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28일 토요일
이별 연습
맹하린의 생활단상(生活斷想)
남미크리스챤신문
2001년 9월 1일
공항의 진입로(進入路) 근처는 대낮처럼 밝았다.
쉴 새 없이 멈추고 떠나는 차량들과, 바삐 움직이는 인파를 에워싸고 있는 분위기에서 생동감 까지 넘쳐나 일종의 설렘과 같은 기분을 안겨줬다.
로우터리 한편엔 선인장들이 붉은 꽃줄기를 꼿꼿이 펴들고 있었으며, 철늦게 피어난 화초들은 을씨년스러운 모습으로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겨울은 언제나 가을이라는 계절을 시샘하듯 젖히며 다급하고 성급한 걸음으로 다가온다.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 기후인데도 뼛속까지 스며드는 깊은 추위는 유별나다는 느낌까지 껴안게 한다.
아무리 여름이 얼마 전에 지나갔을지라도 겨울날에 고운 자태로 피어있는 짙은 홍색의 꽃떨기를 보게 되면 어떤 면으로는 변절스러움까지 느끼게 된다.
그래서, 날씨가 비교적 온화하고 악천후의 기온을 강퍅하게 버텨낸 경험이 부족해서인지, 나무의 재목들이 거의 쓸 만한 게 없다는 얘기를 언젠가 유태인 목재상에서 들은 일이 있다.
잘 부서지고 쉽게 꺾어져 버리는 습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대지는 어떤가.
평소에는 딱딱하게 굳어서 옹고집스런 성질이 있다가도 비만 내리면 푸욱 푹 발이 빠지는 찰흙이지 않던가.
그런 연유로 나무들이 쉽게 성장하는 반면에 뿌리가 깊숙이 뻗어나질 못하고, 그 뻗어남이 의외로 얄팍해서 웬만한 비에도 덩치 큰 나무들이 쉽사리 넘어지고는 했다.
이러한 자연적 조건을 아르헨티나의 경제와 비교해 보면서 나는 흠칫 놀라고 만다.
심심풀이 삼아 여러 번 흔들리고 일진일퇴(一進一退)를 거듭하는 형편이라고는 해도, 내가 얹혀살고 있는 나라에 대한 지나친 결례(缺禮)가 아닌가 싶어서다.
활주로 쪽에서는 낮은 폭파음처럼 비행기 뜨는 소리가 울려왔다.
공항에 닿을 때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만날 것을 믿는다'는 한용운의 싯귀가 생각난다.
'만나는 사람은 반드시 헤어질 운명에 있다'는 , 지나치게 쓸쓸한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까지도.
출입문 근처는 물건을 싣거나 내리는 일에 함빡 정신을 쏟고 있는 사람들로 어수선 하게 붐비고 있었다.
나는 열려진 문이 있는 데도 자동문 앞에 섰다.
스륵스륵 저절로 열려지고 있는 자동문 앞에서 어린애처럼 기분이 좋아져 문명의 혜택을 잠시나마 실감해 보는 것이다.
이 어린아이와 같은 천성(天性)을 언제나 버릴 것인가.
쓸쓸하게 웃으며 면세품을 팔고 있는 가게들을 스쳐 지나자, 팬암 항공사의 수속 창구 근처에 몇몇의 아는 얼굴들이 보였다.
그들에게 감싸이듯 서 있는 정민 엄마의 희망에 찬 모습도 금세 발견할 수 있었다.
정민엄마는 당장에 떠날 사람이고, 주위의 그들조차 미국으로의 재이민을 떠나기 위해 오래 전부터 수속을 밟고 있다고 알았던 사람들이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이들이 모두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으므로 나는 걸음을 서둘렀다.
소탈하고 간편한 블루진 차림의 본토여인이 남편인 듯 한 남자와 석별의 포옹을 나누고 있는데, 그 포즈에 애틋함이 담뿍 깃들어 보여 나는 그만 눈물이 글썽여지고 말았다.
나는 그랬다.
아름다운 일과 만나면 눈물이 글썽여졌다.
묵시적이면서 감성에 찬 장면과 만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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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92년도 7월 7일에, '친구를 떠나보내고'라는 제목으로 J일보에 게재했던 것이다.
82년도 부터 본국의 카토릭 경향잡지 등에 몇 번인가 투고를 한 적이 있었고, 나는 그 무렵 이미 여러 단편들을 써내고 있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 교민사회에는 처음으로 발표하게 된 글이었으므로 의미있게 간직하느라, 단편 '우라깐'의 도입부분에 접목 시키기도 했었다.
속담에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지만, 현대는 3년에 한 번, 또는 1년에 한 번씩도 강산과 도시가 변하는 추세에 있다.
그렇게 강산이 여러 번 변했을 만큼의 세월이 9년이나 흐르고 난 후인 지금, 공항 근처의 자연경관은 날이 갈수록 수려해지고 있는 반면, 더욱 넓혀지고 최신식이면서 초현대적이랄 수 있게 꾸며진 발전을 보이고 있지만, 예전과 달리 문명의 동굴 내지는 미로(迷路)같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도록 소란스럽고 시끌벅적한 곳으로 변모되었다.
불경기의 여파를 자주 앵무새처럼 반복할 때는 언제고, 웬 사람들이 그리도 많이 서거나 앉거나 걸으면서 하드 케이스를 가까이 하거나 끌며 술렁여대는 것일까.
이민 생활 20여 년 동안에 참으로 많은 이들을 떠나보낸 것 같다.
누구나 떠날 때는 평소에 차지하고 있던 자리의 몇 배나 되는 넓은 자리를 휑하게 남기고 떠나는 법이라던가.
떠나고 난 기차는 아름답다는 시(詩)가 아니더라도 떠나려는 이들, 그리고 떠난 뒤의 그들은 어쩌면 그리도 살뜰한 아름다움을 내포하고 있는 것인지.
느닷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 이별의 특징은 아무 것도, 그야말로 아무 것도 준비조차 안하면서 기꺼이 그들을 위해 떠나보내려 했다는 데에 있다.
섭섭했던 기억이란 전혀 없고 본의 아니게 소홀했던 점, 그리고 아쉬웠던 일들만 날이면 날마다 새록새록 풀잎의 싹처럼 자라날 것이다.
매우 차분하거나 조금 들떠 보이거나 의외로 평화로워 보이는 그들과 상관없이, 속으로 갈무리하듯 이별연습을 하면서, 마지막 수업을 받고 있는 학생의 심정이 아마 이럴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석별(惜別).
국어사전에는 서로 헤어지기를 애틋하게 여김이라고 적혀 있다.
능력이 있다면 국어사전의 그 뜻을 바꾸고 싶어진다.
사람이 헤어질 때 남아 있는 사람들만이 애틋하게 여긴다는 뜻이라고.
이 겨울에.
나는 예감한다.
아끼던 이들 몇을 더 선선히, 그리고 더욱 의연하게 떠나보내야 하리라고.
그러나 그들에 대한 기억을 더 이상 지우지 않겠다.
영원히 간직하며 아끼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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