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27일 일요일

내 이웃

-맹하린



어디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도토리나무는 심겨진 후 50년을 보내고 나서야 자식이라는 열매를 해마다 맺기 시작한다는 자연학 연구를.
그렇다면 우리 가게 건너 편 중앙분리대에 조성된 산책로의 여러 그루나 되는 도토리나무는 자그마치 수령이 100년도 넘었다는 얘기 아닌가.

가을이 닥칠 때, 그 도토리나무 주위를 바라보노라면 도토리를 줍기 위해 허리를 연신 굽혔다 펴는 한국인들의 모습이 자주 발견된다. 현지인들은 도토리를 왜 먹어야 하는지를 모르고, 먹으려고도 안하는 부류들이라선지 어쩌다 한국인 주인을 돕는 가사도우미 정도나 볼 수가 있다.
그러한 장면을 유심히 지켜볼 때마다 나는 웃음이 퐁퐁 솟는 느낌을 갖게 된다.
저 도토리들이 우리 교민들의 도토리묵도 되고 도토리 전도 되고 도토리 차도 되어 식탁에 오르내린다는 사실이 더할 나위 없이 정겹게 안겨 오기 때문이다.
물론 나야 도토리를 줍지는 않는다.
자연 그대로를 아끼는 취향이 강해서.
도토리나무와 여러 나무들이 서 있는 산책로는 나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다.
나와 수없는 눈길을 주고받으며 묵언의 말을 나누는 솔직담백한 이웃 말이다.

재작년이었던가.
우리 가게와 반 블록 떨어진 에스끼나(모퉁이)에서 끼오스꼬(편의점)를 운영하는 묻지도 여인이 혼자서 도토리를 줍다가 마침 거리를 내다보고 있는 나를 다급히 손짓하며 불렀었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껑충대며 차도를 건너갔었고.
그녀는 가끔씩 내게 묻지도 않는 얘기를 잘 해대서 내가 가족들한테 묻지도 여인이라고 우리가족만 알아들을 수 있는 별명을 호칭으로 사용해 오던  중이었다.
그날 역시 묻지도 않는 얘기를 꺼내기 위해 창밖 내다보기를 즐기는 나를 일부러 부른 것.

낮에 젊은 한국남자가 담배를 사러 왔었다는 걸로 얘기는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단골은 아니지만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얼굴이라서 대뜸 물었다고 했다.
-아저씨, 안면이 무척 많으신데 우리가 어디서 만났지요?
그랬더니 그 남자가 매우 점잖게 웃으면서 친절을 아끼지 않으며 대답하더라는 것.
-네. 저도 안면이 있으신 분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아저씨를 어디서 뵈었을까? 혹시 성당 다니세요? 우리 교우신가?
그때 그 젊은 남자는 약간 더 웃었다고 한다.
-아, 네. 교우라고 볼 수도 있겠군요.
-아이고, 아저씨도 참. 성당 다니는 게 무슨 죕니까? 참나! 뭘 그렇게 숨기고 쑥스러워 하고……. 왜 그러시는데요?
그랬더니 그 남자는 여전히 흐트러지지 않는 웃음을 남기며 장사 잘하시라고 덕담까지 얹어주며 총총 돌아갔다고 한다.
하지만 도토리를 주울 무렵에야 그 젊고 점잖고 예의 바른 남자가 누구인지가 뒤늦게 떠올랐다는 설명이었다.
-글쎄, 그 남자가 우리 서신부님이라는 사실이 왜 이제야 떠오르는데?
-근데 그분이 서신부님이라는 걸 이제야 알아 챈 게 무슨 죄인데?
나도 질세라 그렇게 대답하고 묻지도 그녀와 커다랗게 웃는데 도토리 나무도 , 그리고 도토리들도 덩달아 웃음을 못 참겠던지 바람에 잎을 흔들며 쏴아쏴아  팔랑대었다. 이미 땅에 내려앉은 도토리 열매들은 데굴데굴 구르며 까르륵 대는 느낌까지도 들게 했다.
주말이면 교회에 나오는  한국인 1세나 2세들 때문에 한층 바빠서, 일 년이면 성당을 고작 서너 번이나 갈까말까한 묻지도 그녀와,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미사참례를 하는 나는 그날 참 많이도 웃어댔다.
때때로 내 왼쪽과 오른 쪽, 그리고 이층의 이웃들까지도 하나하나 조명해 나갈 생각이지만 어쨌거나 나는 묻지도 그녀 같은 이웃이 있고, 사시장철 나와 눈길을 주고받는 도토리나무라는 이웃까지 있어 사는 일 그다지 무료한 편은 아니라고 본다.

더욱 겸손한 순례자가 되고 싶다
비밀처럼 조용조용, 사는 게 참 아름답다는 걸 겨우 알아챈 느낌이다.
운명의 신이 쉽사리 발견 못하도록 고요히, 그렇게 걷고 걷겠다.
나를 사로잡고 있는 그 한없는 갈망이 무엇인지는 굳이 캐내고 싶지가 않다.
고독한 모색의 길쯤 되지 않으려나.
나 여전히 내게 주어진 섭리의 길, 순례의 길을 가고 가리라.
아름다움을 창조하려는 공감, 지향, 열정 그런 언어들이 요즘 내게 새삼 친근하다.
그다지 느닷없지는 않은 일이지만 나 또 다시 정처 없어지고 말았어라.








댓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