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4일 수요일
낯선 환경
맹하린의 목요칼럼
아르헨티나 조선일보
2000년 7월 13일
우리 가족이 아르헨티나에 도착한 계절은 늦여름, 그러니까 3월 초순이었다. 첫 학기가 막 시작 될 무렵이라 이민이라고 오자마자 아이를 유치원에 넣었다.
아침마다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어딘지 모르게 걸음이 느려지고, 거의 마음이 놓이지를 않았다. 그래서 발길을 되돌려 유치원으로 다시 가보고는 했다.
아르헨티나의 교육방침은 학부모가 학교나 유치원에 학부형회의 때 이외엔 못 들어가게 되어있다. 아주 특별 한 이유 말고는.
'물마시고 싶다'와 '화장실에 가겠다'는 본능에 치중한 짧은 언어를 서둘러 외우게 해서 유치원에 들여보내진 내 아이가 과연 어떤 적응력을 지니고 있을지 그 사실 결코 느긋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궁리 끝에 되찾아간 내 기분을 초음속으로 읽어낸 원장은 잠깐만이라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선선한 배려를 해주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들여다 본 유리창 안의 광경은 예측한 대로가 아니라 예측보다 더 심각한 상태였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장난감을 가지고 놀거나 그림책을 보면서 자유시간을 누리는데 내 아이만 유독 무엇에 속박 당한 것처럼 오도카니 서 있었다.
꼼짝 않고 서 있는 역할을 떠맡은 작고 어린 배우처럼…….
꼼짝없이 움직일 줄 모른 채 서 있는 아이의 그 모습은 내게 있어서 어떤 위급 상황보다 더 극적인 충격을 몰고 왔다.
내 나라를 두고 왜 이민을 떠나 왔던가.
그렇게 가슴 아릿한 회한이 소나기처럼 후두두둑 나를 향해 쏟아져 내리면서 아이를 도로 데리고 나와 당장이라도 내 나라 한국으로 떠나고 싶을 정도로 마음 전체에 먹장구름까지 휘몰아치듯 일렁거렸다.
낯선 나라의 낯선 환경과 낯선 아이들.
그것도 항상 보아오던 검은 머리가 아니라 노랗거나 갈색이거나 잿빛의 머리들이었다.
내 아이가 겪어야 할 서름서름함이 순식간에 유리창 밖의 내게까지 전달되어 오더니 또다시 빗방울로 후두둑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몇 밤인가를 장마 속에 갇힌 후줄그레한 심정이 되어 매시간 결코 평화롭지도 못했고, 쉽사리 잠들 수도 없었다.
그렇게 이틀 동안 꼼짝 않고 서 있게 되자, 유치원 교사와 원아들이 한꺼번에 다가왔고, 친절하게 이끌고 달래주기까지 했었나 보았다.
사흘째부터는 다른 애들과 똑같이 어울리며 미끄럼과 시소까지 타냈고, 날마다 새로운 말을 익히느라 재미까지 생겼으니까 이제 엄마는 걱정을 놓으라는 위로를 아이 쪽에서 다짐처럼 건네 오게 되었다.
그때 비로소 이민이라는 낯선 삶과의 화해가 악수를 나누고 난 것처럼 새롭고 가뿐하게 시작되는 기분이라니.
자디잔 하늘색 체크무늬의 유니폼을 입고 어른처럼 쓸쓸하게 서 있던 내 아이의 부동자세는 사진첩에 끼워진 한 장의 스냅 사진처럼 지금껏 생생하고 강렬하게 내 의식 속에 잔존해 있다.
아이의 입장에서 따지자면, 한국에 남아 있었다고 해도 당연히 유치원에 가야할 나이였고, 한국에서 유치원에 다니게 됐다고 해도 태어나 첫 바깥생활인 며칠 동안은 두렵고 막막하기가 이곳에서와 별반 다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르헨티나 땅에는 94년까지 4만이던 한국 교민의 수가 현재는 2만 정도로 줄었다고 한다. 많은 우리의 이웃사촌들이 미국이나 호주, 뉴질랜드, 멕시코, 심지어는 아프리카까지 이민 보따리를 옮기는 추세에 있다고 본다.
나는 다시는 이민이라는 걸 안 떠날 결심이다.
꼭 어디로 가야 한다면 차라리 내 나라로나 가겠다.
자식은 자랄 대로 자라서 우리의 조국인 한국과 다름없이 아르헨티나를 사랑하고 아끼는 데다 자식들 에게 못할 짓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하는 만시지탄(晩時之歎)이, 쌓여있던 먼지처럼 풀풀 휘날리기 때문이다.
이제 지난 세월의 자락들을 굽이굽이 살펴보면, 참 겁도 없이 내 나라를 떠나왔구나 하는 후회 비슷한 감상이 그리움처럼 친밀하면서도 애틋하게 안겨온다.。
이민 생활20년을 마치 엊그제처럼 훌쩍 보내고
겨우 수구초심(首丘初心)하는 나이에 이르렀다.
언제 적 얘기던가 하고 격세지감을 논할 계제가 아닌 게 우리의 2세나 3세들이 지금도 여전히 플로레스 지역의 오락장에서 학교 가방을 옆에 하고 땡땡이를 치며 왕따와 은따에서 해방되려는 연막전을 스트레스 풀듯 밤낮으로 펼치고 있는 모양이다.
이민. 그것은 어떤 면으로는 위험하고 난해한, 특히 우리에게 딸린 자식들에게는 무량무변 (無重無邊)의 도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