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하린
결혼하고 아이가 태어나자, 그 무렵에도 농사를 지으시던 시어머니는 열다섯 살의 성순이라는 애를 시골의 이웃마을에서 구해다 주셨다.
부엌일을 거들거나, 청소나 심부름, 그리고 아기를 돌보는 일 정도나 해낼 수 있는 애였다.
나는 그때 종로에 있는 YMCA 건물 안에 소재한, 명휘원에 드나들며 직조를 배우고 있었다.
명휘원은 영친왕의 부인 이방자 여사가 운영을 했고, 직조강사는 미국인 여선교사였다.
뭐든 알고 익히려는 자세는 내 일종의 취미였고 내 삶의 첫째가는 지향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그때 역시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까운 건 돈이 아니라 시간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나는 아직껏 그 조립식 베틀을 소유하고 있다.
분해하면 나무토막 몇 개지만, 설치하면 1미터가 되는 목조기계다.
보기와는 달리 그 기계는 머플러도 짤 수 있고, 커튼, 식탁보, 방석커버 , 벽걸이 등등,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의 완제품은 뭐든 만들어 낼 수가 있었다.
나는 그 직조기계로 여러 가지 색을 배합하여 머플러를 짜는 걸 즐겼고, 친구나 친지들에게 선물하기를 특히 좋아했다.
어느 날, 모백화점에 친구들과 쇼핑을 갔는데, 영업담당상무라고 자기소개를 밝힌 분이 우리가 두르고 있는 머플러에 지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결국, 뜻이 있다면 샘플을 몇 장 가져다 달라고 나를 향해 정중하게 부탁을 하기에 이르렀다.
나의 첫 비즈니스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처음엔 20장, 그 다음엔 50장, 그리고 100장.
주문은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나는 그 해 겨울, 머플러를 유행시킨 장본인이 되었다.
나와 함께 직조를 배우던 여인들은 모두 공관직원 부인들 정도였고, 그리고 그때 이미 직조수강은 끝나 있었는데 새로운 강의주제는, 서양인형 만들기였다.
그리하여 나의 머플러 납품은 경쟁이 전무했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결혼하고 바로 상도동의 정원이 있는 집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된 나는, 경제적으로 전혀 부족하진 않은 상태였다.
어느 정오에 중년부인이 예고도 없이 집으로 찾아왔다.
정말 뜻밖의 방문이 아닐 수 없었다.
S백화점 영업담당상무의 부인이라고 해서 더 의아스러웠을 것이다.
강산이 수차례 바뀐 지금껏 그 여인의 인상이 뚜렷하게 기억된다.
금테 안경과 작은 키와 약간의 풍만함과 이북 태생 특유의 강한 사투리.
머플러의 주문량이 날로 쇄도해서 내가 만들어 내는 양으로는 상품의 확보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게 방문 이유였다.
생각다 못해 애라도 봐 주고 살림이라도 도와준다면 훨씬 능률이 높아지지 않겠나 싶어 그녀의 남편이자 영업담당상무가 아래와 같은 지시를 내리게 되었다는 것.
" 아침부터 저녁까지 돌보시오."
그 여인의 도움다운 돌봄을 일주일 정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여인은 살림을 돕지는 않고, 직조 짜는 일을 거드는 게 가장 효율적인 도움이 될 거라면서 매우 적극적인 태세로 대응했다. 함께 실을 감고 함께 들실과 날실을 넣고.
그 여인이 더 이상 살림인지 직조인지를 도우러 오지 않게 된 일과, 영업담당상무의 전화를 받게 된 일은 우연처럼 같은 날 이루어졌다.
더 이상 머플러를 납품하지 않아도 된다는 통보였다.
그는 평소와는 달리 인사라거나 군더더기 모두 생략하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전화기를 통해 말하는 그의 음성은 약간 권위적이기까지 했다.
며칠도 안 되었을 때, 최종결산을 하러 가서야 알게 되었다.
그 여인이었다.
내 대신 모백화점에 더 낮은 가격으로 머플러를 대량 납품하게 된 사람은.
그 여인이 진정 그 영업상무의 부인인지, 아닌지는 그다지 나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크게 상관은 없는 일이라는 생각만 지배적이었다.
내가 절대 다그치지도 않았고, 산뜻하게 그곳을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 그랬었다.
나는 이미 짧은 기간이었지만, 내가 만든 상품으로 일이라는 걸 해봤고
또한 세상이 어떤 곳인지 경험까지도 맛본 귀한 모티브를 안겨줬지 않은가라고
고맙게 여기는 부분이 더 많았을 터였다.
그런 뜻밖의 감정들이 절대 유쾌한 사안은 아닐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최악의 상황이라거나 아픔이나 슬픔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그런대로 괜찮았지 않았던가 새삼 그런 자기 위안의 토닥임도 맛 보았을 것이다.
나는 그때 전혀 화나거나 충격 받지 않았던 게 고맙다.
일부러 생업을 위해 일하려던 동기는 아니었기 때문에 다행이다.
손해까지 입은 건 아니라서 잘 된 일이다.
취미 삼아 일할 수 있어서 좋았었다.
바로 그거다.
내 방식의 생에 대한 해석이라는 게.
다른 건 몰라도, 그때 나는 나를 가르쳤을 것이다
(원래 그런 거야. 늘 경험하면서 살아야 하지.)
그 영업담당상무라는 사람과 그 부인된다던 여인은 그러한 파행을 주도하고 실행하면서
오늘날, 가히 성공적인 욕망의 울타리와 튼튼하고 높은 재물의 탑까지 거침없이 세우고 쌓고 이룩해 놓았으려나?
어쩌다 기억하게도 되지만, 그들은 내 관심 밖의 인물들인 것만은 확실하다.
나는 벼라별 쓸데없는 일을 다 기억할 때 허다하지만
분명한 건, 단지 좋은 일만을 떠올리고 아끼고 그리워한다.
상도동 집.
내 나라.
엄마와 형제들.
친구와 친지들.
그립다.
모두모두 그립다.
오늘 특별히 그립고 그립다.

동해안 바닷가에서
댓글 2개:
오히려 읽는 독자가 좀 화가 나는데요? 주인장은 괜찮으신 듯 해 부러움을 느낍니다. ^^ 보통 성품으로는 힘들거든요...
보통 성품으로는 글쓰기도 힘들지 않을까요?
뭔가 다른 생을 일부러 추구하진 않지만, 그런데 뭐든 통과하는 일이 의외로 쉽사리 가능해지곤 합니다.
주인장은 많이 괜찮아요.
아디도 표현도 함축이 보이십니다.
날은 흐리지만 밝은 하루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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