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1일 목요일
반 가마의 쌀
맹하린
한 면(面)에 하나씩만 허용된 양조장을 운영하던 우리 집은 논과 밭도 적지 않았고, 해가 갈수록 토지가 늘어나는 추세에 있었다.
5.16혁명이 터지고 유신시절이 되자, 기존의 법들은 가차 없이 개혁되었다.
쌀로 만들던 막걸리를 잡곡으로 대체하도록 강력한 지시가 내렸고, 면(面) 단위이던 구역을 통합하는 방식으로 압력이 가해졌다.
쌀로 만들 때는 하루에 쌀이 두세 가마씩 술밥을 찌는데 사용되었다.
우리 논에서 수확되는 쌀로 충분하게 공급이 가능했지만, 농부들이 급히 돈이 필요하다고 품에 안거나 지게나 등에 지고 오는 쌀도 기꺼이 구입하였다.
이웃마을이나 도시까지 들고 나가야 하는 농부들의 수고를 덜어 주려는 의도였다고 본다.
어느 겨울의 초저녁,
쌀 두가마를 그런 식으로 사들였는데, 미처 곡간에 넣지 못하고 양조장 입구에 놔뒀었다.
동네사람 전체를 믿었던 시절이라 미닫이로 된 철문은 있었지만, 따로 자물쇠를 잠그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새벽에 자리에서 일어난 할머니는 세수하려고 양조장 안에 있는 작두물 근처로 다가가다가 쌀 한 가마가 없어진 걸 알아채게 되었다.
그럴 경우 할머니는 기술자나 일꾼이나 가족들을 깨우고 법석을 일으키는 분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새벽에 일어났고, 할머니와 벗해 드리기를 좋아하던 나만 그 광경을 고스란히 지켜보게 되었다.
그때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그런데 밤사이에 생쥐가 가마니를 쏠아서 매우 적은 양의 쌀이 바닥에 쏟아져 있는 걸 내가 먼저 발견하게 되었다.
확실히 생쥐의 짓인 게 틀림없는 게, 쏠아도 아주 조금만 쏠아낸 자국이 남아 있던 또 하나의 가마니 밑에도 나있었다.
하지만 쌀은 그 주위에만 흩어져 있는 게 아니었다.
할머니와 나는 양조장의 출입문을 옆으로 밀고 밖으로 나갔다.
밤새 눈이 많이도 아니고 서리처럼 살짝 내렸는데, 쌀은 그 위로 매우 가는 띠처럼 무늬를 만들며 쌀이 떠나 간 곳과 할머니와 내가 가봐야 할 장소를 제시해 주고 있었다.
일교차가 큰 계절이었다.
해가 어느새 밝아오고 있었는 데도 기온은 높아질 기미가 없었다.
어떤 집들은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할머니와 나는 그 띠를 다라 300미터쯤 큰 길을 걸었고, 곧 이어 야산 옆으로 난 길의 중간 쯤에 접어들었다.
쌀 알갱이들은 종골이 오빠 네 사립문을 사이에 두고 다시 연결되어 있었다
종골이 오빠는 이십 대의 청년이었고, 나는 동네 청년들 누구나를 오빠라고 부르진 않았다.
마땅한 호칭을 못 찾아 여기서만 그렇게 부르고 있을 뿐이다.
홀어머니와 함께 남의 집 삯일이나 하면서 연명하는 가정이었다.
대부분의 시골집이 그러하듯 사립으로 된 대문이 있고 마당도 있고 작은 초가집이 옴팍하게 들어앉은 그런 집이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종골이네라는 호칭보다 옴팍 집이라고 더 많이 불렀다.
할머니는 나를 사립문 밖에 서 있도록 했다.
말씀은 따로 안하셨지만, 종골이 오빠나 그 어머니에게서 나에 대한 수치심을 배제하기 위해 그랬었다고 추정된다.
어떤 얘기가 오고 갔는지 전혀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일의 과정이나 결과에 대해서 전혀 모를 수밖에 없었다.
돌아오면서 할머니의 이렇다 할 설명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내 쪽에서 자세히 알려고도 안했고 구태여 묻지도 않았기에 더 모른다.
아침나절에, 마침 겨울방학이라 친구집에 가려고 집을 나서는데 반 가마의 쌀을 지고 종골이 오빠가 나타났다.
마침 할머니는 그 자리에 없었다.
기술자 아저씨들이 받아서 내리는 걸 도왔다.
종골이 오빠가 주눅 든 사람처럼 웅얼대며 말했다.
"아침 일찍 큰 아주머니한테서 쌀값을 미리 받았어요. 반 가마 값이었습니다."
나는 종골이 오빠네 대문 밖에서 듣지 못했던 할머니의 말이 그제야 귀에 들어오는 느낌 같은 게 안겨왔다.
-쌀은 반가마만 보내게. 내가 미리 돈을 땡겨 준 걸로 하고. 형편이 그러니 이해하겠네. 우리 이 일을 죽을 때까지 함구하세나.
남아 있던 쌀가마는 이미 할머니에 의해 곳간에 옮겨졌고, 쌀가마가 있던 자리와 앞마당에 긴 줄을 이루었던 쌀 알갱이들은 종골이 오빠네서 돌아오자마자 할머니가 흔적을 쓸어내어 이미 깨끗한 상태였다.
한 달이나 지났을까.
종골이 오빠네가 서울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된 건.
그 사실은 할머니와 나만 알고 있었는데
가족이나 기술자들이나 일군들도 모르는 일이었는데
나는 그 사실을 이제야 털어 놓고 있는데.
그때 할머니는 혼자 중얼거리셨다.
-어서 잊으라고 그동안 논밭 일에 두 모자간을 자주 불렀던 것을, 차라리 잘된 일이다. 흘흘 털고 잘들 살아야 할 텐데.
원래 혼잣말을 잘 안 하시는데 나 들으라고 그러셨을 것도 같다.
혹은 종골이 오빠 네를 향한 작은 염원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살면서 반 가마의 쌀을 가끔 묵상한다.
내가 이렇게나마 글쟁이가 된 건 내가 태어난 땅의 아름다운 자연들의 영향이 가장 컸겠지만, 반 가마의 쌀과 같은 사건들이 내가 그냥 세파에 머물지 않도록 작고 큰 묵상을 안겨서도 더 그러하게 됐으리라 여겨진다.
때때로 한국에서 동생이 전화를 해올 때, 어린 시절의 추억들을 꺼내면 동생은 놀라기만 하는 게 아니라 질책까지 해내고 그런다.
"언니는 무슨 별의별 걸 다 기억하고 그러냐? "
나는 내 속을 상하게 했던 일은 쉽게 잊는다.
그러나 반가마의 쌀 같은 일은 결코 못 잊는 편이다.
굵직굵직한 사건을 다루기보다 지난 얘기를 소재로 삼는 일이 더 힘겨운 건 왜일까.
마음 한켠에 아픔이 껴들어 더 그러한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할머니가 그립다.
휴가철이라선지 작금의 아르헨티나는 빈 아파트를 터는 도둑들이 극성이라고 한다.
인접국 전문 빈집털이들이 원정을 왔다는 소문이다.
벌써 시작된 지 몇 십 년도 더 끌어온, 한국인 집만, 그것도 새벽에 터는 강도들의 작태는 잠잠한가 하면 다시 고개를 들고 도무지 멈추지를 못한다.
요즘엔 고급 승용차로 앞과 뒤의 간격을 밀착하고 좁힌 뒤, 승용차와 귀중품과 옷까지 털어 가는 현지인 이십 대 젊은이들이 날뛰는 모양이다.
특별히 한국인 현지인 가리지 않고 표적이 되고 있다고 한다.
점점 대중화 되고 있는 마약이 주범 역할을 하는 게 아닌가 싶어진다.
신고해 봐야 이렇다 할 성과도 없고, 오가라 성가신 일 투성이니까 어쩔 수없이 인내하고 감수하는 피해자들이 늘어나는 세태(世態)와 형편에 있다.
참으로 많은 발전을 거듭해온 첨단문화의 세상이 되었지만, 범죄 역시 그 첨예로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를 않으려는 상황인 모양이다.
그 어떤 떳떳함이라도 지닌 것처럼 매우 완강하고 저돌적인 범죄들이다.
우리가 살아 가는 세상은 갈수록 우후죽순처럼 들쑥날쑥 속출되는 사건의 연속이다.
더 겸허롭고 더 조심하며 살아야 할 것만 같은 예감이 연거푸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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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참 아름다운 기억이네요. 할머님께서 넉넉하고 섬세하고 배려깊은 분 이셨던 듯 합니다. 가슴으로 기억되는...
네. 말씀이 토옹 없으셨어요.
그래서 제가 가장 많이, 그리고 그립게 기억하는 말은 내 새끼야, 아이고 우리 강아지였죠.
할머니는 저희에게 그 이상의 말이 필요 없으셨어요. 할머니처럼 말을 좀 줄이고 싶은데 잘 안되고 있어요. 보셨죠? 지금도~~~ㅎㅎ
글도 많이 압축하고 싶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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