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27일 화요일

열 개의 반지(斑指)






         맹하린


어제 오후 7시,  나는 H회관에 갔다.
동문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동문회에 가면 글 소재가 될 얘기들을 참 많이 듣는다.
장사 얘기, 교회 얘기, 자녀들 얘기.
특히 한국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강도사건은 매달 부상(浮上)하듯 떠오른다.
아베쟈네다에 가게를 몇 개나 소유한 모(某)여인은, 집을 소개하러 온 한국인 부동산 중개인이 바쁜 이유로 떠난 순간,  같이 왔던 현지인 커플에게 매까지 맞으며 가게 하나의 쟈베(3년에 한 번씩 지불받는 권리금이지만 다시 반환하지 않음 )로 받아둔 15만 달러를 고스란히 강탈당했다는 얘기다.
매우 걱정스러운 문제다.
한국 사람은 털 때마다 거금이 나온다는 인식을 강도들에게 매번 심어주게 되는, 역사처럼 한결같은 맥을 이어오는 우리 한국인들의  지독한 허술함.
아무리 그래도 그런 얘기들을 듣는 족족 글로 모두 풀어내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부담스러운 면도 많아, 취할 건 취하고  흘려보내야 할 건 흘려듣는다.

언젠가는 두드리게 되리라 예상은 했지만, 되도록 건드리고 싶지 않은 소재가 하나 있었다.
동문회에 다녀올 때마다 필히 묵상하게 되는 일종의 숙제나 메시지와 흡사한 소재다.
잘못 건드리게 되면 일종의 비난으로 비칠 수도 있는 사안(私案)이라서  밀쳐 뒀었으나 오늘은 부득불 적게 된다.

화교(華僑)지만, 한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을 뿐 아니라, 대학도 한국에서 마쳤기 때문에 동문이 된 쳉씨는 아르헨티나에서 한국인 상대의 중화요리점을 가장 최초로 열었던 덕택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튼튼한 기반을 구축하였다.
몇 년 전 환갑도 안 된 나이에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동창회원의 수가 적다보니까 오래 전부터 부부동반을 허용하게 되었고,  그런 연유로 왕여인은 쳉씨가 세상을 떠난 현재에 이르기까지,  개근상을 타야할 정도로 참석에 열성을 보여 왔다.
그녀는 시내 곳곳에 여러 채의 주택을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일 년에 대만을 두어 번 정도 왕래하는가 하면, 가끔씩 캐나다의 아들한테 다녀오기도 한다.
비록 아끼느라 동창회에 오고 갈 때는 버스를 자가용처럼 이용하지만,  그녀의 손가락은 열 개나 되는 반지가 모양과 색깔과 종류를 달리 한 채 주르르르르르르르르륵 껴 있다.
환타시아(모조품)가 아니라 모두 진짜로된  보석반지들이다.

어젯밤 따라 유난히들 그녀의 반지에 대한 질문이 집중적으로 많이 쏟아졌다.
아마 나만 잠잠히 듣고 있었을 것이다.
나도 한 마디 할 수는 있었지만, 청문회 성격이 엿보여 굳이 인내한 셈이다.
"불편하지 않아요?"
"아니, 편해요."
"길이나 버스에서 위험할 것 같아요."
"안 위험해요. 가짜라고 알아. 그래서 더 버스를 타요."
"밤에는 빼 놓아요?"
"한 번도 안 뺐어요. 7년 동안이나 안 뺐어요."
"7년을 밤낮으로요?"
"그럼요. 이제 내 피부 같이 됐어요. 이제 내 살이나 마찬가지야."
"왜 안 빼놓는 건데요? 중국식으로 하면 복을 받는,  무슨 그런 거예요?"
"그런 건 없어. 빼놓으면 허전 해. 많이 불편해. 잠이 안 와."
그녀는 말을 많이 할 때나 다급한 표현을 해야 할 때면 존댓말이 증발한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반말 투성이가 되는 것이다.

그들이 중화요리점을 할 때, 문협여인들 몇 명이 그 식당에서 모인 적이 있었다.
어느 토요일 정오 무렵이었다.
문협의 S여사는 하여간에. 웃음소리가 끝내준다.
성당의 미사시간 중 강론을 듣노라면 S여사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자주 듣게 된다.
신부님의 강론에  아멘!하고 장단을 맞추는 역할을 떠맡은 것 같은 웃음이다.
그녀가 왼쪽에 앉아 있는지, 오른쪽에 앉아 있는지 , 또는 바로 뒤인지 또는 한참 뒤인지의 감을 일부러 안 돌아 보고도 쉽사리 알아 챌 수 있을 정도가 된다.
왜냐하면 나는 항상 앞에서 세번 째의 자리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사람들은 참 이상한 구석이 많다.
항상 같은 자리를 선호한다.
S여사처럼 여기저기 앉는 타입은 미사시간에 허둥지둥 나타나는 형에나 가능한 일이다.

그날, 그 식당에서 우리 다섯 사람은 마냥 재미있었고 특히 S여사의 탕탕한 웃음이 가장 요란뻑적지근했다.
다행인지 식당 안엔 우리 일행만 있었다.
그런데 왕여인이 그만 성깔이 나버렸다.
그녀 특유의 반말 투성이가 시작된 것이다.
열 개의 반지가 껴있는 두 손을 휘저으며 우리 일행이 앉아 있는 식탁을 향해 언성을 한껏 높이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
-시끄럽다 해! 조용 해. 귀 아파, 그만 가라고 한다 해?
왕여인의 그러한 말투가 너무 재미 있었지만 이내 조심스러워우리는 키득키득 웃었고,  S여사는 도리어 더 크게 웃어댔다.

동문회가 끝날 무렵, 왕여인은 이미 준비해온 멜라닌 도시락 서너 개를 가방에서 꺼내어 식탁에 남은 음식들을 담기 시작했다.
고기는 고기끼리.
나물은 나물끼리.
밑반찬은 밑반찬끼리.
어차피 식당에서 재탕시켜 재생하는 음식은 아닐 터였다.
식당들이 음식을 재탕한다는 걸 못마땅 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겐, 그러는  왕여인의 그런 행동은 한 몫 단단히 거드는 셈이기도 하다.
왕여인은 자주 다른 사람이 옆에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녀는 스스로를 아끼고 방어(防禦)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면으로는  자신을 고통 속으로 방치(放置)하는 것처럼도 비치게 된다.

이미 참을 대로 참다가 한마디씩  질문을 보내는 회원들도 몇달에 한 번씩은  돌출한다.
바로 어제와 같은 날이다.
"집으로 가져가면 변하지 않아요?"
"아니, 냉동실에 넣어.  조금씩 얼음이 풀리면 먹어 해. 한국음식 최고야."
그 대답이 필요했다는 듯 너도나도 이윽고 시치미를 떼기에 이르른다.
그녀와 가까이 앉게 되면 나는 항상 그녀의 반찬수거를 도와 준다.
어젯밤 나는 약간 늦게 도착되어 왕여인과 좀 떨어져 앉았었다.
그녀를 도울 때,  나는 자신이 약간 겸허로워지는 것을 느낀다.
그건 누군가를 다독이고 있다는 따사로운 감정 같은 것과 닮았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못 배울 지적이 있다고 생각된다.
지적해서는 안 되지 싶은데 지적하게 되는 일과
지적해야 하는데 지적하지 못하는 일이다.
왕여인의 저렇기도 하고 이렇기도 한 유별난 모습은
지적하고 싶지도 지적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왕여인에게 있어 그러저러한 행동은 일종의 아픔이기 때문이다.
그건 아픔 맞다.
재산은 있는 아픔.

인간이 행하기 어려운 일 두 가지를 들라면 그렇다던가.
다른 사람이 내게 고통을 안겼을 때 망각(忘却)하는 일과
나의 재산을 남을 위해 쓰는 일이라고들 일컽는다.
둘 다 쉬운 일이라고 보기에는 지난(至難)한 과제다.
왕여인은 여전히 그리 살아갈 것이다.
현실이란 사람에 따라서는 환상적(幻想的)인 덫이기도 하다.

탈무드의 <은칠한 거울>이라는 예화가 절절 안겨오는 오후다.

'한 제자가 랍비에게 물었다
"랍비님. 가난한 사람들은 오히려 남을 돕는데
왜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지 않습니까?"
랍비가 말했다.
"창밖을 보게. 무엇이 보이는가?"
"예. 아이의 손을 잡고 가는 사람과 자동차가 보입니다."
"다음엔 벽에 걸린 거울을 보게."
"예. 제 얼굴 밖에 아무 것도 안 보입니다."
"그렇지? 창이나 거울이나 모두 유리로 만들었다네.
하지만 유리에 은칠을 얇게라도 발라 주면 자기 얼굴 밖에 볼 수가 없기 때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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