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30일 월요일
노동법
맹하린의 생활단상(生活斷想)
아르헨티나 중앙일보
1996년 3월 6일
장사를 하는 조건에는 그다지 거치적거림이 없을 정도로 현지 언어에 접근했다고 내 나름대로 착각에 빠져 살지만, 특이한 분야에 부딪치면 전혀 들어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낱말이 잡힐 듯 잡히지 않아 나도 모르게 당황할 때가 있다.
시청이나 세관 정도면 그래도 적당히 의사소통을 해내는 편인데, 유독 변호사를 만날 경우 당혹감은 배가(倍加)되고 만다.
'아' 다르고 '어' 다른 정도가 아닌, 말 한마디가 결정적인 판단을 좌우(左右)하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나는 통역사로 아들을 대동한다.
그 또한 문제라고 할 수 있는 현안이라는 것은, 아들은 하라는 말을 안 할 때가 있고, 하지 말라는 얘기는 꼭 해내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그게 바로 이민 1세대와 2세대의 정서차이가 아닐는지.
복잡한 노동법에 묶여 있는 현지 사정 때문에 가끔 잊을 만 하면 종업원 문제가 대두된다,
그럴 경우 필수적으로 변호사를 내세우고 해결책을 모색해야하는 애로점은 분명 나 혼자서 겪는 일은 아닐 것이다.
보통 때는 형제 같고 조카 같이 다정다감한 종업원들이지만, 보상금이나 보너스 문제에 부딪치면 치밀하게 자기주장을 내세우는데 지나치리만큼 철두철미해서 저절로 넌덜머리가 생기기 마련이다.
가능하면 종업원들에게 양보하면서 마찰을 피하려는 내 의도가 제대로 먹혀들어 종업원들과 이렇다 할 불편한 지경까진 가지 않았었는데, 혼전임신한 직원 때문에 덴겁하게 혼이 난 적이 있다.
한 달에 서너 번씩 병원에 간다면서 결근하는 일은 다반사이고, 오랜 안정을 취해야한다는 의사의 진단서만 있으면 한 달이 아니라 두 달이라도 휴가를 줘야 했다.
월급은 월급대로 지불하고 임신보너스도 월급의 두 배였다.
아이를 낳기 전과 후의 몇 달은 아예 나타나지도 않으면서 월급날에는 어김없이 나타나는 너무도 당당하고 의젓한 그 표정과 태도라니.
그럴 땐 내 기분이 좌지우지해서일까.
그 종업원은 임신한 배가 더 나와 보이도록 일부러 배를 불쑥 내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야말로 '책상위의 오뚝이'가 아니라 '우리 가게 종업원 우습구나야, 배는 불쑥 내밀고' 의 노래라도 터져 나올 판국이다.
현지 노동법이라는 게 고용하는 사람 쪽을 고려한 보호수단이 아니라, 노동자에게 복리(福利)가 제대로 안겨지도록 유리한 방책을 세워 놓았기 때문에 웬만큼 느긋한 성격이 아니면 사용자 측에서 일찌거니 두 손 들고 항복을 선언하도록 만들어졌다.
이 일 저 일에 신경 쓰고 시일을 끄느니, 차라리 보상금을 내주어 파면시키는 게 그나마 수월한 일이 된다.
문제가 된 일들의 마무리 역시 필수적으로 변호사를 대동해야하고 구비서류에는 기필코 서명을 받아두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서명이 빠진 서류란 또 다른 문제의 여지를 야기시킬 확률이 다분한 게 아니라 그런 서류 자체가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다.
나의 지인은 집으로 퇴근하던 종업원이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출퇴근시간 전후의 1시간 안에 일어난 사고는 고용인도 보상해야 한다는 법조항에 걸려 가해자 측과 맞먹는 대가를 치렀다고 한다.
습여성성(習與性成).
여러 가지 복잡 미묘한 가닥으로 점철되어 있는 현지 노동법이 보다 더 완화의 전환점(轉換點)으로 들어서지 않는 한 경제적 성장과 산업혁명은 먼 미래의 일이 되리라는 관점이 당연지사처럼 밀려든다.
새롭고 획기적인 컴퓨터 시설과 인조인간 로봇을 이용하는 방식이 점차적으로 발달되어, 노동법의 완충지대가 아니라 노동자의 수를 줄이는 시대로의 변혁이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사람이 해야 할 일을 기계가 대신할 수 있는 분야는 한계가 있을을 어쩌랴.
이 꼴 저 꼴 거부감이 생기면 종업원도 두지 않고 혼자 일하면서 살거나 가족끼리만 일하면 가장 편할 것이다.
아무리 그러해도 혼자서 이룩할 수 있는 일은 많지가 않다.
어느 사회, 어느 일에 있어서도 공생공존(共生共存)의 관계는 결코 무시할 수없는 필연의 과제임을 이래저래 인정하게 된다.
아르헨티나 정부가 노동법을 강화시키는 복리사업에는 성공을 거뒀을지 몰라도 노동정신을 개선하는데 있어서의 발전에는 다소 미약한 점 없지 않아 있다.
분명한 것은 아르헨티나는 노동법의 천국도 되지만, 노동자의 천국이라는 사실이다.
종업원들의 배포 큰 요구를 일일이 다 받아 주라는 정부의 선심과 배려라는 게, 빈민을 위한 보호정책으로만 부각되는 방향으로 치닫는 양상을 지켜보면서, 양날의 칼이 될 확률이 매우 크다는 걸 새삼 깨우치게 된다.
해묵은 빈티지 오디오의 상쾌한 음색이 달콤한 계절이다.
노동법을 잊고 내 주위와 가족에게 더욱 관심과 아낌이나마, 이제라도 쏟아야겠다는 생각을 곰곰 해내게 된다.
2012년 1월 29일 일요일
내 마음의 텃밭
맹하린의 생활 산책
아르헨티나 한국일보
1996년 9월 7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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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 항아리 판매! 좋은 값에 드립니다. Asamblea oooo번지. |
일간신문을 뒤적이다가 위와 같은 광고를 보고 서둘러 항아리를 보러 갔다.
중간 크기는 50달러, 약간 큰 건 100달러였다.
유약을 잘 발라서인지, 자르르 윤기가 흐르는 게 단박에 소유욕을 불러 일으켰다.
암팡지게 야무지고 예쁘긴 했으나 지나친 가격이라는 단정이 뒤따르게 되어 아쉽지만 포기했고, 이내 마음도 바꿨다.
아무리 배를 타고 지구를 반 바퀴 돌아서 옮겨 놨다지만 너무 터무니없는 값이었다.
밖으로 나오는데 마당 한쪽에 어쩌면 눈에 익은 듯도 싶고, 약간은 낯이 선 것도 같은 풀잎들이 꽃샘추위에도 연두 빛으로 밭을 이루어 파릇파릇 보기에 탐스러웠다.
화초라면 잡초까지도 사랑스럽게 여기는 나는 몇 포기 얻을 마음에 발길을 다시 집안을 향해 돌리게 되었다.
그댁의 따님인 소녀가 마침 외출하려다가 나와 맞닥뜨렸다.
"저어! 이 꽃모종의 이름이 뭔지 아세요?"
"아, 그거요? 내 엄마가 그러는데 질경이라고 해요."
"질경이? 한국의 시골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그 질경이 말인가요?"
"나는 잘 몰라요. 내 엄마가 더 잘 알아요. 엄마한테 말해요."
한국말이 서툴었지만 소녀는 또박또박 대답을 잘했다.
때마침 따라 나온 소녀의 엄마에게서 나는 질경이 몇 포기를 선뜻 얻을 수 있었다.
"여름에 한국 나갔다가 친구한테서 이 질경이 씨앗을 얻었어요. 화초가 아니고 나물이나 약용으로 쓰인다고 했어요. 있잖아요. 질경이처럼 억세다는 풀. 그런 뜻을 갖고 있어선지 나물을 해 먹으면 몸에 좋다고 해요. 씨를 차처럼 달여 먹으면 신장염에 좋다나 봐요."
비록 항아리는 값이 안 맞아 못 샀지만 그때 몇 포기 얻어온 질경이가 금세 포기를 늘여나가고 씨까지 맺어 차츰차츰 번져나가다가 모판을 연상케 하는 강렬한 색조를 이루게 됐다.
나는 그걸 나물이나 약용으로 사용하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틈날 때마다 바라보기도 아까워하며 환희작작한다.
진초록의 그 강렬한 색채도 색채거니와, 강한 생명을 지닌 번식력 또한 나를 탄복시키기에 충분했다.
내가 어릴 땐 질경이가 피워 올리는 기다란 줄기가 꽃이라는 생각은 상상도 못했었는지도 모른다.
기다란 기둥을 갖고 있는 풀이라고만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 기둥을 따서 길게 땋아 여러 가지 꽃들을 곁들여 머리에 얹는 화관을 만들어 놀던 소꿉놀이 기억이 새롭다.
나는 이윽고 어린 시절의 나로 잠시 돌아가 보기도 한다.
내 마음을 가장 감동시켰던 건 강과 산과 들이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특히 자운영이 심겨진 논들에게서 언제나 감격적인 반응이 앞섰다.
자운영 꽃들이 파르라니 꽃을 피우고 난 한참 후엔 소를 몰아 쟁기로 땅을 뒤엎는다.
그렇게 되면 그 어떤 비료보다 월등한 생장을 촉진하는 거름구실을 한다는 사실은 훨씬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 보라와 자주와 하양이 섞인 자운영 꽃들의 차갑고 깔끔하면서 슬프게 화려한 색조는 내 기억의 터전에 그립고 그립게 만개해서 때때로 보랏빛 강을 이루고 자줏빛 들판을 펼쳐져 왔을 것이다.
지금에야 걱정도 내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지만, 내가 머물고 있는 이 복잡한 세상을 벗어나 다시 그 어린 시절로 돌아가 살고 싶을 때가 내 생의 여정 중에 여러 번 있었던 것 같다.
많은 것을 획득하려고도 하지 않았는데 많은 소중한 것을 잃게 되던 날들도 분명 있었다.
어느 시인이 말했듯이 인생을 놓치는 방식이 곧 인생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껏 잃은 것보다는 더 많은 귀한 것을 간직하고 있다고 자긍한다.
하물며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보자면 무소유중의 무소유라고 할 수 있지만, 나 스스로 판단하기엔 부자 중의 부자가 바로 나인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신에게서 받은 게 너무도 많고 흡족하다고 언제나 감사하는 성격을 간직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그때는 아무 걱정도 몰랐던 게다.
무엇보다 고요한 나날들이었으니까.
고국을 떠나와 사니까 하찮게 여기던 질경이조차 새롭게 소중해지는 나날들이다.
뜻하지 않은 나라, 모든 게 나직한 나라에 당도하여, 겸허로이 일상을 맞고 보내는 틈틈이 나는 나의 작은 뜰을 고즈넉이 자주 지켜 보게 된다.
또한 내 화단 뿐아니라, 마음밭까지 예쁘게 장식해 주고 사는 꽃나무들을 애틋한 마음으로 바라보게도 된다.
나는 마음속에도 텃밭을 일구고 살아가는 셈이다.
질경이처럼 억세고 질긴 잡초까지 아끼고 북돋아주는 텃밭을.
2012년 1월 27일 금요일
SUBE(대중교통수단 단일전자임금제도)
맹하린
구정(舊正) 전날은 아들의 생일이었다.
아들은 그동안 생일에 적절할 듯한 어떤 선물을 해도, 쓸데없이 왜 아까운 시간과 돈을 낭비하나, 그런 눈치만 보여왔다.
그리고 옷이나 운동화를 선물하면, 다시 또 사들일까를 염려한 나머지 1년이 지나야 겨우 그 옷이나 그 운동화를 사용해내는 기질이 있었다.
철없는(?) 어미의 버릇을 단단히 좀 고쳐주려는 의미에서 그랬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예외적이면서도 특별한 존재니까 자기처럼 살지는 말라고 그런다.
(물론이고 말고. 나는 내가 하고 싶은대로 행동하며 살기를 좋아하지, 아무렴.)
그리하여 아들은 언제나 거의 단벌처럼 옷을 입고, 운동화 하나를 6년 정도 신어낸다.
지금은 미국에 사는 동서가 이 나라에 살 때,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는 , 그녀의 아들들이 사들인 유명메이커의 한국 옷이나 명품 운동화를 두어 보따리 정도 가져다주고는 했었다.
그런데 그건 더 안 입고, 더욱 안 신어 내면서 곧장 이웃돕기에 보내는 걸 아들은 거침없이 단행해 왔다.
명품을 싫어하기도 하는 데다, 본인은 양반이기 때문에 남이 입거나 신던 신은 절대 가까이 안한다는 게 이유라면 이유였다.
생일이 닥치면, 나는 생각다 못해 봉투라도 건네주는 수밖에 없었다.
아마 그런 식으로 생일을 맞고 보낸지 몇 년쯤 되었을 것이다.
물론 미역국이나 잡채나 생선전 같은 , 주로 아들이 즐기는 생일식탁은 빠짐없이 준비해 준다.
하지만 케이크도 사양한다.
나는 100 페소부터 소중하게 여기는데
1페소조차 소중하고 큰 액수라고 생각한다.
아들은.
아들은 그렇게 건네주는 돈으로 책을 산다.
물론 한글이 딸리니까 서반아어나 영어로 된 서적이다.
그냥 책이 아니라 주로 고전이고 헌 책일 때가 많다.
아들과 내가 가장 마음이 잘 통할 때는 각자 다른 언어로 된 책을 읽고 난 후, 서로 느낀 감상을 진지하게 주고받을 때다.
호머의 일리아드 오디세이를 가장 흥미롭게 읽었다는 아들
아들이 얼마나 수준 높은 철학책들을 읽어내는지, 책 좀 읽었다고 자부하는 나지만 아들 앞에 서면 오메, 기죽어! 이다.
임진년이 시작되었을 때의 아들 생일날, 나는 봉투에 3백 페소를 넣었는데 그만 몇 분도 지나지 않은 사이에 반납을 받게 되었다.
불경기에 무슨 선물이 따로 필요하냐면서 필요하면 그때그때 타서 쓰겠다고 나온 것이다.
아들은 몇 년 동안 과외지도비를 모아둔 저축이 있어 그러는지도 모르겠다.
이건 결코 자랑이 못된다. 자랑이라기 보다 오히려 수치가 아니려는지.
하지만 나는 글쟁이니까 말하고 싶은 사항은 말하게 된다.
이리도 문명이 날로 첨단시대를 향한 발전과 성과를 거듭하는 세상에, 이런 인생도 있다는 걸 얘기하고 싶을 뿐이고.
또한 나처럼 뒤늦게 고생하는 것보다, 미리 당겨서 고생하는 것도 매우 바람직한 세상공부라고 말없이 두둔하는 심정도 없잖아 있을 것이다.
각설하고.
아르헨티나 정부는 수도권의 시내버스와 기차요금을 오는 2월 10일부터 전면적으로 인상하리라고 전격 발표했다. 1.5페소 정도 하던 금액이 4페소까지 대폭 오르리라는 전망이다.
단지, SUBE 카드를 이용하는 승객들에게는 인상을 적용시키지 않겠다는 별도사항이 첨부된 발표였다.
SUBE 카드를 배부하게 된 날의 우체국은 가히 장사진을 이루었다.
24일 정오경에는 SUBE 카드가 바닥이 났다는 안내문이 일부 우체국의 정문에 붙여지기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5월의 광장 근처의 배부사무실에서는 1천 개의 SUBE 카드가 짧은 시간 안에 재빠르게 나눠졌다고도 한다.
많은 수의 사무원들은 새벽 4시에 줄을 서서 오전 10시에나 배부 받을 수 있었다고 현지 TV의 뉴스는 속보처럼 전하고 있다.
정부는 이틀동안 270만장의 카드가 배부됐다는 중간발표를 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당일에는 줄 서야 하니까 하루 이틀 지난 후에야 가봐야겠다고 아들은 중얼댔었다.
26일인 어제, 인터넷을 검색하여 가장 가까운 장소 세 군데를 적던 아들은 뜻밖에도 반시간 안에 돌아 왔다.
첫 번째 갔던 곳은 이미 끝난 상태였지만. 디렉토리오 거리에 있는 문방구는 의외로 한가하여 금방 신청을 했노라는 설명이었다. 그곳조차 얼마 남지는 않았다면서, 카드를 보여 주기까지 하더라는 얘기였다.
AFIP(연방세입청)과 ANseS(사회보장국)에서 소비자의 정보를 전산화 시킨 후, 정부보조금 지원을 최대한으로 제한하려는 계획 아래, 이와 같은 제도가 긴밀하게 구성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 일리가 깃든 창출이라고 나름대로 수긍하게도 된다.
느닷없이 나는 달러의 변동도 적고, 물가의 변동지수도 낮은 나라에 살고 싶어진다 .
하지만 어쩌겠는가.
좋은 점만 바라보며 참고 참으며 살자니, 이리도 거추장스런 일에까지 신경을 잠시라도 빌려 주며 지내야 함을 새삼 인식하게 된다.
나는 한국이 좋다고 하는데, 아들은 이 나라를 몹시도 아끼고 사랑까지 해내고 있다.
한 번도 이 나라에 대해서 투덜대는 모습을 못 보았다.
분명한 것은 나도 아들도 이 나라에게 크게 바라는 게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여기까지 오게 되었나 보다.
다시 참고 참으며 살아 봐야지 싶다.




2012년 1월 26일 목요일
2세들
맹하린
이반은 아들의 대자(代子)다.
이반이 유아영세를 받을 때 아들이 대부(代父)를 서 준 것이다.
그 토록이나 어렸던 이반이 벌써 대학 2년생이 되었다.
가끔씩 친구들을 몰고 우리 가게에 오는 이반.
어제도 친구들과 함께였다.
자동차 안에 두 명, 가게에 함께 들어온 두 명.
이반은 주문할 때 말한다.
"Cumpleanos de mi viejo, tia(내 아빠 생일이에요, 이모)!"
올 때마다 매번 그 비슷한 이유를 달지만, 사실은 친구 아빠의 생일이라는 얘기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이반의 아빠는 지방도시 Tucuman에서 의류소매상을 경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반의 아빠가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유학 중인 이반을 만날 겸 의류상품을 구입하러 내려 왔을 확률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반은 매번 그런 식으로 우리 가게를 선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매우 강하게 안겨온다.
나는 그럴 경우 이반을 위해 만드는 꽃을 훨씬 더 풍성하게 보태는 편이다.
이반의 여동생 테레지나는 예전에 내가 옷가게를 할 때, 비둘기들에게 모이를 주자고 날마다 찾아오던 아기였었다.
여기서 내가 정작 얘기를 펼치려는 건 이반의 성격이랄까 태도에 대해서다.
이반은 나를 띠아=Tia(이모)라고 부르는데, 이반이 한 번이라도 왔다 가면 내 머리나 가슴은 이반이 말끝마다 붙여준 띠아라는 호칭의 여운에 취해 정신이 붕, 떠있을 지경이 된다.
이반은 한국말이 딸려도 약간 딸리는 정도가 아니다.
그래서 주로가 아니라 전부 까스떼쟈노(서반아어)를 사용하는데 중요한 것은 말끝마다 띠아가 붙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Si, Tia(네, 이모).
"Quiero Ramo Redondo Tia( 둥근 다발을 원해요. 이모)."
Muy lindo armo Tia(참 예쁘게 만들었어요, 이모)
Hasta Pronto Tia, Te Quiero, Tia(곧 다시 만나요, 이모. 사랑해요, 이모)
....서반아어문으로 쓰다 보니까 , Tilde(엑센트 부호)가 여럿이나 빠졌다. 한컴엔 그게 없다. 새로 찾기가 복잡해 그냥 쓴다......
그렇지만 나는 이반의 그런 말투나 자세를 절대 아부로 여기지 않고 친절과 존칭으로만 기껍게 받아들인다.
아들의 친구 아드리안은 또 어떤가.
아르헨티나의 사립대학에서 컴퓨터를 전공하고 대형슈퍼 '디스코'에서 일하다가 몇 년 전 미국으로 재이민을 간 아드리안도 참 특이한 편이다.
아들을 만나러 오거나 만날 약속이 있을 때마다 자동차로 아들을 데리러 오고, 극장이나 외식을 한 뒤엔 꼭 집에다 데려다 주기까지 했던 아드리안. 예쁜 애인이 언제나 함께였다.
그런데 아드리안은 아들 뿐 아니라, 나까지도 집에다 데려다 주기를 서슴치 않았다.
(아들은 자가용에 대한 필요를 전혀 못 느끼는, 아주 엉뚱한 성격이다.)
아들과 외출할 시간도 꼭 내 퇴근시간에 맞춰서 정하고 우리 가게로 오고는 했다.
처음엔 부담을 줄여주고 방해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일부러 사양했었다.
거절할 때마다 몹시 난처한 얼굴이 되었으므로, 결국 성의를 무시하진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뜻대로 맡겼었다.
( 어느 날의 삽화가 그립게 떠오른다.
결혼식 꽃장식을 맡은 날, 아들과 신혼차 리본을 다는 중에 소낙비가 내렸었다.
시간을 미룰 수도 없었다. 약속 시간보다 늦게 나타난 신혼차였다.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때마침 도착한 아드리안은 트렁크에서 우산을 꺼내 자기도, 친구도 아닌, 나를 내내 우산으로 받쳐 주고 있었다. 예쁜 애인은 차안에 남아 있었고.
그날, 아들과 아드리안은 비를 흠뻑 맞아야 했다.
나는 소나기인지 감동의 비인지가 마음안으로 자꾸만 흐름을 감지했었다.
마음안에 소나기를 가장 많이 맞은 사람은 단연 나였다.)
아드리안은 말끝마다 띠아가 아니라 네, 가 붙는다.
하지만 네, 가 한 번만 붙는 경우를 결코 못보고 못 들었다.
"네네."
"네네네."
그렇게 두 번 아니면 세 번 붙는 네, 다.
얼마 전, 문협의 P선생과 할 얘기가 생겨 전화를 넣었다.
역시 대학생인 P선생의 아들이 받았다.
"아버지 계신가요?"
"아니요, 안 계세요."
"몇 시에 돌아오시죠?"
"아니, 안 돌아 와요."
이쯤에서 내 머리는 손톱만큼의 소리라도 전화기를 타고 전달될까를 염려하며 잽싸게 구르고 구르기를 거듭한다.
"아, 한국에 가셨어요?"
"맞아요. 그래서 안 돌아와요."
"그렇군요. 다음에 또 전화 할게요."
"그래요, 또 해요."
말끝마다 띠아가 붙고
말끝마다 네라는 대답이
두 번이나 세 번이 되고
오늘 돌아오지 않을 때는
안 돌아온다고 표현하는
우리의 2세들.
그들을 대할 때마다 마음 뿌듯한 든든함이 새록새록 생겨난다.
아르헨티나의 특성상 탈선하는 2세는 손으로 꼽을 정도일 따름이다.
누구나 생업에 열심한 부모를 닮아 절약하고 부지런하고 친절함에 익숙한 모습들이다.
그들 젊은이들의 풋풋함으로 인하여 우리 아르헨티나 교민사회는 갈수록 싱그럽게 변화를 획득하고 있는 추세다.
우리의 미래는 의외로 밝다
나는 우리의 2세들을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한국적인 선비기질과 서양적인 자유분방함이 우월한 방면으로만 뒤섞여
기본은 된
기본이 보기 좋은
기본마다 튼튼한 영역을 이룩하리라 기대하게 된다.
사람은 우선 기본부터 갖춘다는 게 쉬운 일도 같지만 특히나 어려운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밝은 미래다.
그들.
우리의 2세들이 가야 할 앞날은.
탈무드는 말한다.
'다섯 살 난 자식은 당신의 주인이고
열 살 난 자식은 노예이며
열다섯 살이면 동격이 된다.
그 다음부터는 기르기 나름인데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적이 될 수도 있다.'
2012년 1월 23일 월요일
베드로(Pedro)와 루벤(Ruben)
맹하린의 목요칼럼
아르헨티나 조선일보
2001년 1월 18일 목요일
우리 집 옆골목을 지나서 뒤로 가면 두 채의 집이 나란히 붙어 있다. 베드로와 루벤은 그 두 채의 집에 각각 살고 있는 육십 대 초반의 현지인 형제들이다. 베드로가 형이고 루벤이 동생인데, 베드로는 알리시아와의 사이에 아들 하나와 네 명의 손자를 두었고, 루 벤은 코카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 두 명에게서 일곱 명의 손자들을 두었다.
그들은 이미 정년퇴직을 한 나이에다 연금을 받는 신세다.
하지만 부모가 세상 떠나면서 유산을 물려줬다.
그렇기 때문에 상가(商街)건물에 서 나오는 월세를 양분(兩分)하여 생활하며 경제적으로는 부족함이 없고 오히려 풍족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그런데도 그들의 생활자세는 지극히 겸허롭고 매사에 도리(道理)를 잃지 않으려는 대단히 도덕적인 삶을 영위하려고 노력하는 면모가 은연 중에 보인다.
내외끼리는 말할 것도 없고 형제와 동서끼리도 서로 돈독한 관계를 이룩하고 있는데, 집수리를 할 때 보면 형네 먼저 아우 나중을 고수한다,
한국의 속담은 ‘형만 한 아우 없다’고 하지만 루벤은 베드로와 비교할 때 ‘형만 한 아우 있다’라고 말해도 크게 어긋나는 평은 아닐 것 같다.
무더운 여름날 오후가 되면 그 들 가족들은 의자를 들고 골목을 빠져나가 앞길에 앉아서 한담(閑談)을 주고 받을 때가 많다.
몇 시간이고 상관없이 물처럼 유연한 대화를 이어간다.
주말마다 방문해 오는 아들네 가족들을 위해 두 집이 합동으로 아사도(숯불구이) 파티를 준비할 때면, 숯 냄새와 불 갈비 냄새를 우리 집까지 진동하게 만든다.
아들네 가족들과도 똘똘 뭉친 가족관계를 유지하는 베드로와 루벤을 떠올리면 나마저 공연히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된다.
손자들과 골목길에서 축구를 할 때의 베드로와 루벤은, 할아버지 와 손자들이 아니라 나이를 초월 한 친구들을 바라보는 느낌이 들게 하고 , 실제로 그들은 할아버지와 손자이기 이전에 친구처럼 정답고 격의 없는 결속을 맺고 있는 관계에 익숙해 보인다.
그럴 때 알리시아와 코카, 그리고 아들, 며느리, 손녀들은 열렬한 관중이면서 응원단이기도 하다.
오래도록 동심에 가까운 무구한 마음을 잃지 않고 있는 뻬드로와 루벤.
그들이 자식 며느리와 손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어미 소가 송아지를 돌보는 지독지정(舐犢之情)이라고 하기보다, 돈독한 동맹을 맺은 사이처럼 우호적인 혈맥상통의 관계로 더 많이 부각되는 편이다.
혹자는 이 시대를 부성(父性)이 메마른 시대라고 일컫는다.
권위와 물질을 베푸는 일만이 혁신적인 아버지의 상징이라고 주장하는 어버이 앞에서는, 진실 된 부자관계란 기대이하로 전락하게 될 위험이 따른다.
부성(父性)에 혁신이 굳이 필요하다면 그건 사랑과 배려가 스민 혁신이 특히 우선 되어야 할 것이다.
베드로와 루벤, 그리고 그들에게 소속되어 있는 가족형성을 살펴볼 때마다 노후에 나의 오빠나 동생, 또는 시동생들과 이웃하며 살고 싶은 간절한 부러움을 품게 된다,
글쎄, 베드로와 루벤처럼 서로의 인격을 철저하게 지켜주면서 그처럼 가까운 이웃으로 지내기가 과연 가능하기나 할 것인지를 자문자답하게 되기는 하지만.
골목길에서 축구를 하며 지르는 그들의 함성이 드높은데도 그들의 가족구성을 아껴서일까.
전혀 시끄러운 줄 모르고 오히려 마음에서 부터 응원하는 심정이다.
가끔씩 입가에 웃음이 번지는 걸 나 스스로 의식할 정도로 꽤나 달관하는 입장이다.
축구의 열기가 점점 열광적인 방향으로 치닫는 듯 했을 때, 베드로와 루벤 이 손자들에게 번갈아 가며 주의를 준다.
“공을 너무 높이 차지는 말자. 옆집으로 날아가서 세뇨라 린이 자식처럼 소중하게 키우는 양란 들을 부러뜨릴까 겁난다. 그리고 다니엘(나의 아들 이름)은 공부할 텐데 우리가 내는 소란 때문에 지장이 많을 거야. 안되겠어. 앞길로 나가자."
발소리를 줄이며 조심조심 걷는 그들 가족축구팀의 발자국 소리가 잠시동안 어수선하게 들리는가 싶더니 점점 멀어져 간다.
일시에 찾아온 적막 속에서 나는 그들의 소란이 아쉽게까지 느껴진다.
소음 속의 공해가 아니라 소음 속의 흔쾌함이고 평정심이기 때문이다.
이 어려운 시대에 베드로와 루벤의 가족들이 내 이웃에 있어, 나 그나마 더욱 웃노라.
아르헨티나 조선일보
2001년 1월 18일 목요일
우리 집 옆골목을 지나서 뒤로 가면 두 채의 집이 나란히 붙어 있다. 베드로와 루벤은 그 두 채의 집에 각각 살고 있는 육십 대 초반의 현지인 형제들이다. 베드로가 형이고 루벤이 동생인데, 베드로는 알리시아와의 사이에 아들 하나와 네 명의 손자를 두었고, 루 벤은 코카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 두 명에게서 일곱 명의 손자들을 두었다.
그들은 이미 정년퇴직을 한 나이에다 연금을 받는 신세다.
하지만 부모가 세상 떠나면서 유산을 물려줬다.
그렇기 때문에 상가(商街)건물에 서 나오는 월세를 양분(兩分)하여 생활하며 경제적으로는 부족함이 없고 오히려 풍족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그런데도 그들의 생활자세는 지극히 겸허롭고 매사에 도리(道理)를 잃지 않으려는 대단히 도덕적인 삶을 영위하려고 노력하는 면모가 은연 중에 보인다.
내외끼리는 말할 것도 없고 형제와 동서끼리도 서로 돈독한 관계를 이룩하고 있는데, 집수리를 할 때 보면 형네 먼저 아우 나중을 고수한다,
한국의 속담은 ‘형만 한 아우 없다’고 하지만 루벤은 베드로와 비교할 때 ‘형만 한 아우 있다’라고 말해도 크게 어긋나는 평은 아닐 것 같다.
무더운 여름날 오후가 되면 그 들 가족들은 의자를 들고 골목을 빠져나가 앞길에 앉아서 한담(閑談)을 주고 받을 때가 많다.
몇 시간이고 상관없이 물처럼 유연한 대화를 이어간다.
주말마다 방문해 오는 아들네 가족들을 위해 두 집이 합동으로 아사도(숯불구이) 파티를 준비할 때면, 숯 냄새와 불 갈비 냄새를 우리 집까지 진동하게 만든다.
아들네 가족들과도 똘똘 뭉친 가족관계를 유지하는 베드로와 루벤을 떠올리면 나마저 공연히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된다.
손자들과 골목길에서 축구를 할 때의 베드로와 루벤은, 할아버지 와 손자들이 아니라 나이를 초월 한 친구들을 바라보는 느낌이 들게 하고 , 실제로 그들은 할아버지와 손자이기 이전에 친구처럼 정답고 격의 없는 결속을 맺고 있는 관계에 익숙해 보인다.
그럴 때 알리시아와 코카, 그리고 아들, 며느리, 손녀들은 열렬한 관중이면서 응원단이기도 하다.
오래도록 동심에 가까운 무구한 마음을 잃지 않고 있는 뻬드로와 루벤.
그들이 자식 며느리와 손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어미 소가 송아지를 돌보는 지독지정(舐犢之情)이라고 하기보다, 돈독한 동맹을 맺은 사이처럼 우호적인 혈맥상통의 관계로 더 많이 부각되는 편이다.
혹자는 이 시대를 부성(父性)이 메마른 시대라고 일컫는다.
권위와 물질을 베푸는 일만이 혁신적인 아버지의 상징이라고 주장하는 어버이 앞에서는, 진실 된 부자관계란 기대이하로 전락하게 될 위험이 따른다.
부성(父性)에 혁신이 굳이 필요하다면 그건 사랑과 배려가 스민 혁신이 특히 우선 되어야 할 것이다.
베드로와 루벤, 그리고 그들에게 소속되어 있는 가족형성을 살펴볼 때마다 노후에 나의 오빠나 동생, 또는 시동생들과 이웃하며 살고 싶은 간절한 부러움을 품게 된다,
글쎄, 베드로와 루벤처럼 서로의 인격을 철저하게 지켜주면서 그처럼 가까운 이웃으로 지내기가 과연 가능하기나 할 것인지를 자문자답하게 되기는 하지만.
골목길에서 축구를 하며 지르는 그들의 함성이 드높은데도 그들의 가족구성을 아껴서일까.
전혀 시끄러운 줄 모르고 오히려 마음에서 부터 응원하는 심정이다.
가끔씩 입가에 웃음이 번지는 걸 나 스스로 의식할 정도로 꽤나 달관하는 입장이다.
축구의 열기가 점점 열광적인 방향으로 치닫는 듯 했을 때, 베드로와 루벤 이 손자들에게 번갈아 가며 주의를 준다.
“공을 너무 높이 차지는 말자. 옆집으로 날아가서 세뇨라 린이 자식처럼 소중하게 키우는 양란 들을 부러뜨릴까 겁난다. 그리고 다니엘(나의 아들 이름)은 공부할 텐데 우리가 내는 소란 때문에 지장이 많을 거야. 안되겠어. 앞길로 나가자."
발소리를 줄이며 조심조심 걷는 그들 가족축구팀의 발자국 소리가 잠시동안 어수선하게 들리는가 싶더니 점점 멀어져 간다.
일시에 찾아온 적막 속에서 나는 그들의 소란이 아쉽게까지 느껴진다.
소음 속의 공해가 아니라 소음 속의 흔쾌함이고 평정심이기 때문이다.
이 어려운 시대에 베드로와 루벤의 가족들이 내 이웃에 있어, 나 그나마 더욱 웃노라.
2012년 1월 22일 일요일
미스터리
맹하린
외국어 대학 일본어과를 졸업하자, 오빠는 종로 2가에서 사진현상소를 하던 선배의 일을 돕게 됨과 더불어 모 여성지의 사진기자도 겸하게 되었다.
오빠가 일본어과를 선택한 오직 한 가지 목적은 순전히 사진에 미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일본처럼 사진기술이 발달한 나라도 없었을 뿐 아니라, 일본은 인쇄기술 또한 타국의 추종을 불허하던 시대였다.
(오빠는 현재 사진작가다. )
나는 국문과.
바로 밑에 동생은 무용과.
그렇게 셋이서 드는 하숙비도 만만치는 않은 일이라, 차라리 집을 하나 사는 게 낫겠다 싶었던지, 우리의 교육은 말할 것도 없고 집안 살림의 총책이었던 고모는 동대문 근처에 작은 한옥을 구입하기에 이르렀다.
방 3개와 마루와 작은 마당이 있었다.
마당 가운데의 지하실 위에는 장독대도 있었다.
고모는 고모의 큰 애와 둘째도 한양공고와 명지중학교로 각각 전학시켰다.
그래서 학생이 다섯이나 되다 보니까 부엌일 하는 애까지 필요하게 되었다.
그렇게 같은 가족이 된 애의 이름은 완자였다.
그 애는 내 동생 맹미숙하고는 자매처럼 친하게 지냈고, 나에겐 깎듯이 공주대접을 해줬다.
내가 엎디거나 옆으로 누워 책을 읽을 때면, 그 애는 물도 떠나 놓고 과일과 과자 등을 꼭 가져다 놓는 걸 잊지 않았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진정 마음 가득 우러나는 배려를 결코 힘겹지 않게 웃음으로 실행 하던 애였다.
우리는 밤에 마루에 둘러 앉아 오빠, 또는 고모의 둘째 송태호가 반주하는 기타에 맞춰 노래 부르기를 자주 했다. 오빠는 중고등학교 때 기악부에 소속돼 있었고, 작은 북 담당이었다. 송태호는 트럼펫 주자였다.
노래를 함께 부를 때마다 우리는 안 보이는 결속감을 다지게도 되었고 서로가 서로를 아껴야 하리라는 각오 같은 것도 기쁨의 씨앗으로 마음 밭에 자주 뿌리고 심었던 듯 하다.
고모일 때도 있었고, 고모부일 때도 있었으며 엄마일 때도 있었지만, 계절마다 한두 번씩 밑반찬과 용돈을 전하기 위해 어른들은 교대로 상경하셨다.
평소의 반찬거리는 시장속의 식료품점을 한 군데 정해놓고 수첩에 그날그날 가져가는 명세서를 일일이 적어주면 어른들이 상경할 때마다 한꺼번에 갚아주고 하향하셨다.
학생신분에 날마다 반찬값에 신경 쓰는 걸 막으려는 의도였다고 본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의 소꼽놀이에서 오빠는 단연 아버지 역할이었고, 나는 엄마였다.
오빠의 친구들은 가끔 모임에서, 나와 내 동생 맹미숙을 칭찬하고는 그랬나보았다.
나와 맹미숙은 엄마를 답습하여 반찬 만들기에 일가견이 좀 있는 편이다.
나는 고모를 닮아 글 쓰는 면모까지 갖췄을 것이다.
하지만 오빠 친구들의 그런 칭찬은 항상 우르르 우리 집에 몰려와 점심이나 저녁을 얻어먹고 난 후에나 얻어 듣는 말이었다.
그토록 하루하루를 화평과 안온 속에 지내던 우리에게 매우 충격적인 대형 사고가 터진 건 겨울이 막 시작되던 11월 초순경이었을 것이다.
고모의 큰 아들 송태언이 얼굴 전체가 짓뭉개진 상처를 입고 하학시간을 조금 넘어서 귀가한 것.
친구들에게 업힌 것도 같고 둘러멘 것도 같은 매우 기이한 모습으로였다.
그때 송태언은 눈 코 입이 온통 붉은 상처에 가려져 도저히 따로 분간키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 어떤 놀라운 일을 만날지라도 호들갑을 떨면 안 된다고, 평소에 암묵적 가정교육을 받았었던 우리는 미리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모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떤 면으로는 다행이었으며, 울고불고 캐묻고 그러는 것보다는 꽤 숙달된 대응이었다고는 해도, 한 사람도 아니고 단체로 할 말을 잃는다는 건, 말 그대로 얼떨떨하기도 하고 절망적인 상황의 극치가 아닐 수 없었다.
우리야 단체로 할 말을 잃었지만, 송태언은 신음은 커녕 아프다는 소리도 결코 내는 일이 없었다.
그럴 땐 비록 오빠만이라도 사건의 실마리라거나 원인이나 결과에 대해서 어떤 해답 정도는 들어 낼 수 있을 줄 알았다. 송태언은 당사자니까 그렇다고 해도 그의 친구들이라도 약간의 언질이나 변명 같은 게 있을 줄 알았었다.
하지만 오빠 역시 아무 설명이라거나 해결책 등을 일언반구 듣거나 찾지 못했다.
송태언은 그런 얼굴을 하고도 등교는 열심히 해냈고, 하학 후에는 치료를 위해 병원에 다녀야 했다. 며칠 쉬라고 해도 그것조차 송태언 개인으로 결정될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며칠인가 지났을 때, 예상했던 바대로 학부모 호출이 있었다.
부모가 시골에 계시다는 걸 잘 아는 담임선생은 형이나 누나라도 오라는 가정통신 비슷할 걸 보내왔다.
오빠는 두 군데의 직장 일로 시간이 없었기에 나라도 대신 가야했다.
혼자 가기 그래서 맹미숙과 함께 갈 작정이었는데, 하필 동생은 다음날 실기시험이 있다고 마루에서 아라베스크, 어쩌고 하면서 연습에 혼신을 다하는 중이었다.
장충체육관 근처에 있던 한양공고의 교정으로 들어가 곧장 교무실로 찾아간 나.
송태언은 수업 중인지 아무 데서도 안 보였다.
마침 교무실엔 몇 분의 교사만 있었다.
나를 대면하자마자 훈육주임과 담임은 처음부터 강하게 나왔다.
나도 질세라 강하게 나와야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겹쳐지게 비난을 꺼낼 경우 나는 괴롭다는 표정을 나타냈고, 우선은 짚고 넘어갔을 것이다.
“여러모로 불리한 입장이 되리라는 각오는 했습니다. 하지만 한 분하고만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결국 담임이 수업에 가야 한다면서 교무실을 나가 주었다.
훈육주임은 퇴학을 고려 중이라는 얘기를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나는 반성문 정도로 선처해 달라는 부탁을,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처럼 여러 번 뎅뎅거렸고.
훈육주임은 원인은 물론이거니와 주동자들만이라도 밝혀 준다면 얼마든지 눈 감아 주겠다고, 퍽도 합리적인 것처럼 말하는 것도 잊지 않고 있었다.
나는 정신을 좀 바짝 차려야만 했다.
“집에서 일어 난 일이 아니라 학교에서. 그것도 하학 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가족이 해야 할 질문을 왜 선생님께서 하시죠? 원인과 결과를 도리어 저희에게 알려 주셔야 하는 학교 측에서 확실한 입장표명만 해주신다면 저희는 퇴학도 각오하겠습니다. 정학을 하라시면 그 점도 고민해 보겠어요. "
지금도 생각난다. 정작 얼굴 전체가 깨진 사람은 나라도 되는 것처럼 멍한 표정을 결코 못 버리던 훈육주임의 순간적으로 넋을 잃어버린 표정이.
결국 몇 날 며칠 몇 달을 보내고도 교사들이나 친구들이나 가족 역시도 이렇다할 원인을 파악해 내지는 못했다. 고향의 어른들께는 절대 비밀이 되도록 우리는 그분들만 만나면 입단속에 충실했고, 디행히도 끝까지 잘 지켜낼 수 있었다.
송태언은 그러는 과정에서도 여전히 그 얘기만 꺼내면 침묵을 고수했다.
그 와중에 알았다
송태언은 그렇게 많이 다쳤을 경우나 심각한 사건 속에서도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는 성격이라는 점이었다.
몇 년 전 귀국여행 중에, 고모네 자녀들과 우리 형제들이 일식집에서 함께 식사하는 시간을 가진 적이 있었다. 서로의 짝들과 조카들 합하니까 거의 이십 명 정도 되었다.
'연 하나로 기획'의 송태일이 나를 환영한다는 명목으로 내는 자리였다.
그날 펄떡펄떡 뛰는 생새우가 바구니마다 숨죽이고 숨어 있다가, 풀 코스의 순서에 따라 등장해야 할 무렵에는 덮고 있던 면보자기를 젖히고 저마다 춤추며 나타났다.
그런데 내 친족들은 너무 싱싱하다며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매우 가벼이 껍질을 벗겨냈고, 그리고 매우 행복한 얼굴로 잘도 먹어댔다.
나는 아르헨티나 촌뜨기가 다 되었다는 말을 피하기 위해 아마 딴청을 떨며 절대 안 먹고 말았을 테고.
그 대단하던 비밀과 결심은 이제 많이 회석되고 누그러지지 않았을까 싶어져, 나는 송태언에게 진지한 태도로 그 당시의 의문점을 새삼 질문처럼 건네고 말았다.
선선히 돌아온 답은 두 가지였다.
묵묵부답과 그 잘나고 잘난 뜻 모를 미소.
가장 신비스러운 일은, 송태언은 그렇게나 끔찍하게 많이 다치고도 얼굴에 흉터 하나 남지 않았더라는 사실이다.
워낙 추측하는 일엔 우선멈춤을 모르는 나지만, 결국 나는 송태언이, 지방에서 올라온 전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몰매를 겸한 왕따를 당한 거나 아닐까 그 정도로만 단정하게 된다.
미스터리다.
참으로 미스터리다.
영원히 알려고 해서도 , 알고 싶어 해도 안 되는 미스터리다.
그 사건이란 게 그토록 무서운 거였구나.
아직도 입을 떼서는 안 되는 일이었구나.
그 추위에, 그 무렵에 얼마나 상처가 아프고 쓰라렸을까.
대단하다 .
대단했다.
그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잘 견뎌내 줘 고맙다.
지금처럼 핸드폰의 문자로나마 괴롭힘을 안 당한 일이 천만다행이다.
살아줘서 고맙다.
송태언!!!
아르헨티나에 돌아오기 며칠 전이었다.
송태언의 간곡한 부탁으로 그의 집에 하루 이틀 사흘 머물었다.
내가 왜 이렇게 표현하는가 하면 사흘이 하루 처럼 금방 지나갔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 인천까지 함께 드라이브를 하였다.
명목은 싱싱한 회를 대접하려는 거라고 말했었다.
나는 더 이상 그 때의 그 사건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영원히 묻지 않을 것이다.
고층 아파트의 16층에 있었다.
송태언의 아파트는.
밤의 전망은 별나라처럼 아름다웠지만
고층아파트의 특성상 건물이 위이위이
강풍에 흔들리던 느낌을 약간 강도 있게 감지하며
아주 오래 묵은 어지럼증이, 송태언이 다친 날
순간적으로 느꼈던 그 어지럼증이 휩싸이듯
나를 흔들고 있음을 깨닫고 깨달았다.
2012년 1월 21일 토요일
생에 대한 해석
맹하린
결혼하고 아이가 태어나자, 그 무렵에도 농사를 지으시던 시어머니는 열다섯 살의 성순이라는 애를 시골의 이웃마을에서 구해다 주셨다.
부엌일을 거들거나, 청소나 심부름, 그리고 아기를 돌보는 일 정도나 해낼 수 있는 애였다.
나는 그때 종로에 있는 YMCA 건물 안에 소재한, 명휘원에 드나들며 직조를 배우고 있었다.
명휘원은 영친왕의 부인 이방자 여사가 운영을 했고, 직조강사는 미국인 여선교사였다.
뭐든 알고 익히려는 자세는 내 일종의 취미였고 내 삶의 첫째가는 지향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그때 역시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까운 건 돈이 아니라 시간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나는 아직껏 그 조립식 베틀을 소유하고 있다.
분해하면 나무토막 몇 개지만, 설치하면 1미터가 되는 목조기계다.
보기와는 달리 그 기계는 머플러도 짤 수 있고, 커튼, 식탁보, 방석커버 , 벽걸이 등등,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의 완제품은 뭐든 만들어 낼 수가 있었다.
나는 그 직조기계로 여러 가지 색을 배합하여 머플러를 짜는 걸 즐겼고, 친구나 친지들에게 선물하기를 특히 좋아했다.
어느 날, 모백화점에 친구들과 쇼핑을 갔는데, 영업담당상무라고 자기소개를 밝힌 분이 우리가 두르고 있는 머플러에 지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결국, 뜻이 있다면 샘플을 몇 장 가져다 달라고 나를 향해 정중하게 부탁을 하기에 이르렀다.
나의 첫 비즈니스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처음엔 20장, 그 다음엔 50장, 그리고 100장.
주문은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나는 그 해 겨울, 머플러를 유행시킨 장본인이 되었다.
나와 함께 직조를 배우던 여인들은 모두 공관직원 부인들 정도였고, 그리고 그때 이미 직조수강은 끝나 있었는데 새로운 강의주제는, 서양인형 만들기였다.
그리하여 나의 머플러 납품은 경쟁이 전무했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결혼하고 바로 상도동의 정원이 있는 집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된 나는, 경제적으로 전혀 부족하진 않은 상태였다.
어느 정오에 중년부인이 예고도 없이 집으로 찾아왔다.
정말 뜻밖의 방문이 아닐 수 없었다.
S백화점 영업담당상무의 부인이라고 해서 더 의아스러웠을 것이다.
강산이 수차례 바뀐 지금껏 그 여인의 인상이 뚜렷하게 기억된다.
금테 안경과 작은 키와 약간의 풍만함과 이북 태생 특유의 강한 사투리.
머플러의 주문량이 날로 쇄도해서 내가 만들어 내는 양으로는 상품의 확보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게 방문 이유였다.
생각다 못해 애라도 봐 주고 살림이라도 도와준다면 훨씬 능률이 높아지지 않겠나 싶어 그녀의 남편이자 영업담당상무가 아래와 같은 지시를 내리게 되었다는 것.
" 아침부터 저녁까지 돌보시오."
그 여인의 도움다운 돌봄을 일주일 정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여인은 살림을 돕지는 않고, 직조 짜는 일을 거드는 게 가장 효율적인 도움이 될 거라면서 매우 적극적인 태세로 대응했다. 함께 실을 감고 함께 들실과 날실을 넣고.
그 여인이 더 이상 살림인지 직조인지를 도우러 오지 않게 된 일과, 영업담당상무의 전화를 받게 된 일은 우연처럼 같은 날 이루어졌다.
더 이상 머플러를 납품하지 않아도 된다는 통보였다.
그는 평소와는 달리 인사라거나 군더더기 모두 생략하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전화기를 통해 말하는 그의 음성은 약간 권위적이기까지 했다.
며칠도 안 되었을 때, 최종결산을 하러 가서야 알게 되었다.
그 여인이었다.
내 대신 모백화점에 더 낮은 가격으로 머플러를 대량 납품하게 된 사람은.
그 여인이 진정 그 영업상무의 부인인지, 아닌지는 그다지 나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크게 상관은 없는 일이라는 생각만 지배적이었다.
내가 절대 다그치지도 않았고, 산뜻하게 그곳을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 그랬었다.
나는 이미 짧은 기간이었지만, 내가 만든 상품으로 일이라는 걸 해봤고
또한 세상이 어떤 곳인지 경험까지도 맛본 귀한 모티브를 안겨줬지 않은가라고
고맙게 여기는 부분이 더 많았을 터였다.
그런 뜻밖의 감정들이 절대 유쾌한 사안은 아닐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최악의 상황이라거나 아픔이나 슬픔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그런대로 괜찮았지 않았던가 새삼 그런 자기 위안의 토닥임도 맛 보았을 것이다.
나는 그때 전혀 화나거나 충격 받지 않았던 게 고맙다.
일부러 생업을 위해 일하려던 동기는 아니었기 때문에 다행이다.
손해까지 입은 건 아니라서 잘 된 일이다.
취미 삼아 일할 수 있어서 좋았었다.
바로 그거다.
내 방식의 생에 대한 해석이라는 게.
다른 건 몰라도, 그때 나는 나를 가르쳤을 것이다
(원래 그런 거야. 늘 경험하면서 살아야 하지.)
그 영업담당상무라는 사람과 그 부인된다던 여인은 그러한 파행을 주도하고 실행하면서
오늘날, 가히 성공적인 욕망의 울타리와 튼튼하고 높은 재물의 탑까지 거침없이 세우고 쌓고 이룩해 놓았으려나?
어쩌다 기억하게도 되지만, 그들은 내 관심 밖의 인물들인 것만은 확실하다.
나는 벼라별 쓸데없는 일을 다 기억할 때 허다하지만
분명한 건, 단지 좋은 일만을 떠올리고 아끼고 그리워한다.
상도동 집.
내 나라.
엄마와 형제들.
친구와 친지들.
그립다.
모두모두 그립다.
오늘 특별히 그립고 그립다.

동해안 바닷가에서
2012년 1월 19일 목요일
아드리안과 골리앗
맹하린
-아드리안의 이야기-
아드리안은 칠레인이다.
그는 노숙자다.
애인이 신발을 거꾸로 신자, 그는 정처 없이 길을 떠나 아르헨티나로 들어왔다.
일을 하는 것도 귀찮고, 매사에 절망스럽기만 했다.
가장 커다란 고통이란 것은, 눈을 떴을 때는 견딜 만 한데, 눈만 감으면 연인 베로니카가 눈 안 가득 담겨 있어 몇 날이고 몇 밤이고 잠을 이룰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도대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지탱해나갈만한 도리라거나 끈 같은 걸 아무 데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결국 노숙인이 되었다.
그는 시인이다.
구태여 시를 지면에는 남기지 않는 그.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온통 시다.
그는 찬송가를 흑인영가처럼 잘 부른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워 볼 때'
그는 말한다.
말한다기보다 시를 읊는다.
"나의 이불은 하늘이죠."
그는 이제 거의 읊듯이 노래한다.
"침대는 내게 대지입니다.
이불의 빛깔은 많은 날들 사이에서 푸르러도
때로는 하얗거나 잉크처럼 짙습니다
뭉게뭉게 구름이 피어나는 고운 무늬
아무도 내 이불처럼 예쁘게는 수를 못 놓을 걸요."
그는 항상 술병을 끼고 산다.
그가 판자촌에서 이웃나라 태생의 불우한 사람들을 상대로 사목하는 한국인 J목사의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지는 2년 정도 되었다.
그 역시 대다수의 한국인처럼 어린 시절, 선물에 유혹되어 교회에 다녔던 경험이 있다.
어느 날, 한국인 J목사의 교회 앞을 지나다가 어려서 듣던 찬송가를 듣게 되었다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그리움으로 환원되어 들려오던 그 소리에 몸 전체가 저절로 이끌리게 되었으며 자기도 모르게 교회 안으로 멈칫멈칫 발길을 옮기게 되었다.
'내 영이 주를 찬양하리니
주 하느님 크시도다'
그는 곧장 혼자서 찬양을 하던 J목사의 부인인 L사모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매우 고즈넉한 마음 되어 실토한다.
"나는 죄인입니다."
L사모가 대답한다.
"내가 더 큰 죄인입니다."
그가 부르짖듯 외친다.
"우리는 모두 하늘이 만드신 귀한 작품이죠."
L사모가 말한다.
"고통 중에 있는 한 영혼을 절대로 천하와도 바꾸지 않는다고 예수그리스도는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가문은 예술가 집안이다.
시와 노래에 출중한 아드리안을 위해, Puchero( 전골 남비요리 )와 닭튀김을 준비하면서 L사모는 동료들을 더 데려와도 된다고 말한다.
그는 강한 어조를 숨기며 진지하게 반문한다.
"우리가 거지입니까?"
어떤 이들은 없는 사람들이, 가진 거라고는 자존심 밖에 없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존심이 센 게 아니라, 자존심 그 자체고 자존심만이 최고의 재산이다.
그는 잊었다는 듯 말을 잇는다.
"우리는 얻어먹지 않아도 먹고는 삽니다."
이 부분에서 나는 무릎을 탁 치는 심정이다.
지인들이 어떻게 사느냐고 물으면 내가 언제나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먹고는 삽니다."
(하하, 그와 나는 공통점이 많구나.)
그들은 한국인들의 식당 앞에서 한국인들의 값비싼 자가용들을 지켜 주며 , 또는 유리창을 닦아주기도 하면서, 그렇게 먼지나 다름없는 부피의 콩고물을 얻어내는 셈이었다.
기이한 것은 가장 좋은 차를 가진 사람일수록 푼돈을 내주는 일에 인색하다는 점이다.
아드리안의 인도로 그 교회에 발을 디딘 그들 15명.
세 명은 개과천선하여 직장생활을 해낼 수 있는 경지까지도 이룩했다.
다섯 명은 3년 전 유난히도 극심하던 추운 겨울 날, 길에서 동사했다.
눈도 내리지 않고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도 살을 에이는 유별난 기온은 그들의 체온을 앗아가기에 충분했던 것.
-골리앗의 이야기-
골리앗은 볼리비아인 이다.
키가 2미터도 넘는다.
그의 별명은 세삐죠(칫솔)다.
머리카락이 칫솔처럼 뻣세서 얻은 별명이다.
골리앗 역시 사실은 별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골리앗처럼 거인이라는 뜻이다.
그는 본명을 결코 밝히고 싶어 하지 않는다.
매사에 쫒기는 심정이어서 그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볼리비아 군대의 장교였던 그가 어느 날 새벽 기상했을 때 사건은 이미 전개되어 있었다고 한다.
총이 여러 자루나 분실된 사태가 발생된 것.
볼리비아군대에서는 장교나 사병이 총기를 소홀히 할 경우 3년 이상의 영창생활을 각오해야 한다. 그는 순간적으로 탈영을 결심한다.
이왕 나선 길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자는 결심으로 가고 가다 보니까 아르헨티나 땅에 도착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는 곧바로 거지신세가 되었다고는 안한다.
그 역시 길에서 3년을 지냈다고 표현한다.
그에게는 3년의 감옥생활이 현재의 삶보다 더 험악할까라고 묻지도 물어서도 안 된다.
그건 그의 인격을 심하게 모욕할 뿐더러 몰아세우기도 하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 또한 시인이다.
그는 그날 내게 W. B 에이츠를 짧게 설파했다.
'부자들이란 거지들이 이에 시달리듯 재산에 시달리죠.'
그는 아드리안과는 달리 거지라는 사실을 쉽게 인정하고 들어가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생존을 위해서 거지가 된 건 아니라고 밝힌다.
하늘이 내리신 운명일 뿐이라고 얘기한다.
오묘하신 뜻이 분명 숨겨져 있으리라고 까지 믿고 있었다.
L사모와의 대화에 이끌리어 어느 날 일부러 틈을 내어 아드리안과 골리앗을 1년 전쯤 만나본 적이 있다. 거의 반시간 정도 얘기를 주고받았다.
한인 타운의 어느 교회 앞에서였다.
찾기가 쉬었다.
키도 키지만 준수한 사람 둘을 찾으면 되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노숙생활을 하노라고 부끄럼 없이 말했다.
그들 동료의 일부는 알게 모르게 어느 새 마약에 절어 있었고. 마약의 판매 역시 손대고 있는 눈치였다.
그들은 절대 한 푼 줍쇼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동전 있어요?" 그렇게 묻는다.
그들은 진정 노숙인 이었다.
그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은 결코 없었다.
생각해 보라.
나보다 더 나은 생활을 유지한다고 해서 누가 나보고 불쌍하다고 한다면 나는 좋겠는가?
가난해 보인다면 기분이 괜찮겠는가?
거지라고 단정한다면 기쁘겠는가?
어디다 메모는 해놨지만 찾기가 지난한 일이 될 것만 같아 대강 쓰는데, 알버트 슈바이처였을 것이다.
' 배고픈 사람, 병든 사람,
외롭거나 두려움에 잠긴 사람이
이 세상에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그건 모두 나의 책임이다.'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크리스티나는 3백만 달러 상당의 아파트를 팔레르모 지역에 새로이 구입했다는 뉴스가 얼마 전 보도 되었다.
물론 한 나라의 대통령 쯤 되면 그 정도의 부를 축적한다고 누가 뭐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신은 사람에게 복을 내릴 때 되로 달고 자로 재어 준다고 했던가.
누구보다 자유롭게 사는 노숙자들이어도 샤워나 제때에 하면서 살게 되기를 바라게 된다.
어제 오후 L사모가 꽃다발을 사러 왔으므로 아드리안과 골리앗의 안부를 맨 먼저 물었다.
그리고 변함없이 잘 있다는 소식을 반가이 듣게 되었다.
어떤 환경에서도 내가 무럭무럭 잘 지내는 것처럼 그들 역시 잘 지내고 있었던 것.
오늘은 시나 펌할 계획이었다.
매사에 긍정적인 성격의 나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날은 외로움이 사무치다.
하지만 그들이 연신 눈에 밟혀 힘내어 이 글을 쓰고 썼다.
오늘 아주 모처럼 트윗하러 들어갔다가
바로 내게 전해주는 듯한 좋은 말이 안겨와서 옮긴다.
외로움이 찾아올 때 사실은 그 순간이 인생에 있어서
사랑이 찾아올 때보다 더 귀한 시간이다.
쓴 외로움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한 인간의 삶의 깊이
삶의 우아한 형상들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곽재구 시인의 ' 포구기행' 중
2012년 1월 18일 수요일
삼총사
맹하린
H와 S와 나는 삼총사였다.
우리는 재수하면서 만났다.
나는 학창시절에 분단장은 맡아 놓고 했었는데, 고등학교 고학년에 올라가면서 공부를 멀리하고 문학적인 책만 읽어내느라 그만 재수생이 되었었다.
하지만 아이큐 검사의 발표시간에 반 애들 전부 42번인 내 아이큐 결과를 듣더니 모두 뒤돌아 나를 바라보던 시선과 표정은 지금 생각해도 가관이었다고 볼 정도로 머리는 그럭저럭 쓸 만했다.
그래서 더 문제가 되었다.
머리는 괜찮으면서 공부를 안 해서.
잘하던 애가 공부를 멀리해서.
H는 가수 하청일의 동생이고 S는 종로2가의 견지동에서 골동품상회를 경영하던 집의 딸이었다.
셋다 유족한 집안 덕택에 산악회에 가입하여 일요일에는 서울 근교에 있는 산들을 돌아가며 등산했다.
그때 서울대학교동문이고 유명회사에 다니던 오빠들을 만나게 되었다.
명현오빠는 S대학교대학원장의 아들이었고 H건설의 자녀와 약혼을 했었다.
그 오빠들은 대대로 내려오던 학자집안의 아들들로만 뭉쳐 있었다.
오빠들 여섯에게서 우리는 많은 지식을 익혔다.
하지만 오빠들을 하나 둘 약혼 시키고(?) 우리 삼총사는 오빠들도 산악회도 동시에 접었다.
H는 동국대 국문과에
S는 이화여대 체육과에
나는 경희대 국문과에 들어가면서
우리 삼총사는 뿔뿔이 헤어진 것 같았지만
그러나 일주일에 서너 번은 만났다.
서대문의 커피하우스나 명동에도 잘 갔지만
무교동의 르네상스에서 주로 만났다.
H는 남친 정도 있었고, S는 절친 정도 있었으며, 나는 편지도 보내오고 만나자고 몇 번인가 부탁하던 키 크고 잘 생긴 학우에게 맘은 있었는데 전혀 관심 없는 척을 했더니, 바보 같은 그가 훌쩍 군에 입대해서 그 뒤로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어쩌다 그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내 노트를 빌려간 그가 노트를 돌려 줄 때 넣어 보낸 편지의 몇 구절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가 영남학생들의 모임이 있는데 함께 참석해 줬으면 했을 때, 그 부탁조차 거절하여 나는 아직도 그에게 빚진 기분이다.
그래서인지 그 후 미팅도 미팅이라는 말도 흥미를 잃고 말았었다.
나는 이미 그때 문학에 넋을 잃고 있었을 것이다.
교수진도 쟁쟁했다.
황순원, 조병화, 서정범, 등등.
S는 항공회사 사주의 조카와 결혼하여 유학중인 신랑을 따라 미국으로 들어갔는데, 철없고,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나처럼 멋 부리기를 즐기던 그녀는 미국생활에 적응이 안 된 나머지 결혼 1년 만에 이혼했다. 지금껏 부유한 친정에 얹혀 혼자 살고 있다.
H는 애경유지 공장장이던 사람과 결혼하여 잘 살고 있다.
어쩌다보니 이민을 와 이렇게나 많이 흘러왔지만, 때때로 그 친구들이 너무나 그립다.
2만 5천 년이 걸려야만 당도한다는 별빛과 같은 사람.
나의 첫 고뇌였던 예전의 그대.
만일 누가 첫사랑을 묻는다면 선뜻 그를 말하리라.
방학에 고향에 돌아가 밤새 왈왈대며 떠들썩하던 개구리들의 외침 속에서 그에 대한 미안함으로 깨어 있던 밤을 기억한다.
그때였을 것이다.
항상 똑같은 날들 속에서도 내게 주어진 인연 너무 매몰차게 대하지 않으려던 각오가 싹튼 것은.
나는 그때 비로소 겸허를 터득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아가는 생애 속에는 뜻밖의 선물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자연과 인연과 햇빛, 바람, 비.
내게 첫사랑이 있었고, 삼총사가 있었고, 산악회가 있었고, 가족, 유년의 시절, 이민자의 삶, 그리고 현재의 일상들이 있어, 나는 문학을 했었고, 문학을 가까이 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머물렀고, 머물고 싶은 생의 근원.
황량하고 공허하고 때로 가파른 흐름일 때 잦았지만, 어떤 은총을 안기는 기분이 들던 좋은 시간들이 대부분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 좋은 시절들이 모두 옛날이 되었다고는 느끼지 않을 테다.
내가 선택해서 스스로 누릴 때는 고통이 아니다.
밀쳐 내려는 때가 특별히 힘든 고역이 되리라.
때로 내 맘은 모든 인류나 사물에 대해서 이해를 넘어 존중에까지 닿아 있음을 절절 깨닫는다.
나는 이미 작은 풀포기처럼 낮고 단순해져 있다.
내 안에 갇혀 지내던 감성 실꾸리 풀 듯 서서히 풀어내며 살아가겠다.
오늘은 나인지 그 누구에겐지, 또는 신에게인지 갈수록 선하리라는 약속을 하고 싶어지는,
참으로 해맑은 날이라선지 막힘없이 이 글을 적었다.

덕수궁에서

산악회 홍석오빠의 별장에서

내가 읽어낸 책들아, 안경 가져가고 내 눈 돌리도~
2012년 1월 16일 월요일
모자라게 살아내기
맹하린
나는 푼수 떼기인가?
아니면 모자란가?
꽃시장에 가면 일본인이나 현지인들이 내 아르헨티나 이름, 그러니까 세례명은 따로 있는데 이왕이면 부르기 좋으라고 가게 이름에서 열매 따듯이 뚝 따내어 알려 줬는데, 내가 지나가기만 하면 아주 마르가리따라는 노래를 잘도 불러댄다.
(아이고, 내 공주병!)
정작 마르가리따는 우리 꽃가게를 가장 처음 시작했던 나의 교우 마르가리따가 진짜 마르가리따인 것을.
나는 한인 타운에 살지만 대여섯 개 있는 한국식품점은 몇 달에 한번이나 갈까 말까 그러고 주로 Coto라는 현지인 마트나 중국인이 운영하는 마켓이나 조선교포가 주인인 '안녕'에 주로 간다.
'안녕 슈퍼'
뜻은 괜찮고 친근미 넘치는 좋은 상호 같은데, 왜 그 상호만 떠올리면 길에서조차 포복절도와 같은 웃음이 터지는지.
하여간에 한국식품점을 피하는 진정한 이유의 첫째는 모두 알음알음한 사람들인데, 두어 가지 정도만 사들고 나오기가 꽤나 겸연쩍어서다.
내 절약정신에 크게 위배되는 구매를 할 수도 있을 정도로 한국에서 직수입해온 상품들이 식품점마다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충동구매는 절대 안 한다.
그리고 냉장고에 꽉꽉 채우는 성격이 아니라,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만 조금씩 구입해서 사용하기를 선호한다.
예전에 꽉꽉 채우며 살땐 얼마나 많은 걸 버렸었던가.
그래서 지금은 꼭 필요한 걸 그때그때 구입하기를 즐긴다.
실제로 우리 냉장고는 일 년 내내 텅텅 비어서 좀 무용지물처럼도 생각된다.
그런데 냉장고라는 존재는 크게 욕심은 안 부리는 듯 하다. 배부르게 안 채워줘도 큰 소리를 안 내는 데다가 다소곳하고 차분한 모습이다.
개를 키우면 주인을 닮는다던데 냉장고도 주인을 닮는 모양이다.
구태여 부끄러울 사안은 아니라서 짚고 넘어가는데 , 이 여름 들어 나는 한국참외를 1킬로씩 두 번째 샀을 것이다.
멜론이 더 달고 싼값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먹는 거에 절대 호사를 안 부리는 편이다.
나의 조모께서는 한 번 떠나간 끼니는 다시 안 돌아온다고 그러셔서 나는 그걸 진리처럼 챙기며 산다.
의료보험을 안 들었으니까, 일부러 밥까지 굶으며 검사 다닐 일도 없고, 어디가 고장 나서 소화 안 될 일도 없으며, 튀기거나 지지고 볶는 음식 안 좋아하니까 내 속은 언제나 속 상한 게 아니라 속 안 상해 있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얘기가 옆으로 흘렀다.
어제 낮에 우리 가게와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위치한 중국마트에 갔었다.
아직 말문도 안 트이고 세 살도 못돼 보이는 중국인 주인의 아들이, 너무도 귀여운 모습으로 아장아장 걸어와 아는 체를 한다.
아는 체라고 해야 내 무릎을 서너 번 두드린 거였지만.
내가 항상 아우스팅! 그렇게 이름을 불러주며 인사를 주고받고 그래서였을까?
맨날 네모난 플라스틱으로된, 울타리가 높은 놀이터 안에서만 지내다가 모처럼 해방되었다 싶었는지 그 정확한 이유까지는 캐지 못했지만 , 그 아기는 한국라면이고 밀가루고 낮은 쪽에 진열된 상품마다 내 장바구니에 손수(?) 담아주고 있었다. 그렇게 상술이 뛰어난 아기가 그동안 어떻게 그 네모난 틀 속에만 갇혀 있었을지 의문도 되고 웃음도 터지고 참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계속 상품을 들고 와 쏼라쏼라 떠들며, 지구의 자전이 저절로 느껴지는지 쓰러질 듯 아슬아슬 기우뚱 쫒아오는 그 아기에게서 줄행랑치느라 그 아기가 아니라 내가 먼저 넘어질까 봐 죽는 게 아니라 죽어 나가떨어지는 줄 알았다.
휴우! 아직껏 심장이 마구 뛴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풀풀 웃게 된다.
오, 나이에 상관없이 상술을 발휘하는 중국인들의 끈기여!
나는 고객에게 친절한 편이고, 그럭저럭 기억력도 좋은 덕택에 고객의 이름을 한 번 들으면 틀리지 않게 그대로 불러주고 있는데, 나의 고객들은 그점을 퍽으나 흐뭇해하는 것도 같다.
아무튼 그 중국인 젊은 내외에게서 나는 많은 걸 배우게 된다.
현지인 고객들의 애완견 이름까지 모두 챙기면서 친목까지 다지려는 면이 은연중에 보이는 게 아니라 곁으로도 보이는 것이다.
한 20년 슬픔과 불행에게 멱살을 잡힌 채 살아내서인지, 나는 이제야 중년에 이른 느낌이고, 다 늦게 세상이 싱싱 싱그럽다.
몇 달 전에 미용실에 2년 만에 갔더니 미용사가 깜짝 놀라며 반가워하고 있었다.
내 머리통에서 검은 새싹이 마구 솟아나고 있다는 얘기였다.
방금 전, 거리를 지나던 현지인이 하필 우리 가게의 초인종을 눌러 길을 묻는다.
현지인 거지도 물병을 내밀며 물을 담아 달라고 한다.
나는 친절하게 가르쳐 줄 뿐 아니라 , 정성껏 차가운 물을 담아 건네며 약간의 적선도 잊지 않고 해낸다. 우리 가게 근처의 거지들은 안다. 날마다 오면 물만 얻어 가지만 어쩌다 들르면 지폐도 얻을 수는 있다는 사실을.
나는 불안을 안 키우고 산다.
불안은 언제나 권태까지 데리고 다니는 종자다.
나는 권태도 말이나 글로만 알고 있다.
혼자일 때 역시 전혀 심심해 본 적은 없다.
책과 음악과 글쓰기가 내 곁에서 항상 나를 지켜주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푼수 떼기 맞다.
나는 모자란 거 맞다.
푼수 떼기는 사는 게 재미있다.
모자라게 사는 건 싱싱 신난다.
왜냐면 크게 바라는 게 없기 때문이다.
아래의 얘기처럼 자기 중심도가 너무 강하지만 않다면 자기에게 맞춰서 산다는 건 어떤 의미로든 현명하고 복된 일이 아닌가 싶어진다.
' 1965년 11월.
미국 동부는 큰 정전을 겪게 되었다.
뉴욕도 암흑 천지였다.
브루클린에 사는 맥스가 때마침 전구를 갈아 끼우는 순간 정전이 되었다.
부인 로지는 재빨리 일어나 창문 곁으로 달려갔다.
창밖을 내다보니 뉴욕 시내는 온통 콜타르를 쏟아 부은 듯 깜깜절벽이었다.
로지는 놀라 소리쳤다.
"맥스. 이건 너무 한 일이네요. 당신이 전기를 잘못 만지는 바람에 뉴욕 전체가 전부 정전이 되어 버렸잖아요."
나는 푼수 떼기인가?
아니면 모자란가?
꽃시장에 가면 일본인이나 현지인들이 내 아르헨티나 이름, 그러니까 세례명은 따로 있는데 이왕이면 부르기 좋으라고 가게 이름에서 열매 따듯이 뚝 따내어 알려 줬는데, 내가 지나가기만 하면 아주 마르가리따라는 노래를 잘도 불러댄다.
(아이고, 내 공주병!)
정작 마르가리따는 우리 꽃가게를 가장 처음 시작했던 나의 교우 마르가리따가 진짜 마르가리따인 것을.
나는 한인 타운에 살지만 대여섯 개 있는 한국식품점은 몇 달에 한번이나 갈까 말까 그러고 주로 Coto라는 현지인 마트나 중국인이 운영하는 마켓이나 조선교포가 주인인 '안녕'에 주로 간다.
'안녕 슈퍼'
뜻은 괜찮고 친근미 넘치는 좋은 상호 같은데, 왜 그 상호만 떠올리면 길에서조차 포복절도와 같은 웃음이 터지는지.
하여간에 한국식품점을 피하는 진정한 이유의 첫째는 모두 알음알음한 사람들인데, 두어 가지 정도만 사들고 나오기가 꽤나 겸연쩍어서다.
내 절약정신에 크게 위배되는 구매를 할 수도 있을 정도로 한국에서 직수입해온 상품들이 식품점마다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충동구매는 절대 안 한다.
그리고 냉장고에 꽉꽉 채우는 성격이 아니라,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만 조금씩 구입해서 사용하기를 선호한다.
예전에 꽉꽉 채우며 살땐 얼마나 많은 걸 버렸었던가.
그래서 지금은 꼭 필요한 걸 그때그때 구입하기를 즐긴다.
실제로 우리 냉장고는 일 년 내내 텅텅 비어서 좀 무용지물처럼도 생각된다.
그런데 냉장고라는 존재는 크게 욕심은 안 부리는 듯 하다. 배부르게 안 채워줘도 큰 소리를 안 내는 데다가 다소곳하고 차분한 모습이다.
개를 키우면 주인을 닮는다던데 냉장고도 주인을 닮는 모양이다.
구태여 부끄러울 사안은 아니라서 짚고 넘어가는데 , 이 여름 들어 나는 한국참외를 1킬로씩 두 번째 샀을 것이다.
멜론이 더 달고 싼값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먹는 거에 절대 호사를 안 부리는 편이다.
나의 조모께서는 한 번 떠나간 끼니는 다시 안 돌아온다고 그러셔서 나는 그걸 진리처럼 챙기며 산다.
의료보험을 안 들었으니까, 일부러 밥까지 굶으며 검사 다닐 일도 없고, 어디가 고장 나서 소화 안 될 일도 없으며, 튀기거나 지지고 볶는 음식 안 좋아하니까 내 속은 언제나 속 상한 게 아니라 속 안 상해 있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얘기가 옆으로 흘렀다.
어제 낮에 우리 가게와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위치한 중국마트에 갔었다.
아직 말문도 안 트이고 세 살도 못돼 보이는 중국인 주인의 아들이, 너무도 귀여운 모습으로 아장아장 걸어와 아는 체를 한다.
아는 체라고 해야 내 무릎을 서너 번 두드린 거였지만.
내가 항상 아우스팅! 그렇게 이름을 불러주며 인사를 주고받고 그래서였을까?
맨날 네모난 플라스틱으로된, 울타리가 높은 놀이터 안에서만 지내다가 모처럼 해방되었다 싶었는지 그 정확한 이유까지는 캐지 못했지만 , 그 아기는 한국라면이고 밀가루고 낮은 쪽에 진열된 상품마다 내 장바구니에 손수(?) 담아주고 있었다. 그렇게 상술이 뛰어난 아기가 그동안 어떻게 그 네모난 틀 속에만 갇혀 있었을지 의문도 되고 웃음도 터지고 참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계속 상품을 들고 와 쏼라쏼라 떠들며, 지구의 자전이 저절로 느껴지는지 쓰러질 듯 아슬아슬 기우뚱 쫒아오는 그 아기에게서 줄행랑치느라 그 아기가 아니라 내가 먼저 넘어질까 봐 죽는 게 아니라 죽어 나가떨어지는 줄 알았다.
휴우! 아직껏 심장이 마구 뛴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풀풀 웃게 된다.
오, 나이에 상관없이 상술을 발휘하는 중국인들의 끈기여!
나는 고객에게 친절한 편이고, 그럭저럭 기억력도 좋은 덕택에 고객의 이름을 한 번 들으면 틀리지 않게 그대로 불러주고 있는데, 나의 고객들은 그점을 퍽으나 흐뭇해하는 것도 같다.
아무튼 그 중국인 젊은 내외에게서 나는 많은 걸 배우게 된다.
현지인 고객들의 애완견 이름까지 모두 챙기면서 친목까지 다지려는 면이 은연중에 보이는 게 아니라 곁으로도 보이는 것이다.
한 20년 슬픔과 불행에게 멱살을 잡힌 채 살아내서인지, 나는 이제야 중년에 이른 느낌이고, 다 늦게 세상이 싱싱 싱그럽다.
몇 달 전에 미용실에 2년 만에 갔더니 미용사가 깜짝 놀라며 반가워하고 있었다.
내 머리통에서 검은 새싹이 마구 솟아나고 있다는 얘기였다.
방금 전, 거리를 지나던 현지인이 하필 우리 가게의 초인종을 눌러 길을 묻는다.
현지인 거지도 물병을 내밀며 물을 담아 달라고 한다.
나는 친절하게 가르쳐 줄 뿐 아니라 , 정성껏 차가운 물을 담아 건네며 약간의 적선도 잊지 않고 해낸다. 우리 가게 근처의 거지들은 안다. 날마다 오면 물만 얻어 가지만 어쩌다 들르면 지폐도 얻을 수는 있다는 사실을.
나는 불안을 안 키우고 산다.
불안은 언제나 권태까지 데리고 다니는 종자다.
나는 권태도 말이나 글로만 알고 있다.
혼자일 때 역시 전혀 심심해 본 적은 없다.
책과 음악과 글쓰기가 내 곁에서 항상 나를 지켜주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푼수 떼기 맞다.
나는 모자란 거 맞다.
푼수 떼기는 사는 게 재미있다.
모자라게 사는 건 싱싱 신난다.
왜냐면 크게 바라는 게 없기 때문이다.
아래의 얘기처럼 자기 중심도가 너무 강하지만 않다면 자기에게 맞춰서 산다는 건 어떤 의미로든 현명하고 복된 일이 아닌가 싶어진다.
' 1965년 11월.
미국 동부는 큰 정전을 겪게 되었다.
뉴욕도 암흑 천지였다.
브루클린에 사는 맥스가 때마침 전구를 갈아 끼우는 순간 정전이 되었다.
부인 로지는 재빨리 일어나 창문 곁으로 달려갔다.
창밖을 내다보니 뉴욕 시내는 온통 콜타르를 쏟아 부은 듯 깜깜절벽이었다.
로지는 놀라 소리쳤다.
"맥스. 이건 너무 한 일이네요. 당신이 전기를 잘못 만지는 바람에 뉴욕 전체가 전부 정전이 되어 버렸잖아요."
2012년 1월 15일 일요일
2010년 맹하린 시집 해설 - 박해림
끝없는 도전, 길찾기와 탐색의 여정
박해림 (시인 ․ 문학박사)
1.
‘갈등은 내게 여일한 흐름이고 전체적 소통이며 중심의 축이기는 하다.’는 맹하린의 고백은 그의 시를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 이국땅에서 살아온 34년여는 갈등과 소통의 대립각에서 소용돌이치는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지구의 정반대, 계절도 밤낮도 반대인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생의 절반을 살아온 시인의 노래는 참으로 곡진하다. 90년대 중반, 중편소설로 문단에 데뷔한 이래 다시 10여년 후 시로도 데뷔한 재주꾼이다. 소설집과 시집이 각각 한 권씩 발간되었고 그 두 번째 시집을 발간하게 된 시인의 이력은 낯설고 물선 이국땅에서 철저히 삶에만 투신한 것이 아니라 정신세계도 혼신의 힘을 다해 가꾸어왔음을 확인케 한다. 삶이란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외다리와도 같아서 자칫 발을 헛디디면 벼랑 아래로 떨어지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한 쪽 발을 정신세계에 걸쳐두었다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哀而不悲 樂而不流’. 이민의 시간 속을 넘나드는 삶의 행간에 초록 무성한 문학이 살아 숨 쉬고 삶의 강건한 역동성이 오늘의 맹하린 시인을 만들었다면 그 결과물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다. ‘시의 행간이 물장구치듯 내 발치에서 철벅일 때, 두 나라에 공존하는 것만 같은 강한 혼돈을 어쩌지 못해 내가 나를 시 앞에 꿇어앉히던 나날들’이 증언하는 시인의 내적 세계는 끊임없이 솟구쳐 오르는 욕망에 다름 아니다. 인간에게 욕망이 없다면 결코 살아있다고 할 수 없다. 그 욕망이 단순한 탐욕으로 화(化)한다면 살아 있어도 살아있다고 할 수 없다. 시인은 이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한 번밖에 없는 삶을 어떻게 살아내어야 할지 불면의 숱한 이국의 밤을 앓고 또 앓아야 했다. 작품 전반을 아우르는 집요한 생명력과 견고한 다짐, 확인, 약속, 인식, 성찰, 향수, 의지, 애상 등의 감각은 그것을 말해주고도 남는다.
맹하린의 시는 대체로 산문형태, 즉 이야기 형식을 띠고 있다. 압축보다 풀어내는 시풍을 택한 것은 시인의 개성일 수도 있지만 억압의, 가슴 속 응어리가 많은 탓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일인칭 ‘나’의 사설이듯, 여백이듯 건너뛰는 모국어의 행간은 촘촘하다. 또한 너무도 크고 깊다. 풀고 맺는 이완의 부단한 작업을 통해 감정이입이 쉬운 반복적 어휘를 자기만의 독특한 언어구사로 구현한다. 모국어로 시를 쓴다는 건 뿌리를 잊지 않는 것이다. 아니 그 이상이다. 말이 쉽지 간단한 메모이거나 기록에 끝나지 않고 고도의 정신세계를 현현하는 문학적 언어를 잊지 않고 여전히 자유자재로 구사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가령 시 전편에 유난히 의태어, 부사어, 동사, 명사반복이 많은데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시인의 몸 어디엔가 바짝 달라붙어 있다가 소통의 기회가 주어지면 그 존재를 드러내 보이는 듯하다. 시인의 타고난 예리하고 섬세한 언어감각이 전방위로 체화되었기에 가능하다는 느낌이다. 총 86편에 달하는 시에서 ‘파릇파릇, 주렁주렁, 소복소복, 포동포동, 수런수런, 초롱초롱, 술렁술렁, 엉금엉금, 주섬주섬, 시들시들, 반질반질, 보송보송, 아삭아삭, 사근사근, 휘적휘적, 쫄깃쫄깃’등의 눈에 익숙한 의태어, 부사어들뿐만 아니라,‘너글너글, 퍼석퍼석, 하마하마, 슴벅슴벅, 시적시적, 사붓사붓, 다붓다붓, 사분사분, 생게망게, 왈칵왈칵, 아치랑아치랑, 우럭우럭 등 요즘 자주 보기 어렵거나 생경스러운 부사어, 동사들까지 즐겨 차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흔덕흔덕, 서그럭서그럭, 싱둥싱둥 등의 사전에도 없는 말과 사록사록(동사 변형), 다분다분(형용사 변형), 야단야단(명사반복)의 현상은 시인 특유의 언어조탁 능력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모국어에 대한 강한 애착을 엿보게 한다.
이러한 언어의 반복 현상은 시인에게 있어 생래적으로 몸속 깊이 체화된 모국어가 고향의 시간을 일깨워주는 도구일지 모른다. 언어와 문화, 삶의 방식이 전혀 다른 이국(異國)에서 그 존재를 잃을까 염려되어서 일지도 모른다. 생경스럽고 전혀 낯선 공간이 아주 익숙한 공간으로 다가올 때의 두려움은 새로운 것에의 적응이다. 간절히 적응하기를 원하지만 한편으로는 나의 세계를 잃게 되는 두려움은 하나를 얻을 때 다른 하나는 잃을 수밖에 없는 것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이전 익숙한 내 것이 이후 점점 마모되거나 사라지고 있어 이와 같이 언어의 재창조를 가져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기억이란 태초의 생성에서 소멸의 과정에 이르는 우리의 모든 삶을 지배한다. 자아가 형성되기 전 몸속에 새겨진 지문과도 같은 기억이 환경이 달라졌다고 뿌리 뽑히지 않는다. 수십 년을 지구의 반대편인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살아온 시인은 오히려 체화된 몸의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본능적인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그 중 한 방편이 문학이라고 볼 때 기억은 거대한 에너지다.
2.
맹하린 시집의 시들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일상생활을 거침없이 드러내 보이면서 인식과 성찰을 반복한다. 선택한 행동들에 대한 깊은 사유와 일의 앞뒤를 다시 확인하고 재어보는 치밀함, 반듯한 행동과 생활의 틀을 벗어나면 안 된다는 무언의 압박감을 스스로 가슴 위에 돌처럼 눌러놓고 한편으로는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시인의 시선은 한쪽에 고정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다른 한 쪽을 끊임없이 탐색하고 있다. 무엇을 찾고 있음인가? 그녀의 앞에 펼쳐진 세계는 참 기이하다. 그의 시를 살펴본다.
어떤 장소가 문제가 아닌데
문제는 분명 나인데
어떤 장소라도 처음 들어간 장소는
나올 때마다 방향감각을 잃고
생게망게에 빠지고 만다
문제가 문제 될 건덕지 없긴 하다
차라리 반대쪽으로 발길 옮기면
가야 할 길 의연히 제시되는
참 명쾌하면서도 기묘한 선택
살아감 자체가 오고감이 유별한 관계로
몇 번이고 헤매고 나서야 비로소
바른 길 불쑥 앞을 터줬던 건 아닐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자주 길 잃고
결국 반대쪽을 내딛게 되는
방황하며 방향을 제시받는
나의 참 아픈 방향감각
—「방향감각」전문
시인은 길 위에서 ‘길 찾기’를 하고 있다. 공간과 공간이 연결된 통로에서, 그 과정에서 길이 사라졌다 나타났다 반복한다. 낯선 어떤 공간에 들어갔다 나올 때 방향감각을 상실하는 경우가 특별한 것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늘 있을 법한 일이다. 하지만 시인은 금세 반성 한다. ‘어떤 장소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분명 나’에게 있음을 강조한다. 살면서 무수히 만나는 허방에서 길을 잃고 좌충우돌할 때 비로소 깨닫게 된다. ‘몇 번이고 헤매고 나서야 비로소 바른 길 불쑥 앞을 터줬던 건 아닐까’아마 그럴 거야 하고 사려 깊은 반성을 하고 있다. 열심히 달려온 삶의 방향감각을 상실했을 때 오는 난감함은‘ 터무니없다’라는 부사어‘생게망게’다. 생게망게가 주는 언어적 뉘앙스가 신선하다. 옳다고 선택한 길은 결코 옳은 길은 아니라는 자성의 변론은 ‘나의 참 아픈 방향감각’임을 고백하고 있지만 사실 누구나 한 번쯤은 이 변론에 동의하고 싶을지 모른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자주 길 잃’는 일은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충분히 그럴 것이기에 쉽게 공감이 가는 것이다. ‘방황’의 과정을 거쳐야만 ‘방향을 제시받는’데 문제는 ‘아프다’는 데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사는 시인은 이곳에서의 삶이 늘 기이하다. 기이하면서 늘 익숙하다. 아래의 시는 이국의 삶에서 뿌리내리고 살고자 부단히 애를 쓰는 ‘동안’의 모습이 한눈에 조망된다.
내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사는 동안
소떼 한가로이 풀 뜯고 잔디는 뒤덮을 듯 들판 에워쌌다
바둑판처럼 네모나게 펼쳐진 사방으로
파란만장에 가까우리라는 예감
잡초처럼 왕성하게 가지를 뻗어내고 있었다
틈틈이 아이들과 근교에 나가 가오리 연 날리며
돌아가고 싶은 마음 반향사고로 뒤집어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각오의 실톳 바짝 붙들며
풀었다 늦췄다를 거듭했다
(중략)
나는 지금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금세 도착한 것만 같은
생경스러움으로 히말라야시더처럼 사시장철 푸르러 있고
이방인에게도 다채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감상 새록새록 싹터 올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그냥 살아 내려는
결심 개개비사촌새처럼 머릿속 까맣도록 굳혀져 있다
(중략)
모든 집들이 전부 틀린 모양으로 어깨동무는 했으나 각각 토라져 앉아
그 점을 참 기이하게 여겼다
똑 같아도 이상한데 하나도 안 똑 같음이 볼수록 이상하여
나는 이상한 나라의 예상치 못한 사람들과
그들의 독특한 생에 대하여 접근 가능성을 계획하거나
친화의 등피 닦아 창문 가까이 램프 걸어 두었다
내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사는 동안
내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사는 동안
—「내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사는 동안」부분
3.
시인의 의식 한쪽은 늘 ‘가오리연’을 날리던 고향에 닿아 있다. 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돌아가면 안 된다는 대립각에 날이 서 있다. 기실 연 날리는 행위는 놀이이다. 하지만 여기선 놀이를 앞세운 자아와의 갈등과 화해의 반복이다. 놀이의 측면으로 볼 때는 그리움이 근간에 놓이지만 ‘돌아가고자’하는 강렬한 바람이 솟구칠 때는 갈등을 부른다. 줄을 당겼다가 놓는 반복된 행위가 그것이다. 다잡고 또 다잡는 현실적응의 강한 욕구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밀어 올리는 것에 다름 아니다. 허리 휘도록 열심히 벌어도 심각한 인플레로 얼마 안 되는 달러를 손에 쥘 때 ‘여름날 아스팔트보다 더 끈끈한 검질긴 느낌/신발에 자꾸만 달라붙어 마음에까지 달라붙’는 절박함에 ‘패잔병’이 된다.
하지만 시인은 새처럼 노래한다. ‘나는 지금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금세 도착한 것만 같은/생경스러움으로 히말라야시더처럼 사시장철 푸르러 있음'을 스스로 고취시키며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그냥 살아 내려는/결심 개개비사촌새처럼 머릿속 까맣도록 굳혀져 있’는 것이다. 달아나려는 다짐과 각오를 마음속에 들어앉히며 다시 길을 찾는다. 그러면서 이국정서와 현실에 눈을 떠간다. ‘모든 집들이 전부 틀린 모양으로 어깨동무는 했으나 각각 토라져 앉아/그 점을 참 기이하게 여’기는, 적응할수록 저항의 몸짓 또한 거세 곧‘기이함’, ‘이상한 나라’로 슬쩍 비켜가는 재치를 보인다.
「띠또네 가게」는 불안한 존재의 확인을 드러내는 시다. 아직 뿌리내리지 못한 이국의 흔들리는 구도 속에서 잊고 있었던 자아의 정체성을 발견한다.
조니 뎁이나 올렌도 블롬보다
더 잘 생긴 띠또
그의 가게에서 계산을 치르려고
몇 발 다가가다가
약간 발 헛디뎌 넘어지려고 했을 때
띠또의 주위에 둘러 서 잡담을 나누던
띠또의 고객과 띠또의 고객들
예닐곱 사이에서 마르가리따, 하고
띠또가 나의 아르헨티나 이름을
부르짖는 순간
그들 모두 띠또의 놀라움 실린 명령
내내 기다렸다는 듯 전광석화처럼
구원의 손길 나 향해 펼쳤을 때
(중략)
마음이 건져졌을 때는 마음으로의 수혈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것만 같아
한층 시에 가까워져야 하리라는 각오
그들의 손길처럼 나 향해 펼쳐지고 있었다
—「띠또네 가게에서」전문
이 시대에 잘 나가는 미국의 미남이자 개성파배우 조니 뎁, 매력남 올렌도 블롬보다 잘 생긴 ‘띠도’는 평범한 가게 주인이다. 그 가게에서 시인은 공교롭게도 계산 후 넘어질 찰나에 놓였다. 순간 불려진 ‘마르가리따’의 존재. 시인의 아르헨티나 이름이다. 잘 생긴 ‘띠또’의 외마디에 주위 시선이 한 곳으로 집중되고 스스로를 확인한다. 나는 누구였던가? 지금 이전과 이후의 가운데 서 있는, 넘어지지 않으려 뒤뚱거리는 이 여성은 누구인가? 자문자답 속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민으로 우뚝 선 자아와 맞닥뜨리게 된다. 늘 한 발은 고국(과거)에 걸쳐두고 다른 한 발은 아르헨티나(현재)에 놓은 채 살고 있는, 살 수 밖에 없는 시인의 현재적 모습이 확인되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 쉰다. ‘구원의 손길 나 향해 펼쳤을 때’에 서로 이미 동화된 공동체로서의 모습인 것이다. 이웃의 ‘손길’은 곧 갈등을 넘어선 화해의 손길이며 시인이 그토록 넘어서고자 했던 길이었다.‘마음이 건져졌을 때는 마음으로의 수혈/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것만 같’은 시인은 스스로를 새삼 다독인다. ‘한층 시에 가까워져야 하리라는 각오’로 세계를 응시한다.
그러나 다시 길 한 가운데서 길을 잃어버린다. 겨우 길을 찾아 들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방향감각을 상실한다. 내비게이션이 절실히 필요한 사각구도에 갇힌다.
차도에 발 내 딛자
비옷 자락 우격다짐으로 붙잡아 버리는 자동차의 왼손
-눈물 뚝뚝 떨구며 어리광 섞던 비의 칭얼거림에 한 나절을 헤맸더니
눈앞이 다 깜깜해요 내비게이션 하나 달아 주셔요.
(중략)
크게 내키진 않지만
당장 내비게이션 하나 달아주면
나 빗발치는 빗줄기의 심포니 속을 씽씽 달리며
허청허청 방황할 자유는 계속 남는 것일까
—「내비게이션」전문
긴 여정에 자동차 없이 목적지에 다다르기란 참으로 난감하다. 그러나 자동차가 있다하더라도 방향 설정의 불명확은 더욱 난감하다. 그리하여‘눈물 뚝뚝 떨구며 어리광 섞던 비의 칭얼거림에 한 나절을 헤맸더니 눈앞이 다 깜깜해요 내비게이션 하나 달아 주셔요.’하고 사정한다. 누구를 향해 던진 부탁인가. 비오는 날이면 앞은 더욱 흐리기 마련이다. 직진이든, 우회전이든, 좌회전이든 할 텐데 앞은 다 지워졌다. 시인은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나 방향상실에 난감하다. 내비게이션만 있다면, 하고 간절히 희구한다. 없던 길이 무수히 생겨난 요즘 기존의 방향감각으로, 표지판으로는 가고자 하는 길을 제 시간에 맞춰 가기 쉽지 않다. 에돌아가는 것만도 다행이다. 낯선 길에선 아예 찾다가 지쳐 포기하기 십상이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설정한 목표지점에 다다르기 위해서 내비게이션은 필수적이라는 시인의 발상이 신선하다. 삶의 길 찾기에 은유로 해석되어지는 ‘내비게이션’의 효용은 시인의 방향표지판이다. 하지만 ‘당장 내비게이션 하나 달아주면/나 빗발치는 빗줄기의 심포니 속을 씽씽 달리며/허청허청 방황할 자우는 계속 남는 것일까’하며 의문부호를 단다. 정직하게 분명하게 가시화된 목적지를 향해 단숨에 달려간다면 시인만이 공유하는 화려한(?) 여백의 공간인‘허청허청 방황할 자유’는 박탈당하지 않을까 우려되는 것이다. 시인은 그 장소가 어디가 되었건 길 찾기의 선상에서 에너지의 원천이 되기도 할 ‘방황’을 그려낸다. 하지만 곡진한 ‘방황’의 의미가 함축적 의미를 더하기 위해선‘허청허청’은 그다지 필요치 않은 수식일 터이다.
갈등과 화해는 삶의 지점 어디에서나 상승과 하강의 곡선을 긋게 마련이다. 아래「현지인들」은 시인이 살고 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민을 관찰자적 입장에서 토로하고 있는 시이다.
아삭아삭하고 사근사근하기는
자른 지 여덟 시간 동안 하얀 속살 유지한다는
신품종 사과 '질투'처럼 해반지르르
곱다랗기보다 드센 편에 속하나
곧게 위로만 뻗는 삼나무처럼
자존심의 껍질은 갈색
긍지의 잎은 바늘과 다름없이 뾰족뾰족
성질머리는 강파른가하면 고고하여라
쌀밥조차 쫄깃쫄깃 찰지면 질색이고
절대로 안 붙는 독립된 밥알 선호하며
그런 쌀일수록 비싼 축에 들어서
그들의 국민성을 절로 절감하게 만드는
(중략)
사과와도 같고
삼나무와도 같으며
잘 안 붙는 밥알처럼
(중략)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내가 알거나
또는 모르기 마련인
현지인들
—「현지인들」전문
한 편의 시에서‘사과’와 ‘삼나무’와 ‘밥알’에 비유되고 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사람들. 시인의 눈에서 독특한 개성적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질투’라는 이름을 가진 사과는 매우 특이한 신품종이다. ‘아삭아삭하고 사근사근하기는/자른 지 여덟 시간 동안 하얀 속살 유지하’기 때문이다. ‘아삭하고 사근한’ 것이 기존의 사과와는 사뭇 다르다. 삼나무의 경우, 본능적 속성이 곧게 위로만 뻗는 것인데 ‘자존심의 껍질은 갈색/긍지의 잎은 바늘과 다름없이 뾰족뾰족/성질머리는 강파른가하면 고고하’다. ‘밥알’은 우리네 찰진 밥알보다 독립된 밥알, 즉 안남미 같이 서로 붙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을 종합해 현지인들의 특성을 풀어낸다. ‘보일 듯 감춰진 듯/더욱 뚜렷하게 부각되는’ 이들의 국민성이 시인의 눈에 새삼스럽다. 파악된 그만큼 현지인들과 점점 밀착되고 있는,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동화되어가고 있는 적응력을 드러낸다고 하겠다. 시인의 길 찾기가 현지적응력을 통해 잠시 주춤하고 있다.
4.
하지만 다시 길 찾기의 여정이 시작된다. 잘 살아낸다는 것은 한 곳에 적응되었다 싶으면 보다 더 나은 삶으로 이동하는 것을 말한다. 삶의 질이란 늘 숙명과도 같아서 잠시도 게을리 할 수 없다. 아래의 시 「고도를 기다리며」는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머리에 제초제 뿌린 현지인 청년
며칠에 한 번씩 붙박이처럼 서서
기다림이 어떤 것인지 혹독한 연습
거듭하고 거듭한다
우리 가게 앞 화단의 난간에
한 발 부단히 얹고
(중략)
그가 서 있는 작은 섬을 끼고
크고 작은 차들이 파도처럼 출렁이며
쉼 없이 밀려오고 밀려간다
나는 오늘도
기다림으로 지친 게 아니라
기다림으로 마냥 설레어 있는 그를
등대처럼 우뚝 서서 자꾸만 내려다보고 있다
그는 진정 고도를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
정작 고도를 기다리는 건 내가 아닐까?
세상이라는 바다에
외로운 섬으로 떠 있는
내 가게 앞 화단에
한 발 부단히 얹고 서 있는
(하략)
—「고도를 기다리며」전문
가게 너머 현지인 청년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시인의 눈은 어느 새 탐색의 여정에 들어가 있다. 첫 연의 내용이 예사롭지 않다. ‘머리에 제초제 뿌린 현지인 청년/며칠에 한 번씩 붙박이처럼 서서/기다림이 어떤 것인지 혹독한 연습’을 반복하고 있는 모습은 시인의 삶에 그대로 전이된다. 시인의 가게 앞 화단의 난간에 서서 그는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가. 뿐만 아니라 그는 ‘누구인가?’의문부호를 단다. 그 다음 ‘행여 고도를 기다리는 것 아닐까?’생각해보는 것이다. ‘기다림’, 타자의 삶을 들여다보며 나의 기다림을 만나는 이러한 탐색 작업은 그 속에 내재한 길찾기의 간절한 염원이 없고서야 생각하기 어렵다. 따뜻하고 긍정적인 시선으로 그 기다림을 스스로 용해시킨다. 시인은 현재를 직시하며 미래를 견인한다. 기다림을 ‘설레는’ 것으로 치환시키는 것이다. 이제 시인은 여유가 생겼다. 스스로 ‘등대’로 자처한다. 이것은 기다림이 무엇인지 아는 이만 생각할 수 있다. 그러기에 ‘세상이라는 바다에/외로운 섬으로 떠 있는/내 가게 앞 화단’을 보아낸다. 시인이 속한 가게는 저 드넓은 세계 속에 한 개 외로운 섬이 아닌가. 이국 청년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한인 타운의 대로변
까라보보 거리의 중앙분리화단에
어른 떡갈나무 다섯 그루와
어린 떡갈나무 20여그루 터를 잡고
모여 산다
(중략)
몇 십 년 후
우리의 후세들이 한국말 양념처럼 얹어
서반아어로 뚜알뚜알 말하며
우리의 한인 타운을 잘 지켜낼 수 있을까?
인접국 이민자들로 구성된 날치기나 퍽치기가
기필코 한국인만을 겨냥하며
(중략)
이방인이 이방인만을 표적으로 삼는
한인 타운 대로변
청소년 떡갈나무들
시침 뚝 뗀 채 잘 자라고 있다
—「청소년 떡갈나무들」부분
시인의 역동적인 길 찾기의 탐색은 자신에게만 국한시키지 않는다는 데서 빛난다. 한인 청소년들을 향한 따뜻한 모성애적 애정을 보인다. 한인 타운 대로변에‘어른 떡갈나무 다섯 그루와/어린 떡갈나무 20여 그루 터를 잡고/모여 산다’며 적응력이 뛰어나며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떡갈나무에 한인을 비유시키고 있다. 그 어느 식물들보다 뿌리를 잘 내리며 혹한도 견뎌내는 어린 떡갈나무를 보면서 내심 대견해 하고 있다. 다른 이민자들의 범죄 대상자로서 한인이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한 것을 시사하면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다. 하지만 어떠한 위험요소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괘념치 않고 제자리를 꿋꿋하게 지켜내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온몸으로 풍파를 겪어낸 부모세대가 그랬듯 다음 세대 역시 그러할 것이라는 믿음과 염려하는 마음이 따뜻하게 전달되고 있다.
맹하린의 시집은 도시적 서정에서 발견되는 뿌리내리기, 길 찾기의 여정 외 숨 가쁜 일상 속에서도 자연과 교감을 이루는 시인의 여유를 만날 수 있다. 시 「풀꽃의 미소」, 「모과」, 「고드름」, 「소나기」, 「담쟁이」, 「해바라기」, 「함박눈」, 「동백꽃」, 「귀뚜리스트」, 「바위」등은 시인의 원형적 자연서정이 잘 드러나는 작품들이다.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 객관적 상관물의 원형들은 시인의 품성이 그러하리라는 짐작을 갖게 한다. 특히 귀뚜라미를 의인화 한「귀뚜리스트」는 ‘혼신 바쳐 사명감 다하며/낮에만 쉬는 열정적 일꾼’을 통해 자신을 투사한 것으로 보인다. 시인은 순수 자연 서정에서조차 일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한 작품이다. 그 외 「바위」를 경전으로 읽는, 궁극적으로 평화를 희구하는 시인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5.
시인의 길찾기는 유년에 그 뿌리가 닿아 있다. 귀소본능의 요소가 인간에게 ‘그리움’을 생산해내고 있다면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상실과 박탈은 끝없는 허기를 불러온다. 또한 본질적 욕망과의 충돌을 야기한다. 의지에 반(反)하는 이 충돌은 의지가 강할수록 충돌에 가속이 붙는다. 고향을 향한 맹하린 시인의 다음의 시편들을 살펴보면서 그리움에 절은 한 인간을 만날 수 있다. 한 여성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아이덴티티(identity)를 볼 수 있는 것이다. 특정 지역인 「백도」, 「오동도」, 「향일암」과 더불어「조각달의 표정되어 뜨다」, 「어머님의 고향」, 「할머니」, 「원두막으로」, 「호두나무」에서 발견되어지는 그리움은 귀소본능으로 얼룩져 있다. 아래의 시를 보자.
어머니로 하여금 목포는
한 번도 가 본적 없고
앞으로도 갈 수 없는 도시와는
생판 다르다는 인식 속에 존재하며
매양 서 있었다
해넘이를 배경으로 갯벌에서
금방 떠나온 사람처럼
어머님은 언제나 몸빼바지 차림으로
돌아갈 준비 항시 되어 있었다
(중략)
—「어머님의 고향」부분
시인의 그리움은 그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 모성적인 것에 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의 근원/나의 표본/나의 강/나의 등경/사랑하올 나의 할머니(「할머니」) ‘해넘이를 배경으로 갯벌에서/금방 떠나온 사람처럼/어머님은 언제나 몸빼바지 차림으로/돌아갈 준비 항시 되어 있/는 것이다. 시인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유년을 향해 서 있는 모습이 어머니의 그것과 흡사하다. 이미 떠나온 고향에 대한 애착과 그리움은 몸속 깊이 각인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목포를 전설과 같이 영원히 품에 안고 시인의 몸속 깊이 새겨졌다. 어찌 잊고 살랴만 잊는다고 잊힐 성질의 것이 아닌 것이 그리움이다. 드러내놓고 그리워하는 것이 차라리 덜 그립다. 하지만 그러기엔 그리움이 너무 깊다. 친인척을 호칭하는 시도 여럿 보인다. 이들에 대한 그리움의 질량도 만만찮을 것이다.
그 외 수십 년의 이국 생활에서 정착을 하면서 비교적 정서적으로 안정을 보이는 작품들이 있다. 「흘러 간 시간을 초대하여」, 「한인 타운에서」, 「행복에 대하여」, 「자화상」, 「펼쳐진 하늘 아래서」, 「펭귄들의 나날」, 「약속, 변화 추구하는」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 「행복에 대하여」는 최근의 심정을 압축하여 보여주고 있는 듯 하다.
행복하면
시가 내 안에서 빠져 나갈 줄 알았다
그런데
행복한데도 시가 써진다
행복해서
다른 데로 눈길 돌리려 해도
시가 자꾸만 나를 잡아당기며
제 앞에 붙들어 앉힌다
(중략)
그래도 나는 행복하여라
어찌 됐던 끝끝내 시를 쓰리라
이름만 바꾼 행복일지라도
시를 못 써낼 이유는 없다
아름답거나 화려함을
시로서 표출하려던 의도 아닌 바에야
(중략)
한 줄기의 절망
한 움큼의 고통이
늘 나를 깨어 있게 하는데
—「행복에 대하여」부분
타향살이가 아무리 편한들 내 고향만하겠는가. 하지만 시인은 행복이라는 시어를 즐겨 차용한다. 한 편의 시에서 행복이라는 어휘가 일곱 번이나 반복되었다는 것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솔직하게 토로하고 있는 행복은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내면에서 차고 넘치는 질량이다. 행복하면/시가 내 안에서 빠져 나갈 줄 알았다/그런데/행복한데도 시가 써진다고 고백한다. 행복이란 인위적으로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시를 써서 더 행복하다는 시인의 함박웃음은 행복을 통해 세계의 확장을 불러오고 있다. 삶의 군더더기를 벗어버리고 조그만 알맹이에 만족하고 있는 자신을 확인하면서 사실 행복이란 그다지 멀리 있지 않으며 대단한 것도 아니라는 깨달음을 보이고 있다. ‘내 행복이란 게/참 보잘 것 없’음을 고백하고 있지 않은가.
맹하린 시편들은 참 소박하다. 화려한 미사여구를 차용하지 않고서 내면의 아름다움과 외로움, 그리움, 사랑, 성찰을 잘 풀어내고 있다. 이미 소설가로서의 필력을 보였던 바, 유창한 흐름을 따라 하고 싶은 말을 주저하지 않는다. 때론 직설적이면서 때론 에돌아가는 마음의 행로를 그다지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다. 시인은 타고난 역동성을 절제하는 것에 익숙하며 주어진 것에 만족하기보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세계를 향한 시인의 삶의 진정성은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다. 남들보다 한 발 앞서 노력하고, 남들보다 앞서 가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채찍질이 뼛속 깊이 내재되어 있는 듯하다. 꿈틀/파도치듯 일렁이는 변화로의 도약(「약속, 변화 추구하는」)을 위해 세상과 스스로를 향해 당당하게 약속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다. 끝없이 미지의 나를 찾아 끝없이 미지의 세계를 탐색하는 여정은 더욱 힘든 일이다.
산다는 것은 무수한 상처를 안으로 다독이는 것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하고 홀로 감내하는 것이다. 이역만리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수십 년을 살아가고 있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인 맹하린 시인을 직접 보지는 못하였지만 만난 것 같은 것은 분명 시의 힘일 것이다. 어떠한 상처라도 상처로 두지 않고 소통의 창구로 바꾸어 놓는 재주를 가진, 모국어에 대한 애착이 문학에 현현되어 풀고 맺는 남도소리 같은 고백들. 이야기 형태의 시를 통해 시인의 도전과 길찾기, 그리고 그 과정에서 확인되고 있는 지난한 탐색의 여정이 더욱 새롭게 꽃피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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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도전, 길찾기와 탐색의 여정
박해림 (시인 ․ 문학박사)
1.
‘갈등은 내게 여일한 흐름이고 전체적 소통이며 중심의 축이기는 하다.’는 맹하린의 고백은 그의 시를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 이국땅에서 살아온 34년여는 갈등과 소통의 대립각에서 소용돌이치는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지구의 정반대, 계절도 밤낮도 반대인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생의 절반을 살아온 시인의 노래는 참으로 곡진하다. 90년대 중반, 중편소설로 문단에 데뷔한 이래 다시 10여년 후 시로도 데뷔한 재주꾼이다. 소설집과 시집이 각각 한 권씩 발간되었고 그 두 번째 시집을 발간하게 된 시인의 이력은 낯설고 물선 이국땅에서 철저히 삶에만 투신한 것이 아니라 정신세계도 혼신의 힘을 다해 가꾸어왔음을 확인케 한다. 삶이란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외다리와도 같아서 자칫 발을 헛디디면 벼랑 아래로 떨어지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한 쪽 발을 정신세계에 걸쳐두었다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哀而不悲 樂而不流’. 이민의 시간 속을 넘나드는 삶의 행간에 초록 무성한 문학이 살아 숨 쉬고 삶의 강건한 역동성이 오늘의 맹하린 시인을 만들었다면 그 결과물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다. ‘시의 행간이 물장구치듯 내 발치에서 철벅일 때, 두 나라에 공존하는 것만 같은 강한 혼돈을 어쩌지 못해 내가 나를 시 앞에 꿇어앉히던 나날들’이 증언하는 시인의 내적 세계는 끊임없이 솟구쳐 오르는 욕망에 다름 아니다. 인간에게 욕망이 없다면 결코 살아있다고 할 수 없다. 그 욕망이 단순한 탐욕으로 화(化)한다면 살아 있어도 살아있다고 할 수 없다. 시인은 이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한 번밖에 없는 삶을 어떻게 살아내어야 할지 불면의 숱한 이국의 밤을 앓고 또 앓아야 했다. 작품 전반을 아우르는 집요한 생명력과 견고한 다짐, 확인, 약속, 인식, 성찰, 향수, 의지, 애상 등의 감각은 그것을 말해주고도 남는다.
맹하린의 시는 대체로 산문형태, 즉 이야기 형식을 띠고 있다. 압축보다 풀어내는 시풍을 택한 것은 시인의 개성일 수도 있지만 억압의, 가슴 속 응어리가 많은 탓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일인칭 ‘나’의 사설이듯, 여백이듯 건너뛰는 모국어의 행간은 촘촘하다. 또한 너무도 크고 깊다. 풀고 맺는 이완의 부단한 작업을 통해 감정이입이 쉬운 반복적 어휘를 자기만의 독특한 언어구사로 구현한다. 모국어로 시를 쓴다는 건 뿌리를 잊지 않는 것이다. 아니 그 이상이다. 말이 쉽지 간단한 메모이거나 기록에 끝나지 않고 고도의 정신세계를 현현하는 문학적 언어를 잊지 않고 여전히 자유자재로 구사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가령 시 전편에 유난히 의태어, 부사어, 동사, 명사반복이 많은데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시인의 몸 어디엔가 바짝 달라붙어 있다가 소통의 기회가 주어지면 그 존재를 드러내 보이는 듯하다. 시인의 타고난 예리하고 섬세한 언어감각이 전방위로 체화되었기에 가능하다는 느낌이다. 총 86편에 달하는 시에서 ‘파릇파릇, 주렁주렁, 소복소복, 포동포동, 수런수런, 초롱초롱, 술렁술렁, 엉금엉금, 주섬주섬, 시들시들, 반질반질, 보송보송, 아삭아삭, 사근사근, 휘적휘적, 쫄깃쫄깃’등의 눈에 익숙한 의태어, 부사어들뿐만 아니라,‘너글너글, 퍼석퍼석, 하마하마, 슴벅슴벅, 시적시적, 사붓사붓, 다붓다붓, 사분사분, 생게망게, 왈칵왈칵, 아치랑아치랑, 우럭우럭 등 요즘 자주 보기 어렵거나 생경스러운 부사어, 동사들까지 즐겨 차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흔덕흔덕, 서그럭서그럭, 싱둥싱둥 등의 사전에도 없는 말과 사록사록(동사 변형), 다분다분(형용사 변형), 야단야단(명사반복)의 현상은 시인 특유의 언어조탁 능력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모국어에 대한 강한 애착을 엿보게 한다.
이러한 언어의 반복 현상은 시인에게 있어 생래적으로 몸속 깊이 체화된 모국어가 고향의 시간을 일깨워주는 도구일지 모른다. 언어와 문화, 삶의 방식이 전혀 다른 이국(異國)에서 그 존재를 잃을까 염려되어서 일지도 모른다. 생경스럽고 전혀 낯선 공간이 아주 익숙한 공간으로 다가올 때의 두려움은 새로운 것에의 적응이다. 간절히 적응하기를 원하지만 한편으로는 나의 세계를 잃게 되는 두려움은 하나를 얻을 때 다른 하나는 잃을 수밖에 없는 것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이전 익숙한 내 것이 이후 점점 마모되거나 사라지고 있어 이와 같이 언어의 재창조를 가져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기억이란 태초의 생성에서 소멸의 과정에 이르는 우리의 모든 삶을 지배한다. 자아가 형성되기 전 몸속에 새겨진 지문과도 같은 기억이 환경이 달라졌다고 뿌리 뽑히지 않는다. 수십 년을 지구의 반대편인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살아온 시인은 오히려 체화된 몸의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본능적인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그 중 한 방편이 문학이라고 볼 때 기억은 거대한 에너지다.
2.
맹하린 시집의 시들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일상생활을 거침없이 드러내 보이면서 인식과 성찰을 반복한다. 선택한 행동들에 대한 깊은 사유와 일의 앞뒤를 다시 확인하고 재어보는 치밀함, 반듯한 행동과 생활의 틀을 벗어나면 안 된다는 무언의 압박감을 스스로 가슴 위에 돌처럼 눌러놓고 한편으로는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시인의 시선은 한쪽에 고정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다른 한 쪽을 끊임없이 탐색하고 있다. 무엇을 찾고 있음인가? 그녀의 앞에 펼쳐진 세계는 참 기이하다. 그의 시를 살펴본다.
어떤 장소가 문제가 아닌데
문제는 분명 나인데
어떤 장소라도 처음 들어간 장소는
나올 때마다 방향감각을 잃고
생게망게에 빠지고 만다
문제가 문제 될 건덕지 없긴 하다
차라리 반대쪽으로 발길 옮기면
가야 할 길 의연히 제시되는
참 명쾌하면서도 기묘한 선택
살아감 자체가 오고감이 유별한 관계로
몇 번이고 헤매고 나서야 비로소
바른 길 불쑥 앞을 터줬던 건 아닐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자주 길 잃고
결국 반대쪽을 내딛게 되는
방황하며 방향을 제시받는
나의 참 아픈 방향감각
—「방향감각」전문
시인은 길 위에서 ‘길 찾기’를 하고 있다. 공간과 공간이 연결된 통로에서, 그 과정에서 길이 사라졌다 나타났다 반복한다. 낯선 어떤 공간에 들어갔다 나올 때 방향감각을 상실하는 경우가 특별한 것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늘 있을 법한 일이다. 하지만 시인은 금세 반성 한다. ‘어떤 장소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분명 나’에게 있음을 강조한다. 살면서 무수히 만나는 허방에서 길을 잃고 좌충우돌할 때 비로소 깨닫게 된다. ‘몇 번이고 헤매고 나서야 비로소 바른 길 불쑥 앞을 터줬던 건 아닐까’아마 그럴 거야 하고 사려 깊은 반성을 하고 있다. 열심히 달려온 삶의 방향감각을 상실했을 때 오는 난감함은‘ 터무니없다’라는 부사어‘생게망게’다. 생게망게가 주는 언어적 뉘앙스가 신선하다. 옳다고 선택한 길은 결코 옳은 길은 아니라는 자성의 변론은 ‘나의 참 아픈 방향감각’임을 고백하고 있지만 사실 누구나 한 번쯤은 이 변론에 동의하고 싶을지 모른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자주 길 잃’는 일은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충분히 그럴 것이기에 쉽게 공감이 가는 것이다. ‘방황’의 과정을 거쳐야만 ‘방향을 제시받는’데 문제는 ‘아프다’는 데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사는 시인은 이곳에서의 삶이 늘 기이하다. 기이하면서 늘 익숙하다. 아래의 시는 이국의 삶에서 뿌리내리고 살고자 부단히 애를 쓰는 ‘동안’의 모습이 한눈에 조망된다.
내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사는 동안
소떼 한가로이 풀 뜯고 잔디는 뒤덮을 듯 들판 에워쌌다
바둑판처럼 네모나게 펼쳐진 사방으로
파란만장에 가까우리라는 예감
잡초처럼 왕성하게 가지를 뻗어내고 있었다
틈틈이 아이들과 근교에 나가 가오리 연 날리며
돌아가고 싶은 마음 반향사고로 뒤집어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각오의 실톳 바짝 붙들며
풀었다 늦췄다를 거듭했다
(중략)
나는 지금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금세 도착한 것만 같은
생경스러움으로 히말라야시더처럼 사시장철 푸르러 있고
이방인에게도 다채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감상 새록새록 싹터 올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그냥 살아 내려는
결심 개개비사촌새처럼 머릿속 까맣도록 굳혀져 있다
(중략)
모든 집들이 전부 틀린 모양으로 어깨동무는 했으나 각각 토라져 앉아
그 점을 참 기이하게 여겼다
똑 같아도 이상한데 하나도 안 똑 같음이 볼수록 이상하여
나는 이상한 나라의 예상치 못한 사람들과
그들의 독특한 생에 대하여 접근 가능성을 계획하거나
친화의 등피 닦아 창문 가까이 램프 걸어 두었다
내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사는 동안
내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사는 동안
—「내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사는 동안」부분
3.
시인의 의식 한쪽은 늘 ‘가오리연’을 날리던 고향에 닿아 있다. 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돌아가면 안 된다는 대립각에 날이 서 있다. 기실 연 날리는 행위는 놀이이다. 하지만 여기선 놀이를 앞세운 자아와의 갈등과 화해의 반복이다. 놀이의 측면으로 볼 때는 그리움이 근간에 놓이지만 ‘돌아가고자’하는 강렬한 바람이 솟구칠 때는 갈등을 부른다. 줄을 당겼다가 놓는 반복된 행위가 그것이다. 다잡고 또 다잡는 현실적응의 강한 욕구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밀어 올리는 것에 다름 아니다. 허리 휘도록 열심히 벌어도 심각한 인플레로 얼마 안 되는 달러를 손에 쥘 때 ‘여름날 아스팔트보다 더 끈끈한 검질긴 느낌/신발에 자꾸만 달라붙어 마음에까지 달라붙’는 절박함에 ‘패잔병’이 된다.
하지만 시인은 새처럼 노래한다. ‘나는 지금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금세 도착한 것만 같은/생경스러움으로 히말라야시더처럼 사시장철 푸르러 있음'을 스스로 고취시키며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그냥 살아 내려는/결심 개개비사촌새처럼 머릿속 까맣도록 굳혀져 있’는 것이다. 달아나려는 다짐과 각오를 마음속에 들어앉히며 다시 길을 찾는다. 그러면서 이국정서와 현실에 눈을 떠간다. ‘모든 집들이 전부 틀린 모양으로 어깨동무는 했으나 각각 토라져 앉아/그 점을 참 기이하게 여’기는, 적응할수록 저항의 몸짓 또한 거세 곧‘기이함’, ‘이상한 나라’로 슬쩍 비켜가는 재치를 보인다.
「띠또네 가게」는 불안한 존재의 확인을 드러내는 시다. 아직 뿌리내리지 못한 이국의 흔들리는 구도 속에서 잊고 있었던 자아의 정체성을 발견한다.
조니 뎁이나 올렌도 블롬보다
더 잘 생긴 띠또
그의 가게에서 계산을 치르려고
몇 발 다가가다가
약간 발 헛디뎌 넘어지려고 했을 때
띠또의 주위에 둘러 서 잡담을 나누던
띠또의 고객과 띠또의 고객들
예닐곱 사이에서 마르가리따, 하고
띠또가 나의 아르헨티나 이름을
부르짖는 순간
그들 모두 띠또의 놀라움 실린 명령
내내 기다렸다는 듯 전광석화처럼
구원의 손길 나 향해 펼쳤을 때
(중략)
마음이 건져졌을 때는 마음으로의 수혈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것만 같아
한층 시에 가까워져야 하리라는 각오
그들의 손길처럼 나 향해 펼쳐지고 있었다
—「띠또네 가게에서」전문
이 시대에 잘 나가는 미국의 미남이자 개성파배우 조니 뎁, 매력남 올렌도 블롬보다 잘 생긴 ‘띠도’는 평범한 가게 주인이다. 그 가게에서 시인은 공교롭게도 계산 후 넘어질 찰나에 놓였다. 순간 불려진 ‘마르가리따’의 존재. 시인의 아르헨티나 이름이다. 잘 생긴 ‘띠또’의 외마디에 주위 시선이 한 곳으로 집중되고 스스로를 확인한다. 나는 누구였던가? 지금 이전과 이후의 가운데 서 있는, 넘어지지 않으려 뒤뚱거리는 이 여성은 누구인가? 자문자답 속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민으로 우뚝 선 자아와 맞닥뜨리게 된다. 늘 한 발은 고국(과거)에 걸쳐두고 다른 한 발은 아르헨티나(현재)에 놓은 채 살고 있는, 살 수 밖에 없는 시인의 현재적 모습이 확인되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 쉰다. ‘구원의 손길 나 향해 펼쳤을 때’에 서로 이미 동화된 공동체로서의 모습인 것이다. 이웃의 ‘손길’은 곧 갈등을 넘어선 화해의 손길이며 시인이 그토록 넘어서고자 했던 길이었다.‘마음이 건져졌을 때는 마음으로의 수혈/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것만 같’은 시인은 스스로를 새삼 다독인다. ‘한층 시에 가까워져야 하리라는 각오’로 세계를 응시한다.
그러나 다시 길 한 가운데서 길을 잃어버린다. 겨우 길을 찾아 들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방향감각을 상실한다. 내비게이션이 절실히 필요한 사각구도에 갇힌다.
차도에 발 내 딛자
비옷 자락 우격다짐으로 붙잡아 버리는 자동차의 왼손
-눈물 뚝뚝 떨구며 어리광 섞던 비의 칭얼거림에 한 나절을 헤맸더니
눈앞이 다 깜깜해요 내비게이션 하나 달아 주셔요.
(중략)
크게 내키진 않지만
당장 내비게이션 하나 달아주면
나 빗발치는 빗줄기의 심포니 속을 씽씽 달리며
허청허청 방황할 자유는 계속 남는 것일까
—「내비게이션」전문
긴 여정에 자동차 없이 목적지에 다다르기란 참으로 난감하다. 그러나 자동차가 있다하더라도 방향 설정의 불명확은 더욱 난감하다. 그리하여‘눈물 뚝뚝 떨구며 어리광 섞던 비의 칭얼거림에 한 나절을 헤맸더니 눈앞이 다 깜깜해요 내비게이션 하나 달아 주셔요.’하고 사정한다. 누구를 향해 던진 부탁인가. 비오는 날이면 앞은 더욱 흐리기 마련이다. 직진이든, 우회전이든, 좌회전이든 할 텐데 앞은 다 지워졌다. 시인은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나 방향상실에 난감하다. 내비게이션만 있다면, 하고 간절히 희구한다. 없던 길이 무수히 생겨난 요즘 기존의 방향감각으로, 표지판으로는 가고자 하는 길을 제 시간에 맞춰 가기 쉽지 않다. 에돌아가는 것만도 다행이다. 낯선 길에선 아예 찾다가 지쳐 포기하기 십상이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설정한 목표지점에 다다르기 위해서 내비게이션은 필수적이라는 시인의 발상이 신선하다. 삶의 길 찾기에 은유로 해석되어지는 ‘내비게이션’의 효용은 시인의 방향표지판이다. 하지만 ‘당장 내비게이션 하나 달아주면/나 빗발치는 빗줄기의 심포니 속을 씽씽 달리며/허청허청 방황할 자우는 계속 남는 것일까’하며 의문부호를 단다. 정직하게 분명하게 가시화된 목적지를 향해 단숨에 달려간다면 시인만이 공유하는 화려한(?) 여백의 공간인‘허청허청 방황할 자유’는 박탈당하지 않을까 우려되는 것이다. 시인은 그 장소가 어디가 되었건 길 찾기의 선상에서 에너지의 원천이 되기도 할 ‘방황’을 그려낸다. 하지만 곡진한 ‘방황’의 의미가 함축적 의미를 더하기 위해선‘허청허청’은 그다지 필요치 않은 수식일 터이다.
갈등과 화해는 삶의 지점 어디에서나 상승과 하강의 곡선을 긋게 마련이다. 아래「현지인들」은 시인이 살고 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민을 관찰자적 입장에서 토로하고 있는 시이다.
아삭아삭하고 사근사근하기는
자른 지 여덟 시간 동안 하얀 속살 유지한다는
신품종 사과 '질투'처럼 해반지르르
곱다랗기보다 드센 편에 속하나
곧게 위로만 뻗는 삼나무처럼
자존심의 껍질은 갈색
긍지의 잎은 바늘과 다름없이 뾰족뾰족
성질머리는 강파른가하면 고고하여라
쌀밥조차 쫄깃쫄깃 찰지면 질색이고
절대로 안 붙는 독립된 밥알 선호하며
그런 쌀일수록 비싼 축에 들어서
그들의 국민성을 절로 절감하게 만드는
(중략)
사과와도 같고
삼나무와도 같으며
잘 안 붙는 밥알처럼
(중략)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내가 알거나
또는 모르기 마련인
현지인들
—「현지인들」전문
한 편의 시에서‘사과’와 ‘삼나무’와 ‘밥알’에 비유되고 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사람들. 시인의 눈에서 독특한 개성적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질투’라는 이름을 가진 사과는 매우 특이한 신품종이다. ‘아삭아삭하고 사근사근하기는/자른 지 여덟 시간 동안 하얀 속살 유지하’기 때문이다. ‘아삭하고 사근한’ 것이 기존의 사과와는 사뭇 다르다. 삼나무의 경우, 본능적 속성이 곧게 위로만 뻗는 것인데 ‘자존심의 껍질은 갈색/긍지의 잎은 바늘과 다름없이 뾰족뾰족/성질머리는 강파른가하면 고고하’다. ‘밥알’은 우리네 찰진 밥알보다 독립된 밥알, 즉 안남미 같이 서로 붙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을 종합해 현지인들의 특성을 풀어낸다. ‘보일 듯 감춰진 듯/더욱 뚜렷하게 부각되는’ 이들의 국민성이 시인의 눈에 새삼스럽다. 파악된 그만큼 현지인들과 점점 밀착되고 있는,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동화되어가고 있는 적응력을 드러낸다고 하겠다. 시인의 길 찾기가 현지적응력을 통해 잠시 주춤하고 있다.
4.
하지만 다시 길 찾기의 여정이 시작된다. 잘 살아낸다는 것은 한 곳에 적응되었다 싶으면 보다 더 나은 삶으로 이동하는 것을 말한다. 삶의 질이란 늘 숙명과도 같아서 잠시도 게을리 할 수 없다. 아래의 시 「고도를 기다리며」는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머리에 제초제 뿌린 현지인 청년
며칠에 한 번씩 붙박이처럼 서서
기다림이 어떤 것인지 혹독한 연습
거듭하고 거듭한다
우리 가게 앞 화단의 난간에
한 발 부단히 얹고
(중략)
그가 서 있는 작은 섬을 끼고
크고 작은 차들이 파도처럼 출렁이며
쉼 없이 밀려오고 밀려간다
나는 오늘도
기다림으로 지친 게 아니라
기다림으로 마냥 설레어 있는 그를
등대처럼 우뚝 서서 자꾸만 내려다보고 있다
그는 진정 고도를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
정작 고도를 기다리는 건 내가 아닐까?
세상이라는 바다에
외로운 섬으로 떠 있는
내 가게 앞 화단에
한 발 부단히 얹고 서 있는
(하략)
—「고도를 기다리며」전문
가게 너머 현지인 청년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시인의 눈은 어느 새 탐색의 여정에 들어가 있다. 첫 연의 내용이 예사롭지 않다. ‘머리에 제초제 뿌린 현지인 청년/며칠에 한 번씩 붙박이처럼 서서/기다림이 어떤 것인지 혹독한 연습’을 반복하고 있는 모습은 시인의 삶에 그대로 전이된다. 시인의 가게 앞 화단의 난간에 서서 그는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가. 뿐만 아니라 그는 ‘누구인가?’의문부호를 단다. 그 다음 ‘행여 고도를 기다리는 것 아닐까?’생각해보는 것이다. ‘기다림’, 타자의 삶을 들여다보며 나의 기다림을 만나는 이러한 탐색 작업은 그 속에 내재한 길찾기의 간절한 염원이 없고서야 생각하기 어렵다. 따뜻하고 긍정적인 시선으로 그 기다림을 스스로 용해시킨다. 시인은 현재를 직시하며 미래를 견인한다. 기다림을 ‘설레는’ 것으로 치환시키는 것이다. 이제 시인은 여유가 생겼다. 스스로 ‘등대’로 자처한다. 이것은 기다림이 무엇인지 아는 이만 생각할 수 있다. 그러기에 ‘세상이라는 바다에/외로운 섬으로 떠 있는/내 가게 앞 화단’을 보아낸다. 시인이 속한 가게는 저 드넓은 세계 속에 한 개 외로운 섬이 아닌가. 이국 청년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한인 타운의 대로변
까라보보 거리의 중앙분리화단에
어른 떡갈나무 다섯 그루와
어린 떡갈나무 20여그루 터를 잡고
모여 산다
(중략)
몇 십 년 후
우리의 후세들이 한국말 양념처럼 얹어
서반아어로 뚜알뚜알 말하며
우리의 한인 타운을 잘 지켜낼 수 있을까?
인접국 이민자들로 구성된 날치기나 퍽치기가
기필코 한국인만을 겨냥하며
(중략)
이방인이 이방인만을 표적으로 삼는
한인 타운 대로변
청소년 떡갈나무들
시침 뚝 뗀 채 잘 자라고 있다
—「청소년 떡갈나무들」부분
시인의 역동적인 길 찾기의 탐색은 자신에게만 국한시키지 않는다는 데서 빛난다. 한인 청소년들을 향한 따뜻한 모성애적 애정을 보인다. 한인 타운 대로변에‘어른 떡갈나무 다섯 그루와/어린 떡갈나무 20여 그루 터를 잡고/모여 산다’며 적응력이 뛰어나며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떡갈나무에 한인을 비유시키고 있다. 그 어느 식물들보다 뿌리를 잘 내리며 혹한도 견뎌내는 어린 떡갈나무를 보면서 내심 대견해 하고 있다. 다른 이민자들의 범죄 대상자로서 한인이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한 것을 시사하면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다. 하지만 어떠한 위험요소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괘념치 않고 제자리를 꿋꿋하게 지켜내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온몸으로 풍파를 겪어낸 부모세대가 그랬듯 다음 세대 역시 그러할 것이라는 믿음과 염려하는 마음이 따뜻하게 전달되고 있다.
맹하린의 시집은 도시적 서정에서 발견되는 뿌리내리기, 길 찾기의 여정 외 숨 가쁜 일상 속에서도 자연과 교감을 이루는 시인의 여유를 만날 수 있다. 시 「풀꽃의 미소」, 「모과」, 「고드름」, 「소나기」, 「담쟁이」, 「해바라기」, 「함박눈」, 「동백꽃」, 「귀뚜리스트」, 「바위」등은 시인의 원형적 자연서정이 잘 드러나는 작품들이다.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 객관적 상관물의 원형들은 시인의 품성이 그러하리라는 짐작을 갖게 한다. 특히 귀뚜라미를 의인화 한「귀뚜리스트」는 ‘혼신 바쳐 사명감 다하며/낮에만 쉬는 열정적 일꾼’을 통해 자신을 투사한 것으로 보인다. 시인은 순수 자연 서정에서조차 일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한 작품이다. 그 외 「바위」를 경전으로 읽는, 궁극적으로 평화를 희구하는 시인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5.
시인의 길찾기는 유년에 그 뿌리가 닿아 있다. 귀소본능의 요소가 인간에게 ‘그리움’을 생산해내고 있다면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상실과 박탈은 끝없는 허기를 불러온다. 또한 본질적 욕망과의 충돌을 야기한다. 의지에 반(反)하는 이 충돌은 의지가 강할수록 충돌에 가속이 붙는다. 고향을 향한 맹하린 시인의 다음의 시편들을 살펴보면서 그리움에 절은 한 인간을 만날 수 있다. 한 여성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아이덴티티(identity)를 볼 수 있는 것이다. 특정 지역인 「백도」, 「오동도」, 「향일암」과 더불어「조각달의 표정되어 뜨다」, 「어머님의 고향」, 「할머니」, 「원두막으로」, 「호두나무」에서 발견되어지는 그리움은 귀소본능으로 얼룩져 있다. 아래의 시를 보자.
어머니로 하여금 목포는
한 번도 가 본적 없고
앞으로도 갈 수 없는 도시와는
생판 다르다는 인식 속에 존재하며
매양 서 있었다
해넘이를 배경으로 갯벌에서
금방 떠나온 사람처럼
어머님은 언제나 몸빼바지 차림으로
돌아갈 준비 항시 되어 있었다
(중략)
—「어머님의 고향」부분
시인의 그리움은 그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 모성적인 것에 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의 근원/나의 표본/나의 강/나의 등경/사랑하올 나의 할머니(「할머니」) ‘해넘이를 배경으로 갯벌에서/금방 떠나온 사람처럼/어머님은 언제나 몸빼바지 차림으로/돌아갈 준비 항시 되어 있/는 것이다. 시인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유년을 향해 서 있는 모습이 어머니의 그것과 흡사하다. 이미 떠나온 고향에 대한 애착과 그리움은 몸속 깊이 각인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목포를 전설과 같이 영원히 품에 안고 시인의 몸속 깊이 새겨졌다. 어찌 잊고 살랴만 잊는다고 잊힐 성질의 것이 아닌 것이 그리움이다. 드러내놓고 그리워하는 것이 차라리 덜 그립다. 하지만 그러기엔 그리움이 너무 깊다. 친인척을 호칭하는 시도 여럿 보인다. 이들에 대한 그리움의 질량도 만만찮을 것이다.
그 외 수십 년의 이국 생활에서 정착을 하면서 비교적 정서적으로 안정을 보이는 작품들이 있다. 「흘러 간 시간을 초대하여」, 「한인 타운에서」, 「행복에 대하여」, 「자화상」, 「펼쳐진 하늘 아래서」, 「펭귄들의 나날」, 「약속, 변화 추구하는」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 「행복에 대하여」는 최근의 심정을 압축하여 보여주고 있는 듯 하다.
행복하면
시가 내 안에서 빠져 나갈 줄 알았다
그런데
행복한데도 시가 써진다
행복해서
다른 데로 눈길 돌리려 해도
시가 자꾸만 나를 잡아당기며
제 앞에 붙들어 앉힌다
(중략)
그래도 나는 행복하여라
어찌 됐던 끝끝내 시를 쓰리라
이름만 바꾼 행복일지라도
시를 못 써낼 이유는 없다
아름답거나 화려함을
시로서 표출하려던 의도 아닌 바에야
(중략)
한 줄기의 절망
한 움큼의 고통이
늘 나를 깨어 있게 하는데
—「행복에 대하여」부분
타향살이가 아무리 편한들 내 고향만하겠는가. 하지만 시인은 행복이라는 시어를 즐겨 차용한다. 한 편의 시에서 행복이라는 어휘가 일곱 번이나 반복되었다는 것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솔직하게 토로하고 있는 행복은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내면에서 차고 넘치는 질량이다. 행복하면/시가 내 안에서 빠져 나갈 줄 알았다/그런데/행복한데도 시가 써진다고 고백한다. 행복이란 인위적으로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시를 써서 더 행복하다는 시인의 함박웃음은 행복을 통해 세계의 확장을 불러오고 있다. 삶의 군더더기를 벗어버리고 조그만 알맹이에 만족하고 있는 자신을 확인하면서 사실 행복이란 그다지 멀리 있지 않으며 대단한 것도 아니라는 깨달음을 보이고 있다. ‘내 행복이란 게/참 보잘 것 없’음을 고백하고 있지 않은가.
맹하린 시편들은 참 소박하다. 화려한 미사여구를 차용하지 않고서 내면의 아름다움과 외로움, 그리움, 사랑, 성찰을 잘 풀어내고 있다. 이미 소설가로서의 필력을 보였던 바, 유창한 흐름을 따라 하고 싶은 말을 주저하지 않는다. 때론 직설적이면서 때론 에돌아가는 마음의 행로를 그다지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다. 시인은 타고난 역동성을 절제하는 것에 익숙하며 주어진 것에 만족하기보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세계를 향한 시인의 삶의 진정성은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다. 남들보다 한 발 앞서 노력하고, 남들보다 앞서 가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채찍질이 뼛속 깊이 내재되어 있는 듯하다. 꿈틀/파도치듯 일렁이는 변화로의 도약(「약속, 변화 추구하는」)을 위해 세상과 스스로를 향해 당당하게 약속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다. 끝없이 미지의 나를 찾아 끝없이 미지의 세계를 탐색하는 여정은 더욱 힘든 일이다.
산다는 것은 무수한 상처를 안으로 다독이는 것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하고 홀로 감내하는 것이다. 이역만리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수십 년을 살아가고 있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인 맹하린 시인을 직접 보지는 못하였지만 만난 것 같은 것은 분명 시의 힘일 것이다. 어떠한 상처라도 상처로 두지 않고 소통의 창구로 바꾸어 놓는 재주를 가진, 모국어에 대한 애착이 문학에 현현되어 풀고 맺는 남도소리 같은 고백들. 이야기 형태의 시를 통해 시인의 도전과 길찾기, 그리고 그 과정에서 확인되고 있는 지난한 탐색의 여정이 더욱 새롭게 꽃피기를 기대해본다.
-초여름- |
친애하고 공경하고 소중한 존재이신 님들!!!!!! 나도 아는 나 나도 모르지만 알아야 할 나 나도 아는데 모르고 싶은 나 나도 안다고 생각하지만 모를 때가 더 많은 나 그런 나를 가장 잘 파악해 준 것만 같아 가끔은 들여다보는 평론입니다. 내게 행운이 있었다면 글쟁이가 된 일 때로 아픔이 있었던 날들 아름다운 세상이 함께라는 사실 가족을 가졌다는 것 그대들을 알게 된 숙연 진정 하루하루 매 시간이 너무 예뻐요 또한 함부로 보내기는 너무도 아까워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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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14일 토요일
보석
맹하린
새벽에 글을 좀 써내다가 오랜 습관이지만, 한동안 멀리했다는 생각이 치밀어 책을 집어 들었다.
오래 전 읽었던 탈무드였다.
이미 머리에 입력된 내용이지만 새롭게 인식되어 옮겨본다.
'베를린에 사는 한 유태인이 어떤 제분소에 보물이 묻혀 있는데 파내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꿈을 몇 번이나 꾸었다. 그래서 그는 아침 일찍이 일어나 그 제분소로 가서 조심스럽게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러나 흙과 돌멩이 이외에는 이렇다하게 값어치가 될 만한 걸 아무 것도 파내지 못했다.
마침 그 자리에 제분소의 주인이 나타나서 왜 이런 곳을 파내고 있는지 물었다. 그 사람의 설명을 다 듣고 난 제분소 주인은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베를린에 사는 어떤 사람 집의 뜰에 보물이 묻혀 있다는 암시를 몇 번이나 꿈에서 봤는데요?"
제분소 주인은 꿈에 본 베를린 사람의 이름까지 알려 주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그 유태인 자신의 이름이었다.
그 사람은 곧 집으로 돌아가 뜰을 파헤쳐 보았다. 그랬더니 과연 자기 집 뜰에서 보석이 나왔다.'
이 얘기는 자기 나라 특유의 훌륭한 전통이나 문화를 지니고 있으면서, 뭐든 외국 것이면 다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나라 사람들에게 교훈이 되는 내용이라고 한다. 먼 데 있는 보물을 탐하기 보다는 가까이에 있는 보물 , 특히 가족과 친구라는 보물도 항상 잊지 말라는 예화이기도 하다는 설명이었다.
몇 년 전에 고려사에 계시던 경현 스님에게서 점심초대를 받은 일이 있었다.
문우 L여사와 K시인, 그리고 나였다.
신선한 야채들이 골고루 들어간 비빔밥과 버섯탕과,그리고 약간의 밑반찬들이 순서를 알맞게 지키며 나오고 나왔다.
식사시간 중간쯤 되었을 때, 두 분 모두 비구니이신 스님들은 녹차와 과일을 준비하느라 잠시 주방으로 나갔을 때였을 것이다.
L여사와 K시인이 미리 약속이라도 주고받은 것처럼 비빔밥의 양이 좀 많다면서 남은 밥을 게 눈 감추듯 입안으로 넣는 게 아니라 식탁에 놓여 있던 냅킨에 쌌다.
그리고 방구석에 있는 약간 큰 쓰레기통에 잽싸게 집어넣고 있었다.
L여사는 그 무렵 다이어트 중이었고, K시인은 그때 이미 알코올중독에 시달리던 터였다.
모처럼 대접받는 절밥의 절묘한 맛에 반해 있었던 나는 벌써 그릇을 말끔히 비운 상태라서 함께 동참할 기회가 주어지지 못했다.
사흘 후에 우리는 고려사에 또 다시 점심초대를 받게 되었다.
이번엔 여러가지 나물반찬이 푸짐하게 차려진 식탁이었다.
식사를 마쳤을 때,다도를 위해 다기를 다루던 경현 스님이 지난번, 그 문제의 쓰레기통에서 두 분 문우들이 버렸던 작은 비빔밥 덩어리를, 지난번에도 그다지 많은 양은 아니었으나 이미 졸아든 문제의 그 잔해를 꺼냈다.
쌀 한 톨, 밥알 하나도 버리지 않고 밥그릇에 붙은 찌꺼기도 숭늉으로 헹구어 목 안에 넘기는 일을 득도와 계율로 삼아오던 스님들인지라 그날 두 분 문우들은 야단 좀 제대로 맞았다.
그날 함께 행동하는 시기를 놓쳤던 나는 민망을 원망으로 바꾸고 웃음까지 섞으며 마치 대표자나 되는 것처럼 항의를 했었다.
셋 중에서 그래도 나를 가장 편하게 여기던 스님들이었다.
"스님들은 숭늉 드실 때마다, 일부러 쓰레기통을 뒤지세요? 그래서 밥알이 어디 또 없나 그렇게 찾으시나 봐요?"
크게 웃으며 경현 스님이 자세히 보여주던 쓰레기통은 정작 쓰레기통이 아니었다.
저자거리에서 식료품 살 때 받았던 비닐봉투마다 아까운 마음에 최대한의 작은 부피로 묶어서 모아둔 봉투통이었다.
두 분 문우는 결국 쓰레기통이 아니라, 반드시 들키거나 들통날 수 밖에 없는 들킬통, 혹은 들통통이라는 통에 버린 거였다.
쓰레기를 버리려고 봉투를 찾다가 서너 수저 정도가 뭉쳐진 비빔밥 두 뭉치를 발견했던 두 분 스님은 걱정이 앞섰다고 했다. 얼마나 맛이 없었으면 그걸 남겼을까, 남자가 이럴 수는 없다. 틀림없이 두 여자 분의 짓이다. 그런 여러 가지 착잡함에 다시 오늘 다른 메뉴로 바꾸고 초대하게 된 거라는 설명이 진지하게 이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같이 행동해서 나도 함께 야단을 좀 맞았더라면 훨씬 더 재미있고 편했을 걸, 그 비슷한 후회막심이 한참이나 남았었는데 오늘 문득 그 일이 떠올라 이 글을 적게 되었다.
탈무드에서처럼 지금껏 알고 지내던 인연들 뒤늦게나마 보석처럼 아끼리라고 오늘 그런 심오한 흔적을 지닌 결심 비슷한 걸 들추거나 덮게 된다.
사람은 감정에 빠지면 소설 쓰듯 얘기를 한다고 했던가.
나는 요즘 감정에 퐁당 빠지고 말았나 보다.
소설처럼 얘기하는 게 아니라 소설이 더 잘 써지는 요즈음이다
나의 글쓰기는 생에 관한 하나의 도리이자 갈망이자 자아실현이다.
힘겨워하면서도 여전히 부딪치고 싶은 참으로 매혹적인 영역이다.
후기 자본주의라는 과도한 권력이 우리 인간의 정서를
어둡고 암울한 출구까지 설치해 놓았다고 해도
한층 격려를 실어주는 힘의 원천은
바로 매일 변화되는 자연과 가족과 친구라는 존재인 것 같다.
기억력.
많이 지웠고 많이 버렸는데도
어떤 기억들은 버리려 할수록
더 강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간과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일깨움이
초록빛 싹을 틔우는 날.
약간은 선선한 날.
오늘은 바로 그런 날이다.
새벽에 글을 좀 써내다가 오랜 습관이지만, 한동안 멀리했다는 생각이 치밀어 책을 집어 들었다.
오래 전 읽었던 탈무드였다.
이미 머리에 입력된 내용이지만 새롭게 인식되어 옮겨본다.
'베를린에 사는 한 유태인이 어떤 제분소에 보물이 묻혀 있는데 파내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꿈을 몇 번이나 꾸었다. 그래서 그는 아침 일찍이 일어나 그 제분소로 가서 조심스럽게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러나 흙과 돌멩이 이외에는 이렇다하게 값어치가 될 만한 걸 아무 것도 파내지 못했다.
마침 그 자리에 제분소의 주인이 나타나서 왜 이런 곳을 파내고 있는지 물었다. 그 사람의 설명을 다 듣고 난 제분소 주인은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베를린에 사는 어떤 사람 집의 뜰에 보물이 묻혀 있다는 암시를 몇 번이나 꿈에서 봤는데요?"
제분소 주인은 꿈에 본 베를린 사람의 이름까지 알려 주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그 유태인 자신의 이름이었다.
그 사람은 곧 집으로 돌아가 뜰을 파헤쳐 보았다. 그랬더니 과연 자기 집 뜰에서 보석이 나왔다.'
이 얘기는 자기 나라 특유의 훌륭한 전통이나 문화를 지니고 있으면서, 뭐든 외국 것이면 다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나라 사람들에게 교훈이 되는 내용이라고 한다. 먼 데 있는 보물을 탐하기 보다는 가까이에 있는 보물 , 특히 가족과 친구라는 보물도 항상 잊지 말라는 예화이기도 하다는 설명이었다.
몇 년 전에 고려사에 계시던 경현 스님에게서 점심초대를 받은 일이 있었다.
문우 L여사와 K시인, 그리고 나였다.
신선한 야채들이 골고루 들어간 비빔밥과 버섯탕과,그리고 약간의 밑반찬들이 순서를 알맞게 지키며 나오고 나왔다.
식사시간 중간쯤 되었을 때, 두 분 모두 비구니이신 스님들은 녹차와 과일을 준비하느라 잠시 주방으로 나갔을 때였을 것이다.
L여사와 K시인이 미리 약속이라도 주고받은 것처럼 비빔밥의 양이 좀 많다면서 남은 밥을 게 눈 감추듯 입안으로 넣는 게 아니라 식탁에 놓여 있던 냅킨에 쌌다.
그리고 방구석에 있는 약간 큰 쓰레기통에 잽싸게 집어넣고 있었다.
L여사는 그 무렵 다이어트 중이었고, K시인은 그때 이미 알코올중독에 시달리던 터였다.
모처럼 대접받는 절밥의 절묘한 맛에 반해 있었던 나는 벌써 그릇을 말끔히 비운 상태라서 함께 동참할 기회가 주어지지 못했다.
사흘 후에 우리는 고려사에 또 다시 점심초대를 받게 되었다.
이번엔 여러가지 나물반찬이 푸짐하게 차려진 식탁이었다.
식사를 마쳤을 때,다도를 위해 다기를 다루던 경현 스님이 지난번, 그 문제의 쓰레기통에서 두 분 문우들이 버렸던 작은 비빔밥 덩어리를, 지난번에도 그다지 많은 양은 아니었으나 이미 졸아든 문제의 그 잔해를 꺼냈다.
쌀 한 톨, 밥알 하나도 버리지 않고 밥그릇에 붙은 찌꺼기도 숭늉으로 헹구어 목 안에 넘기는 일을 득도와 계율로 삼아오던 스님들인지라 그날 두 분 문우들은 야단 좀 제대로 맞았다.
그날 함께 행동하는 시기를 놓쳤던 나는 민망을 원망으로 바꾸고 웃음까지 섞으며 마치 대표자나 되는 것처럼 항의를 했었다.
셋 중에서 그래도 나를 가장 편하게 여기던 스님들이었다.
"스님들은 숭늉 드실 때마다, 일부러 쓰레기통을 뒤지세요? 그래서 밥알이 어디 또 없나 그렇게 찾으시나 봐요?"
크게 웃으며 경현 스님이 자세히 보여주던 쓰레기통은 정작 쓰레기통이 아니었다.
저자거리에서 식료품 살 때 받았던 비닐봉투마다 아까운 마음에 최대한의 작은 부피로 묶어서 모아둔 봉투통이었다.
두 분 문우는 결국 쓰레기통이 아니라, 반드시 들키거나 들통날 수 밖에 없는 들킬통, 혹은 들통통이라는 통에 버린 거였다.
쓰레기를 버리려고 봉투를 찾다가 서너 수저 정도가 뭉쳐진 비빔밥 두 뭉치를 발견했던 두 분 스님은 걱정이 앞섰다고 했다. 얼마나 맛이 없었으면 그걸 남겼을까, 남자가 이럴 수는 없다. 틀림없이 두 여자 분의 짓이다. 그런 여러 가지 착잡함에 다시 오늘 다른 메뉴로 바꾸고 초대하게 된 거라는 설명이 진지하게 이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같이 행동해서 나도 함께 야단을 좀 맞았더라면 훨씬 더 재미있고 편했을 걸, 그 비슷한 후회막심이 한참이나 남았었는데 오늘 문득 그 일이 떠올라 이 글을 적게 되었다.
탈무드에서처럼 지금껏 알고 지내던 인연들 뒤늦게나마 보석처럼 아끼리라고 오늘 그런 심오한 흔적을 지닌 결심 비슷한 걸 들추거나 덮게 된다.
사람은 감정에 빠지면 소설 쓰듯 얘기를 한다고 했던가.
나는 요즘 감정에 퐁당 빠지고 말았나 보다.
소설처럼 얘기하는 게 아니라 소설이 더 잘 써지는 요즈음이다
나의 글쓰기는 생에 관한 하나의 도리이자 갈망이자 자아실현이다.
힘겨워하면서도 여전히 부딪치고 싶은 참으로 매혹적인 영역이다.
후기 자본주의라는 과도한 권력이 우리 인간의 정서를
어둡고 암울한 출구까지 설치해 놓았다고 해도
한층 격려를 실어주는 힘의 원천은
바로 매일 변화되는 자연과 가족과 친구라는 존재인 것 같다.
기억력.
많이 지웠고 많이 버렸는데도
어떤 기억들은 버리려 할수록
더 강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간과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일깨움이
초록빛 싹을 틔우는 날.
약간은 선선한 날.
오늘은 바로 그런 날이다.
2012년 1월 13일 금요일
애인 구함
-권오범
가졌다고 콧대 높다든가
쥐뿔도 없이 카드 긁어대는
그런 사람 말고
선바람에 칼국수도 만족해하는 사람
피 말리는 악처처럼
후회로 자반뒤집기 하게 만드는
생파리같은 사람 말고
베잠방이처럼 조금 헐렁한 사람
재물 욕심이 남산만해
거머리처럼 자근대는
꽃뱀 같은 사람 말고
삶이 근근자자해 웅숭깊은 사람
춘정의 갈망으로 몸부림치며
세상 욕구불만 다 끌어안아 우중충한
그런 사람 말고
구름에 엎질러진 노을마저 미소로 수거해
마음 살찌울 줄 아는 사람
목로주점 막걸리 한잔에도
노가리 물고 희희낙락
분위기 거들 줄 아는
하여간 껄끄럽지 않은 그런 사람
죽도 밥도 안 되는 시는 몰라도 되는
가졌다고 콧대 높다든가
쥐뿔도 없이 카드 긁어대는
그런 사람 말고
선바람에 칼국수도 만족해하는 사람
피 말리는 악처처럼
후회로 자반뒤집기 하게 만드는
생파리같은 사람 말고
베잠방이처럼 조금 헐렁한 사람
재물 욕심이 남산만해
거머리처럼 자근대는
꽃뱀 같은 사람 말고
삶이 근근자자해 웅숭깊은 사람
춘정의 갈망으로 몸부림치며
세상 욕구불만 다 끌어안아 우중충한
그런 사람 말고
구름에 엎질러진 노을마저 미소로 수거해
마음 살찌울 줄 아는 사람
목로주점 막걸리 한잔에도
노가리 물고 희희낙락
분위기 거들 줄 아는
하여간 껄끄럽지 않은 그런 사람
죽도 밥도 안 되는 시는 몰라도 되는
2012년 1월 12일 목요일
시인이 되려면
천양희
시인이 되려면
새벽하늘의 견명성(見明星)같이
밤에도 자지 않는 새같이
잘 때에도 눈뜨고 자는 물고기같이
몸 안에 얼음세포를 가진 나무같이
첫 꽃을 피우려고 25년 기다리는 사막만년청풀같이
1킬로그램의 꿀을 위해 560만 송이의 꽃을 찾아가는 벌같이
성충이 되려고 25번 허물 벗는 하루살이같이
얼음구멍을 찾는 돌고래같이
하루에도 70만번씩 철썩이는 파도같이
제 스스로를 부르며 울어야 한다
자신이 가장 쓸쓸하고 가난하고 높고 외로울 때*
시인이 되는 것이다
*백석의시<흰 바람벽이 있어>중에서
시인이 되려면
새벽하늘의 견명성(見明星)같이
밤에도 자지 않는 새같이
잘 때에도 눈뜨고 자는 물고기같이
몸 안에 얼음세포를 가진 나무같이
첫 꽃을 피우려고 25년 기다리는 사막만년청풀같이
1킬로그램의 꿀을 위해 560만 송이의 꽃을 찾아가는 벌같이
성충이 되려고 25번 허물 벗는 하루살이같이
얼음구멍을 찾는 돌고래같이
하루에도 70만번씩 철썩이는 파도같이
제 스스로를 부르며 울어야 한다
자신이 가장 쓸쓸하고 가난하고 높고 외로울 때*
시인이 되는 것이다
*백석의시<흰 바람벽이 있어>중에서
다른 인생까지 살아보며
맹하린
양력 7월 하순의 여름 태생인 나는 이민 온 덕택에 한 겨울에 생일을 맞기는 하지만
여름에 주로 작품을 많이 써내는 체질이다.
무엇을 써야할지
어떻게 써야할지
이렇다하게 고민을 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펜이 종이와 만나기만 하면
마치 바람을 잔뜩 받은 범선처럼
거침없이 항해하는 유람선 스타일이 바로 나다.
그런 이유로 나는 되도록 펜과 종이를 서로 떨어져 지내게 하고
되도록 멀리 두려는 방향으로 노력한다.
글쓰는 일을 굳이 기피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쓰일 데 없이 너무 많이 써내는 짓을 경계하기 위한 일종의 절제와 방식이라는 뜻이다.
글 쓰다 지루하면 나는 산책도 다니고, 대청소도 하고, 화단에 물도 흠뻑 뿌려주게 된다.
하지만 고객이나 친구들에게서 약간이라도 스트레스를 받았다 싶으면,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한 아나바다의 매장에 가서 주로 옷 종류를 고르는 일에 정신을 온통 쏟기도 한다.
사실, 나는 얼마나 단순하게 생겨 먹었는지, 그러고 나면 그 어떤 골치덩어리도 간단히 해소가 되는 성질머리의 인간이라서 내 스스로 생각해도 참 엉뚱하다는 단정이 든다.
물론, 한 벌로 쉽게 해결이 되지만, 최근처럼 며칠동안 날마다 한 벌일 때도 간혹 있다.
그곳엔 헌옷이 많지만 가끔은 55나 66 사이즈의 새옷도 들어 올 때가 많다.
당연히 한국에서 오는, 한국산 헌옷과 새옷이다. 하물며 유명 메이커의 상표까지 붙어 있다.
그곳의 헌옷은 달러로 치면 3불이나 5불 정도 되고, 새옷은 10불 수준이다.
말이 새옷이지, 사이즈가 작아 못 팔던 옷들이 오갈데 없어 쫒겨 왔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나는 이런 식의 구매에 점점 현혹되다 못해 매력까지 느껴져, 앞으론 결코 비싼 옷을 못 사 입을 것만 같은 예감까지 밀려오고 있다.
그렇게 구입한 옷을 차려 입고 문협이나 동문회나 봉사단체에 가면 나는 완전 맹공주 취급을 받는다. 어디서 샀느냐고 하도들 캐물어서 너무 성가실 지경이다.
그런데 ,그렇게 나를 부러워 하던 이들이 쪼르르 아나바다에 달려 가보면 막상 고를 만한게 한 톨도 없더라면서 그녀들은 언제나 내게 원망 섞인 투정을 뿌려댄 뒤 결국은 빈손으로 돌아들 간다,
첫째는 사이즈가 안 맞아서이고, 둘째나 셋째는 가격이 너무 터무니없이 저렴해서 그녀들의 자존심에 크게 손상을 입히는 모양이다.
첫째나 둘째, 그리고 셋째가 되는 기준의 순서가 바뀌었을 수도 있다.
(흠! 헌옷이나 스몰이 아무에게나 어울린다고들 생각하다니.)
하나도 건지지 못해서 화가 난 대가로 그녀들은 나를 한동안 별명으로만 불러대기 시작한다.
맹공주, 맹활약, 맹고집, 맹한너. 너? 꽤나 익숙한 언어다.
분명한 사실은 나는 헌옷이나 새옷에 전혀 구애를 받지 않는 성격이라는 점이다.
나의 인생이란 게 어차피 많은 책속에서 다른 사람의 인생까지 절절하게 섭렵해온 터이므로.
그런 이유로 나는 헌옷조차 내 맘에 끌리면 망설임 없이 구입을 시도한다.
어떤 헌옷은 딱 한 번만 입고 옷깃에 묻은 눈꼽만큼의 국물자국 때문에 버려진 의도가 역력하다. 작은 국물자국으로 크게 대변해 주고 있음을 볼 수 있는 일례이기도 하다.
그점이 내게 어떤 작은 묵상 거리를 제시해 주기도 한다.
예전에, H일보에 칼럼을 내보낼 때였을 것이다. 많은 분들이 나를 만나면 말했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말하자면 작은 걸로 글을 참 그럴 듯이 퍽도 짜임새 있게 잘 지어 낸다고.
분명히 말하지만 그건 아니다.
나라는 사람은 작은 소재를 큰 묵상으로 전환시킨다고 보면 좀더 근사한 지적이 되는 것을..
각설하고, 헌옷을 사 입는 나의 심정이란 건, 내가 생각해도 그다지 값싼 행위는 아니라고 본다.
누구라도 해낼 수 있는 행동은 아니잖은가.
그 또한 다른 사람의 인생을 입어 보는 기회를 획득하는 의미라고
일종의 가치와 경험으로 자긍 삼는 것을.
머잖아 불우이웃돕기에 보내기를 과감하게 실행하면서.
최근의 나는 이 일 저 일에 받은 스트레스가 덤불처럼 쌓이고 쌓여 거의 불붙기 직전이었다.
그런 결과로 인하여 약 열흘동안 날마다 아나바다엘 드나들었다.
중요한 건 나는 나를 불태울 정도로 우매하지는 않다는 점이다.
의외로 맘에 들기도 하고 기분까지 산뜻해지는, 꽤 괜찮은 옷을 몇 벌이나 구입하고 나서, 나는 날아갈 듯 기분이 상쾌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막상 갈 데가 없다.
그러한 느닷없는 각성 때문에 순간적으로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왜냐하면 문협도 동문회도 여름휴가철이라서 3월에나 참석할 수 있기때문이다.
한동안 방황하는 심사였으니 이제 맘 잡고 또 다시글 쓰는 일에나 침잠하게 될 것이다.
외롭다거나 고달프다거나 부자유스럽다는 건 어떤 면으로는 나를 문학이라는 경로에게 다소곳이 다가가게 만드는 필연의 터널이었을 확률이 많다.
짧다면 짧았고 길다면 길었던 날들.
읽고 읽히고 보고 느끼면서
나는 현재 이 시점에까지 운명처럼 착오없는 속도로 자연스러이 닿게 되었을 것이다.
인생에는 마법과 같은 순간이 있다고 했던가.
준비가 부족하여 내 인생 미처 마법에 포위되지 못했어도
나는 문학의 장에 서성거리는 일로나 은총을 허락 받는다면
더없이 감격스러운 일이 될 것이라 여기고 있다.
더위 속에서도 추운 시간이 있다.
그리하여 나는 여름에도 겨울이 읽히는 편이다.
오래 꿈꾸어 왔으나 어딘지 모르게 생소해서 낯선 기분부터 맛보는 것처럼.
나의 사고방식은 어찌하여 현실에 한 번도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는 것일까.
내 문학은, 때로 철학적인 강 어귀에 살며시 침윤될 경우 더러 있었으려나.
요즈음, 자유의 본질이 어떤 것인지를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얼마전까지 나는 진정 자유로웠다.
해방감보다 자유로움이 훨씬 강했다.
신이 내려 주신 나의 문학은 너무도 느린 속도를 지닌 듯 싶어진다.
단지 가루만은 점차 고우려 해서 굳이 느림을 탓하지는 않으려 한다.
낯선 방향을 바라보려는 마음
오늘 그러한 느낌이 유난히 강하게 안겨온다.
2012년 1월 11일 수요일
거북이의 사랑
맹하린
내 이웃에 나보다 훨씬 나이가 적은 N이 살고 있다.
그녀는 툭하면 나에게 차 한 잔 마시자며 전화로 부른다.
그건 사실 형식적인 인사치레에 불과하고, 막상 가보면 언제나 작고 큰 어떤 논의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 마련이다.
어제 아침 역시 그랬다.
“형님, 시원하게 차 한 잔 마시러 올래요?”
바쁘거나 혼자 있거나 그러면 못가는데, 마침 아들이 있어 선선히 가게 되었다.
이틀 전 이미 대화를 나눴던 레퍼토리에 약간의 반전이 첨가되어 있었다.
그날도 그녀는 대단한 걱정거리가 생겼다면서 나를 불렀었다.
예외 없이 나를 부를 때의 제목은 짧지만 언제나 비슷한 수준이다.
꼭 춥고 덥고가 살짝 들어가고 비 오고 바람 불고도 약간 들어간다.
“날도 더운데 차 한 잔 하실래요?”
그녀가 정원에 네 마리의 거북이를 키운 지는 벌써 10년쯤 되었을 것이다.
평소에도 두 마리는 잘 안보이고, 한 쌍의 거북이만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이좋게 걸어 다니는 모습을 나도 여러 번이 아니라 갈 때마다 보았었다.
내가 자연을 사랑하는 걸 잘 아는 그녀는 나를 위해 다탁을 싱그러운 정원 중간쯤에 차려 놓을 때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뒤뚱거리며 앞뒤로 이끌고 따르며 걷는 장면도 재미있지만, 마북이(Macho거북이)가 엠북이(Hembra거북이)를 맨날 쫄쫄 쫓아다니는 행동은 내가 어떤 기분에 처해 있을지라도 항상 입꼬리 길게 웃음이 환하고 밝은 빛으로 퍼진다.
마북이와 엠북이.
이 이름은 장난기 많은 내가 나 혼자 그렇게 지은 이름일 뿐, N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른다.
N의 친구이자, 나를 언니라는 호칭으로 살갑게 따르는 편인 L이,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애지중지 키우던 매우 젊은 세뇨리따(아가씨)엠북이를 N에게 선물했나 보았다.
N의 생뚱맞은 고민은 그때부터 시작된 것.
N은 인생사 온통 승승장구라서 하느님 보시기엔 물론이고 내가 보기에도 더없이 좋은데 문제는, 고민도 아닌 걸 고민으로 접수하고, 그렇게 혼자만 열심히 진행해 나간다면 나야 결코 상관도 안하고 예쁘게 봐주겠는데, 나를 자주 염두에 두고 기필코 나까지 끼워주고 싶어 해서 문제가 돌출되는 경우 참으로 비일비재다.
L이 선물한 젊고 날씬하고 아름다운 엠북이를 가족으로 결정한 순간, N의 마북이는 조강지처 따위는 관심도 없다는 듯 나 몰라라 팽개치고, L이 보내준 엠북이만 믿고 따르는 데서 사단이 지진이나 쓰나미처럼 생겨난 거였다.
그런데 가장 심각한 고민은 N의 엠북이가 서글프기 짝이 없는 몸짓과 표정으로 매우 가까운 장소에서 두 연인을 꼼짝없이 바라보고 있다는 데에 있었다.
나 또한 그런 장면을 고스란히 재확인 하듯 보아낼 수 있었고.
약간 떨어진 풀숲에 서서 새로 만난 한 쌍의 커플을 쳐다보며 애달픔의 극치처럼 애를 태우는 중이던, 몹시도 가엾은 그 광경을 발견하고, 나는 내 가슴이 다 무너져 내리는 듯한 애증을 처절할 정도로 강하게 감지해내고야 말았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새롭게 부각된 N의 고민은, 거북이들의 반전된 상황 앞에서 더욱 심각한 상태로 급변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세상의 반전이라는 건 언제나 반전다운 면모가 차고 넘치는 것 같다.
N의 마북이가 회심하여 총총 옛 아내에게 돌아왔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더없이 사이가 돈독해졌고 다시 예전처럼 앞서거니 뒤서거니 자랑스러이 산책을 일삼게 된 것이다.
함께 영화배우로 분하기도 하고, 서로 영화를 찍기도 하는그들 Los Tortugas(거북이들)!!!
그 내외간은 두 그루의 소철나무 둥치 아래에 나란한 모습으로 서서, 완벽한 먼 산이라고 볼 수 있는 나와 N을 우러르듯 올려다보기까지 해냈었다.
다시 돌아 왔다고.
미안하다고.
어쩔 수 없었다고.
그 순간, L의 엠북이는 그들 천생연분내외를 그다지 멀다고도 할 수 없는 레몬나무 그늘에 서서 너무도 허전하고 서글퍼 보이는 눈으로 울듯이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N의 어떤 고민에 따라서는 그동안 전혀 불편함에 개의치 않고 나의 생각을 얘기 해줬던 터라 명쾌한 답을 어떻게든 건네야 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N이 참 자기 본인 위주의 존재로 까지 각인될 때가 대부분이었는데, 오늘은 이러는 그녀가 평소와는 달리 보였고 고맙게까지 느껴지고 있었다.
뭔가 내 나름대로의 깨달음이 터득되어서다.
나는 요즘 나 개인에 대한 질서회복과 존재의 해석이라는 선명한 플룻에 질식할 것만 같아 고개를 자주 쳐들고 , 일부러 하늘을 한참이나 올려다보게도 된다.
그럴 때, 하늘은 온통 하늘다움에 충만해 보이고 만개한 별천지일 때도 많다.
한동안 땅만 보며 걷던 내가 아니었던가.
그렇던 내가 어찌하여 지금은 하늘만 보며 걷는 것일까.
나도 나를 모르는 시대에 나 드디어 당도하였다는 얘기인가.
나의 결정적인 답은 언제나 간결하고 단호한 면이 강하다.
“저, 새로운 애인을 다른 곳으로 보내야 할 것 같아. 어쨌거나 조강지처를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형님네 마당에서 키우면 안 될까?”
“ 몰랐구나? 난 내 몸 하나 건사하는 걸로 대만족인 사람이야. 친애하는 이들에게조차 시간을 제대로 할애하지 못해서 미안한 형편이기도 하고.”
오후에 중국인이 경영하는 마트에 뭐 좀 사러 가는 도중에, 편의점 앞에서 이웃들과 담소를 나누던 N을 만나게 되었다.
지나가는 나를 발견한 그녀는 반가운지 약간 크게 웃으며 짧게 설명하고 있었다.
“있잖아? 형님. K가 데려가겠대. 새 거북이 말이야.”
잘한 결정이라고 말하던 나는 새삼 부탁을 얹었다.
“K에게 전해줘. 아주 잘생긴 남북이 하나 구해 주라고. 내 간곡한 희망사항이라고.”
나는 제대로 된 지침을 적절하게 전달했을까?
애인 거북이의 짧지만 추억 가득했던 저 사랑은 어찌해야 할 것인지.
내 설 익은 지식으로 K의 새 가족이 될 저 엠북이의 사랑을 아무런 가책도 없이 갈라놓고 나는 대체 어쩌자는 건지.
거북이 사회에서는 일부다처제가 용납될지도 모르는 사항인 것을.
탈무드의 이런 예화가 책임처럼 비례하며 나를 무겁게 짓누르기 시작하고 있다
'어떤 장사꾼이 몇 대의 마차에 물건을 가득 싣고 여행을 하고 있었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광야는 금방 30~40cm의 눈으로 덮이고 말았다.
마차 대열은 가야 할 길을 잃게 되었다.
그는 동네로 향해 가야 할 텐데 숲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고생고생 끝에 동네로 들어가는 옳은 길을 겨우 찾아 낼 수 있었다.
그때 상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탄식까지도 쏟아냈다.
그러자 상인의 곁에 앉아 있던 마부가 물었다.
“모처럼 길을 찾았는데 왜 그렇게 탄식을 하십니까?”
“나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길을 잃어버린 일이 있고, 그때마다 바른 길을 찾아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일이 있었다. 마부로서 마차를 한 대밖에 끌고 있지 않은 당신은 아마 알 수 없는 일인지 모르지만 한 대의 마차가 남겨 놓은 차바퀴의 자국은 바람이나 눈으로 금방 지워져 버린다.
그러나 이번처럼 무거운 물건을 실은 몇 대의 마차가 틀린 길을 지나면 그 마차의 바퀴자국은 깊이 남는다. 그래서 우리가 온 길이 동네로 가는 옳은 길인 줄 알고 우리 마차 바퀴자국을 따르느라 다른 마차들마저 당연히 헤매지 않겠는가.”
상인은 그렇게 대답을 해냈다.'
덜 여문 지식으로 나는 이제 아무에게나 아무 때나 답을 제시하지는 않아야겠다, 그렇게 마음을 다지게 된다.
단지 작은 체구를 지닌 거북이의 사랑일지라도 내 쪽에서 책임을 짊어질 일은 부득이 피하자는 생각이다.
언젠가 , N이 장난삼아 거북이의 잔등을 밟고 한참이나 서 있었는데
그런데 1킬로도 안 될 거북이가 N의 무게에 끄덕도 없이 버티더라던 얘기가
새삼 귓가에 맴돌고 있다.
내 이웃에 나보다 훨씬 나이가 적은 N이 살고 있다.
그녀는 툭하면 나에게 차 한 잔 마시자며 전화로 부른다.
그건 사실 형식적인 인사치레에 불과하고, 막상 가보면 언제나 작고 큰 어떤 논의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 마련이다.
어제 아침 역시 그랬다.
“형님, 시원하게 차 한 잔 마시러 올래요?”
바쁘거나 혼자 있거나 그러면 못가는데, 마침 아들이 있어 선선히 가게 되었다.
이틀 전 이미 대화를 나눴던 레퍼토리에 약간의 반전이 첨가되어 있었다.
그날도 그녀는 대단한 걱정거리가 생겼다면서 나를 불렀었다.
예외 없이 나를 부를 때의 제목은 짧지만 언제나 비슷한 수준이다.
꼭 춥고 덥고가 살짝 들어가고 비 오고 바람 불고도 약간 들어간다.
“날도 더운데 차 한 잔 하실래요?”
그녀가 정원에 네 마리의 거북이를 키운 지는 벌써 10년쯤 되었을 것이다.
평소에도 두 마리는 잘 안보이고, 한 쌍의 거북이만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이좋게 걸어 다니는 모습을 나도 여러 번이 아니라 갈 때마다 보았었다.
내가 자연을 사랑하는 걸 잘 아는 그녀는 나를 위해 다탁을 싱그러운 정원 중간쯤에 차려 놓을 때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뒤뚱거리며 앞뒤로 이끌고 따르며 걷는 장면도 재미있지만, 마북이(Macho거북이)가 엠북이(Hembra거북이)를 맨날 쫄쫄 쫓아다니는 행동은 내가 어떤 기분에 처해 있을지라도 항상 입꼬리 길게 웃음이 환하고 밝은 빛으로 퍼진다.
마북이와 엠북이.
이 이름은 장난기 많은 내가 나 혼자 그렇게 지은 이름일 뿐, N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른다.
N의 친구이자, 나를 언니라는 호칭으로 살갑게 따르는 편인 L이,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애지중지 키우던 매우 젊은 세뇨리따(아가씨)엠북이를 N에게 선물했나 보았다.
N의 생뚱맞은 고민은 그때부터 시작된 것.
N은 인생사 온통 승승장구라서 하느님 보시기엔 물론이고 내가 보기에도 더없이 좋은데 문제는, 고민도 아닌 걸 고민으로 접수하고, 그렇게 혼자만 열심히 진행해 나간다면 나야 결코 상관도 안하고 예쁘게 봐주겠는데, 나를 자주 염두에 두고 기필코 나까지 끼워주고 싶어 해서 문제가 돌출되는 경우 참으로 비일비재다.
L이 선물한 젊고 날씬하고 아름다운 엠북이를 가족으로 결정한 순간, N의 마북이는 조강지처 따위는 관심도 없다는 듯 나 몰라라 팽개치고, L이 보내준 엠북이만 믿고 따르는 데서 사단이 지진이나 쓰나미처럼 생겨난 거였다.
그런데 가장 심각한 고민은 N의 엠북이가 서글프기 짝이 없는 몸짓과 표정으로 매우 가까운 장소에서 두 연인을 꼼짝없이 바라보고 있다는 데에 있었다.
나 또한 그런 장면을 고스란히 재확인 하듯 보아낼 수 있었고.
약간 떨어진 풀숲에 서서 새로 만난 한 쌍의 커플을 쳐다보며 애달픔의 극치처럼 애를 태우는 중이던, 몹시도 가엾은 그 광경을 발견하고, 나는 내 가슴이 다 무너져 내리는 듯한 애증을 처절할 정도로 강하게 감지해내고야 말았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새롭게 부각된 N의 고민은, 거북이들의 반전된 상황 앞에서 더욱 심각한 상태로 급변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세상의 반전이라는 건 언제나 반전다운 면모가 차고 넘치는 것 같다.
N의 마북이가 회심하여 총총 옛 아내에게 돌아왔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더없이 사이가 돈독해졌고 다시 예전처럼 앞서거니 뒤서거니 자랑스러이 산책을 일삼게 된 것이다.
함께 영화배우로 분하기도 하고, 서로 영화를 찍기도 하는그들 Los Tortugas(거북이들)!!!
그 내외간은 두 그루의 소철나무 둥치 아래에 나란한 모습으로 서서, 완벽한 먼 산이라고 볼 수 있는 나와 N을 우러르듯 올려다보기까지 해냈었다.
다시 돌아 왔다고.
미안하다고.
어쩔 수 없었다고.
그 순간, L의 엠북이는 그들 천생연분내외를 그다지 멀다고도 할 수 없는 레몬나무 그늘에 서서 너무도 허전하고 서글퍼 보이는 눈으로 울듯이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N의 어떤 고민에 따라서는 그동안 전혀 불편함에 개의치 않고 나의 생각을 얘기 해줬던 터라 명쾌한 답을 어떻게든 건네야 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N이 참 자기 본인 위주의 존재로 까지 각인될 때가 대부분이었는데, 오늘은 이러는 그녀가 평소와는 달리 보였고 고맙게까지 느껴지고 있었다.
뭔가 내 나름대로의 깨달음이 터득되어서다.
나는 요즘 나 개인에 대한 질서회복과 존재의 해석이라는 선명한 플룻에 질식할 것만 같아 고개를 자주 쳐들고 , 일부러 하늘을 한참이나 올려다보게도 된다.
그럴 때, 하늘은 온통 하늘다움에 충만해 보이고 만개한 별천지일 때도 많다.
한동안 땅만 보며 걷던 내가 아니었던가.
그렇던 내가 어찌하여 지금은 하늘만 보며 걷는 것일까.
나도 나를 모르는 시대에 나 드디어 당도하였다는 얘기인가.
나의 결정적인 답은 언제나 간결하고 단호한 면이 강하다.
“저, 새로운 애인을 다른 곳으로 보내야 할 것 같아. 어쨌거나 조강지처를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형님네 마당에서 키우면 안 될까?”
“ 몰랐구나? 난 내 몸 하나 건사하는 걸로 대만족인 사람이야. 친애하는 이들에게조차 시간을 제대로 할애하지 못해서 미안한 형편이기도 하고.”
오후에 중국인이 경영하는 마트에 뭐 좀 사러 가는 도중에, 편의점 앞에서 이웃들과 담소를 나누던 N을 만나게 되었다.
지나가는 나를 발견한 그녀는 반가운지 약간 크게 웃으며 짧게 설명하고 있었다.
“있잖아? 형님. K가 데려가겠대. 새 거북이 말이야.”
잘한 결정이라고 말하던 나는 새삼 부탁을 얹었다.
“K에게 전해줘. 아주 잘생긴 남북이 하나 구해 주라고. 내 간곡한 희망사항이라고.”
나는 제대로 된 지침을 적절하게 전달했을까?
애인 거북이의 짧지만 추억 가득했던 저 사랑은 어찌해야 할 것인지.
내 설 익은 지식으로 K의 새 가족이 될 저 엠북이의 사랑을 아무런 가책도 없이 갈라놓고 나는 대체 어쩌자는 건지.
거북이 사회에서는 일부다처제가 용납될지도 모르는 사항인 것을.
탈무드의 이런 예화가 책임처럼 비례하며 나를 무겁게 짓누르기 시작하고 있다
'어떤 장사꾼이 몇 대의 마차에 물건을 가득 싣고 여행을 하고 있었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광야는 금방 30~40cm의 눈으로 덮이고 말았다.
마차 대열은 가야 할 길을 잃게 되었다.
그는 동네로 향해 가야 할 텐데 숲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고생고생 끝에 동네로 들어가는 옳은 길을 겨우 찾아 낼 수 있었다.
그때 상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탄식까지도 쏟아냈다.
그러자 상인의 곁에 앉아 있던 마부가 물었다.
“모처럼 길을 찾았는데 왜 그렇게 탄식을 하십니까?”
“나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길을 잃어버린 일이 있고, 그때마다 바른 길을 찾아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일이 있었다. 마부로서 마차를 한 대밖에 끌고 있지 않은 당신은 아마 알 수 없는 일인지 모르지만 한 대의 마차가 남겨 놓은 차바퀴의 자국은 바람이나 눈으로 금방 지워져 버린다.
그러나 이번처럼 무거운 물건을 실은 몇 대의 마차가 틀린 길을 지나면 그 마차의 바퀴자국은 깊이 남는다. 그래서 우리가 온 길이 동네로 가는 옳은 길인 줄 알고 우리 마차 바퀴자국을 따르느라 다른 마차들마저 당연히 헤매지 않겠는가.”
상인은 그렇게 대답을 해냈다.'
덜 여문 지식으로 나는 이제 아무에게나 아무 때나 답을 제시하지는 않아야겠다, 그렇게 마음을 다지게 된다.
단지 작은 체구를 지닌 거북이의 사랑일지라도 내 쪽에서 책임을 짊어질 일은 부득이 피하자는 생각이다.
언젠가 , N이 장난삼아 거북이의 잔등을 밟고 한참이나 서 있었는데
그런데 1킬로도 안 될 거북이가 N의 무게에 끄덕도 없이 버티더라던 얘기가
새삼 귓가에 맴돌고 있다.
-초여름- |
지난 월요일엔 L의 모친 팔순잔치가 해운대회관에서 있었다. 나는 일단 성의껏 꽃장식을 마무리 해냈고, 다시 가느라 부랴부랴 겨우겨우 참석할 수 있었다. N과 L과 그리고 다른 친구들도 함께한 시간들. 더불어 내가 가장 아끼는 문우의 엄마와 여러 번에 걸쳐 소근소근. 문우에게 전해달라며 수건과 비누라도 챙겨 드릴 수 있었기에 그나마 맘이 놓였던 밤. 그런데 구두도 높은 걸 안 신었는데 왜 내가 제일 큰 키로 나왔지? 난 키가 커보이면 싫은데~ |

2012년 1월 10일 화요일
마음을 열어주는 32
- 문학과 사람들
추억..
1. 울고 싶을때는 크게 운다.
2. 자기자신과 타인을 심판하지 않는다.
3. 마음에 어떤 공간을 남겨두고, 그 곳에 자신에게 소중한 것들을 넣어둔다.
4. 고민스러울때는 심하게 고민한다.
5. 앞으로 일어날 것 같은 일 때문에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다.
6. 가슴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스스로에게 묻는다.
7. 하루에 한번은 조용한 시간을 갖는다.
8. 마음의 눈에서 두려움의 안경을 벗어 던진다.
9. 과거의 상처들에 대해선 한바탕 운 다음에 그것들로부터 벗어난다.
10. 어떤 선택들이 가능한지 스스로에게 말해 준다.
11. ˝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돼˝라는 것들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킨다.
12. 자신을 주장하되 부드럽게 주장하는 법을 스스로 터득한다.
13. 자신에게 기다림의 기술을 가르친다.
14. 자신에게 노래를 불러준다.
15. 오늘이 자기 자신에게 하나의 모험이 되게 한다.
16. 마음에 와 닿는 모든 느낌들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 들인다.
17. 마음이 내린 결정을 지지한다.
18. 마음속에 있는 순수한 어린아이를 소중히 여긴다.
19. 생각속에서 남을 비판하려는 목소리가 들려올때는 그것을 침묵시킨다.
20. 삶의 조화와 균형을 생각한다.
21. 마음속에 유머를 나눌 공간을 늘 남겨둔다.
22. 때로 자기자신에게 놀라운 기쁨을 안겨 준다.
23. 새로 피어난 꽃들로 자신의 집안을 장식한다.
24. 완벽해지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자신에게 말해준다.
25. 마음이 들려주는 교훈에 귀를 기울인다.
26. 어떤 순간이든지 그 순간에 몰입한다.
27. 괴짜가 되어 행동하는 자기자신을 소중히 여긴다.
28. 폭포의 근원을 알기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모험을 과감히 시도한다.
29.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얼마나 큰 변화의 힘을 갖는가를 기억한다.
30. 자신에게 시를 한 편 써서 읽어준다.
31. 자신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능력을 높이 인정한다.
32. 이제 막 내린 눈 위를 달빛 아래서 걷는다.
김제동 어록 (2)
♣ 내 비밀은 아주 간단한 거야.
무엇이든 마음으로 보면 가장 잘 보인다는 거지.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거든.
- 어린 왕자의 편지 중에서 -
항상 여러분들과 마음으로 보았으면 합니다.
그래서 제가 눈이 작아서 행복합니다.^^
♣ 자신의 단점을 깊숙히 숨겨두지 말고 햇볕을 쏘이게 하라.
그래야 그 단점이 광합성을 하여 꽃을 피울 수 있다.
♣ 모든 인간이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단점도 다 신의 창조계획과 의지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히말라야 산 봉우리에 작은 풀 한 포기에 맺혀있는 이슬 한 방울에도
신의 창조계획과 의지가 들어 있다.
♣ 미국의 한 보험회사에서 가장 판매율이 좋은 사람은 다름 아닌
말을 더듬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처음부터 자신이 말을 더듬는다고
고객들에게 말을 했으며 이 말을 한 이후부터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자신은 편하게 말할 수 있어 좋았고, 고객들은 그 사람의 말에 더 집중하게 되어
성공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는 것이다.
♣ 백조라는 것은 언젠가는 호수를 박차고 날아오를 새
♣ 키가 작은 나풀레옹이 산 정상에 올라갔을 때 키가 아주 큰 적군이
앞을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대요.
그때 그 작은 나풀레옹을 비꼬며 그 작은 키로 무슨일을 할수 있을것 같냐며
너는 나를 꺾지 못할 꺼라고 말했데요.
그때 나풀레옹이 이랬다고 해요.
비록 땅에서 부터 재는 나의 키는 너보다 작지만, 하늘에서 부터 재는
나의키는 너보다 훨씬 크다. 내가 너보다 키는 작을 지언정 너를 꺾고
자하는 나의 맘은 누구보다 더 크다고...
♣ 대구 시내 겔러리존에서 제동아저씨가 코너를 진행하는데...
거의 막바지에 다달아서...제동님께서 춤에자신있으신 분은 나와 주세요 라고
한적이 있습니다..
시간은 계속 지나가는데 아무도 나오지 않는데, 뒤에서 지나가시는 어떤 무서운 형들 가운데 한 명이 엄청난 굵은 목소리로 "저기요∼노래하는 겁니까 춤추는 겁니까?"
라고 무섭게 말했습니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갑자기 조용해졌죠.
그아저씨의 무서움 때문이랄까. 저는 이 상황을 어떡해 할까
제동형님의 행동을 유심히봤죠.
그떄 제동형님의 말씀... "노래하는거냐구요?춤추는거냐구요?
지금15분동안 춤추는 것이라고 말씀드렸는데, 가까이있었으면 귀싸대기를 날렸는데...
라고 분위기를 완전히 업 시키더라구요 어찌나 웃기시던지..
♣ 결혼식 사회 전문입니다.
30분에 150만원, 40분에 200만원, 신부 친구가 많으면 공짜입니다.
♣ 겨울 바다와 좋은 친구의 공통점은 별로 특별한게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겨울 바다와 좋은 친구가 좋은 것은 항상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 매일 맑은 날만 계속된다면 이 세상은 사막이 되었을 것이다.
♣ 세상에서 최고로 느낄수 있는 기쁨은 최고로 체념할 때이다.
♣ 운명은 우연을 가장해서 찾아온다.
♣ 세상에서 가장 장엄한 광경은 불리한 역경과 싸우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다.
♣ 평생 모든 사람을 좋아하고 한 사람만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다
눈감을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다.
♣ 러브레터 리플해주세요 에서,
제동형 : 키스할 때 담벼락에 탁 밀어넣고 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도현형 : 그렇죠. 전봇대도 있고.
제동형 : 전봇대엔 개들이 있지요.
도현형 : 말못하고 쓰러짐.
♣ 사랑은 사랑하는 당사자 두 사람밖에 못하기 때문에 소중할 수 있는거겠죠.
♣ 언젠가 캘리포니아 선박이 난파 됐을때 그 선박에 있던 승객 가운데
한 광부가 금괴 2백 파운드를 넣은 띠를 두른채 해저에 가라앉아 죽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렇다면 그가 그 금을 가지고 있었던가?
아니면 금이 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인가?
-집착에 관한 이야기 인 듯...
♣ 이룩할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잡을 수 없는 저 밤하늘의 별을 따자.
♣ 하늘에 계신 분에게 통하는 유일한 길은 기도이고,
사람에게 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정직이다.
♣ 솔직함이라는 것은 사랑만 놓고 봤을때에는 전 세계에서 유일한 종교다.
2012년 1월 9일 월요일
가뭄
맹하린
지난 금요일 오후에는 재아한인회장취임식이 있었다.
재아 한인사회에 첫 여성한인회장이 탄생된 것이다.
나는 사고방식이 꽤나 보수적이라선지 여자들이 앞장서 일하는 걸 박수치며 찬성하는 성향은 아니다.
젊은 남성들 , 일 잘할 수 있도록 보필하는 게 여자들이 진정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더욱 바라는 바는 어떤 목적에 의해서, 여자를 앞세우는 일 또한 없었으면 한다.
금요일에 있을 취임식 축하화환과 축하화분을 목요일 오후에야 주문을 받게 되어 나는 그야말로 그날 새벽 4시에 일어나 꽃시장으로, 나무시장으로, 휘젓고 다녔고, 화환 7개, 화분11개 포장하고 리본 쓰고 꽃다발, 꽃바구니 10개쯤 만들어내느라 날아다닌 게 아니라 총알처럼 쏘아져 움직였다.
그 과정에서 전에 없던 실수가 있었다.
한 그루의 행운목에 두 군데의 단체 이름을 달아 낸 것이다.
한쪽에 축 취임이라고 썼어야 했던 것을, 바쁘다는 핑계로 한 번만 확인하고 재삼 확인하지 못한 게 그런 결과를 만든 것이다.
토요일 정오쯤, 관계자 되시는 분이 일부러 술을 마시고 왔다면서 찾아와 그 사실을 지목하는데 매우 예사롭지 않은 몰이해였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빈 건 아니지만, 웃으며 이해를 청해도 술의 힘에 의해서인지 전혀 납득을 못하는 상태라서, 나는 결국 약간 울음이 터졌고 그제야 비로소 화해로 이어졌다.
그분을 보내고, 나는 나를 위해서 그 사실 금세 접었다.
그렇지만 다시는 그런 실수가 없고 싶어 일기 쓰듯 이리 적는다.
여름이라서가 아니라, 올해는 더위를 잘 안 타는 나일지라도 유난히 무덥게 느껴진다.
내 친애하는 그대들은 모두 바케이션을 떠났지 않았나 싶어질 정도로 이 며칠 감감무소식이다.
오, 무척이나 개성미 넘칠 것 같으면서도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나의 정나미여!
왜 이럴 경우 나는 그대들이 아득하고 멀게 느껴지는가?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지금 50년만의 가뭄이라고 한다.
지방도시 코르도바는 71년 만에 겪는 최악의 가뭄이라고도 한다.
인터넷 서핑하다가 20여개의 현장사진을 보았으므로 몇 개 골랐다.
굳이 아픔까지 얹어 함께 올리게 된다.
이런 계제에 내가 겪는 고단함이나 막막함, 또는 작가적 인식의 원형질, 그 모든 문제들은 가장 심각한 이슈로 떠오른 가뭄이 겹친 이상기온 앞에서 너무도 부끄러운 팻말에 불과한 게 아닌가 싶어진다.
나는 나의 하루하루가
내문학의 도도한 흐름에서
자칫 발목을 삐끗하지 않기만을
바랐던 게 아니었을까.
오늘.
나.
며칠 전의 수난시대는 이미 잊고 오로지 비를 간구하게만 된다.
비를 그리워하고
비를 맞이할 무렵
특히 우리 모두 한마음이 될 것이기에.
지금 현재
더위는 흡사 거대한 거울처럼
우리 인간의 결핍과 갈증을 무덥고 메마른 방식으로
갈등처럼 비춰주고 있다.
나는 지금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파수꾼 되어
혼자서 조용히 기우제를 지내는 심정이다.




지난 금요일 오후에는 재아한인회장취임식이 있었다.
재아 한인사회에 첫 여성한인회장이 탄생된 것이다.
나는 사고방식이 꽤나 보수적이라선지 여자들이 앞장서 일하는 걸 박수치며 찬성하는 성향은 아니다.
젊은 남성들 , 일 잘할 수 있도록 보필하는 게 여자들이 진정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더욱 바라는 바는 어떤 목적에 의해서, 여자를 앞세우는 일 또한 없었으면 한다.
금요일에 있을 취임식 축하화환과 축하화분을 목요일 오후에야 주문을 받게 되어 나는 그야말로 그날 새벽 4시에 일어나 꽃시장으로, 나무시장으로, 휘젓고 다녔고, 화환 7개, 화분11개 포장하고 리본 쓰고 꽃다발, 꽃바구니 10개쯤 만들어내느라 날아다닌 게 아니라 총알처럼 쏘아져 움직였다.
그 과정에서 전에 없던 실수가 있었다.
한 그루의 행운목에 두 군데의 단체 이름을 달아 낸 것이다.
한쪽에 축 취임이라고 썼어야 했던 것을, 바쁘다는 핑계로 한 번만 확인하고 재삼 확인하지 못한 게 그런 결과를 만든 것이다.
토요일 정오쯤, 관계자 되시는 분이 일부러 술을 마시고 왔다면서 찾아와 그 사실을 지목하는데 매우 예사롭지 않은 몰이해였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빈 건 아니지만, 웃으며 이해를 청해도 술의 힘에 의해서인지 전혀 납득을 못하는 상태라서, 나는 결국 약간 울음이 터졌고 그제야 비로소 화해로 이어졌다.
그분을 보내고, 나는 나를 위해서 그 사실 금세 접었다.
그렇지만 다시는 그런 실수가 없고 싶어 일기 쓰듯 이리 적는다.
여름이라서가 아니라, 올해는 더위를 잘 안 타는 나일지라도 유난히 무덥게 느껴진다.
내 친애하는 그대들은 모두 바케이션을 떠났지 않았나 싶어질 정도로 이 며칠 감감무소식이다.
오, 무척이나 개성미 넘칠 것 같으면서도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나의 정나미여!
왜 이럴 경우 나는 그대들이 아득하고 멀게 느껴지는가?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지금 50년만의 가뭄이라고 한다.
지방도시 코르도바는 71년 만에 겪는 최악의 가뭄이라고도 한다.
인터넷 서핑하다가 20여개의 현장사진을 보았으므로 몇 개 골랐다.
굳이 아픔까지 얹어 함께 올리게 된다.
이런 계제에 내가 겪는 고단함이나 막막함, 또는 작가적 인식의 원형질, 그 모든 문제들은 가장 심각한 이슈로 떠오른 가뭄이 겹친 이상기온 앞에서 너무도 부끄러운 팻말에 불과한 게 아닌가 싶어진다.
나는 나의 하루하루가
내문학의 도도한 흐름에서
자칫 발목을 삐끗하지 않기만을
바랐던 게 아니었을까.
오늘.
나.
며칠 전의 수난시대는 이미 잊고 오로지 비를 간구하게만 된다.
비를 그리워하고
비를 맞이할 무렵
특히 우리 모두 한마음이 될 것이기에.
지금 현재
더위는 흡사 거대한 거울처럼
우리 인간의 결핍과 갈증을 무덥고 메마른 방식으로
갈등처럼 비춰주고 있다.
나는 지금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파수꾼 되어
혼자서 조용히 기우제를 지내는 심정이다.




2012년 1월 8일 일요일
대장과 졸병
맹하린의 생활단상(生活斷想)
남미크리스챤 칼럼
2001년 3월 17일
어린 시절의 나는 우리 동네 토끼재의 꼬마대장이었다.
내 또래의 어금지금한 여자애들을 모두 합하면 열여섯 명이었지만 무슨 일이 생겨서 못 나오는 애들은 거의 없었으므로 우리는 저녁마다 우리 집 앞마당으로 약속처럼 모여 들었다.
그 시절의 우리는 일 년 내내 감기 한 번을 앓지 않았다.
비가 내리거나 눈이 내리는 궂은 날조차도 우리에게는 다른 날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아름답고 괜찮은 날일 따름이었다.
강강술래 , 술래잡기, 수건돌리기, 합창과 무용, 그렇게 변화를 즐기면서 해내는 여러 놀이들은 우리의 하루하루를 걱정이라고는 모르는 넉넉함으로만 신나게 채워 주었다.
봄철이면 학교가 끝난 오후마다 나물을 캐러 다녔는데, 우리 집에서는 나의 나물바구니를 너무나 탐탁잖게 여겨서, 내가 캐는 나물은 언제나 친구들에게 골고루 나눠 주는 데에 그쳤다.
개울에 나가 미꾸라지나 올챙이떼 쫒기, 강에 나가면 가재나 새우, 그리고 송사리를 건지기도 하고, 산꽃이나 들꽃 속에 퍼질러 앉아 소꿉장난에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해가 뉘엿뉘엿 저물 무렵에야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의 집으로 흩어지고는 했다.
친구 복례네가 고구마를 캐는 날이면 우르르 몰려가 줄줄이 열린 고구마 포기를 쑤욱쑥 뽑아 올리면서 누리던, 온 세상을 다 얻은 것 같던 수확의 기쁨도 우리를 신명나게 부추기던 일종의 놀이에 불과했다.
우리 집과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던 당숙의 원두막에 앉아 개구리참외와 수박을 먹으며 여름방학숙제를 풀던 일.
그밖에 눈썰매, 얼음지치기 등 여러 가지 놀이들이 좀 많았던가.
아쉽게도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저절로 조신을 떨며 그만두게 되었지만, 같이 놀던 친구들을 은연중에 떠올려 볼 때가 때때로 있다.
일찍이 휘트먼이 ‘ 풀잎’에 대해 읊은 시는 내 어린 날의 그 애틋한 날들과 전혀 무관하지가 않음에랴.
"나는 그것이 필연코 희망의 푸른 천으로 짜여진
내 천성의 깃발일 것이라고 생각 한다
아니면 그것은 주님의 손수건
그분이 일부러 떨어뜨린 향기로운 기념품"
같은 나라에 산다 해도 서로 만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는 못 만날지도 모르는 격세안면(隔世顔面)의 그들이 진세(塵世)의 어떠한 고달픔에 잠길지라도 기쁘고 흥미진진했던 우리의 어린 날들을 가끔은 기억하며 살아 주기를 희망한다.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기꺼이 힘을 내어 언제나 마음 저 깊은 곳에 숨겨 놓은 기쁨들
약간씩 꺼내고, 그리고 다시 새롭게 간직하며 그토록 기쁘게 살아나가기를 바라고 바란다.
때로는 강강술래 같고, 술래잡기 같고, 수건돌리기, 합창과 무용, 얼음지치기, 비탈길에서의 미끄럼, 그리고 강과 들판, 도깨비 방죽, 수리조합이 만든 수로와 다리, 학교운동장.
그 모든 놀이와 장소들처럼 너무나 각양각색인 세상살이에서 나름대로 주어진 날들을 태평하게 잘 지내고 있기를 그리움처럼 소원하게 된다.
그 시절의 우리를 키운 건 진정 광활하고 변화무쌍하던 자연이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언제나 대장이었던 내가 이즈음에는 누구에게나 졸병이고, 계급도 지위도 낮은 여러 역할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
지금의 졸병노릇도 어려서의 대장처럼 일종의 사명감이 느껴지고 있고, 순복하는 마음 또한 없지 않아 있다.
안락한 생보다 분분(紛紛)한 자락이 더욱 잦게 들춰지는 이민자의 삶이고 주위환경이긴 하지만, 그 어떤 악머구리 숲에 이를지라도 유유자적한 선비정신과 겸애를 마땅하고 옳은 일처럼 여기며 강물의 한 자락 물결처럼 유유히, 유유히 흘러가리라.
굳이 인생이 무엇인가고 시치미 뗄 기분도 아니기에 내가 떠맡은 졸병노릇을 의연히 감내하면서 충일(充溢)한 여생을 타박타박 걸어 나가겠다.
어떤 이들은 처음부터 순조롭게 길을 걷지만, 어떤 이들은 꼭 부대끼고 난 후에야 비로소 길을 나선다.
헤아려 보면 우리 모든 이의 행선지는 섬김을 받는 자의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온 자의 지표에서 결정되는 게 아닐는지.
삶은 우리가 어떤 길을 걷느냐에만 있지 않고, 어떻게 낮아지느냐에 따라서도 그 의미부여에 크나큰 변화를 안긴다.
서로 용서하라고, 서로 이해하라고, 서로 참고 견디며 더욱 감싸주도록 하라고, 신께서는 사랑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끊임없이 보내고 계실 것이다.
속되면서도 부족한 우리의 믿음이 그 점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겠고.
축복된 날들을 제대로 맞을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삼가 낮아져야 하리.
더욱 낮아져야 하리.
남미크리스챤 칼럼
2001년 3월 17일
어린 시절의 나는 우리 동네 토끼재의 꼬마대장이었다.
내 또래의 어금지금한 여자애들을 모두 합하면 열여섯 명이었지만 무슨 일이 생겨서 못 나오는 애들은 거의 없었으므로 우리는 저녁마다 우리 집 앞마당으로 약속처럼 모여 들었다.
그 시절의 우리는 일 년 내내 감기 한 번을 앓지 않았다.
비가 내리거나 눈이 내리는 궂은 날조차도 우리에게는 다른 날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아름답고 괜찮은 날일 따름이었다.
강강술래 , 술래잡기, 수건돌리기, 합창과 무용, 그렇게 변화를 즐기면서 해내는 여러 놀이들은 우리의 하루하루를 걱정이라고는 모르는 넉넉함으로만 신나게 채워 주었다.
봄철이면 학교가 끝난 오후마다 나물을 캐러 다녔는데, 우리 집에서는 나의 나물바구니를 너무나 탐탁잖게 여겨서, 내가 캐는 나물은 언제나 친구들에게 골고루 나눠 주는 데에 그쳤다.
개울에 나가 미꾸라지나 올챙이떼 쫒기, 강에 나가면 가재나 새우, 그리고 송사리를 건지기도 하고, 산꽃이나 들꽃 속에 퍼질러 앉아 소꿉장난에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해가 뉘엿뉘엿 저물 무렵에야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의 집으로 흩어지고는 했다.
친구 복례네가 고구마를 캐는 날이면 우르르 몰려가 줄줄이 열린 고구마 포기를 쑤욱쑥 뽑아 올리면서 누리던, 온 세상을 다 얻은 것 같던 수확의 기쁨도 우리를 신명나게 부추기던 일종의 놀이에 불과했다.
우리 집과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던 당숙의 원두막에 앉아 개구리참외와 수박을 먹으며 여름방학숙제를 풀던 일.
그밖에 눈썰매, 얼음지치기 등 여러 가지 놀이들이 좀 많았던가.
아쉽게도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저절로 조신을 떨며 그만두게 되었지만, 같이 놀던 친구들을 은연중에 떠올려 볼 때가 때때로 있다.
일찍이 휘트먼이 ‘ 풀잎’에 대해 읊은 시는 내 어린 날의 그 애틋한 날들과 전혀 무관하지가 않음에랴.
"나는 그것이 필연코 희망의 푸른 천으로 짜여진
내 천성의 깃발일 것이라고 생각 한다
아니면 그것은 주님의 손수건
그분이 일부러 떨어뜨린 향기로운 기념품"
같은 나라에 산다 해도 서로 만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는 못 만날지도 모르는 격세안면(隔世顔面)의 그들이 진세(塵世)의 어떠한 고달픔에 잠길지라도 기쁘고 흥미진진했던 우리의 어린 날들을 가끔은 기억하며 살아 주기를 희망한다.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기꺼이 힘을 내어 언제나 마음 저 깊은 곳에 숨겨 놓은 기쁨들
약간씩 꺼내고, 그리고 다시 새롭게 간직하며 그토록 기쁘게 살아나가기를 바라고 바란다.
때로는 강강술래 같고, 술래잡기 같고, 수건돌리기, 합창과 무용, 얼음지치기, 비탈길에서의 미끄럼, 그리고 강과 들판, 도깨비 방죽, 수리조합이 만든 수로와 다리, 학교운동장.
그 모든 놀이와 장소들처럼 너무나 각양각색인 세상살이에서 나름대로 주어진 날들을 태평하게 잘 지내고 있기를 그리움처럼 소원하게 된다.
그 시절의 우리를 키운 건 진정 광활하고 변화무쌍하던 자연이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언제나 대장이었던 내가 이즈음에는 누구에게나 졸병이고, 계급도 지위도 낮은 여러 역할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
지금의 졸병노릇도 어려서의 대장처럼 일종의 사명감이 느껴지고 있고, 순복하는 마음 또한 없지 않아 있다.
안락한 생보다 분분(紛紛)한 자락이 더욱 잦게 들춰지는 이민자의 삶이고 주위환경이긴 하지만, 그 어떤 악머구리 숲에 이를지라도 유유자적한 선비정신과 겸애를 마땅하고 옳은 일처럼 여기며 강물의 한 자락 물결처럼 유유히, 유유히 흘러가리라.
굳이 인생이 무엇인가고 시치미 뗄 기분도 아니기에 내가 떠맡은 졸병노릇을 의연히 감내하면서 충일(充溢)한 여생을 타박타박 걸어 나가겠다.
어떤 이들은 처음부터 순조롭게 길을 걷지만, 어떤 이들은 꼭 부대끼고 난 후에야 비로소 길을 나선다.
헤아려 보면 우리 모든 이의 행선지는 섬김을 받는 자의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온 자의 지표에서 결정되는 게 아닐는지.
삶은 우리가 어떤 길을 걷느냐에만 있지 않고, 어떻게 낮아지느냐에 따라서도 그 의미부여에 크나큰 변화를 안긴다.
서로 용서하라고, 서로 이해하라고, 서로 참고 견디며 더욱 감싸주도록 하라고, 신께서는 사랑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끊임없이 보내고 계실 것이다.
속되면서도 부족한 우리의 믿음이 그 점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겠고.
축복된 날들을 제대로 맞을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삼가 낮아져야 하리.
더욱 낮아져야 하리.
김제동 어록 (1)
♣ 사랑했다면...앞을 보고... 사랑할거면...서로를 보고... 사랑한다면...같은곳을 보라...
♣ 사랑은 서로 마주보는게 아니라 같은곳을 보는 것이다.
♣ 사랑은 기댈곳을 찾는 곳이 아니라 기대어 줄곳을 만들어 주는 곳.
♣ 이세상에 반대가 없는 두 단어는 우주와 사랑입니다.
우주는 끝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끝이 없는것 조차도 우주안에 포함되어 있는겁니다.
그리고 사랑의 반대가 미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미움도 사랑에서 파생된 단어에 불과합니다.
사랑과 우주의 공통점은 그 속에서는 우주나 사랑을 바라볼 수 없는 것입니다.
♣ 우주는 존재합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없는 우주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 스토킹은 날 위해 그 사람의 앞모습을 잡아두는 것이고,
사랑은 그 사람을 위해 그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봐 주는 것이다. 2proo
♣ 남자친구를 기다린다고 생각하지말고,
자랑스러운 남자친구를 내 조국에 임대해주었다고 생각하고,
나도 같이 나라를 지킨다고 생각을 하면 기다리는 게 아니라 함께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 남자친구를 군대에 보낸 여성분들에게 남자친구를 기다려달라며...
♣ "독일의 속담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금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되면, 별이 아름답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여러분은 아직 금의 아름다움보다는 별의 아름다움을 즐기실 나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젊음 영원히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 하늘의 별만을 바라보는 사람은, 자기 발 아래의 아름다운 꽃을 느끼지 못한다.
♣ "당신이 이 세상에 세잎클로버로 태어난 것을 더 이상 슬퍼하지 마십시오.
만약 당신이 네잎클로버로 태어났다면 이미 누군가의 손에 의해서 당신의 허리는 잘려져 나갔을 것을...
더 이상 당신의 잎이 세잎인 것을 슬퍼하지 마십시오.
이제 당신의 인생에서 마지막 행운의 한 잎은 제가 되어드리겠습니다.
사랑합니다."
♣ 태어날 땐 서로 다른 장소에서 태어났지만 이젠 같은 장소에 있을 것이며
태어날 땐 다른 하늘을 보고 태어났지만
앞으로는 같은 하늘을 보게 될 것이며
태어날 땐 서로를 모르고 태어났지만 앞으로는 서로를 알아가게 될 것이며
태어날 때 다른 부모를 섬겼지만 이젠 한 부모를 섬기게 될 것이며
이제껏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앞으로는 두 발이 하나가 되어 하나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그 첫발걸음에 무한한 영광이 깃들기 바랍니다.
♣ 날 버리고 간 사람에게 복수하지말고, 후회하게 해라.
- 괜히 술먹고 그 집에 가서 창문에 돌 던지지 말라며...
♣ 김제동의 "이별 극복법"
그 여자가 결혼해서 2층 집을 지으면 난 양 옆에 4층을 짓고
그 여자가 4층 지으면 난 양옆에 8층을 쌓아 올리고
그 여자가 16층빌딩을 쌓아 올려면 난 양옆으로 해서 32층 빌딩을 쌓아 올려서
그 여자와 남편이 평생 햇빛을 보면서 살지 못하도록 만들어 주는거죠.
그 여자가 치킨집을 시작하면 난 양계장을 시작해서 닭을 공급하지 않는거고
그 여자 남편이 돈까스 집을 시작하면 난 양돈업을 시작해서 돼지를 공급하지 않고
그리고 차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 여자가 타는 차보다 1단계 더 높은 차를 타야 합니다 약을 올리는거죠.
소형차를 타면 중형차를 타고 중형차를 타면 대형차를 타고 대형차를
타면 난 버스나 트럭을 몰고 가서 옆에서 계속 빵빵 거리는거죠.
그것이 정말로 후회하도록 만들어 주는거죠.
그리고 "언젠가 언젠가 날 놓친 걸 꼭 후회하게 될거다"
이렇게 속삭여 줍니다.
♣ 날 버린 여자는 지금 후회 할거예요 씨에프 두개나 찍었어요.
♣ "어떤 커플이 이 세상에서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간단하게 생각하면 만날 확률 안 만날 확률 반반이죠.
하지만 따져보면 내가 남자로 태어나고 그녀가 여자로 태어날 확률
1/2 , 이 세상의 수많은 국가 약 200개국 중에 대한민국에서 태어날
확률 1/200 , 대한민국에서도 같은 지역에서 태어날 확률 우리나라의
수많은 지역을 약 1000개의 시, 도, 군, 읍, 면이라 해도 1/1000,
그리고 같은 시간대에 있을확률, 시간을 숫자로 환산하면 약
1/100000000...
앞으로 아무리 좋은 성능의 컴퓨터가 나와도 이 확률을 계산할 수는 없습니다.
즉 어떤 커플이 이렇게 만나게 된것은 인연이 아닙니다.
인연이라고 할수 없습니다.
그것은 기적입니다."
♣ 사랑이 아름다운 이유는 기억을 추억으로 만들어 준다는것입니다.
♣ 여자는 첫사랑을 기억에 남기고 남자는 첫사랑을 가슴에 남긴다.
♣ 사랑이란건 인간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보여주기 위해
신이 만든것이 아니라 인간이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얼마나
잘해쳐 나갈수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신의 시험표이다.
♣ 영원히 살 것처럼 꿈을 꾸고,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아라.
♣ 가장 낮은 사랑이, 가장 깊은 사랑일 수도 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기 때문에 바다를 이룰 수 있다.
2012년 1월 7일 토요일
추위 속에서의 포근함
맹하린의 목요칼럼
아르헨티나 조선일보
2000년 7월 27일
이민 와서 가장 추운 겨울이라고 너도 나도 감탄을 섞는 겨울중의 겨울이다. 추위에 어깨를 옹송그리며 친구들과의 점심약속이 돼있는 'S 뷔페'에 갔다.
그녀들 모두 이민 경력 20년을 웃도는 데다 온세나 아베쟈네다에 두세 개 정도의 가게는 기본으로 소유하고 있는 '쟁쟁한 실력파'들이다.
식사가 끝날 때까지는 교민 직업의 90%를 차지한다는 의류생산과 판매에 관한 얘기가 주로 오고 갔다. 하지만 후식으로 차와 과일이 나왔을 무렵엔 이민 초창기에 서반아어를 잘 몰라서 겪었던 에피소드를 누군가 익살스러이 끄집어냈다. 그러자 아무도 그 일에 관해서 질 수 없다는 듯 앞 다투어 각자의 경험담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 혜진 엄마: 스웨터공장에 완제품을 납품하고 돌아오는 길에 택시를 탔어. 항상 혜진 아빠가 하던 일을 그날은 서류를 뗄 일이 있다고 대사관 에 갔었거든. 우리가 살고 있던 아파트를 교민 모두 '시우다델라'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렇게만 말하면 통하는 줄 알았던 거야. 그래서 행선지를 묻는 택시기사한테 너무도 태연하게 ‘시우다델라’에 간다고 자신 있게 말했지. ‘시우다델라’ 지역은 한국의 도시 '시흥’에 비교할 면적이라나 봐. 계속 답답해하는 기사한테 정작 답답한 사람은 나라는 시늉을 연신 해내며 계속 외쳤지. "시우다델라, 시우다델라!"
♣ 승혁엄마: 교회에 다녀오는 길에 택시를 탔는데 똑 바로 가도 되는 길을 뺑뺑 돌아가는 기분이 들지 뭐야. 애써 불쾌감을 참고 있는데 여전히 돌고 있다는 느낌을 못 버리겠더라고. ‘왜 도는가라고 묻고 싶은데 돈다는 말을 어떻게 표현해야 될지 도무지 감이 안 잡혔어. 그래서 꽥 소리를 지르며 따졌지. "세뇰, 뽀르께(왜) 뺑뺑?"
♣ 정선엄마: 학교에서 자모회의에 참석하라는 연락이 왔는데 정선이가 지나치게 펄쩍 뛰며
만류하는 거야. 부모가 바쁘게 살고 있으니까 제 딴에는 생각한다고 그러는구나. 그렇게 좋은 쪽으로 해석하다가 너무 강한 반대에 부딪치자 곰곰 헤아리게 됐어.허구헌날 일에 파묻혀 지내니까 제 엄마가 초라하게 여겨져서 그럴까. 그런 의아심까지 생기면서 어디에서 그 원인이 생겼나 살펴보는 날들이 계속되었지.그런데 어느 날, 아, 이거구나 하는 이유가 저절로 찾아지더라고. 정선이와 쇼핑센터에 간 날이었어. 내가 값을 묻거나 계산할 때마다, 꼭 그 애가 나서서 내 말을 가로채는데 어쩌다 내가 한마디라도 거들게 되면 내 허리를 꽉 붙들고 치마까지 잡아당기며 낮은 목소리로 하소연하는 거였어. "안 돼, 엄마. 나서지 마. 엄마가 하는 말은 말이 아니야. 그런 엉터리 말은 이 나라 말도 안 돼."
♣ 가영엄마「 이민 온 뒤 몇 년 지나서 고국에 다니러 갔거든. 중학교 다니는 조카가 아르헨티나 노래를 한곡 듣고 싶다는데 변변하게 외워둔 게 없다고 솔직하게 말해도 겸손을 떠는 줄 알고 자꾸 떼를 부리는 거야. 계속 그러니까 나중에는 언니네 내외까지 합세하는 거 있지. 순간적인 기지로 떠오른 게 ‘베사 메 무쵸’곡에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거리 이름을 줄줄이 사탕처럼 엮어 꿰기였어."베사메 베사메 무쵸
꾸엔까 엘게라 깜빠나 아르헤리치
베사메 베사메 무쵸
가오나 나쓰까 빠에쓰 산니콜라스
그때 비로소 내가 겪었던 얘기를 해야 될 차례가 닥쳐왔지만 세상살이 물맛처럼 무덤덤히 지내기로 새삼 작정을 굳힌 바 있는 나는 그럴 듯한 에피소드를 특별히 기억해내지도 않았고 선선히 다음 친구에게 바통을 넘기는 일에만 한 몫을 했다.
외국어.
노력 없이는 결코 이루어 지지 않는 성역일 것이다.
그런저런 에피소드를 겪으면서 직접 부딪쳐 말하다 보면 어느 날 문득 그 단어가 자주 들린다 싶다가 이윽고 귀에 익게 되는 이치로 변하는 것일 테고.
예전에, 결코 웃어넘길 수만은 없던 실수들을 숱하게 저질렀던 나의 친구들은 지금은 훨씬 나아지거나 조금 나아지거나, 여전히 실수투성이의 현지어실력을 구사하며 저녁노을처럼 석양 빛 도는 일상을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구시대의 유물처럼 어떻게 하면
좀 더 잘나고 똑똑하고 부티가 흐를까를 나타내는 게 아니라
어찌하면 한층 완덕에 이르는 도덕적 삶을 이룩할까를 모색하는
의연한 표정들에 익숙한 채 말이다.
각오라는 짐 가뿐히 등에 얹고 산 너머 산을 넘고 또 넘다가도
이리도 소박하고 격의 없는 친구들 내 곁에 있어 나 웃노라.
세찬 한파 속에서도 포근함까지 느끼며.
아르헨티나 조선일보
2000년 7월 27일
이민 와서 가장 추운 겨울이라고 너도 나도 감탄을 섞는 겨울중의 겨울이다. 추위에 어깨를 옹송그리며 친구들과의 점심약속이 돼있는 'S 뷔페'에 갔다.
그녀들 모두 이민 경력 20년을 웃도는 데다 온세나 아베쟈네다에 두세 개 정도의 가게는 기본으로 소유하고 있는 '쟁쟁한 실력파'들이다.
식사가 끝날 때까지는 교민 직업의 90%를 차지한다는 의류생산과 판매에 관한 얘기가 주로 오고 갔다. 하지만 후식으로 차와 과일이 나왔을 무렵엔 이민 초창기에 서반아어를 잘 몰라서 겪었던 에피소드를 누군가 익살스러이 끄집어냈다. 그러자 아무도 그 일에 관해서 질 수 없다는 듯 앞 다투어 각자의 경험담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 혜진 엄마: 스웨터공장에 완제품을 납품하고 돌아오는 길에 택시를 탔어. 항상 혜진 아빠가 하던 일을 그날은 서류를 뗄 일이 있다고 대사관 에 갔었거든. 우리가 살고 있던 아파트를 교민 모두 '시우다델라'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렇게만 말하면 통하는 줄 알았던 거야. 그래서 행선지를 묻는 택시기사한테 너무도 태연하게 ‘시우다델라’에 간다고 자신 있게 말했지. ‘시우다델라’ 지역은 한국의 도시 '시흥’에 비교할 면적이라나 봐. 계속 답답해하는 기사한테 정작 답답한 사람은 나라는 시늉을 연신 해내며 계속 외쳤지. "시우다델라, 시우다델라!"
♣ 승혁엄마: 교회에 다녀오는 길에 택시를 탔는데 똑 바로 가도 되는 길을 뺑뺑 돌아가는 기분이 들지 뭐야. 애써 불쾌감을 참고 있는데 여전히 돌고 있다는 느낌을 못 버리겠더라고. ‘왜 도는가라고 묻고 싶은데 돈다는 말을 어떻게 표현해야 될지 도무지 감이 안 잡혔어. 그래서 꽥 소리를 지르며 따졌지. "세뇰, 뽀르께(왜) 뺑뺑?"
♣ 정선엄마: 학교에서 자모회의에 참석하라는 연락이 왔는데 정선이가 지나치게 펄쩍 뛰며
만류하는 거야. 부모가 바쁘게 살고 있으니까 제 딴에는 생각한다고 그러는구나. 그렇게 좋은 쪽으로 해석하다가 너무 강한 반대에 부딪치자 곰곰 헤아리게 됐어.허구헌날 일에 파묻혀 지내니까 제 엄마가 초라하게 여겨져서 그럴까. 그런 의아심까지 생기면서 어디에서 그 원인이 생겼나 살펴보는 날들이 계속되었지.그런데 어느 날, 아, 이거구나 하는 이유가 저절로 찾아지더라고. 정선이와 쇼핑센터에 간 날이었어. 내가 값을 묻거나 계산할 때마다, 꼭 그 애가 나서서 내 말을 가로채는데 어쩌다 내가 한마디라도 거들게 되면 내 허리를 꽉 붙들고 치마까지 잡아당기며 낮은 목소리로 하소연하는 거였어. "안 돼, 엄마. 나서지 마. 엄마가 하는 말은 말이 아니야. 그런 엉터리 말은 이 나라 말도 안 돼."
♣ 가영엄마「 이민 온 뒤 몇 년 지나서 고국에 다니러 갔거든. 중학교 다니는 조카가 아르헨티나 노래를 한곡 듣고 싶다는데 변변하게 외워둔 게 없다고 솔직하게 말해도 겸손을 떠는 줄 알고 자꾸 떼를 부리는 거야. 계속 그러니까 나중에는 언니네 내외까지 합세하는 거 있지. 순간적인 기지로 떠오른 게 ‘베사 메 무쵸’곡에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거리 이름을 줄줄이 사탕처럼 엮어 꿰기였어."베사메 베사메 무쵸
꾸엔까 엘게라 깜빠나 아르헤리치
베사메 베사메 무쵸
가오나 나쓰까 빠에쓰 산니콜라스
그때 비로소 내가 겪었던 얘기를 해야 될 차례가 닥쳐왔지만 세상살이 물맛처럼 무덤덤히 지내기로 새삼 작정을 굳힌 바 있는 나는 그럴 듯한 에피소드를 특별히 기억해내지도 않았고 선선히 다음 친구에게 바통을 넘기는 일에만 한 몫을 했다.
외국어.
노력 없이는 결코 이루어 지지 않는 성역일 것이다.
그런저런 에피소드를 겪으면서 직접 부딪쳐 말하다 보면 어느 날 문득 그 단어가 자주 들린다 싶다가 이윽고 귀에 익게 되는 이치로 변하는 것일 테고.
예전에, 결코 웃어넘길 수만은 없던 실수들을 숱하게 저질렀던 나의 친구들은 지금은 훨씬 나아지거나 조금 나아지거나, 여전히 실수투성이의 현지어실력을 구사하며 저녁노을처럼 석양 빛 도는 일상을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구시대의 유물처럼 어떻게 하면
좀 더 잘나고 똑똑하고 부티가 흐를까를 나타내는 게 아니라
어찌하면 한층 완덕에 이르는 도덕적 삶을 이룩할까를 모색하는
의연한 표정들에 익숙한 채 말이다.
각오라는 짐 가뿐히 등에 얹고 산 너머 산을 넘고 또 넘다가도
이리도 소박하고 격의 없는 친구들 내 곁에 있어 나 웃노라.
세찬 한파 속에서도 포근함까지 느끼며.
2012년 1월 5일 목요일
바다는 매번 너무 젊어서
-장석남
바다에 가는 길이 아니었는데도
우리들의 발걸음은 결국 바다에 닿지 않던가.
바다에 가는 길이 아니었는데도
우리들 넋은 결국 바닷가에 머물며 물 빠진 해변을 밤새 걷지 않았던가.
내가 밟고 다녔던 바닷길들
때론 저녁 밀물 위에 음악처럼 노을로 떠오르고
그 노을 빛을 딛고 오라 하는 이가 있어서
수평 너머의 바다는 아주 잠기어
지금 내 속으로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바다는 매번 너무 젊어서 지금 바다에 비가 온다.
그런데 저것은 비 以外의 또 무엇인가.
바다는 매번 너무나 젊어서 저것은 파도 以外의 또 무엇인가.
바다에서 거두어 오는 발걸음은 늘 발걸음 하나만은 아니어서
바다 또한 더 멀리 사랑같은 쪽으로 아주 가지 않고 되돌아오기를
아직도 너무 젊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바다는 매번 너무 젊다.
바다에 가는 길이 아니었는데도
우리들의 발걸음은 결국 바다에 닿지 않던가.
바다에 가는 길이 아니었는데도
우리들 넋은 결국 바닷가에 머물며 물 빠진 해변을 밤새 걷지 않았던가.
내가 밟고 다녔던 바닷길들
때론 저녁 밀물 위에 음악처럼 노을로 떠오르고
그 노을 빛을 딛고 오라 하는 이가 있어서
수평 너머의 바다는 아주 잠기어
지금 내 속으로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바다는 매번 너무 젊어서 지금 바다에 비가 온다.
그런데 저것은 비 以外의 또 무엇인가.
바다는 매번 너무나 젊어서 저것은 파도 以外의 또 무엇인가.
바다에서 거두어 오는 발걸음은 늘 발걸음 하나만은 아니어서
바다 또한 더 멀리 사랑같은 쪽으로 아주 가지 않고 되돌아오기를
아직도 너무 젊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바다는 매번 너무 젊다.
위조지폐
맹하린의 목요칼럼
아르헨티나 조선일보
2000년 10월 26일
밀란 쿤테라의 말에 의하면, '소설가란 자기 생활이라는 집을 때려 부숴, 그 돌조각으로 소설이라는 집을 세우는 족속' 이라고 한다.
내가 생각해도 나 역시 그런 족속에 속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다른 이들과는 동떨어진 생활을 많이 하고 있고, 휘적휘적 햇빛과 비와 바람을 향해 걸어 다니는 일을 취미 이상으로 즐기는 편이다.
그런 내게는 자주 들르는 쉼터가 여럿이나 있다. -
아베쟈네다에 가면 산뜻한 마음으로 차를 마시며 두런두런 얘기를 주고받는 지인 (知人) 몇몇 분의 가게가 있는가 하면, 온세나 백구에도 그런 공간이 꽤나 된다.
어느 날 온세 지역의 쉼터라고도 말할 수 있는, D라는 옷가게에 들렀더니 P선생은 부재중이고 그 부인이 나를 살갑게 반긴다.
내게 녹차를 권유하던 P선생의 부인은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하다가 다른 얘기도 꺼낸다.
“우리 그이 때문에 정말 속상해요. 가게를 봐주면서 툭하면 가짜 돈을 받는 거예요. 그것도 20페소짜리로는 양이 안 차는지 주로 50페소나 100페소짜리로 말입니다. 언젠가는 글쎄 100불짜리 달러를 두 장 이나 받은 거 있지요? "
그 날 저녁에 P선생이 듣지 않도록 세 딸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자, 딸들은 아빠가 이 일에 대해서 전혀 모르느냐고 이구동성으로 물었다고 했다. 아직 그 얘기를 차마 못했노라고 하자 딸들은 다시 합창처럼 너도 나도 부탁하더라는 것이다.
“아빠가 불쌍해. 한 장만 받은 걸로 했으면 좋겠어. 두 장이나 받았다는 걸 알게 되면 아빠는 아마 속상해서 한 숨도 못 주무실 거야. 엄마, 그럴 거지? 그래 줄 수 있지?"
딸들의 부탁도 부탁이지만. 매사 에 진지 하라면 아무도 따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진지하기 이를 데 없는 P선생이 현지인 고객 (?)들에게 그런 식으로 뻥뻥 당하는 게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다고 생각되어진 P선생 의 부인은 한 장의 위조지폐에 대해서만 간단히 지적했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P선생은 밤새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을 계속했던가 보았다.
몇 달이 지난 뒤, 그 날 당신은 위조달러를 두 장이나 받았었다고 경고 삼아 얘기 하자, 그 날 밤에 다시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을 마다하지 않더라는 P선생.
P선생의 부인이 더욱 괴로운 건, 이웃 가게 한국인들이 일부러 종업원을 시켜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명해 달라면서 P선생을 특별대우를 한다는 점에 있고, 다른 가게 위폐는 잘도 골라댄다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거기다 강의까지 해요. '달러 안 에는 금속 실이 들어 있다’ ‘종이의 질 자체가 매끄럽지 않고 약간의 투박함이 느껴진다’ ‘이 나라 돈은 우선 빛을 향해 비쳐 보아라’ 등등"
집안 아저씨뻘이 되고 문협회원인 P 선생의 그 우직성에 재미가 쏠쏠해진 나는 모처럼의 파안대소를 아낌없이 터뜨리고 말았었고, 나중에 P 선생에게 그 일에 대해서 시침 뚝 떼 고 일부러 질문까지 했었다.
'“글쎄요. 남의 돈은 그럭저럭 꼼꼼하게 봐 주겠는데, 고객을 바로 앞에 세워놓고 밝은 곳에 비춰본다 는 자체도 그렇고 어색하여 대강 만져 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진짜라는 확신이 강하게 서다가도 뒤에 집사람이 가짜라고 밝혀 낸 후에 자세히 보면 또 ‘속았다’는 기분이 그제야 일깨워지는 겁니다. "
진지하라면 두 번째라고 해도 서운하리라는 P선생 앞에서 다시 파안대소를 터뜨릴 수는 없어서 나는 그만 주름이 덜 생길 정도로만 푸하하 웃고 말았던가.
이 나라의 경제는 과연 어디까지 곤두박질을 칠 것인지.
' 몇 천 페소가 매상으로 올라도 남을까 말까한 도매상들이 기대이하의 매상밖에 안 오른다는 현실에 신경이 날카로울 대로 날카로워진, 이리도 팍팍한 묵정밭 같은 이 시대에, 하필이면 위조지폐를 들고 설치는 날 도둑들까지 극성스럽게 한 몫을 하는 모양이다.
오늘은 그 어느 쉼터에도 발길을 머물지 않고 집안에서 차분히 글을, 아니 어느 작가의 말처럼 소설질, 지금은 그 일에나 열정을 보태려 한다.。
잠시 감은 눈 속에 소설에 대한
강물처럼 쉼 없이 흐르는 괜찮은 느낌의 감성(感性)이 내게 찰랑 찰랑 밀려들고 있나니.
때로는 질박해 보이기도 하는 인생의 먼지들이여!
쉬잇! 지금은 조심조심 흩날리기를.
아르헨티나 조선일보
2000년 10월 26일
밀란 쿤테라의 말에 의하면, '소설가란 자기 생활이라는 집을 때려 부숴, 그 돌조각으로 소설이라는 집을 세우는 족속' 이라고 한다.
내가 생각해도 나 역시 그런 족속에 속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다른 이들과는 동떨어진 생활을 많이 하고 있고, 휘적휘적 햇빛과 비와 바람을 향해 걸어 다니는 일을 취미 이상으로 즐기는 편이다.
그런 내게는 자주 들르는 쉼터가 여럿이나 있다. -
아베쟈네다에 가면 산뜻한 마음으로 차를 마시며 두런두런 얘기를 주고받는 지인 (知人) 몇몇 분의 가게가 있는가 하면, 온세나 백구에도 그런 공간이 꽤나 된다.
어느 날 온세 지역의 쉼터라고도 말할 수 있는, D라는 옷가게에 들렀더니 P선생은 부재중이고 그 부인이 나를 살갑게 반긴다.
내게 녹차를 권유하던 P선생의 부인은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하다가 다른 얘기도 꺼낸다.
“우리 그이 때문에 정말 속상해요. 가게를 봐주면서 툭하면 가짜 돈을 받는 거예요. 그것도 20페소짜리로는 양이 안 차는지 주로 50페소나 100페소짜리로 말입니다. 언젠가는 글쎄 100불짜리 달러를 두 장 이나 받은 거 있지요? "
그 날 저녁에 P선생이 듣지 않도록 세 딸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자, 딸들은 아빠가 이 일에 대해서 전혀 모르느냐고 이구동성으로 물었다고 했다. 아직 그 얘기를 차마 못했노라고 하자 딸들은 다시 합창처럼 너도 나도 부탁하더라는 것이다.
“아빠가 불쌍해. 한 장만 받은 걸로 했으면 좋겠어. 두 장이나 받았다는 걸 알게 되면 아빠는 아마 속상해서 한 숨도 못 주무실 거야. 엄마, 그럴 거지? 그래 줄 수 있지?"
딸들의 부탁도 부탁이지만. 매사 에 진지 하라면 아무도 따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진지하기 이를 데 없는 P선생이 현지인 고객 (?)들에게 그런 식으로 뻥뻥 당하는 게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다고 생각되어진 P선생 의 부인은 한 장의 위조지폐에 대해서만 간단히 지적했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P선생은 밤새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을 계속했던가 보았다.
몇 달이 지난 뒤, 그 날 당신은 위조달러를 두 장이나 받았었다고 경고 삼아 얘기 하자, 그 날 밤에 다시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을 마다하지 않더라는 P선생.
P선생의 부인이 더욱 괴로운 건, 이웃 가게 한국인들이 일부러 종업원을 시켜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명해 달라면서 P선생을 특별대우를 한다는 점에 있고, 다른 가게 위폐는 잘도 골라댄다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거기다 강의까지 해요. '달러 안 에는 금속 실이 들어 있다’ ‘종이의 질 자체가 매끄럽지 않고 약간의 투박함이 느껴진다’ ‘이 나라 돈은 우선 빛을 향해 비쳐 보아라’ 등등"
집안 아저씨뻘이 되고 문협회원인 P 선생의 그 우직성에 재미가 쏠쏠해진 나는 모처럼의 파안대소를 아낌없이 터뜨리고 말았었고, 나중에 P 선생에게 그 일에 대해서 시침 뚝 떼 고 일부러 질문까지 했었다.
'“글쎄요. 남의 돈은 그럭저럭 꼼꼼하게 봐 주겠는데, 고객을 바로 앞에 세워놓고 밝은 곳에 비춰본다 는 자체도 그렇고 어색하여 대강 만져 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진짜라는 확신이 강하게 서다가도 뒤에 집사람이 가짜라고 밝혀 낸 후에 자세히 보면 또 ‘속았다’는 기분이 그제야 일깨워지는 겁니다. "
진지하라면 두 번째라고 해도 서운하리라는 P선생 앞에서 다시 파안대소를 터뜨릴 수는 없어서 나는 그만 주름이 덜 생길 정도로만 푸하하 웃고 말았던가.
이 나라의 경제는 과연 어디까지 곤두박질을 칠 것인지.
' 몇 천 페소가 매상으로 올라도 남을까 말까한 도매상들이 기대이하의 매상밖에 안 오른다는 현실에 신경이 날카로울 대로 날카로워진, 이리도 팍팍한 묵정밭 같은 이 시대에, 하필이면 위조지폐를 들고 설치는 날 도둑들까지 극성스럽게 한 몫을 하는 모양이다.
오늘은 그 어느 쉼터에도 발길을 머물지 않고 집안에서 차분히 글을, 아니 어느 작가의 말처럼 소설질, 지금은 그 일에나 열정을 보태려 한다.。
잠시 감은 눈 속에 소설에 대한
강물처럼 쉼 없이 흐르는 괜찮은 느낌의 감성(感性)이 내게 찰랑 찰랑 밀려들고 있나니.
때로는 질박해 보이기도 하는 인생의 먼지들이여!
쉬잇! 지금은 조심조심 흩날리기를.
2012년 1월 4일 수요일
착각에 빠질 줄 알아야 행복하다.
-좋은 글
어느 정도 자기가 행복하다는 착각에 빠져야
행복을 누릴 줄 아는 사람으로 살아진다
이것의 이유가 되고, 저것의 이유가 되어
자기도 모르는 어둡고 습습함에
정체를 알 수없는 중량감에 동행해 버릴 때에는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짓눌려 버리고 만다
가끔은 가벼운 깃털을 달고
자기만의 괄호를 치고 들어가 앉아
행복하다는 착각에 빠져
단순하게 살아내는 내가 되어지는 것도
행복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 된다.
알 수 없는 미혹으로 자꾸만 집어넣고
영원한 미로의 여행만을 행복이라고 치부하지 말라.
당착한 현실 앞에서의 내 것을
남에게 내어주는 어리석음으로
불행에 빠져 있어야 할 겨를이 없다.
착각에 빠져 가끔은
내 것의 행복을 찾아낼 줄 알아야 한다.
지금이 어떠하더라도
가끔은 착각의 여정을 떠날 필요가 있다.
어느 정도 자기가 행복하다는 착각에 빠져야
행복을 누릴 줄 아는 사람으로 살아진다
이것의 이유가 되고, 저것의 이유가 되어
자기도 모르는 어둡고 습습함에
정체를 알 수없는 중량감에 동행해 버릴 때에는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짓눌려 버리고 만다
가끔은 가벼운 깃털을 달고
자기만의 괄호를 치고 들어가 앉아
행복하다는 착각에 빠져
단순하게 살아내는 내가 되어지는 것도
행복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 된다.
알 수 없는 미혹으로 자꾸만 집어넣고
영원한 미로의 여행만을 행복이라고 치부하지 말라.
당착한 현실 앞에서의 내 것을
남에게 내어주는 어리석음으로
불행에 빠져 있어야 할 겨를이 없다.
착각에 빠져 가끔은
내 것의 행복을 찾아낼 줄 알아야 한다.
지금이 어떠하더라도
가끔은 착각의 여정을 떠날 필요가 있다.
낯선 환경
맹하린의 목요칼럼
아르헨티나 조선일보
2000년 7월 13일
우리 가족이 아르헨티나에 도착한 계절은 늦여름, 그러니까 3월 초순이었다. 첫 학기가 막 시작 될 무렵이라 이민이라고 오자마자 아이를 유치원에 넣었다.
아침마다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어딘지 모르게 걸음이 느려지고, 거의 마음이 놓이지를 않았다. 그래서 발길을 되돌려 유치원으로 다시 가보고는 했다.
아르헨티나의 교육방침은 학부모가 학교나 유치원에 학부형회의 때 이외엔 못 들어가게 되어있다. 아주 특별 한 이유 말고는.
'물마시고 싶다'와 '화장실에 가겠다'는 본능에 치중한 짧은 언어를 서둘러 외우게 해서 유치원에 들여보내진 내 아이가 과연 어떤 적응력을 지니고 있을지 그 사실 결코 느긋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궁리 끝에 되찾아간 내 기분을 초음속으로 읽어낸 원장은 잠깐만이라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선선한 배려를 해주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들여다 본 유리창 안의 광경은 예측한 대로가 아니라 예측보다 더 심각한 상태였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장난감을 가지고 놀거나 그림책을 보면서 자유시간을 누리는데 내 아이만 유독 무엇에 속박 당한 것처럼 오도카니 서 있었다.
꼼짝 않고 서 있는 역할을 떠맡은 작고 어린 배우처럼…….
꼼짝없이 움직일 줄 모른 채 서 있는 아이의 그 모습은 내게 있어서 어떤 위급 상황보다 더 극적인 충격을 몰고 왔다.
내 나라를 두고 왜 이민을 떠나 왔던가.
그렇게 가슴 아릿한 회한이 소나기처럼 후두두둑 나를 향해 쏟아져 내리면서 아이를 도로 데리고 나와 당장이라도 내 나라 한국으로 떠나고 싶을 정도로 마음 전체에 먹장구름까지 휘몰아치듯 일렁거렸다.
낯선 나라의 낯선 환경과 낯선 아이들.
그것도 항상 보아오던 검은 머리가 아니라 노랗거나 갈색이거나 잿빛의 머리들이었다.
내 아이가 겪어야 할 서름서름함이 순식간에 유리창 밖의 내게까지 전달되어 오더니 또다시 빗방울로 후두둑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몇 밤인가를 장마 속에 갇힌 후줄그레한 심정이 되어 매시간 결코 평화롭지도 못했고, 쉽사리 잠들 수도 없었다.
그렇게 이틀 동안 꼼짝 않고 서 있게 되자, 유치원 교사와 원아들이 한꺼번에 다가왔고, 친절하게 이끌고 달래주기까지 했었나 보았다.
사흘째부터는 다른 애들과 똑같이 어울리며 미끄럼과 시소까지 타냈고, 날마다 새로운 말을 익히느라 재미까지 생겼으니까 이제 엄마는 걱정을 놓으라는 위로를 아이 쪽에서 다짐처럼 건네 오게 되었다.
그때 비로소 이민이라는 낯선 삶과의 화해가 악수를 나누고 난 것처럼 새롭고 가뿐하게 시작되는 기분이라니.
자디잔 하늘색 체크무늬의 유니폼을 입고 어른처럼 쓸쓸하게 서 있던 내 아이의 부동자세는 사진첩에 끼워진 한 장의 스냅 사진처럼 지금껏 생생하고 강렬하게 내 의식 속에 잔존해 있다.
아이의 입장에서 따지자면, 한국에 남아 있었다고 해도 당연히 유치원에 가야할 나이였고, 한국에서 유치원에 다니게 됐다고 해도 태어나 첫 바깥생활인 며칠 동안은 두렵고 막막하기가 이곳에서와 별반 다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르헨티나 땅에는 94년까지 4만이던 한국 교민의 수가 현재는 2만 정도로 줄었다고 한다. 많은 우리의 이웃사촌들이 미국이나 호주, 뉴질랜드, 멕시코, 심지어는 아프리카까지 이민 보따리를 옮기는 추세에 있다고 본다.
나는 다시는 이민이라는 걸 안 떠날 결심이다.
꼭 어디로 가야 한다면 차라리 내 나라로나 가겠다.
자식은 자랄 대로 자라서 우리의 조국인 한국과 다름없이 아르헨티나를 사랑하고 아끼는 데다 자식들 에게 못할 짓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하는 만시지탄(晩時之歎)이, 쌓여있던 먼지처럼 풀풀 휘날리기 때문이다.
이제 지난 세월의 자락들을 굽이굽이 살펴보면, 참 겁도 없이 내 나라를 떠나왔구나 하는 후회 비슷한 감상이 그리움처럼 친밀하면서도 애틋하게 안겨온다.。
이민 생활20년을 마치 엊그제처럼 훌쩍 보내고
겨우 수구초심(首丘初心)하는 나이에 이르렀다.
언제 적 얘기던가 하고 격세지감을 논할 계제가 아닌 게 우리의 2세나 3세들이 지금도 여전히 플로레스 지역의 오락장에서 학교 가방을 옆에 하고 땡땡이를 치며 왕따와 은따에서 해방되려는 연막전을 스트레스 풀듯 밤낮으로 펼치고 있는 모양이다.
이민. 그것은 어떤 면으로는 위험하고 난해한, 특히 우리에게 딸린 자식들에게는 무량무변 (無重無邊)의 도전이 아닐까?
2012년 1월 3일 화요일
한 그루의 시
이기철
떠돎이 한갓 부랑(浮浪)이라 할지라도
나는 헴 가림 없이 떠돎을 사랑한다
바라보면 아득함이었던 길들은 수평이었던가
슬픔의 포기포기 길렀던 추억은 수직이었던가
내 열 살 적 눈 맞추었던 소백의 싸리꽃은 다 져버렸다
내 이름 몰라 그저 댕기새라 불렀던 새들은
하늘 가운데 작은 온기 남기고 사라졌다
죽은 새의 온기로 하늘이 따스하다고
나는 아직도 철부지 같은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너무 맑아 눈물겨운 유리창 같은 세월아
찢고 난 뒤 다시 맞춰 읽어보는 숨 가쁘던 날의 연서들아
사랑했던 날들은 음악처럼 날아가 버린다
기쁨은 늘 희망의 반대 켠
나는 삼십만 번의 수저질로 그걸 깨달았다
스스로 가슴에 들어와 집을 짓는 이름들
그것을 누가 처음 사랑이라 불렀을까
그의 마음속 등불은 몇 촉이었을까
도라지꽃술 속에 들어 잠자고 싶었던 시간들
차마 등 돌릴 수 없었던 세간들
그 불편의 사랑을 이제금 나는 낭비였다 쓰고 싶지 않으니
밤이면 나 몰래 어둠 속을 지나 예까지 걸어왔을 정념
그 넓은 잎이 펼치고 싶은 꿈을 누가 잎파랑치로 펴겠느냐
이 세상에 없는 말 하날 찾아 헤매는 밤이 깊듯
이 세상에 없는 사람 하나 찾아 헤매던 날의 열의는
병이었던가 사랑이었던가
내 손수 놓았던 무지개다리 사라진 여기
다시금 채색한 마음 불러 색동시를 쓴다한들
그것은 내 편애의 생 기록한 부끄러운 노트일 뿐
그것은 내겐 사치스런 이름인 한 그루 시일 뿐
2012년 1월 2일 월요일
이 詩, 나는 이렇게 썼다
월간 우리시 2010년 6월호
시는 내게 있어 사랑이다
맹하린
아칫아칫 둘러 앉아 딱지 치며 노는 색종이들 위로
조명의 빛살 앙증맞게 끼어들고
만국기 팔랑팔랑 박수치는 순간
행사는 시작 된다
한인 유치원 재롱잔치
침잠의 느긋한 자세와 산뜻하고 환한 기대에 손 내밀듯
커튼 젖히며 이웃가게 유빈이가
첫 번째 출연의 유빈이 느릿느릿 걸어 나온다
(세 나라 말도 벅찬데 재롱까지 잔치를 삼는구나. 엄마는 정말 와 있을까?)
눈 비비는 새싹의 응석으로 까무룩이 감기려는 유빈이의 시선
찰나 되어 천정을 쏜다
씰룩 샐룩 비어져 나오려는 불만과 외로움의 멍울들
연기처럼 떠오르는가 하면 흩어지고 유빈이의 걸음 아슬아슬 휘청인다
겉으로야 버젓이 거들먹대는 것처럼 보여 포복절도하는 관중의 열광
폭죽 되어 당장 허공으로 치솟을 기세
나는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지고 있다
불현듯 ‘글래디에이터’의 3번째 트랙에서 울려 퍼지던
한스 짐머의 사운드 트랙
출렁이는 환청으로 하염없이 밀려오고 있다.
그때였다, 유빈이의 무대가 아드 리비툼* 그 자체가 된 건
세상을 당기듯 사람들의 시선 모조리 잡아 끈 건
유목민 자처했을 때부터 그랬을까
나는 번번이 유빈이의 걸음처럼 걸으며
모르는 사이 휘청이거나
설렘과 토닥임의 체온 지닌 채
흡사 거들먹대는 수준이었을 터
세상이라는 둥근 테두리 안에 저절로 휘말리던 하루하루
마구 뒤섞이고 부딪치며 날로 북적이는 날들의 회전
간절토록 손길 닿게 되던 수많은 관념들
가까운 오늘과 가까운 내일은 언제나 가까워져
나는 오늘도 유목민 답습하며
광활하면서도 섬세한 세상 쏠리듯 걷게 된다
유빈이의 등장처럼
유빈이의 걸음으로
*아드 리비툼 : 애드리브
- 졸시,「 유빈이의 걸음으로」전문
학교 다닐 때는 친구들과 본적에 관한 질의응답을 기쁨처럼 주고받았다.
나의 본적은 물론 소설이었다. 소설 중에서도 단편소설.
그러던 내가 시에게 전입신고를 한 건 말을 좀 더 줄이고 싶은 의도 같은
게 있었고, 시심이 나의 팔짱을 끼며 살갑게 말을 걸더니 우리 사귀자고 폭
탄선언을 안기고 부터였다. 그렇게 만난 사이라서 나는 시에게 말을 터놓
게도 되는 모양이다.
내게 산문은 종교다.
시는 내게 있어 사랑이다.
땅만 넓고, 시골구석처럼 정나미가 만발하였어도 서로 밀집을 선호한
나머지, 아르헨티나 한인사회는 꽤나 비좁다.
인구 2만의 교민사회 전체가 동일한 뒤주이고 한 솥이고 도란도란 같은 식탁일 수밖에 없다.
1천여 의류도매상을 축으로 고리처럼 연결된 숙명적 관계를 못 벗어나기 때문이다.
문학을 가까이 하기에는 그럭저럭 견딜 만은 하다고 자부하는 반면
척박한 환경일 확률이 산재해 있다는 사실 결코 부정하지 않겠다.
가게가 한인타운에 위치해 있다 보니 다양한 계층의 고객은 차치하고라
도, 약속이라는 게 어떻게 생긴 건지조차 모르는 것만 같은, 약속 같은 건
귀족들이나 하는 걸로만 착각하고 그냥이 더 정겹다고 단정하는 동족들 불
쑥불쑥 나인지 내 영역인지에 찾아 들어 내 감성이라는 감성은 잦은 몸살
을 앓게 된다. 어쩌겠는가, 그들이 외롭다는데. 안부와 그리움에 목말라 있
는데. 의논이라는 꼬투리 거짓처럼 잽싸게 꺾어 들고 수시로 찾아오는데.
나는 과연 속물인가. 고객들은 전혀 귀찮지가 않다. 많을수록 감사한 마
음까지 솟구친다. 하지만 나의 불청객들은 지칠 줄을 모른다. 어떤 일요일
은 열여덟 명이 다녀 간 적도 있다.
내 분노의 뇌관은 항시 빗물에 젖어 있는 데다, 워낙 견고하게 잠겨 있어
점화를 시도하기에는 지난한 일인지라 가끔은 잊지 않고 조심과 자제를 요
청하는 부탁만을 건네고 건넸었다. 그런데 내게 알맞은 입지조건보다 본인
들의 취향만이 현실적인 입장으로 굳혀져 있다.
허밍이지만 노래까지 잊고 지낼 수는 없어 나는 누가 들을세라 틈틈이 흥얼거린다.
(외롭고 싶어라. 혼자이고 싶어라. 그런데 시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꼭
할 말이 있는데 시간이 지나면 잊을 것만 같은데)
가장 질릴 수밖에 없는 일은, 저녁모임이 한인타운에서 있는 날이면 나
를 만나려는 계획에 일찍부터 서두르게 된다면서 파격적이게도 두 시간 또
는 다섯 시간까지도 앞당겨 달려오는 참 무궁무진 샘솟는 다정다감. 그럴
때의 나는 흡사 대한민국 같다. 더 이상 못 살겠다고 속속 환향하는 이민자
들 모두 받아줘야 하는 우리나라. 혹은 한 아름도 더 되는 커다란 나무의 몸통.
가까운 공원에서 산책을 하다보면 알음알음한 교민여인들이 커다랗게 살아
숨쉬는 아름드리나무의 몸에 어깨를 의지하거나 손으로 두들기거나 두 팔
로 껴안으며 나무의 초록 무성한 기를 얻겠다고 벌이는 굿거리장단도 못
되는 낯선 행태를 자주 보게 된다. 나는 바로 그러한 나무는 아닐는지.
가끔은 신문에 낼 광고문을 써 달라, 주일학교 자모회에서 발표할 인사
말을 작성해 주기 바란다, 그런 간청까지 앞장세워 찾아온다. 이런 일 모두
내가 인맥, 학맥, 지맥만 따지는 모국의 사회적 연고관계에 관하여 떫고 껄
끄러운 편견을 지녀왔던 데서 생긴 대가라고나 자족한다면 맞춤할 일이기
는 하다. 차라리 한국과 같은 연고관계가 그나마 낫지 않을까, 아쉽도록 긍
정하며 연거푸 되짚어 보던 수많은 고뇌의 밤들.
그럭저럭 문학에게 다가갈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래서도 나는 글
을 붙잡는다. 그렇기 때문에 글 속으로의 도피를 감행한다. 그리하여 글에
게 나를 바친다.
어떤 면에서 보면 나는 선한 편이지만 바보는 아니다. 얼굴 잔뜩 허물어
웃어대며 그들이 섭섭해 하지 않도록 회유시켜 선선히 돌아가게 만들 때도
더러는 있는 것. 아무리 그렇단 들 그들은 내 마음을 훔치지는 못했으리.
한 조각도 꺼내거나 떼어 가지는 못했으리.
어쩌면 그들은 이방인을 대신해서 우울함에 물들고 이방인을 표방하며
무지하게 굴고 이방인을 대신하느라 방황에 넋 빠져 있는 지도 모른다.
이러저러한 나의 참을성으로 인하여 내 문학 쪽에서 되레 절망을 껴안은 적
여러 번 있었을 것도 같다.
결국 나는 사람이라는 나무, 사람이라는 강, 사람이라는 자연에 대해서
시로써 표출하려는 경향을 섞박지 담그며 자꾸만 맛보듯 간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안 보이는 뜻이 내게로 내려앉았는지도 모르겠고.
각각 내용이 다른 그 여러 나무들의 생동감 넘치는 활기.
산재해 있는 무언의 흔적.
세월을 반죽하는 선량한 미소.
결과적으로 나는 시심과의 조우를 새벽녘이나 되어야 표류하듯 맞기에 이른다.
그때 비로소 내 이성이라는 이성은 아픈 감성이 못내 가엾어 절절 챙기게도 된다.
이윽고 마음 시리다 못해 벅차오르는 여명의 빛다발.
일과처럼 써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내 오래 묵은 고질병만 아니라면 기꺼이 그들과
어깨동무까지도 해내며 놀아 줄 수도 있을 텐데.
어쨌거나 잘 참았다고
그게 바로 자연으로 가는 길목이라고
고통 없이 어찌 시를 좋아할 수 있겠는가고 스스로의 머리
여러 번 쓰다듬어 주는 일까지도 생겨나는 것을.
나는아직 긴 머리다.
염색이라고는 해 본 적도 없고 흰머리는 어쩌다 뽑는다.
나는 머리카락을 문학과 수신할 수 있는 필연적 존재의 안테나라고까지 확신하기를 즐긴다.
부끄럽게도 나는 한 번도 죽음에 유혹되거나 원한을 가까이 하지도 않아왔다.
결코 자만이 아니다. 그건 어떤 면으로는 한 번도 문학 이외의 그 무엇에
눈부시도록 뇌쇄 당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언제나 나에게 나를 맞추며 나 스스로에게조차 자유로웠다고 자긍한다.
오래도록 그래 왔지만 이제 와서 특별히 닿으려는 카테고리는, 내 시심의
삐걱대는 문 기꺼이 밀며 사랑이나 절망이 적당히 스며든 시어 즐겨 풀어
나가기를 바라는 것. 현실의 무게를 결코 버거워 하지는 않겠다는 것.
내 시는 언제나 시냇물과 같이 작고 여일한 흐름으로 흘러 왔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압축을 간절히 소원하면서 압축에 근접하지도 못하고 시를
써낸 셈이다. 이후에는 일단 압축을 받아들이겠다. 압축하고 남는 게 아니
라 압축하기도 전에 표면보다 내면을 건지다가 전체가 집약되듯 아낌없이
버릴 것 버리는 일 모색하겠다.
시와 친하게 지내는 길은 내가 지인들에게 들볶이듯 달달 볶는 일이 아
니라는 사실도 각오처럼 마음 어딘가에 걸어 둘 작정이다. 어설픈 결정이
나마 우선 접수해 놓고
앞의 시, 그렇게 썼고
이 詩, 이렇게 썼다.
― 오빠는 모가지 꼭 내게 주었어. 그래야 노래를 잘 한다면서.
닭고기 먹을 때면 일렁이는 그리움 아끼듯 꺼내며
목청 노글노글 가라앉히던 고모
비방 전수하듯 유언 전달하듯 그리도 읊어 대었다
닭고기 먹게 되는 날
고모를 기억하며
아버지 추억하며
닭의 모가지 꿀꺽 통증처럼 목안으로 넘긴다
때로는 목 중간 쯤 걸리려다 마는 정체성
간혹 싸해지는 혈맥상통
가족과의 그럴 듯한 시절 온통 생략한 채
아버지 멈칫멈칫 다른 세상 향해 떠났다 해도
유언 높이 받들 듯 비방 익히 듯
굳이 닭의 모가지 챙기고 삼킨다
영원토록 챙기며 삼키고 싶어져
갈수록 굳혀지는 싹싹한 각오
추모의 알뜰함으로 고모와 아버지 섬기게 되기를
갈망하는 일이 나의 포부이자 방식
비록 닭고기 앞에 두고라도 누구를 기억한다는 건
너볏한 공경의 한 자락
숙일 때의 다소곳함 수많은 날들에 실리어
애틋하고 소박했어도
쳐들 때마다 쌀쌀함의 극치를 이뤘던 건 아닌지
목인지 모가지 인지 여러 번
쓰다듬어 보고 당겨도 보는데
노래는 노래여도 다투며 진화된 이미지 몇 다발
고모에게서 내게로 전이되다가 문득 돌연변이 화한
모종의 상념 내게로 다가와 환히 밝다
차마 내딛지 못한 유예의 리듬 체온으로 토닥이면
가벼이 나르던 세월 곡선으로 뒤척인다.
유언 높이 받들 듯
비방 전수 받듯
외로움 부침시키며
목정강이 새삼 숙여지게 된다
언어의 형체 외롭도록 조율하며
고개 자꾸만 숙여지고 있다
- 졸시,「 유언높이받들듯」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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