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20일 화요일

쇠 소쿠리



맹하린의 생활단상


아르헨티나 조선일보

2001년 1월 31일

나는 아파트보다 주택을 좋아한다.
땅을 밟으며 사는 걸 즐겨서 그런 것 같다.
얼마 전 주택에서 주택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가게와 더 좀 가까운 곳을 원하다보니 그리 되었다.

이사하는 과정에서 이십여 년 동안 꾸리고 살아 온 짐덩이들을 얼마만큼 줄였는지에 대헤서는 굳이 생략하겠다.
많은 이들이 이 문제에 대해 누누이 다뤄 왔을 것이기에.
무소유 어쩌고 하면서들 말이다.
분명한 것은, 사람은 가끔씩 이사도 해봐야 되리라는 점이다.
정리될 것은 정리되고 과감히 버릴 것은 버려지는 계기(契機)를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아끼기는 했지만 잘 안 입던 옷들을 가난한 이들에게 보내며, 서양의 어느 유명 인물이 저절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한 가지 옷만을 고집하며 살아 왔다고 한다,
말할 것도 없이 최고급의 옷이었다.
상류사회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한 가지 옷만을 입는 그의 취향과 주관은 한층 돋보였을 뿐 아니라  아랫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으로까지 부각되었다.
모양이나 색상에 변함이라고는 없는 한 가지 옷만을 선호하면서 사치와는 담을 쌓고 생활해온 그에게는 주위의 칭송과 존경까지 금빛 망토처럼 걸쳐지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그는  죽고 나서 주위 사람들을 온통 당혹 속에 잠기게 만들었다.
그의 장롱 속엔  똑 같은 옷이 무수하게 걸려 있었던 것.
사람은 겉만 보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예화로 장식되어 남은 그.
중요한 것은 인간이 한 평생 살면서 꼭 필요한 것은 그다지 많은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사를 한 날,  그럭저럭 짐정리를 해내다가 전화를 받게 되었다.
하루 전에 이사를 떠났던 한국인 새댁이었다.
아래층 창고 앞에 쇠 소쿠리가 있는데 무거워서 못 버렸다고, 골칫덩어리를 놔두고 와서 너무 미안하다는 해명이었다.
나는 왠지 웃음이 터지려고 했지만 조용조용, 그리고  조심스레 웃었다.
다행히 새댁은 나더러 왜 웃는지를 묻지 않았고 나 역시 그걸 해명하지는 않았다.
새댁과 나 사이에 잠시 침묵이 오갔다.
나는 쇠 소쿠리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새댁은  쇠 소쿠리를 알기 때문에.
웃어서 안 될 이유 같은 건 없었다.
새댁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쇠 소쿠리가  내게는 신비롭고 감동적인 것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전화를 끊고 난 뒤 나는 서둘러 아래층의 창고 앞으로 다가갔다.
새댁이 말하던 창고 앞에는 녹슨 가마솥 하나가 비루먹은 짐승처럼 방치되어 있었다.
낡고 녹슬다 못해 그야말로 붉은 부스럼 딱지 투성이의 무쇠덩어리에 불과했다.
나는 전혀 무겁다는 생각도 없이 거의 가뿐하게 가마솥을 들고 이층으로 올라오게 되었다.
대략 30Kg 정도 되겠다 싶었는데 저울에 달아보니 25Kg이었다.
책들을 챙기던 아들과 안락의자에 앉아 티뷔를 보던 남편의 눈동자가 마치 그 무쇠 솥의 솥뚜껑만큼이나 동그랗고 커다래졌다.
웬만큼 쓸모가 있는 것들까지 많이 처분해 버린 이 마당에 어찌하여  괴물덩어리를 다시 끌어들였나 하는,  일단 깜깜해진 눈빛들이었다.
그나마 남편은 가마솥을 금방 알아보고 감탄을 아끼지 않았지만 아들은 달랐다.
-그래요. 예전에는 그렇게 대단한 쇠솥을 얹어 나무나 짚을 지피어 군불을 때고, 대가족의 밥을 해냈다는 정도는 알죠. 그런데 그 괴물을 이제 와서 어쩌시려고요?  더군다나 녹이 잔뜩 번져 마모(磨耗)의 지름길로 들어 선 것을.  쓸데없는 일을 시작하고 있다는 거 아시죠?
-기다려 줘. 서너 시간 후에나 제대로 된 말을 할 테니까.

부엌의 싱크대 서랍에서 쇠 수세미를 찾아다 신문지를 여러 겹 펴놓은 위에 가마솥을 앉히고 나는 물비누를 발라주며 연신 닦아내기 시작했다.
이미 들리고 맡아지고 보이고 있었다.
손 뻗을 때마다 묻어나던 녹이 점차 줄어들면서 잠결에 듣던
내 유년(幼年)의 솥뚜껑 여닫는 소리가
부뚜막 위에 얹힌 가마솥에서 퍼져 나오던 밥과 국과 여러 가지 음식 냄새가
볏짚이 활활 타오르던 모습이.
무쇠 솥을 닦는 나를 지켜보던 남편이 감회에 젖은 음성으로 말했다.
-조상의 슬기가 느껴지던 만능의 솥이었지. 물도 데워주고, 고구마도 쪄주고, 떡과 식혜와 엿까지 고아주던, 군불을 땔 때까지도 묵묵하게 참아내던 솥이었어.

우리 이민자의 뱃짐에 실려와 골동품처럼, 조국의 긍지처럼 다뤄지다가 어느 날 녹이 슬기 시작하자 창고 앞에 버려지게 된 가마솥 하나를 닦아내며 나는 참 많은 상념들이 밀려오고 밀려감을 내내 감지하고 있었다.
솥은 머잖아  어느 정도 말끔해졌고 콩기름을 발라주자  언제 그랬었냐는  듯 멀쩡하게 반지르르 생기까지  돌고 있었다.
모국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여 지구의 끝인 아르헨티나 땅까지 오게 된 나보다 더 일찍 도착 했을 나의 이민선배 가마솥.
나는 그를 앉은뱅이 원탁에 올려놓고 즐거이 바라보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아스라이 솥뚜껑 여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음식내음이 풍겨오고
짚단이 계속 타오르는 불길까지도 눈에 잡히고 있다.

'순간온수기'의 낡은 부속품 정도로나 여겼었는데 어떻게 가마솥을 알아 봤었느냐고 내 전화에 탄성을 지르던 새댁과,  지난 세월의 한 자락 같은 무쇠 솥 따위를 닦는 시간에 글 쓰는 일에나 정진하기를 바라는 아들에게서 심한 세대차이와 격세지감까지 동시에 껴안아야 했지만,  나는 벌써부터 격양가(擊壤歌)를 흥얼대게 된다.
더불어  새로 이사한 집이 더할나위 없이  마음에 들기 시작한다.
가마솥을 지그시 바라보는 순간, 마음 가득 비눗방울인지 물수제비인지가 통통통 뜬다.
가마솥 안에 낡고 묵은 기억들을 모두 앉히고 이제는 흔쾌한 불길만을 지피리라.
내가 평소 가장 고민하는 문제는 현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
바로 문학이 문제다.
다른 문제는 문제도 아닌 문제일 따름인 것이다.

하필이면 이때,  냄비를 두들기는 이들의 소요(騷擾)가 한길을 떠들썩하게 북적이며 휩쓸려 지나가고 있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고달프고 억울한 마음을 어디다 풀 길 없어 틈만 나면 냄비뚜껑을 두들기며 시위를 할지라도 각성하고 잘 살아보자는 뜻으로 알고 고맙고 진지하게 살아 내리라 결심을 다지고 다지게 된다.
나는 아직도 예전 그대로다.
세월이 비켜 간 건 아니고 여일(如一)한 신념을 잃지 않았다는 의미다.
이 가슴 저리는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도 사람들은 저토록 바쁘다.

중국 속담이 교훈되어 맘에 뿌리를 내리는 아침나절이다.

인생이라는 커다란 가게에 들어가서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가져가라
다만 대가를  지불할 준비를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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