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도전, 길찾기와 탐색의 여정
박해림 (시인 ․ 문학박사)
1.
‘갈등은 내게 여일한 흐름이고 전체적 소통이며 중심의 축이기는 하다.’는 맹하린의 고백은 그의 시를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 이국땅에서 살아온 34년여는 갈등과 소통의 대립각에서 소용돌이치는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지구의 정반대, 계절도 밤낮도 반대인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생의 절반을 살아온 시인의 노래는 참으로 곡진하다. 90년대 중반, 중편소설로 문단에 데뷔한 이래 다시 10여년 후 시로도 데뷔한 재주꾼이다. 소설집과 시집이 각각 한 권씩 발간되었고 그 두 번째 시집을 발간하게 된 시인의 이력은 낯설고 물선 이국땅에서 철저히 삶에만 투신한 것이 아니라 정신세계도 혼신의 힘을 다해 가꾸어왔음을 확인케 한다. 삶이란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외다리와도 같아서 자칫 발을 헛디디면 벼랑 아래로 떨어지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한 쪽 발을 정신세계에 걸쳐두었다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哀而不悲 樂而不流’. 이민의 시간 속을 넘나드는 삶의 행간에 초록 무성한 문학이 살아 숨 쉬고 삶의 강건한 역동성이 오늘의 맹하린 시인을 만들었다면 그 결과물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다. ‘시의 행간이 물장구치듯 내 발치에서 철벅일 때, 두 나라에 공존하는 것만 같은 강한 혼돈을 어쩌지 못해 내가 나를 시 앞에 꿇어앉히던 나날들’이 증언하는 시인의 내적 세계는 끊임없이 솟구쳐 오르는 욕망에 다름 아니다. 인간에게 욕망이 없다면 결코 살아있다고 할 수 없다. 그 욕망이 단순한 탐욕으로 화(化)한다면 살아 있어도 살아있다고 할 수 없다. 시인은 이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한 번밖에 없는 삶을 어떻게 살아내어야 할지 불면의 숱한 이국의 밤을 앓고 또 앓아야 했다. 작품 전반을 아우르는 집요한 생명력과 견고한 다짐, 확인, 약속, 인식, 성찰, 향수, 의지, 애상 등의 감각은 그것을 말해주고도 남는다.
맹하린의 시는 대체로 산문형태, 즉 이야기 형식을 띠고 있다. 압축보다 풀어내는 시풍을 택한 것은 시인의 개성일 수도 있지만 억압의, 가슴 속 응어리가 많은 탓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일인칭 ‘나’의 사설이듯, 여백이듯 건너뛰는 모국어의 행간은 촘촘하다. 또한 너무도 크고 깊다. 풀고 맺는 이완의 부단한 작업을 통해 감정이입이 쉬운 반복적 어휘를 자기만의 독특한 언어구사로 구현한다. 모국어로 시를 쓴다는 건 뿌리를 잊지 않는 것이다. 아니 그 이상이다. 말이 쉽지 간단한 메모이거나 기록에 끝나지 않고 고도의 정신세계를 현현하는 문학적 언어를 잊지 않고 여전히 자유자재로 구사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가령 시 전편에 유난히 의태어, 부사어, 동사, 명사반복이 많은데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시인의 몸 어디엔가 바짝 달라붙어 있다가 소통의 기회가 주어지면 그 존재를 드러내 보이는 듯하다. 시인의 타고난 예리하고 섬세한 언어감각이 전방위로 체화되었기에 가능하다는 느낌이다. 총 86편에 달하는 시에서 ‘파릇파릇, 주렁주렁, 소복소복, 포동포동, 수런수런, 초롱초롱, 술렁술렁, 엉금엉금, 주섬주섬, 시들시들, 반질반질, 보송보송, 아삭아삭, 사근사근, 휘적휘적, 쫄깃쫄깃’등의 눈에 익숙한 의태어, 부사어들뿐만 아니라,‘너글너글, 퍼석퍼석, 하마하마, 슴벅슴벅, 시적시적, 사붓사붓, 다붓다붓, 사분사분, 생게망게, 왈칵왈칵, 아치랑아치랑, 우럭우럭 등 요즘 자주 보기 어렵거나 생경스러운 부사어, 동사들까지 즐겨 차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흔덕흔덕, 서그럭서그럭, 싱둥싱둥 등의 사전에도 없는 말과 사록사록(동사 변형), 다분다분(형용사 변형), 야단야단(명사반복)의 현상은 시인 특유의 언어조탁 능력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모국어에 대한 강한 애착을 엿보게 한다.
이러한 언어의 반복 현상은 시인에게 있어 생래적으로 몸속 깊이 체화된 모국어가 고향의 시간을 일깨워주는 도구일지 모른다. 언어와 문화, 삶의 방식이 전혀 다른 이국(異國)에서 그 존재를 잃을까 염려되어서 일지도 모른다. 생경스럽고 전혀 낯선 공간이 아주 익숙한 공간으로 다가올 때의 두려움은 새로운 것에의 적응이다. 간절히 적응하기를 원하지만 한편으로는 나의 세계를 잃게 되는 두려움은 하나를 얻을 때 다른 하나는 잃을 수밖에 없는 것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이전 익숙한 내 것이 이후 점점 마모되거나 사라지고 있어 이와 같이 언어의 재창조를 가져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기억이란 태초의 생성에서 소멸의 과정에 이르는 우리의 모든 삶을 지배한다. 자아가 형성되기 전 몸속에 새겨진 지문과도 같은 기억이 환경이 달라졌다고 뿌리 뽑히지 않는다. 수십 년을 지구의 반대편인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살아온 시인은 오히려 체화된 몸의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본능적인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그 중 한 방편이 문학이라고 볼 때 기억은 거대한 에너지다.
2.
맹하린 시집의 시들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일상생활을 거침없이 드러내 보이면서 인식과 성찰을 반복한다. 선택한 행동들에 대한 깊은 사유와 일의 앞뒤를 다시 확인하고 재어보는 치밀함, 반듯한 행동과 생활의 틀을 벗어나면 안 된다는 무언의 압박감을 스스로 가슴 위에 돌처럼 눌러놓고 한편으로는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시인의 시선은 한쪽에 고정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다른 한 쪽을 끊임없이 탐색하고 있다. 무엇을 찾고 있음인가? 그녀의 앞에 펼쳐진 세계는 참 기이하다. 그의 시를 살펴본다.
어떤 장소가 문제가 아닌데
문제는 분명 나인데
어떤 장소라도 처음 들어간 장소는
나올 때마다 방향감각을 잃고
생게망게에 빠지고 만다
문제가 문제 될 건덕지 없긴 하다
차라리 반대쪽으로 발길 옮기면
가야 할 길 의연히 제시되는
참 명쾌하면서도 기묘한 선택
살아감 자체가 오고감이 유별한 관계로
몇 번이고 헤매고 나서야 비로소
바른 길 불쑥 앞을 터줬던 건 아닐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자주 길 잃고
결국 반대쪽을 내딛게 되는
방황하며 방향을 제시받는
나의 참 아픈 방향감각
—「방향감각」전문
시인은 길 위에서 ‘길 찾기’를 하고 있다. 공간과 공간이 연결된 통로에서, 그 과정에서 길이 사라졌다 나타났다 반복한다. 낯선 어떤 공간에 들어갔다 나올 때 방향감각을 상실하는 경우가 특별한 것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늘 있을 법한 일이다. 하지만 시인은 금세 반성 한다. ‘어떤 장소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분명 나’에게 있음을 강조한다. 살면서 무수히 만나는 허방에서 길을 잃고 좌충우돌할 때 비로소 깨닫게 된다. ‘몇 번이고 헤매고 나서야 비로소 바른 길 불쑥 앞을 터줬던 건 아닐까’아마 그럴 거야 하고 사려 깊은 반성을 하고 있다. 열심히 달려온 삶의 방향감각을 상실했을 때 오는 난감함은‘ 터무니없다’라는 부사어‘생게망게’다. 생게망게가 주는 언어적 뉘앙스가 신선하다. 옳다고 선택한 길은 결코 옳은 길은 아니라는 자성의 변론은 ‘나의 참 아픈 방향감각’임을 고백하고 있지만 사실 누구나 한 번쯤은 이 변론에 동의하고 싶을지 모른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자주 길 잃’는 일은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충분히 그럴 것이기에 쉽게 공감이 가는 것이다. ‘방황’의 과정을 거쳐야만 ‘방향을 제시받는’데 문제는 ‘아프다’는 데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사는 시인은 이곳에서의 삶이 늘 기이하다. 기이하면서 늘 익숙하다. 아래의 시는 이국의 삶에서 뿌리내리고 살고자 부단히 애를 쓰는 ‘동안’의 모습이 한눈에 조망된다.
내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사는 동안
소떼 한가로이 풀 뜯고 잔디는 뒤덮을 듯 들판 에워쌌다
바둑판처럼 네모나게 펼쳐진 사방으로
파란만장에 가까우리라는 예감
잡초처럼 왕성하게 가지를 뻗어내고 있었다
틈틈이 아이들과 근교에 나가 가오리 연 날리며
돌아가고 싶은 마음 반향사고로 뒤집어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각오의 실톳 바짝 붙들며
풀었다 늦췄다를 거듭했다
(중략)
나는 지금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금세 도착한 것만 같은
생경스러움으로 히말라야시더처럼 사시장철 푸르러 있고
이방인에게도 다채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감상 새록새록 싹터 올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그냥 살아 내려는
결심 개개비사촌새처럼 머릿속 까맣도록 굳혀져 있다
(중략)
모든 집들이 전부 틀린 모양으로 어깨동무는 했으나 각각 토라져 앉아
그 점을 참 기이하게 여겼다
똑 같아도 이상한데 하나도 안 똑 같음이 볼수록 이상하여
나는 이상한 나라의 예상치 못한 사람들과
그들의 독특한 생에 대하여 접근 가능성을 계획하거나
친화의 등피 닦아 창문 가까이 램프 걸어 두었다
내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사는 동안
내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사는 동안
—「내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사는 동안」부분
3.
시인의 의식 한쪽은 늘 ‘가오리연’을 날리던 고향에 닿아 있다. 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돌아가면 안 된다는 대립각에 날이 서 있다. 기실 연 날리는 행위는 놀이이다. 하지만 여기선 놀이를 앞세운 자아와의 갈등과 화해의 반복이다. 놀이의 측면으로 볼 때는 그리움이 근간에 놓이지만 ‘돌아가고자’하는 강렬한 바람이 솟구칠 때는 갈등을 부른다. 줄을 당겼다가 놓는 반복된 행위가 그것이다. 다잡고 또 다잡는 현실적응의 강한 욕구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밀어 올리는 것에 다름 아니다. 허리 휘도록 열심히 벌어도 심각한 인플레로 얼마 안 되는 달러를 손에 쥘 때 ‘여름날 아스팔트보다 더 끈끈한 검질긴 느낌/신발에 자꾸만 달라붙어 마음에까지 달라붙’는 절박함에 ‘패잔병’이 된다.
하지만 시인은 새처럼 노래한다. ‘나는 지금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금세 도착한 것만 같은/생경스러움으로 히말라야시더처럼 사시장철 푸르러 있음'을 스스로 고취시키며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그냥 살아 내려는/결심 개개비사촌새처럼 머릿속 까맣도록 굳혀져 있’는 것이다. 달아나려는 다짐과 각오를 마음속에 들어앉히며 다시 길을 찾는다. 그러면서 이국정서와 현실에 눈을 떠간다. ‘모든 집들이 전부 틀린 모양으로 어깨동무는 했으나 각각 토라져 앉아/그 점을 참 기이하게 여’기는, 적응할수록 저항의 몸짓 또한 거세 곧‘기이함’, ‘이상한 나라’로 슬쩍 비켜가는 재치를 보인다.
「띠또네 가게」는 불안한 존재의 확인을 드러내는 시다. 아직 뿌리내리지 못한 이국의 흔들리는 구도 속에서 잊고 있었던 자아의 정체성을 발견한다.
조니 뎁이나 올렌도 블롬보다
더 잘 생긴 띠또
그의 가게에서 계산을 치르려고
몇 발 다가가다가
약간 발 헛디뎌 넘어지려고 했을 때
띠또의 주위에 둘러 서 잡담을 나누던
띠또의 고객과 띠또의 고객들
예닐곱 사이에서 마르가리따, 하고
띠또가 나의 아르헨티나 이름을
부르짖는 순간
그들 모두 띠또의 놀라움 실린 명령
내내 기다렸다는 듯 전광석화처럼
구원의 손길 나 향해 펼쳤을 때
(중략)
마음이 건져졌을 때는 마음으로의 수혈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것만 같아
한층 시에 가까워져야 하리라는 각오
그들의 손길처럼 나 향해 펼쳐지고 있었다
—「띠또네 가게에서」전문
이 시대에 잘 나가는 미국의 미남이자 개성파배우 조니 뎁, 매력남 올렌도 블롬보다 잘 생긴 ‘띠도’는 평범한 가게 주인이다. 그 가게에서 시인은 공교롭게도 계산 후 넘어질 찰나에 놓였다. 순간 불려진 ‘마르가리따’의 존재. 시인의 아르헨티나 이름이다. 잘 생긴 ‘띠또’의 외마디에 주위 시선이 한 곳으로 집중되고 스스로를 확인한다. 나는 누구였던가? 지금 이전과 이후의 가운데 서 있는, 넘어지지 않으려 뒤뚱거리는 이 여성은 누구인가? 자문자답 속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민으로 우뚝 선 자아와 맞닥뜨리게 된다. 늘 한 발은 고국(과거)에 걸쳐두고 다른 한 발은 아르헨티나(현재)에 놓은 채 살고 있는, 살 수 밖에 없는 시인의 현재적 모습이 확인되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 쉰다. ‘구원의 손길 나 향해 펼쳤을 때’에 서로 이미 동화된 공동체로서의 모습인 것이다. 이웃의 ‘손길’은 곧 갈등을 넘어선 화해의 손길이며 시인이 그토록 넘어서고자 했던 길이었다.‘마음이 건져졌을 때는 마음으로의 수혈/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것만 같’은 시인은 스스로를 새삼 다독인다. ‘한층 시에 가까워져야 하리라는 각오’로 세계를 응시한다.
그러나 다시 길 한 가운데서 길을 잃어버린다. 겨우 길을 찾아 들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방향감각을 상실한다. 내비게이션이 절실히 필요한 사각구도에 갇힌다.
차도에 발 내 딛자
비옷 자락 우격다짐으로 붙잡아 버리는 자동차의 왼손
-눈물 뚝뚝 떨구며 어리광 섞던 비의 칭얼거림에 한 나절을 헤맸더니
눈앞이 다 깜깜해요 내비게이션 하나 달아 주셔요.
(중략)
크게 내키진 않지만
당장 내비게이션 하나 달아주면
나 빗발치는 빗줄기의 심포니 속을 씽씽 달리며
허청허청 방황할 자유는 계속 남는 것일까
—「내비게이션」전문
긴 여정에 자동차 없이 목적지에 다다르기란 참으로 난감하다. 그러나 자동차가 있다하더라도 방향 설정의 불명확은 더욱 난감하다. 그리하여‘눈물 뚝뚝 떨구며 어리광 섞던 비의 칭얼거림에 한 나절을 헤맸더니 눈앞이 다 깜깜해요 내비게이션 하나 달아 주셔요.’하고 사정한다. 누구를 향해 던진 부탁인가. 비오는 날이면 앞은 더욱 흐리기 마련이다. 직진이든, 우회전이든, 좌회전이든 할 텐데 앞은 다 지워졌다. 시인은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나 방향상실에 난감하다. 내비게이션만 있다면, 하고 간절히 희구한다. 없던 길이 무수히 생겨난 요즘 기존의 방향감각으로, 표지판으로는 가고자 하는 길을 제 시간에 맞춰 가기 쉽지 않다. 에돌아가는 것만도 다행이다. 낯선 길에선 아예 찾다가 지쳐 포기하기 십상이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설정한 목표지점에 다다르기 위해서 내비게이션은 필수적이라는 시인의 발상이 신선하다. 삶의 길 찾기에 은유로 해석되어지는 ‘내비게이션’의 효용은 시인의 방향표지판이다. 하지만 ‘당장 내비게이션 하나 달아주면/나 빗발치는 빗줄기의 심포니 속을 씽씽 달리며/허청허청 방황할 자우는 계속 남는 것일까’하며 의문부호를 단다. 정직하게 분명하게 가시화된 목적지를 향해 단숨에 달려간다면 시인만이 공유하는 화려한(?) 여백의 공간인‘허청허청 방황할 자유’는 박탈당하지 않을까 우려되는 것이다. 시인은 그 장소가 어디가 되었건 길 찾기의 선상에서 에너지의 원천이 되기도 할 ‘방황’을 그려낸다. 하지만 곡진한 ‘방황’의 의미가 함축적 의미를 더하기 위해선‘허청허청’은 그다지 필요치 않은 수식일 터이다.
갈등과 화해는 삶의 지점 어디에서나 상승과 하강의 곡선을 긋게 마련이다. 아래「현지인들」은 시인이 살고 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민을 관찰자적 입장에서 토로하고 있는 시이다.
아삭아삭하고 사근사근하기는
자른 지 여덟 시간 동안 하얀 속살 유지한다는
신품종 사과 '질투'처럼 해반지르르
곱다랗기보다 드센 편에 속하나
곧게 위로만 뻗는 삼나무처럼
자존심의 껍질은 갈색
긍지의 잎은 바늘과 다름없이 뾰족뾰족
성질머리는 강파른가하면 고고하여라
쌀밥조차 쫄깃쫄깃 찰지면 질색이고
절대로 안 붙는 독립된 밥알 선호하며
그런 쌀일수록 비싼 축에 들어서
그들의 국민성을 절로 절감하게 만드는
(중략)
사과와도 같고
삼나무와도 같으며
잘 안 붙는 밥알처럼
(중략)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내가 알거나
또는 모르기 마련인
현지인들
—「현지인들」전문
한 편의 시에서‘사과’와 ‘삼나무’와 ‘밥알’에 비유되고 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사람들. 시인의 눈에서 독특한 개성적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질투’라는 이름을 가진 사과는 매우 특이한 신품종이다. ‘아삭아삭하고 사근사근하기는/자른 지 여덟 시간 동안 하얀 속살 유지하’기 때문이다. ‘아삭하고 사근한’ 것이 기존의 사과와는 사뭇 다르다. 삼나무의 경우, 본능적 속성이 곧게 위로만 뻗는 것인데 ‘자존심의 껍질은 갈색/긍지의 잎은 바늘과 다름없이 뾰족뾰족/성질머리는 강파른가하면 고고하’다. ‘밥알’은 우리네 찰진 밥알보다 독립된 밥알, 즉 안남미 같이 서로 붙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을 종합해 현지인들의 특성을 풀어낸다. ‘보일 듯 감춰진 듯/더욱 뚜렷하게 부각되는’ 이들의 국민성이 시인의 눈에 새삼스럽다. 파악된 그만큼 현지인들과 점점 밀착되고 있는,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동화되어가고 있는 적응력을 드러낸다고 하겠다. 시인의 길 찾기가 현지적응력을 통해 잠시 주춤하고 있다.
4.
하지만 다시 길 찾기의 여정이 시작된다. 잘 살아낸다는 것은 한 곳에 적응되었다 싶으면 보다 더 나은 삶으로 이동하는 것을 말한다. 삶의 질이란 늘 숙명과도 같아서 잠시도 게을리 할 수 없다. 아래의 시 「고도를 기다리며」는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머리에 제초제 뿌린 현지인 청년
며칠에 한 번씩 붙박이처럼 서서
기다림이 어떤 것인지 혹독한 연습
거듭하고 거듭한다
우리 가게 앞 화단의 난간에
한 발 부단히 얹고
(중략)
그가 서 있는 작은 섬을 끼고
크고 작은 차들이 파도처럼 출렁이며
쉼 없이 밀려오고 밀려간다
나는 오늘도
기다림으로 지친 게 아니라
기다림으로 마냥 설레어 있는 그를
등대처럼 우뚝 서서 자꾸만 내려다보고 있다
그는 진정 고도를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
정작 고도를 기다리는 건 내가 아닐까?
세상이라는 바다에
외로운 섬으로 떠 있는
내 가게 앞 화단에
한 발 부단히 얹고 서 있는
(하략)
—「고도를 기다리며」전문
가게 너머 현지인 청년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시인의 눈은 어느 새 탐색의 여정에 들어가 있다. 첫 연의 내용이 예사롭지 않다. ‘머리에 제초제 뿌린 현지인 청년/며칠에 한 번씩 붙박이처럼 서서/기다림이 어떤 것인지 혹독한 연습’을 반복하고 있는 모습은 시인의 삶에 그대로 전이된다. 시인의 가게 앞 화단의 난간에 서서 그는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가. 뿐만 아니라 그는 ‘누구인가?’의문부호를 단다. 그 다음 ‘행여 고도를 기다리는 것 아닐까?’생각해보는 것이다. ‘기다림’, 타자의 삶을 들여다보며 나의 기다림을 만나는 이러한 탐색 작업은 그 속에 내재한 길찾기의 간절한 염원이 없고서야 생각하기 어렵다. 따뜻하고 긍정적인 시선으로 그 기다림을 스스로 용해시킨다. 시인은 현재를 직시하며 미래를 견인한다. 기다림을 ‘설레는’ 것으로 치환시키는 것이다. 이제 시인은 여유가 생겼다. 스스로 ‘등대’로 자처한다. 이것은 기다림이 무엇인지 아는 이만 생각할 수 있다. 그러기에 ‘세상이라는 바다에/외로운 섬으로 떠 있는/내 가게 앞 화단’을 보아낸다. 시인이 속한 가게는 저 드넓은 세계 속에 한 개 외로운 섬이 아닌가. 이국 청년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한인 타운의 대로변
까라보보 거리의 중앙분리화단에
어른 떡갈나무 다섯 그루와
어린 떡갈나무 20여그루 터를 잡고
모여 산다
(중략)
몇 십 년 후
우리의 후세들이 한국말 양념처럼 얹어
서반아어로 뚜알뚜알 말하며
우리의 한인 타운을 잘 지켜낼 수 있을까?
인접국 이민자들로 구성된 날치기나 퍽치기가
기필코 한국인만을 겨냥하며
(중략)
이방인이 이방인만을 표적으로 삼는
한인 타운 대로변
청소년 떡갈나무들
시침 뚝 뗀 채 잘 자라고 있다
—「청소년 떡갈나무들」부분
시인의 역동적인 길 찾기의 탐색은 자신에게만 국한시키지 않는다는 데서 빛난다. 한인 청소년들을 향한 따뜻한 모성애적 애정을 보인다. 한인 타운 대로변에‘어른 떡갈나무 다섯 그루와/어린 떡갈나무 20여 그루 터를 잡고/모여 산다’며 적응력이 뛰어나며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떡갈나무에 한인을 비유시키고 있다. 그 어느 식물들보다 뿌리를 잘 내리며 혹한도 견뎌내는 어린 떡갈나무를 보면서 내심 대견해 하고 있다. 다른 이민자들의 범죄 대상자로서 한인이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한 것을 시사하면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다. 하지만 어떠한 위험요소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괘념치 않고 제자리를 꿋꿋하게 지켜내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온몸으로 풍파를 겪어낸 부모세대가 그랬듯 다음 세대 역시 그러할 것이라는 믿음과 염려하는 마음이 따뜻하게 전달되고 있다.
맹하린의 시집은 도시적 서정에서 발견되는 뿌리내리기, 길 찾기의 여정 외 숨 가쁜 일상 속에서도 자연과 교감을 이루는 시인의 여유를 만날 수 있다. 시 「풀꽃의 미소」, 「모과」, 「고드름」, 「소나기」, 「담쟁이」, 「해바라기」, 「함박눈」, 「동백꽃」, 「귀뚜리스트」, 「바위」등은 시인의 원형적 자연서정이 잘 드러나는 작품들이다.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 객관적 상관물의 원형들은 시인의 품성이 그러하리라는 짐작을 갖게 한다. 특히 귀뚜라미를 의인화 한「귀뚜리스트」는 ‘혼신 바쳐 사명감 다하며/낮에만 쉬는 열정적 일꾼’을 통해 자신을 투사한 것으로 보인다. 시인은 순수 자연 서정에서조차 일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한 작품이다. 그 외 「바위」를 경전으로 읽는, 궁극적으로 평화를 희구하는 시인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5.
시인의 길찾기는 유년에 그 뿌리가 닿아 있다. 귀소본능의 요소가 인간에게 ‘그리움’을 생산해내고 있다면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상실과 박탈은 끝없는 허기를 불러온다. 또한 본질적 욕망과의 충돌을 야기한다. 의지에 반(反)하는 이 충돌은 의지가 강할수록 충돌에 가속이 붙는다. 고향을 향한 맹하린 시인의 다음의 시편들을 살펴보면서 그리움에 절은 한 인간을 만날 수 있다. 한 여성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아이덴티티(identity)를 볼 수 있는 것이다. 특정 지역인 「백도」, 「오동도」, 「향일암」과 더불어「조각달의 표정되어 뜨다」, 「어머님의 고향」, 「할머니」, 「원두막으로」, 「호두나무」에서 발견되어지는 그리움은 귀소본능으로 얼룩져 있다. 아래의 시를 보자.
어머니로 하여금 목포는
한 번도 가 본적 없고
앞으로도 갈 수 없는 도시와는
생판 다르다는 인식 속에 존재하며
매양 서 있었다
해넘이를 배경으로 갯벌에서
금방 떠나온 사람처럼
어머님은 언제나 몸빼바지 차림으로
돌아갈 준비 항시 되어 있었다
(중략)
—「어머님의 고향」부분
시인의 그리움은 그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 모성적인 것에 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의 근원/나의 표본/나의 강/나의 등경/사랑하올 나의 할머니(「할머니」) ‘해넘이를 배경으로 갯벌에서/금방 떠나온 사람처럼/어머님은 언제나 몸빼바지 차림으로/돌아갈 준비 항시 되어 있/는 것이다. 시인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유년을 향해 서 있는 모습이 어머니의 그것과 흡사하다. 이미 떠나온 고향에 대한 애착과 그리움은 몸속 깊이 각인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목포를 전설과 같이 영원히 품에 안고 시인의 몸속 깊이 새겨졌다. 어찌 잊고 살랴만 잊는다고 잊힐 성질의 것이 아닌 것이 그리움이다. 드러내놓고 그리워하는 것이 차라리 덜 그립다. 하지만 그러기엔 그리움이 너무 깊다. 친인척을 호칭하는 시도 여럿 보인다. 이들에 대한 그리움의 질량도 만만찮을 것이다.
그 외 수십 년의 이국 생활에서 정착을 하면서 비교적 정서적으로 안정을 보이는 작품들이 있다. 「흘러 간 시간을 초대하여」, 「한인 타운에서」, 「행복에 대하여」, 「자화상」, 「펼쳐진 하늘 아래서」, 「펭귄들의 나날」, 「약속, 변화 추구하는」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 「행복에 대하여」는 최근의 심정을 압축하여 보여주고 있는 듯 하다.
행복하면
시가 내 안에서 빠져 나갈 줄 알았다
그런데
행복한데도 시가 써진다
행복해서
다른 데로 눈길 돌리려 해도
시가 자꾸만 나를 잡아당기며
제 앞에 붙들어 앉힌다
(중략)
그래도 나는 행복하여라
어찌 됐던 끝끝내 시를 쓰리라
이름만 바꾼 행복일지라도
시를 못 써낼 이유는 없다
아름답거나 화려함을
시로서 표출하려던 의도 아닌 바에야
(중략)
한 줄기의 절망
한 움큼의 고통이
늘 나를 깨어 있게 하는데
—「행복에 대하여」부분
타향살이가 아무리 편한들 내 고향만하겠는가. 하지만 시인은 행복이라는 시어를 즐겨 차용한다. 한 편의 시에서 행복이라는 어휘가 일곱 번이나 반복되었다는 것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솔직하게 토로하고 있는 행복은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내면에서 차고 넘치는 질량이다. 행복하면/시가 내 안에서 빠져 나갈 줄 알았다/그런데/행복한데도 시가 써진다고 고백한다. 행복이란 인위적으로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시를 써서 더 행복하다는 시인의 함박웃음은 행복을 통해 세계의 확장을 불러오고 있다. 삶의 군더더기를 벗어버리고 조그만 알맹이에 만족하고 있는 자신을 확인하면서 사실 행복이란 그다지 멀리 있지 않으며 대단한 것도 아니라는 깨달음을 보이고 있다. ‘내 행복이란 게/참 보잘 것 없’음을 고백하고 있지 않은가.
맹하린 시편들은 참 소박하다. 화려한 미사여구를 차용하지 않고서 내면의 아름다움과 외로움, 그리움, 사랑, 성찰을 잘 풀어내고 있다. 이미 소설가로서의 필력을 보였던 바, 유창한 흐름을 따라 하고 싶은 말을 주저하지 않는다. 때론 직설적이면서 때론 에돌아가는 마음의 행로를 그다지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다. 시인은 타고난 역동성을 절제하는 것에 익숙하며 주어진 것에 만족하기보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세계를 향한 시인의 삶의 진정성은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다. 남들보다 한 발 앞서 노력하고, 남들보다 앞서 가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채찍질이 뼛속 깊이 내재되어 있는 듯하다. 꿈틀/파도치듯 일렁이는 변화로의 도약(「약속, 변화 추구하는」)을 위해 세상과 스스로를 향해 당당하게 약속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다. 끝없이 미지의 나를 찾아 끝없이 미지의 세계를 탐색하는 여정은 더욱 힘든 일이다.
산다는 것은 무수한 상처를 안으로 다독이는 것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하고 홀로 감내하는 것이다. 이역만리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수십 년을 살아가고 있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인 맹하린 시인을 직접 보지는 못하였지만 만난 것 같은 것은 분명 시의 힘일 것이다. 어떠한 상처라도 상처로 두지 않고 소통의 창구로 바꾸어 놓는 재주를 가진, 모국어에 대한 애착이 문학에 현현되어 풀고 맺는 남도소리 같은 고백들. 이야기 형태의 시를 통해 시인의 도전과 길찾기, 그리고 그 과정에서 확인되고 있는 지난한 탐색의 여정이 더욱 새롭게 꽃피기를 기대해본다.
-초여름- |
친애하고 공경하고 소중한 존재이신 님들!!!!!! 나도 아는 나 나도 모르지만 알아야 할 나 나도 아는데 모르고 싶은 나 나도 안다고 생각하지만 모를 때가 더 많은 나 그런 나를 가장 잘 파악해 준 것만 같아 가끔은 들여다보는 평론입니다. 내게 행운이 있었다면 글쟁이가 된 일 때로 아픔이 있었던 날들 아름다운 세상이 함께라는 사실 가족을 가졌다는 것 그대들을 알게 된 숙연 진정 하루하루 매 시간이 너무 예뻐요 또한 함부로 보내기는 너무도 아까워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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