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8일 목요일
비 내리는 뜰
남미크리스챤신문
2001년 9월 15일
맹하린
‘아들을 서울로 유학시킨 농부가 있었다.
주기적으로 보내주는 아들의 학비를 송금하려고 쌀을 팔기 위해 시장으로 나설 때, 부인이 앞을 가로막으며 따졌다.
산판의 나무를 판 돈이 있는데 어찌하여 귀한 쌀을 팔아 송금 하려느냐 는 항의였다.
농부는 웬 가당찮은 소리냐고 부인을 나무랐다.
풍절목(風切木=저절로 시들거나 바람에 꺾어진 나무)으로 생긴 돈을 아들의 학비에 보탤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해에 바람이 심하게 불어 산판의 나무가 많이 부러졌는데, 그 나뭇가지들을 시장에 내다 팔아 그들은 적잖은 수입을 올렸던 것이다.'
농부의 이런 마음가짐과 교육태도에 대해서 웬 미신과 같은 전근대적 사고방식이냐고 더러 비웃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농부와 같은 결곡한 심지(心地)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돈을 벌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현대인들의 폐단에 대해 쉽게 동참하지는 않으리라고 본다.
우리의 물질에 대한 욕망은 언제나 너무 원대하다.
토마스 머턴의 말과 같이 쇠붙이라는 쇠붙이는 다 끌어 모은다.
우리 인간은...... .
하지만 강건함과 나약함의 양면성을 누구보다도 강하게 지니고 있는 우리.
누군가 절망하면, 누군가 아파하면, 누군가 슬픔에 잠겨 있으면, 우리 또한 그들 이상으로 동화하면서 그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로 덜 하지는 않아 한다.
그 우리는 때로 아집에 찬 생활을 해내면서 항상 고독을 새로움처럼 받아들이는 시점에 몸담고 있을 때가 많다.
해가 떠도 고독하고 해가 져도 고독감은 물고기처럼 우리의 하루 속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닌다.
이럴 때, 우리가 언제나 사랑하는 가을날의 색감 짙은 잎들과 푸르른 하늘과 쉼 없이 밀려오는 강물의 여일함은 더욱 우리를 가슴 저리게 한다.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 한 번 고요한 강물이 되어보자.
급히 솟아오를 생각을 접고 저절로 파도치고 저절로 흐르고 자연스레 바람에 휘날려 보자.
고독은 선(善)하지만, 사람을 가리며 찾아오지는 않는다.
지금의 우리는 지난날의 우리이고 과거의 총체(總體)다.
중요한 건 상처를 키우기만 할 게 아니라 그 상처로부터 어떻게 스스로를 담담하고 산뜻하게 자아형성의 방향으로 이끌어 내느냐에 있을 것 같다.
사람이 소통한다는 것은 결국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아름다움에 관한 폭 넓은 통찰이라는 의미도 된다.
소통은 곧 현실이고 허구의 뼈아픈 가치관이기도 하다.
인간은 결국 혼자다.
고독했었기에 소통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소통이라는 장르가 있었기에 사랑이 있고 고독이 존재하는 것이다.
고독했기 때문에 사랑이 다가 온 게 아니고 사랑했고 사랑하기 때문에 고독을 받아들일 수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지향하지 않은 의외의 결과를 빚어내면서.
소통이라는 이름의 합리화를 표출하면서.
관심이라는 말 참 좋고 근사하다.
온통 쏠린다는 뜻도 있겠지만,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의미도 되기 때문이다.
너무나 쉬운 말이지만 가장 어려운 난제(難題)중의 난제(難題)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요즘 평등(平等)이라는 강에 발을 담그고 있다.
참 무난한 것 같은데 매우 조심스런 강이다.
옛날 옛적의 문인 정사현이 시집 제호로 선택한 우정(雨庭=비 내리는 뜰)이라는 정자(亭子)하나 짓고 싶은 심정이다.
굳이 대쪽 같은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
주관이 너무 뚜렷하기도 버겁고 두려운 일이다.
느긋하면서 산뜻하게 급류에 휩쓸리지 않으며 세상의 부귀영화나 권위나 명예를 얻기 위해 안달하지 아니 하며 앞으로 그리 살겠다.
내가, 우리가, 나와 우리에게 부담을 덜어 주는 나날들을 소원하며.
오늘은 '여성의 날'이라고 현지인 남성 고객들이 나한테까지 축하의 말을 남기고 간다.
나 역시 모든 여성들에게 ㅊㅋㅊㅋㅊㅋ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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