따 낸 단감처럼 나는 몇 개인가를 연거푸 먹으며 아스라한 사색에 잠기고 있었다.
거지가 되긴 싫고 , 이렇다 할 직장을 구하지도 못했을 그 청년은 우선 감 장사를 작은 규모로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농작물이나 과일 값은 형편없고, 달러는 하늘을 찌를 듯 폭등하는 세상에 나는 살고 있다.

오늘은 유리문을 동전으로 똑똑 두드리는 소리에 커튼을 젖히며 나는 우선멈춤으로 섰다.
감 청년이었다.
어제 남았던 반 부대를 부둥켜안고 다시 찾아온 것이다.
“ 당신 밖에 그 누구도 거들떠를 안 봐요. 못 생긴 감이라고 트집만 잡고, 하는 수없이 다시 왔습니다.”
나는 그에게 안도를 안기려고 먼저 미소부터 띄었다.
“못 생긴 감이면 언제라도 다시 가져와도 돼요. 못 생겼다는 건 비료나 농약으로 안 키웠다는 뜻이니까요. 훨씬 맛있었어요.”
나는 그에게 80페소를 주지 않고, 100페소를 건넸다.
100페소……. 몇 달 전만 해도 25달러였는데 지금은 12달러 정도나 될까 말까다.
나는 잊지 않고 그에게 칭찬 역시 얹었다.
“아무리 못 생겼어도, 이렇게 잘 생긴 감 가격은 첨이었어요. 너무나 고마워요.”

아들이 초등학교 때 장갑을 사준 일이 있다.
아들은 장갑이 생겼다고 한 발을 두 번 씩 뛰면서 장갑 샀다는 노래를 즉흥적으로 만들어 부르며 춤까지 추면서 앞서서 걷던 날이 있었다.
나는 감 장사 청년에게서 아들의 그때 모습이 그립게 오버랩 됨을 동두렷 보았다.
“청년이여! 어려움을 경험하는 게 그다지 나쁜 일만은 아닐 겁니다. 생활이 우리를 속이더라도 우리는 세상을 속이지 않아야 해요. 부디 축복을 빕니다!”

2013년 4월 4일 목요일

어제는...


내가 거주(居住)하는 수도(首都) 부에노스아이레스는 피해가 극히 적었다고 한다.
하지만 인근도시인 라플라타가 엊그제 밤에 내린 폭우.
4월에 내린 백년만의 폭우.
6개월 동안 내릴 비가 한 시간에 다 쏟아졌다는 그 거대하고 광범위 했던 집중호우로
인해 도시전체가 현재까지 물에 잠기는 홍수사태로 아르헨티나의 매스컴이 몹시도
시끌벅적 어수선한 상태다.
어제 하루 종일 라플라타 시(市)를 조명(照明)하는 현지뉴스를 틀어 놓고 나는 틈틈이
고객들의 주문에 대응하거나 페북에도 열심을 다해 드나들기는 했지만, 평소 메시지를
나누던 절친 두 분에겐 토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표현 자체를 나도 모르게 절제하고 자중을
일삼았다고 본다.
홍수(洪水)가 난 라플라타 도시에서만 4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아직도 물에 잠긴 상태인 도시전체의 재산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엄청난 숫자가 되리라고 뉴스마다 전한다.
말 그대로 천재지변(天災地變)이다.
뉴스를 접하는 내내, 나는 때때로 고개를 흔들었고, 일종의 서글픔을 억제하려고 애썼다.
이래저래 기도를 빠뜨릴 수 없던 어제였다.
오늘은 다시 예전의 나로 쉽사리 돌아오겠지만 오늘 역시 기도하는 자세를 잊지 않으려고 생각 중이다.
아침마다 세 잔 정도 마시는 커피를 당분간 한 잔으로 줄이겠다.
기분전환을 위해 가끔씩 사 입던 옷을 1년 동안 사 입지 않을 작정이다.
라플라타 도시...
사람들마다 아이들보다 반려동물들을 소중한 재산처럼 안고 나오며 영화의 한 장면과 같이 침착하던 그 모습들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만 같다.
참으로 모처럼이었다.
나는 아르헨티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나를 발견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살아오며 아르헨티나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 첫째는 두려움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여유로움이었을 것이다.
그 어떤 절망적 상태에 있을지라도 그들에게서의 지금껏 통곡(痛哭)은 있을 수도 보아낼 수도 없었다고 여겨진다.
아르헨티나 국민의 그러한 태도 자체에서는, 주어진 삶에 대한 무한한 설득력이 무럭무럭 피어나고 있었다.
빠른 복귀를 바라게 된다.

2013년 4월 2일 화요일

친애하는 그대 3


비 내리는 새벽입니다.
크고 작은 위악(僞惡)을 모조리 쓰레질 하듯
불평 많은 세상을 달래고 설득하듯
그렇게 내립니다. 비는...

몇 달 쯤 되었을 것 같아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비는 저녁나절에 내리기 시작하거나
밤중에만 쏟아지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마치 대낮에 쏟아지는 행위를 잊은 것처럼
어스름과 칠흑(漆黑)속에서만 할 말이 많은 듯이....

잠결에 폭우소리를 듣는 일은 일종의 은총과 다름 아니게
마음이 함초롬 적셔집니다.
쏟아 내림이 아늑하게 들어찬 어둠 속은 빗줄기들이 벌이는
흥겨운 잔치마당 같습니다.
그럴 때, 뭔지 모를 상념(想念)이 마음 가득 이리저리 물고기처럼
헤엄치고 있음을 감지하게 됩니다.

최근의 나는 어떤 일이든 상쾌한 마음가짐을 생의 첫 번째 기본이
되도록 우선(優先)에 둡니다.
그러다 보니 하루하루 상쾌라는 의미가 입안에서 톡톡 곁가지 치듯
소리를 내는 느낌입니다.
미립자를 입안에 넣으면 토닥거리며 터지고야 마는...
어린이들이 즐겨 사 먹는 과자처럼 말입니다.

주룩주룩으로 채워지는 세상이라는 그릇은 투박하고 거친 면이
많으면서 커다란 광야(廣野)처럼 넉넉합니다.
비와 땅이 조우(遭遇)하는 평화의 리듬.
그것은 분명 그대가 비추어주는 눈 시린 빛으로 인해 가능했을 것만
같아집니다.
그대의 내게 대한 격려가 몹시도 커다랗기에 나는 때로 신(神)의
질서(秩序)가 아닐까 하는 혼돈(混沌)을 맞기도 합니다.
혼자여도 , 혹은 누구와 함께 있을 때조차, 그대는 문득 생각 키워지는
선(善)한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도 그대에게 닿을 수 있는 강을 향해 천천히 노 저어 가려고 해요.
생(生)은 그렇더군요.
기차역 같아요.
오고 가죠.
있으며 떠나요.
오늘도 안녕이라는 천사가 그대와 여러 차례 악수를 나누기를 희망합니다.
그대...
나의 그대는 그대가 그대입니다.

2013년 3월 26일 화요일

새틋하게


고객들의 전화는 작업실에서 편안한 자세로 받는다.
하지만 친구나 문우들의 전화면, 나는 무선전화기를 귀에 대고 매장의 출입문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간다,
나도 모르는 나만의 행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가 되어 대기를 순환하듯 절로 이루어지는 셈이다.
대형 유리문 앞에서 길 건너에 펼쳐진 중앙분리대의 산책로를 주시하며 한참이나 얘기를 나누고 있는 나를 내가 발견하게도 된다.
내 시야 가득 수령이 백 년도 넘었을 네 그루의 참나무가 꽉 차이게 들어온다.
지금은 가을이라 도토리들이 땅 위에 내려와 편하게 누운 자세로 하늘은 물론이고 그들의 엄마인 참나무를 올려다보는 일이 흔하고 잦다.
새벽에 특히 많지만 하루 내내 한국인들이 도토리를 줍느라 내게 여러 폭의 특별한 그림이 되어 준다.
나는 한 번도 도토리를 주워 본 일은 없다.
자연을 자연이게 놔두기를 즐겨서다.
나의 일상 속에는 도토리를 줍거나, 참나무 아래의 벤치에서 일광욕을 하는 페이지가 없다,
사실성을 거부하는 편이면서도 때로 나는 논리적이고 사실적이다.
지인들이 그렇게 획득한 도토리로 만든 묵이나 전을 가져다 안기는 일이 간혹 있다.
사먹는 것보다 월등한 감칠맛을 지녔다고 여겨진다.
이민자인 내게 그 몇 그루의 참나무는 계절과 날씨와 시간을 파노라마처럼 각양각색으로 제시해 왔으며 언제라도 열정적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때로는 나의 그리움조차 나뭇잎들에 얹혀 팔랑였으리.
하루에도 수차례, 참나무와 도토리와 내 동족들을 지켜 볼 수 있어 내 살아감은 더할 나위 없이 고즈넉하다.
방금, 다섯 살쯤 되는 딸아이를 등에 업은 채 걸어오던 한국인 아빠를 발견했다.
길 건너편에 차를 세우고, 도토리 열매들을 요리저리 피하며 우리 가게로 건너오다가, 한국유치원 쪽으로 가고 있었다. 첨 있는 일은 아니나 처음처럼 신선했다.

때때로 광야에 선 것처럼 별빛만으로 더듬더듬 전진을 거듭했던 날들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해가 떠도 해가 져도 참나무를 주시하며 서로의 근황을 챙기는 일은 어떤 면으로는 축복,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내가 마흔 무렵일 때의 절망은 긍정과 맞바꾼 일로 가히 충만한 일이 되었을 것 같다.
바람이 불어도 우박이 내려도 겸애를 껴안으며 살아 낼 수가 있어서 그 점이 특히 은혜롭다.
 

전화벨이 울린다. 친구 C다.
나는 무선전화를 귀에 댄 채 매장의 출입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어떻게 지내?"
"여일하지. 물에 흐르듯……."
하마터면 실토할 뻔 했다.
"새뜻하게 지낸다, 왜?"라고...




친애하는 그대 2


                맹하린


나의 그대는 그대가 그대입니다.

오늘도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새벽은 내게 커다란 축복으로 다가 옵니다.
나만의 시간처럼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기분이 나쁠 필요는 없어서
나는 하루를 최대한의 우호적인 자세로 시작합니다.

오늘 하루도 십계명(十誡命)의 핵심(核心)과 같이
내 이웃을 사랑하며 지내게 될 것입니다.
최근의 나를 중심 잡도록 붙들어 주는 그대...
친밀한 사람들의 아낌과 함께
당신의 사랑은 내 포켓에 한가득 들어차 있습니다.

관심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슬픔의 얼굴을 지닐 때 또한 없잖아 있겠으나
아름다움으로 귀의(歸依)해야 하는
하나의 당위성을 지녔습니다.

어제 오후 2시엔 바쁜 틈을 비집고
가까운 교우의 집에서 모이는 성당의 반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성모마리아상을 보았습니다.
나를 알고 있노라고 그분은 내게
선하신 미소를 짓고 계셨습니다.

그럼 우리 저녁과 아침이 공존(共存)하는 세상을
오늘도 시작해 보아요.
부족한. 나의 이 편지가 그대의 앞날을 한층
빛낼 수 있도록 다짐을 드리는 거라면
그 일 역시 기쁨이겠습니다

2013년 3월 25일 월요일

이런 틈바구니에서의 글쟁이 노릇




                         맹하린


정치?
일간지와 TV방송국 등의 문어발식 대형 체인을 여럿이나 소유한 CLARIN.
아르헨티나 언론계를 거의 완벽하게 장악(掌握)하고 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CLARIN은 몇 년 전, 현(現)대통령 크리스티나의 남편이던 고(故)키르츠네르 대통령 내각과 매우 불편한 관계의 줄다리기를 거듭했다.
질적 양적으로 너무 거대한 성곽이 되려는 끌라린이라는 재벌회사를 음으로 양으로 압박하려는 정부와, 시도 때도 없이 간섭을 일삼는 정부를 자체 언론을 이용하여 여러 차례 파헤친 데서 일의 발단(發端)이 일파만파(一波萬波) 이슈화 된 것.
결국 고(故)키르츠네르 대통령 내각은 끌라린 신문사에 몇 십 명의 국세청 직원들을 풀어 기습작전을 감행했다.
요소요소에 유능한 인재들, 특히 유태인 직원들을 골고루 기용한 끌라린은 곧장 정부를 고소하는 사태로까지 대응다운 대응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난다 긴다 하는 끌라린의 변호인단이 노린 시일 지연작전의 구축 망에 키르츠네르 정부가 자연스레 걸려든 모양새가 되었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일은 미해결 사태로 남아 있다.
그러한 와중에도 아르헨티나 국민 대다수는 달러투기라는 개인주의적 내 주머니 채우기에 너도나도 혈안이 돼 있었다고 보면 지나친 수식어가 되려나.
경제??
유태인은 말할 것도 없고, 몇몇 한인들은 의류도매시장의 메카인 아베쟈네다 지역에 시가 50만 달러에서 1백만 달러를 웃도는 가게를 몇 개 내지 몇 십 개까지 소우했다는 얘기가 심심파적으로 떠돈다.
전세제도가 전무(全無)한 아르헨티나의 경제 구도상, 그들은 3년에 한 번식 사용자가 되돌려 받지 못하는 쟈베(Llave)라는 명칭을 갖춘 권리금을 몇 만 달러에서 몇 십만 달러까지 가게 주인에게 지불해 왔다.
월세는 월세대로 적잖이 내면서 말이다.
사회주의의 표방과 자본주의적 행태가 복잡하게 뒤섞여 창궐하는 매우 머리 아픈 양상(樣相)이다.
문학???
어느 정도 파악은 되어 있지만, 아르헨티나와 한국 문단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현존하는 문인의 숫자도 숫자지만, 관념이나 주관이나 사명감 자체가 판이하고 특이하게 다른 것.
여기는 남미다. 그러니 교민들은 물론이고 나 역시 남미 식으로 살기도 하지만, 한국인임이 확실한 정체성으로 인하여 가장 한국인처럼 살아갈 때가 더 많다고 본다.
나 때때로 제 2의 나라라는 망토를 벗어 던지고, 모국애라는 겉옷으로만 생을 유지해 오기를 즐겨 샐행해 왔으리.
나는 도덕적 사회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일보다는 일탈을 통해서나 가능한 행복을 추구해 온 한낱 글쟁이에 불과하다.
아르헨티나의 중견작가인 마르셀로 비르마헤르가 자전적 단편소설에 총알로 쏘았던 직언(直言)으로 이글을 마칠까 한다.
<솔직히 내가 살아오면서 보아온 돼먹지 못한 시인들, 다시 말해 시장(市長)의 생리(生理)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쓸데없는 말을 쏟아내면서 나 같은 사람은 상업적 작가라고 매도(賣渡)해 버리는 문화계 인사(人士)라는 작자들이 알고 보면 하나같이 정부(政府)의 녹(錄)을 먹는, 즉 노동자와 힘없는 연금 생활자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먹고 사는 인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직(公職)을 꿰차고 앉든가 시에서 주는 상이나 정부에서 주는 지원금 등을 싹쓸이하는 인간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장장 이십 년 동안 스스로를 소비계층이라고 부르면서도 실은 월급을 꼬박꼬박 받아먹으면서 나 같은 사람에게 전화해 원고료 한 푼 안주고 글이나 써오라고 하는 기생충 같은 인간들이었다, -마르셀로 비르마헤르-

2013년 3월 5일 화요일

단순명료한 방향으로





                   맹하린


본국에 가면 바로 밑의 동생인 맹미숙의 집에 주로 본거지를 둔다.
청주에 계신 엄마, 그리고 시집이나 친정의 형제들 만나러 다니다 보면 친구들이나 동창들은 한 번 씩 밖에 못 만나는 데다, 한 달은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뚝딱 지나간다.
가장 난해한 일은, 본국에 다녀오면 회향병이 어느 정도 회석되기는 커녕, 도리어 명백해진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이미 들떠 있는 맘 이리저리 하염없이 헤매기가 부지기수다 .
결국은 글을 쓰거나 읽거나 음악을 당겨야 사뭇 대책이 없어 보이는 소슬한 쓸쓸함에서 가까스로 헤어 날 수가 있게 된다.
몇 년 전에 귀국했을 때는, 고모의 셋째인 송태일이 형제들 모두에게 저녁을 낸다고 해서 서대문에 위치한 어느 일식집에 갔었다.
우리 형제들과 고모네 가족 거의가 모이니까 열 다섯쯤 되었다.
선천적으로 잘 웃는 나는 고모 큰 아들 송태언의 딸만 봐도 웃었고, 셋째인 송태일의 아들만 보아도 속절없는 웃음이 자꾸만 터뜨려졌다.
틈날 때마다 안아 주고 자주 엎어 주던...
누가 안 무겁냐고 물어 오면 아뇨, 내 동생인걸요?  충분히 그러한 대답을 마련 했던...
누군가 판박이처럼 닮았다는 사실은 새삼 생을 지긋이 바라보는 시간으로 숙연하게 유도하는 면모가 매우 강하다.
얼마나 얼나마 제 아빠들의 어린 시절을 답습했던지 나는 웃느라 식사 도중 내내 밥도 잘 못 넘겼을 것이다.
풀코스로 나오는 일식(日食)의 세 번 째 쯤에, 젖은 베 보자기로 덮인 소쿠리가 나왔다.
곧 열려질 휘장처럼 보자기는 어딘지 모르게 이리저리 들썩이고 있었다.
그걸 젖히며 올케언니와 맹미숙은 서로의 감탄을 툭툭 튕기며 주고 받았다.
-어머나! 새우가 어쩜 이리도 싱싱하지?
-그치? 언니. 너무나 상큼하게 생겼다!
유년시절에 일꾼 아저씨가 난산 강에서 뜰채로 건져내던 투명한 빛 새우와 몹시도 흡사한 크기와 모양이어서 나는 순간적으로 놀랐을 것이다.
약간씩 뛰어 오르며 팔딱이는 새우의 머리 부분을 톡톡 따면서 손가락 역시 팔딱이며 연신 입에 넣던 내 혈육들.
왜 안 먹느냐고 의아해 하는 그들에게 나는 잊지않고 익살을 떨었을 것이다.
-아르헨티나 촌뜨기라서... 살아 있는 건 미물이라도  그 생명의 신비함을 소중히 여기는 못난 성질머리라서...

나의 생애(生涯)에게 다가오고 지나가던 온갖 흐름은 나를 여기까지 도달하게 만든 이미 예비된 궤도였다고 보여진다.
어제 저녁 퇴근 후, 소파에 기댄채 수박 쥬스를 마시는 중일 때 국제전화가 왔다.
말레이시아에 여행가서 석 달을 쉬다 왔다는 맹미숙이었다.
엄마 고모 오빠 동생들 자녀들 얘기가 순서도 없이 나눠지고 펼쳐졌다.
나와 맹미숙은 잊지 않았다는 듯 쉴 새 없이 웃어댔다 .
내가 살아오면서 안 보이는 손을 가장 많이 잡았던 손은 내 첫 번 째 친구와 전혀 다름 아닌 맹미숙이었을 것이다.
맹미숙과 나는 어쩌면 울음이 낯설어서라기 보다, 웃음이 낯익어서 그리도 자주 웃어 대는 지도 모른다.
형제들을 자주 만날 수 없어서, 나는 형제들의 존재를 더욱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내는 중이라고 보아야 하려나.
허다한 그리움의 부피를 거듭 추스르기만으로는 허전하여, 나는 그리움을 필적(匹敵)할 만한 대안(代案)을 웃음으로 삼았을 것도 같다.
전화기를 내려놓자, 드디어 손에 쥐가 나기 시작했다.
하여간에 까르륵 대며 연거푸 웃을 수가 있어서 나는 앞으로 한 달 정도는 저절로 기쁘게 지낼 것만 같다.
내게 있어 가족이나 형제들, 그리고  웃음은 일종의 충전작용을 가져다 주는 그 어떤신비로운 힘이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단순명료한 쪽으로 살아감의 방향을 제시(提示)해 보려고 한다.
예술을 추구하는 특이하고 강한 개성의 소유자인 사람들.
그들에 대해서도 보다 더 이해의 폭을 넓히고 싶다.
그게 진정한 예술정신으로 중무장 하는 일이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2013년 2월 20일 수요일

겸애주의




                   맹하린



친구 수산나가 두 달이나 무소식이었다.
우리 가게에서 세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한국인성당에 오게 되면 한 달에 한 두 번은 찾아오던 그녀였다.
엊그제 일요일에 그녀가 나타났다.
때가 때이니만큼 외숙씨 얘기를 주로 나눴다.
얘기 도중, 그녀는 내손을 잡으며 말했다.
"참 건강하시고 항상 밝으셔서 보기 좋아요."
"노동자가 오매불망 건강이라도 챙겨야 나름 걸맞지 않을까요?"
그녀가 돌아가는 시간에 나도 따라 나섰다.
흑임자로 만든 미숫가루를 사러 D떡집에 가야 하는데 함께 가자고 말하면서.

세 블록을 사이좋게 팔짱끼고 걸었다.
두 몫으로 담아 달래서 그녀에게 한 봉지 건넸다.
내 몫까지 본인이 지불하려고 했지만, 우격다짐으로 내가 다 냈다.
바쁠 때 나를 도와 준 고마움을 나는 그런 식으로 갚아 나간다.
다시 팔짱 끼고 걸어 태극당제과 모퉁이에 닿자,  7번과 50번 버스가 동시에 왔고 나란히 스톱하고 있었다.
뒤에 있는 50번 버스에 수산나는  탔다.
우리 가게에서부터 이미 꺼내어 손에 꼭 쥐고 다니던 교통카드를 그녀가 버스기사 옆의 메모난 기계에 대는 모습까지 지켜 본 후, 산책로를 택해 총총 돌아왔다.
나는 순간적으로 혼자서 쿡쿡 웃었을 것이다.
버스 카드를 기계에 대던 수산나가 나보다 훨씬 유식해 보였기 때문이다.
수산나의 집엔 자가용이 세 대 있다. 남편과 아들과 딸이 각각 따로 사용한다.
그런데 수산나는 오로지 버스,  버스만을 이용한다.

사실은 크게 앓고 난 직후(直後)라서 성당의 독서그룹도 구역반장 위임도   모두 반납(返納)하거나 고사하고  왔다던  수산나.
온세 도매상 지역에 큼직한 옷가게도 지녔고, 비록 경제적 기반(基盤)을 확고히 구축(構築)해 놓긴 했어도, 평생을 소모해 왔을 이민자로서의 파근파근한 그녀의 일상(日常)들을 어루만지듯 나의 상념(想念)마다 다듬으며 산책로를 걷는 내게 집중포화(集中砲火)처럼 쏟아져 내리던 여름햇살을 기억(記憶)한다.

덤으로 사는 인생.
크게 근심할 일도 그다지 조심하고 싶은 일도 없이 타박타박 걷기만 하면 도달이 가능할 지점이 되는 과정에 이른 내게 지인들의 떠남이나 와병(臥病)은 일종의 쓸쓸한 아픔이 된다.
내 앞에 펼쳐진 세상은 아직껏 사뭇 미려(美麗)하고 섬세(纖細)한 것을...... .
평소에 겸애(兼愛)를 표방해온바 여실했지만, 새삼 겸애주의(兼愛主義)에 관심이 쏠리고 쏠리는 중이다.
때로 이 나라에서의 외로움엔 나를 감싸며 마음을 휘젓는 기류(氣流) 같은 게 분명 있다.
단정하건대 부에노스아이레스 땅, 여기에서야 나는 비로소 진솔한 나를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생(生)에서 더좀 강렬한 의미를 찾고 여러 숙고(熟考) 끝에 친구에 대한 아낌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됐다면 이제라도 그리 살아야겠다는 각오다.
나의 친구들에 대한 열정(熱情)은 어떤 면으로는 사랑처럼 나를 꼼짝 못하게 구속(拘束)해 왔을 것도  같다.
오늘, 유난히 셍 떽쥐뻬리의 명언이 내게 회오리친다,
"사랑, 나의 안내로 그대가 그대 자신에게 돌아가는 것."

2013년 2월 19일 화요일

행주강

                

            박철                                 



 
   내 눈이 점점 커지는 것은 외로움 탓이다
  시가 길어지는 일처럼 요즘 그리움이란 지금은 부재하는 저 하늘의
  별들과 같다 누군가 나의 별빛을 본다면 희망에 대해 노래해다오
  꿈의 불빛을 따라 김포에서 일산으로 이사 와 나는 자주 강으로 나간다
  안개 짙은 야적, 강의 하류에선 그들 나름대로 시대를 앓고
  둑으로 쌓아 올리는 바람이 외면을 받으며 갈대 곁에 섰다
  언덕을 돌아 결국 다시 만나련만
  강폭이 점점 커지는 것은 할 말이 많아서일 거다
  사랑이든 역사든 배고픔을 달래는 무엇이든 말로서 될 일이 아니건만
  물살이 거듭 손마디를 꺾으며 행주강이 흐른다
  400년 전 임진란의 함성이 되살아나 내 가슴에 화살을 쏘아대는 강
  치마폭에 돌덩이를 주워 담던 아낙도 가끔은 허리를 펴 강 건너 친정아비의
  안부가 그립기도 했을 저녁 바람처럼 날이 진다

  오늘은 먼 사랑
  내 인생은 겨우 강 하나 건너온 것이다
  그것도 개구리헤엄조차 잊고 육중한 시멘트 다리를 빠르게 건너왔다
  사람들은 5분이면 건너는 강을 때론 50년이 걸려서 지나온다
  오늘은 내가 다시 사랑하고 싶은 날
  꿈의 불빛을 따라 김포에서 일산으로 이사 와 나는 자주 강으로 나간다
  물수재비를 뜨며 천둥오리 날고
  나의 파랑波浪을 아는 안개가 더 큰 한숨을 쉬노니
  안개의 흐린 눈빛은 다만 난세 탓이고
  내가 점점 외로워지는 것은 그래도 생의 아름다운 때문이다
  그렇게 믿고, 그렇게 말하고 싶다 




                                                      


                                 



 

2013년 2월 16일 토요일

연인의 날


      

        맹하린



밸런타인데이라기보다 연인의 날인 14일은 물론이고 15일까지 이틀에 걸쳐 퍽으나 바빴다.
매번 느끼는 바로는, 아침나절에 시집(?) 가는 꽃에 따라 그날의 유행과 가격이 평균화 되고는 한다는 점이다.
100페소(15달러 상당)의 라운드형 꽃다발이 빠르게 입소문을 탔고, 전화주문을 하는 고객마다 둥근형으로 된 100페소 가격의 다발에 초콜릿도 주시는 거죠,를 노래 삼고 있었다.
해를 더해 갈수록 현지인 고객이 늘어나는 추세(趨勢)다.

가장 인상 깊었던 고객은 현지인 마르셀로 내외였다.
항상 그래왔듯 마르셀로는  당일에 앞당겨, 10일쯤에 미리 주문하러 왔었다.
딸이 결혼하는데 살롱의 메인 식탁에 놓을 사방 화와 부케를 맡아달라는 설명이었다.
나는 흰색을 바탕으로 한 연분홍을  매치하여  장식해 놓기로 했다.
14일 오전 11시에 찾으러 오기로 했었다.
바쁜 날은 뭐가 겹쳐도 겹치게 된다.
바쁘기 마련인 날이라서 그런 것 같다.

정각 11시에 도착한 마르셀로 내외.
초면이 되는 부인은 자기 이름이 제시카라고 이름부터 밝혔다.
탤런트 장미희와 흡사한 분위기에 말투까지 똑 같았다.
부인이 말을 시키기도 전에 마르셀로는 그녀의 등 뒤에서 내게 살짝 윙크하며 가만히 들어내 달라는 제스처를  보내왔다.
생김새와는 달리, 의외로 시름을 섞으며 제시카는 말을 더듬거리듯 이어 나갔다.
"도대체 꽃을 맞추기는 했다는데, 평소에 당신이 만든 꽃을 선물 받은 경험은 많아도 이번엔 아주 특별한 날인데, 딸애가 결혼하는데, 그런데 마르셀로는 잘 기억이 안 난다고 그러는 거 있죠? 플라스틱으로 된 조화(造花)로 맞춘 것 같다고도 그러고,  빨강과 노랑을 주로 꽂아 달라고 부탁했었다고 까지 말하는가 하면, 그리고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해서... 우린 매사에 튀는 걸 바람직하게 생각하지 않는 생활신조라서   걱정이 참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마르셀로는 재삼  내게 윙크를 보내고 있었다.
(어쩌면 좋은가. 뭔가 나쁜 일을 저지르진  않았는데, 그런데 말썽에 휘말린 듯 한 이 느낌은...)
"당신 남편 마르셀로는 주문을 꽤나 정확하게 했던 걸로 알아요. 오늘은 약간 바쁜 날이라서 주문보다 소홀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해해 주셨으면 해요.  하지만 빨강과 노랑이 아니라, 비올레타(보라)와 살몬(주황)으로 장식한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어요?"
"디오스 미오(세상에나)!  비올레타... 그 슬픈 색으로도  부족하여,   딸이 가장 배척하는 살몬색을요?"
작으면서 또박또박한 음성을 내지르는 차갑고 지성적인 경악이라니!
아무 말 없이 곧장 작업실에서 내간 하양과 분홍이 고루 배합된 부케와 사방 화를 보는 순간 당장에 마음에 들어 하며 마르셀로의 어께에 쓰러지듯 기대며 웃는 그녀, 제시카.

언제나 그렇듯 자가용의 바울(트렁크)에 꽃들을 실어 주자, 제시카는 내게 뜬금없이 물었다.
"저 건너 편 공장의 간판은 누가 세 놓은 거죠? 어떤 용도에 사용할 수 있는 공장인가요?"
나는 마르셀로에게 전수 받은 대응을 재빠르게 전달하고 있었다.
"난 모르죠. 단지 저 건너 편 공장의 건너편에서 가게를 할 뿐, 사실 저 공장이 뗄라(피륙)를 취급한다는 정도만  알고 있어요. 아마 당신 남편이 저보다 훨씬 더 많이 아실듯요.  제 생각으로는  남편께서 적절한 답을 매우 멋지게 꾸며내 집으로 가는 동안 근사하게 설명해 줄 것만  같습니다만..."
그 내외의 희극적인 웃음만 잽싸게 접수하고 나는 총총 가게로 돌아와야 했다.
분석하건대 마르셀로는 평소, 부인의 자로 잰 듯 한 성격에 질리고 말았던 마음을 그런 식으로 통쾌하게 복수(復讐)하는 지도 모른다.  절대로 미워하거나 버릴 수도 없는 부인에 대한 애정(愛情)을 그런 방식으로 스스로에게까지 설득시키는 지도 모르겠고.
나는 마르셀로 내외에게서 영원한 연인(戀人)의 표양을 발견하게 됐었다.
제시카에게서는 순간적이랄 수 있게,  배우자의 그 어떤 면모조차 신뢰하고 아끼며 사랑하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모습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고 여긴다.

아르헨티나 여인들은 현지인이건 교민이건 남자를 제대로 휘두를 줄 아는 것 같으다.
밸런타이데이를 연인의 날로 뒤바꿀 수 있도록 역전의 실력을 발휘한  것도 그렇고, 그리하여  꽃 사러 온 여성은 눈을 씻고 봐도 없었기에 하는 말.

불경기에는 불경기에 어울리는 상품이 있다.
물론 값진 꽃바구니 주문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착한 가격의 상품이 제대로 먹히는 시절(時節)이었다.

2013년 2월 12일 화요일

폭우...





                     맹하린



월요일엔 카니발 축제가 시작되는 날이라서 이 대단한 나라는 또다시 연휴였다.
공휴일에 특히 가게를 여는 나는 퇴근시간을 약간 앞당겨야 했다.
통상적으로 7시 30경에 가게 문을 닫는데, 7시부터 엄청난 폭우(暴雨)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
7시 10분쯤 서둘러 셔터를 내렸다.
집까지의 세 블록을 정강이까지 닿는 물살에 맡기고 되도록 찰박이며 기분 좋게 헤쳐 나갔다.
순복음교회 앞 모퉁이에서는 급류에 휘말려 잠시 왼발이 휘청했지만, 깔깔대며 순식간에 극복해 냈다.
모퉁이에서 내가 건너오기를 기다리던 가족이 껄껄 대는 웃음으로 구조(構造)의 손길을 대신하고 있었다.
깔깔과 껄껄이 각자 긴 손을 뻗쳐 서로를 붙잡아 주던 찰나였다.
신비스럽게도 집에 도착하자마자 비가 뚝, 그쳤다.
나로선 행복하게  받아들인 비의 카니발이었을 것이다.
음력 설날이라 한인묘원에 가는 분들이 있어 약간은 바빴던 날...
이런 우연(偶然)을 보았을까.
설날이어선지 폭우(暴雨)도 축복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나의 생활은 얼마 전부터 전혀 다른 접점(接點)에서 영위(營爲)되는 느낌 유난히 강하다.
나 같은 사람의 상쾌함을 돋우려고 마련된 성싶은 이 도시,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나는 내 생(生)을 툭하면 예술(藝術)에 기대며 거뜬상쾌히 지낼 수 있어 나름 감사로이 여기는 중이다.
예술(藝術)이라는 건 그런 것 같다.
우선은 이끌어 주다가 싹수가 노랗다 싶으면 가차 없이 내치는 묘수(妙手)의 도사다.
최근의 나는 방정식을 풀기 시작했다.
방정식은 언제라도 내게 난해한 장르가 아닐 수 없다.
나와 같은 수다꾼이 단답형의 페이스에 어찌 당할까.
세상이치(世上理致)란 언제나 마찬가지다.
말 많으면 지는 것.
더우면 지치는 사람도 많지만 난 정말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산뜻함의 연속처럼 단순명료하게 잘 흐르는 과정에 이르렀다.
눈앞에 펼쳐졌던 길이 끊어진 듯 한 느낌 가득했는데, 그런데 다른 숲길에 이른 이 기분이란 대체 무슨 의미인 것일까.
오르페우스와 같이 뒤돌아보는 일은 없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삶도 글도 운명처럼 극복할 수도 있겠으나, 나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뭔가를 위해, 누군가 때문이 아니라,  하고 싶고, 해야 할 일이고,  영감(靈感)이 다가와 그리 되는 것.
폭우가 내려서, 자가용을 안 키워서, 택시나 레미스를 타기는 정녕 싫어서가 아니라 폭우(暴雨)가 반가워, 헤쳐 나가는 순간이 극적(劇的)이어서 폭우(暴雨)를 반갑게 맞아낸 날이었다.
우산으로는 미약했던지 옷이고 몸이고 함초롬히 젖었지만 폭우(暴雨)로 인해 즐거웠다.
그것은 일종의 고통이기도 했던 날들을 치유(治癒)하는 하나의 방편이기도 했을 것이다.
더욱 글에 침잠한다기 보다 한층 글에게 찰박이겠다.
나는 폭우(暴雨)에게서 거대(巨大)한 고독(孤獨)을 보았다.

2013년 2월 10일 일요일

외숙씨



         맹하린


그녀는 외가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외숙 씨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내가 외숙 씨를 알게 된 건 재아부인회에서였다.
그 당시 회장으로 선출된 이웃의 N여인에게서,  회원 가입은 물론이고 부회장이라는 임원까지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었다.
외숙 씨는 그때 회계를 담당하게 됐었다.
나는 모임도 줄일만큼 줄였고 임원을 맡지 않는 주의에 철저했었지만, N여인과의 끈끈한 정 때문에 그 일을 순수하게 받아 들였었다.
나보다 한참이나 어린 외숙 씨와 나는 매사에 의기투합(意氣投合)하며  잘도 어울렸다.
절약이 생활화된 면도 그렇고,  외출복만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게 산뜻함을 강조하며 입는다는 점이 특히  그랬다.
키는 같지만(165cm), 외숙 씨는 47kg이고, 나는 56kg였다.
신비로운 건 56kg이던 외숙 씨는 모델과 같은 몸매로 변화 되었고, 47kg이던 나는 몇 십 년 동안 9kg의 체중이 불어난 것이다.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외숙 씨는 봉사마다  열심이었고,  나는 중노동자니 서로 그 정도는 유지해야 하는 것.
너무도 나약해 보여 봄의 날이나 어머니날 대목 때는 일손이 딸리면서도 차마 연락도 못했었다.
하지만 외숙 씨와  친구 수산나는 앞치마를 싸들고 짠! 하게 나타나고는 했다.
그렇게 그녀들은 마른일 진 일 가리지 않고 틈만 나면 나를 거들고 도왔다.

금요일 오후.
N여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님, 외숙 씨 어떻게 해요?"
"외숙 씨가 왜요?
"상조회 게시판에 올라 왔다는데... 못 봤어요?  아직 확실하진 않은 것 같아요.  형님이 글을 올린 이은산씨에게 연락 좀 해봐요. "
"요즘 게시판을 통 못 봐요. 휴가철이라서 철저히 놀고먹느라 내 나름대로  바쁘거든요."
이은산 전 한인타운회장은 전화건 핸드폰이건 모두  불통이었다.
결국은 N여인이 다시 소식을 알려 왔다.

내가 그리도 아끼고 사랑하던 외숙 씨.
교회 갔다 오는 길에, 수입상회에 그릇이나 이불 사러 온 길에, 크루즈 여행을 엄마하고 열흘 동안 다녀왔다면서 기념용 티셔츠를 두 장 선물로 건네 주며,  함께 있는 내내, 언니라는 노래를 언니 언니 부르고 또 부른 후에나 돌아가던 외숙 씨.

외숙 씨는 그리도 허무하게 떠났다.
교회 수양 관에서 사용할 야채와 과일 등을 구입하러 손수 운전하고 청과시장에 갔다가, 도둑과 핸드백 때문에 실랑이 하는 과정에서 교통사고가 발생했다고 한다.
세상에나!
어떤 나라는 지진이나 전쟁이나 쓰나미로 한꺼번에 많은 사상자를 내는가 하면,  이 잘난 나라는 일부러 도둑을 키우고 먹여 한 알의 총알만을 장전한 러시안 룰렛처럼 국민이건 이민자건 전혀 상관하지 않고 순서 없이  세상을 뜨게 하고, 겨냥까지 하고 있구나.

사실, 토요일인 어제 오후는  S식당에서 외숙 씨  엄마의 팔순잔치를 지내기로 예약된 날이었다.
항상 내 일을 자주 도왔던 터라,  사방 화와 꽃다발 열 개를 부조로 삼아 달라는 언질을 나는 이미 건넨 계제(階梯)였고.
언제 저녁이나 같이 먹자며, 꼭 한 번 들르라고 하자,  엄마의 팔순잔치나 치른 후 보자던 외숙 씨. 내가 아끼고 사랑했던 외숙 씨.
생일 꽃바구니도 가장 커다랗게 해줄 것을.
밥도 자주 함께 먹을 걸.
자주 포옹해 줬어야 했던 것을,
외숙 씨가 떠나고 나서야 더 좀 잘해 줄 걸 하는 후회막심을 새삼 뒤늦게 꺼내고 또 꺼낸다.
오늘 하루 내내 숲속에서 외숙 씨를 찾아야 하는 역할을 떠맡은 술래처럼,  나는 하루 종일 복잡하게 헤매고 헤맨 심정이다.
그녀도 나도 장애물 경기를 거의 마치고 드디어 평탄한 코스에 도착한 것 같다고   함께 기쁨의 말들을 나누며 자연스레  손까지 잡았었는데…….

피가 흐르지 않아 자나 깨나 돈 버는 일로 수혈(輸血)을 일삼는 이민사회의 기류(氣流)에 편승하여 외숙 씨는 참 알뜰살뜰 냉철할 만큼 치밀한 부(富)를 이룩했다.
항상 나에 대한 배려와 정이 넘치고 넘쳤고.
장의사를 벌써 두 번째 다녀왔다.
월요일 아침나절의  발인예배는 물론이고, 장지까지 다녀올 작정이지만 생각대로 될 지 모르겠다. 예약이 느닷없이 닥치면 가고 싶어도 못 가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만들어 준 하트형 꽃다발을 가슴에 안고 무심하고 무구한 표정으로  눈 감은 채  누워 있던 외숙 씨.
그동안 다복하게 잘 살고 간 게 훤히 보였다. 남편, 그리고 세 아들, 엄마, 남동생과 여동생들, 제부들…….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이 아웃 포커스로 비친다.
나는 외숙 씨를 잃었다.
나의 슬픔은 이미 너무 절제력이 강하다.
그렇지만 동쪽을 봐도 서쪽을 봐도 외숙 씨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잘 가요, 외숙 씨. 차우차우!!!
진정 사랑했어요.…….


2013년 2월 7일 목요일

우리는 한국인




      맹하린


 며칠 전의 오후 4시 경.
금요일이었다.
바다가게에 갔다.
그냥 저냥 옷들을 들추거나 다시 제 자리에 걸고 그랬다.
뚜렷하게 건질 생각 같은 건 없었기 때문에 산책이나 하려고 산뜻하게  다시 그곳을 나왔다.
우리 가게를 하늘 한 번 쳐다보고 물 한 모금 입에 넣듯 물끄러미 본 후, 스쳐 가는데 편의점 앞에 경찰차가 경보 등을 켠 채 반짝반짝 깜박이고 있었고, 앰뷸런스도 깜박이로 맞장구 치고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경찰이나 경찰차가 보이면 가까이 가지 않는 성격인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내 발이 저절로 그쪽으로 다가 가고 있었다,
바다가게로  갈 때,  이미 경찰차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기억이 찰나와 같이 떠올랐다.
편의점으로 다가가는 나를 경찰들이 교양 있게 바라보았다.
나는 그들에게 손을 약간 흔들며 씩씩하게 인사를 건넸다.
"부에나스 따르데스(좋은 오후입니다)."
편의점에는 육중한 체격으로 입구를 가로 막은 것처럼 경찰 하나가 서 있었다,
나는 사람 문인지 사립문인지의 그 경찰에게 부탁처럼 물었다.
"뿌에도 빠사르 아덴뜨로(안으로 들어갈 수 있나요)?"
안쪽에서는 근심스런 표정을 공동으로 띤 수입상여인과 냉동김밥여인이 보였다.
냉동 김밥.
외식을 잘 안하는 내가 어느 바쁜 날.
근처에서 분식점을 운영하는 식당에 김밥 2인분을 시켰었다.
냉동됐다 풀린 기미가 여실한, 몹시도 차갑고 딱딱하기까지 한 김밥이 배달돼서 나와 가족이 붙여준 별명이었다. 입맛 버렸다고 가족은 그날의  점심을 과자로만  때웠다.
나는 그럴 때, 냉동 김밥에 대해서 나중에라도 따지는 성격은 아니다.
길에서 만나면 나를 선생님이라고 따르는 여인이라서가 아니라, 내 성격이 워낙 그 모양으로 생겨 먹었다.
그러려니 한다.
나 아니래도 세상을 바로 잡을 사람은 많기 때문이다.

편의점 강 여인은 머리쪽에서 피를 흘리며 냉장고 옆에  눕혀져 있었다,
의사로 보이는 푸른 제복의 현지인 여인이 강 여인을 지혈 시킨 후 일어섰다.
누구의 연락을 받았는지, 편의점 강 여인의 딸과 사위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의사가 차트를 펴더니 강 여인의 이름을 물었다,
딸과 사위는 충격 때문인지 꽤나 더듬거렸다.
벌써부터 이름을 익혔던 내가 대답하기 시작했다.
또박또박 읊었다고 본다.
"아뻬시도(성씨), 강! 까 아 애네 헤. 놈부레(이름), 영자! 이그리에가 오 우 애네 헤. 세빠라도(칸을 떼고), 자! 호따 아."
여의사는 다 적었다는 듯 펜을 멜로디라도 파생시킬 것처럼 힘껏 떼며, 나를 향해 상큼하고 탄성과 같은 음성으로 초등학생에게  좋은 점수를  베풀듯  말했다.
"무이 비엔(참 잘했어요)."
(원래 위급상황일 때 난 그렇거든요? 뭘...)
골판지로 만들어 자유자재로 팔다리를 접었다 펼 줄 아는 장난감 병정처럼 작동하는 만능휠체어에 누운 채 강 여인은 아무런 기척도 없이 앰뷸런스의 웨앵웨앵 소리에 실려 갔다.
지금껏 그 처음 본 휠체어침대의 최첨단 기능성에 놀라 있다. 구태여 사람의 손이 접고 펼 필요도 없이 어디에 닿기만 하면 펴지고 접어지고  세워지던...

엊그제부터 강 여인은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편의점 문에 쇠줄을 건채 열쇠까지 잠그고  쉬엄쉬엄 일하고 있다.
낯을 알고 있는 노숙자였다고 한다.
손바닥만 한 돌멩이를 허리춤에 감추고 들어왔고,  협박하고 실갱이 하는 과정에서 뒤통수를 여러 차례 가격(加擊)당했다고 한다,
돈 통과 포켓에 넣었던 돈들을 모두 털렸다는 얘기다.
그런데 뒤통수를 맞았다는 강 여인은 아이러니하게도 앞 통수가 튀어나오고 눈두덩은 빠샤쇼(어릿광대)와 흡사한 붉고 푸른색으로 굵고 둥글게 선이 그어져 있다.
나는 철학처럼 깨닫는다.
(그러니 그 누구에게라도 말 한마디조차 장난스레 말아야 해. 아무리 옆통수에 대고 웃어도 상대방은 앞 통수가 붓고 울긋불긋 멍들지 않던가.)

지금껏 문을 훤하게 열고 지내다가 문을 꼭꼭 닫은 채 일하기 시작한 강 여인.
우리는 한국인이다.
언제 어디서나 외국에 살지라도 어느 날 어느 시간에도 한국인이다.
강 여인은 요즘 지인들이 날라다 주는 김밥과 야채쥬스와 반찬과 찌개가 넘치고 넘쳐,  때 아닌 비명이다.
선글라스를 안 끼고 자랑스레 말할 때, 강 여인의 표정은 가히 희극적이랄 수가 있겠다.
하지만 몇 대 얻어맞은 사람 확실하게 맞다.
원래 잘 웃지를 않았었지만 너무나 안 웃고  있다.
한국학교 학생들로 북적대던 편의점이지만 여름방학으로 학생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편의점 한편에서 화투도 치고 카톡도 하고 양푼비빔밥도 나눠 먹던 우리의 한국 여인들은 휴가에서 돌아와 뭔가를 가져다주기에  바쁘다.
다시 문 활짝 열고 장사하는 날이 오도록 바라게 된다.
화투장으로 일진을 알아보는 패도 떼볼 것이며, 신 김치 넣은 비빔국수도 나눠 먹고 시끌벅적 카톡도 해낼 수 있는 날들이...... .
나는 오며가며 내 동족인 그들의 유한(有閑)을 늘 안도(安堵)하겠고.

2013년 2월 6일 수요일

경고(警告)





                    맹하린


하루 온종일 창을 열어 놓지는 않아도 즐겨 찾기를 클릭하면 방문이 가능한 사이트.
내가 하루에 열 번도 더 들락거리는  재아 상연회 자유게시판.
그곳의 관리자가 이틀에 걸쳐 내게 간헐적인 제한조치 경고를 띄우고 있다.
서반아어로 표시한 Limite(제한) 어쩌고의 경고다.
어제 정오쯤 오른 부고는 어땠는가.
46세의 젊은 한국여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알림이었다. 아마 지병(持病)탓이었나 보았다.
나는 일단 내 아이디 중의 하나와 비밀번호를 입력했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라는 댓글을 슬픔까지 얹은 후, 올리는 중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경고가 떴기 때문에 금세 댓글을 접어야 했다.
"다른 사람과 똑 같은 댓글은 사용할 수 없습니다."
무슨 얘기인가. 내 댓글 바로 위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었지만 그 위와 또 그 위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가 위아래로 씌어져 있었는데 말이다.
몇 년에 걸쳐 몇몇의 악플러에게 여러 번 시달림을 받아온 지라 최근 들어 열흘에 한 번 정도만 댓글을 써냈을 것이다. 쓰고 싶어서 썼지만 쓰기 싫기도 했었다.
하지만 오후 내내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댓글은 사다리의 칸들처럼 여럿이나 올려져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라도 부고가 올려 져 있는 경우  조의를 표하는 댓글을 거의 올렸었지만, 일단 포기하게 됐다.
세상 그 누구라도 권좌의 위치에 오르면 절대 권력은 점차 약시(弱視)가 된다는 말은 정녕 진리라는 입증(立證)이 아닐 수 없었다.
경고라는 것은 지켜보는 나를 매번 밀치는 느낌으로만 특히 밀쳤다.
어찌 됐던 경고는 과연 경고다웠다.
얼마 전 페북의 유명인사에게서 개인적인 강퇴를 맞은 것과 겹치게 된 일은 강퇴의 상호우연으로 보이지만 뭐 어쩌겠는가.
댓글이 겹치면 안 된다는데,  강퇴가 겹치면 안 된다는 법이 따로 마련되지는 못했을 터.
누군가는 이랬을 것이다.
"권리의 위임이란 권리행사의 유보와 하나도 다를 게 없다."
나는 미사참례를 잘 못 지키고 있지만 마음만은 언제나 카토릭정신이다.
이런 일 가지고 내 손으로 죽지는 못하는 영혼의 소유자인 것.

상연회 자유게시판의 위대하신 관리자분!
그동안 심심찮게 드나들 수 있어서 꽤나 고마웠다고 인정을 하게 됩니다.
자유게시판과 절친들이 내 졸작(拙作)들을 엮던 도중의 산소 노릇을 톡톡히 해줬을 테고요.
이점만은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희망 하나를 잃으면 또 다른 희망이 다가오는 법입니다.
새로운 희망이란 그래요. 차라리 홀가분하고 편하고 자유롭다는 입장을 갖추게 하죠.
부탁하건대 다시는 실명이라거나 직업과 나이 등등을 공개하는 일 더 이상 없기를 간구하는 바입니다.
멀쩡한 사람 정신과 치료 꼭 받으라는 지적질도 들을 만큼 들었으니 그만 삼가시구요.
그럴 때마다 같은 대꾸 안하려고 얼마나 참고 참아야 했던지요.

나이 들추는 거 지긋지긋해서 페북에 갔더니, 그곳에선 나이를 제대로 먹는 일이 화두라고 하네요.
페북도 그렇군요.
예술 하는 사람들이 예술 하는 사람을 나이로 저울질 하는 일.
그거 올바른 화두 맞습니까?
제대로……. 그 말의 진정한  뜻은 별다른  의미가 따로 감춰져 있다는 얘기 아닐까요?
귀 게시판에서, 혹은 아르헨20년님의 블로그에서 배워둔 가락으로 표현하며 이 글을 마칠까 합니다.
"나 잠수합니다.  찾지 마세요."

2013년 2월 5일 화요일

나의 복음(福音)


          맹하린


 감자칩 민주주의(Couch Poteto=소파에 앉아 감자 칩을 먹으며 정치에 참여할 때가 많은 주의)도 못되고, 인터넷 민주주의(컴퓨터를 통해 정치참여가 가능한 주의)는 더더욱 아닌, 건강 체크 족 정도 되는,  나 그런 주의(主義)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이라고 생각하면서 날이 갈수록 퇴보(退步)에서 한층 멀어지려는 계층이며 인스턴트 음식보다 직접 만든 웰빙 음식을 선호하는데, 한 번도 건강진단을 받아 본 적은 없고 아직은 어디가 고장 난 일도 없다.
하고많은 날 놀고먹는 것 같아도 하는 일 넘치도록 과중(過重)할 경우 부지기수.
그런 연유로 누군가의 집에 초대 받거나 야외에 소풍 나가면 손끝 하나 꼼짝 하기 싫다는 주의(主義) 역시 한 몫 한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도우미가 있으면서도 일손이 부족한 모습 자꾸만 눈길 성가시게 할 경우, 나도 모르는 사이 팔 걷어 부치고 음식접시를 나르거나 과일을 깎기도 한다.
어려서부터 잔소리를 안 듣고 컸고, 공부든 뭐든 내가 다 알아서 해왔다고 표현해도 큰 무리수는 아닐 테지만, 그 무엇보다 자긍을 삼는 건 긍정의 생존을 부침(浮沈)에 얹고 시적시적 잘도 지나왔다는 사실.
아직은 내가 나에게 물주며 가르치는 중.
나 언제라도 인생을 납득하려고 스스로에겐  납득을 베풀지 못할 때 비일비재(非一非再)였으리.
그게 결국은  나를 위한 납득(納得)이며 설득(說得)이지 않았으려나.
그리하여 한 여름에도 한기(寒氣) 감지하며 오롯이 움츠린 어깨를 한 팔, 그리고 또 다른 팔로 안는다. 부여안는다.
 바라보는 순간,  파문 되어 팔랑이는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어슷비슷한 사계절은 오래 전
이미 복음, 내 유예의 복음이었어라.
지친 팔 늘어뜨리며  관목  비를 받아들이듯
나 홀연 기지개를 켠다.
한동안 침묵이었고 표류라고도 여겨왔던 내 시심의 뜨락에서
시는 내게 고백과 감성과 메타포의 씨앗을 빗방울 되어  흩뿌려 주고 있다.


무심(無心)한 이의 흔적처럼 걸어가는
그대의 파란(波瀾)한 뒷모습
어찌하여 내게 열 가지도 넘는 깃발이 되어주네
세상이 새삼 혼자 같지는 않아져
사람을 강으로 바라보는 과정은
시가 강(江)되어 흐르는 목 메이는 서정(抒情)
거칠거나 섬세할 수도 있는 격정의 물결이기도 해
더 이상 시를 마셔버리지도 삼키지도 않을 거야
시에게 들키고 기척(棄擲)하며
시에게만  흔쾌히 손 내밀고 싶어
가는 것 같지만 다가 오네
떠나게 하면서도
매번 붙들어 앉히고 있네
내 몸에 복음(福音)이 잠복(潛伏)해 있어
복음(福音)은 그래
그게 복음(福音)이야

 -초여름-
당분간 음악을 폄하지 않을 생각이다.
어느 날 문득 펌하고 싶을 때에만 그리 할 것이다.

2013년 1월 31일 목요일

영원한 서민...맞다




                  맹하린


아르헨티나는 12월부터 들썩이기 시작하여 3월 초까지 여름휴가철이다.
보통 보름 정도의 여행들을 떠난다.
본국의 설날이나 추석과 같은 민족 대이동을 연상하게 될 정도의, 같은 수준이라고 하기에는 훨씬 길면서도 도시 전체가 텅 빈 느낌 매우 강하다.
대부분의 현지인들은 여름휴가를 알차게 보내기 위해, 일 년 내내 적금을 붓기도 한다.
기다렸다는 듯,  해마다 이맘 때쯤 되면 달러가격은 지나칠 정도로 급상승의 곡선을 긋는다.
수요와 공급이 적정선을 유지하지 못하는 관계로 과도한 달러병목현상까지 유도한다.
루머에 의하면 몇몇 정치가들이 달러시장을 쥐락펴락 한다는 얘기가 끊임없이 피어나기도 하고 지기도 한다.
불경기, 달러시세 급등(急騰), 수입규제라는 삼박자의 경제적 변동에도 불구하고 해외로 관광을 떠난 피서인구는 그 어느 해보다 신기록 갱신의 수치를 달성했을 정도로 올해 역시 시작부터 여행이고 즐김이고 휴식이다.
이웃나라 칠레에 몰린 관광객의 40퍼센트가 아르헨티노들이라고 한다.
우루과이나 브라질의 해변 가에 있는 개인별장이나 임대별장을 선호하던 지난해까지의 유행이 향방(向方) )을 뒤바꾼 양상으로 변했다고도 전한다.
결정적인 원인은 적정선 이하의 가격다운이 있었다는 분석이다.

대통령 크리스티나는 관저의 화장실 수리비용에 3백만 달러인지 3백만 페소(1백 50만 달러 상당)인지를 들였다는 소식이 얼마 전 현지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하도 인플레이션이 가파른 곡선을 긋고 서민들의 장바구니가 날이 갈수록 부피가 줄어드는 사태가 발생(發生)하자, 꼬보스 전(前)부통령은 화폐개혁이 절실하다는 예견을 강하고 절실한 태도로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현 부통령의 성씨는 부두다. 한글로 글을 끄적이는 내겐 웃음만 나오는 존함이다. 하물며 부두 부통령의 이름은 아마도다. 나는 가끔 아마도 노래를 잘 흥얼거린다. 아마도 별 일은 없겠지. 아마도 화페개혁은 없겠지. 아마도 머잖아 다시 좋아지겠지.)
각설하고,  화폐개혁설은 2012년 내내 몇몇 정치가들이나 경제인들에게서 자주 회자되던 쟁점(爭點)이었다.
현실적으로 정권(政權)의 실세(實勢)도 아닌 정객(政客)의 정치이론인지라, 공신력이라거나 공권력이 제 빛을 잃은 한낱 주장(主張)에 불과하다고 가볍게 치부할 수도 있다.
하여간에 정치가들이란 입에 무쇠조각을 단 것처럼, 평소에는 아무 말이 없다가도 맘만 먹으면 너도 나도 쨍그랑거리면서 요란을 떤다.

작금(昨今)의 아르헨티나 Pampa(대평원)나 Campo(농경지대)들은 소를 사육하는 일보다 쌀이나 콩, 그리고 옥수수와 해바라기들을 재배하는 일이 보다 원활한 수출신장을 보장하는 공헌이라고들 확신을 굳혔는지, 알게 모르게 점차  변화하는 추세다.
아마 몇 년 전부터 그러한 변혁을 실현해 왔던 듯하다.
고기값이 올라서 어쩐지 고기맛이 고급스러워졌다고 감탄했더니,  아마 소보다 작물이 효자노릇을 톡톡히 하는 실정(實定)이라서 더 그리 된 모양이다.
정부는 앞으로의 주요 경제성장을 콩 수출에 쏟고 기대하는 시대적 추이에 너무나 민감해 있다.

달러파동도 그렇다지만 화폐개혁.
한두 번 겪은 일은 아니다.
일어날 수도 있겠으나 안 일어 날 확률도 많다.
누가 뭐라 해도 그것은 최선(最先)이라는 이름의 최악(最惡)의 카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제아침,  암달러시장인 후로리다 거리는 어느 큰 손에 의해 큰 폭으로 좌지우지 됐었다고 메스콤은 전한다.
한 사람이 4백만 달러를 구입해 가는 이변(異變)을 보인 것.
당연지사  암달러상승현상은 큰 파장으로 전환된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중앙은행은 발 빠른  개입을 서두르며,  적정량의 달러를 암달러 시장에 풀어 왔고, 위험한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는 태세에 전폭적으로 임해 왔으나,  어제는 정부시세만  조정하는 선에서 그쳤다는 속보(速報)다.
별일이 아닌 것 같은 별일이다.
달러는 잊게 만들고 페소만 생각나게 해주겠다던 정책이 어찌, 뭐, 왜 이런가.
내 철학은 아르헨티나에서 느긋하게 살아남기 위해서는 달러가 널 뛸 때일수록 달러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주의다.

아르헨티나에서 살아가는 일.
그건 절대로 심심하다는 수준과는 무관한 일이고 어떤 면으로는 흥미진진이다.
그러나 심심하지 않다거나 흥미롭다는 내 표현은 표면적으로 이해한 것에 불과할 뿐, 결국 아르헨티나의 속성(屬性)까지 이해했다는 말은 아니다.

일찍이 괴테가 읊었을 것이다.
'인간들이란 대개 어슷비슷한 거라네. 사람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살아가기 위해 다 써 버리고, 자유로운 시간이 그저 조금이라도 남아 있게 되면 오히려 마음의 안정을 잃는 데다,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그 시간을 없애 버리려고 기를 쓰는 성향이 뚜렷하지.'

지나치게 왁자지껄한 분위기일 때면  나 도리어 여행을 삼간다.
더 이상 잃을 게 없어서 흐뭇한 아침이다.
나 같은 사람의 여유만만을 보호하려고  먹고 살 걱정은 마련된 성싶은, 어떤 면으론 완덕을 요구하는 땅...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나대로의 생(生)은 고스란히 제대로 잘 지나가고 있다.
하루하루를 고분고분하게.
나 영원한 서민... 맞다.


-초여름-
오늘은 국경일이다.
어쩌구저쩌구를 표방하는 100주년 기념일이라서 백년 마다 쉬도록 급조한 날이라고 한다.
왜 높은 이들은 백년에 한 번 있는 기념일까지 맘대로 금긋고 난리인가.
나처럼 나이 잊고 사는 사람도 고작 한 번 밖에 못 맞는 매우 소중한 기념일이긴 하다.
일 년에 공휴일이 19번이나 있는 나라.
토요일도 공휴일인 나라.
주중에 국경일이 있을 경우, 금요일이나 월요일로 당기거나 밀고 합쳐서 3일간의 주말연휴를 실컷 즐기게 만드는 나라.
이민자들이나  토요일을  반공일로 거울 삼는  나라.
나와 같은  뭐시깽이한테나 토요일이 가장 바쁜 나라.

저녁 6시 반경에 S여사 댁에서 아사도(숯불갈비)를 먹기로 했다.
하하하, 나 요즘 이러고 산다.
어쩌면 가장 인간답게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얼 먹을까.
무얼 입을까.
어떤 친구를 만날까.
.............................................

꼬보스 전 부통령을 기도라고 적었다가 나는 가족에게 엄청 깨졌다.
다른 질타는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단지 이 말만 떠오른다.
"무식하고 싶어서 아주 작정을 하셨군."
글을 쓰기 전, 실수하지 않으려고 가족에게 한 번 꼬보스 전 부통령의 정확한 이름을 묻고도 이런 일이 생겼으니 쥐 죽은 듯 가만히 당하고만 있어야 했다.
아마 내게 치매라도 온 게 아닌가 걱정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야단을 쳤지 않았나 싶다.
현지인 게시판과 현지인 페북에 매우 그럴 듯한 아이디를 사용하며, 아주 철학적이고 바른 댓글만을 가끔씩 다는 가족이지만, 내 글은 물론이고  교민 게시판에도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문우 S여사가 이곳 한국일보에 나온 윗글을 보고 기도가 아니라 꼬보스라고 오늘 전화로 알려 왔기 때문에 들통이 난 일이었다.
나도 한 번 S여사의 실수들을 바리바리 들썩여 봐?

아무리 내가 완벽주의자이긴 해도 가끔은 실수도  한다.
실수도 하기 때문에 완벽을 추구하는 것을...
실수해선 안될 날은, 실수해선 안될  일을  꼭  실수하게 된다.




2013년 1월 29일 화요일

입구는 하나




     맹하린


지난 27일, 브라질 남부 리우그란데 도 술의 주도(州都) 산타마리아의  나이트클럽 '키스'에서  240여명이 사망하고 200명 이상이 중경상을 입는 화제가 발생했다.
브라질 최악의 참사로 기록될 이 사고는 새벽 2시경, 출연진이던 밴드가 불꽃 쇼를 하느라 폭죽을 터뜨리다 무대 위에서 발생된 화재였다.
대다수 클럽에 있던 사람들은 빠른 탈출을 시도 했으나 출구(出口)가 1개였고 닫혀 있었기 때문에 뒤엉키고 서로 짓밟히면서 피해가 확대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나이트클럽 경비원들은 사고를 즉각 알아내지 못 했을 뿐 아니라, 술 값 등의 돈을 내지 않고 나가는 사람이 없도록 탈출구의 문을 철저히 닫아 놨던 데서 인명피해가 컸다고 분석되고 있다.
경비원들은 클럽 안에서 대형사고가 진행 중인 것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팔을 벌려 퇴장을 막기까지 해서 피해는 가속되었다고도 한다,
비록 하나이던 닫힌 문조차 막상 열리지 않아 인부들이 도끼로 벽을 부수고 늑장대피를 도우려하는 동영상.
칠레에서 개최되었던 메르꼬수르와 유럽연합의 정상회의에 참석했던 지우마 조데프 브라질 대통령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조속히 브라질로 돌아가 4명의 장관을 대동 한 채 직접 사고현장에 도착했다고 한다,
현대의 비극이 따로 없다.
비현실을 외면하는 현실.
의도적이 아닌 것과 같은 우연의 천재지변과 다름 아닌 혼란.
하나면서 두 얼굴인 환락과 소멸.
'춥고 배고픔도 근심이지만, 덥고 배루름이 더 큰 근심이다'는 옛말이 매캐한 연기되어 숨막히는 현상을 고통으로 안기게 했다. 




2013년 1월 26일 토요일

'돌아온 장고(Django)'





      맹하린


검정가죽 소파에 기대 앉아,  나는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 속으로 초저녁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밤으로 도착하기도 전에 도중하차(途中下車)를 했다.
어제 퇴근 후였다.
아예 그만둘 각오를 굳힌 건 아니었고,  다음에 다시 틈을 내어 떠나 볼 의도로 그랬을 것이다.
가게에서 여러 번이나 관람을 시도(試圖)했으나 번번이 포기하고는 했다.
이상하게도 진도(進度)가 지지부진한 여행이었다.
슬픔이라거나 고통까지도 리듬으로만 창출(創出)된 영화였으므로 어딘지 모르게 진지(眞摯)해지지가 않았고 몰입조차 어려워서 더 그랬다고 본다.
그 영화를 보는 장면마다  나의 머리엔 음악적인 물결만 출렁였다.
고통이건 기쁨이건 따지지 않고 뮤지컬배우처럼 리드미컬하게 숨 쉬어 왔던 나의 일상(日常)들을 홀연 되돌아보게도 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푸르르 일어나 원탁을 마주하고 노트북의 파워를 넣었다.
집에서는 금기(禁忌)처럼 멀리하던 작업이었다.
일 년도 더 넘게 노트북을 방치해 뒀을 것이다.
양어깨에 두 개의 날개가 솟고 푸르른 등줄기의 뿌듯함과
햇살 투명하게 반짝이거나 무지개로 뜨던 파릇파릇한 감성들이
파도 되어 밀려오고 밀려갔다.

우리 인간은 얼마나 오묘하며  자유자재로이 흐를 때가 잦고 많은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무한정 과거로 거슬러 오르는 몫을 매번 거듭할 수가 있는
특별함을 갖췄다는그 자체라니.
때를 막론(莫論)하는 성격이기는 해도,  나는 중력 달 지구 타원궤도 회전 지구 행성 태양의 둘레 회전증명 등의 언어들이 잇달아 부각되는 뉴턴의 법칙에는 매우 드물게 관심을 기울이는 성향(性向) 매우 짙다.
나는 수학(數學)에는 지독한 문외한이다.
난해한 수학 때문에 한층 문학에 가까워졌을 확률 특히 많다.
세상에나!
지구라는 이 행성엔 내게 방정식처럼 난해한 수학이라는 장르가 얼마나 흔하게 널려 있는가.
하여, 내가 문학이라는  고난의 길목에서  목이 길어지는 건 당연지사(當然之事)가 당면(當面)한 문제처럼 파생 되었을 터…….
그렇지만 세상천지에서 가까이하고 싶은 일만 실행하고 사는 사람은 없다는 공식(公式)은 자고이래 누누이 입증(立證)되어 왔다.
사람이 실행하기 가장 어려운 일 두 가지를 축소하라면 다른 사람이 나를 훼손하는 발언을 했을 경우 용서하는 마음과, 내가 지닌 것을 약간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자세라고들 일컫는다.
포괄적(包括的)으로 표현하자면 우리 모두 동시대(同時代)에 흘러가는 같은 행성의 테두리 안에서 크고 작게 반짝이는 하나하나의 별 떨기라는 사실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긍정 심은 그 어떤 위대한 이에게서도 질타로 표출되어서는 곤란하다.
사람이 그 누군가에게서 동질성을 감지하는 일은 생의 권태(倦怠)에서 비롯되는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누구를 좋아하는 감정 또한 아무도 자신 있게 설명할 수가 없겠고.
그건 단지 운명적 압도(壓倒)라고 말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인생사 어찌 보면 격언(格言)이 바로미터가 될 경우 흔하게 있어왔다.
"밉게 보면 풀 아닌 것이 없고, 곱게 보면 꽃 아닌 것이 없다."
내 시야가 풀로 뒤덮이면 보이는 사물 마다 풀이고, 내 시야가 꽃으로 맺히면 눈에 띄는 상황마다 꽃이 핀다.

결국 나는 종반(終盤) 무렵에야 디카프리오가 악당(惡黨)역할로 등장하는 영화 '돌아온 장고'를 밤늦도록 관람하기에 이르렀다.
밤중에 마실 물을 병에 채우기 위해 부엌으로 가다가, 내가 아슬아슬한 경지에 몰입해 있는 거실에 섰던 가족이  한 마디 했었다.
"그거 애들이나 보는 영화인데……."
"옛날에 애들이던 시절에 남친 하고 함께 봤던 영화야.  무섭다는 핑계로 남친이 내손을 잡았던 것도 같고, 나도 좀 그렇다!  내쪽에서 무섭다고 내숭을 떨었어야 하는 거 아니었나?   하하.  새로우면서 흥미진진이야. 이 영화..."
사실 나는 아직도  스릴과 액션에 적응되고 당긴다는 자세를 고수(固守)하고 있다.
가난이나 절망, 혹은 극한 상황 등이 돌출하는 '레미제라블'이 내겐 영원한 부적절함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쉬엄쉬엄 접근하게 되는 분야인가 보다.
나는 계속 뮤지컬로 숨 쉬며 살아낼 것이다.
처음이다.
학창시절에 단체로 보았으며, 감명이  넘치던 영화를  이리도 띄엄띄엄 행군하는 '레미제라블'이라는 저 여행은…….

이 기호 소설가의 칼럼 '너무 많은 공감' 후반부가 강하게 어필된다.
아이들 때문에 '레미제라블'을 먼저 보고 온 그분의 아내가 전하는 말.
"그나저나 저 영화 왜 다 뮤지컬로 만들었는지 알아? 누가 그러더라. 가난한 것들. 이런 식으로라도 뮤지컬 봐라."






2013년 1월 20일 일요일

송태일~~~축하!

취임식 행사 맡은 연하나로기획은…아시안게임·올림픽·월드컵 행사 `연출`


연세대 응원단장 출신 송태일 대표 1985년 창업
朴 "中企가 맡으면 안되나"

김진선 대통령취임준비위원장이 20일 서울 삼청동 인수위 기자회견장에서 취임식 준비에 대해 브리핑하고 있다.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내달 25일 대통령 취임식 행사기획을 맡게 될 ‘연하나로기획’은 중소 행사기획 전문업체다. 연하나로기획은 연세대 응원단장 출신인 송태일 대표(55·사진)가 1985년 자본금 9억원으로 창업한 이벤트 전문 기업이다. 전체 직원은 70여명 정도다. 2011년 매출 240억원에 순이익 3억원을 거뒀다. 2011년까지 8년 연속 흑자를 기록하기도 했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식전 문화행사 및 공식행사 연출을 시작으로 1988년 서울올림픽 식전 행사를 연출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 개막행사에도 참여하는 등 굵직한 행사 기획을 맡았다. 김진선 취임준비위원장이 위원장을 겸직하고 있는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와도 각별한 인연이 있다. 2003년, 2007년 제일기획과 함께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한 프레젠테이션 기획에 참여해 실력을 인정 받았다.

지금까지 세계 50여개국 100여개 도시에서 진행된 1500여개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2006년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에서 가진 삼성모 바일 울트라폰 프레스콘퍼런스를 비롯해 2004년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진행된 대한민국 세계일류상품로드쇼, 2003년과 2006년 칠레 산티아고와 핀란드 헬싱키에서 각각 진행된 한국상품전 등이 대표적이다. 삼성그룹과 현대자동차, 한국관광공사, 두산그룹, 금호타이어, SK텔레콤, KOTRA, 서울시 등과 주로 거래하고 있다.

취임식 행사 기획을 중소업체가 맡은 것은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의중이 담겼다. 박 당선인이 취임준비위에 “취임식은 중소기획사가 맡아 하면 안 되느냐”고 제안했고, 취임준비위가 이를 받아들여 대기업 계열 기획사와 중견기획사를 배제한 채 경쟁 프레젠테이션을 실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8 년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부터 2008년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까지 대기업 계열 기획사가 기획·연출을 맡아 진행했지만, 이번에는 최종 프레젠테이션에도 참가하지 못한 것이다. 취임준비위는 무대장치와 장식물 준비를 비롯한 세부적인 실무 작업도 중소기획사에 맡길 계획이다.

최만수/이현진 기자 bebop@hankyung.com

행복하고 기쁨 가득하기를…


         맹하린


우리 가게에서 세 블록 떨어진 C마켓에 어제 오후 산보(散步) 삼아 다녀왔다.
생선코너에 진열된 오징어가 꼴뚜기보다는 크면서 야들야들 싱싱해 보여 그걸 구입하여 오징어덮밥을 마련했다.
매콤하게 양념하여 프라이팬에 재빨리 볶았고, 깻잎과 풋고추와 파 마늘을 듬뿍 얹어 다시 한 번 볶아냈다.
꽤 그럴싸한 맛이었다.
나는 매일 장을 보기 때문에 그날그날 꼭 필요한 것만 사는 성격이라  같은 음식이 다음날까지는 안 간다.
밑반찬 위주에서 해방 된지 오래되었고, 두세 가지 이상은 준비하지 않는 주의다.
그런 이유로 우리 집 냉장고는 사시사철 텅텅 비어 있는 편이기도 하다.

명태와 무를 넣은 찌개는 다음 날을 위해 미리 끓이고 있었다.
퇴근시간이 가까운 무렵이라 맘 놓고 준비했다고 본다.
이상하게도 한국적인 음식을 만들 때면 현지인 고객이 닥치거나 소중한 손님이 찾아와 결국 맘속에서 민망함이 설익을 것처럼 뚜껑이 열린 채 들끓게 된다.

처음 보는 젊은 커플이었다.
다음날 생신을 맞는 어머니를 위해 주문을 했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신비가 엿보일 정도로 말수가 적었고 지나치리만큼 정중했다.
메시지는 가뭄에 콩 나듯 주고받고 서로의 글에 댓글이나 달던, 내겐 은둔의 문우인 아르헨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휩싸이던 순간들이 존재했다.
갈 때 매우 짧게 인사를 나누며 듣고 보니 지인(知人)의 자제였다.
바로 이틀 전, 장갑 사달라고 울던 그 아드님의 유년시절에 대한 얘기를 접했던 터라서 나는 퐁퐁 샘솟던 웃음다발이 생선찌개 때문에 창피한 상태의 내 마음을 연신 식혀 주고 있음을 감지했다.

너무도 잘 어울리던 두 사람이었다.
그들이 너무 아름답고 눈부셨던지라 장미 50송이쯤 채우기로 했던 꽃바구니를 지인(知人)의 나이수로 알고 있는 77송이로 장식했다.
두 사람에 대한 축복 역시 잊지 않고 기원했다.
행복하고 기쁨 가득하기를…….

평소에 아끼던 시집(詩集)을 읽느라 그날밤 잠을 설쳤다,
나처럼 감정이입(感情移入)에 멈칫대거나 넋을 드러내는 수식어가 아니라, 빈틈없고 짜임새 있고 서정(抒情)이 살아 있는 시어(詩語)들의 정원(庭園)이었다.
모처럼 불면을 겪었으나, 새벽길을 걷는 산책로 전체에 감성이 찰랑이고 있었다.

오늘 불현듯 스스로에게 감격이다.
나는 때로 길을 잃고 살아온 것이다.
짧은 시간의 숙고(熟考)도 거치지 않고, 나이나 취향에 상관없이 오직 느낌으로만 타인의 인격을 두둔하고 아끼려드는 내 단순명료한 성품.
예술을 신뢰하는 마음.
그게 없었더라면 나는 인생을 망쳤을까.
내가 원하는 일을 한다는 것.
내가 좋아하는 일의 조건마다 아낌을 고수(固守)하며 산다는 것.
그게 그리도 못난 일일까.
결국 내가 지향하는 참된 진리의 길은 자유가 아니려는지…….
나는 어쩌면 내가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 모호함과 불가사의(不可思議)를 선망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나는 진정한 글쟁이 맞다.
그 작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어서 오늘이  특별하고  사는 일 한층 감사하다.
고맙고 고맙다는 마음 새록새록이다.
내 친애하는 그대들에 대해서도.



2013년 1월 16일 수요일

삼계 유일심(三界 唯一心)



           맹하린


해마다 연말이면 인터넷을 검색하여 '토정비결'을 본다.
지난 해 연말은 이래저래 바쁜 일이 겹쳤었기 때문에 2013년 연초인 일주일 전에야 '토정비결'과 조우할 수 있었다.
일년 가득 좋은 일이 많다고 나와 있다.
2월에는 아름다운 이를 만나는 인연을 맺는다고 하여 하하하 포복절도(抱腹絶倒)가 터졌다.

불교에서 말하기를 부부인연은 "하늘 높은 곳에서 바늘을 쏘아 땅의 겨자씨를 맞추는 것이라고 했던가.
내가 남편에게 잘 한 거라고는 어떤 악전고투 속에서도 이혼하지 않은 것 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환득환실(患得患失).
무엇을 얻기 전에는 어떤 수단을 부려서든 그것을 확보하려고 노심초사하고, 일단 획득하면 그때부터는 그걸 잃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걱정한다는 의미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답게 살아내는 근본 개념은 크게 어려운 일은 이닐 것 같다.
크고 작은 일마다 슬기와 지혜를 병행하면 그나마 인간다운 도리에 닿는 게 아닐까.
소박하게 사는 것.
그게 내가 가장 잘 사는 바로 내 스타일이다.

나의 뇌 속에는 팻말이 하나 걸려 있다.
필리핀 칼멜 수녀원의 벽에 걸려 있는 팻말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축소한 것.
1. 그 사람이 너에게 한 서운한 일을 용서하면 네가 그 서운함을 잊게 되고 , 그 섭섭했던 일을 잊게 되면 너는 드디어 치유를 맞는다.
2. 사람의 위대함을 깨닫기 위해선 그 사람이 너에게 어떤 마음을 남겼는지를 보면 된다.

인생사 어차피 삼계 유일심(三界 唯一心)이다.
세상만사가 오직 마음 하나에 달려 있다는 불경(佛經)의 계시가 아니더라도 뭐든 편하게 여기면서 더욱 자유롭고 수월하게 흐를 생각이다.




2013년 1월 15일 화요일

휴식과의 소통



        맹하린


지난해엔 지독히도 극심한 불경기를 겪었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겸허를 표출했지만 나로선 다른 해보다는 더 바쁘게 일했던 것 같다.
인플레 문제, 그리고 환율급등으로 위정자들에 대한 불신(不信)과 잦은 어리둥절 상태는 그다지 낯설지만은 않던 사안이었지만, 애면글면 분주함 속에서 지냈다는 사실만으로 명쾌히 접어 두게도 된다.

여름태생이어선지 나는 여름에 주로 글을 쓴다.
하물며 아르헨티나는 12월 초부터 3월 초순까지 무려 3개월이나 휴가시즌이다.
1년에 걸쳐 19번인가 있다는 공휴일은 차치하고,  대부분 보름이나 한 달 남짓 지방 도시와 국외로의 여행들을 연례행사 삼아 다녀온다.
도시는 서부영화에 나올 법한 장면처럼 텅 비고, 거리마다 자동차도 드물고 고객들 또한 뜸한 상태다.
한적한 시간을 여행이라는 고생과 맞바꾸는 일이 내겐 어느 날부터 더 이상 내키지 않는 삶의 행간처럼 접혀져 있다.
음악 속에서 글 쓰고 책이나 읽으며 소일하는 게 가장 신명이 날뿐이다.
책을 읽는 도중엔 습관적으로 편의점에 가서 아이스크림이나 과자를 사다 먹고 그런다.
나는 붕어나 멜론으로 된 한국산 아이스크림보다 아르헨티나산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훨씬 맛있어 하는 취향이 있다.
값도 저렴하고 산뜻한 맛이라서 더 그럴 테지만, 어찌하여 한국 아이스크림은 약간의 눈물이 글썽여지는 고향 맛이기에 부득불 간혹 가다 구입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어제 역시 알멘드라(아몬드) 맛의 아이스크림을 사려고 편의점에 갔다.
마침 편의점 강여인을 포함한 지인 넷이서 각자의 의자를 차지하고 앉아서는,  각각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느라 희희낙락이 대체적이었다.
Y엄마는 카톡, N여인은 가요동영상을 보며 어깨춤. K여인은 기념사진 들여다보기, 강여인은 거베라꽃 두 송이가 크게  부각된 바탕화면의 아래 켠을 손가락 끝으로 밀면서 내게 시 하나 좋은 거 건졌다고 자랑처럼  보여주고 그랬다.
하하하. 그렇게 화통한 웃음을 잘 터뜨리는 나지만 그곳을 나올 때는 깔깔 대며 웃지 않을 도리라고는 없었다.
넓은 정원을 소유한 저택에 살면서들 왜 날이면 날마다 좁디좁은 편의점에 약속처럼 들이닥쳐 양푼 하나에 공동합자(公同合資)로 밥 비벼 먹고, 호박잎쌈 나눠 먹고 그러는 것일까.
하필이면 한 깔끔하는 내게까지 이 여인 저 엄마가 한 쌈씩 큼직하게 손수 나의 입안에 쌈밥을 넣어 주고 그러는 것일까.

가게로 돌아오는 길의 앞쪽에서 걸어오는 젊은 현지인 커플조차 서로 카톡하며 위태로이 아슬아슬 걸어오는데, 생글생글이 너무도 잘 어울려 보여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나는 또 웃고웃었다.
이번엔 쿡쿡쿡!!!

그 누가 설파했을까.
최상급(最上級) 쾌적함과 탁월함이 최선(最善)과 같이 아우러진 환경일지라도 마음이 함께 섞이지 못하면 지옥과 다름 아니며, 퇴보(退步)와 척박함이 뒤얽히듯 조성된 환경이라도 마음이 닿고 마음을 열고 마음을 쏟게 되면 그곳이 곧 천국이라고…….

햇살이 자글자글 퍼지는 도시.
너도나도 떠난 도시의 한 가운데에서 나는 올해도 틈틈이 산책하며 텅텅 비어 있는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파수꾼처럼 열심히 지켜내며 재밌게 잘 지내고 있다.
예전엔  여행과 휴가를 제때에 누렸을지라도,  지금은 단지 집과 가게를 오갈 수 있다는 현실 그 본체(本體)를 가장 감사하게 되는 날들이다.

날마다 변화 추구하며 시골풍이면서 소박하게 차리게 되는 집밥을 매일 먹을 수 있어서.
내 소유의 연필이 작대기 발로 노트라는 빙판위에서 스케이트 타기를 즐겨 실행해서.
그 누구와도 나를 견주지 않아서.
거의 모두 떠났지만 나까지 떠나지 않을 수 있어서.
하물며 절대고독이 필수인 장르의 글쟁이 노릇에 치열하게 세뇌되어.
멀리 여행을 떠나온 처지도 아닌데 슬프거나 고즈넉해져서.
참 대책 없다.
내 영혼의 침잠(沈潛).
작렬(炸裂)하는 태양빛의 열정이 묻어 있는 내 빗장뼈의 시리거나 아린 통증(痛症).

그네에 흔들리듯 지금은 휴식과 소통하는 시간이다.




2013년 1월 13일 일요일

장자(莊子)를 펼치며





    맹하린


우리 집의  뒷집에는 볼리비아인 들이 살고 있다.
제품공장을 운영하는 사람들이다.
명색(名色)이 한인 타운이고, 한국교민들에게  제2의 고향이라는 감동을 안기던 이 지역이 점차 인접국 사람들과 연변 교포들의 소유지로 변천되고 있는 실정에 이르른 건 벌써 몇해쯤  되었다.
몇 달 전부터 우리 집의 벽과 천정에 물이 스며들어 마룻바닥이 아니라 나무천정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거나 벽면으로 줄줄 새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몇 번이고 찾아가서 매우 좋은 말, 가장 상냥한 언어로 항의하면, 높낮이가 다른 그들 특유의 억양으로 비가 많이 와서 그럴 거라는 핑계만 주절주절  성긴 빗방울 뿌려 대듯 튕겨 버린다.
가장 경악할 만한 대응(對應)이라니...
자기들 집은 멀쩡한데 웬 트집이냐고 되레 통박을 보내온다는 사실이다.
문제가 되는 우리 집과 맞붙은 그 집의 이층 화장실 바닥은 세탁기의 물 버리는 호스가 바닥에 노출되어 있었다.
주범이라고 볼 수 있는 세탁기의 사용을 당분간 멈춰 달라고 부탁했던 일주일 동안 물방울은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엄청난 폭우가 퍼부었던 날들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도 않아 다시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더욱 기가  막힌 건 그들은 우리의 당부(當付)를 전혀 지킬 생각조차  안하고 새삼스러이 뜬금없는  트집까지 앞세웠다.
당면한 숙제를 떠안은 당사자들은 바로 우리니까 우리 집에서 벽이나 천정을 깨부수어 고쳐 내야 한다고 고집하며 우기는 것이다.
그리고 화장실을 다시 보여 달라고 하면 한참이나 기다리게 만들고 가까스로 보여준다.
분명 임시조치를 취한 자욱이 넘친다.
억양의 높낮이가 다른 그들과 승산  없는 싸움을 벌일 수도 없고 참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와 가족은 평소에 가족끼리는 물론이고 그 누구와도 논쟁이라거나 언성(言聲)을 높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안다.
그들에게 친해지자고 유화작전을 시도할 확률이 많은 나를.
세상 살아가는 근본적인 설득의 원리는 논리(論理)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에 근거를 두어서다.
새벽이나 퇴근 후.
천정과 벽에서 떨어지거나 흐르는 물방울을 바라보며 마음만은 언제라도 편하려고만 하는 주의(主義)인 내 마음이 그다지 평화롭지만은 않다.

크게 걱정이 앞선다.
우리의 2세나 3세들이 교양이라고는 어쩌다 가뭄에 콩 나듯 보이고,  억지 내세우기를 가장 첫째가는 근본으로 일삼는 인접국 도우미들의 손에 의해 자라면서,  우유를 먹고 기저귀를 갈아 채며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유아기(幼兒期)를 겪어내고 있음에 관해서다.
내가 알고 있는 한국아기 비올레타(보라)는 인접국 도우미에게 크면서, 몸의 군데군데가 멍이 들고 잠만 자는 게 너무  이상하여 도우미를 당장 내쫒았다는 하소연을 그 엄마에게서 들었다.
울어야 할 때마다 무섭게 울음을 삼키는 증상을 치유하는 데는 많은 시일이 걸렸다고 알고 있다.
자꾸만 안아 주라고, 머리도 자주 쓰다듬어 주고, 뽀뽀 역시 많이 해줘야 한다고 …….나는 그 엄마에게  다독이듯 그랬을 것이다,
우리 집 천정은 둘째 사항의 문제라고 여긴다.
우리의 2세나 3세들이 한층 부모와 많은 시간을 공유하기를 바라게 된다.
새삼 아르헨티나가 걱정 된다
나라에 경제파동이 닥칠 때마다 석학(碩學)들과 자산(資産)이 속속 외국으로 빠져 나가고, 이론이 통하지 않는 인접국의 억지사촌들만 꾸역꾸역 밀려와 중얼중얼 높낮이 없이 대책 없는 주장만을 앞세우는 세상이 도래해 있다.
그 여파(餘波)는 점점  도를 넘고 있고, 당면한 현실이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다.
결국 나는 난감(難堪)한 일을 겪을 때마다 접하는 장자(莊子)를 음미하듯 펼친다.

'송나라상인 이야기'
송나라 사람이 '장보'라는 모자를 밑천 삼아 월나라로 장사를 갔다.
그런데 월나라 사람들은 머리를 짧게 깎고 문신을 하고 있어서 그런 모자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소유요-

작금(昨今)의 나는 송나라 사람이 되어 있다.
야만 상태에 있었으나 중국역사에 동참했던 신흥국가 월나라 사람들을 보듯 인접국 사람들에게서 동질과 타협이라는 격차(隔差)를 직접적으로 실감하는 장터에 발길을 내딛고 있다.
내가 모색해 왔던 종족(種族)간의 이해와 협력이 결코 와해될 수는 없겠으나, 나는 이민자들 틈바구니와 간격에서 오는 신뢰감이 소멸되는 아찔한 현기증을 매우 강하게 체험하는 중이다.
말 그대로 종족과 정서와 문화에 대한 커다란 낯설음이다.
인접국 사람들 다루기.
어떤 면으로는 전쟁의 도화선(導火線)이 될 돌발적 사태로 진전될 가능성이 구석구석 흔하게 엿보인다.
세상사 언제는 묘수 같아도, 어떤 땐 악재가 될 소지가 많았던 게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언제라도 협상이라는 카드는 남아 있을 것이지만 말이다.

지난 연말.
나는 빤둘세(견과류를 넣은 축구공보다는 작은 빵인데 연말에 주고 받는 선물용.) 하나와 시드라(샴페인) 한 병까지 사들고 뒷집을 방문했다.
갈 때는 살살 달래듯 말할 계획이었다.
소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더라도 되도록이면 마지막 카드를 커낼 계획은 삼가기로 작정을 굳혔었다.
그런데 여전히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그들을 대하자마자,  나도 모르게 맘이 변하고 있음을 실감하고 말았다.
한 가지 조건으로는 미약하다 싶어 전면전을 시도(試圖)한 셈이고, 별다른 돌파구는 없으리라는 단정(斷定)이어서 거의 자신감 넘치게 내 적절한 표현을 전달했다.
나는 결단코 웃으며 말하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그 이후로 웃음도 두려울 때가 있다는 인상을 보일까봐 나는 최대한으로 진솔한 표정을 갖춘 채  말했었다.
"더 이상 이 일로 시간을 소모하고 싶지 않아요.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내가 곰곰 생각해낸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당신들 편에서 선택하는 거예요.  우리와 공동부담으로 고쳐 보도록 해요. 그것도 귀찮으면 간단해요. 며칠 안으로  Carta Documento(내용 증명서)를 받으시게 되겠죠?"
분명하고 확실한  사실은 그들에겐  표정조차 이렇다 할 차이가  없었다는 점이다..

내용증명서가 두려웠던 것일까.
절대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도 말이다.
아니면 공동부담을 부담하기가  부담스러웠으려나.
그도 저도 아니면 Pan Dulce와 샴페인의 역할이 돈독했을지도 모른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협상 끝?
새해 첫날부터 물방울도 물줄기도 단숨에 행방을 감췄다.





2013년 1월 10일 목요일

우리 집 사전(辭典)



          맹하린


“아드님 있어요?”
이웃 가게에서 수입상품을 취급하는 S사장이다.
“정오쯤에 오는데 무슨 일이세요?”
“건너 편 공장 앞의 거지들 때문에 그럽니다. 저 공장 주인한테 전화해서 쟤들 좀 어떻게 해결하라고 그러세요. 도대체 쟤들 때문에 수준 떨어져서 어디 장사를 해먹겠습니까?”
이렇다 저렇다 토 달지 않고 나는 그렇게 전하겠다고만 대답한다.
가족한테 전화해서 나는 자세한 설명을 삼간다.
올래? 그렇게 짧게 말해도 곧장 나오기 때문이다.
주문이 여러 개 밀려 있게 되면, 나도 모르게 암묵적인 표현을 간단히 해낸다.
“왈래?”
올래를 왈래라고 말할 정도로 느닷없이 바빠 있다는 표시다.
5분이나 10분이면 도착하는 가족이 40분 후에나 도착했다.
욕실의 수도꼭지가 말썽을 일으켜 그걸 혼자서 뜯고 원상복귀 시키느라 늦었다는 얘기다.

생긴 건 곱상한데 뚜렷한 주관쟁이에다 끈기가 한 몫 한다.
뭐든 솔선수범 고치기를 즐겨 실행해 왔다.
어려서부터 멀쩡한 건 하나 같이 망가뜨려 놓고  고장 난 건 기어이 고쳐내는 반전의 연속이었는데, 나로선  전부 다 눈 감아 주고 기다리고 참아 줘 왔었다고 본다.
기술이란 게 실패하면서 익히기 마련 이라 서다.
어쩌면 나는 전생에 유태인이었는지도 모른다.
남보다 ‘뛰어나게’키운 게 아니라 남과 ‘다르게’키우는 걸 최우선으로 삼았지 싶다.

나는 점심식탁을 차려 주며 노숙자문제를 설명한다.
“그래서요?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그분의 아들이 둘이나 있는데 뭘. 왜 하필 우리가 나서겠니?”
S사장은 최신형 아우디를 몰고 다니는 장성한 아들이 둘이나 있다.
나는 짧고 핵심적인 결정을 순간적으로 표출한다.
“개입하지 말자.”
신문의 사설에서 누누이 읽어왔다.
노숙자 보호시설에 들어가면 끼니는 물론이고 날마다 샤워를 할 수 있고 단체생활을 영위한다는 잇점도 있으며 전문의 역시 상주한다는 사실을.
나는 글에서나 나댈 뿐 웬만한 일에는 못 본 척, 모르는 척, 모자란 척 하는 주의에 철저하다.
그렇게나 제대로 차려 놓은 복지시설을 마다하고 붙잡혀 가는 족족 뛰쳐 나오는 그들.
흡사 닭장 같은 나무상자를 켜켜로 쌓아 놓고,  너댓의 청년들이 노숙을 고수하고 있다.
저들에게도 자유를 누릴 특권은 분명 주어졌을 것이다.
한인 타운에 오고가는 한국인들에게서 떨어지는 콩고물 맛이 날이 갈수록 고소한 치즈 맛인지도 모른다. 쾌쾌한 냄새와 고소한 맛을 골고루 지녔으며 영양도 풍부한…….

며칠 전,  S사장과 노숙자들이 서로 갈궈 대는 소란을 우연히 목격했었다.
S사장의 고객들이 구매 후에 집으로 돌아가다가 노숙자들에게 적선하려던 찰나였을 것이다.
그런데  S사장 쪽에서 못 주게 가로막은 데서 생긴 충돌이었다.

나는 우리 가게 앞을 지나가던 S사장을 반대로 지나가던 중, 지나가는 말을 지나가게 전하고 있었다.
“쟤들에게 앙심을 품게 만들지는 마세요. 해코지라도 당하고 싶으신 거예요?”
“박해를 당해야 저곳을 포기하고 떠날 것 같아서 그럽니다.”
“쟤들이 무슨 예수그리스도인가요? 저 공장의 관리인들과 경찰들조차 건드리지 않으려는 문제아 그룹입니다. 무늬만 노숙자들이라는 거 아시죠?”
난감한 표정을 못 벗어나는  S사장을 웃어주며 나는 가게로 향했다.
S사장은 잊었다는 듯 커다랗게 내 뒤에 대고 소리쳤다.
“내가 저 녀석들 나무판자를 모조리 끌어다 버렸습니다. 저놈들 안보일  때 말입니다.”
나는 못 들을 척 서둘러 가게에 들어섰다.
S사장의 커다랗던 음성이 의아했던지 가족이 물었다.
“괜찮아요?”
“물론 괜찮아.”
나는 속으로 대답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세상은 격파하는 게 아닐 거야. 마냥 흐르는 게 순리인 것 같아.)

우리 집 사전에는 고발이나 고소가 없다. 신고 역시 화재신고 정도만  한다.
내게 남겨진 소중한 시간들 아무 일에나 낭비하고 싶지가 않다.
세상과 예술을 아끼기에도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고통에서 벗어나서야 평화가 온 게 아니라, 고통 중에 있을 동안 나는 특별히  평화를 얻었는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에 젖을 때 간혹 있어 왔다.
내게는 노숙자들이 전혀 거치적거리지도 않고 불편할 일이 없는데,  다른 이들의 눈에는 가시처럼 쓰리고 따가운 모양이다.
(나는 거지사촌쯤 되는 존재?)
저 높은 이의 시선으로 부각시키자면  우리 모두 노숙자들이 아니려는지...

초인종이 울린다.
다시 S사장이었다.
얼떨떨한 표정을 숨기며 나는 가게 문을 열었다.
“아드님 있어요?”
“네. 있어요.”
“산책길의 수도가 크게 고장 났어요. 저놈들이 머리감고 옷을 세탁하느라 난리를 치더니 결국 고장을 냈지 뭡니까?  당장 신고하고, 수도 자체를  아예 없애버리라고 하세요.”
“하하.  잔디나 나무들은요?  그리고 쟤들도 사람인데 샤워라도 하게 놔둬야 할 것 같은데요.”

가족은 시청에 전화도 하고 수도 국의 홈페이지를 검색하더니 메시지도 보내고 그런다.
우리 집 사전에 첨부해야겠다.
수도고장신고도 한다!
가로등 사이의 플래카드 되어 펄럭이는 ‘물을 아끼자'는 캠페인이 느닷없고 속절없어만 보인다.


2013년 1월 7일 월요일

CCTV





      맹하린


온세 지역에서 의류도매상을 잘 하더니, 15년 전 미국으로 재이주를 떠났었다.
그랬던  K여사 내외가 금요일 오후 불현듯 나타났다.
둘째 손자의 돌 꽃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목요일 아침 아르헨티나에 도착 했다 한다.
나는 그분들이 손자의 돌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방문하지 않고, 우리 가게에 주문하려고 아르헨티나에 온 것처럼 반가웠지만, 호들갑은 사양했다.
(꽃이나 많이 넣어 고급스러우면서도 산뜻하고 예쁘게 장식해야지…….)
따님 결혼 꽃은 물론이고 작년에 큰 손자 돌 꽃도 우리 가게에 주문했었다.

한국으로 치면 강남 땅 정도 되는 Puerto Madero 지역의 중국식당 Royal China로 토요일 오후 배달까지 도맡아 달라는 부탁이었다.
우리 교민들의 대다수가 상류층 부류에 진입한지 오래고, 치안문제의 불안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잔치나 행사의 장소가 때로는 급전환을 시도하는 추세다.

토요일 새벽, 나는 몇 개 쯤 겹쳐 있는 예약에 대비하려고 6시 반경 가게에 도착했다.
7시쯤, 어딘지 모르게 가게 밖이 소란스러웠다.
현지인들 간에 싸움이 터졌지 싶었다.
투덕투덕, 퍽퍽, 서로 두들겨 패는 소음도 들려왔다.
나까지 구경하고 상관할 일은 못된다고 단정했다.
길에서 일어나는 사건마다 모두 구경하고 참견하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서다.
그런데 오아시스받침을 가지러 매장에 나갔던 나는 금세 작업실로 다시 되돌아오고 말았다.
가게 건너편의 산책길에 예닐곱의 경찰과 등 뒤로 수갑을 찬 채 앉아 있는 현지인 남녀와 그리고 엎드려뻗친 자세인  또 한 명의 현지인을 액션영화 관람하듯 바라보고 말았다.
경보 등을 켠 경찰차들과 구급차는 서로 누가 더 많이 현란하고 요란하게 반짝일 수 있는지를 내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미 들렸을 사이렌 소리는 지나가는 중이려니 그렇게 예사로 지나쳤을 확률이 많다.

영문을 알 도리가 없었지만, 이웃의 그 누구에게도 오전 내내 내색하지 않았다.
내 주위에서 나보다 일찍 출근하는 사람은 몇 년을 가도 없었고, 그 일에 대한 해답을 듣기에 앞서 내 쪽의 설명이 한층 불가피한 상황을 연출 할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최근의 나는 내 스스로 느끼기에도 어딘지 모르게 전혀 나답지가 않다.
그런 이유로 장난기만은 여전히 살리는 중이다.
편의점 K여인이 문간에서 몇몇의 쓰레기 나부랭이를 서너 번에 걸쳐 발로 차내는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잽싸게 다가가 발길질이 그렇게나 재미있으면 나도 해봐야 한다며 나는 그녀를 고스란히 흉내 냈다.
자연스레 K여인을 파안대소하도록 유도한 일이 되었다고 본다,

오후 다섯 시가 다 될 무렵, Royal China에 가려고 서둘렀다.
큼직한 사방 화와 두 개의 유리화병에 얹을 꽃 장식을 싣고 레미스로 출발했다.
여름휴가철이라선지 거리마다 자동차들이 눈에 띄게 적어 상상외로 빠른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평소에는 40분까지도 정체현상을 일으키던 길이었다.
아르헨티나 역시 한국처럼 날이 갈수록 자동차들이 늘어나고 있다.

레미스 기사 후안에게 질문하려고 오전 내내 침묵하고 있었다는 듯 나는 돌아오는 도중에
선뜻 물었다.
"오늘 아침, 우리 가게 건너편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대낮엔 노숙인 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밤이면 마약판매원인 청년 두 명과 여자 한 명이 왼편에서 걸어오다가 오른편에서 걸어오던 다른 세력의 한 명과 패싸움이 벌어졌었다고 한다.
우리 가게와 매우 근접한 곳에는 시청에서 설치해 둔 CCTV가 있다.
문제의 그 장면은 고스란히 포착되었고,  빠르고 강경하게  따로 지시를 받은 경찰들이 순식간에 속전속결을 단행 했었다는 설명이었다.

이렇다하게 문제를 일으키지만 않는다면 가능한 한도에서 뭐든  상관하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에 치우친 경찰들이 마약쟁이들을 꽤나 두들겨 패더라고 했다.
누구 하나 죽어 없어졌을 수도 있었던 패싸움은 경찰의 개입으로 일단락 됐다는 의미도 된다는 얘기였다.
나는 서부영화도 갱영화도 아닌
마카로니웨스턴에 나오던 돌아온 장고의 세상 역시 아니고 아닌
빠꼬(싸구려 마약)꾼들 벌판에 살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장 마끄리가 일을 하긴 하는구나.
한인 타운을 관할하는 50경찰서가 그렇게 빠를 때도 있구나.
CCTV가 제대로 작동을 하고 있구나.
한인 타운 회가 미리미리 정책적 교류와 악수를 굳세게 많이 해뒀구나.







2013년 1월 1일 화요일

펠리스 아뇨 누에보




    맹하린


아침 8시까지 성묘 다발 3개를 준비해 놓으라는  고객의 주문에 맞추려고 6시쯤 집을 나서게 되었다.
영락교회 근처에 둥지를 튼 20대의 노숙인 들이 커다랗게 인사를 건네 온다.
"아쥼마(아줌마), 펠리스 아뇨 누에보(새해에 복 받으세요)!"
"이괄 멘떼(마찬가지로)!"

정원이라는 이름의 식당 앞 산책길에서는 피식 웃음이 터진다.
벌써 보름째나 그 자리를 지날 때마다 습관적으로 웃는 웃음이다.
부인회 임원인 L여인이 보름 전의 오후 무렵, 엉덩이 부분이 암팡지고 사람보다는 약간 키가 큰 덕더구리란(덕란)을 올려다보며 현지인 여인과 대화 중에 툴툴대고 있었다.
아랫부분으로 흐르는 마르고 갈색이 된 쭉정이와 다름 아닌 머리카락들(?)을 누가 모두 뜯어냈다는 투정이다.
나는 그녀와 안부의 포옹을 나눈 뒤 선뜻 이실직고 했었다.
"나였는데?"
나는 산책길의 나무들에 붙어있는 노랗거나 퇴색한 잎, 또는  가지들을 그동안 자주 손봐줬었다.
"아이고, 이 나무는 우리가 20년을 집 앞의 화분에 길러 온 나무인데 우리만 보느니 다른 이들도 보게 하자고 얼마 전 내다 심은 나무랍니다. 알아도 우리가 더 잘 알죠. 그냥 놔둬야 훨씬 잘 자라거든요? 그렇게 마르면서 크는 게 이 나무의 특징이에요. 오죽하면 우리 집 양반이 악담을 다했을까.  이 나무의 겉잎을 누가 다 뜯어냈다고, 어떤 손모가지인지 당장 부러져 버려라! 그렇게 ."
"하하하."
환희작작  웃음부터 터뜨린 나는 순간적으로 내 손모가지를 올려다 보다가 자세히 내려다보게도 되었다.
"아직은 멀쩡한데요? 모든 나무의 삭정이들은 제 때 따 줘야 따로 영양소를 빼앗기지 않아요. 앞으로는 지금까지보다 훨씬 왕성하리라고 확신 합니다. 약속까지도 할 수가 있어요."
"글쎄 우리가 자식처럼 키운 나무라니까요. 알아도 우리가 더 알죠."
그런데 그 나무가 보름이 되는 요즘 머리카락의 숱을 푸르면서도 놀랍고 풍성한 모습으로 잔뜩 내려뜨리는 중인 것이다.

나는 며칠 전 L여인의 남편이 허리를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다.
(손목이 아니고 왜 허리지?)
살아오며 나는 수차례 경험했었다. 내가 누구를 욕하면 그 욕이 누구에게 미처 닿지 못할 경우, 결국은 내게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그래서 나는 결코 어떤 누구에게도 욕을 사용하지 않는다.

제일교회 앞의 산책길을 지날 때는 되도록 땅을 보며 걷거나 하늘을 올려다보며 걷기를 즐기고 선호한다.
제일교회를 지키는 현지인 Vigilancia(사설경찰)와 매일 인사하기가 약간 겸연쩍어서다.
가끔은 길을 사이에 두고 고개를 까딱하거나 손을 들어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오늘 역시 오른쪽나무들과 눈 맞추며 그곳을 지나고 있었다.
"세뇨라( 아주머니)!"
그 사설경찰이 나를 불러 세웠다.
나는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길 가장자리까지 다가오더니 길이라는 돗자리 앞에서 한국식으로 허리를 잔뜩 숙이며 인사를 보내 왔다.
"펠리스 아뇨 누에보(새해 복 받으세요)."
나는 순간적으로 길이라는 돗자리의 중간쯤까지   갔고,  그 역시 스스럼 없이 다가와 우리는 길이라는 돗자리 위에서 서로 악수하며 각자의 인사를  충실하게 다시 해냈다.
"펠리스 아뇨 누에보."
"펠리스 아뇨 누에보."

가게에 가까워질수록 나는 나무들과 꽃들과 세상을 향해 새해인사를 동서양식 마구 뒤섞으며 작게 외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펠리스 아뇨 누에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