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하린의 목요칼럼
아르헨티나 조선일보
2000년 10월 26일
밀란 쿤테라의 말에 의하면, '소설가란 자기 생활이라는 집을 때려 부숴, 그 돌조각으로 소설이라는 집을 세우는 족속' 이라고 한다.
내가 생각해도 나 역시 그런 족속에 속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다른 이들과는 동떨어진 생활을 많이 하고 있고, 휘적휘적 햇빛과 비와 바람을 향해 걸어 다니는 일을 취미 이상으로 즐기는 편이다.
그런 내게는 자주 들르는 쉼터가 여럿이나 있다. -
아베쟈네다에 가면 산뜻한 마음으로 차를 마시며 두런두런 얘기를 주고받는 지인 (知人) 몇몇 분의 가게가 있는가 하면, 온세나 백구에도 그런 공간이 꽤나 된다.
어느 날 온세 지역의 쉼터라고도 말할 수 있는, D라는 옷가게에 들렀더니 P선생은 부재중이고 그 부인이 나를 살갑게 반긴다.
내게 녹차를 권유하던 P선생의 부인은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하다가 다른 얘기도 꺼낸다.
“우리 그이 때문에 정말 속상해요. 가게를 봐주면서 툭하면 가짜 돈을 받는 거예요. 그것도 20페소짜리로는 양이 안 차는지 주로 50페소나 100페소짜리로 말입니다. 언젠가는 글쎄 100불짜리 달러를 두 장 이나 받은 거 있지요? "
그 날 저녁에 P선생이 듣지 않도록 세 딸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자, 딸들은 아빠가 이 일에 대해서 전혀 모르느냐고 이구동성으로 물었다고 했다. 아직 그 얘기를 차마 못했노라고 하자 딸들은 다시 합창처럼 너도 나도 부탁하더라는 것이다.
“아빠가 불쌍해. 한 장만 받은 걸로 했으면 좋겠어. 두 장이나 받았다는 걸 알게 되면 아빠는 아마 속상해서 한 숨도 못 주무실 거야. 엄마, 그럴 거지? 그래 줄 수 있지?"
딸들의 부탁도 부탁이지만. 매사 에 진지 하라면 아무도 따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진지하기 이를 데 없는 P선생이 현지인 고객 (?)들에게 그런 식으로 뻥뻥 당하는 게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다고 생각되어진 P선생 의 부인은 한 장의 위조지폐에 대해서만 간단히 지적했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P선생은 밤새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을 계속했던가 보았다.
몇 달이 지난 뒤, 그 날 당신은 위조달러를 두 장이나 받았었다고 경고 삼아 얘기 하자, 그 날 밤에 다시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을 마다하지 않더라는 P선생.
P선생의 부인이 더욱 괴로운 건, 이웃 가게 한국인들이 일부러 종업원을 시켜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명해 달라면서 P선생을 특별대우를 한다는 점에 있고, 다른 가게 위폐는 잘도 골라댄다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거기다 강의까지 해요. '달러 안 에는 금속 실이 들어 있다’ ‘종이의 질 자체가 매끄럽지 않고 약간의 투박함이 느껴진다’ ‘이 나라 돈은 우선 빛을 향해 비쳐 보아라’ 등등"
집안 아저씨뻘이 되고 문협회원인 P 선생의 그 우직성에 재미가 쏠쏠해진 나는 모처럼의 파안대소를 아낌없이 터뜨리고 말았었고, 나중에 P 선생에게 그 일에 대해서 시침 뚝 떼 고 일부러 질문까지 했었다.
'“글쎄요. 남의 돈은 그럭저럭 꼼꼼하게 봐 주겠는데, 고객을 바로 앞에 세워놓고 밝은 곳에 비춰본다 는 자체도 그렇고 어색하여 대강 만져 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진짜라는 확신이 강하게 서다가도 뒤에 집사람이 가짜라고 밝혀 낸 후에 자세히 보면 또 ‘속았다’는 기분이 그제야 일깨워지는 겁니다. "
진지하라면 두 번째라고 해도 서운하리라는 P선생 앞에서 다시 파안대소를 터뜨릴 수는 없어서 나는 그만 주름이 덜 생길 정도로만 푸하하 웃고 말았던가.
이 나라의 경제는 과연 어디까지 곤두박질을 칠 것인지.
' 몇 천 페소가 매상으로 올라도 남을까 말까한 도매상들이 기대이하의 매상밖에 안 오른다는 현실에 신경이 날카로울 대로 날카로워진, 이리도 팍팍한 묵정밭 같은 이 시대에, 하필이면 위조지폐를 들고 설치는 날 도둑들까지 극성스럽게 한 몫을 하는 모양이다.
오늘은 그 어느 쉼터에도 발길을 머물지 않고 집안에서 차분히 글을, 아니 어느 작가의 말처럼 소설질, 지금은 그 일에나 열정을 보태려 한다.。
잠시 감은 눈 속에 소설에 대한
강물처럼 쉼 없이 흐르는 괜찮은 느낌의 감성(感性)이 내게 찰랑 찰랑 밀려들고 있나니.
때로는 질박해 보이기도 하는 인생의 먼지들이여!
쉬잇! 지금은 조심조심 흩날리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