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8일 일요일

대장과 졸병

맹하린의 생활단상(生活斷想)

남미크리스챤 칼럼

2001년 3월 17일

어린 시절의 나는 우리 동네 토끼재의 꼬마대장이었다.
내 또래의 어금지금한 여자애들을 모두 합하면 열여섯 명이었지만 무슨 일이 생겨서 못 나오는 애들은 거의 없었으므로 우리는 저녁마다 우리 집 앞마당으로 약속처럼 모여 들었다.
그 시절의 우리는 일 년 내내 감기 한 번을 앓지 않았다.
비가 내리거나 눈이 내리는 궂은 날조차도 우리에게는 다른 날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아름답고 괜찮은 날일 따름이었다.
강강술래 , 술래잡기, 수건돌리기, 합창과 무용, 그렇게 변화를 즐기면서 해내는 여러 놀이들은 우리의 하루하루를 걱정이라고는 모르는 넉넉함으로만 신나게 채워 주었다.
봄철이면 학교가 끝난 오후마다 나물을 캐러 다녔는데, 우리 집에서는 나의 나물바구니를 너무나 탐탁잖게 여겨서, 내가 캐는 나물은 언제나 친구들에게 골고루 나눠 주는 데에 그쳤다.
개울에 나가 미꾸라지나 올챙이떼 쫒기, 강에 나가면 가재나 새우, 그리고 송사리를 건지기도 하고, 산꽃이나 들꽃 속에 퍼질러 앉아 소꿉장난에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해가 뉘엿뉘엿 저물 무렵에야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의 집으로 흩어지고는 했다.
친구 복례네가 고구마를 캐는 날이면 우르르 몰려가 줄줄이 열린 고구마 포기를 쑤욱쑥 뽑아 올리면서 누리던, 온 세상을 다 얻은 것 같던 수확의 기쁨도 우리를 신명나게 부추기던 일종의 놀이에 불과했다.
우리 집과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던 당숙의 원두막에 앉아 개구리참외와 수박을 먹으며 여름방학숙제를 풀던 일.
그밖에 눈썰매, 얼음지치기 등 여러 가지 놀이들이 좀 많았던가.
아쉽게도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저절로 조신을 떨며 그만두게 되었지만, 같이 놀던 친구들을 은연중에 떠올려 볼 때가 때때로 있다.

일찍이 휘트먼이 ‘ 풀잎’에 대해 읊은 시는 내 어린 날의 그 애틋한 날들과 전혀 무관하지가 않음에랴.
"나는 그것이 필연코 희망의 푸른 천으로 짜여진
내 천성의 깃발일 것이라고 생각 한다
아니면 그것은 주님의 손수건
그분이 일부러 떨어뜨린 향기로운 기념품"


같은 나라에 산다 해도 서로 만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는 못 만날지도 모르는 격세안면(隔世顔面)의 그들이 진세(塵世)의 어떠한 고달픔에 잠길지라도 기쁘고 흥미진진했던 우리의 어린 날들을 가끔은 기억하며 살아 주기를 희망한다.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기꺼이 힘을 내어 언제나 마음 저 깊은 곳에 숨겨 놓은 기쁨들
약간씩 꺼내고, 그리고 다시 새롭게 간직하며 그토록 기쁘게 살아나가기를 바라고 바란다.
때로는 강강술래 같고, 술래잡기 같고, 수건돌리기, 합창과 무용, 얼음지치기, 비탈길에서의 미끄럼, 그리고 강과 들판, 도깨비 방죽, 수리조합이 만든 수로와 다리, 학교운동장.
그 모든 놀이와 장소들처럼 너무나 각양각색인 세상살이에서 나름대로 주어진 날들을 태평하게 잘 지내고 있기를 그리움처럼 소원하게 된다.
그 시절의 우리를 키운 건 진정 광활하고 변화무쌍하던 자연이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언제나 대장이었던 내가 이즈음에는 누구에게나 졸병이고, 계급도 지위도 낮은 여러 역할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
지금의 졸병노릇도 어려서의 대장처럼 일종의 사명감이 느껴지고 있고, 순복하는 마음 또한 없지 않아  있다.
안락한 생보다 분분(紛紛)한 자락이 더욱 잦게 들춰지는 이민자의 삶이고 주위환경이긴 하지만, 그 어떤 악머구리 숲에 이를지라도 유유자적한 선비정신과 겸애를 마땅하고 옳은 일처럼 여기며 강물의 한 자락 물결처럼 유유히, 유유히 흘러가리라.
굳이 인생이 무엇인가고 시치미 뗄 기분도 아니기에 내가 떠맡은 졸병노릇을 의연히 감내하면서 충일(充溢)한 여생을 타박타박 걸어 나가겠다.

어떤 이들은 처음부터 순조롭게 길을 걷지만, 어떤 이들은 꼭 부대끼고 난 후에야 비로소 길을 나선다.
헤아려 보면 우리 모든 이의 행선지는 섬김을 받는 자의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온 자의 지표에서 결정되는 게 아닐는지.
삶은 우리가 어떤 길을 걷느냐에만 있지 않고, 어떻게 낮아지느냐에 따라서도 그 의미부여에 크나큰 변화를 안긴다.
서로 용서하라고, 서로 이해하라고, 서로 참고 견디며 더욱 감싸주도록 하라고, 신께서는 사랑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끊임없이 보내고 계실 것이다.
속되면서도 부족한 우리의 믿음이 그 점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겠고.
축복된 날들을 제대로 맞을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삼가 낮아져야 하리.
더욱 낮아져야 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