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22일 일요일
미스터리
맹하린
외국어 대학 일본어과를 졸업하자, 오빠는 종로 2가에서 사진현상소를 하던 선배의 일을 돕게 됨과 더불어 모 여성지의 사진기자도 겸하게 되었다.
오빠가 일본어과를 선택한 오직 한 가지 목적은 순전히 사진에 미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일본처럼 사진기술이 발달한 나라도 없었을 뿐 아니라, 일본은 인쇄기술 또한 타국의 추종을 불허하던 시대였다.
(오빠는 현재 사진작가다. )
나는 국문과.
바로 밑에 동생은 무용과.
그렇게 셋이서 드는 하숙비도 만만치는 않은 일이라, 차라리 집을 하나 사는 게 낫겠다 싶었던지, 우리의 교육은 말할 것도 없고 집안 살림의 총책이었던 고모는 동대문 근처에 작은 한옥을 구입하기에 이르렀다.
방 3개와 마루와 작은 마당이 있었다.
마당 가운데의 지하실 위에는 장독대도 있었다.
고모는 고모의 큰 애와 둘째도 한양공고와 명지중학교로 각각 전학시켰다.
그래서 학생이 다섯이나 되다 보니까 부엌일 하는 애까지 필요하게 되었다.
그렇게 같은 가족이 된 애의 이름은 완자였다.
그 애는 내 동생 맹미숙하고는 자매처럼 친하게 지냈고, 나에겐 깎듯이 공주대접을 해줬다.
내가 엎디거나 옆으로 누워 책을 읽을 때면, 그 애는 물도 떠나 놓고 과일과 과자 등을 꼭 가져다 놓는 걸 잊지 않았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진정 마음 가득 우러나는 배려를 결코 힘겹지 않게 웃음으로 실행 하던 애였다.
우리는 밤에 마루에 둘러 앉아 오빠, 또는 고모의 둘째 송태호가 반주하는 기타에 맞춰 노래 부르기를 자주 했다. 오빠는 중고등학교 때 기악부에 소속돼 있었고, 작은 북 담당이었다. 송태호는 트럼펫 주자였다.
노래를 함께 부를 때마다 우리는 안 보이는 결속감을 다지게도 되었고 서로가 서로를 아껴야 하리라는 각오 같은 것도 기쁨의 씨앗으로 마음 밭에 자주 뿌리고 심었던 듯 하다.
고모일 때도 있었고, 고모부일 때도 있었으며 엄마일 때도 있었지만, 계절마다 한두 번씩 밑반찬과 용돈을 전하기 위해 어른들은 교대로 상경하셨다.
평소의 반찬거리는 시장속의 식료품점을 한 군데 정해놓고 수첩에 그날그날 가져가는 명세서를 일일이 적어주면 어른들이 상경할 때마다 한꺼번에 갚아주고 하향하셨다.
학생신분에 날마다 반찬값에 신경 쓰는 걸 막으려는 의도였다고 본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의 소꼽놀이에서 오빠는 단연 아버지 역할이었고, 나는 엄마였다.
오빠의 친구들은 가끔 모임에서, 나와 내 동생 맹미숙을 칭찬하고는 그랬나보았다.
나와 맹미숙은 엄마를 답습하여 반찬 만들기에 일가견이 좀 있는 편이다.
나는 고모를 닮아 글 쓰는 면모까지 갖췄을 것이다.
하지만 오빠 친구들의 그런 칭찬은 항상 우르르 우리 집에 몰려와 점심이나 저녁을 얻어먹고 난 후에나 얻어 듣는 말이었다.
그토록 하루하루를 화평과 안온 속에 지내던 우리에게 매우 충격적인 대형 사고가 터진 건 겨울이 막 시작되던 11월 초순경이었을 것이다.
고모의 큰 아들 송태언이 얼굴 전체가 짓뭉개진 상처를 입고 하학시간을 조금 넘어서 귀가한 것.
친구들에게 업힌 것도 같고 둘러멘 것도 같은 매우 기이한 모습으로였다.
그때 송태언은 눈 코 입이 온통 붉은 상처에 가려져 도저히 따로 분간키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 어떤 놀라운 일을 만날지라도 호들갑을 떨면 안 된다고, 평소에 암묵적 가정교육을 받았었던 우리는 미리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모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떤 면으로는 다행이었으며, 울고불고 캐묻고 그러는 것보다는 꽤 숙달된 대응이었다고는 해도, 한 사람도 아니고 단체로 할 말을 잃는다는 건, 말 그대로 얼떨떨하기도 하고 절망적인 상황의 극치가 아닐 수 없었다.
우리야 단체로 할 말을 잃었지만, 송태언은 신음은 커녕 아프다는 소리도 결코 내는 일이 없었다.
그럴 땐 비록 오빠만이라도 사건의 실마리라거나 원인이나 결과에 대해서 어떤 해답 정도는 들어 낼 수 있을 줄 알았다. 송태언은 당사자니까 그렇다고 해도 그의 친구들이라도 약간의 언질이나 변명 같은 게 있을 줄 알았었다.
하지만 오빠 역시 아무 설명이라거나 해결책 등을 일언반구 듣거나 찾지 못했다.
송태언은 그런 얼굴을 하고도 등교는 열심히 해냈고, 하학 후에는 치료를 위해 병원에 다녀야 했다. 며칠 쉬라고 해도 그것조차 송태언 개인으로 결정될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며칠인가 지났을 때, 예상했던 바대로 학부모 호출이 있었다.
부모가 시골에 계시다는 걸 잘 아는 담임선생은 형이나 누나라도 오라는 가정통신 비슷할 걸 보내왔다.
오빠는 두 군데의 직장 일로 시간이 없었기에 나라도 대신 가야했다.
혼자 가기 그래서 맹미숙과 함께 갈 작정이었는데, 하필 동생은 다음날 실기시험이 있다고 마루에서 아라베스크, 어쩌고 하면서 연습에 혼신을 다하는 중이었다.
장충체육관 근처에 있던 한양공고의 교정으로 들어가 곧장 교무실로 찾아간 나.
송태언은 수업 중인지 아무 데서도 안 보였다.
마침 교무실엔 몇 분의 교사만 있었다.
나를 대면하자마자 훈육주임과 담임은 처음부터 강하게 나왔다.
나도 질세라 강하게 나와야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겹쳐지게 비난을 꺼낼 경우 나는 괴롭다는 표정을 나타냈고, 우선은 짚고 넘어갔을 것이다.
“여러모로 불리한 입장이 되리라는 각오는 했습니다. 하지만 한 분하고만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결국 담임이 수업에 가야 한다면서 교무실을 나가 주었다.
훈육주임은 퇴학을 고려 중이라는 얘기를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나는 반성문 정도로 선처해 달라는 부탁을,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처럼 여러 번 뎅뎅거렸고.
훈육주임은 원인은 물론이거니와 주동자들만이라도 밝혀 준다면 얼마든지 눈 감아 주겠다고, 퍽도 합리적인 것처럼 말하는 것도 잊지 않고 있었다.
나는 정신을 좀 바짝 차려야만 했다.
“집에서 일어 난 일이 아니라 학교에서. 그것도 하학 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가족이 해야 할 질문을 왜 선생님께서 하시죠? 원인과 결과를 도리어 저희에게 알려 주셔야 하는 학교 측에서 확실한 입장표명만 해주신다면 저희는 퇴학도 각오하겠습니다. 정학을 하라시면 그 점도 고민해 보겠어요. "
지금도 생각난다. 정작 얼굴 전체가 깨진 사람은 나라도 되는 것처럼 멍한 표정을 결코 못 버리던 훈육주임의 순간적으로 넋을 잃어버린 표정이.
결국 몇 날 며칠 몇 달을 보내고도 교사들이나 친구들이나 가족 역시도 이렇다할 원인을 파악해 내지는 못했다. 고향의 어른들께는 절대 비밀이 되도록 우리는 그분들만 만나면 입단속에 충실했고, 디행히도 끝까지 잘 지켜낼 수 있었다.
송태언은 그러는 과정에서도 여전히 그 얘기만 꺼내면 침묵을 고수했다.
그 와중에 알았다
송태언은 그렇게 많이 다쳤을 경우나 심각한 사건 속에서도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는 성격이라는 점이었다.
몇 년 전 귀국여행 중에, 고모네 자녀들과 우리 형제들이 일식집에서 함께 식사하는 시간을 가진 적이 있었다. 서로의 짝들과 조카들 합하니까 거의 이십 명 정도 되었다.
'연 하나로 기획'의 송태일이 나를 환영한다는 명목으로 내는 자리였다.
그날 펄떡펄떡 뛰는 생새우가 바구니마다 숨죽이고 숨어 있다가, 풀 코스의 순서에 따라 등장해야 할 무렵에는 덮고 있던 면보자기를 젖히고 저마다 춤추며 나타났다.
그런데 내 친족들은 너무 싱싱하다며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매우 가벼이 껍질을 벗겨냈고, 그리고 매우 행복한 얼굴로 잘도 먹어댔다.
나는 아르헨티나 촌뜨기가 다 되었다는 말을 피하기 위해 아마 딴청을 떨며 절대 안 먹고 말았을 테고.
그 대단하던 비밀과 결심은 이제 많이 회석되고 누그러지지 않았을까 싶어져, 나는 송태언에게 진지한 태도로 그 당시의 의문점을 새삼 질문처럼 건네고 말았다.
선선히 돌아온 답은 두 가지였다.
묵묵부답과 그 잘나고 잘난 뜻 모를 미소.
가장 신비스러운 일은, 송태언은 그렇게나 끔찍하게 많이 다치고도 얼굴에 흉터 하나 남지 않았더라는 사실이다.
워낙 추측하는 일엔 우선멈춤을 모르는 나지만, 결국 나는 송태언이, 지방에서 올라온 전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몰매를 겸한 왕따를 당한 거나 아닐까 그 정도로만 단정하게 된다.
미스터리다.
참으로 미스터리다.
영원히 알려고 해서도 , 알고 싶어 해도 안 되는 미스터리다.
그 사건이란 게 그토록 무서운 거였구나.
아직도 입을 떼서는 안 되는 일이었구나.
그 추위에, 그 무렵에 얼마나 상처가 아프고 쓰라렸을까.
대단하다 .
대단했다.
그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잘 견뎌내 줘 고맙다.
지금처럼 핸드폰의 문자로나마 괴롭힘을 안 당한 일이 천만다행이다.
살아줘서 고맙다.
송태언!!!
아르헨티나에 돌아오기 며칠 전이었다.
송태언의 간곡한 부탁으로 그의 집에 하루 이틀 사흘 머물었다.
내가 왜 이렇게 표현하는가 하면 사흘이 하루 처럼 금방 지나갔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 인천까지 함께 드라이브를 하였다.
명목은 싱싱한 회를 대접하려는 거라고 말했었다.
나는 더 이상 그 때의 그 사건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영원히 묻지 않을 것이다.
고층 아파트의 16층에 있었다.
송태언의 아파트는.
밤의 전망은 별나라처럼 아름다웠지만
고층아파트의 특성상 건물이 위이위이
강풍에 흔들리던 느낌을 약간 강도 있게 감지하며
아주 오래 묵은 어지럼증이, 송태언이 다친 날
순간적으로 느꼈던 그 어지럼증이 휩싸이듯
나를 흔들고 있음을 깨닫고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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