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29일 일요일

노 빠사 나다(No pasa nada=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맹하린의 생활단상(生活斷想)


아르헨티나중앙일보


1996년 12월 6일


오늘은 유난히 무더운 날이라고 모두들 오며가며 말했다.
건조한 기온은 피부까지 바삭바삭 말리고 있는 느낌으로 유도했다.
오후 7시에 가게 문을 닫고 교민 C씨의 공장으로 상품이 될 옷을 구입하러 가는 자동차 안에서였다.
남편은 무슨 말인지를 할까 말까 연신 망설이고 있는 눈치였다.
-왜요,  나한테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네요?
-새벽에 꿈을 꿨거든. 내가 생각하기엔 별로 좋은 꿈이 못되는 것 같아. 그래서 당신한테 얘기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여태 참았던 거고.
남편은 꿈속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었는데, 바퀴를 두 개나 잃어버려 여기저기 찾으러 다녔다고 한다. 얼마나 애를 태우며 찾아 헤맸던지 그 꿈을 떠올리면 아직도 진땀이 날 지경이라고 했다.
-당신 꿈이 언제는 맞았었나요? 내 꿈이라면 또 모를까.
나는 그렇게 반문하며 웃었지만, 그때부터 시야(視野)에 들어오는 차량들의 거치적거림에 바짝 신경을 세우며 팽팽하게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그러나 금세 꿈 얘기도 긴장감도 잊고 말았다.

C씨 집에서 여름 원피스 종류를 구입하고 한인회관 앞길을 지나오는데,  갑작스레 어떤 둔탁한 소리가 나더니 남편이 운전하는 쪽으로 기울면서 넘어지고 있었다.
나는 차를 세우는 남편보다 더 잽싸게 차에서 내려 황망히 그쪽으로 뛰어갔다.
체구는 작지만 노숙한 얼굴을 지닌 현지인 청년이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우리 차에 부딪친 것이었다.
그런데 자전거의 바퀴가 활처럼 휘어져 못쓰게 돼버렸고, 망가지면서 튀어나온 자전거 바퀴의 살인지 뼈인지가 우리 차의 바퀴를 찔러 대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펑크를 내며  스르륵 스르륵 내지르는 비명 소리가 듣기에 몹시 거북했고 보기에도 가히 가관이었다.
중요한 문제는 바퀴 정도가 아니었다.
나는 서둘러 청년을 일으켜 세웠고, 다친 데는 없는 가고 조심스레 묻게 되었다.
불볕더위인 데다 마침 초저녁이라서, 집밖에 내놓은 의자에 앉아 신선한 바람을 쐬고 있었나 보았다. 청년의 가족들과 그 이웃들은...... .
하지만  그 사건을 고스란히 목격하게된 그들은 우르르 몰려 왔고, 청년의 머리와 온 몸을 꼼꼼하게 만져보며 상처의 유무(有無)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때에야 깨달은 점은 청년이 다운증후군을 겸한 지체장애자라는 사실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희극적이며 약간은 애수에 젖은 얼굴을 갖춘 청년은 그제야 커다랗게 부르짖었다.
거의 무의식적이다 싶게 절규처럼 .
그것도 두 손을 약간 올리며 어깨를 잔뜩 움츠리더니 여러 번이나.
-노 빠사 나다! 노 빠사 나다! 노 빠사 나다!
그들은 천만다행이었다고 안도의 숨을 내쉬며 자전거를 수선 소에 맡기기 위해, 청년과 자전거를 감싸 듯 보호하며 그 자리를 떠나갔다.
우리 내외도 그럭저럭 다행한 일이었다고 마음을 놓으며 자동차에 올랐으나 바람이 완전히 빠져 버린 펑크 난 바퀴가 왜 그때 비로소 깨달아지던지.

남편은 트렁크에서 공구와 스페어타이어를 꺼내고 있었는데, 이미 떠나갔던 청년과 가족들이 우르르르 몰려오는 모습이 또 다시 눈에 들어 왔다.
불구자와 충돌했기 때문에 바퀴 값이라도 물어내야 마땅하리라는 항의 섞인 제안이었다.
변상을 거절하면 경찰서에서 복잡한 수속을 밟을 수밖에 없다는 협박만 하지 않았더라면 좀 더 인정 어린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았을 텐데.

그럴 경우에 평소보다 더 차분해지고야마는 내 비장의 침착함은 그들을  이내 타이르고 설득하게 되었다.
-양쪽의 잘잘못을 떠나서 그 정도의 보상은 기꺼이 하겠어요. 하지만 협박이 섞인 언성은 좀 섭섭하군요. 얘기를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겠네요.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한 이 시간에 자전거 전용도로가 아닌 차도를 마음대로 활주(滑走)하도록 가족인 당신들이 이 청년을 방관할 일은 아니지 않았나요?

때마침, 한인회관의 상주경찰이 다가왔다.
처음부터 목격을 했었다고 한다.
청년이 한 눈을 팔며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별로 속력도 내지 않으며 지나가던 우리 차에 부딪치는 광경을 똑똑히 봤었다고 차근차근 자세한 설명까지 아끼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두말조차 못 꺼내고 곧장  물러갔다.
물론 나는 그 청년에게 바퀴를 바꾸는데 사용하도록 적정선의 금액을 건네주는 일 또한 잊지 않았다.
느닷없는 난리를 겪는 통에 바퀴를 교체하는 일에 의욕을 상실해 버린 남편은 몇 블록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는 타이어 수선 소에 가서 정비사를 불러오게 되었다.
펑크 난 바퀴는 더 이상 손 볼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되어 새로운 바퀴를 구입해야 하리라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그때 비로소 내 기억의 한 모퉁이에 접혀져 있던 남편의 꿈 얘기가 파르르르 펼쳐짐을 감지하게 되었다.
결국 자전거 바퀴와 자동차 바퀴, 그렇게 두 개의 바퀴를 못 쓰게 되어,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바퀴 두 개를 잃었다고 애쓰며 헤매고 다녔었다는 남편의 꿈은 아주 근사하게 맞아 떨어진 셈이 되었다.
남편도 나와 다름없이 꿈을 떠올리는 중이었을까.
-에이, 참. 밤에 차고에 집어넣은 후에나  말할 생각이었는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드는 남편을 보면서 나도 잊지 않고 말을 보탰다.
-여하튼,  뭐를 잃어버리는 꿈은 하나도 건질 게 없긴 하죠.
그렇게 단정하는 자체가 샤머니즘적인 미신행위가 아닐까를 자조(自照)해 보면서 나는 이윽고 생각났다는 듯 오싹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청년이 다쳤을 경우란  상상하기조차 두려웠던 것.
나는 마치 현지인이 된 것처럼 머리를 여러 번 흔들었다.
그리고 중얼거리듯 작게 말했다.
-꼭 꿈을 실제상황으로 연결시켜야만 시원해요? 너무도 놀랐잖아요. 오늘...
-그야 당연하지. 그럼 꿈을 심심해서 꾸는 걸로 알았어?
나도 남편도 항상 서로를 그런 식으로 대응(對應)해 왔다.
-당신!
나는 난감한 일을 만날 때마다 습관처럼 장난스럽게 불러보는 호칭으로 남편을 부르며 옆을 돌아보았다.
-꿈이 안 맞아도 괜찮아요. 다시는 나와 세상에게 꿈 팔기 없어요. 알았죠?
순간적으로 운전대를 놓았다.  남편은.
그리고  어딘가 희극적이면서 약간은 애수까지 엿보였었고,  한껏 어깨를 움츠리며 해내던 쳥년의 제스처를 고스란히 본보이며 여러 번 소리쳤다.
-노 빠사 나다, 노 빠사 나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난 게 아니었다.
싱싱 신나게 잘 타던 자전거였다.
그때부터 나는 자전거를 타면, 자꾸만 넘어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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