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29일 일요일

내 마음의 텃밭



맹하린의 생활 산책

아르헨티나 한국일보

1996년 9월 7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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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 항아리 판매!
좋은 값에 드립니다.
Asamblea oooo번지.




일간신문을 뒤적이다가 위와 같은 광고를 보고 서둘러 항아리를 보러 갔다.
중간 크기는 50달러, 약간 큰 건 100달러였다.
유약을 잘 발라서인지, 자르르 윤기가 흐르는 게 단박에 소유욕을 불러 일으켰다.
암팡지게 야무지고 예쁘긴 했으나 지나친 가격이라는 단정이 뒤따르게 되어 아쉽지만 포기했고, 이내 마음도 바꿨다.
아무리 배를 타고 지구를 반 바퀴 돌아서 옮겨 놨다지만 너무 터무니없는 값이었다.
밖으로 나오는데 마당 한쪽에 어쩌면 눈에 익은 듯도 싶고,  약간은 낯이 선 것도 같은 풀잎들이 꽃샘추위에도 연두 빛으로 밭을 이루어 파릇파릇 보기에 탐스러웠다.
화초라면 잡초까지도 사랑스럽게 여기는 나는 몇 포기 얻을 마음에 발길을 다시 집안을 향해 돌리게 되었다.
그댁의 따님인 소녀가 마침 외출하려다가 나와 맞닥뜨렸다.
"저어!  이 꽃모종의 이름이 뭔지 아세요?"
"아, 그거요? 내 엄마가 그러는데 질경이라고 해요."
"질경이? 한국의 시골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그 질경이 말인가요?"
"나는 잘 몰라요. 내 엄마가 더 잘 알아요. 엄마한테 말해요."
한국말이 서툴었지만 소녀는 또박또박 대답을 잘했다.
때마침 따라 나온 소녀의 엄마에게서 나는 질경이 몇 포기를 선뜻 얻을 수 있었다.
"여름에 한국 나갔다가 친구한테서 이 질경이 씨앗을 얻었어요. 화초가 아니고 나물이나 약용으로 쓰인다고 했어요. 있잖아요. 질경이처럼 억세다는 풀. 그런 뜻을 갖고 있어선지 나물을 해 먹으면 몸에 좋다고  해요. 씨를 차처럼 달여 먹으면 신장염에 좋다나 봐요."

비록 항아리는 값이 안 맞아 못 샀지만 그때 몇 포기 얻어온 질경이가 금세 포기를 늘여나가고 씨까지 맺어 차츰차츰 번져나가다가 모판을 연상케 하는 강렬한 색조를 이루게 됐다.
나는 그걸 나물이나 약용으로 사용하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틈날 때마다 바라보기도 아까워하며 환희작작한다.
진초록의 그 강렬한 색채도 색채거니와, 강한 생명을 지닌 번식력 또한 나를 탄복시키기에 충분했다.
내가 어릴 땐 질경이가 피워 올리는 기다란 줄기가 꽃이라는 생각은 상상도 못했었는지도 모른다.
기다란 기둥을 갖고 있는 풀이라고만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 기둥을 따서 길게 땋아 여러 가지 꽃들을 곁들여 머리에 얹는 화관을 만들어 놀던 소꿉놀이 기억이 새롭다.

나는 이윽고 어린 시절의 나로 잠시 돌아가 보기도 한다.
내 마음을 가장 감동시켰던 건 강과 산과 들이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특히 자운영이 심겨진 논들에게서 언제나  감격적인 반응이 앞섰다.
자운영 꽃들이 파르라니 꽃을 피우고 난  한참 후엔 소를 몰아 쟁기로 땅을 뒤엎는다.
그렇게 되면 그 어떤 비료보다 월등한 생장을 촉진하는 거름구실을 한다는 사실은  훨씬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 보라와 자주와 하양이 섞인 자운영 꽃들의 차갑고 깔끔하면서 슬프게 화려한 색조는 내 기억의 터전에 그립고 그립게 만개해서 때때로 보랏빛 강을 이루고 자줏빛 들판을 펼쳐져 왔을 것이다.

지금에야 걱정도 내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지만, 내가 머물고 있는 이 복잡한 세상을 벗어나 다시 그 어린 시절로 돌아가 살고 싶을 때가 내 생의 여정 중에 여러 번 있었던 것 같다.
많은 것을 획득하려고도 하지 않았는데 많은 소중한 것을 잃게 되던 날들도 분명 있었다.
어느 시인이 말했듯이 인생을 놓치는 방식이 곧 인생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껏  잃은 것보다는  더 많은 귀한 것을 간직하고 있다고  자긍한다.
하물며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보자면  무소유중의 무소유라고 할 수 있지만, 나 스스로 판단하기엔 부자 중의 부자가 바로 나인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신에게서 받은 게 너무도 많고 흡족하다고  언제나 감사하는 성격을 간직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그때는 아무 걱정도 몰랐던 게다.
무엇보다 고요한 나날들이었으니까.
고국을 떠나와 사니까 하찮게 여기던 질경이조차 새롭게 소중해지는 나날들이다.

뜻하지 않은 나라,  모든 게 나직한 나라에 당도하여,  겸허로이 일상을 맞고 보내는 틈틈이 나는 나의 작은 뜰을 고즈넉이 자주 지켜 보게 된다.
또한 내 화단 뿐아니라, 마음밭까지 예쁘게 장식해 주고 사는 꽃나무들을 애틋한 마음으로 바라보게도 된다.
나는 마음속에도  텃밭을 일구고 살아가는 셈이다.
질경이처럼 억세고 질긴 잡초까지 아끼고 북돋아주는 텃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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