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5일 월요일

무료병원(無料病院)




   맹하린


시냇물 위에 띄엄띄엄 놓여 있는 징검돌 딛듯이 짚고 또 짚었지만, 나는 의료보험이 없다.
보험료도 아깝지만, 하릴없이 무슨 검사, 무슨 촬영, 그러며 병원에 쫒아 다니는 것도 성가셔서 더 그렇지만, 진정한 이유는 병이 올 때 오더라도 , 떠날 때 떠나더라도 그런 식으로 어떤 제도에 구속 받는 게 싫어서 더 그래왔다고 본다.

그렇게 의료보험도 없는 나에게 하필,  가게의 작업실에서 살짝 넘어지면서  손목뼈가 빠지는 상황이 몇 년 전 전개되었었다.
손으로 방어 한다는 게 일을 더 크게 만든 결과였다.
무료 병원에 갈 경우 몇 시간을 줄 서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 두려움이 앞서, 한국인이 경영하는 P병원에 갔다.
직접 상태를 살펴 보던 P원장은, 독일병원에 적을 두고 있는 현지인 정형외과 의사가 오후 3시에나 출근한다면서 그 시간을 약정해 주었다.
그 시간 안에 현지인 지정  병원에 가서 X레이를 찍어오라고 하여, 알려 준  병원에서 접수하고 줄 서고 그러는  일에 넋을 바치다 보니 P병원으로 돌아 갈 시간이 금세 촉박하게 다가왔다.

그날은 내게  호사다마다라는 말을 절대적으로 실감하게  해주던 날이었다.
다음 날이 일 년 중 제일 큰 대목인 어머니날이었던 것.
택시를 탔는데, 그 야바위 같은 현지인 기사는 내가 다 아는 길인데도 간 길을 또 가고 돌고 또 돌았다. 내 쪽에서 최대한의 친절한 부탁도 하고, 내 손목의 아픔이 점차 심각해지고 있다고 엄살 섞인 하소연을 해 봐도 완벽한 막무가내였고  지독한 마이동풍이었다.
그 기사의 직업철칙이란, 위급환자는  일단 차에 태우고 끌고 다닐 때까지 끌고 다니자는 주의(主義)인가 보았다.

그렇게 도착해서 만난 정형외과 현지인 의사는  X레이 필름을 보더니 뼈에 작은 금들이 많이 난 상태라면서 우선 독일병원에 입원을 하고 다음 날 아침 수술을 해야 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장이라면 모를까 내일 아침이라니!
의료보험을 못 갖춘 형편이라 값비싼 수술비 정도는 각오 했지만, 지치지 않고 쿡쿡 쑤시는 왼팔의 통증을 다음날까지 버티라는 얘기다.
나는 떼를 부리기 시작했다.
-당장 무료병원에 가야겠어요. 손목이 점점 더 아파와 내일까지 견딜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진료비를 접수창구에 치루고 나올 때까지 걱정스레 만류하던 P원장과 현지인 의사.
그들에게 여러 번에 걸쳐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나는 그 병원 앞에서  다시 택시를 탔다.

디오스 미오(나의 신이시여=세상에)!
현지인들도 좋은 사람이 많지만, 나쁜 사람 역시  꽤 많은 것 같다.
내가 나오기를 노렸는지, 택시에 오르니 반시간 전의 바로 그 택시기사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뗏목을 타고 급류에 휩쓸리는 느낌이 밀려들었다.
신호등이라는 이름의 노란 돛단배가 보이더니 금세 빨간 돛단배로 바뀌었다.
나는 잽싸게 택시에서 내렸다. 손에 미리 준비하고 있던 지폐라는 노를 택시의 차창 안으로 힘껏 던지는 일을 잊지 않고였다.
돛단배는 파랑으로 바꾸었다.
택시와는 반대방향을 향해 나는 시적시적 걸었다.
다행히도 무료 병원 알바레스 병원은 6블록 정도 밖에 안 떨어져 있었다.
팔에 건 붕대로 인해 손목은 점점 불편해지고 있었고 뭐라 표현키 어렵도록 아팠다.
나의 온 신경이 손목쪽으로 몰려가 걱정하고 둑을 쌓고 그러나 보았다.
나는 되도록 조금만 가 있으라고 신경에게 명령을 해댔다.
언제나 한 부분에만 신경을 쏟는 일은 내 사전에는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붕대를 벗고 차라리 손목을 잡고 얼굴 근처까지 들어 올리는 방식을 택했다.
새벽녘에 사고가 난 이후, P원장의 응급조처로 목에 붕대를 늘여 뜨려 팔을 걸고 다녔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일종의 서글픔을 억제하려고 애썼다.
(뭐가 잘못 됐을까. 오늘 일진이 왜 이 모양인가.)
내 심정이라는 것은 뛰지만 않았지 목이 조여드는 숨 가쁨을 하루 내내 느꼈을 것이다.

적성에는 안 맞는 일이었지만, 알바레스 병원 내에서 거주하며 가난한 환자들을 돌보기도 하고  봉사와 수도생활을 겸하고 있는 한국수녀님을 찾아 부탁하게 되었다.
진료 시간을 미리 앞당기거나  줄서는 일을 새치기 시키는 일은 불가능 하지만,  성의껏 진찰에 임해 달라는 부탁 정도는 해줄 수 있다고 하셨다.
나는 이미 서 있는 줄의 맨 끝에  스스럼없이 동참하게 되었다.

새로 만나게 된 현지인 정형외과 의사 역시 수술을 권장하였다.
다시  찍어 낸 X레이 필름을 보고난 결과였다.
수술은 당장 해 줄 수 있지만 하루 입원!
하루를 입원해 있을 정도로 사태가 편하고 한가하지 않음을 잘 인지하고 있던 나는 간곡히 내가 해내야 할 일들에 대해서 설명했고, 결국 의사는 마지못한 듯 져 주었다.
우선 깁스를 하고, 삼일 후에 X레이를 찍어 본 뒤 경과에 따라 다시 수술을 하자는 약속과 다짐을 받아내고 나서였다.

그때 알았다.
손 중의 하나가 불편할 경우 아무 일도 제대로 해낼 수 없다는 사실을.
그래도 해내야 하는 일들이었다.
많은 친구들이 내 대신 일을 도왔다.
그런데도 착하고 선량한 내 고객들은 인내심으로 잘 견뎌 주었다.
밤마다 이불깃에만 스쳐도 아프던 깁스 안의 손과 팔.
40일 후에 깁스를 자를 때까지 3일에 한 번씩 X레이를 찍어댔다.
15일이 지나자, 깁스의 길이를 훨씬 짧게 줄여 주기도 했다.
잘  접목이 되어 구태여 수술까지는 안해도 되겠다는 진단결과가 뒤따랐다.

그 무렵 절절이 깨달았다.
아르헨티나가 얼마나 살만한 나라인가를.
40일 동안 X레이만 10번 쯤 찍었어도 치료비나 진찰료를 한 푼도 내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
그게 바로 무료병원이 베푸는 혜택이자 배려였다.
파라과이 등 이웃나라에서 버스타고 건너와 치료하고 가는 나라가 바로 아르헨티나였다.
나는 담당의사에게 꽃다발도 선물했고, 약간의 촌지도 건넸다.
수녀님에게는 가난한 환자를 돌보는데 사용하시라고 적은 액수가 담긴 봉투를 하나 드렸다.
의료보험 비를 약간 냈던 셈으로 치부했다.

탈리(脫離)된 손목에 깁스를 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손이 왜 둘이 있어야 하는지, 손 하나만으로는 그 어떤 일에도 능률을 기대하지 못한다는 걸 모를 것이다.
수술을 안 했기 때문에 좋은 것보다, 수술을 안 해서 나쁜 일이 더 많았다.

내 손목은 깁스를 제거 했을 때 보니까 붙긴 붙었는데 약간 뼈가 튀어 나온 모양으로 변형된 모습이었다.
다친 부분은 또 다치기 마련이라는 의사의 충고에 따라 한동안은 왼 손에 조심과 조심을 다했었다.

그 때 병원에 자주 가야했고, 의사도 수시로 교대되어 바뀌는 시스템에 익숙해야 했지만, 뻐기거나 권위를 내세우던 의사는 결코 만나지 못했다.
봉사차원이라서 시청이 주는 무료병원 의사들의 봉급이 4,822페소라고 한다.
레지던트는 3,900페소 이며 간호사의 봉급은 3,265페소고, 사립병원 의사들의 초봉은 6792페소로 책정되어 있는 모양이다.
 대략 1천 달러나 그에 못 미치는 봉급수준인 것이다.
저명한 의사들일수록 일주일에 하루 이틀을 무료병원에서 의무감과 사명감을 어깨에 얹고  진료를 해내고 있다.
우리 한국교민들도 이름 석자 발표 되는 곳에만 후원이나 찬조를 할 게 아니라, 무료병원에 한층 많은 지원이 줄을 이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아르헨티나 의료진에게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을 확실히 접하게 된 계기였었다고 지금껏 절감하고 있다.
 


이 글을  써내고
여기에 올리면서 나는
마이클 무어가 미국 민간 의료 보험 조직의
부조리적 병폐의 이면을 폭로했던 영화
식코(Sicko)를 새삼 다시 보게 되었다.
한국어 자막으로 된 것도 검색하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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