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19일 월요일
강의 범람(氾濫) 후에
맹하린
나는 2년 전부터 어떤 인터넷 게시판에 내가 살아 온 이야기와 살아가는 얘기를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올려야겠다는 맘 같은 걸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겐 가끔 악플러가 따른다는 문제가 홀연히 돌출 되었다.
내게는 악플러를 가장(假裝)한 선플러가 여럿이나 존재했다.
언제라도 양날의 칼로 돌출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내가 관심이라는 덧문을 삐걱 열었을 때, 특히 더 그랬었다.
그리하여 고심 끝에 내 의지를 휘발(揮發) 시키고 오로지 블로그에만 글을 올리게 되었다.
그럴 때 나의 뇌리에는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상념 같은 게 들끓고는 했다.
'이집트의 나일 강은 참으로 강한 특징을 지녔다고 한다.
아프리카 오지(奧地)로부터 발원(發源)하여 사막 밑을 꿰뚫고 흘러드는 그 강은 우기(雨期)가 시작되면서 엄청난 양의 물이 휘몰려 강 하류가 삽시간에 범람하는 것이다.
이집트인들은 그럴 때마다 뼈저린 고통과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대홍수는 어마어마한 양의 물과 함께 강 상류에서 양질의 흙을 쓸어왔다.
홍수가 휩쓸고 지나간 지역은 오히려 농사에 적합한 비료를 확보하는 이변이 일어나는 것이다.'
나는 꼭 인생의 홍수를 겪고 나서야 글이 잘 써진다.
혼란을 회피하고 고통스럽게 받아들이기보다는 모조리 포용하는 방법을 선호한 뒤의 일이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햇빛은 변함없이 찬란하고.
그런 것들과 함께 홍수의 범람은 내 실존(實存)에 대해 진정한 가치까지 부여(附與)한다.
'인연은 자신의 때를 알고 있다'는 격언은 그래서 더 타당성이 느껴진다.
이번 가을이 연상시키는 게 뭔가를 추인해 보면
바로 작년 가을이라는 사실에 생각이 닿는다.
사실 그렇다.
나는 항상 자신의 격(格)이나 머물러야 할 적재적소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것만 같아 한편으로는 든든하다.
밉거나 곱거나 많은 관심 속에 지냈으니 이젠 글로 열매 맺으며 살아가겠다는 결심 같은 게 자주 싹을 틔운다.
분명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글쓰는 순간이 내게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는 사실이다.
내게 글쓰는 일은 내가 평생동안 입어 낼 옷을 걸친, 내 몸에 꼭 맞고 내 맘에 쏙 드는, 따사로움과 산뜻함을 동반한다.
관심을 주고 받는 일.
이상하게 고즈넉하지만, 잦은 매캐함이기도 하다.
바람에 맞서서 대항하는 듯한 발걸음으로 여전히 힘차게 걷고 싶다.
절제 있으나 따뜻한 관심에 약한 나.
나는 절도 있는 말을 잘하는 편인 반면, 정감어린 표현 역시 거의 마음에 감추지를 못해 왔다.
내가 알아채기 전에 상대에게 먼저 들통 난다.
그럴 때 나는 질문을 잘못 알아들은 사람처럼 불쑥 엉뚱한 대답을 꺼내서 상대를 난처하게 만들기도 해왔다.
홍수처럼 고통이 휩쓸고 지나간다고 해도 나 여러 혼란을 감수하며 글 농사에 적합한 비료를 많이 확보했음을 가장 감사하고 감격하리.
감격이라는 것에는 뭔가 연약하면서도 순수한 게 적절하게 섞여 있다.
뭔가 마음 가득 사무치는 그런 것.
공명하듯 울리는 그 무엇.
나는 가게에 누구라도 찾아와서 어떤 고민이라거나 하소연이나 원망 등을 털어 놓는 사람이 있으면 그들의 얘기 다 맞다면서 수더분하고 진지한 가운데 고요로이 들어줘 왔다.
절대로 정확한 지적이나 충언을 삼가하면서.
오죽했으면 가진 거라고는 쥐뿔도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 비밀에 가까운 속마음을 털어 놓고 싶었겠는가 하는 안타까움에서 더 그런다.
그리고 그렇게 들어 주는 것도 일종의 희생이고,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는 한 방편이라고 여기므로 더 그래 왔다.
나도 누군가에게 내 고뇌를 보일 때가 간혹 있다.
그냥 누구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내게는 아픔이었던 것을.
그런데 세상은 내 맘과 같지가 않다는 걸 얼마잖아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이외수의 <외뿔>중 이런 말이 통증되어 감겨 드는 아침이다.
'진정한 사랑은
오로지 아름다움이라는 미끼 하나만으로 충분하다.
모든 생명체는 절대로
아름답지 않은 대상에게서
사랑을 느끼지 않는다.'
피드 구독하기:
댓글 (Atom)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