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12일 목요일

다른 인생까지 살아보며


          맹하린


양력 7월 하순의 여름 태생인 나는 이민 온 덕택에 한 겨울에 생일을 맞기는 하지만
여름에 주로 작품을 많이 써내는 체질이다.
무엇을 써야할지
어떻게 써야할지
이렇다하게 고민을 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펜이 종이와 만나기만 하면
마치 바람을 잔뜩 받은 범선처럼
거침없이 항해하는 유람선 스타일이 바로 나다.
그런 이유로 나는 되도록 펜과 종이를 서로 떨어져 지내게 하고
되도록 멀리 두려는  방향으로 노력한다.
글쓰는 일을 굳이 기피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쓰일 데 없이 너무 많이 써내는 짓을 경계하기 위한 일종의 절제와 방식이라는  뜻이다.

글 쓰다 지루하면 나는 산책도 다니고,  대청소도 하고, 화단에 물도 흠뻑 뿌려주게 된다.
하지만 고객이나 친구들에게서 약간이라도 스트레스를 받았다 싶으면,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한 아나바다의 매장에 가서 주로 옷 종류를 고르는 일에 정신을 온통 쏟기도 한다.
사실,  나는 얼마나 단순하게 생겨 먹었는지, 그러고 나면 그 어떤 골치덩어리도 간단히 해소가 되는 성질머리의 인간이라서 내 스스로  생각해도 참 엉뚱하다는 단정이 든다.
물론, 한 벌로 쉽게 해결이 되지만,  최근처럼 며칠동안 날마다 한 벌일 때도  간혹 있다.
그곳엔 헌옷이 많지만 가끔은 55나  66 사이즈의 새옷도 들어 올 때가 많다.
당연히 한국에서 오는, 한국산  헌옷과 새옷이다. 하물며 유명 메이커의 상표까지  붙어 있다.
그곳의 헌옷은 달러로 치면 3불이나 5불  정도 되고, 새옷은 10불 수준이다.
말이 새옷이지, 사이즈가 작아  못 팔던 옷들이 오갈데 없어 쫒겨 왔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나는 이런 식의 구매에  점점 현혹되다 못해 매력까지 느껴져,   앞으론  결코  비싼 옷을 못 사 입을 것만 같은 예감까지 밀려오고 있다.
그렇게 구입한 옷을 차려 입고 문협이나 동문회나 봉사단체에 가면 나는 완전 맹공주 취급을 받는다. 어디서 샀느냐고 하도들  캐물어서 너무 성가실 지경이다.
그런데 ,그렇게 나를 부러워 하던 이들이 쪼르르 아나바다에 달려 가보면 막상 고를 만한게 한 톨도 없더라면서 그녀들은 언제나 내게 원망 섞인 투정을 뿌려댄 뒤 결국은  빈손으로 돌아들 간다,
첫째는 사이즈가 안 맞아서이고,  둘째나 셋째는 가격이 너무 터무니없이 저렴해서 그녀들의 자존심에 크게 손상을 입히는 모양이다.
첫째나 둘째, 그리고 셋째가 되는 기준의 순서가 바뀌었을 수도 있다.
(흠!  헌옷이나 스몰이 아무에게나 어울린다고들 생각하다니.)
하나도 건지지 못해서 화가 난 대가로 그녀들은 나를 한동안 별명으로만 불러대기 시작한다.
맹공주, 맹활약, 맹고집, 맹한너. 너?  꽤나 익숙한 언어다.

분명한 사실은 나는 헌옷이나 새옷에 전혀 구애를 받지 않는 성격이라는 점이다.
나의 인생이란 게 어차피 많은 책속에서 다른 사람의 인생까지 절절하게 섭렵해온 터이므로.
그런 이유로 나는 헌옷조차 내 맘에 끌리면 망설임 없이 구입을 시도한다.
어떤 헌옷은 딱 한 번만 입고 옷깃에 묻은 눈꼽만큼의 국물자국 때문에 버려진  의도가 역력하다. 작은 국물자국으로  크게 대변해 주고 있음을  볼 수 있는 일례이기도 하다.
그점이 내게 어떤 작은 묵상 거리를 제시해 주기도 한다.
예전에,  H일보에 칼럼을 내보낼 때였을 것이다. 많은 분들이 나를 만나면 말했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말하자면 작은 걸로 글을 참 그럴 듯이 퍽도  짜임새 있게 잘 지어 낸다고.
분명히 말하지만 그건 아니다.
나라는 사람은 작은 소재를  큰 묵상으로 전환시킨다고 보면 좀더 근사한 지적이 되는 것을..
각설하고,  헌옷을 사 입는 나의 심정이란 건, 내가 생각해도 그다지 값싼 행위는 아니라고 본다.
누구라도 해낼 수 있는 행동은 아니잖은가.
그 또한 다른 사람의 인생을 입어 보는 기회를  획득하는 의미라고
일종의 가치와  경험으로  자긍 삼는 것을.
머잖아 불우이웃돕기에 보내기를 과감하게 실행하면서.

최근의 나는 이 일 저 일에 받은 스트레스가 덤불처럼 쌓이고 쌓여 거의 불붙기 직전이었다.
그런 결과로  인하여 약 열흘동안 날마다 아나바다엘 드나들었다.
중요한 건 나는 나를 불태울 정도로 우매하지는 않다는 점이다.
의외로 맘에 들기도 하고 기분까지 산뜻해지는, 꽤 괜찮은 옷을 몇 벌이나  구입하고 나서, 나는 날아갈 듯 기분이  상쾌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막상 갈 데가 없다.
그러한 느닷없는 각성  때문에  순간적으로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왜냐하면 문협도 동문회도 여름휴가철이라서 3월에나 참석할 수 있기때문이다.

한동안 방황하는 심사였으니 이제 맘 잡고 또 다시글 쓰는 일에나 침잠하게 될 것이다.
외롭다거나 고달프다거나 부자유스럽다는 건 어떤 면으로는 나를  문학이라는 경로에게 다소곳이 다가가게 만드는 필연의 터널이었을  확률이 많다.

짧다면 짧았고 길다면 길었던 날들.
읽고 읽히고 보고 느끼면서
나는 현재 이 시점에까지 운명처럼 착오없는 속도로 자연스러이 닿게 되었을 것이다.

인생에는 마법과 같은 순간이 있다고 했던가.
준비가 부족하여 내 인생 미처 마법에 포위되지 못했어도
나는 문학의 장에 서성거리는 일로나 은총을 허락 받는다면
더없이 감격스러운 일이 될 것이라 여기고 있다.

더위 속에서도 추운 시간이 있다.
그리하여 나는 여름에도 겨울이 읽히는 편이다.
오래 꿈꾸어 왔으나 어딘지 모르게 생소해서 낯선 기분부터  맛보는 것처럼.
나의 사고방식은 어찌하여 현실에 한 번도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는 것일까.
내 문학은,   때로 철학적인 강 어귀에 살며시 침윤될 경우 더러 있었으려나.

요즈음, 자유의 본질이 어떤 것인지를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얼마전까지 나는  진정 자유로웠다.
해방감보다 자유로움이 훨씬 강했다.
신이 내려 주신 나의 문학은 너무도 느린 속도를 지닌 듯 싶어진다.
단지 가루만은  점차  고우려 해서 굳이 느림을 탓하지는 않으려 한다.
 낯선 방향을  바라보려는 마음
오늘 그러한 느낌이 유난히 강하게 안겨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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