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11일 수요일

인생무상(人生無常)






             맹하린


우리 가게에서 반 블록만 가면 한국유치원이 병설(倂設)되어 있는 한국학교가 있다.
아침에는 그런 기류(氣流)가 거의 약간만 흐르지만, 오후 4시부터는 학생들을 데리러 오는 한국인의 자동차들로 우리 가게 앞과 건너편은 물론이고 다음 블록까지 시끌벅적 야단법석 북적북적이 다목적으로 실행된다.
학군(學群)으로만 조성된 학교와  학생들이 아니라서 더 그러한 모양이다.
하필 나는 그 시간대에 산책을 나간다.
그 어떤 뚜렷한 이유는 없고 오랜 세월 익혀온 습관일 따름이다.
어제도 산책을 나서는데, 저만치 왼켠으로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이 동원 심이라는 이름을 지닌 이민동창이라서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외치듯 불러댔다.
우리 가족은 심동원을 그렇게 별명처럼 불러 오고 있었다.
한국학교에 다니는 딸의 손을 잡고 수레로 된 가방을 끌면서 자동차로 다가가던 중이던 동원 심.
공교롭게도 딸의 나이가 딱히 동원 심이 이민 올 때의 바로 그 또래여서 나는 심한 격세지감(隔世之感)이 휘몰아침을 순간적으로  감지했다.
그동안 동원 심을 만날 때마다 나는 그의 부모에 대한 안부를 감격처럼 물어왔었다.
그런데 어제는 왠지 다른 얘기부터 나누게 되었다.
초창기라고 표현하게 될 시기에, 아베쟈네다 앞길에 위치했던  의류도매상에서  재력을 튼튼하게 굳혀냈던 동원 심의 형 동준 심 가족은 십여 년 전, 미국으로의 재이민을 떠났다.
마치 한 건 제대로 했다는 듯 너무도 과감한 결단력으로 부각되었었다.
아쉬움이라거나 미련 같은 게 한 톨도 안 보이던 결심이었고...
우리보다는 한참 연상(年上)이었던 그들의 부모는 한국에 영구귀국(永久歸國)을 한지 이미 수삼년(數三年)도 더 지났을 것이다.

동원 심이 이혼이라는 험준한 산을 넘게 되었을 때, 그의 부모들은 자주 우리 집에 찾아와 절박한 하소연을 자주 털어 놓았다.
동원 심의 파경(破鏡)에 대한 논의였는데,  뼈와 살이 함께 아파 보이던 토로(吐露)였다.
올 때마다 하소연이 뒤바뀌고 있었다.
얼마나 험난한 산이면 오르락 내리락을 그토록 거듭했을 것인가.
손의 앞면과 뒷면처럼 표연히 두 가지로만 치러지는 제목이었다.
-그냥 참고 살라고 했어.
그럴 때마다 우리가족은 합창을 했다.
-참 잘하셨어요. 자식을 위해서도 그래야지요. 레오가 엄마와 헤어지면 가여울 것 같아요,
그런데 일주일쯤 지나면 다시 진로(進路) 가 뒤바뀌었다.
-아무래도 이혼은 피할 수 없는 일 같아.
- 너무도  잘 하신 선택이세요. 예전에야 이혼이 죄악시 되었다고도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참고 사는 게 바로 죄악이라고들 하나 봅니다.
결국 동원 심은 이혼을 했고, 어제 함께 가던 딸은 재혼해서 낳은 딸이었다.

헤어지기 직전, 동원 심은 불쑥 말했다.
어딘지 모르게 비장감(悲壯感)이 묻어나는 음성이었다.
-우리 형에 대해서...  아세요?
그의 눈에서 레이저 같은 빛이 순간적으로 스치듯 지나갔다.
어딘지 모르게 심상치 않은 빛이었다.
예전의 동준 심에 대해서는 잘 안다고도 말할 수 있었겠으나, 최근의 근황(近況)에 대해서 나로선 전혀 알 리가 없었다.
“떠났어요. 이 세상에서... 한 달,  됐어요.”
나는 느닷없는  충격으로 당장 할 말부터  잃었다.
어떻게... 아팠었어? 그런 말들도 내 입은 입을 다물기를 서슴치 않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은 커녕 계속  말을 꺼내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밀려드는 예감(豫感)이 어스레 어두워지기를 마다하지 않고 있었다.
차마 묻지도 못했다.
왜? 무슨 일이야? 그런 말들을 겉으로 쏟아내지 못해 나는 단지 눈빛으로만 물었을 것이다.
“아무 일도. 갑자기...  떠났어요. 그냥...”
동원 심은 왼 손을 약간 올려 엄지를 접은 채 손가락 네 개를  힘겹게 펴냈다.
“마흔 아홉에…….”
마흔을 나타내던 손가락은 더 이상 아홉까지는 나타내지를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고작 말문이 트였고,  조심스레 그들 부모의 안부를 묻게 되었다.
“부모님은?”
“미국에, 한국에 계시다가. 형 때문에도... 미국에, 지금. 나도... 다녀왔는데.”
그의 말은 방향을 잃었는지 앞과 뒤를 맞추어 내지 못하고 자꾸만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말을 주워 담기라도 할 것처럼 그의 두 팔을 오롯이 붙잡았다.
그리고 다시 왼손으로만 그의 오른 팔을 짧게 붙들었고, 이윽고 두어 번 토닥였다.
두 손 모두 토닥인다면 그를 울릴 수도 있겠다 싶었었다.
어쩌면 그러는 게 동원 심이나 나를 위하는 길일 수도 있었다.
그럴 때는 무슨 말이라도 전하고 싶었는데 말이라는 말마다 내 입을 차단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생이던 옛 모습 고스란히 지닌 동원 심의 얼굴을 뚜렷이 지켜보며, 나는 동원 심이 어린 시절 그 토록이나 자주 흥얼대던 ‘인생무상’이라던 말을 슬픔 앞에서는 서로 내색조차  하지 말아야한다는 걸 순간적으로 터득했다.
그건 차라리 적당히 견딜 수 있을 때나 터뜨리는 언어에 불과한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가 뻔질나게 드나들던 우리의 교민게시판을 홀연히 떠올렸다.
이곳에서 살다 미국으로 떠난 어느 선플러를 접할 때마다 나는 그가 동준 심이 아닐까 생각했던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왜냐면 우리와 동원 심네는 꼬리엔떼스 거리에 있던 Y교회에 함께 다녔었다.
교회가 양분(兩分)되어 두 갈래가 될 때까지였다.
그런데 미국에 사는 S라는 아이디는 이곳 교민인터넷게시판에 가끔 나타나 꼬리엔떼스 거리의 그 Y교회를 너무도 그립게 추억하고는 했었다.
그런 연유로 더 그  S라는 아이디의 글에 나는 리플을 열심으로  달았었다고 기억된다.
나는 미국의 S라는 그분이 꿈에라도 동준 심이 아니기를 염원하게 된다.
눈으로 직접 확인하거나 만난 일도 없는 교민게시판의 익명성을 한층 아끼고 다독여 주기로 결심을 굳히게도  된다.

나는 여전히 모자란 어린애처럼 걱정에 넋 잃지 않고 하루하루 잘 살아 낼 것이다.
한동안 동준 심의 영원한 안식(安息)을 위해 기도를 바치게 될 것이다.
그의 가족을 위한 기도 또한 빠뜨리지 않겠다.

어제,  나는 길섶의 가로수들이 왈칵왈칵 떨어뜨린 갈색의 잎사귀들에게서까지  일종(一種)의 아픔 같은 게 느껴져 선뜻 밟지를 못했다.
그것들조차 밟지 않기 위해
나는 어제 오후 내내 비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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