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14일 토요일

대한독립만세!!!




             맹하린


(대한독립만세!
나는 가끔 이 말을 사용합니다.
혼자서라도 만세를 부르고 싶을 때 특히 그럽니다.
예전에 한국에 살 때였습니다.
홍수환이라는 권투선수가 외국에 나가 상대선수를 이겨 금메달을 타게 되었습니다.
그때, 한국인 중계아나운서가 건네준 마이크에 대고 엄마를 향해 부르짖던 감격의 말이 바로 그랬습니다.
대한독립만세!!!
아마 대한민국만세를 그렇게 외쳤을 겁니다.)


         


엊그제였다.
초인종 소리에 나가보니 아들의 친구인 아드리안과 너무도 흡사(恰似)하게 닮은 한국인이 유리문 밖에 환하게 웃으며 서 있다.
웃음은 몹시도 환했으나 역광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약간 흐릿한 모습이다.
키가 크던 아드리안 보다는 약간 작아 보였고, 훨씬 마른 얼굴이었다.
(미국에 사는 아드리안이 이런 시간에 문 앞에 서 있을 리가 없지. 하지만 그 토록이나 환하게 웃으며 서 있던 사람이 또 누구였더라? 분명 그런 사람이 있었는데…… .)
나는 쉽고도 분명한 답을 어렵게 푸느라 순간적인 혼란을 겪으며, 바람에 문이 닫히는 걸 방지하기 위해 문 밑에 고여 둔 작으면서 단단한 상자를 젖히고 조심스레 빗장을 열었다.
매장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의 해바라기 닮은 미소가 피고 또 피는 모습을 무심히 올려다보던 나는 그가 바로 아드리안 이라는 걸 순간적으로 깨닫게 되었다.
거침없이 작업실을 향해 낮고 기쁜 음성으로  소리쳤던 나.
“다니! 누가 왔네?  반가운 사람 같아.”
오랫동안 기다렸던 이가 있었다는 듯 아들은 기대에 찬 웃음을 띤 채 쫑긋 매장을 내다보더니 잽싸고 빠른 걸음으로 튀듯이 다가섰다.
역시 친구는 친구엄마보다 친구가 더 잘 알아 보는 법인가 보았다.
“우와!”
그들의 함성에 가까우며,  환호까지  함께  얽히던  포옹이라니!
나는 그런 장면들을 만나려고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이기라도 한 것처럼 감동과 감사를 눈물 글썽이도록 절감했다.
고객들이 기다리는 동안을 위해 마련해 둔 기다란 의자에 나란히 앉은  둘은 장장(長長) 두 시간 이상 쉴 새 없이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한국어도 아니고 영어는 더욱 아니었고 오로지 까스떼쟈노(서반아어)였다.
어딘지 모르게 신이 나 있던 나는  커피도 대접하고 안녕슈퍼에서 감도 사다 깎아 내 주고, 그리고 편의점에 가서 한국아이스크림도 사다 건넸다.
붕어아이스크림.
누가 붕어아이스크림 속에는 붕어가 없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런데 속에는 없다던 바로 그 붕어가 겉에는 있었다.
그런 대접을 나는 한꺼번에 하지 않고 거의 몇 십분 간격으로 해냈다.
에바 페론 거리에 가면 까페떼리아(찻집)가 몇이나 있으니 다녀오라는 권유를 내가 안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둘 다 지독한 절약쟁이들이라선지 그대로가 좋다는 응수만  산뜻하게 보내오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아르헨티나의 사립대학에서 전산학(電算學)을 전공한 뒤 아르헨티나의 대형마켓인 Disco에서 전산업무(電算業務)를 담당하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런 아드리안 이었지만,컴퓨터에 대해서 모르는 부분도 있어서,  오히려 아들에게 질문해 올 때가 많았다.
아들은 컴퓨터를 독자적으로 책보며 익혔지만 컴퓨터의 고수라는 명칭을 그의 친구들에게서 부여 받았을 정도의  컴퓨터 도사다.

아들과 한 치도 다름없이 아르헨티나를 아끼고 사랑하던 아드리안이 미국으로의 재 이민을 떠나게 된 건,  순전히 아르헨티노 상사(上司)가 지르는  고함소리 때문이었다.
아드리안이나 다른 동료들이 아무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을 경우에도 그 상급자는 툭하면 고함부터 질러 댔다고 한다.
아드리안은 더 이상 참을 수는 없다는 듯, 부랴부랴 한국인이며 간호대학을 다니던 애인 가비와 결혼을 서둘렀다.
그리고 2년 전에  훌쩍 미국으로 떠났다.
아드리안 뿐 아니라, 우리 인간은 큰일을 당했기 때문에 모종(某種)의 전환점을 찾는다기보다는 작은 일에서 더 큰 결정을 포착하게 될 확률이 매우 잦다.
아드리안의 재이민을 기억할 때마다 그러한 묵상 비슷한 터득이  싹터 오르게 됨을 나는 때때로 느끼고 깨닫는다.
부부싸움이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다툼 또한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항상 하찮은 일과, 똑 같거나 비슷한 레퍼토리가 쌓이고 쌓이다가, 거대한 결정을 단박에 회전시키는 요인으로  굳혀지는 것이다.

컴퓨터의 주변을 정리하고 물걸레로 닦아내던 내게 커튼을 사이에 둔 그들의 말소리가 미풍(微風)처럼 살랑살랑 시원하게 불어왔다.
그리고 작은 북을 조심스레 두드리는 듯 한 나직하고 정겨운 음성의 연이은 웃음소리.
확실히 그들 사이에서는 코드가 잘 맞는 사람들만의 기분 좋은 유대(紐帶)의 공기가 끊임없이 흐르는 것 같았다.
그들은 며칠이고 밤 세워 얘기를 나누라고 해도 그럴 수가 있으리라.
그들의 대화는 절제력을 지녔으면서도 탄력이 넘쳤다.
그리고 신선하면서도 서늘한 감동 역시 스며 있었다.
경제나 정치의 암울함을 돌아보는 시선(視線)을 객관적으로 극복해낸 각자의 맑은 성숙도가  감상성을 배제하면서도 투명했고. 무엇보다 예리했다.

나는 이미 워드를 두들기던 중이라서 그들의 얘기를 거의 귀담아 듣지 않았지만, 간혹 그들이 미국과 아르헨티나에 대한 지식을 비빔밥처럼 뒤섞고 있다는 정도는 저절로 전달되어 왔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2년여를 서로의 간격이나 분주함을 위해 각자의 생활 역시  존중하며 이렇다하게 소식도 없이 지내왔는지 자주 의문이 들었던 현상들이 문득 떠오르고 있기도 했다.
아들은 그동안 페이스 북을 뒤져 아드리안의 딸에 대한 출산소식이라거나 사진을 내게 보여줘 왔기 때문이다.
아들과 아드리안은 서로 첫손가락에 꼽히는 친구임을 그동안 허다하게 증명해 왔고 그 점 명쾌하고 확실한 사실이었는 데도 말이다.

나는 아들과 친구와의 시간을 거의 침해하지 않으려는 방침이고 철칙이라서 딱 두어 마디만 짧게 말했었다.
"미국에서는 만지는 지폐마다 모두 달러지? 생필품마다 미제를 쓰던데?"
미국도 한국처럼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까지,  많이 가진 자들의 횡포(橫暴)와 아집(我執)에 수없이 도산(倒産)하는 실태에 있고, 직장생활이나 가능한 세상이라는 얘기를 아드리안은 재확인처럼 답으로 제시해 주고 있었다.

얼마나 타이트한 생활을 하고 있었으면 10년 전에 미국으로 미리 떠났던 10여명의 친구들조차 두 명 밖에, 그것도 고작 한 번 씩만 만나 봤다는 얘기가 나오게 됐을까.
아들의 나중 설명에 의하면 아드리안 가족은 2년에 한 번씩 수속을 마쳐야 하는 비자 때문에 부득불 다니러 왔다고 했다.
며칠  뒤로,  다른 친구들과 함께 만나기로 약속을 잡고 그들은 헤어졌다.
아드리안과 같은 나라에 살면 좋지만, 미국에 살아도 아들에게는 영원토록 좋은 우정(友情)으로 유지되리라 여겨져 나는 그점을  이렇다하게 아쉬어 하진 않는다.

아들에게 아드리안 이라는 친구가 있어 고마웠던 날이었다.
우리 교민들이 불경기의 여파(餘波)에 기우뚱, 자주 출렁이고 있다고 해도 각자의 사업에 자유를 표방하며 올인 할 수 있어서 그  사실 또한  고맙던 날이었다.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사실은 내 동족, 내 이웃, 내 친구들과 아들의 친구들, 그리고 내 이웃, 우리 모두 자부심 강한 나라의 국민임이 확연할 뿐 아니라,  어느 나라에 몸담고 있을지라도 영원한 대한민국의 소우주(小宇宙)이고 개성 강한 하나하나의 한국인으로 반짝이는 별, 바로 그런 존재라는 사실이다.
파이팅이 저절로 외쳐지는 날이었다.
엊그제, 그 날은.

나는 혼자서 다시 외친다.
대한독립만세!
만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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