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22일 목요일
한 생(生)의 통과
맹하린
그동안 결코 건드리고 싶지 않았던 세월의 켜였지만 이제 단풍으로 물들었던 시절을 살몃 들춰본다.
2007년 8월 말경에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8년 동안 중풍을 앓아내고 있었다.
아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 생화학과 졸업반인 5학년이었다.
약학과를 겸해서 공부하고 있었다.
8년 내내 남편의 식사는
이른 아침엔 내가 챙겨주고
이른 점심은 아들이 챙기고
이른 저녁은 다시 내가 챙겨 내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아들은 이른 점심을 챙겨 주고 서둘러 대학에 등교했다가 저녁때에야 돌아왔다.
어느 날, 이상하게 좌불안석이 되며 불안감까지 치밀더니 자꾸만 집에 다녀오고 싶어지고 있었다.
어쩔 수없이 가게의 유리문에 15분 후에 돌아온다는 안내문을 붙였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갔다.
아들은 이미 학교로 떠난 시간이었다.
대문을 열자마자 남편이 느낌표와 물음표까지 붙여가며 아들을 부르는 소리가 집안 가득 메아리치고 있었다. 거의 절규 수준이었다.
-다니야!!!!!!
-다니엘??????
나는 안방을 향해 마구 뛰었다.
그는 말이 좀 어둔했지만 듣거나 말하는 데엔 이렇다 할 지장이라고는 없었다.
아들이 작고 네모난 한국식 밥상을 침대 위의 그에게 올려주고 떠나면 밥을 다 먹고 난 남편이 그릇을 하나 씩 침대와 같은 높이의 교자상에 내려놓고 작고 네모난 밥상은 맨 나중에 원탁 옆의 바닥에 내려놓도록 이미 순서라거나 질서가 잡혀져 가고 있었다.
아들은 시험 때라, 바쁜 마음에 수저를 놓는 일을 잊었던 모양이다.
중풍이라는 병은 사람의 뇌를 참 단순하게 바꾼다.
아들이 학교에 간 사실은 알지만, 갔으니까 안 되겠다가 아니라, 부르면 그래도 와 줄 거라고 생각하는 구조 정도가 된다.
그 뒤론 원탁에 비상수저 하나 더 놔두어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진 않았다.
그럴 때는 마치 시간이 어긋나는 게 아니고 재편성되기도 한다는 느낌으로 남는다.
새삼 고맙다.
8년을 그렇게 산뜻하게 웃으며 잘 지나올 수 있었던 일.
남편은 침대를 딛고 일어나 벽마다 붙잡으며 화장실을 드나들었다.
없는 사람만 자존심이 센 게 아니고 아픈 사람도 자존심이 세다는 걸 남편은 매번 증명하며 살아 내고 있었다. 그래서 누가 붙잡아 주는 걸 원치 않았다. (대단했던 황소고집!)
어떤 날은 내가 방안에 있을 때 넘어지는 소리가 나서 달려가 보면 그는 뒤로 넘어져 있고 슬리퍼 한 짝은 변기 속에 들어가 있기도 했다.
그럴 때 넘치는 건 장난기 밖에 없는 나는 슛, 골인입니다를 중계방송의 아나운서처럼 외치며 탄복을 곁들였다.
-당신은 참 재주가 훌륭해요. 어떻게 넘어지는 순간, 변기라는 골대에 슬리퍼를 넣는 골인을 해낼 수가 있는지 바보 같은 내가 생각해도 참 대단, 대단하심!
그를 일으키며 그렇게 말하면 그는 자꾸만 풀풀 웃어댔었다.
운동부족으로 체중이 줄어든 상태였지만, 일어나려는 의지를 전혀 보여 줄 수없는 그는 천근처럼 무거웠다.
안방이 좀 넓어서, 의자의 쿳션을 떼어낸 모양의 바퀴가 넷이나 달린 지팡이를 사주며 날마다 가족이 없을 때 운동 삼아 왔다갔다 하라고 일러도 만사를 귀찮게 생각했었다.
죠깅운동장에 가서 휠체어를 밀고 다니면 운동이 좀 될텐데도 그것조차 짜증을 잘 냈다.
새벽부터 휠체어에 탄 그를 밀고 공원가는 건 내가 더 힘들었는데 말이다.
그렇게도 활동적이던 그였는데...
그가 성할 땐, 일 년 가야 감기 한 번 안 걸리는 건강의 표본이었다.
그는 말썽쟁이가 아닌 것처럼 말썽쟁이였다.
몇 번인가 이혼을 생각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만약에, 단점이 하나만 되었다면 그럴 수도 있었겠는데.
그런데 그에게는 단점이 댓 개쯤 되었다.
나이도 들었지, 가진 재산이라고는 우리가 극복할 수 있을만큼만 거두고 이민 올 때 자기 형제들에게 모두 다 나눠주고 왔지, 등등이었다.
나는 내 어렸을 때의 별명(맹꽁이)을 너무나 아껴 왔던 사람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혼하려고 내세우는 필요충분조건마다 내게는 결코 이혼하면 안 되는 필요불충분조건으로 뒤집어버리는 습성이 있었다.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잘 한 일을 꼽으라면 아마 이혼을 안 해낸 점이었을 것이다.
단점이 많은 사람을 내친다면 내 성격에 안 맞는 일을 저질렀다는 죄책감에 잠겨, 머잖아 괴로워 죽을 것 같은 심정이 될게 뻔 한 일이라서 더 그랬을 것이다.
화장실에 늦게 도착되어 생긴 여러 대청소 사건으로 인하여 내 지인들은 그를 요양원에 맡기라는 권유를 많이 했다.
나와 아들은 절대 반대였다.
환자일수록 가족과 함께 지내야 한다는 주의(主義)였으므로.
남편이 홀연히 떠나자 내 옷은 문제가 없었는데, 아들의 상복(喪服)이 문제였다.
회색과 베이지 색 양복은 하나 씩 있었지만 검정이 없었다.
시실 남편의 옷은 아들에게 너무 컸다.
당장 기성복을 사 입어야 한다고 해도 아들은 어디서 빌려달라고만 했다.
한두 번 입기 위해 필요 없는 지출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공교롭게도 아들의 친구들 거의 미국으로 떠났고, 서너 명 남은 친구들이라야 남편이 장지로 떠날 때, 검정 양복차림으로 운구를 도맡아야 했던 것이다.
급기야는 가게로 청소하러 오는 볼리비아인 그라시엘라가 일하러 왔다가, 그 장면을 조심스레 지켜봤고, 몇 달 전 결혼할 때 입었던 자기 신랑의 양복을 빌려주면 어떻겠는가고 나왔다.
나를 앞지르며 아들이 잽싸게 대답을 건넸다.
-에스 우나 부에나 이데아(좋은 착상이군요)!
나도 꼴통 축에 들지만, 아들은 나보다 한 수 더 뜨는 꼴통이라고 해야만 될 것 같은 상황이었다.
8년이 참 힘들기도 힘들었던 모양이다.
나는 언제나 웃으며 지냈는 데도 말이다.
요즘 성당이나 모임에 가면 사람들이 깜짝 놀란다.
나에게서 점점 예전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는 얘기다.
항상 장난기 많은 나는 그럴 때 꼭 한 마디 튕긴다.
" 나, 연애해요."
"어머나? 상대가 누군데?"
"하하. 예수 그리스도라는 상대죠."
남편의 1주기가 닥쳐오자, 나는 아들에게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양복을 꼭 사 입었으면 한다는 언질을 건넸었다.
웬일인지 시원시원 대답하더라니!
아들은 현지인 양복점에서 가장 값이 싼 양복을 100페소(당시엔 25달러.) 가격으로 사들고 와 나를 또 박장대소 하하하 손뼉 치며 웃게 만들었다.
구닥다리도 그런 구닥다리 양복은 첨 보았다.
그런데 내게 공주병이 있듯이 아들에게는 왕자병이 있었다.
(나는 이제라도 그 공주병을 왕비병으로 바꾸고 싶은데 참 그게 쉽지가 않다.)
-상관 없어요. 그 얼굴이 그 얼굴인데. 그리고 내 얼굴은 유행이 좀 지난 옷을 입어도 꽤나 봐 줄만 하지 않던가요?
나는 내 형편이 부자라는 자부심을 갖고 사는데, 아들은 우리 가족이 항상 절약 속에서 지내야 된다고 각오를 다져왔나 보았다.
아들을 그렇게 만 든 건 순전히 내 잘못이라는 자책감이 꽤 크다.
머리도 나처럼 자기가 자르고, 외식도 싫어하고, 가장(家長)이 중풍으로 자주 일을 저질렀을 때조차 자존심 안 상하게 하려고 , 수치스러워 죽을상을 하며 침대의 한편에 앉아서 가족이 도리어 달래 주기를 바라던 그에게 잘했다고, 괜찮다고, 어머니와 나는 아버지의 속이 얼마나 편해졌을까, 그렇게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고 있다고. 버릴 건 버릴 때 버려야 하는 거라고.
아픈 사람 성가셔 하면 얼마나 큰 죄인가.
아프다고 정떨어지면 가족이기나 한 건가.
울음도 뚝 자취를 감췄던 나날들.
나는 차라리 요즘에 더 잘 운다.
파란 했던 건 아니고 뜯어진 실밥 뜯듯이 단단한 껍질을 쪼아내던, 그야말로
한 생의 통과였다.
그렇지만 나는 8년이라는 세월을 낭비했었다는 관념 같은 건 없다.
고생스러웠다는 느낌도 없다.
강물처럼 넉넉했고 들판처럼 풍족했고 이별은 숭고했다고 본다.
나는 아침저녁으로 그에게 여군(女軍)처럼 경례(敬禮)를 바치며 충성을 외치던, 나이를 거꾸로 먹은 개구장이였다.
아름답고 찬란하다고 여기고 싶었던 나의 고달픔 사이를 비집고 긍정의 씨앗이 뿌려지던 날들.
꽃과 잎들을 나무들도 보낼 때가 되면 보낸다.
나는 현재 손끝 하나 걸릴 게 없다.
지나온 세월과 화해하고 새로운 세상과 악수한 상태의 나다.
특별한 날들이 아니라 일상(日常) 자체가 평화와 고요로 다독여질 그런 날들을 폭풍을 견뎌낸 나무처럼 살아내겠다.
홀연 깨달음이 다가오던 담담한 이해.
고통을 고통스럽지 않게 견딘다는 것은 견뎌야할 환호와 다름 아닌 것.
이윽고 그 무어라 표현할 수없는 겸허로운 감성들이 온 몸 가득 채워지고 있다.
오늘 아침 산책하면서 남편의 얼굴이 모든 나무마다 모든 잎사귀마다 어른거리고 있었다.
나는 요즘 말썽쟁이였던 남편이 그립다.
그렇게라도 살아 있을 때가 든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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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같은 가장의 한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수치심 창피함을 그렇게 지워주시고 감싸주셨으니...
길지는 않지만 불편하신 부모님을 옆에서 돌봐드리다 보니 그게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조금씩 깨닫습니다.
우리 인생이 가장 중요하게 지켜야 할 것은 어떤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에 대처할만한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저희는 더 웃고 더 밝게 지내는 변화를 선택했던 거죠. 정신이란 건 그렇더군요.
더럽거나 냄새가 안 난다고 맘 먹으니 그리 되더라능~~~
더 기쁜 날들 맞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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