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31일 토요일
요순시절(堯舜時節)
맹하린
시어머니는 90세에 돌아가셨다.
몇 년 전의 일이었는데 연락을 받고도 서둘러 찾아뵙지를 못했고, 마지막 작별인사도 못 드리는 크나큰 불효를 저질렀다.
아르헨티나가 멀기도 멀지만, 와병 중인 남편으로 인하여 한동안 집을 비운다는 일이 도저히 불가능했던 것이다.
시어머니는 결혼시절 맏동서의 시집살이가 눈에 띄게 심했었다고 한다.
곡간에서 양식이 될 곡식을 내어 줄때마다 턱없이 모자라게 내어줘, 시어머니의 몫은 항상 밥그릇의 3분의 1밖에 안 되었던 모양이다.
젖먹이 아기를 둔 여인네의 식사양으로는 너무나 부족했지만, 밥맛이 없다며 당신의 밥그릇을 살짝 밀어주던 시아버님 덕택에 그런대로 끼니를 채우셨나 보았다.
그게 한(恨)으로 맺히셨던지 시어머니는 막 결혼한 내게 먹을 때마다 지나치게 너그러우셨다.
같은 밥상에서 식사를 할 때마다 잡수던 밥이고 국이고 반찬이고를 나의 의사(意思)와는 상관없이 내 그릇에 잽싸게 얹어 주시고는 했다.
그런 면으로 나를 매번 당혹스럽게 하신 것이다.
나는 시어머니께서, 잡수던 수저나 저븐으로 그렇게 불쑥 덜어주는 인정(人情)이 왜 그리 이해가 안 되고 참 기분 별로였던지.
차마 내색은 못했지만 거의 죽을 맛이었다.
밥을 안 먹을 수도 없었고, 먹을 수도 없게 되던 시간.
하지만 시어머니는 내가 사양하느라 그러는 줄 알고 더 자주 그러셨다.
어려서부터 한 깔끔하던 내게 그건 참 고역 중의 고역이었다.
하지만 농사철이 끝난 초겨울 무럽에 상경하셨고, 일 년이면 두어 달쯤 머무시니까 그다지 못견딜 일은 아니었다.
나는 가끔 묵상에 잠겨 왔다.
배 고픈 시집살이와 적정량 이상으로 먹어야 하는 시집살이 중 어떤게 더 고초당초일까를.
둘다 만만치는 않은 수준처럼 여겨진다.
시어머니는 그렇게 네 자녀의 집을 교대로 돌아다니시면서 시집살이라는 걸 한꺼번에 몰아서 시키셨다.
나는 시어머니가 상경하시면, 앞집 만물상회에 가서 친정과 친구들에게 서둘러 연락을 취했다.
전화도 방문도 당분간 금지라는 선언을 살며시 전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이해가 안 된다.
왜 그리도 짧게 줄이는 전화조차 못마땅하게 여기셨던 지가.
모든 것 다 참고 견딜 수 있었는데, 신문이나 책은 왜 또 못 보게 하셨는지가.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나는 뭐든 그래야 하는 걸로 알고 잘 견디고 잘 참아냈다.
남편의 사촌형 아들이, 취직한다는 의도를 지닌 채 상경하여, 장장(長長) 1년을 먹고 자고 텔레비전만 보면서 빈둥대는 모습도 그래야 하는 줄만 알고 참고 견뎠다.
그 사실을 보고 받은 시어머니는 잘 하는 일이라고, 그래야 한다고, 도리어 칭찬까지 아끼지 않으셨다.
그런 일들 모두 뿌리치고 조용히 글이나 쓰면서 살고 싶어 나는 이민을 떠나온 건지도 모르겠다.
시어머니는 그렇게 자식들마다 교대로 찾아다니며 시집살이라는 쓰디쓴 익모초 액을 명약(名藥)처럼 골고루 골고루 마시게 하셨다.
첫 자녀인 나의 시누이를 임신했을 때, 밭에서 일하다 산기(産氣)를 느꼈다는 시어머니.
부랴부랴 집에 도착하여 방문을 열자마자 혼자서 아기를 낳았고, 그 아이를 안은 채 시렁에 얹힌 반짇고리를 내려 탯줄을 끊었다는 시어머니.
그리고 그 이튿날부터 다시 논밭 일을 계속했다던 시어머니.
그런데 그런 시어머니가 어떻게 내게 가정부까지 여럿이나 교대로 데려다 주실 수가 있었을까.
그점 참으로 의문이다.
때때로 잊지 않고 하시던 말씀
- 너는 지금 요순시절을 살고 있는 거다!
사람들은 인생을 마음먹기에 달렸다고들 한다.
마음먹기.
마음을 먹어 버리기.
조금씩 야금야금 베어 먹을 땐 잘 몰랐는데
그 마음이라는 걸 눈 질끈 감고 꿀꺽 삼켰더니
알게 모르게 나 드디어 행복해졌다.
삶에 있어 좋은 조건은 좋은 게 아니고
나쁜 조건도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현자는 일컫는다.
우선 새옹지마(塞翁之馬)가 그럴 것이고
아우슈비츠 생존자들이 표본적이지 않았나 싶다.
‘소련군이 진입 했을 때, 아우슈비츠에는 대략 7000여명 정도, 행군(行軍)조차 불가능한 병약자들만 남아 있었다.
그들은 나치가 다른 수용소로 옮길 수 없는 처지라서, 결과적으로는 목숨을 건진 것이다.
신체가 튼튼한 이들로만 뽑힌 많은 유태인들이 도보행군 중, 목적지인 독일에 도착하기도 전에 추위와 굶주림에 죽은 것.
SS는 남아 있는 병약자들을 집단처형 하려는 계획을 긴급히 획책하고 있었으나, 소련군이 이틀이나 앞당겨 진군(進軍)한 덕택에 그들 병약자들은 살아남게 되었다.
아우슈비츠에서는 절대 주위사람의 꿈을 방해하지 않는 게 철칙과 같이 지켜졌다고 한다.
가족들과 함께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는, 그런 행복한 순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였고, 악몽일지라도 당장 처해 있는 극단적인 현실과는 비교가 안 되리라는 판단에서 더 그랬다고 한다.'
놓을 거 다 놓고 나니까 나는 이제야 요순시절에 머물고 있는 듯 한 화평(和平)을 맛보게 된다.
다른 건 그저 그런데, 글 쓰는 일을 언제라도 붙잡을 수 있어서 그게 바로 내게는 요순시절이 아닐까 요즘 새삼 그러한 느낌에 사로잡히고 있다.
비록 잡문에 불과하지만, 실 자아 내듯 글을 가까이 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딘지 모르게 고즈넉한 기분까지 안겨준다.
언제나 요순시절이라는 격양가(擊壤歌)를 읊어 대면서.
그런 면에서 보면 시어머니께 새삼 감사롭다.
내게 있어 진정한 요순시절이 어떠하리라는 걸 일찌거니 터득토록 도움을 주셨으므로.
나 드디어 요순시절에 이르렀어라.
2012년 3월 30일 금요일
서로 기대며 살아가는 것을
(펌)
우린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볼 때가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 발 딛고 살아가는 사람
그 어느 누구도
나와 무관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 시대에 태어나 같이 살아간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인연이라는 생각을..
이런 생각을 할 때면 나는 주위 사람들을
너무 소홀히 대하지는 않았나 반성하게 됩니다.
아주 커다란 인연의 끈으로
만난 사람을 소중히 여기지 못한
내 못남을 스스로 꾸짖는 것이지요.
빌 오히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에
참으로 많은 에너지를 얻는다.
특히 어떤 사람을
사랑할 때마다 많은 에너지를 얻게 된다.
또한 거기서 받은 에너지의 일부를
다른 누군가에게
제공한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서로 어깨를 기대고
체온을 나누며 살아야 하는 존재인가 봅니다.
사람의 손이 따스한 체온을 나누며
서로 깍지를 끼고 살아가라고
다섯 손가락으로 이루어져 있듯이...
2012년 3월 29일 목요일
뒤에 있던 그들이 옆과 앞에 있다
맹하린
어제 나는 한 달에 두어 번 정도 찾아오는 볼리비아노 고객인 훌로이란의 집까지 꽃배달을 가게 됐었다.
수술하고 퇴원한 그의 부인 까롤리나가 나를 좀 만나고 싶어 한다는 얘기 때문이었다.
까롤리나는 내가 만든 꽃을 볼 때마다 꼭 한 번 만나고 싶은 사람이라고 말했었나 보았다.
나는 차를 이용해야 하는 배달일 경우엔 항상 레미세로(대절용 자가용기사)에게 보낸다.
가게를 비워서도 안 되지만, 일종의 불편이나 부담을 덜기 위해서도 더 그런다.
언제였던가.
현지인 고객이 자기 집에 처치해야할 꽃나무가 많은데 거저 주겠다고 초대를 했을 때도 나는 정중히 사양했었다.
부담은 부담스럽지 않을 때 더 지켜야 하니까.
부담스런 상황에 처했을 때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으니까.
세상에서 거저 얻는 건 없다는 걸 나는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막상 훌로이란의 집을 방문하고 나는 깜짝 놀랐다.
마침 훌로이란은 가게에 출근했기 때문에 (훌로이란은 Feria에도 가게가 더 있다.)까롤리나와 무까마(가정부)가 나를 반겼다.
까롤리나의 지시로 특별히 만들어진 헤이즐넛을 감탄 섞어 마시며 1시간 정도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들 부부가 그렇게나 궁궐 같은 집에서 산다는 게 도대체 용납이 안 되어 나는 온종일 미로(迷路)속을 헤매는 기분이 들고 있었다.
난데없는 위압감과 약간의 거부감까지 마음 한구석에서 스멀스멀 피어나고 피어났다.
마치 우리 교민을 대표하여 그 집에 찾아간 것처럼 말이다.
우리 교민은 25여년 동안 유태인 상가(商街)를 하나하나 번영시켜 나갔지만 볼리비아노, 그들은 우리의 상권(商圈)에 기하급수적으로 참여해 오기 시작한지 벌써 이십여 년이 되었다.
수적(數的)으로는 단연 수세(守勢)에 몰릴 수도 있는 형세(形勢)였다.
때때로 나는 일요일이면 볼리비아노들의 장터가 열리는 까스따냐레스 거리와 보노리노 거리가 교차되는 장소를 찾아 간다.
산책 겸, 구경 삼아 그렇게 다닌 지 어느 새 15년쯤 되었다.
그곳은 뭐든 싼 게 아니라 무조건 싸다.
그들의 주식인 감자는 물론이고, 보라색 감자도 있고, 청양고추도 많다.
15년 전에는 감자가 3Kg에 1달러였는데, 요즘은 3Kg에 2달러 정도 된다.
볼리비아 고추는 상상 외로 지독하고, 뒷맛까지도 한참동안 맵고 맵다.
우리 한국 고추는 매우면서도 달지만, 볼리비아 고추는 매운 감각으로만 맵다.
말 그대로의 도떼기시장이다.
시끌벅적하면서 없는 게 없어 구경이 더 된다.
고급스러운 구경은 못되고 소박한 구경거리다.
천막을 친 간이 이발소, 간이식당, 간이 옷가게, 가방 가게, 신발 가게, 액세서리 가게.
별의별 게 다 있다.
까세로(집에서 만든 상품)로 만든 께소(치즈), 투박하고 커다란 엠빠나다(파이=만두)등등.
그곳에선 볼리비아노들이 수 백명 정도 북적이는 모습을 짧은 시간에 많이 볼 수가 있다.
나는 단지 산책과 구경으로만 다니기 때문에 별로 사지는않는다.
세상 이치라는 게 참 그렇다.
왠지 싸면 싼 맛이 있고 비싸면 비싼 맛이 있다.
남편이 멀쩡했을 때는 남편이 주로 다녔다.
그런데 여느 볼씨들은 남편에게 협박도 불사(不辭)했던 모양이다.
-우리의 영역이니 들어오지 마라!
-더 안쪽으로 들어오면 죽어나갈 수도 있다!
그러저러한 으름장이라고 했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들에게 환영을 받는다.
한국인도 와줘서 괜찮다는 대응(對應)이다.
나는 더좀 안쪽으로는 접근을 삼가한다.
전반적으로 물가의 상승폭이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고는 해도 그곳에 가면 대부분 상상외의 저렴한 가격과 수준에 식료품의 거래가 이루어진다.
그들은 우리 한국인과 불가불념(不可不念)의 관계지만, 여러 방면으로 꽤 괜찮은 조건을 겸비했다고도 여겨진다.
식료품도 싼 값에 구입하지.
제품일은 가족끼리 혹은 친척끼리 두루 뭉실 합동으로 해내지.
훌로이란처럼 아베쟈네다 뒷길에 작은 가게 덜렁 얻어서 옷 몇 장 걸어 두고, 우선 가격 면에서 승리를 쟁취했으니, 대량주문을 받은 뒤 납품은 공장에서 직접해내는 방식을 취하는 음험하기 이를 데 없는 세금포탈의 명사(名士)들이지.
유럽이나 미국, 또는 한국과 중국에서 한국인들이 들여온 최신식 모델과 그에 따른 몰데(옷본)를 단시간에 카피하여 전염병처럼 떠돌게 하지.
나는 이 새벽 내 동족들에게 새삼 존경스럽다 못해 흠숭하는 마음까지 솟고 솟는다.
어떻게 이렇고 저렇고 한 북새통과 경쟁체제 속에서, 그들은 벤츠나 BMW나 아우디나 혼다를 상큼하게 몰고 다니며 의류도매상을 끄떡없이 제대로 이끌어 나갈수가 있을까라는 감격이 썰물처럼 몰려와서다.
대통령 크리스티나정부는 지난 1년 동안 달러구입절제령을 미사일 쏘듯 제시했었고, 그로 인한 외화유출방지책은 이렇다할 착오나 과오없이 잘 실행되어 많은 효과를 얻어냈다고 한다.
엉뚱하게도 몇 달 전부터 수입품 금지령이 또 다른 정책으로 발표되었다.
그 또한 한바탕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사태와 실정에 있다.
당장 피륙이나 실은 물론이고 공업용자재 등이 아두아나(세관)에 묶여 있어, 어불성설(語不成說)이나 날벼락과 다름 아닌 사태가 되었다.
심심파적으로 전개되는 이런 식의 흐름은 과연 어디에서 근거한 노림수라는 얘긴가.
그런 포석(布石)들이 나라와 국민들에게 어떤 미래를 제시하고 , 무엇을 위한 변화와 손익을 가져다주게 될지 나로선 예측불허의 형국(形局)으로만 비춰진다.
의류도매상인도 아니면서 현재의 경기순환에 유달리 민감해짐은 물론이고, 우선 걱정부터 앞섬을 전혀 어쩌지 못하겠다.
물론 나라 안의 산업을 육성화 하려는 경기정책(景氣政策)인지라. 민초인 나 정도야 정부당국의 그럴듯한 계획까지 반대하는 입장은 결코 못된다
올해는 윤달이 껴있다고들 하지만, 엘니뇨현상 때문에도 세계적으로 날씨가 비정상적이라고 볼 수 있는 기후와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얼마전까지 늦더위가 기승이더니 며칠 전부터 갑자기 추워졌다.
분명한 것은 추위 때문에 활기가 몰려올 확률도 배제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추위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추위도 고맙게 여겨야겠다는 결심이 새롭다.
모두들 활기로운 경기 호황을 맞이했으면 하고 희망하게 된다.
한국인들의 하청을 받아 제품을 하던 볼리비아노들을 위시한 인접국 이민자들이 'Feria La Salada'에 사업성 내지 자본을 투입한지는 거의 25년 정도의 역사를 가졌다고 한다.
(수영장위에 세워졌다고 해서 '라 살라다'라는 명칭이붙여짐.)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규모가 큰 Feria라고 널리 알려진 이 시장의 성공사례로 인하여 현재 작은 Feria가 조금씩 근교나 지방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일주일에 9백만달러의 전체판매가 이루어지고, 하루 유동인구는 10만여명이며 그 안에서 일하는 인원만 해도 자그만치 2만 5천에서 3만명이라고 한다.
유명 메이커의 짝퉁이 주종을 이루며 80퍼센트는 도둑물건이라고도 회자되고 있다.
Sebastian Hacher라는 작가가 '상그레 라 살라다(짠 피)'라는 책을 2년에 걸쳐 연구한 뒤 써냈고. 또 다른 작가의 책도 발간되었다고 한다.
'상그레 라 살라다'[의 작가가 나오는 동영상은 주로 볼리비아노들을 두둔하고 있어 당장 여기에 올리지 못하고 다음 기회에 다시 심층적인 얘기를 올릴까 한다.
우리 교민경제의 90퍼센트가 의류도매상가에 집중되어 있다고 평가되는 이 시점에서 이러한 소재를 곁들이는 일이 좀 망설여졌다.
알고도 모르는 척 신경 끄고 지내는 일도 산뜻하리라 여겨져서다.
맹하린
어제 나는 한 달에 두어 번 정도 찾아오는 볼리비아노 고객인 훌로이란의 집까지 꽃배달을 가게 됐었다.
수술하고 퇴원한 그의 부인 까롤리나가 나를 좀 만나고 싶어 한다는 얘기 때문이었다.
까롤리나는 내가 만든 꽃을 볼 때마다 꼭 한 번 만나고 싶은 사람이라고 말했었나 보았다.
나는 차를 이용해야 하는 배달일 경우엔 항상 레미세로(대절용 자가용기사)에게 보낸다.
가게를 비워서도 안 되지만, 일종의 불편이나 부담을 덜기 위해서도 더 그런다.
언제였던가.
현지인 고객이 자기 집에 처치해야할 꽃나무가 많은데 거저 주겠다고 초대를 했을 때도 나는 정중히 사양했었다.
부담은 부담스럽지 않을 때 더 지켜야 하니까.
부담스런 상황에 처했을 때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으니까.
세상에서 거저 얻는 건 없다는 걸 나는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막상 훌로이란의 집을 방문하고 나는 깜짝 놀랐다.
마침 훌로이란은 가게에 출근했기 때문에 (훌로이란은 Feria에도 가게가 더 있다.)까롤리나와 무까마(가정부)가 나를 반겼다.
까롤리나의 지시로 특별히 만들어진 헤이즐넛을 감탄 섞어 마시며 1시간 정도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들 부부가 그렇게나 궁궐 같은 집에서 산다는 게 도대체 용납이 안 되어 나는 온종일 미로(迷路)속을 헤매는 기분이 들고 있었다.
난데없는 위압감과 약간의 거부감까지 마음 한구석에서 스멀스멀 피어나고 피어났다.
마치 우리 교민을 대표하여 그 집에 찾아간 것처럼 말이다.
우리 교민은 25여년 동안 유태인 상가(商街)를 하나하나 번영시켜 나갔지만 볼리비아노, 그들은 우리의 상권(商圈)에 기하급수적으로 참여해 오기 시작한지 벌써 이십여 년이 되었다.
수적(數的)으로는 단연 수세(守勢)에 몰릴 수도 있는 형세(形勢)였다.
때때로 나는 일요일이면 볼리비아노들의 장터가 열리는 까스따냐레스 거리와 보노리노 거리가 교차되는 장소를 찾아 간다.
산책 겸, 구경 삼아 그렇게 다닌 지 어느 새 15년쯤 되었다.
그곳은 뭐든 싼 게 아니라 무조건 싸다.
그들의 주식인 감자는 물론이고, 보라색 감자도 있고, 청양고추도 많다.
15년 전에는 감자가 3Kg에 1달러였는데, 요즘은 3Kg에 2달러 정도 된다.
볼리비아 고추는 상상 외로 지독하고, 뒷맛까지도 한참동안 맵고 맵다.
우리 한국 고추는 매우면서도 달지만, 볼리비아 고추는 매운 감각으로만 맵다.
말 그대로의 도떼기시장이다.
시끌벅적하면서 없는 게 없어 구경이 더 된다.
고급스러운 구경은 못되고 소박한 구경거리다.
천막을 친 간이 이발소, 간이식당, 간이 옷가게, 가방 가게, 신발 가게, 액세서리 가게.
별의별 게 다 있다.
까세로(집에서 만든 상품)로 만든 께소(치즈), 투박하고 커다란 엠빠나다(파이=만두)등등.
그곳에선 볼리비아노들이 수 백명 정도 북적이는 모습을 짧은 시간에 많이 볼 수가 있다.
나는 단지 산책과 구경으로만 다니기 때문에 별로 사지는않는다.
세상 이치라는 게 참 그렇다.
왠지 싸면 싼 맛이 있고 비싸면 비싼 맛이 있다.
남편이 멀쩡했을 때는 남편이 주로 다녔다.
그런데 여느 볼씨들은 남편에게 협박도 불사(不辭)했던 모양이다.
-우리의 영역이니 들어오지 마라!
-더 안쪽으로 들어오면 죽어나갈 수도 있다!
그러저러한 으름장이라고 했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들에게 환영을 받는다.
한국인도 와줘서 괜찮다는 대응(對應)이다.
나는 더좀 안쪽으로는 접근을 삼가한다.
전반적으로 물가의 상승폭이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고는 해도 그곳에 가면 대부분 상상외의 저렴한 가격과 수준에 식료품의 거래가 이루어진다.
그들은 우리 한국인과 불가불념(不可不念)의 관계지만, 여러 방면으로 꽤 괜찮은 조건을 겸비했다고도 여겨진다.
식료품도 싼 값에 구입하지.
제품일은 가족끼리 혹은 친척끼리 두루 뭉실 합동으로 해내지.
훌로이란처럼 아베쟈네다 뒷길에 작은 가게 덜렁 얻어서 옷 몇 장 걸어 두고, 우선 가격 면에서 승리를 쟁취했으니, 대량주문을 받은 뒤 납품은 공장에서 직접해내는 방식을 취하는 음험하기 이를 데 없는 세금포탈의 명사(名士)들이지.
유럽이나 미국, 또는 한국과 중국에서 한국인들이 들여온 최신식 모델과 그에 따른 몰데(옷본)를 단시간에 카피하여 전염병처럼 떠돌게 하지.
나는 이 새벽 내 동족들에게 새삼 존경스럽다 못해 흠숭하는 마음까지 솟고 솟는다.
어떻게 이렇고 저렇고 한 북새통과 경쟁체제 속에서, 그들은 벤츠나 BMW나 아우디나 혼다를 상큼하게 몰고 다니며 의류도매상을 끄떡없이 제대로 이끌어 나갈수가 있을까라는 감격이 썰물처럼 몰려와서다.
대통령 크리스티나정부는 지난 1년 동안 달러구입절제령을 미사일 쏘듯 제시했었고, 그로 인한 외화유출방지책은 이렇다할 착오나 과오없이 잘 실행되어 많은 효과를 얻어냈다고 한다.
엉뚱하게도 몇 달 전부터 수입품 금지령이 또 다른 정책으로 발표되었다.
그 또한 한바탕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사태와 실정에 있다.
당장 피륙이나 실은 물론이고 공업용자재 등이 아두아나(세관)에 묶여 있어, 어불성설(語不成說)이나 날벼락과 다름 아닌 사태가 되었다.
심심파적으로 전개되는 이런 식의 흐름은 과연 어디에서 근거한 노림수라는 얘긴가.
그런 포석(布石)들이 나라와 국민들에게 어떤 미래를 제시하고 , 무엇을 위한 변화와 손익을 가져다주게 될지 나로선 예측불허의 형국(形局)으로만 비춰진다.
의류도매상인도 아니면서 현재의 경기순환에 유달리 민감해짐은 물론이고, 우선 걱정부터 앞섬을 전혀 어쩌지 못하겠다.
물론 나라 안의 산업을 육성화 하려는 경기정책(景氣政策)인지라. 민초인 나 정도야 정부당국의 그럴듯한 계획까지 반대하는 입장은 결코 못된다
올해는 윤달이 껴있다고들 하지만, 엘니뇨현상 때문에도 세계적으로 날씨가 비정상적이라고 볼 수 있는 기후와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얼마전까지 늦더위가 기승이더니 며칠 전부터 갑자기 추워졌다.
분명한 것은 추위 때문에 활기가 몰려올 확률도 배제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추위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추위도 고맙게 여겨야겠다는 결심이 새롭다.
모두들 활기로운 경기 호황을 맞이했으면 하고 희망하게 된다.
한국인들의 하청을 받아 제품을 하던 볼리비아노들을 위시한 인접국 이민자들이 'Feria La Salada'에 사업성 내지 자본을 투입한지는 거의 25년 정도의 역사를 가졌다고 한다.
(수영장위에 세워졌다고 해서 '라 살라다'라는 명칭이붙여짐.)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규모가 큰 Feria라고 널리 알려진 이 시장의 성공사례로 인하여 현재 작은 Feria가 조금씩 근교나 지방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일주일에 9백만달러의 전체판매가 이루어지고, 하루 유동인구는 10만여명이며 그 안에서 일하는 인원만 해도 자그만치 2만 5천에서 3만명이라고 한다.
유명 메이커의 짝퉁이 주종을 이루며 80퍼센트는 도둑물건이라고도 회자되고 있다.
Sebastian Hacher라는 작가가 '상그레 라 살라다(짠 피)'라는 책을 2년에 걸쳐 연구한 뒤 써냈고. 또 다른 작가의 책도 발간되었다고 한다.
'상그레 라 살라다'[의 작가가 나오는 동영상은 주로 볼리비아노들을 두둔하고 있어 당장 여기에 올리지 못하고 다음 기회에 다시 심층적인 얘기를 올릴까 한다.
우리 교민경제의 90퍼센트가 의류도매상가에 집중되어 있다고 평가되는 이 시점에서 이러한 소재를 곁들이는 일이 좀 망설여졌다.
알고도 모르는 척 신경 끄고 지내는 일도 산뜻하리라 여겨져서다.
2012년 3월 28일 수요일
백야(白夜), 우수아이아!!!
맹하린
아르헨티나는 지표의 면적이 넓기도 넓지만 기다란 형태를 갖추고 있어서인지 한 여름일지라도 지방에만 가면 눈 덮인 산과 영하로 내려가는 밤 기온을 만나게 된다.
한 겨울에 지방도시를 여행할 경우,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춥지만, 어떤 지방도시는 푹푹 찌는 더위 탓으로 반바지와 반소매 차림으로 나다녀야 하는 건 예상사(例常事)가 된다.
그래서 한 계절에 봄가을 닮은 날씨와 여름과 겨울이 공존하는 계절들을 언제라도 만나볼 수가 있는 편이다.
우수아이아라는 지방도시를 여행한 적이 있다.
신비롭게도 저녁에 해가 지지 않고, 달처럼 흐린 빛깔로 떠 있었다.
아침에 떠오르는 해가 저녁에 지기는 하는데 완전히 떨어지지를 않고 밤중에도 어스레 떠 있어서 신비롭기 이를 데 없다는 느낌에 한참이나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현상(現象)은 해가 지평선 저쪽으로 완벽하게 사라질 만큼 지구가 기울지 않는 원리에서 생기고, 해를 중심으로 운행하는 지구의 기울기에 의해서라고 한다.
남극의 여름은 정반대로 낮이 저녁나절처럼 어둑어둑하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그점이 신기하게 여겨져 밤늦도록 거리를 쏘다녔다.
그 어둑어둑 어스레하던 도시의, 특색 있는 안온함은 지금껏 시야 가득 잔존해 있다.
밤이, 석양이, 꽃이, 새벽이, 바다가.
밤 11시에 해가 지고
새벽 두시에 벌써 해오름이 시작되는 도시.
아름답고 아름다우며 아름다운 도시.
아르헨티나의 여러 지방도시를 때때로 찾게 되면, 아르헨티나가 참으로 넓고 크다는 인식(認識)의 한 귀퉁이를 고작 손톱만금만 붙잡아 본 느낌같은 게 서리서리 마음에 깃든다고나 할까.
천혜(天惠)의 땅, 그리고 끝을 모르게 매장되어 있다는 지하자원.
방대한 보고(寶庫)의 해산물은 차치(且置)하고라도 시야에 직접 들어오는 천연경관만 바라보아도 한숨이 저절로 터뜨려지게 된다.
그럴 때마다 좁은 땅. 고갈된 자원의 내 나라 내 조국을 운명처럼 떠올리게 됨은 뒤늦게 싹튼 애국심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도 보아야 할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지방도시나 바다 한 귀퉁이를 뭉텅 떼어내어 가져갈 수는 없는 일일 테고 해서 그저 부러운 마음만 새록새록 식물의 싹처럼 자라고 자란다.
말비나스(포클랜드)전쟁 때, 나라의 한 쪽에서는 전쟁이 났는데도 생필품 사재기하는 민족은 오로지 한국 교민들 밖에 없었을 정도로 태평하게 축구시합에만 열을 올리던 아르헨티나 국민들을 지켜보면서 깨닫고 또 깨달았었다.
우선 나라의 면적이 크면서 넓으면서 기다랗고 볼 일이라는 것을.
혹자는 말한다.
신(神)은 때로 맘이 약해서 게으른 아르헨티노들에게 놀면서 지내도 먹고 살만한 넓은 땅을 축복처럼 내렸다고.
그럴까?
그럴 것이다.
'1만 고랑의 밭을 지녔어도 5척의 침상에서 잔다'는 중국의 속담을 음미하자면 하루하루를 아등바등 살아갈 필요도, 그렇게 살아서도 안 될 것 같다는 상념이 최근 부쩍 든다.
세상은 공평하다.
무엇인가 주어진 국가(國家)나 사람은 무엇인가 결여된 것도 있기 마련이다.
인생을 미리 알아낸 사람은 행복하다.
행복한 생(生)은 바로 내 자신이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진 게 적다고 해서 체념이나 유보(留保)를 선택해서도 아니 될 듯하다.
아름다운 삶을 지향하는 일은 쉽게 생각하면 쉬워지고
어렵게 단정하면 더욱 어려워진다.
행복도 필연도 거저 얻어지는 건 없다.
우연이 필연으로 이어져야 가능한 행복이고 만남이 되는 것.
왜냐하면 행복이란 소박함에 대한 응답(應答)이기에 더 그러하다.
더군다나 생(生)이란 가꿈이고 다스림이고, 그에 대한 보상(補償)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밤낮이 뚜렷한 대지 위에서 살아가지만 백야(白夜)의 땅에도 산다.
이제라도 삶이 우리의 것, 나의 소유가 되도록 혜안(慧眼)의 눈뜸을 뜨고 뜨자.
2012년 3월 27일 화요일
열 개의 반지(斑指)
맹하린
어제 오후 7시, 나는 H회관에 갔다.
동문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동문회에 가면 글 소재가 될 얘기들을 참 많이 듣는다.
장사 얘기, 교회 얘기, 자녀들 얘기.
특히 한국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강도사건은 매달 부상(浮上)하듯 떠오른다.
아베쟈네다에 가게를 몇 개나 소유한 모(某)여인은, 집을 소개하러 온 한국인 부동산 중개인이 바쁜 이유로 떠난 순간, 같이 왔던 현지인 커플에게 매까지 맞으며 가게 하나의 쟈베(3년에 한 번씩 지불받는 권리금이지만 다시 반환하지 않음 )로 받아둔 15만 달러를 고스란히 강탈당했다는 얘기다.
매우 걱정스러운 문제다.
한국 사람은 털 때마다 거금이 나온다는 인식을 강도들에게 매번 심어주게 되는, 역사처럼 한결같은 맥을 이어오는 우리 한국인들의 지독한 허술함.
아무리 그래도 그런 얘기들을 듣는 족족 글로 모두 풀어내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부담스러운 면도 많아, 취할 건 취하고 흘려보내야 할 건 흘려듣는다.
언젠가는 두드리게 되리라 예상은 했지만, 되도록 건드리고 싶지 않은 소재가 하나 있었다.
동문회에 다녀올 때마다 필히 묵상하게 되는 일종의 숙제나 메시지와 흡사한 소재다.
잘못 건드리게 되면 일종의 비난으로 비칠 수도 있는 사안(私案)이라서 밀쳐 뒀었으나 오늘은 부득불 적게 된다.
화교(華僑)지만, 한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을 뿐 아니라, 대학도 한국에서 마쳤기 때문에 동문이 된 쳉씨는 아르헨티나에서 한국인 상대의 중화요리점을 가장 최초로 열었던 덕택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튼튼한 기반을 구축하였다.
몇 년 전 환갑도 안 된 나이에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동창회원의 수가 적다보니까 오래 전부터 부부동반을 허용하게 되었고, 그런 연유로 왕여인은 쳉씨가 세상을 떠난 현재에 이르기까지, 개근상을 타야할 정도로 참석에 열성을 보여 왔다.
그녀는 시내 곳곳에 여러 채의 주택을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일 년에 대만을 두어 번 정도 왕래하는가 하면, 가끔씩 캐나다의 아들한테 다녀오기도 한다.
비록 아끼느라 동창회에 오고 갈 때는 버스를 자가용처럼 이용하지만, 그녀의 손가락은 열 개나 되는 반지가 모양과 색깔과 종류를 달리 한 채 주르르르르르르르르륵 껴 있다.
환타시아(모조품)가 아니라 모두 진짜로된 보석반지들이다.
어젯밤 따라 유난히들 그녀의 반지에 대한 질문이 집중적으로 많이 쏟아졌다.
아마 나만 잠잠히 듣고 있었을 것이다.
나도 한 마디 할 수는 있었지만, 청문회 성격이 엿보여 굳이 인내한 셈이다.
"불편하지 않아요?"
"아니, 편해요."
"길이나 버스에서 위험할 것 같아요."
"안 위험해요. 가짜라고 알아. 그래서 더 버스를 타요."
"밤에는 빼 놓아요?"
"한 번도 안 뺐어요. 7년 동안이나 안 뺐어요."
"7년을 밤낮으로요?"
"그럼요. 이제 내 피부 같이 됐어요. 이제 내 살이나 마찬가지야."
"왜 안 빼놓는 건데요? 중국식으로 하면 복을 받는, 무슨 그런 거예요?"
"그런 건 없어. 빼놓으면 허전 해. 많이 불편해. 잠이 안 와."
그녀는 말을 많이 할 때나 다급한 표현을 해야 할 때면 존댓말이 증발한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반말 투성이가 되는 것이다.
그들이 중화요리점을 할 때, 문협여인들 몇 명이 그 식당에서 모인 적이 있었다.
어느 토요일 정오 무렵이었다.
문협의 S여사는 하여간에. 웃음소리가 끝내준다.
성당의 미사시간 중 강론을 듣노라면 S여사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자주 듣게 된다.
신부님의 강론에 아멘!하고 장단을 맞추는 역할을 떠맡은 것 같은 웃음이다.
그녀가 왼쪽에 앉아 있는지, 오른쪽에 앉아 있는지 , 또는 바로 뒤인지 또는 한참 뒤인지의 감을 일부러 안 돌아 보고도 쉽사리 알아 챌 수 있을 정도가 된다.
왜냐하면 나는 항상 앞에서 세번 째의 자리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사람들은 참 이상한 구석이 많다.
항상 같은 자리를 선호한다.
S여사처럼 여기저기 앉는 타입은 미사시간에 허둥지둥 나타나는 형에나 가능한 일이다.
그날, 그 식당에서 우리 다섯 사람은 마냥 재미있었고 특히 S여사의 탕탕한 웃음이 가장 요란뻑적지근했다.
다행인지 식당 안엔 우리 일행만 있었다.
그런데 왕여인이 그만 성깔이 나버렸다.
그녀 특유의 반말 투성이가 시작된 것이다.
열 개의 반지가 껴있는 두 손을 휘저으며 우리 일행이 앉아 있는 식탁을 향해 언성을 한껏 높이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
-시끄럽다 해! 조용 해. 귀 아파, 그만 가라고 한다 해?
왕여인의 그러한 말투가 너무 재미 있었지만 이내 조심스러워우리는 키득키득 웃었고, S여사는 도리어 더 크게 웃어댔다.
동문회가 끝날 무렵, 왕여인은 이미 준비해온 멜라닌 도시락 서너 개를 가방에서 꺼내어 식탁에 남은 음식들을 담기 시작했다.
고기는 고기끼리.
나물은 나물끼리.
밑반찬은 밑반찬끼리.
어차피 식당에서 재탕시켜 재생하는 음식은 아닐 터였다.
식당들이 음식을 재탕한다는 걸 못마땅 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겐, 그러는 왕여인의 그런 행동은 한 몫 단단히 거드는 셈이기도 하다.
왕여인은 자주 다른 사람이 옆에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녀는 스스로를 아끼고 방어(防禦)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면으로는 자신을 고통 속으로 방치(放置)하는 것처럼도 비치게 된다.
이미 참을 대로 참다가 한마디씩 질문을 보내는 회원들도 몇달에 한 번씩은 돌출한다.
바로 어제와 같은 날이다.
"집으로 가져가면 변하지 않아요?"
"아니, 냉동실에 넣어. 조금씩 얼음이 풀리면 먹어 해. 한국음식 최고야."
그 대답이 필요했다는 듯 너도나도 이윽고 시치미를 떼기에 이르른다.
그녀와 가까이 앉게 되면 나는 항상 그녀의 반찬수거를 도와 준다.
어젯밤 나는 약간 늦게 도착되어 왕여인과 좀 떨어져 앉았었다.
그녀를 도울 때, 나는 자신이 약간 겸허로워지는 것을 느낀다.
그건 누군가를 다독이고 있다는 따사로운 감정 같은 것과 닮았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못 배울 지적이 있다고 생각된다.
지적해서는 안 되지 싶은데 지적하게 되는 일과
지적해야 하는데 지적하지 못하는 일이다.
왕여인의 저렇기도 하고 이렇기도 한 유별난 모습은
지적하고 싶지도 지적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왕여인에게 있어 그러저러한 행동은 일종의 아픔이기 때문이다.
그건 아픔 맞다.
재산은 있는 아픔.
인간이 행하기 어려운 일 두 가지를 들라면 그렇다던가.
다른 사람이 내게 고통을 안겼을 때 망각(忘却)하는 일과
나의 재산을 남을 위해 쓰는 일이라고들 일컽는다.
둘 다 쉬운 일이라고 보기에는 지난(至難)한 과제다.
왕여인은 여전히 그리 살아갈 것이다.
현실이란 사람에 따라서는 환상적(幻想的)인 덫이기도 하다.
탈무드의 <은칠한 거울>이라는 예화가 절절 안겨오는 오후다.
'한 제자가 랍비에게 물었다
"랍비님. 가난한 사람들은 오히려 남을 돕는데
왜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지 않습니까?"
랍비가 말했다.
"창밖을 보게. 무엇이 보이는가?"
"예. 아이의 손을 잡고 가는 사람과 자동차가 보입니다."
"다음엔 벽에 걸린 거울을 보게."
"예. 제 얼굴 밖에 아무 것도 안 보입니다."
"그렇지? 창이나 거울이나 모두 유리로 만들었다네.
하지만 유리에 은칠을 얇게라도 발라 주면 자기 얼굴 밖에 볼 수가 없기 때문이지."
2012년 3월 26일 월요일
역지사지(易地思之)
# 웃는 여자는 무조건 예쁘다?
김정운 교수
지난 5월 KBS 2TV 예능프로그램 <승승장구>에 출연해 화제를 모았던 명지대학교 문화심리학과 김정운(50) 교수가 지난 16일 저녁 7시 덕수궁 정관헌 강단에 섰다. 봄과 가을 문화재청 덕수궁관리소에서 진행하는 '정관헌에서 명사와 함께' 프로그램의 첫 번째 명사로 초청된 것이다. 강의 제목은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었고, 방송에 나와서 했던 것과 내용의 강의였지만 청중이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예시들을 가져와 특유의 유머감각을 뽐내며 강의하면서 김 교수는 또 한 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 첫 번째 관문, 만지기
김 교수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가장 첫 번째 요소로 만지는 것을 꼽았다. 아기 원숭이가 철사로 만들어진 원숭이 인형보다 부드러운 천으로 만들어진 원숭이 인형에 안기고 애착을 갖는다는 것을 실험한 영상은 적절했다. 철사 인형은 아기 원숭이에게 음식물을 줬음에도 마음을 얻지 못한 것이다. 가까운 사람이 슬픈 일을 당하면 어깨를 토닥이거나 손을 잡는 등 만지는 일이 위로가 된다는 것은 평소에 의식하지 않았지만 누구나 알고 있고 수긍할 만한 이야기였다.
“노인부부가 살다가 할머니가 먼저 죽으면 보통 할아버지는 6개월 이상 살지 못하지만 할아버지가 먼저 죽더라도 할머니들은 4년을 버팁니다. 할머니들은 아기를 기르거나 바느질 등 집안일을 하면서 만질 대상이 많지만 할아버지들은 만질 대상이 없어요. 선거유세 할 때 악수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죠. 백 마디 말 보다 한 번 만지는 게 중요합니다.”
두 번째는 ‘정서 공유하기’다. 김 교수는 사람에게는 정서를 공유하는 뉴런이 있어서 웃는 얼굴을 보면 따라 웃게 되고, 상대방이 찡그리면 따라서 찡그리게 된단다. 김 교수는 남자들이 평소에 잘 웃지 않는다는 것을 예로 들어 공감을 샀다. “남자들은 거울 뉴런 작용이 망가져서 볼 근육을 안 움직이려고 해요. 특히 입 꼬리가 처진 3대 집단이 있어요. 사장님들, 교수들, 중앙공무원교육원들. 나도 교수지만 교수는 교수들 중에는 이상한 사람들이 많아요. 직업적으로 자기 얘기만 하게 돼 있어요.”
김 교수에 따르면 논리만으로 사람을 설득하려는 사람은 바보요, 설득하는 좋은 방법은 정서를 공유하는 것이다. 그는 “심리학적으로 논리는 물이고, 수도관이 정서 공유해 줍니다. 정서 공유를 잘 하는 사람은 따라 웃고 따라 웃습니다. 물이 있어봤자 수도관이 없으면 정서를 공유할 수 없어요. 기분좋은 사람들의 특징은 웃는 거에요. 웃는 여자는 무조건 예쁩니다. 왜냐구요? 웃으면 따라 웃게 되죠. 웃고 있는 자신을 보고 왜 따라 웃게 될까 고민하다가. 좋네, 예쁘네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 내 순서가 있으면 남의 순서도 있는 법
김 교수는 “내 순서가 있으면 남의 순서가 있다. 내 순서가 오면 반드시 반응 해야 한다”고 공식처럼 외며 강조했다. “아이를 키우는 전세계 엄마들은 아기에게 이 순서를 가르쳐줍니다. 엄마들은 아기에게 말을 걸죠. 누가 그랬어? 아니 자기가 그래 놓고 누가 그랬냐니요. 3개월이 지나면 아기는 웃게 돼요. 내 순서가 왔다는 걸 아는 것이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에게 순서를 내줄 때 상대방이 장점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심리학이 약점을 고치려고 애를 썼지만 고칠 수 없었어요. 제 성격은 보통이 아니에요. 길을 가다가 담배꽁초를 버리고 가는 사람이 있으면 잡아 세워서 호통을 치죠. 요즘은 얼굴이 알려져서 못하지만. 고등학교 때 생활기록부를 보니 과묵하고, 성실하나 쉽게 격함이라고 적혀있더군요. 사람은 안 바뀝니다. 장점을 끌어올려서 약점을 따라 올라오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화를 넘길 때도 상대방이 멋지게 보일 때 내주세요.”
김 교수는 장점과 단점에 대해 얘기하며 학업 면에서 기대에 못 미치는 아들에 대한 이야기도 살짝 공개했다. "아들이 공부를 못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 3년이 걸렸어요. 지금은 아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공부를 하는 게 좋아요. 평균 수명이 50~60세일 때는 좋은 직장을 나와 10년 행복하게 살 수 있었지만 앞으로는 수명이 길어져 50~60년을 더 행복하게 살아야 하기 때문에 공부가 다가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 유니온프레스 김규승 인턴기자
“사람은 네 살이면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능력을 갖추게 돼요. 그런데 이상한 점은 나이가 들수록, 높은 지위에 올라갈수록, 장사가 잘 될수록 사라진다는 거에요.” 다음으로 김 교수는 입장을 바꿔 생각하는 습관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며 역지사지를 훈련하는 특별한 방법으로 자기 자신과 대화를 하는 법을 공개했다. “내가 나한테 애기하는 것을 심리학에서는 에고 센트럴 스피치라고 해요. 나와 얘기하는 것은 휴식이 되기도 해요. 가만히 앉아 있으면 교수로서의 나. 아빠로서의 내가 말을 걸어 와요.”
김 교수에게 자신과의 대화는 글을 짓는데도 큰 도움이 된다. 대화 내용을 수첩에 적는데, 수첩을 한두 페이지만 쓰고 버려서 1년에 30~40개 수첩을 갈아치운다고 했다. 아내와 자식을 바꿀 수 없으니 수첩이라도 자기 마음대로 바꾸는 것이라느니, 술을 안 마시고 담배 안 피우고 좋은 만년필을 모으는 게 취미라느니 하는 개인사에 대한 시답잖은 말을 이어나가며 좌중에 웃음을 주기도 했다.
끝으로 그는 우리가 사는 데 있어서 감탄하는 것의 중요성을 얘기했다. “음악을 작곡하고 그림을 그리는 것 모두 감탄을 위한 일이에요. 왜 에펠탑을 보러 가죠? 감탄하고 싶어섭니다. 사람은 감탄하고 감탄 받기 위해 살죠. 남자들이 룸살롱에 가는 이유는 거기 여자들이 감탄해주기 때문이고, 여자들이 오래 사는 이유는 모였다 하면 ‘그래그래’, ‘맞아맞아’ 서로들 감탄해서 그래요.”
김정운 교수는 이날 ‘삶’과 맞닿아 있는 소재와 유쾌한 강의법으로 강의를 들으러 덕수궁을 찾은 170여 명의 사람들에게 감동과 재미를 주었다. 감탄할 만한 강의였다.
힐링캠프 1부
2부.
벙어리ㅇㅇㅇ
맹하린의 생활 산책
1999년 남미크리스챤신문
지금 살고 있는 주택으로 이사 온 지 3년이 넘도록 페인트를 칠하지 못하고 지내서 올해는 큰맘 먹고 페인트 가게에 연락하여 견적을 뽑아 달라고 부탁했다.
집 안팎 전체를 모두 칠하자면 2천 페소(700달러 상당)정도 예상을 하라기에 서로 양보하고 적당한 선(線)에서 가격절충을 보았다.
3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아무 일이나 힘든 줄 모르고 해냈기 때문에 굳이 페인트 공에게 의뢰할 필요까진 없었다. 그런데 자꾸만 일에 꾀가 나고 페인트칠은 아무래도 무리다 싶어 그런 타결점을 찾은 셈이다.
남편은 집안일이라면 빗자루는커녕 열었던 서랍이나 제대로 닫아주면 감지덕지할 인물이라서 나로선 항상 남편을 예외적인 사람으로 생각해 왔었다.
현지인 페인트 공들이 일하는 광경을 보면서 내가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두 명의 페인트 공들이 하루에 딱, 벽의 한 면(面)만 칠하고, 그 한 면도 쏠아낼 곳 다 쏠아내고 메울 곳 모두 메우느라 며칠을 소모하고 난 뒤의 일인데도 하대명년(何待明年)이었다.
인건비를 시간제로 지불하기로 한 건 아니라서 크게 상관은 없었다고는 해도 한 면씩이라도 약간의 속도를 싣고 칠해 줬으면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화가(畵家)가 작품을 앞에 두고 온갖 정성을 다 바치는 자세보다 더한 지극정성으로 칠하는 모습들이라니.
더군다나 도중에 사다리에서 대여섯 번은 내려와서 담배 피우고 봄비쟈(빨대)가 담긴 마테( 남미산 녹차)통을 교대로 주고 받으며 흡입하거나, 라디오까지 틀어놓고 큰소리로 따라 부르며 일을 해내고 있었다.
그 현상은 마치 미술경연대회에 참석하여 소풍삼아 그림 그리는 형색이어서 웬만큼 느긋한 성격의 나인데도 며칠 사이에 지치는 심정이었다.
하물며 다른 곳에도 중복으로 일을 맡아뒀는지 가끔은 아예 며칠동안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렇게 며칠 가지고 질리는 기분이었는데, 집치장 칠이 자그마치 한 달이나 걸리고 말았다.
아마 그러한 과정을 필수처럼 거치기 때문에 한번 페인팅을 하고 나면 적어도 5년 정도 끄덕없이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는 모양이라는 이해와 긍정이 뒤늦게 생겨나고 있었다.
페인트칠 뿐인가.
현지인들은 집 한 채 짓는데 보통 1년에서 3년까지도 걸리는 추세였다.
개인이 짓는 집은 취미삼아 짓기라도 한다는 듯 10년도 걸리는 경우를 보았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건축허가가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라 대단히 까다로워서였다.
집이 상상 외로 깔끔하고 산뜻해지자, 이민 오기 전 상도동 집을 수리할 때 겪었던 모종(某種)의 사건이 저절로 떠올려졌다.
신림동으로 넘어 가는 언덕 초입(初入)에 위치해 있어서 어딘지 모르게 까스락져 보이는 형상이었지만, 잔디밭이낀 운치 있는 정원이 갖춰져 있었기에 단박에 마음에 들어 구입했던 집이었다.
남편의 회사 동료 되는 분의 친척 중에 집수리를 전문으로 하는 분이 있다하여 부탁했더니 다른 사람보다 훨씬 비싼 견적이 나왔지만, 남편의 동료를 대접해 주려는 의미에서 선뜻 일을 맡기게 되었었다.
거실의 벽에 나무를 붙이기도 하고 부엌을 입식(立式)시설로 바꾸는 공사였다.
그렇게 새집처럼 수리하고 대략 한 달이나 지났을까.
아랫집에서 항의가 빗발쳤다.
축대에서 물이 흘러 그 집 마당으로 작은 시냇물이 흐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수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아랫집에서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여겨진 나는 우리 축대 탓이 아닐 거라고 도리어 떳떳한 응수를 해냈다.
그래도 계속 물이 새어 나온다는 끈질긴 항의에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져 나는 사람을 불러 뜯어 볼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일을 맡았던 분은 여러 번 전화 했지만 바쁘다면서 차일피일 미루는 데다, 어느 날부터는 아예 전화를 피하는 기미까지 느껴졌다.
아랫집에서 소개한 두 명의 일꾼을 시켜 부엌에서 내려가게 되는 하수구 근처를 파보게 했다.
물이 통과해서 지하의 하수도로 연결되는 기다란 하수구의 토관이 네 개까지만 연결돼 있었고. 다섯 번째에 있어야 할 하수관은 땅에 물이 스며들거나 말거나 관계없이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잠시 아연실색(啞然失色)에 잠겼다.
(이럴 수가! 뜨거운 물에 토관이 녹아버린 것도 아니고 대체 이게 어찌된 일인 것일까.)
난감해진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다가 나는 일꾼들에게 다시 획인해 볼 수 없겠느냐고 재차 부탁했다.
-죄송하지만 혹시 하수관이 잘못 연결되어 물이 새다 보니까 흙 속에 묻혔을 수도 있을 테니 더 좀 아래쪽과 옆쪽까지 집중적으로 파 헤쳐 주세요. 그분은 믿을만한 분이시고 더군다나 아는 분의 친척이거든요.
지금도 선명하고 생생하게 기억된다.
두 일꾼의 말과 행동들이.
그 두 명의 일꾼들은 실소(失笑)를 감추지 못하겠던지 껄껄껄 웃어댔다.
마치 미리 계획하고 웃어대는, 그러니까 그냥 웃는 게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서로 짜고 웃는 것만 같은 매우 시니컬한 웃음이었다.
한 사람은 나를 보면서 웃고, 한 사람은 나를 외면하면서 웃는 매우 기묘한 웃음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아주머니, 아는 사람이고 뭐고 요즘 세상에 이런 건축업자들 많습니다. 못 들어 보셨겠습니다만, 우리 토목쟁이들 사회에선 이런 하수구를 어떻게 부르는 지 아십니까? '벙어리하수구'라고 합니다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잠깐 동안 벙어리라도 된 것처럼 순식간에 할 말이 막혔다.
(벙어리하수구?)
나는 내가 모르는 세상에 막 도달한 사람처럼 한참이나 서먹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더 이상 그 사람에게 굳이 전화하여 따질 필요도 없다는 단정에, 일단 수리부터 서둘러 달라고 지시하기 직전에 이르렀다.
아마 남편 역시 그런 친척을 둔 동료를 더 이상 다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 선(線)에서 함구무언(緘口無言)을 지켰으니 더 이상의 내막을 알리도 없었던 탓이었다.
나중에 들통이 나건 말건 뒷일은 나 몰라라 하고 우선 증축비와 수고료만 챙겨내는 이런 처사가 과연 있을 수나 있는 일이던가.
참으로 극적(劇的)인 사건이었다.
도대체 믿을 수가 없었지만 나는 이내 마음을 추슬렀다.
어찌 세상이 믿기 쉬운 일만 일어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새로운 자구책(自救策)을 강구했던 것도 같다.
나는 마지막 선포나 되는 것처럼 의연히 반문했었다.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공사를 하면서 나다닐 수가 있는 거죠? 앞으로도 그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일을 계속할까요?
-그럼요. 물론이죠.
그런데 또 흥미로운 일은 이번에는 나를 보면서 실소를 터뜨리던 일꾼은 고개를 꼬면서 만면에 터지는 웃음을 조절하기 시작했고, 나를 외면하면서 웃어대던 아저씨는 느닷없는 사고에 대응할만한 적절한 답을 진지하게 전해오는 것이었다.
-대형아파트가 무너지는 사고는 바로 그런 사람들 때문에 일어나는 거죠. 앞으로는 아무도 믿지 마세요. 일꾼들이 일할 때 필히 지켜보셔야 한다는 것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나는 충격을 완화시키면서 그들의 충고를 기꺼이 받아 들였다.
그때의 그 사건은 내게 또 다른 지침(指針)이 되었다
기분 나쁜 사건은 되도록 빠르게 밀어내는 현명함을 갖추자는 교훈이었다.
하지만 나는 때때로 느끼고 있다.
나는 언제 어디서나 져주려고 이 세상을 살아 가는 건 아닌가 하는 관념을.
2012년 3월 25일 일요일
서정의 유형지에서
-이기철
벼랑에 도라지꽃 피고 서정시가 씌어진다는 것이
아직은 위안이다
아무도 노래하지 않는 땅에서 혼자 노래 부르는 사람이여
목이 아픈가
사람의 어깨에 싸라기 같은 햇살 내리고
공장의 굴뚝에도 달빛은 희다
대리석은 지층의 꿈에 젖고
강물은 나보다 먼저 내일에 닿는다
나는 삶에 대해 불온한 비유를 빌려오고 싶지 않다
비탄을 땅에 심어 희망이 열리기를 바라는 것은
고통보다는 달콤한 경험
햇빛으로 한 벌 옷을 해 입은 나무 곁에서
흙의 가장 신선한 부분을 꽃으로 옮기는 것은
나무의 가장 큰 희망
누가 달빛 잉크로 편지를 쓰느냐
아직도 내가 시에 쓸 말들이
이 땅 어디엔가 묻혀 있다는 생각이 나의 기쁨이다
나는 서정의 유형지에 혼자 서서
복사나무의 분홍 힘을 빌려 시를 쓴다
2012년 3월 24일 토요일
물가를 조심하라!
맹하린
해마다 연말이 되면 나는 인터넷을 검색하여 토정비결을 본다.
단지 재미를 얻기 위해 보는 관계로, 좋고 나쁨에 크게 연연해 하지는 않아왔다
신비스럽게도 나의 토정비결은 해마다 이렇다하게 나쁘지 않아서 한층 재미 있었고 괜찮았던 셈이고 지속적으로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해, 그러니까 10 년 전의 토정비결은 유난히 1년 내내 운수가 만사형통으로 나왔었다.
그러나 5월 달에는 물가를 조심하라던 항목이 유난히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문협에서는 우연찮게도 추위가 6월부터 심해지더라면서, 야유회를 5월로 당기자는 합의점들을 찾고 있었다.
더불어, 넓고 광활한 땅에서 하필이면 내게는 물가가 되는, 강쪽으로 나가자는 결정이 금세 좁혀지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도 바다나 강을 좋아해 왔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나로서는 묵묵부답 을 고수하며 참을성 있게 견뎌야만 했다.
그럴 때 나는 , 내 토정비결이 어떻더라? 그러면서 어리석게 문제를 제기하는 성격은 못된다.
마음 속으로만 조심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굳히면 되는 것.
Laguna de Lobos 강.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의 강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바다처럼 널따란 강이었다.
아사도(갈비구이), 겉절이, 야채사라다, 밥과 찌개, 그리고 커피까지 달콤새콤쌉싸름 하게 끝을 낸 회원들은 강을 낀 숲으로 단체산책을 나섰다.
일부는 휴식을 취하겠다고 돗자리에 눕거나 강가에 앉아서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나는 물론 산책 팀에 합류했다.
돌아오는 길에 Muelle(잔교=棧橋)의 기둥에 매어 있는 두어 대의 보트를 발견한 회원들은 보트놀이를 하겠다고, 마치 유치원생들처럼 우르르 몰려갔다.
나의 갈등 따윈 아랑곳 없이 잔교 위에서 연신 사진부터 찍던 회원들.
보트 하나에 넷과 다섯이 사이좋게 나눠 탔을 무렵, 그때껏 잔교위에 서있던 나는, 사양하고 싶어져서 미안하다는 웃음을 보이며 그들을 향해 손까지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 순간 내 의식(意識) 속엔 토정비결, 5월, 물가, 그런 언어들만 떠올랐었다.
예상 했던 대로 곧장 야유인지 원망인지 또는 힐책인지가 투명한 화살이 되어 내게 여러 대나 쏘아지고 꽂히고 그랬다.
-에이고, 저 꼴통!
나는 강한 말투에는 부드러운 표현으로 응수하는 센스도 잊지 않는 성격이다.
-어휴, 진짜 얄미운 리버럴리스트! 그게 훨씬 어울린다고 생각되지 않나요. 여러분?
자유는 모든 인간의 신성한 권리인 것을.
그렇지만 내 한 손의 축복이 턱없이 부족했었나?
나의 미소(微笑)는 너무 미소(微小)해서 부득이 미소(媚笑)로 바꿔야 했을까.
나는 드디어 깔깔대며 두 팔을 춤추듯 휘저었고, 손짓까지 휘날리도록 펼치고 펼쳤다.
그때의 내 심정이라는 것은, 나만 위험에서 빠져 나와야겠다가 아니라, 나 때문에 다른 사람까지 위험하면 안 된다, 에 치우쳐 있었다.
공원 안의 대여 장소에 닿았을 때, 그곳에 남아 있던 몇몇 회원은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일로는 만족치 못했던지 술잔까지 부딪치며 희희낙락하고 있었다.
나는 잔디 위에 엎뎌 약간의 휴식을 즐겼다.
술을 마시던 회원 하나가, 멀리서 보트 놀이하는 회원들을 수시로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30분이 넘도록 회원들이 탄 두 대의 보트는 수초와 물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제자리놀이를 계속하고 있더라는 얘기였다.
달려가 볼 수도 없다는 의견들이 오갔다.
보트의 주인이던 현지인도 안 보이는 상태에서 그들을 더욱 당황 속으로 잠기게 한다면 점차 못 헤어날 확률이 더 많다는 염려들이 술좌석을 안개처럼 떠다녔다.
거의 1시간이 지나서야 수초와 역류에서 헤어난 그들은, 조용한 가운데 기다려 주고 있던 우리 일행과 합류했다.
함께 안 타기를 잘 했었다고 내게 안도를 전달하는 회원도 여럿이나 있었다.
강산이 변할 정도로 많은 날들이 지나게 된 최근에야 나는 그해의 토정비결에 대한 얘기를 허심탄회 털어 놓을 수 있었다.
항상 내게 딴죽을 잘 거는 L선생이 묵은 감정을 토해내듯 반격을 가해왔다.
"그래서, 혼자 살겠다고 빠져나오신 게 잘하신 일입니까?"
그것은 원망 같았지만 원망이 남을 수도 있는 사인이라서 나는 굳이 해명하고 나섰다.
"아니죠. 내가 그 보트를 탔더라면 전복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는 문제였어요. 그걸 견제했다고 생각하시면 우리가 서로 손해날까요? 나는 나로 인해 엇나가고 싶지가 않았던 겁니다."
교회의 중책을 맡고 있고, 본인들의 신앙심이 깊고 넓다고 확신하는 몇 회원은 토정비결은 미신일 뿐이라고 강하게 표방했다.
분명한 것은 나는 문협의 토정비결을 본 게 아니라, 나의 토정비결을 보았다는 사실이었다.
이 세상 어딘가에는 내가 한 인간으로 거듭나야 할 역할이 숙명처럼 마련되어 있다.
인생은 수만 종류의 기쁨과 수만 종류의 애환으로 짜여 있다.
이 모든 과정은 궁극적인 평화와 긍정적인 선(善)에 도달하는 여정(旅程)이고
인연이고 운명이라고도 보여진다.
제대로 된 사람이 되어지는 과정에서 우리는, 조건 없이 사랑하고 이해하며 비판을 회피하고 나와 남의 소중함에 관해 약하거나 강한 애정을 감추기도 하고 건네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사람이기 위해, 사람이려고, 누구나 아끼지만, 그것을 누누이 밝히고 싶지 않은 이성(理性)만큼은 나름대로 갖췄다고 여겨진다.
내 시각으로 필요치 않은 디테일들은 마냥 흘러 보내지만 말이다.
앞으로도 나, 해마다 토정비결을 미신으로가 아니라
재미삼아 찾고 보고 느끼고 받아들일 것이다.
2012년 3월 23일 금요일
물도 음악이 될 수 있다면
-박정대
밥 딜런의 노래 듣고 싶어,
전속력으로 차를 몰아 42번 국도를 지나왔다.
지나오는 길에도 생은 내 갈비뼈 사이에서 푸른 잎들을 꺼내어
필사적으로 사랑을 흔든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눈물도 음악이 될 수 있다면,
난 참으로 오래간만에 음악을 들은 것이다.
밥 딜런의 노래 듣고 싶어,
전속력으로 차를 몰아 42번 국도를 지나왔다.
지나오는 길에도 생은 내 갈비뼈 사이에서 푸른 잎들을 꺼내어
필사적으로 사랑을 흔든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눈물도 음악이 될 수 있다면,
난 참으로 오래간만에 음악을 들은 것이다.
2012년 3월 22일 목요일
한 생(生)의 통과
맹하린
그동안 결코 건드리고 싶지 않았던 세월의 켜였지만 이제 단풍으로 물들었던 시절을 살몃 들춰본다.
2007년 8월 말경에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8년 동안 중풍을 앓아내고 있었다.
아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 생화학과 졸업반인 5학년이었다.
약학과를 겸해서 공부하고 있었다.
8년 내내 남편의 식사는
이른 아침엔 내가 챙겨주고
이른 점심은 아들이 챙기고
이른 저녁은 다시 내가 챙겨 내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아들은 이른 점심을 챙겨 주고 서둘러 대학에 등교했다가 저녁때에야 돌아왔다.
어느 날, 이상하게 좌불안석이 되며 불안감까지 치밀더니 자꾸만 집에 다녀오고 싶어지고 있었다.
어쩔 수없이 가게의 유리문에 15분 후에 돌아온다는 안내문을 붙였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갔다.
아들은 이미 학교로 떠난 시간이었다.
대문을 열자마자 남편이 느낌표와 물음표까지 붙여가며 아들을 부르는 소리가 집안 가득 메아리치고 있었다. 거의 절규 수준이었다.
-다니야!!!!!!
-다니엘??????
나는 안방을 향해 마구 뛰었다.
그는 말이 좀 어둔했지만 듣거나 말하는 데엔 이렇다 할 지장이라고는 없었다.
아들이 작고 네모난 한국식 밥상을 침대 위의 그에게 올려주고 떠나면 밥을 다 먹고 난 남편이 그릇을 하나 씩 침대와 같은 높이의 교자상에 내려놓고 작고 네모난 밥상은 맨 나중에 원탁 옆의 바닥에 내려놓도록 이미 순서라거나 질서가 잡혀져 가고 있었다.
아들은 시험 때라, 바쁜 마음에 수저를 놓는 일을 잊었던 모양이다.
중풍이라는 병은 사람의 뇌를 참 단순하게 바꾼다.
아들이 학교에 간 사실은 알지만, 갔으니까 안 되겠다가 아니라, 부르면 그래도 와 줄 거라고 생각하는 구조 정도가 된다.
그 뒤론 원탁에 비상수저 하나 더 놔두어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진 않았다.
그럴 때는 마치 시간이 어긋나는 게 아니고 재편성되기도 한다는 느낌으로 남는다.
새삼 고맙다.
8년을 그렇게 산뜻하게 웃으며 잘 지나올 수 있었던 일.
남편은 침대를 딛고 일어나 벽마다 붙잡으며 화장실을 드나들었다.
없는 사람만 자존심이 센 게 아니고 아픈 사람도 자존심이 세다는 걸 남편은 매번 증명하며 살아 내고 있었다. 그래서 누가 붙잡아 주는 걸 원치 않았다. (대단했던 황소고집!)
어떤 날은 내가 방안에 있을 때 넘어지는 소리가 나서 달려가 보면 그는 뒤로 넘어져 있고 슬리퍼 한 짝은 변기 속에 들어가 있기도 했다.
그럴 때 넘치는 건 장난기 밖에 없는 나는 슛, 골인입니다를 중계방송의 아나운서처럼 외치며 탄복을 곁들였다.
-당신은 참 재주가 훌륭해요. 어떻게 넘어지는 순간, 변기라는 골대에 슬리퍼를 넣는 골인을 해낼 수가 있는지 바보 같은 내가 생각해도 참 대단, 대단하심!
그를 일으키며 그렇게 말하면 그는 자꾸만 풀풀 웃어댔었다.
운동부족으로 체중이 줄어든 상태였지만, 일어나려는 의지를 전혀 보여 줄 수없는 그는 천근처럼 무거웠다.
안방이 좀 넓어서, 의자의 쿳션을 떼어낸 모양의 바퀴가 넷이나 달린 지팡이를 사주며 날마다 가족이 없을 때 운동 삼아 왔다갔다 하라고 일러도 만사를 귀찮게 생각했었다.
죠깅운동장에 가서 휠체어를 밀고 다니면 운동이 좀 될텐데도 그것조차 짜증을 잘 냈다.
새벽부터 휠체어에 탄 그를 밀고 공원가는 건 내가 더 힘들었는데 말이다.
그렇게도 활동적이던 그였는데...
그가 성할 땐, 일 년 가야 감기 한 번 안 걸리는 건강의 표본이었다.
그는 말썽쟁이가 아닌 것처럼 말썽쟁이였다.
몇 번인가 이혼을 생각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만약에, 단점이 하나만 되었다면 그럴 수도 있었겠는데.
그런데 그에게는 단점이 댓 개쯤 되었다.
나이도 들었지, 가진 재산이라고는 우리가 극복할 수 있을만큼만 거두고 이민 올 때 자기 형제들에게 모두 다 나눠주고 왔지, 등등이었다.
나는 내 어렸을 때의 별명(맹꽁이)을 너무나 아껴 왔던 사람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혼하려고 내세우는 필요충분조건마다 내게는 결코 이혼하면 안 되는 필요불충분조건으로 뒤집어버리는 습성이 있었다.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잘 한 일을 꼽으라면 아마 이혼을 안 해낸 점이었을 것이다.
단점이 많은 사람을 내친다면 내 성격에 안 맞는 일을 저질렀다는 죄책감에 잠겨, 머잖아 괴로워 죽을 것 같은 심정이 될게 뻔 한 일이라서 더 그랬을 것이다.
화장실에 늦게 도착되어 생긴 여러 대청소 사건으로 인하여 내 지인들은 그를 요양원에 맡기라는 권유를 많이 했다.
나와 아들은 절대 반대였다.
환자일수록 가족과 함께 지내야 한다는 주의(主義)였으므로.
남편이 홀연히 떠나자 내 옷은 문제가 없었는데, 아들의 상복(喪服)이 문제였다.
회색과 베이지 색 양복은 하나 씩 있었지만 검정이 없었다.
시실 남편의 옷은 아들에게 너무 컸다.
당장 기성복을 사 입어야 한다고 해도 아들은 어디서 빌려달라고만 했다.
한두 번 입기 위해 필요 없는 지출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공교롭게도 아들의 친구들 거의 미국으로 떠났고, 서너 명 남은 친구들이라야 남편이 장지로 떠날 때, 검정 양복차림으로 운구를 도맡아야 했던 것이다.
급기야는 가게로 청소하러 오는 볼리비아인 그라시엘라가 일하러 왔다가, 그 장면을 조심스레 지켜봤고, 몇 달 전 결혼할 때 입었던 자기 신랑의 양복을 빌려주면 어떻겠는가고 나왔다.
나를 앞지르며 아들이 잽싸게 대답을 건넸다.
-에스 우나 부에나 이데아(좋은 착상이군요)!
나도 꼴통 축에 들지만, 아들은 나보다 한 수 더 뜨는 꼴통이라고 해야만 될 것 같은 상황이었다.
8년이 참 힘들기도 힘들었던 모양이다.
나는 언제나 웃으며 지냈는 데도 말이다.
요즘 성당이나 모임에 가면 사람들이 깜짝 놀란다.
나에게서 점점 예전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는 얘기다.
항상 장난기 많은 나는 그럴 때 꼭 한 마디 튕긴다.
" 나, 연애해요."
"어머나? 상대가 누군데?"
"하하. 예수 그리스도라는 상대죠."
남편의 1주기가 닥쳐오자, 나는 아들에게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양복을 꼭 사 입었으면 한다는 언질을 건넸었다.
웬일인지 시원시원 대답하더라니!
아들은 현지인 양복점에서 가장 값이 싼 양복을 100페소(당시엔 25달러.) 가격으로 사들고 와 나를 또 박장대소 하하하 손뼉 치며 웃게 만들었다.
구닥다리도 그런 구닥다리 양복은 첨 보았다.
그런데 내게 공주병이 있듯이 아들에게는 왕자병이 있었다.
(나는 이제라도 그 공주병을 왕비병으로 바꾸고 싶은데 참 그게 쉽지가 않다.)
-상관 없어요. 그 얼굴이 그 얼굴인데. 그리고 내 얼굴은 유행이 좀 지난 옷을 입어도 꽤나 봐 줄만 하지 않던가요?
나는 내 형편이 부자라는 자부심을 갖고 사는데, 아들은 우리 가족이 항상 절약 속에서 지내야 된다고 각오를 다져왔나 보았다.
아들을 그렇게 만 든 건 순전히 내 잘못이라는 자책감이 꽤 크다.
머리도 나처럼 자기가 자르고, 외식도 싫어하고, 가장(家長)이 중풍으로 자주 일을 저질렀을 때조차 자존심 안 상하게 하려고 , 수치스러워 죽을상을 하며 침대의 한편에 앉아서 가족이 도리어 달래 주기를 바라던 그에게 잘했다고, 괜찮다고, 어머니와 나는 아버지의 속이 얼마나 편해졌을까, 그렇게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고 있다고. 버릴 건 버릴 때 버려야 하는 거라고.
아픈 사람 성가셔 하면 얼마나 큰 죄인가.
아프다고 정떨어지면 가족이기나 한 건가.
울음도 뚝 자취를 감췄던 나날들.
나는 차라리 요즘에 더 잘 운다.
파란 했던 건 아니고 뜯어진 실밥 뜯듯이 단단한 껍질을 쪼아내던, 그야말로
한 생의 통과였다.
그렇지만 나는 8년이라는 세월을 낭비했었다는 관념 같은 건 없다.
고생스러웠다는 느낌도 없다.
강물처럼 넉넉했고 들판처럼 풍족했고 이별은 숭고했다고 본다.
나는 아침저녁으로 그에게 여군(女軍)처럼 경례(敬禮)를 바치며 충성을 외치던, 나이를 거꾸로 먹은 개구장이였다.
아름답고 찬란하다고 여기고 싶었던 나의 고달픔 사이를 비집고 긍정의 씨앗이 뿌려지던 날들.
꽃과 잎들을 나무들도 보낼 때가 되면 보낸다.
나는 현재 손끝 하나 걸릴 게 없다.
지나온 세월과 화해하고 새로운 세상과 악수한 상태의 나다.
특별한 날들이 아니라 일상(日常) 자체가 평화와 고요로 다독여질 그런 날들을 폭풍을 견뎌낸 나무처럼 살아내겠다.
홀연 깨달음이 다가오던 담담한 이해.
고통을 고통스럽지 않게 견딘다는 것은 견뎌야할 환호와 다름 아닌 것.
이윽고 그 무어라 표현할 수없는 겸허로운 감성들이 온 몸 가득 채워지고 있다.
오늘 아침 산책하면서 남편의 얼굴이 모든 나무마다 모든 잎사귀마다 어른거리고 있었다.
나는 요즘 말썽쟁이였던 남편이 그립다.
그렇게라도 살아 있을 때가 든든했다.
2012년 3월 21일 수요일
아르헨티나 엄마들은
맹하린
2008년 12월 8일
본국 잡지 <엄마는생각쟁이> 12월호
(웅진싱크빅)
아르헨티나에 살면서 가장 근사하게 여겨지는 건 아르헨티나인 들의 가족관계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엄마와 자녀들의 사이가 친구 이상으로 돈독하고 친밀하여 그점 매우 부럽게 생각 했던 걸 결코 부인하지 않겠고.
아르헨티나 엄마들은 특히 물건을 살 때나 고를 때 남편 아니면 자녀들을 대동하고 나타나 가족들의 고견을 듣기를 매우 중요한 일로 여긴다.
가구나 전자 제품이나 그릇을 고를 때도 색상이나 스타일. 특별히 집안을 장식한 기존의 분위기에 부합되는 색을 선택하면서 가족들의 도움을 즐겨 받는다.
또한 옷을 구입할 때조차 구두와 핸드백과 상하의의 매치에 신경을 있는 대로 쓰는데, 그럴 경우 역시 가족의 조언을 기꺼이 받는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 아르헨티나 여성들은 카드빚의 궁지에 결코 빠지지 않는다.
더불어 허영이나 사치와는 담을 쌓고 산다.
명품? 그런 걸 들고 다니거나 착용하고 다니는 걸 오히려 수치로 알고 정신 나간 미친 짓이라고까지 단정 짓기를 서슴지 않는다.
물론 상류층의 엄마들은 다를 확률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업이나 직장이 흔들리는 예는 거의 없다.
동양인이 아니라 그들이 돌다리도 두드리며 건너는 것이다.
만약 외부적인 영향을 받아 몰락을 맞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으나 그런 일조차 거의 드문 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사람이 장에 간다고 아무나 등에 지게를 지지도 않을뿐더러 아무나 어린 나이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지도 않고 아무나 영어공부에 열을 올리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다.
아르헨티나의 유수한 재벌들조차 아이들이 공부에 소질이 없다 싶으면 중학교만 마치게 하고 바로 사업의 기초 작업부터 배울 수 있게 그 길을 자연스레 열어준다는 얘기다.
여기서 잠깐 나와 절친한 관계인 현지인 제시카의 예를 들겠다.
그녀의 집은 엘리베이터가 갖춰진 정도의 대저택이지만 그녀는 나와 밖에서 만날 때조차 진을 줄기차게 입는다.
물론 잔치나 파티에 참석할 경우의 그녀는 화려한 치장을 맘껏 발휘하여 마치 딴 사람처럼 보일 때도 많지만, 집안에서의 그녀와 그녀의 남편과 아이들은 한결 같이 평소의 생활방식이 소탈 그 자체이다.
무릎이 헤진 청바지는 기본이고 단추가 한두 개 떨어져 나간 상의.
그런데도 그들의 생활태도는 당당하다 못해 의젓하기까지 하다.
마치 무릎이 헤진 바지 때문에, 또는 단추가 모자란 상의를 입어서 그토록 빛나고 용감한 것처럼.
아르헨티나 엄마들에겐, 의상은 물론이고 세상의 그 무엇도 참으로 중요하고 책임감 있는 자세로 요소요소 살아 있음을 자주 접한다.
단지 그들은 평상복과 파티복의 차이를 명확히 구분하는 데에 익숙해 있을 뿐 아니라, 수수한 차림의 평상복조차 색상의 배합을 소중히 여기고야 마는 도사들이라고 평가해야 마땅할 것이다.
좀 더 원대한 의미에서 살펴보자면 아르헨티나는 정치인들이 정치를 잘못 펼쳐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일으키고 몇 차례의 IMF를 치렀을지라도 아르헨티나의 국민들은 개인적으로 너나없이 침대 밑에 달러를 감춰둔 든든한 부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나라에 어려움이 닥치면 한국인들은 금붙이도 내놓으며 그렇게 나라를 위기에서 건질 때에, 아르헨티나인 들은 나라가 어려워지고 있다고 느껴지기 시작하면 꼭 사야할 것도 조심하며 당장 달러를 사들이기에 혈안이 되고는 한다.
달러를 지니는 길만이 유일한 해결책이고, 안도의 길이라고 나름대로의 위안을 삼으며.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들은 철저한 개인주의자들이기 때문에 이혼율이 꽤 많은 편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다행스럽게 여기는 건 그들은 이혼 후에도 자녀들을 서로 왕래 시키고 헤어진 부부조차 친구처럼 지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매우 놀랄만한 사실은 아르헨티나에는 고아원이 많지 않다.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 고아가 되었을 때는 친척 중의 그 누군가가 돌보며 키우기를 의무처럼 완수하기 마련이고, 18세부터는 독립하여 일하기 때문에 이렇다하게 문제가 될 소지가 매우 적다. 그런 연유로 크게 사회문제가 대두되지도 않는 편이다.
특별히 우려되는 일이라고 한다면 아르헨티나 뿐 아니라 남미는 현재 마약 문제가 심각한 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산지(콜롬비아와 볼리비아)가 인접해 있어서인지 우선 값이 저렴하고 구입이 손쉬운 탓에 멀쩡하던 청소년들조차 빠르게 맛을 터득하고 잠식되기에 이르렀다.
단언하지만 아르헨티나인 들은 마약쟁이도 거지도 청소부도 신사도를 지키기를 기본적으로 갖춘 셈이긴 하다.
오늘도 역시 많은 아르헨티나 엄마들이 남편이나 아이들에게 친구처럼 묻고 있을 것이다.
" 오늘 저녁 결혼식에 참석하려면 뭘 입을까? "
그러면 그들의 남편이나 아이들은 신이 나서 옷을 골라 줄 것이다.
아르헨티나 엄마들은 그렇게 가족과 친구처럼 다정하게 지내면서 오늘도 절약하는 일에 익숙한 채 충동구매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철저하고 알뜰한 가정을 살뜰하게 구축해 나가고 있다.
그런 환경에서 살아온 우리 아르헨티나의 교민 엄마들도 모르는 사이에 아르헨티나의 엄마들의 성격을 저절로 답습해 오지 않았을까?
-엄마는생각쟁이.
발행부수가 25만부라고 한다.
원고청탁 받고나서 원고료 몇백 달러 받았을 때, 기분 참 근사했었다.
2012년 3월 20일 화요일
쇠 소쿠리
맹하린의 생활단상
아르헨티나 조선일보
2001년 1월 31일
나는 아파트보다 주택을 좋아한다.
땅을 밟으며 사는 걸 즐겨서 그런 것 같다.
얼마 전 주택에서 주택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가게와 더 좀 가까운 곳을 원하다보니 그리 되었다.
이사하는 과정에서 이십여 년 동안 꾸리고 살아 온 짐덩이들을 얼마만큼 줄였는지에 대헤서는 굳이 생략하겠다.
많은 이들이 이 문제에 대해 누누이 다뤄 왔을 것이기에.
무소유 어쩌고 하면서들 말이다.
분명한 것은, 사람은 가끔씩 이사도 해봐야 되리라는 점이다.
정리될 것은 정리되고 과감히 버릴 것은 버려지는 계기(契機)를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아끼기는 했지만 잘 안 입던 옷들을 가난한 이들에게 보내며, 서양의 어느 유명 인물이 저절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한 가지 옷만을 고집하며 살아 왔다고 한다,
말할 것도 없이 최고급의 옷이었다.
상류사회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한 가지 옷만을 입는 그의 취향과 주관은 한층 돋보였을 뿐 아니라 아랫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으로까지 부각되었다.
모양이나 색상에 변함이라고는 없는 한 가지 옷만을 선호하면서 사치와는 담을 쌓고 생활해온 그에게는 주위의 칭송과 존경까지 금빛 망토처럼 걸쳐지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그는 죽고 나서 주위 사람들을 온통 당혹 속에 잠기게 만들었다.
그의 장롱 속엔 똑 같은 옷이 무수하게 걸려 있었던 것.
사람은 겉만 보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예화로 장식되어 남은 그.
중요한 것은 인간이 한 평생 살면서 꼭 필요한 것은 그다지 많은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사를 한 날, 그럭저럭 짐정리를 해내다가 전화를 받게 되었다.
하루 전에 이사를 떠났던 한국인 새댁이었다.
아래층 창고 앞에 쇠 소쿠리가 있는데 무거워서 못 버렸다고, 골칫덩어리를 놔두고 와서 너무 미안하다는 해명이었다.
나는 왠지 웃음이 터지려고 했지만 조용조용, 그리고 조심스레 웃었다.
다행히 새댁은 나더러 왜 웃는지를 묻지 않았고 나 역시 그걸 해명하지는 않았다.
새댁과 나 사이에 잠시 침묵이 오갔다.
나는 쇠 소쿠리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새댁은 쇠 소쿠리를 알기 때문에.
웃어서 안 될 이유 같은 건 없었다.
새댁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쇠 소쿠리가 내게는 신비롭고 감동적인 것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전화를 끊고 난 뒤 나는 서둘러 아래층의 창고 앞으로 다가갔다.
새댁이 말하던 창고 앞에는 녹슨 가마솥 하나가 비루먹은 짐승처럼 방치되어 있었다.
낡고 녹슬다 못해 그야말로 붉은 부스럼 딱지 투성이의 무쇠덩어리에 불과했다.
나는 전혀 무겁다는 생각도 없이 거의 가뿐하게 가마솥을 들고 이층으로 올라오게 되었다.
대략 30Kg 정도 되겠다 싶었는데 저울에 달아보니 25Kg이었다.
책들을 챙기던 아들과 안락의자에 앉아 티뷔를 보던 남편의 눈동자가 마치 그 무쇠 솥의 솥뚜껑만큼이나 동그랗고 커다래졌다.
웬만큼 쓸모가 있는 것들까지 많이 처분해 버린 이 마당에 어찌하여 괴물덩어리를 다시 끌어들였나 하는, 일단 깜깜해진 눈빛들이었다.
그나마 남편은 가마솥을 금방 알아보고 감탄을 아끼지 않았지만 아들은 달랐다.
-그래요. 예전에는 그렇게 대단한 쇠솥을 얹어 나무나 짚을 지피어 군불을 때고, 대가족의 밥을 해냈다는 정도는 알죠. 그런데 그 괴물을 이제 와서 어쩌시려고요? 더군다나 녹이 잔뜩 번져 마모(磨耗)의 지름길로 들어 선 것을. 쓸데없는 일을 시작하고 있다는 거 아시죠?
-기다려 줘. 서너 시간 후에나 제대로 된 말을 할 테니까.
부엌의 싱크대 서랍에서 쇠 수세미를 찾아다 신문지를 여러 겹 펴놓은 위에 가마솥을 앉히고 나는 물비누를 발라주며 연신 닦아내기 시작했다.
이미 들리고 맡아지고 보이고 있었다.
손 뻗을 때마다 묻어나던 녹이 점차 줄어들면서 잠결에 듣던
내 유년(幼年)의 솥뚜껑 여닫는 소리가
부뚜막 위에 얹힌 가마솥에서 퍼져 나오던 밥과 국과 여러 가지 음식 냄새가
볏짚이 활활 타오르던 모습이.
무쇠 솥을 닦는 나를 지켜보던 남편이 감회에 젖은 음성으로 말했다.
-조상의 슬기가 느껴지던 만능의 솥이었지. 물도 데워주고, 고구마도 쪄주고, 떡과 식혜와 엿까지 고아주던, 군불을 땔 때까지도 묵묵하게 참아내던 솥이었어.
우리 이민자의 뱃짐에 실려와 골동품처럼, 조국의 긍지처럼 다뤄지다가 어느 날 녹이 슬기 시작하자 창고 앞에 버려지게 된 가마솥 하나를 닦아내며 나는 참 많은 상념들이 밀려오고 밀려감을 내내 감지하고 있었다.
솥은 머잖아 어느 정도 말끔해졌고 콩기름을 발라주자 언제 그랬었냐는 듯 멀쩡하게 반지르르 생기까지 돌고 있었다.
모국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여 지구의 끝인 아르헨티나 땅까지 오게 된 나보다 더 일찍 도착 했을 나의 이민선배 가마솥.
나는 그를 앉은뱅이 원탁에 올려놓고 즐거이 바라보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아스라이 솥뚜껑 여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음식내음이 풍겨오고
짚단이 계속 타오르는 불길까지도 눈에 잡히고 있다.
'순간온수기'의 낡은 부속품 정도로나 여겼었는데 어떻게 가마솥을 알아 봤었느냐고 내 전화에 탄성을 지르던 새댁과, 지난 세월의 한 자락 같은 무쇠 솥 따위를 닦는 시간에 글 쓰는 일에나 정진하기를 바라는 아들에게서 심한 세대차이와 격세지감까지 동시에 껴안아야 했지만, 나는 벌써부터 격양가(擊壤歌)를 흥얼대게 된다.
더불어 새로 이사한 집이 더할나위 없이 마음에 들기 시작한다.
가마솥을 지그시 바라보는 순간, 마음 가득 비눗방울인지 물수제비인지가 통통통 뜬다.
가마솥 안에 낡고 묵은 기억들을 모두 앉히고 이제는 흔쾌한 불길만을 지피리라.
내가 평소 가장 고민하는 문제는 현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
바로 문학이 문제다.
다른 문제는 문제도 아닌 문제일 따름인 것이다.
하필이면 이때, 냄비를 두들기는 이들의 소요(騷擾)가 한길을 떠들썩하게 북적이며 휩쓸려 지나가고 있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고달프고 억울한 마음을 어디다 풀 길 없어 틈만 나면 냄비뚜껑을 두들기며 시위를 할지라도 각성하고 잘 살아보자는 뜻으로 알고 고맙고 진지하게 살아 내리라 결심을 다지고 다지게 된다.
나는 아직도 예전 그대로다.
세월이 비켜 간 건 아니고 여일(如一)한 신념을 잃지 않았다는 의미다.
이 가슴 저리는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도 사람들은 저토록 바쁘다.
중국 속담이 교훈되어 맘에 뿌리를 내리는 아침나절이다.
인생이라는 커다란 가게에 들어가서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가져가라
다만 대가를 지불할 준비를 해라.
2012년 3월 19일 월요일
강의 범람(氾濫) 후에
맹하린
나는 2년 전부터 어떤 인터넷 게시판에 내가 살아 온 이야기와 살아가는 얘기를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올려야겠다는 맘 같은 걸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겐 가끔 악플러가 따른다는 문제가 홀연히 돌출 되었다.
내게는 악플러를 가장(假裝)한 선플러가 여럿이나 존재했다.
언제라도 양날의 칼로 돌출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내가 관심이라는 덧문을 삐걱 열었을 때, 특히 더 그랬었다.
그리하여 고심 끝에 내 의지를 휘발(揮發) 시키고 오로지 블로그에만 글을 올리게 되었다.
그럴 때 나의 뇌리에는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상념 같은 게 들끓고는 했다.
'이집트의 나일 강은 참으로 강한 특징을 지녔다고 한다.
아프리카 오지(奧地)로부터 발원(發源)하여 사막 밑을 꿰뚫고 흘러드는 그 강은 우기(雨期)가 시작되면서 엄청난 양의 물이 휘몰려 강 하류가 삽시간에 범람하는 것이다.
이집트인들은 그럴 때마다 뼈저린 고통과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대홍수는 어마어마한 양의 물과 함께 강 상류에서 양질의 흙을 쓸어왔다.
홍수가 휩쓸고 지나간 지역은 오히려 농사에 적합한 비료를 확보하는 이변이 일어나는 것이다.'
나는 꼭 인생의 홍수를 겪고 나서야 글이 잘 써진다.
혼란을 회피하고 고통스럽게 받아들이기보다는 모조리 포용하는 방법을 선호한 뒤의 일이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햇빛은 변함없이 찬란하고.
그런 것들과 함께 홍수의 범람은 내 실존(實存)에 대해 진정한 가치까지 부여(附與)한다.
'인연은 자신의 때를 알고 있다'는 격언은 그래서 더 타당성이 느껴진다.
이번 가을이 연상시키는 게 뭔가를 추인해 보면
바로 작년 가을이라는 사실에 생각이 닿는다.
사실 그렇다.
나는 항상 자신의 격(格)이나 머물러야 할 적재적소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것만 같아 한편으로는 든든하다.
밉거나 곱거나 많은 관심 속에 지냈으니 이젠 글로 열매 맺으며 살아가겠다는 결심 같은 게 자주 싹을 틔운다.
분명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글쓰는 순간이 내게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는 사실이다.
내게 글쓰는 일은 내가 평생동안 입어 낼 옷을 걸친, 내 몸에 꼭 맞고 내 맘에 쏙 드는, 따사로움과 산뜻함을 동반한다.
관심을 주고 받는 일.
이상하게 고즈넉하지만, 잦은 매캐함이기도 하다.
바람에 맞서서 대항하는 듯한 발걸음으로 여전히 힘차게 걷고 싶다.
절제 있으나 따뜻한 관심에 약한 나.
나는 절도 있는 말을 잘하는 편인 반면, 정감어린 표현 역시 거의 마음에 감추지를 못해 왔다.
내가 알아채기 전에 상대에게 먼저 들통 난다.
그럴 때 나는 질문을 잘못 알아들은 사람처럼 불쑥 엉뚱한 대답을 꺼내서 상대를 난처하게 만들기도 해왔다.
홍수처럼 고통이 휩쓸고 지나간다고 해도 나 여러 혼란을 감수하며 글 농사에 적합한 비료를 많이 확보했음을 가장 감사하고 감격하리.
감격이라는 것에는 뭔가 연약하면서도 순수한 게 적절하게 섞여 있다.
뭔가 마음 가득 사무치는 그런 것.
공명하듯 울리는 그 무엇.
나는 가게에 누구라도 찾아와서 어떤 고민이라거나 하소연이나 원망 등을 털어 놓는 사람이 있으면 그들의 얘기 다 맞다면서 수더분하고 진지한 가운데 고요로이 들어줘 왔다.
절대로 정확한 지적이나 충언을 삼가하면서.
오죽했으면 가진 거라고는 쥐뿔도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 비밀에 가까운 속마음을 털어 놓고 싶었겠는가 하는 안타까움에서 더 그런다.
그리고 그렇게 들어 주는 것도 일종의 희생이고,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는 한 방편이라고 여기므로 더 그래 왔다.
나도 누군가에게 내 고뇌를 보일 때가 간혹 있다.
그냥 누구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내게는 아픔이었던 것을.
그런데 세상은 내 맘과 같지가 않다는 걸 얼마잖아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이외수의 <외뿔>중 이런 말이 통증되어 감겨 드는 아침이다.
'진정한 사랑은
오로지 아름다움이라는 미끼 하나만으로 충분하다.
모든 생명체는 절대로
아름답지 않은 대상에게서
사랑을 느끼지 않는다.'
2012년 3월 17일 토요일
Indian Wells 컵을 보며
맹하린
나는 퇴근시간을 7시 반에서 8시 사이에 실행한다.
하지만 뒤늦게 도착한 고객이나 장례화환을 매우 빠듯한 시간에 주문 받았을 경우엔 퇴근시간이 9시가 될 때도 많다.
어제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치러지는 Indian Wells컵 쟁탈전에서 스위스출신의 나달과 아르헨티나출신의 날반디안이 경합하는 생중계를 지켜보느라 8시가 다 되어서야 퇴근하게 됐다.
시합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가장 흥미로웠던 일은 날반디안이 상의(上衣)의 어깨부분을 틈날 때마다 떼어내고는 했는데 아마 웃옷이 땀에 젖어 그러나 보았다.
그런데 나달은 한술 더 뜨며 하의(下衣)를, 그것도 엉덩이부분을 떼어내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나는 그 장면들을 그동안 여러 차례 놓치지 않고 보아 냈으면서도 처음 보는 것처럼 자꾸만 웃어대고 말았다.
나달은 시합에 임할 경우, 보통 때는 덜한데 일단 시합이 안 풀린다 싶거나 컨디션이 엉망으로 얽히고 설킨다 여겨지면 신경질적으로 연신 하의(下衣)를 떼어내는 행동을 경기의 일종이나 되는 것처럼 반복해 왔다.
몇 년 전 본국에 귀국했을 때, 고교동창 중의 몇 명과 약속이 정해져 철판구이 집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냥 철판구이집이 아니고 요리사가 재주를 보이며 서빙 하는 레스토랑이었다.
변호사를 남편으로 두고 있던 K가 초장부터 뉴스에서 본 아르헨티나 얘기를 끄집어 냈다.
공원에 거지가 많더라는 지적이 가장 신랄하면서도 중점적인 소재였다.
-아, 그거? 아르헨티나 같은 나라도 있는데 우리 국민은 대체 무엇이 불만이라는 얘긴가! 대강 그런 의도? 그 나라는 국민이 부자인 나라야. 한국의 정국이 그런 식으로 시선 돌리기를 시도한 거라고 보면 될 테고.
서울대 음대 출신의 K는 더 이상 끈질기게 늘어지지 않았고, 말문까지 막히는지 금세 화제를 다른 방향으로 바꿨다.
본국 정부나 본국 국민이나 본국 친지들은 외국에 나와서 뿌리를 뻗거나 가지를 뻗고 열매까지 맺으려고 불철주야 노력하는 교민들 알기를 옷에 묻은 먼지 정도로나 여기는 경지를 그동안 너무나 많이 보여줘 왔다.
아르헨티나.
본국 국민들이 얕볼 정도로 그렇게 만만한 나라는 아니다.
먹을 게 없어서 빵만 먹고 사는 사람도 없고, 거지들도 마약에 절어 폐인처럼 지낼지언정 죽도록 고생하지는 않는다.
페론주의가 포퓰리즘의 대명사처럼 부각되어 오던 아르헨티나의 왜곡된 역사는 여러 번의 정권이양으로 많이 회석된 느낌이지만 아직껏 잔존해 있고, 그 흔적이 구석구석 남아 있다.
연금제도, 상여금, 휴가, 무료병원혜택등의 사회보장제도는 곧 페론의 업적이 지대했었고, 수십 년에 이를수록 점차 개성 강한 튼실함을 구축해왔다고 대부분의 국민들은 자부한다.
국경마다 개방되어 있는 아르헨티나는 이웃나라의 가난한 자들이 일자리의 창출을 위해 쉼 없이 찾아오는 나라다.
그런 식으로 찾아드는 인접국 이민자의 수가 거의 1천 3백만을 훨씬 능가하는 실정이라고 한다.
약간의 인종차별이 없다고는 단정하지 못하나 크게 두드러지는 치부가 안 보이는, 그야말로 민심이 살아 숨쉬는 나라다.
사회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자본주의 사상을 지녔던 페론은, 소득의 재분배에 불철주야 심혈을 기울였었고, 일부 선택된 국민에게만 한정된 혜택이 아니라 대다수의 서민들에게 부(富)를 돌리려는 정치에 충실과 기여가 컸던, 역사에 영원히 남을 인물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일부 지식인들은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페론의 황금기와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아르헨티나는 영원히 재기불능이고 침체의 늪에서 결코 헤어나지 못하리라고 가혹한 논평을 서슴없이 펼쳐왔다.
분명한 아이러니는 국민의 만족도와 획기적인 성과를 이룩했다거나 산업과 문화가 왕성했던 시절은 페론이 집권을 장악했던 시기였다고 보는 국민들의 평가도 전혀 무시할 수는 없는 탁월한 진단이라는 데에 있다.
세계 4대 부국이라는 명성과 태평성대를 누린 시절까지 세계 2차 대전 당시에는 존재했던, 무한한 저력의 나라가 바로 아르헨티나다.
무얼 해도 밥은 먹고 사는 나라다.
카드빚에 시달리는 사람도 극히 드문 데다, 아르헨티나는 하던 일에 망한 사람도 밥이나 빵은 먹고 살게 되어 있는 나라라는 얘기다.
또한 개개인의 특성과 능력에 따라 얼마만큼의 저축을 해낼 수 있느냐 하는 가능성도 무제한 열려 있는 나라인 것이다.
우루과이의 별장지대 주인들은 아리헨티노들이 대부분이다.
날반디안과 나달의 시합을 지켜보면서 아르헨티노의 국민성을 날반디안에게서 발견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곤경스럽고 코너에 몰리는 한이 있어도 어깨에 달라붙는 티셔츠 가끔 떼어 내는 정도로 느긋한 민족인 것이다.
날반디안은 머리는 비상한데 연습량이 부족한 편이고 승리를 쟁취하려는 도전성이 매우 취약한 선수와 같다는 단정도 생긴다.
나달은 온 몸과 온 정신을 다 바쳐 뛰면서 절대로 포기를 모르는 듯 보여 그점 진지함으로 지켜보게 된다. 엉치 부분의 속옷을 거듭 떼어 내면서 말이다.
페데르는 발레하 듯 사뿐거리며 뛰어 다니고 , 델뽀뜨로는 키가 2미터에 가깝고 순발력이 월등하며 의지력이 강한 선수로 보여진다.
마약이나 범죄, 불법취업 등의 많은 문제점이 산재해 있다 해도 많은 세월 동안, 아르헨티나의 정부당국이나 국민은 우선 이웃나라와 동양계의 이민자들에게 관대함이 엿보이는 느긋하고 개방된 포용정책을 펼쳐왔다.
오늘은 세계랭킹 2위인 나달과 3위인 페데르의 시합이 예고되고 있다.
아르헨티나를 새롭게 기억하며 여전히 웃음을 잊지않고 관전하리라 결심하게 된다.
2012년 3월 16일 금요일
뻬리또 모레노 빙하
맹하린
깔라화떼에서 레돈다 호수를 끼고 많은 새들과 희귀식물들
이정표를 제시하는 순간 뻬리또 모레노 빙하는 페이드 인으
로 나타난다. 6Km에 이르는 정면의 높이와 해면에서 80m에
이르는 얼음이 산으로 된 그 빙하는 정적인 외관과는 상관없
이 거대하고 튼실한 심장 홀로 차지한 관록으로 의젓하고 고
른 숨쉬기 멈춤 없이 내쉰다. 모브씬처럼 달려드는 느낌인
장엄하면서도 장관인 굉음과 얼음파도 벗어나 호수로 떨어진
유빙들은 하얗거나 사파이어 색으로 돌출되어 여러 톤의 찬란
한 빛을 발휘하느라 밤잠 부지기수로 설친다. 호수로 흘러들기
전까지만 보석의 왕좌를 누리고 그 뒤엔 물로 변하는 계시를
신탁으로 받았기에 그 역할 혼신을 다해 연기하느라 녹초가
녹아 물이 되었다. 태양과 바람 그리고 중력의 작용이 얼음
산의 자태를 변화무쌍하게 연출해 내는 감독이자 제작자다.
축소판으로 각색한 웁살라 빙하 역시 너테 하나 없이 순수하
여 감상 쨍하게 열리는 순간 빙하라는 별로 떠나는 우주선에
이르도록 유도한다. 지금까지의 전망에 최면이 걸리듯 문득
눈앞의 얼음산이 아웃 포커스로 흐려지면 어디에서 왔으며 어
디로 갈 것인지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별나라에 도달한다.
그때 비로소 현란한 스포트라이트 부감되는 뻬리또 모레노 빙
하. 감정이입 차단하는 절제의 벽. 신이 인간에게 내린 절벽의
극치, 냉정함의 표본. 적당히 얼고 적절히 녹으라는 메시지.
보석이 물도 되지만 물이 보석도 된다는 신의 수식어(修飾語).
2012년 3월 15일 목요일
힐링캠프
맹하린
어제는 화이트 데이였다.
새벽 4시에 일어나 꽃시장에 다녀 온 걸 분기점으로 해서 저녁 8시에 퇴근할 때까지 내내 바빴던 셈이다.
무슨 전시회도 있었기 때문에 줄기차게 일했다.
그러는 틈틈이 휴식을 위해 내가 자주 드나드는 사이트에 몇 번 드나들기도 했다.
일을 많이 해야 하는 날은 일부러 군것질도 자주 한다.
에너지 보호 차원에서 이것저것 사서 마시고 먹는다.
당근쥬스도 주문해서 마시고. 중국마켓에서 오후 5시 반쯤 직접 구워 나오는 따끈따끈한 바게트 빵도 시간 맞춰 구입한다.
버터를 바르거나 그냥 뜯어 먹기에 안성맞춤이다.
힐링캠프라는 프로를 계속 틀어 놓고 일하기도 했고, 날반디안 나오는 테니스 대회 중계도 틀어 놓았었다.
이경규와 김제동, 한혜진이 엮는 힐링캠프는 흡사 인생무대와 비교 될 때가 있다.
항상 흥미를 끄는 경향은 아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상황을 앞에 하고 어떤 감성으로 살아 왔는가가 관심과 초점의 강도(强度)를 결정한다.
이번처럼 차인표와 같은 인물이 프로 자체를 압도한다고 여겨질 정도가 되면 일부러 틈을 내어 두세 번까지도 보게 된다.
그라사(기름) 중의 그라사.
만떼까(버터) 중의 만떼까였던 차인표.
그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고생을 겪었고 어떤 변화를 지향해왔고 어떤 근사한 말을 펼치는지를 제대로 바라볼 수가 있게 된다.
그는 편협과 타협하지도 않았고, 포퓰리즘에 영합한 일은 더욱 없었으며 오로지 원칙만을 고수해온 헹적이 선한 쪽으로 부각되어 보였는가 하면 너무도 당당힌 주관까지 간직하고 있었다.
힐링캠프를 항상 보는 건 아니다
게스트에 따라서 보는데, 어떤 게스트는 유명 찬란하지만 결국 좋은 본보기를 표방하지 못하기 때문에 중간에 꺼버릴 때도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김제동.
이경규 이상으로 좌중을 주도할 수도 있는 인물인데도 계속 양념 역할을 잘 이행하고 있어 그점 역시 보기에 풋풋하고 신뢰감까지 생겨나고 배울 점이라는 인식이 볼때마다 새롭다.
힐링캠프나 승승장구와 같은 프로들이 있어 나는 사는 게 전혀 팍팍하지가 않다.
드라마는 거의 끝을 못 마친다.
질질 끌고 있다는 기미가 엿보이면 가차 없이 그만 두기 때문이다.
드라마 중에서도 역사극은 특히 기피한다.
정해진 운명처럼 누군가를 끌어 내리고 매도하고 죽음으로 몰아가려는 세도가들이 싫어서다.
하지만 처음부터 포기하려던 작정을 겨우 극복하고 요즘은 '해품달'을 5편째 보고 있다.
시기나 모함은 여전한 작태로 비춰지지만.
퇴근시간의 거리는 바람이 위위 불어댔다.
의외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저녁이 밝음의 휘장을 닫으려 하고 있었다.
J교회 앞의 산책로를 지나는 어떤 순간, 나는 너무 지쳐 있어 마치 술 취한 것처럼 걸음이 비틀거리고 있음을 감지하게 되었다.
안녕슈퍼 주위에서 푸르른 빛이 서광처럼 반짝이며 내 주위를 휘도는 느낌 같은 게 번져왔다.
때로 마음 아프게 전해지던 빛줄기였다.
힘내라는 메시지를 보내오는 듯도 여겨져 느닷없이 진실해지며 감성 또한 샘솟게 되던 서광이었을 것이다.
정신이 인간을 어떻게 이끌어 가는지 참 오묘하다는 생각을 하며 뛰었다.
새롭게 힘을 얻어 낸 사뿐한 뜀박질이었을 것이다.
나는 자주 뛴다.
기뻐서도 뛰고
바빠서도 뛰고
슬퍼서도 뛴다.
오늘도 열심을 다해 바쁘거나 한가함을 만끽하며 하루라는 강을 되도록 곱다랗게 흐르려고 한다.
차인표의 힐링캠프를 권유한다.
누구라도 나처럼 깔깔 웃고
누구라도 나처럼 눈물 글썽대기도 했으면 고맙겠다.
적자생존과 경쟁시대 등의 곤경에서 벗어나 , 늦었다고 자탄하지 말고 우리 모두 지금부터라도 새삼 아름다운 생으로의 전환을 맞이했으면 좋겠다.
'사회소통'을 역설하는 사람들이 당연히 고수해야할 역기능 지수는 결국 이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려는 모티브에서 출발한다고 본다.
힐링캠프의 차인표에게서 그 따뜻함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또는 우리는 때로 한 번도 직접 만난 일이 없는 이에게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경이를 느껴오지 않았던가.
그 따사로움과 포옹해 본 일이 없이는 누군가를 아낀다는 말조차 지난한 일이 될 것이다.
낯설다고 말하기엔 우리는 너무 오래 세상의 공기와 함께 공존해 왔을 것이다.
1부
1부
2부
2부
어제는 화이트 데이였다.
새벽 4시에 일어나 꽃시장에 다녀 온 걸 분기점으로 해서 저녁 8시에 퇴근할 때까지 내내 바빴던 셈이다.
무슨 전시회도 있었기 때문에 줄기차게 일했다.
그러는 틈틈이 휴식을 위해 내가 자주 드나드는 사이트에 몇 번 드나들기도 했다.
일을 많이 해야 하는 날은 일부러 군것질도 자주 한다.
에너지 보호 차원에서 이것저것 사서 마시고 먹는다.
당근쥬스도 주문해서 마시고. 중국마켓에서 오후 5시 반쯤 직접 구워 나오는 따끈따끈한 바게트 빵도 시간 맞춰 구입한다.
버터를 바르거나 그냥 뜯어 먹기에 안성맞춤이다.
힐링캠프라는 프로를 계속 틀어 놓고 일하기도 했고, 날반디안 나오는 테니스 대회 중계도 틀어 놓았었다.
이경규와 김제동, 한혜진이 엮는 힐링캠프는 흡사 인생무대와 비교 될 때가 있다.
항상 흥미를 끄는 경향은 아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상황을 앞에 하고 어떤 감성으로 살아 왔는가가 관심과 초점의 강도(强度)를 결정한다.
이번처럼 차인표와 같은 인물이 프로 자체를 압도한다고 여겨질 정도가 되면 일부러 틈을 내어 두세 번까지도 보게 된다.
그라사(기름) 중의 그라사.
만떼까(버터) 중의 만떼까였던 차인표.
그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고생을 겪었고 어떤 변화를 지향해왔고 어떤 근사한 말을 펼치는지를 제대로 바라볼 수가 있게 된다.
그는 편협과 타협하지도 않았고, 포퓰리즘에 영합한 일은 더욱 없었으며 오로지 원칙만을 고수해온 헹적이 선한 쪽으로 부각되어 보였는가 하면 너무도 당당힌 주관까지 간직하고 있었다.
힐링캠프를 항상 보는 건 아니다
게스트에 따라서 보는데, 어떤 게스트는 유명 찬란하지만 결국 좋은 본보기를 표방하지 못하기 때문에 중간에 꺼버릴 때도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김제동.
이경규 이상으로 좌중을 주도할 수도 있는 인물인데도 계속 양념 역할을 잘 이행하고 있어 그점 역시 보기에 풋풋하고 신뢰감까지 생겨나고 배울 점이라는 인식이 볼때마다 새롭다.
힐링캠프나 승승장구와 같은 프로들이 있어 나는 사는 게 전혀 팍팍하지가 않다.
드라마는 거의 끝을 못 마친다.
질질 끌고 있다는 기미가 엿보이면 가차 없이 그만 두기 때문이다.
드라마 중에서도 역사극은 특히 기피한다.
정해진 운명처럼 누군가를 끌어 내리고 매도하고 죽음으로 몰아가려는 세도가들이 싫어서다.
하지만 처음부터 포기하려던 작정을 겨우 극복하고 요즘은 '해품달'을 5편째 보고 있다.
시기나 모함은 여전한 작태로 비춰지지만.
퇴근시간의 거리는 바람이 위위 불어댔다.
의외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저녁이 밝음의 휘장을 닫으려 하고 있었다.
J교회 앞의 산책로를 지나는 어떤 순간, 나는 너무 지쳐 있어 마치 술 취한 것처럼 걸음이 비틀거리고 있음을 감지하게 되었다.
안녕슈퍼 주위에서 푸르른 빛이 서광처럼 반짝이며 내 주위를 휘도는 느낌 같은 게 번져왔다.
때로 마음 아프게 전해지던 빛줄기였다.
힘내라는 메시지를 보내오는 듯도 여겨져 느닷없이 진실해지며 감성 또한 샘솟게 되던 서광이었을 것이다.
정신이 인간을 어떻게 이끌어 가는지 참 오묘하다는 생각을 하며 뛰었다.
새롭게 힘을 얻어 낸 사뿐한 뜀박질이었을 것이다.
나는 자주 뛴다.
기뻐서도 뛰고
바빠서도 뛰고
슬퍼서도 뛴다.
오늘도 열심을 다해 바쁘거나 한가함을 만끽하며 하루라는 강을 되도록 곱다랗게 흐르려고 한다.
차인표의 힐링캠프를 권유한다.
누구라도 나처럼 깔깔 웃고
누구라도 나처럼 눈물 글썽대기도 했으면 고맙겠다.
적자생존과 경쟁시대 등의 곤경에서 벗어나 , 늦었다고 자탄하지 말고 우리 모두 지금부터라도 새삼 아름다운 생으로의 전환을 맞이했으면 좋겠다.
'사회소통'을 역설하는 사람들이 당연히 고수해야할 역기능 지수는 결국 이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려는 모티브에서 출발한다고 본다.
힐링캠프의 차인표에게서 그 따뜻함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또는 우리는 때로 한 번도 직접 만난 일이 없는 이에게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경이를 느껴오지 않았던가.
그 따사로움과 포옹해 본 일이 없이는 누군가를 아낀다는 말조차 지난한 일이 될 것이다.
낯설다고 말하기엔 우리는 너무 오래 세상의 공기와 함께 공존해 왔을 것이다.
1부
1부
2부
2부
2012년 3월 13일 화요일
하까란다*
맹하린
보름도 부족하여 스무 날이나 치러진다
봄의 여신이 맞는 '꿈플레 아뇨'*
때때로 어리광 섞어 게으르다가도
토라질 양이면 냉정하다 못해 혹한으로까지 치닫는
변덕 심한 계절의 늦은 행장(行裝) 가차 없이 재촉하며
우아한 옷차림 도도하고 표표하게 떨쳐입고
사박사박 둘러보는 여신의 늡늡한 행차
은빛 라 플라따(La plata) 강에서 휘몰아오는 바람비와
로스 안데스(los andes) 산맥의 서늘한 정기(精氣)를
천둥과 우박의 잿물에 밭이고 우려내 누이도다
하여 빛바랜 회색이 아니라
희고 흰 결백에 버금가는 보랏빛 능선
야울 야울한 열정 넌지시 안배하는 태양의 밀어와
갈채 아끼지 않는 바람의 가량가량한 환성
축배의 술잔 높다랗게 들고 활짝 어니 웃는
초록 잎새들의 웃음보 함께 어우러져
기쁨의 팡파르 쟁쟁하고 탕탕하다
휄리시다데스!*
휄리시다데스!
보름도 부족하여 스무 날이나
짙푸른 여신의 옷자락 물결처럼 꿈틀댄다
..............................................
*하까란다(Jacaranda): 열대 아메리카산의 능소화과에 속하는 홍목. 영어명: 자카란다스
*꿈플레아뇨: 생일
*휄리시다데스: 축하합니다



2012년 3월 12일 월요일
비 오시는 아침에
맹하린
여름이 어느덧 자리를 걷고 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기운이 저절로 느껴집니다.
여름마다 글을 참 많이도 써냈는데 올해 또한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지나온 숲을 돌아보니 이미 떠나온 먼 도시처럼 아늑하게 느껴집니다.
아늑함은 내게 언제나 양식과 같은 힘이 되어 줍니다.
사람에게서 전해져 오는 사람이라는 온기를 소통으로 접해왔던 것입니다.
어제는 성당에 갔습니다.
10시 미사였습니다.
편의점 강여인이 일요일엔 가게를 못 비우므로 나는 주보와 성당에서 간식으로 내어 주는 빵이나 떡을 꼭 두 개씩 타옵니다.
따로 봉투 같은 게 없어서 그냥 성가책 위에 얹어서 들고 옵니다.
커피나 녹차도 있지만, 그것까지 마실만한 시간은 내게도 부족합니다.
성당의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데 열 두 살쯤의 소년이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었습니다.
성가집 위의 메디아 루나(크루아상 빵)두 개를 불쑥 내밀 듯 보여주며 물었습니다.
"끼에레 꼬멜(먹을래요)?"
덥석.
아, 덥석이라는 말은 이럴 경우 가장 적절하게 사용하는 거구나 싶게 덥석 손아귀로 움켜잡으며 그라시아스(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소년은 잰 걸음으로 기적의 성당 쪽으로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새벽에 써 내야 할 글 소재를 찾던 어젯밤.
나는 거실에 엎뎌 마구 쿡쿡대며 웃었습니다.
대부분의 내가 보낸 편지는 모두 노트에 옮겨 적은 뒤, 기회 닿는 대로 꺼내보고 그럽니다.
그런데 그 편지들이 손에 잡힘과 동시에 눈에 띄었는데, 그게 그리도 유치찬란하더란 말입니다. 충동적인 단호함으로 많이 없애고, 겨우 남아 있는 편지들입니다.
(왜 그랬지? 마음하고 놀고 싶었나? 뭐에 미치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는 법.)
언제나 단정함을 선호하던 내게 이런 면도 있었구나, 내 안에 나 아닌 누가 따로 살고 있었다는 얘기인가, 하는 의문을 절실하게 되묻고 깨우치게 되던 밤.
어디로 숨고 싶던 밤.
그런데도 계속 웃게 되던 밤.
내가 사람들을 심하게 웃겨 줬던 날들이 있어서 고맙던 밤.
그리도 유치만발했던 나를 잘 참아준 사람들에게 감사롭던 밤.
지금의 나는 지난 날 내가 저지른 불찰들의 총집합체입니다.
그때의 에너지에서 파생된 치밀함이겠고요.
내가 저지른 모든 부끄러움을 그 어떤 이름으로도 합리화 시키지는 않겠습니다.
특별히 곱다랗게 간직하겠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빚어낼까를 고민해 보려고 합니다.
그처럼 부끄럽던 날들이 있었기에 나는 지금 귀의(歸依)하여 살아야겠다고 새삼스러이 작정을 굳혔는지도 모릅니다.
나의 항복은 언제나 지나칠 정도로 너무 빠르지만, 새삼 깨닫게 됩니다.
기억은 생(生)을 관조하는 아름다운 통찰이라는 것.
종달새는 그 둥지에 머무는 동안은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둥지를 떠나 창공을 향해 날개를 펼침과 동시에 참따랗게 노래가 시작된다죠.
높이 나를수록 종달새의 노랫소리는 더욱 활기에 차고 감미롭게 된다는 겁니다.
높이 날던 새가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하면 그 경쾌하던 소리는 차츰 작고 작아지게 되어 새가 대지로 내려오는 중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레 터득하게 되는 겁니다.
둥지로 돌아오면 의연히 노래를 중단하는 종달새.
우리 역시 생각이나 관심이 둥지에 머물게 되면 노래를 멎게 됩니다.
우리가 잡다한 온갖 문제들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드높은 창공에서 부를 노래는 진리처럼 줄어드는 게 아닌가 싶어집니다.
정의(正義)와 공의(公義)를 드높이 받들어야 하는, 세상 살아가는 이치가 이미 정해진 것처럼 그렇다면 땅에서는 노래를 자제하고 자주 창공을 나를 수 있어야겠습니다.
주관을 감추듯 아끼면서 큰물에 부화뇌동(附和雷同) 휩쓸리지 않으며 독특하고 개성 있는 삶을 꾸리고 싶습니다.
3월 초의 모임에서 말라깽이 L고문이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몇 년 전에 본국에서 파견 나온 분을 우연히 만났다고 했습니다.
그분은 아주 신이 나 있었더랍니다.
아르헨티나에 팔아먹을 기차 부속품이 너무 많아서 나 있는 신명이었다고 했습니다.
그 얼마 후에 다시 그분을 뵙게 되었는데, 예상 외로 의기소침해 보이더라는 거였습니다.
그래, 주문은 많이 받았습니까. 하고 묻자, 하나도 못 팔았다는 대답이었다고 합니다.
-왜요? 이 나라의 기차부속은 모두 몇 십 년이나 낙후된 것들일 텐데요, 하고 반문하자 그 직원이 그랬다고 합니다.
-기차회사의 높은 사람마다, 자기들 가족들은 기차를 이용하지 않으니까 크게 상관없는 일이라고 표명하길래 그만 지쳤습니다.
충동구매를 배제하고, 몇 십년된 자동차도 고쳐서 끌고 다니는 국민이 대부분인지라 일종의 핑계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런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많이 투명해졌지만 너무도 느슨해서 우리 이민자들이 그나마 숨도 쉬고, 딴 주머니까지 끼고 살 수 있는 나라가 바로 이 나라인 것입니다.
앞에서는 강하지만 뒤로는 허술하기 이를 데 없는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부족해하는 마음.
종교적 삶의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과 분명 같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는 공통분모의 느낌이 듭니다.
상생(相生)과 조화가 절묘하게 선의(善意)로 이루어진다면 혼돈의 세상은 더 좀 제 자리를 찾지 않을까 그리 사료되기도 하는군요.
고독을 기꺼이 영접하려고 담담하게 맘먹는 아침입니다.
비가 내리지만 환한 오늘입니다.
2012년 3월 11일 일요일
이구아수 폭포
맹하린
옛날에 옛날에요, 이구아수 강에는 거대한 몸집을 지닌 뱀의 신 보이가 살았습니다. 인디언들은 해마다 미모의 아가씨를 산채로 강물에 빠뜨리는 의식을 치루며 제물을 바쳤어요. 인디언들은 그 의식을 치를 때마다 과라니 족들을 초대했다고 해요. 과라니 종족 중에 따로바라는 추장이 있었어요. 따로바는 그 해에 바치게 될 나이삐와 함께 카누우를 타고 멀리 도망갈 계획을 세웠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뱀의 신 보이가 크게 분노하여 이구아수 강을 힘껏 뒤 엎어 버렸어요. 거대한 등을 꿈틀대며 강 전체를 분기충천(憤氣衝天) 파헤친 것이지요. 이구아수 폭포는 그렇게 생겼다고 해요,. 뱀의 신 보이는 지금도 폭포가 떨어지는 안쪽의 동굴 안에 살고 있답니다. 아무리 그렇단 들 이구아수 폭포 중에서 악마의 목구멍은 단연 장관이죠. 보이에게 붙잡힌 따로바는 폭포가 시작되는 곳의 빨메라 나무로 변했고 나이삐는 폭포가 떨어지는 강의 돌멩이로 변했어요. 악마의 목구멍은 그렇게 유래된 것이었어요. 이구아수에는 무지개가 참 자주 떠요. 비가 내리는 날이나 해가 쨍쨍한 날에도 따로바와 나이삐는 뜨는 무지개를 타고 만난다고 해요. 홍수를 만난 듯 넘쳐나는 바다처럼 넓은 범람하는 강의 통쾌한 낙하 이구아수 폭포 악마의 목구멍은 낙하 바로 그것이죠.
옛날에 옛날에요, 이구아수 강에는 거대한 몸집을 지닌 뱀의 신 보이가 살았습니다. 인디언들은 해마다 미모의 아가씨를 산채로 강물에 빠뜨리는 의식을 치루며 제물을 바쳤어요. 인디언들은 그 의식을 치를 때마다 과라니 족들을 초대했다고 해요. 과라니 종족 중에 따로바라는 추장이 있었어요. 따로바는 그 해에 바치게 될 나이삐와 함께 카누우를 타고 멀리 도망갈 계획을 세웠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뱀의 신 보이가 크게 분노하여 이구아수 강을 힘껏 뒤 엎어 버렸어요. 거대한 등을 꿈틀대며 강 전체를 분기충천(憤氣衝天) 파헤친 것이지요. 이구아수 폭포는 그렇게 생겼다고 해요,. 뱀의 신 보이는 지금도 폭포가 떨어지는 안쪽의 동굴 안에 살고 있답니다. 아무리 그렇단 들 이구아수 폭포 중에서 악마의 목구멍은 단연 장관이죠. 보이에게 붙잡힌 따로바는 폭포가 시작되는 곳의 빨메라 나무로 변했고 나이삐는 폭포가 떨어지는 강의 돌멩이로 변했어요. 악마의 목구멍은 그렇게 유래된 것이었어요. 이구아수에는 무지개가 참 자주 떠요. 비가 내리는 날이나 해가 쨍쨍한 날에도 따로바와 나이삐는 뜨는 무지개를 타고 만난다고 해요. 홍수를 만난 듯 넘쳐나는 바다처럼 넓은 범람하는 강의 통쾌한 낙하 이구아수 폭포 악마의 목구멍은 낙하 바로 그것이죠.
2012년 3월 10일 토요일
때로는 은둔에 감성을 싣고
맹하린
어제 이 블로그에 '어떤 문학상'과 사진을 곁들여 올리며 무척이나 망설였다.
나는 어용(御用)은 아니기 때문이다.
본국에서 정치하시는 분들이 오실 땐 엄청 높으신 분일 경우, 기자들도 없이 간담회를 하는 날도 있다.
그리고 나는 단체장이 아닐 때도 초대를 받는 예외가 있는데, 앞에 놓인 명찰에는 여성대표이자 소설가 정도로 표시 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간담회 몇 번 드나들다 보니까, 부끄럽고 창피하거나 적성에 안 맞고 지루할 때가 더 많았던 게 아닌가 하는 사려가 생겨 난다.
후원해 달라거나 정부차원에서 도와 달라는 단체장들의 발표시간이 대부분의 시간을 차지하는 데다 , 이러저러한 사설들이 너무 많고 길기 때문이다.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니다.
그 시간 아니면 본국 정부의 높은 분을 다시 만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라는 걸.
하지만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처럼 큰 계획을 전달해야 한다는 것도 어불성설 아니려는지.
그런데 하여간에, 정치하는 분들의 여유만만과 술수란, 참!
임기가 1년도 못 남았으니까 말로 인심 팍팍 쓴다.
보좌관에게 상쾌발랄뻑쩍지근하게 지시하는 것이다.
"건물이 필요하다는데 제일 첫 번째로 고려해 봐! 저 단체도 건물이 필요하다니 같은 건물을 사용할 수 있도록 선처하고 말야. 이곳 교민들께서 고국과는 멀고 변방이라는 생각이 안 드시도록 특별히 신경 좀 쓰라구!"
어떤 경우엔 불편한 자리지만 , 그런대로 괜찮았다는 인식에 젖을 때도 없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교민사회에선 내로라 할 수 있는 모(某) 단체장이 문화원을 몰아세우고 매도하면서 문화원의 위치나 경비, 그리고 행사에 관해서 폄하 할 때는 내가 방패막이가 되어 약간의 모면을 돕는 발언을 해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병이다.
누구라도 곤경에 빠지면 못 참는다.
더군다나 H문화원장은 내게 돌아왔어야 마땅했다는 어떤 혜택을 다른 이에게 돌렸었다고 나도 모르는 사실을 만날 때마다 미안해하던 처지라서 더 그러했다.
(기분 괜찮다. 나중에 높은 데 가서 상 받을 것 같다. 내 몫을 나도 모르게 앗기고 양보하고.)
몇년 전부터는 간담회 초대가 있을 경우, 시간이 안 될 것 같다고 내쪽에서 사양하게 되었다.
문협회장일 때는 평통위원 자리도 극구 사양했다.
글쓰는 사람이 뭔 평통위원을 한다는 얘기인가.
단체생활.
배가 산으로 올라갈 때가 너무도 많고, 매사에 많이 앞서가는 내 안목은 한 마디 안 할 수가 없어서 대략 짚고 넘어 갈 때도 간혹 있었다.
시일이 지나면 내 지적이 모두 맞는 말이 되지만 , 어느 날부터 바른 말도 모두 부질없는 짓이라는 관념이 싹 터, 현재는 오로지 산뜻함만을 사수(死守)하려고 노력하고 노력하는 중이다.
김종민 문화관광부 장관께서 교민간담회를 주도하던 날도 나는 단체장이 아닌데 초대 되었었다. 뿌에르또 마데로의 오성(五星)급 호텔에 소속된 고급 레스토랑에서였다.
식사 도중, 장관께서는 특별한 질문을 꺼냈다.
나 이외에 따로 초대된 두 분의 여성 단체장에게 먼저였다.
동남아의 여러 나라 여성들이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부러워하는 분야가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이었다.
두 여성 대표가 마땅한 답을 못 찾고 시간이 좀 지연되자, 이윽고 질문은 내게 돌아 왔다.
장관께서는 그런 의미에서 질문의 순서를 제대로 파악하고 결정 했다고 본다.
내게서 비슷한 답이 나왔기 때문이다.
미리 답을 들었더라면 싱거웠을 것이다.
맨 나중 사람이 답을 해야 약간이라도 긴장감이 주어질 테니까.
"네. 첫째는 다른 동남아 여성들이 가질 수없는 문화생활을 우리 한국 여성들이 누린다는 점에 있을 것이고, 둘째는 한국 남성 탤런트들이 타국에 비해 너무나 잘 생겨서입니다."
좌중(座中)쪽의 웃음 실린 물결이 내 두 번째 답 위로 출렁댔다.
장관께서는 자신감 넘치는 음성으로 그 화제를 마무리 지었다.
"그렇습니다. 결국 같은 맥락인데, 동남아 여성들이 한류 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부러워하는 부분은, 바로 최신식의 극치인 우리나라의 주방시설이라고 합니다."
딱 한 번에 대만족이었지만, 지금은 그 잘난 단체장도 더 이상 싫고 참석하는 단체도 두셋이다.
머잖아 하나 정도만 남을 것 같다.
생업과 글에 시간과 정성을 기울이는 틈틈이 자주 산책을 시도하는 지금의 생활리듬이 내게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다.
행복.
별거 아니다.
가진 것마다 흡족할 줄 알고, 그걸 사랑하면 된다.
사람이 갈 길 제대로 가려면 어느 정도는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안 된다고들 하지만, 나는 필연코 돌아 볼 것이다.
과거와 현재가 함께 생생하게 살아 존재하는 힘을 꼭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행복의 이유는 늘 행복이 아닐 이유가 없는 법.
다만 생의 언저리에서 줍고 줍는 작은 환희.
내 일탈의 향방은 항상 각도가 따로 정해져 있다.
생의 그 어느 한 순간에라도 내 손때가 묻은 깃을 날마다 나의 격(格)에 알맞게 가다듬는 것.
오랜 세월, 또는 짧은 기간, 내 주위에 사랑으로 다가왔던 자연의 광휘로운 존재들을 더욱 아끼고 싶다.
별, 달, 햇빛, 바람, 해오름, 어스름, 밤비.
내가 방심했거나 우리 현대인들이 거의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들을 일컬음이다.
오솔길에서 잠시 여름의 끝자락을 지켜보는 순례자처럼.
때로는 은둔을 즐기며.
견뎌야 할 때 견디려고 써 낸 글들의 마디들이 때로는 아픔이 되기를 소원하며.
모든 손에 닿지 못하는 것들은.
어찌 이리도 슬프면서 아름답고 찬란한가.
느긋한 게 나의 천성이지만, 글에 대해서는 치열함을 아끼지 않겠다.
책으로 배움을 얻지 말고 책으로 질문을 받으라는 격언도 높이 받들겠다.
2012년 3월 9일 금요일
어떤 문학상
맹하린
1천 평의 면적을 소유한 대사관저에 달랑 아들과 둘이서만 초대되리라는 뜻밖의 전달은 잠시 당혹이라는 강물에 빠졌다가 금세 꺼내어지는 느낌을 유도하였다. 고맙지만 사양하겠다는, 워낙 자기주장이 분명한 아들은 손사래로도 모자라 뒷걸음질까지 친다. 부득이 혼자 나선 길. 서너 시간 담소를 나누다가 나는 진정한 초대의 제목을 물었고 무제라는 답을 받았다. 내가 무제를 좋아 한다는 걸 언제 들켰을까? 그 석찬은 결국 내가 아니라, 무슨 일이 생길수록 치열하게 가꾸어 오던 결구배추처럼 속이 여러 겹으로 차오르기를 소원하는 나의 문학 포기에게 수여되는, 참으로 특별한 배려가 섬광처럼 반짝이는 융숭한 상인 것을. 이름하여 황의승 문학상. 내가 이름 있거나 이름도 없는 그 흔해 빠진 상들을 결코 안 좋아 한다는 걸 어떻게 들켰을까? 나는 때때로 내 기억의 서랍 속에 소중하게 간직한 그 상패를 조심스레 꺼내어 찬찬히 들여다볼 때가 있다, 형형색색의 빛무리로 이룩되어 있고 글로써 상징하기 어려운 형상으로 에워싸여 있는 데다 무한한 가치를 지닌 나의 영원한 문학상인 그 상패를. 아무나 받는 상, 너도 나도 받는 상, 너와 내가 나눠 받는 상, 이 상 저 상 다 받고도 모자라서 줄줄이 받아내는 상은 결코 아니므로.

문화관광부 김종민 장관 교민 간담회에서.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마끄리 시장과 김병권 대사님과 재아 한인부인회 임원진

한명숙 의원과 재아 한인부인회 임원진들과 Kowin 회장단과

소설집 '세탁부' 출판기념회에서 지금은 칠레에 계시는 황의승 대사님 내외분과 함께.
이명원사모님께선 임기를 마치시고 떠나시면서 나, 또는 내 아들이 귀국 시에 자택에서 머물 수 있도록 방을 비워 놓겠다고 말씀해 주셔서 감격!
2012년 3월 8일 목요일
비 내리는 뜰
남미크리스챤신문
2001년 9월 15일
맹하린
‘아들을 서울로 유학시킨 농부가 있었다.
주기적으로 보내주는 아들의 학비를 송금하려고 쌀을 팔기 위해 시장으로 나설 때, 부인이 앞을 가로막으며 따졌다.
산판의 나무를 판 돈이 있는데 어찌하여 귀한 쌀을 팔아 송금 하려느냐 는 항의였다.
농부는 웬 가당찮은 소리냐고 부인을 나무랐다.
풍절목(風切木=저절로 시들거나 바람에 꺾어진 나무)으로 생긴 돈을 아들의 학비에 보탤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해에 바람이 심하게 불어 산판의 나무가 많이 부러졌는데, 그 나뭇가지들을 시장에 내다 팔아 그들은 적잖은 수입을 올렸던 것이다.'
농부의 이런 마음가짐과 교육태도에 대해서 웬 미신과 같은 전근대적 사고방식이냐고 더러 비웃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농부와 같은 결곡한 심지(心地)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돈을 벌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현대인들의 폐단에 대해 쉽게 동참하지는 않으리라고 본다.
우리의 물질에 대한 욕망은 언제나 너무 원대하다.
토마스 머턴의 말과 같이 쇠붙이라는 쇠붙이는 다 끌어 모은다.
우리 인간은...... .
하지만 강건함과 나약함의 양면성을 누구보다도 강하게 지니고 있는 우리.
누군가 절망하면, 누군가 아파하면, 누군가 슬픔에 잠겨 있으면, 우리 또한 그들 이상으로 동화하면서 그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로 덜 하지는 않아 한다.
그 우리는 때로 아집에 찬 생활을 해내면서 항상 고독을 새로움처럼 받아들이는 시점에 몸담고 있을 때가 많다.
해가 떠도 고독하고 해가 져도 고독감은 물고기처럼 우리의 하루 속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닌다.
이럴 때, 우리가 언제나 사랑하는 가을날의 색감 짙은 잎들과 푸르른 하늘과 쉼 없이 밀려오는 강물의 여일함은 더욱 우리를 가슴 저리게 한다.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 한 번 고요한 강물이 되어보자.
급히 솟아오를 생각을 접고 저절로 파도치고 저절로 흐르고 자연스레 바람에 휘날려 보자.
고독은 선(善)하지만, 사람을 가리며 찾아오지는 않는다.
지금의 우리는 지난날의 우리이고 과거의 총체(總體)다.
중요한 건 상처를 키우기만 할 게 아니라 그 상처로부터 어떻게 스스로를 담담하고 산뜻하게 자아형성의 방향으로 이끌어 내느냐에 있을 것 같다.
사람이 소통한다는 것은 결국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아름다움에 관한 폭 넓은 통찰이라는 의미도 된다.
소통은 곧 현실이고 허구의 뼈아픈 가치관이기도 하다.
인간은 결국 혼자다.
고독했었기에 소통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소통이라는 장르가 있었기에 사랑이 있고 고독이 존재하는 것이다.
고독했기 때문에 사랑이 다가 온 게 아니고 사랑했고 사랑하기 때문에 고독을 받아들일 수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지향하지 않은 의외의 결과를 빚어내면서.
소통이라는 이름의 합리화를 표출하면서.
관심이라는 말 참 좋고 근사하다.
온통 쏠린다는 뜻도 있겠지만,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의미도 되기 때문이다.
너무나 쉬운 말이지만 가장 어려운 난제(難題)중의 난제(難題)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요즘 평등(平等)이라는 강에 발을 담그고 있다.
참 무난한 것 같은데 매우 조심스런 강이다.
옛날 옛적의 문인 정사현이 시집 제호로 선택한 우정(雨庭=비 내리는 뜰)이라는 정자(亭子)하나 짓고 싶은 심정이다.
굳이 대쪽 같은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
주관이 너무 뚜렷하기도 버겁고 두려운 일이다.
느긋하면서 산뜻하게 급류에 휩쓸리지 않으며 세상의 부귀영화나 권위나 명예를 얻기 위해 안달하지 아니 하며 앞으로 그리 살겠다.
내가, 우리가, 나와 우리에게 부담을 덜어 주는 나날들을 소원하며.
오늘은 '여성의 날'이라고 현지인 남성 고객들이 나한테까지 축하의 말을 남기고 간다.
나 역시 모든 여성들에게 ㅊㅋㅊㅋㅊㅋ 합니다!!!
2012년 3월 7일 수요일
내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사는 동안
-맹하린
내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사는 동안
소떼 한가로이 풀 뜯고 잔디는 뒤덮을 듯 들판 에워쌌다
바둑판처럼 네모나게 펼쳐진 사방으로 파란만장에 가까우리라는 예감
잡초처럼 왕성하게 가지를 뻗어내고 있었다
틈틈이 아이들과 근교에 나가 가오리 연 날리며
돌아가고 싶은 마음 반향사고로 뒤집어
돌아가서는 안된다는 각오의 실토리 바짝 붙들며
풀었다 늦췄다를 거듭했다
하늘을 찌를 것처럼 인플레 최고조일 때
침대 밑에 감추어둔 생때 같은 사과 박스 뒤늦게 껴안고
은행에 당도하면 기껏 푸르름 꼬장꼬장한
약간의 달러 손에 쥐어줘
여름날 아스팔트보다 더 끈끈한 검질긴 느낌
신발에 자꾸만 달라 붙어 마음에 까지 달라 붙어
한참을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자칭 패잔병되어 자꾸만 걷고 걷다가
네모 반듯한 거리 꺾고 꺾으면
‘우리 모두 고골리의<외투>에서 나온 사람들이다’*라는 사실
공감의 외투 걸친 채 나를 제치고 저 먼저 대문으로 들어갔다
나는 지금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금세 도착한 것만 같은 생경스러움으로
히말라야시더처럼 사시장철 푸르러 있고 이방인에게도 다채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감상 새록새록 싹터 올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그냥 살아 내려는
결심 개개비사촌새처럼 머릿속 까맣도록 굳혀져 있다
여름은 예외없이 닥쳐와 뎅기 열병 시골구석에 장기적으로 주둔하며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점령도 하기 전 작전상 후퇴를 되풀이 했다
모든 집들이 전부 틀린 모양으로 어깨동무는 했으나 각각 토라져 앉아
그점을 참 기이하게 여겼다
똑 같아도 이상한데 하나도 안 똑 같음이 볼수록 이상하여
나는 이상한 나라의 예상치 못한 사람들과 그들의 독특한 생에 대하여
접근 가능성을 계획하거나 친화의 등피 닦아 창문 가까이 렘프 걸어 두었다
내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사는 동안
내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사는 동안
도스트에프스키의 말*
2012년 3월 6일 화요일
일본공원에 다녀와서
맹하린의 목요 칼럼
아르헨티나 조선일보
2000년 10월 12일 목요일
해마다 이맘때면 일본공원에서는 잊지않고 ’서양란 전시회’가 열린다.
이 일행, 저 모임에 섞여 여러 번 그곳을 찾으니 거기는 마침 철쭉제의 향연이 한창이다,
양지 바른 쪽은 벌써 시들어 약간 산만한 느낌이 드는 반면에, 그늘 진 장소에 자리 잡은 철쭉은 이제 막 봉오리를 맺었거나 활짝 어니 만개(滿開)를 재촉하는 중이었다.
수천마리의 비단잉어들. 올리브 빛 호수. 군데군데 크거나 작게 서 있는 일본에서 공수해온 바위들.
오디나무는 열매를 가득가득 매달고 있고. 모퉁이 쪽의 벽오동 옆에는 버찌가 붉거나 덜 익은 채 동글동글 달려있다.
야단스러울 정도로 복스러운 겹사꾸라 꽃나무들을 끼고 걷다 보면 종각도 보이고 미처 활짝 피기도 전에 떨어져 버릴 게 분명한 목련화가 자주 빛과 보라에 물들어 수줍게 수줍게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듯 하늘을 바라보며 피어있다.
각각 으스대는 듯 당당하게 차려 입은 서양 란들의 빼어난 자태는 예년보다는 못할지라도 제법 화려만발한 편이라고 볼 수 있었다.
갸웃갸웃 이 꽃, 저 잎 다 살펴보다가 이만하면 실컷 봐 뒀다 싶어져 아래층으로 내려 와 일본에서 건너온 일본녹차와 마주한다.
과연 알뜰살뜰 일본인답다 싶은 풍광에 함초롬히 자주 눈길을 빼앗기고 나서인지 나의 일행들은 이윽고 품평을 시작한다.
다탁(茶卓)은 순식간에 아쉬움이 첨가된 부러움의 논쟁으로 들끓는다.
이민 역사 35년 동안 우리는 무얼 했는가,
누가, 무엇이, 우리에게 ‘한국공원’을 갖게 하는 일을 엄두도 못 내게 하는가.
우린 언제나 이처럼 아름다운 공원을 우리 것으로 소유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곧 이어 부정적인 반문들이 미리 정해 놓은 답안처럼 콩 튀듯 튀어 오르거나 쏟아졌다.
만약 ‘한국공원’이 생긴다면 저 비단 잉어들은 제대로 건재(健往) 할 수 있을까. 몸보신에 필요하다고 한 두 마리 건져 가는 교민은 왜 없을 것이며, 철따라 피는 매화 • 동백 • 철쭉의 꽃대들은 극성맞은 한국인들 등쌀에 제대로 붙어 있기나 할런지.
현지인 인파보다 한국 교민이 더 북적대는 양상은 어찌 안 생길 것인가.
잔디밭 위에는 틀림없이 고스톱 판을 벌이는 패거리는 물론이고 골프의 스윙연습을 시도하는 한심한 작태까지 안 벌어진다 는 보장이 그 어디에도 없다는 탁상공론들이었다.
일본공원 안의 일본인 찻집에서 일본공원을 왈가왈부 선망해 보던 나의 일행은 금세 후회하듯 부러움의 날개를 접는다.
나는 애당초 일본공원 같은 걸 우리 것으로 갖고 싶다는 마음이 추호도 없었으므로 옛날 옛적에 도통한 도사처럼 홀가분하게 웃는 역할에 충실하고 만다.
비로소 심란함과 부러움에서 헤어난 나의 일행은, 결국 화제를 멕시코로의 재이민에 대한 얘기에 도달하더니, 어머니 날이 아니라 ‘계모의 날‘일 거라는 투정에까지 촛점을 맞춘다.
안다.
인생은 운동경기와 마찬가지라고 누군가 말했다는 거.
규칙을 따라야 한다는 얘기 같다.
맞는 말이지만 다 맞는 말은 아니다.
나는 내 머리 속에 관념이라는 걸 불어 넣기도 전에 이미 관념이 홀로 싹을 틔웠을 지도 모른다.
내가 가끔씩 여기 저기 휘돌아다니는 이유는 내 자신을 너무도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때로 예외적인 방향으로도 발길을 내 디딜 수가 있어야 한다.
뭔가 특별한 것.
뭔가 살아 숨 쉬는 듯 한 부딪힘.
편견을 이기는 어떤 특별한 모티브나 형상을 제시하지 않는 사랑.
온통 편견의 틀에 갇힌 이 바벨탑의 세파 속의 한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은 저절로 주어지지는 않는다.
우리 자신의 행동이나 말로부터 감정을 분리시킬 수 있음을 자각할 때 우리는 어딘지 모르게 남이 들어내지 못할 작은 함성을 터뜨리기도 한다.
그럴 때 나는 일본공원에 간다.
내 나라와 이웃나라를 비교하려고 가는 게 아니다.
작위적이면서도 인공적인 아름다움이 자연에게 어떻게 항복해 나가고 있는지를 발견하려고 가는 것이다.
다른 곳은 혼자도 잘 가는데 일본공원은 이상하게도 혼자 나서지를 못하고 있다.
머잖아 친구들이나 교우 중 그 어떤 팀 상관없이 다시 일본공원에 다녀오려고 한다.

공원 입구에서 구입한 먹이를 뿌리고 나서...

지금은 미국에 사는 문우

성당의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과 함께
2012년 3월 5일 월요일
무료병원(無料病院)
맹하린
시냇물 위에 띄엄띄엄 놓여 있는 징검돌 딛듯이 짚고 또 짚었지만, 나는 의료보험이 없다.
보험료도 아깝지만, 하릴없이 무슨 검사, 무슨 촬영, 그러며 병원에 쫒아 다니는 것도 성가셔서 더 그렇지만, 진정한 이유는 병이 올 때 오더라도 , 떠날 때 떠나더라도 그런 식으로 어떤 제도에 구속 받는 게 싫어서 더 그래왔다고 본다.
그렇게 의료보험도 없는 나에게 하필, 가게의 작업실에서 살짝 넘어지면서 손목뼈가 빠지는 상황이 몇 년 전 전개되었었다.
손으로 방어 한다는 게 일을 더 크게 만든 결과였다.
무료 병원에 갈 경우 몇 시간을 줄 서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 두려움이 앞서, 한국인이 경영하는 P병원에 갔다.
직접 상태를 살펴 보던 P원장은, 독일병원에 적을 두고 있는 현지인 정형외과 의사가 오후 3시에나 출근한다면서 그 시간을 약정해 주었다.
그 시간 안에 현지인 지정 병원에 가서 X레이를 찍어오라고 하여, 알려 준 병원에서 접수하고 줄 서고 그러는 일에 넋을 바치다 보니 P병원으로 돌아 갈 시간이 금세 촉박하게 다가왔다.
그날은 내게 호사다마다라는 말을 절대적으로 실감하게 해주던 날이었다.
다음 날이 일 년 중 제일 큰 대목인 어머니날이었던 것.
택시를 탔는데, 그 야바위 같은 현지인 기사는 내가 다 아는 길인데도 간 길을 또 가고 돌고 또 돌았다. 내 쪽에서 최대한의 친절한 부탁도 하고, 내 손목의 아픔이 점차 심각해지고 있다고 엄살 섞인 하소연을 해 봐도 완벽한 막무가내였고 지독한 마이동풍이었다.
그 기사의 직업철칙이란, 위급환자는 일단 차에 태우고 끌고 다닐 때까지 끌고 다니자는 주의(主義)인가 보았다.
그렇게 도착해서 만난 정형외과 현지인 의사는 X레이 필름을 보더니 뼈에 작은 금들이 많이 난 상태라면서 우선 독일병원에 입원을 하고 다음 날 아침 수술을 해야 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장이라면 모를까 내일 아침이라니!
의료보험을 못 갖춘 형편이라 값비싼 수술비 정도는 각오 했지만, 지치지 않고 쿡쿡 쑤시는 왼팔의 통증을 다음날까지 버티라는 얘기다.
나는 떼를 부리기 시작했다.
-당장 무료병원에 가야겠어요. 손목이 점점 더 아파와 내일까지 견딜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진료비를 접수창구에 치루고 나올 때까지 걱정스레 만류하던 P원장과 현지인 의사.
그들에게 여러 번에 걸쳐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나는 그 병원 앞에서 다시 택시를 탔다.
디오스 미오(나의 신이시여=세상에)!
현지인들도 좋은 사람이 많지만, 나쁜 사람 역시 꽤 많은 것 같다.
내가 나오기를 노렸는지, 택시에 오르니 반시간 전의 바로 그 택시기사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뗏목을 타고 급류에 휩쓸리는 느낌이 밀려들었다.
신호등이라는 이름의 노란 돛단배가 보이더니 금세 빨간 돛단배로 바뀌었다.
나는 잽싸게 택시에서 내렸다. 손에 미리 준비하고 있던 지폐라는 노를 택시의 차창 안으로 힘껏 던지는 일을 잊지 않고였다.
돛단배는 파랑으로 바꾸었다.
택시와는 반대방향을 향해 나는 시적시적 걸었다.
다행히도 무료 병원 알바레스 병원은 6블록 정도 밖에 안 떨어져 있었다.
팔에 건 붕대로 인해 손목은 점점 불편해지고 있었고 뭐라 표현키 어렵도록 아팠다.
나의 온 신경이 손목쪽으로 몰려가 걱정하고 둑을 쌓고 그러나 보았다.
나는 되도록 조금만 가 있으라고 신경에게 명령을 해댔다.
언제나 한 부분에만 신경을 쏟는 일은 내 사전에는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붕대를 벗고 차라리 손목을 잡고 얼굴 근처까지 들어 올리는 방식을 택했다.
새벽녘에 사고가 난 이후, P원장의 응급조처로 목에 붕대를 늘여 뜨려 팔을 걸고 다녔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일종의 서글픔을 억제하려고 애썼다.
(뭐가 잘못 됐을까. 오늘 일진이 왜 이 모양인가.)
내 심정이라는 것은 뛰지만 않았지 목이 조여드는 숨 가쁨을 하루 내내 느꼈을 것이다.
적성에는 안 맞는 일이었지만, 알바레스 병원 내에서 거주하며 가난한 환자들을 돌보기도 하고 봉사와 수도생활을 겸하고 있는 한국수녀님을 찾아 부탁하게 되었다.
진료 시간을 미리 앞당기거나 줄서는 일을 새치기 시키는 일은 불가능 하지만, 성의껏 진찰에 임해 달라는 부탁 정도는 해줄 수 있다고 하셨다.
나는 이미 서 있는 줄의 맨 끝에 스스럼없이 동참하게 되었다.
새로 만나게 된 현지인 정형외과 의사 역시 수술을 권장하였다.
다시 찍어 낸 X레이 필름을 보고난 결과였다.
수술은 당장 해 줄 수 있지만 하루 입원!
하루를 입원해 있을 정도로 사태가 편하고 한가하지 않음을 잘 인지하고 있던 나는 간곡히 내가 해내야 할 일들에 대해서 설명했고, 결국 의사는 마지못한 듯 져 주었다.
우선 깁스를 하고, 삼일 후에 X레이를 찍어 본 뒤 경과에 따라 다시 수술을 하자는 약속과 다짐을 받아내고 나서였다.
그때 알았다.
손 중의 하나가 불편할 경우 아무 일도 제대로 해낼 수 없다는 사실을.
그래도 해내야 하는 일들이었다.
많은 친구들이 내 대신 일을 도왔다.
그런데도 착하고 선량한 내 고객들은 인내심으로 잘 견뎌 주었다.
밤마다 이불깃에만 스쳐도 아프던 깁스 안의 손과 팔.
40일 후에 깁스를 자를 때까지 3일에 한 번씩 X레이를 찍어댔다.
15일이 지나자, 깁스의 길이를 훨씬 짧게 줄여 주기도 했다.
잘 접목이 되어 구태여 수술까지는 안해도 되겠다는 진단결과가 뒤따랐다.
그 무렵 절절이 깨달았다.
아르헨티나가 얼마나 살만한 나라인가를.
40일 동안 X레이만 10번 쯤 찍었어도 치료비나 진찰료를 한 푼도 내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
그게 바로 무료병원이 베푸는 혜택이자 배려였다.
파라과이 등 이웃나라에서 버스타고 건너와 치료하고 가는 나라가 바로 아르헨티나였다.
나는 담당의사에게 꽃다발도 선물했고, 약간의 촌지도 건넸다.
수녀님에게는 가난한 환자를 돌보는데 사용하시라고 적은 액수가 담긴 봉투를 하나 드렸다.
의료보험 비를 약간 냈던 셈으로 치부했다.
탈리(脫離)된 손목에 깁스를 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손이 왜 둘이 있어야 하는지, 손 하나만으로는 그 어떤 일에도 능률을 기대하지 못한다는 걸 모를 것이다.
수술을 안 했기 때문에 좋은 것보다, 수술을 안 해서 나쁜 일이 더 많았다.
내 손목은 깁스를 제거 했을 때 보니까 붙긴 붙었는데 약간 뼈가 튀어 나온 모양으로 변형된 모습이었다.
다친 부분은 또 다치기 마련이라는 의사의 충고에 따라 한동안은 왼 손에 조심과 조심을 다했었다.
그 때 병원에 자주 가야했고, 의사도 수시로 교대되어 바뀌는 시스템에 익숙해야 했지만, 뻐기거나 권위를 내세우던 의사는 결코 만나지 못했다.
봉사차원이라서 시청이 주는 무료병원 의사들의 봉급이 4,822페소라고 한다.
레지던트는 3,900페소 이며 간호사의 봉급은 3,265페소고, 사립병원 의사들의 초봉은 6792페소로 책정되어 있는 모양이다.
대략 1천 달러나 그에 못 미치는 봉급수준인 것이다.
저명한 의사들일수록 일주일에 하루 이틀을 무료병원에서 의무감과 사명감을 어깨에 얹고 진료를 해내고 있다.
우리 한국교민들도 이름 석자 발표 되는 곳에만 후원이나 찬조를 할 게 아니라, 무료병원에 한층 많은 지원이 줄을 이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아르헨티나 의료진에게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을 확실히 접하게 된 계기였었다고 지금껏 절감하고 있다.
이 글을 써내고
여기에 올리면서 나는
마이클 무어가 미국 민간 의료 보험 조직의
부조리적 병폐의 이면을 폭로했던 영화
식코(Sicko)를 새삼 다시 보게 되었다.
한국어 자막으로 된 것도 검색하니 있었다.
2012년 3월 4일 일요일
만일 내가 다시 아이를 카운다면
-다이아나 루먼스
만일 내가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먼저 아이의 자존심을 세워 주고 집은 나중에 세우리라. 아이와 함께 손가락 그림을 더 많이 그리고, 손가락으로 명령하는 일은 덜 하리라. 아이를 바로 잡으려고 덜 노력하고, 아이와 하나가 되려고 더 많이 노력하리라. 시계에서 눈을 떼고 눈으로 아이를 더 많이 바라보리라. 만일 내가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더 많이 아는 데 관심 갖지 않고, 더 많이 관심 갖는 법을 배우리라. 자전거도 더 많이 타고 연도 더 많이 날리리라. 들판을 더 많이 뛰어다니고 별들을 더 오래 바라보리라. 더 많이 껴안고 더 적게 다투리라. 도토리 속의 떡갈나무를 더 자주 보리라. 덜 단호하고 더 많이 긍정하리라. 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사랑의 힘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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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3일 토요일
자연보호 공원(Reserva Ecologica)
맹하린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오후 3시에는 라 플라타 조류협회가 주관하는 무료관광안내가 있다.
얼마 전, 신문광고를 보고 혼자서 떠났다.
누구라도 함께 다녀오고 싶었는데, 몇몇 친구들에게 연락을 했었지만, 모두들 바쁘다는 비명이었다.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안에 위치해 있고, 'Costanera Sur=남(南) 코스타네라 '지역이었다.
이 '자연보호 공원'은 1918년부터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시민들이 즐겨 찾는 휴식공간이 되었다. 무려 3백 50헥타르의 광활한 면적이며 멀리 도시의 빌딩들이 둘러싸인 분지(盆地)다.
1백년이 가까워 오는 동안, 자연도태(自然淘汰)와 변혁을 거듭해 왔으나, 해수욕장은 시민들로 하여금 돌계단을 내려가 발을 적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자연적인 운치를 한껏 뽐내며 장관을 이루게 되었다.(전염병의 우려에 의해 수영장은 페쇄 되었다.)
70년대 초, 바람에 의해서 날아들기 시작한 여러 가지 식물의 씨앗들은 이곳에서 싹이 트면서 많은 흥성(興盛)을 펼쳐왔다.
Parana 강과 La plata강이 불어나면서부터 많은 동물들 역시 이 지역에 정착을 시도했으며 이밖에도 여러 시기에 걸쳐 이곳에 먹이를 구하기 위해 들렀다가 아예 머물거나 경유하면서 번식을 늘이게 된 철새들까지도 이 지역을 아늑한 도래지(渡來地)로 삼게 되었다.
이 공원 입구에 들어서면 도시와의 경계를 넘어서 거대하고 매혹적인 삼각지대를 만끽할 수 있는 행운을 누리게 된다.
많은 종류의 수중식물 사이를 헤엄치고 다니며, 목에 검은 나비넥타이를 두른 것 같은 검은 목 백조무리가 서식지로 삼은 호수는, 그 둘레에 키 높지 않은 나무들로 무성하고 싱그러운 산림의 지평선을 연출하기도 한다.
이 광범위한 자연공간에는 228종류의 척추동물, 8종류의 포유동물, 11종류의 파충류, 9종류의 양서류, 그리고 부엉이, 오리, 비둘기 , 검은 물오리, 해오라기, 새매, 떼루때루 새등을 합쳐 모두 2백종류의 새들이 살고 있다,
특히 조심해야 할 일은 이 공원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는 살모사를 경계해야 한다는 점이다.
공원 당국은 아무리 저명한 동물학자일지라도 이 산책로를 절대로 혼자서는 다닐 수 없도록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살모사를 쫒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지팡이나 막대기로 땅을 두들기는 것이라는 당부가 여러 번이나 지시되고 있을 정도다.
오랜 전통을 지켜오면서 이 지역을 돋보이게 한 낚시터는 휴식과 기분전환을 필요로 하는 시민들과 낚시 애호가들의 발길을 끊임없이 불러 들였다.
백조, 이빼까, 검은 물오리, 까라오, 시리리, 까라까라, 차하에, 가위새 등의 조류들은 이 공원을 산책하는 모든 이들에게서 감탄사를 터뜨리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독특하고 개성 있는 자태를 뽑내고 있었다.
인공적으로 가다듬지 않은 천연의 이 '자연보호 공원'을 두 시간이 넘도록 돌아보면서, 도시 생활에 찌들었던 어깨가 저절로 펴지는 기분이었다.
도심(都心) 속의 '자연보호 공원'.
천연림 가운데 살고 있는 여러 종류의 동물들과 수많은 새들을 바라보면서 두 시간이 너무 짧다는 아쉬움이 생겨났을 정도로, 훌륭한 자연보호 공원 길을 감격으로 걸어 냈다.
한동안 나는 열정을 다해 생활하고 있었으나, 마음의 일부는 때로 경직되는 느낌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그동안 내가 지녔던 고통들을 다른 사람이 몰랐다 해도 섭섭해 하지 않을 생각이다.
내가 어떤 관심을 감당할 수 있고, 어떤 관심을 감당할 수 없는지에 대해서도 이제 괘념치 않을 테다.
가이드의 침착하고 차근차근한 태도 속에는 설득력이 가득 했다.
그는 주먹을 쥐고 한쪽 손바닥을 치던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설명하는 습관이 있었다.
나는 산책하면서 많은 걸 보았다,
특히 강의 얼굴인 물결들의 찰랑임에서 , 내가 살아가는 단호하거나 나약한 당위성들이 빛다발로 서로 아우르며 어른거림을 놓칠 수는 없었다.
그 곳을 거니는 내내, 나는 내가 사는 테두리 안의 어느 누구도 기억하지 않으려 애썼다.
'자연보호 공원'을 산책하는 동안 그래서 더 발걸음이 가뿐 했을 것이다.
세상에, 도대체 나는 어떤 세상을 살아 내고 있었다는 얘기인가!
가까운 날 다시 틈을 내어 찾아볼 생각이다.
공원의 출구를 나설 때, 일부러 뒤를 한 번 유심히 돌아보았다.
나는 한 줄기 바람을 들이마시며 깨달았다.
처음엔 평범해 보였으나 걷고 걸어도
새롭고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세상이 거기 살아 숨 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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