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31일 토요일

요순시절(堯舜時節)




           맹하린


시어머니는 90세에 돌아가셨다.
몇 년 전의 일이었는데 연락을 받고도 서둘러 찾아뵙지를 못했고,  마지막 작별인사도  못 드리는 크나큰 불효를 저질렀다.
아르헨티나가 멀기도 멀지만, 와병 중인 남편으로 인하여 한동안 집을 비운다는 일이 도저히 불가능했던 것이다.
시어머니는 결혼시절 맏동서의 시집살이가 눈에 띄게 심했었다고 한다.
곡간에서 양식이 될 곡식을 내어 줄때마다 턱없이 모자라게 내어줘, 시어머니의 몫은 항상 밥그릇의 3분의 1밖에 안 되었던 모양이다.
젖먹이 아기를 둔 여인네의 식사양으로는 너무나 부족했지만, 밥맛이 없다며 당신의 밥그릇을 살짝 밀어주던 시아버님 덕택에 그런대로 끼니를 채우셨나 보았다.
그게 한(恨)으로 맺히셨던지 시어머니는 막 결혼한 내게 먹을 때마다 지나치게 너그러우셨다.
같은 밥상에서  식사를 할 때마다 잡수던 밥이고 국이고 반찬이고를 나의 의사(意思)와는 상관없이 내 그릇에 잽싸게 얹어 주시고는 했다.
그런 면으로  나를 매번 당혹스럽게 하신 것이다.
나는 시어머니께서, 잡수던 수저나 저븐으로 그렇게 불쑥 덜어주는 인정(人情)이 왜 그리 이해가 안 되고 참 기분 별로였던지.
차마 내색은 못했지만 거의 죽을 맛이었다.
밥을 안 먹을 수도 없었고, 먹을 수도 없게 되던 시간.
하지만 시어머니는 내가 사양하느라 그러는 줄 알고 더 자주 그러셨다.
어려서부터 한 깔끔하던 내게 그건 참 고역 중의 고역이었다.
하지만 농사철이 끝난 초겨울 무럽에 상경하셨고,  일 년이면 두어 달쯤 머무시니까 그다지 못견딜 일은 아니었다.
나는 가끔 묵상에 잠겨 왔다.
배 고픈 시집살이와 적정량 이상으로 먹어야 하는 시집살이 중 어떤게 더 고초당초일까를.
둘다 만만치는 않은 수준처럼 여겨진다.
시어머니는 그렇게 네 자녀의 집을 교대로 돌아다니시면서 시집살이라는 걸 한꺼번에 몰아서 시키셨다.
나는 시어머니가 상경하시면,  앞집 만물상회에 가서 친정과 친구들에게 서둘러 연락을 취했다.
전화도 방문도 당분간  금지라는 선언을 살며시 전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이해가 안 된다.
왜 그리도 짧게 줄이는 전화조차  못마땅하게 여기셨던 지가.
모든 것 다 참고 견딜 수 있었는데, 신문이나 책은 왜 또 못 보게 하셨는지가.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나는 뭐든 그래야 하는 걸로 알고 잘 견디고 잘 참아냈다.
남편의 사촌형 아들이, 취직한다는 의도를 지닌 채 상경하여, 장장(長長) 1년을 먹고 자고 텔레비전만 보면서 빈둥대는 모습도 그래야 하는 줄만 알고 참고 견뎠다.
그 사실을 보고 받은  시어머니는 잘 하는 일이라고, 그래야 한다고,  도리어 칭찬까지 아끼지 않으셨다.

그런 일들 모두 뿌리치고 조용히 글이나 쓰면서 살고 싶어 나는  이민을 떠나온 건지도 모르겠다.
시어머니는 그렇게 자식들마다 교대로 찾아다니며 시집살이라는 쓰디쓴 익모초 액을 명약(名藥)처럼 골고루 골고루 마시게 하셨다.

첫 자녀인 나의 시누이를 임신했을 때,  밭에서 일하다 산기(産氣)를 느꼈다는 시어머니.
부랴부랴 집에 도착하여 방문을 열자마자 혼자서 아기를 낳았고, 그 아이를 안은 채 시렁에 얹힌 반짇고리를 내려 탯줄을 끊었다는 시어머니.
그리고 그 이튿날부터 다시 논밭 일을 계속했다던 시어머니.
그런데 그런 시어머니가 어떻게 내게 가정부까지 여럿이나 교대로 데려다 주실 수가 있었을까.
그점 참으로 의문이다.
때때로 잊지 않고 하시던 말씀
- 너는 지금 요순시절을 살고 있는 거다!

사람들은 인생을 마음먹기에 달렸다고들 한다.
마음먹기.
마음을 먹어 버리기.
조금씩 야금야금 베어 먹을 땐 잘 몰랐는데
그 마음이라는 걸 눈 질끈 감고 꿀꺽 삼켰더니
알게 모르게 나 드디어 행복해졌다.

삶에 있어 좋은 조건은 좋은 게 아니고
나쁜 조건도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현자는  일컫는다.
우선 새옹지마(塞翁之馬)가 그럴 것이고
아우슈비츠 생존자들이 표본적이지 않았나  싶다.

‘소련군이 진입 했을 때, 아우슈비츠에는 대략 7000여명 정도,  행군(行軍)조차 불가능한 병약자들만 남아 있었다.
그들은 나치가 다른 수용소로 옮길 수 없는 처지라서,  결과적으로는 목숨을 건진 것이다.
신체가 튼튼한 이들로만 뽑힌 많은 유태인들이 도보행군 중, 목적지인 독일에 도착하기도 전에 추위와 굶주림에 죽은 것.
SS는 남아 있는 병약자들을  집단처형 하려는  계획을 긴급히 획책하고 있었으나,  소련군이 이틀이나 앞당겨 진군(進軍)한  덕택에 그들 병약자들은  살아남게 되었다.
아우슈비츠에서는 절대 주위사람의 꿈을 방해하지 않는 게 철칙과 같이 지켜졌다고 한다.
가족들과 함께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는, 그런 행복한 순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였고, 악몽일지라도  당장 처해 있는 극단적인 현실과는 비교가 안 되리라는 판단에서 더 그랬다고 한다.'

놓을 거 다 놓고 나니까 나는 이제야 요순시절에 머물고 있는 듯 한 화평(和平)을 맛보게 된다.
다른 건 그저 그런데,  글 쓰는 일을 언제라도 붙잡을 수 있어서 그게 바로 내게는 요순시절이 아닐까 요즘 새삼 그러한 느낌에 사로잡히고 있다.
비록 잡문에 불과하지만, 실 자아 내듯 글을  가까이 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딘지 모르게 고즈넉한 기분까지  안겨준다.
언제나 요순시절이라는 격양가(擊壤歌)를 읊어 대면서.
그런 면에서 보면 시어머니께 새삼 감사롭다.
내게 있어 진정한 요순시절이 어떠하리라는 걸 일찌거니 터득토록 도움을 주셨으므로.
나 드디어 요순시절에 이르렀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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