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12일 월요일
비 오시는 아침에
맹하린
여름이 어느덧 자리를 걷고 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기운이 저절로 느껴집니다.
여름마다 글을 참 많이도 써냈는데 올해 또한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지나온 숲을 돌아보니 이미 떠나온 먼 도시처럼 아늑하게 느껴집니다.
아늑함은 내게 언제나 양식과 같은 힘이 되어 줍니다.
사람에게서 전해져 오는 사람이라는 온기를 소통으로 접해왔던 것입니다.
어제는 성당에 갔습니다.
10시 미사였습니다.
편의점 강여인이 일요일엔 가게를 못 비우므로 나는 주보와 성당에서 간식으로 내어 주는 빵이나 떡을 꼭 두 개씩 타옵니다.
따로 봉투 같은 게 없어서 그냥 성가책 위에 얹어서 들고 옵니다.
커피나 녹차도 있지만, 그것까지 마실만한 시간은 내게도 부족합니다.
성당의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데 열 두 살쯤의 소년이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었습니다.
성가집 위의 메디아 루나(크루아상 빵)두 개를 불쑥 내밀 듯 보여주며 물었습니다.
"끼에레 꼬멜(먹을래요)?"
덥석.
아, 덥석이라는 말은 이럴 경우 가장 적절하게 사용하는 거구나 싶게 덥석 손아귀로 움켜잡으며 그라시아스(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소년은 잰 걸음으로 기적의 성당 쪽으로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새벽에 써 내야 할 글 소재를 찾던 어젯밤.
나는 거실에 엎뎌 마구 쿡쿡대며 웃었습니다.
대부분의 내가 보낸 편지는 모두 노트에 옮겨 적은 뒤, 기회 닿는 대로 꺼내보고 그럽니다.
그런데 그 편지들이 손에 잡힘과 동시에 눈에 띄었는데, 그게 그리도 유치찬란하더란 말입니다. 충동적인 단호함으로 많이 없애고, 겨우 남아 있는 편지들입니다.
(왜 그랬지? 마음하고 놀고 싶었나? 뭐에 미치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는 법.)
언제나 단정함을 선호하던 내게 이런 면도 있었구나, 내 안에 나 아닌 누가 따로 살고 있었다는 얘기인가, 하는 의문을 절실하게 되묻고 깨우치게 되던 밤.
어디로 숨고 싶던 밤.
그런데도 계속 웃게 되던 밤.
내가 사람들을 심하게 웃겨 줬던 날들이 있어서 고맙던 밤.
그리도 유치만발했던 나를 잘 참아준 사람들에게 감사롭던 밤.
지금의 나는 지난 날 내가 저지른 불찰들의 총집합체입니다.
그때의 에너지에서 파생된 치밀함이겠고요.
내가 저지른 모든 부끄러움을 그 어떤 이름으로도 합리화 시키지는 않겠습니다.
특별히 곱다랗게 간직하겠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빚어낼까를 고민해 보려고 합니다.
그처럼 부끄럽던 날들이 있었기에 나는 지금 귀의(歸依)하여 살아야겠다고 새삼스러이 작정을 굳혔는지도 모릅니다.
나의 항복은 언제나 지나칠 정도로 너무 빠르지만, 새삼 깨닫게 됩니다.
기억은 생(生)을 관조하는 아름다운 통찰이라는 것.
종달새는 그 둥지에 머무는 동안은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둥지를 떠나 창공을 향해 날개를 펼침과 동시에 참따랗게 노래가 시작된다죠.
높이 나를수록 종달새의 노랫소리는 더욱 활기에 차고 감미롭게 된다는 겁니다.
높이 날던 새가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하면 그 경쾌하던 소리는 차츰 작고 작아지게 되어 새가 대지로 내려오는 중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레 터득하게 되는 겁니다.
둥지로 돌아오면 의연히 노래를 중단하는 종달새.
우리 역시 생각이나 관심이 둥지에 머물게 되면 노래를 멎게 됩니다.
우리가 잡다한 온갖 문제들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드높은 창공에서 부를 노래는 진리처럼 줄어드는 게 아닌가 싶어집니다.
정의(正義)와 공의(公義)를 드높이 받들어야 하는, 세상 살아가는 이치가 이미 정해진 것처럼 그렇다면 땅에서는 노래를 자제하고 자주 창공을 나를 수 있어야겠습니다.
주관을 감추듯 아끼면서 큰물에 부화뇌동(附和雷同) 휩쓸리지 않으며 독특하고 개성 있는 삶을 꾸리고 싶습니다.
3월 초의 모임에서 말라깽이 L고문이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몇 년 전에 본국에서 파견 나온 분을 우연히 만났다고 했습니다.
그분은 아주 신이 나 있었더랍니다.
아르헨티나에 팔아먹을 기차 부속품이 너무 많아서 나 있는 신명이었다고 했습니다.
그 얼마 후에 다시 그분을 뵙게 되었는데, 예상 외로 의기소침해 보이더라는 거였습니다.
그래, 주문은 많이 받았습니까. 하고 묻자, 하나도 못 팔았다는 대답이었다고 합니다.
-왜요? 이 나라의 기차부속은 모두 몇 십 년이나 낙후된 것들일 텐데요, 하고 반문하자 그 직원이 그랬다고 합니다.
-기차회사의 높은 사람마다, 자기들 가족들은 기차를 이용하지 않으니까 크게 상관없는 일이라고 표명하길래 그만 지쳤습니다.
충동구매를 배제하고, 몇 십년된 자동차도 고쳐서 끌고 다니는 국민이 대부분인지라 일종의 핑계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런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많이 투명해졌지만 너무도 느슨해서 우리 이민자들이 그나마 숨도 쉬고, 딴 주머니까지 끼고 살 수 있는 나라가 바로 이 나라인 것입니다.
앞에서는 강하지만 뒤로는 허술하기 이를 데 없는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부족해하는 마음.
종교적 삶의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과 분명 같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는 공통분모의 느낌이 듭니다.
상생(相生)과 조화가 절묘하게 선의(善意)로 이루어진다면 혼돈의 세상은 더 좀 제 자리를 찾지 않을까 그리 사료되기도 하는군요.
고독을 기꺼이 영접하려고 담담하게 맘먹는 아침입니다.
비가 내리지만 환한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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