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하린
빛나는 이민 2세대다.
빛나가 두 살이던 1978년에 부모를 따라 두 동생과 함께 파라과이 땅에 도착했다.
파라과이 이민 케이스였다.
빛나의 부모가 브로커를 통해 파라과이에 미리 구입해 뒀던 농경지(農耕地)는 수도와 국도에서 400Km 떨어진 오지(奧地)였다.
모기가 손가락 굵기만 하고 길이는 손가락 마디의 하나처럼 컸는데, 벌보다 더 큰 몸집으로 웽웽거리다가 물면, 며칠도 안 되어 물렸던 자리의 살 속에서 모기의 유충(幼蟲)이 기어 나왔다.
몹시 가려운 나머지 마구 긁어댈 때에야 가능한 출생(出生)이었다.
빛나의 부모는 인디오(인디언)들을 일꾼으로 고용했다.
4헥타르(1만 2천 평)의 땅에 사람의 키처럼 무성하게 자라 있는 잡풀들을 없애려고, 불을 지르거나 흙을 뒤엎고 한국에서 가져온 옥수수와 여러 종류의 채소 씨앗을 뿌렸다.
비만 내리면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못하는 붉은 황토(黃土)의 부드러우면서도 찰진 땅.
싹을 틔우라는 의미로 심어준 씨앗들은 찰흙과 한통속이 되어 숨바꼭질을 일삼더니 머잖아 자취까지 감췄다.
부드러움이란 건 어쩌면 인간사회에서도 그런 것인가 보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일종의 획득, 그리고 어떤 구속.
그처럼 특이한 토질(土質) 탓에 집을 지을 때는 주춧돌을 땅위까지 쌓고 나서 지어야만 했다.
고구마와 만디오까(커사어바) 농사만 가능한 땅이었다.
수도(首都) 아순시온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 수확성도 생산성도 전무(全無)하달 수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운송료가 곡물 값보다 비싸서 타산이 전혀 안 맞는다는 답까지 불거졌다.
전 재산(全 財産)이나 마찬가지인 그 땅을 헐값에 처분하고 빛나의 가족은, 아르헨티나로의 재이민을 떠나오게 되었다.
비제가스.
한국인들이 밀집해 살고 있는 백구나 시우다델라에 비해 비제가스 지역은 한국인이 적었으나 마당도 낀 주택단지여서 그나마 숨통이 좀 트이는 형편이었다.
전기모터가 달린 재봉틀과 오버롴을 4대 구입하여 바느질이 그중 수월하다는 트레이닝복 바지의 삯일을 시작했다.
상의는 지퍼를 달아야했기 때문에 초보자들에겐 무리이므로 차츰 배우면 된다고들 했다.
엄마가 운동복 바지의 발 끈을 재봉틀에 연달아 박아낼 때, 다섯 살이던 빛나는 쪽가위를 들고 발 끈의 연결 부분을 잘라 일의 능률이 원활하도록 차곡차곡 쌓는 일을 시작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흥미도 생겼고, 부모를 도우려는 의미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빛나의 부모 돕기는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재봉틀이나 오버롴의 일까지 거뜬히 해내게 된 것이다.
기계에 발이 닿지 않아 엄마의 하이힐을 신은 채 해보니, 그 어려움은 간단히 해결되었다.
부모는 빛나의 그런 도움을 귀엽게 생각한 데다, 생활력을 길러주는 기틀이라고까지 긍정적인 방향으로 위안을 삼게 되었다.
빛나의 두 남동생도 예외는 아니어서, 다른 한국인들은 볼리비아노들이나 페루아노들을 일꾼으로 고용했지만 빛나의 집은 가족 끼리만으로도 손발이 척척 맞았다.
부모의 열성 또한 대단해서 자녀들이 그렇게 집안 일을 돕는 내내 재봉틀이나 오버롴을 하는 벽면에 공부할 종이를 붙이고 예습복습을 하게 했다.
언젠가 빛나의 집에 초대되어 아사도(갈비구이)를 먹을 때, 앞에 앉아 있던 빛나는 내게 나직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항상 씩씩하셔서 보기 좋아요. 차갑고 예민하실 것 같은데 의외로 푸근하시고."
"그거 아니? 예민한 사람은 절대로 예민해서는 안 된다는 법! 더 이상 예민하면 숨 넘어 가거든."
이민 온 지 40년이 꽉 차오르는 현재.
빛나의 두 동생은 변호사와 계리사가 되었고, 빛나는 의상학과를 마친 후 아베쟈네다 지역에서 의류도매상을 경영한다.
지배인 역할을 도맡은 한인을 위시해서 직원이 꽤 많다.
몇 년 전까지는 유럽이나 미국이나 한국을 계절마다 다녀왔지만, 최근엔 한 달에 한 번일 때가 더 많다.
옷의 견본을 구하기 위해서다.
중국산 수입품도 취급을 시작한 지 오래다.
아베쟈네다 상가의 전체 의류 매장 2,800여개 중에 한인들의 점포는 대략 800여개에 육박했다고 한다.
각 개인이 중소기업 수준에 있는 게 아니라, 이미 중소기업이다.
일하면서 공부를 끝내느라 결혼 적령기를 놓친 빛나가 며칠 후에 약혼식을 치르게 되었다고 그 부모에게서 초대장이 보내져왔다.
신랑은 나와 친척처럼 가까운 이민동창의 아드님인 동욱이라고 한다.
약혼식에 가기도 전에 나는 빛나가 결혼생활 역시 잘 해 내리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다섯 살 때부터 부모의 일을 도와 왔지만 한 번도 고된 줄도 몰랐었다는 빛나.
한국에서 중산층에 살았던 부모들이 낯선 나라에 대한 적응에 얼마나 힘들까를 염두에 두면서, 부모의 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는 거라고 여겼더니 오히려 없던 힘도 생겨나더라고 어른처럼 말해왔고 어른처럼 살아왔던 빛나.
사람들이 짜증내는 부분을 보살핌으로 바꿀 줄도 아는, 너무도 곱디고운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한 빛나.
빛나는 소유욕이 강한 사람이라기보다 적응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빛나의 침착하고 차근차근한 태도 속에는 항상 설득력 같은 게 들어 있다.
언제 어디서나 중심을 잘 잡아 왔고, 자신의 감정까지 통제할 줄 아는 존재.
빛나는 바로 그런 사람이다.
어차피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빛나로서는 닥치는 일마다 두려움을 배제(排除)하려고 더 그러지 않았나 싶다.
나는 빛나가 결혼생활은 물론이고, 사회생활 역시 산뜻하게 잘 병행(竝行)해 나가리라고 예측(豫測)하게 된다.
왜냐하면 빛나는 머리도 좋지만 판단력이 뛰어난 데다, 특히 빛나는 그 이름 그대로
어디에 내놔도 절대로 빗나가지 않는, 환하게 빛나는, 빛나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 교민경제의 발원지 아베쟈네다 거리의 어느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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