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2일 월요일
봄을 맞으며
맹하린의 수요칼럼
아르헨티나 조선일보
2001년 9월 16일
9월 21일은 '봄의 날' 이다.
봄이라선지 부쩍 나들이 할 일이 많아졌다.
문우들, 그리고 친구들은 어디로 구경을 다닐 때마다 나를 꼭 챙겨주고 싶어 한다.
그렇게 다녀온 일본공원.
그곳엔 햇빛, 바람, 잉어, 철쭉 등이 모두모두 건재해 있었다.
벼룩시장인 산 뗄모 역시 여전히 법석이며 번창일로였다.
틈나면 찾아 가던 몇 년 전에 비해 가게들도 훨씬 늘었고, 골동품의 범위도 엄청나게 많아진 데다 관광객과 행인들도 길을 빼곡하게 채울 것처럼 몰려다니고 있었다.
벼룩시장에만 가면 지난 세월의 흥망성쇠와 영욕이 시야 가득 각인된다.
보는 이로 하여금 예술의 아름다움을 형상화 시키는 데 한 몫을 하기도 하고, 시와 음악과 그림과 장식품들이 존재하면서 너나없이 방관자의 마음으로 역사의 흐름을 지그시 접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그리고 며칠 전, 사라떼(Zarate)에 낚시를 떠나는 문우들 팀에 합류했더니, 그곳 또한 태평성세처럼 평화로움과 자연의 신비로움이 공존해 있었다.
불과 몇 달 전에, 가족과 다녀왔던 장소였기에 퍽도 반갑다는 마음까지 일면서 일종의 감회 비슷한 게 솟구쳤는데, 평일인 탓인지 그 낚시터는 우리 일행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우들은 어느새 강태공으로 변모되어 이미 세월을 낚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는 바람에 살랑대는 올리브색 비단 폭 같은 강물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하고, 살아 있음을 확인시키듯 손끝을 간질이는 물결의, 햇빛에 춤추는 미세한 찰랑임도 아련히 만끽했다.
더불어 꿈꾸듯 출렁이는 강물 주위에 열병식 하듯 선채, 유록색 가지를 흐느적거리며 드리우고 있는 버드나무 숲을 지나, 맞은 쪽의 여울목 사이를 어슬렁어슬렁 지나가면서 내 나름대로의 사색과 산책을 즐겼다.
자로 잰 것처럼 크기가 똑 같은 붕어를 연신 끌어올리면서, 그럴 때마다 으레껏 방생을 일삼던 나의 가족이 앉아 있던 풀숲 근처는 언제 그랬었냐는 듯 고요하고 적막한 기운만 감돌고 있었다.
천천히 유유자적 거닐던 내 눈에는 빛 같은 게 반짝 빛났다.
그 빛은 내가 변함없이 자연을 사랑하고 가족을 아끼고 있다는 메시지처럼 느껴졌다.
내겐 자연과 가족이 명약처럼 여겨진다.
자연과 가족이 늘 내게 치유와 은총을 충만하게 베풀고 있는 느낌이
나의 메마른 일상을 그나마 적절히 채워주고 있는 것이다.
화창하고 맑은 기온 속에서 밝고 찬란한 해가 장밋빛 비늘 같은 것으로
강변의 주위를 감싸기 시작했다.
부들의 기다란 잎들은 서로가 서로를 감싸듯 나약하지만 격려가 실린 소리로 서걱인다.
어딘가에서 인디언의 흥얼거림 비슷한 노랫소리도 북소리에 묻혀 들려온다.
강은 자연 속에 안주하며 수도 없이 물결치는 동작을 참을성 있게 익히고 있었으며
나는 사실 강물 주위를 배회하면서 간단없는 사념에 빠져 있었던 듯도 하다.
참으로 곱디고운 계절이다.
아름답기가 천사의 날개처럼 눈부시다.
그렇게 다녀 온 일본 공원에도, 산 뗄모에도, 사라떼에도 봄과 생명의 약동은 여실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지만,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은 어이하여 갈수록 불안정한 기류가 돌고 돈다.
늘 무슨 일에 부대끼게 되는 세상이다.
궂은 일에 복수를 벼르고 험한 일에 강력한 대응을 하는 국가나 단체들.
미국을 위시한 강대국들은 항시 이럴 경우 승산이 적으며
많은 비극을 몰고 올 확률이 산재해 있는 전쟁만을 유일한 목표로 삼기 일쑤다.
겨우 몇 사람만으로 그리도 강한 폭발력과 희생을 가져다주는 테러를 저지르지만
왜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힘을 쏟는 데도 세계의 평화는 요원한 것일까.
왜 사람들은 평화를 위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악역을 떠맡지 못해 안달인 것일까.
사실 누군가 죽임을 당하고
많은 사람들이 테러에 희생되고
그 가족들이 슬픔과 고통으로 밤낮없이 시달리며
새로운 전쟁이 터지는 일에 대해선
더 이상 거론을 삼가고 싶을 정도로 울분이 쌓이는 기분이지만
요즘엔 사뭇 그런 일들만 생기고 그런 일들만 부각됨에랴.
이런 형편이라서, 봄이 왔다고 이리저리 휩쓸려 다녀본들
시끄러운 세상에 이렇다 할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님은 자명한 일이다.
그저 미약한 몸짓에 그치겠지만, 나와 가족과 이웃과 세상의 평화를
꾸준히 간구하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는 없어 보인다.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열심을 부리는 중이라고 깨달으니
언감생심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싸움의 대상으로 삼으며
무슨 말 등을 곱새기고 싶은 마음 같은 게 추호도 없다.
이 봄.
페르시아의 시인 ‘사디’가 시집 <굴레스탄>에 적은
현자의 언어처럼 살고 싶어진다.
“나무마다 각자대로의 열매와 계절을 가지고 있어
계절을 맞으면 싱싱하고 꽃까지 피우나
철이 지나면 말라서 시들고 만다.
그런데 삼나무는 열매나 계절에 구애 없이 사철 푸르니
자유로운 자들, 즉 종교적으로 독립된 자들의 성질이 아니겠느냐.
그러니 네 마음을 덧없는 것에 두지 말라.
삼나무처럼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